맨덜리 저택의 강도 님의 인세인 시나리오 업야담의 pc마무리 글로그... 같은 것입니다... PC3입니다. 시나리오 스포가 있습니다. 123부 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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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세상을 사랑했다. 
 거기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그런 마음을 불가피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눈이 오기 직전에 들여다본 하늘은 잿빛이었다. 손으로 지은 엉성한 오두막은 시간이 지나면서 제법 살만한 보금자리 꼴을 갖추어 갔다. 그는 정성을 들여 주변을 돌보았다. 손길은 투박했지만 게으름을 부리는 법이 없었다. 
 한때 그는 이 설원의 눈 속에 유배되어 있었다. 신의 욕심과 그것이 자아낸 지독한 굴레가 그에게 선사한 형벌로써. 얼고 부서지고 서리가 낀 영혼은 결국 육체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하고, 그는 마땅히 예법에 따라 묻혀야 했을 동사한 몸을 보았다. 그가 자기 자신을 보며 느끼는 감각은 부조리했다. 자신을 달래주고 싶다가도 목을 조르고 싶었다. 타는듯한 갈증을 느끼다가도 순식간에 익사할 것만 같았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섬세한 동작으로 가만 눈을 감겨주고 싶었다. 
 육신이 없는 눈물은 영혼 안에 고여서 강처럼 흘렀다. 그는 한순간도 스스로 울 수 없었기에, 그저 눈물을 제자리로 돌려주려 애쓸 뿐이었다. 결국 죽은 몸은 또 다른 가엾은 영혼과 함께 제 무덤에 바쳐진 한 송이 꽃이 되었다.
 그 모든 일이 끝난 후, 서리는 다시 설원으로 돌아왔다. 그 위에 작은 집을 짓고, 좁다란 지붕의 눈을 걷고, 산가지를 꺾고, 죽은 꿩의 깃털을 뽑고, 이따금씩 눈밭 위에서 장작을 패다 손을 멈추고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면 그곳은 언제나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얼어 죽는 줄 알았어.” 

 눈밭 사이에서 반가운 얼굴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머리 위로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먼 곳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아.” 그는 잠시 넋을 놓은 채 나타난 인영을 바라보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을 골라냈다. 혼자 오래 산 사람의 습관대로. 

 “오랜만이군. 안 그래도 버찌 술을 딸 때가 되었다.” 

 남쪽에서 온 손님이 추위를 탔기 때문에 그는 평소보다 뜨겁게 군불을 때고, 불쏘시개로 아궁이 속 장작을 두어 번 들췄다. 그리고 부엌 한구석에 놓인 술동이와 잔 두 개를 들고 문지방을 넘었다. 

 “이렇게 내내 구석에 박혀서 살 필요는 없잖아. 오가기 힘들어서 원.” 
 “매번 같은 불평이군. 다음에는 내가 찾아가겠다.” 

 그해 첫술을 뜯어 맛을 보는 것은 오랜 친구와 하는 작은 의식으로 굳어졌다. 술맛은 늘 작년보다 조금 나았다. 처음에는 결코 누군가와 나눠 마실 물건이 아니었는데, 꾸준히 만들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솜씨도 붙었다. 이 세상에서 해내는, 해내야 하는 모든 일이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손님은 몇 가지 흥미로운 소식을 전해준다. 눈에 파묻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살던 그와는 달리, 손님은 이야깃거리를 이것저것 가지고 있다. 반면 그가 기껏 전할만한 소식이라고는 자신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뿐이다. 

 “요즘은 시력이 예전 같지 않다. 눈밭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그렇다더군.” 
 “다음에 근방에 오면 의원에 먼저 들러 보는 게 좋겠어. 염려해서 하는 말인데, 더 안 좋아지면 여차하면 도움받을 만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나을 거다.” 

 그는 한참 대답이 없다. 긍정도 부정도 하기 어려운 말에 으레 흘리는 고집스러운 침묵이었다. 손님은 익숙한 듯 술잔을 비웠다. 얼마 안 가 생뚱맞게 불쑥 튀어나온 물음이 적막을 깼다. 

 “염. 사람들 곁에서 지내는 게 행복한가? 이런 방식으로 말이다.” 
 “너는 가끔 정말 말도 안 되게 당연한 걸 물어보는군그래.” 
 “인간을 아끼고 비호하는 것과 인간이 되어보는 것은 다르지 않나. 어떤가.” 
 “다르지. 하지만 완전히 다르지만도 않아.” 

 서리는 이어지는 손님의 대답을 잠자코 듣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순간에는 그 안에 깃든 불잉걸이 비쳐 보이는 듯하다. 대답을 아는 질문을 자꾸 묻게 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어쩌면 그가 내려놓은 신성은 이런 식으로 유지되는 것 같다. 서리는 신기해한다. 그리고 자신의 것과는 다른 그의 심성을 귀하게 여긴다. 그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자신도 차일피일 답변을 미루는 행동을 그만두기로 한다. 

 “어차피 나는 세상 모든 곳에 살아볼 작정이다. 그리고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을 전부 들을 생각이다. 그러니 조급할 것 없다.” 
  
 이번에는 이곳에 머물겠다는 뜻이었다. 온통 희기만 한 세상에 한 점 얼룩으로. 그것도 나쁘지 않나, 찰랑거리는 술잔을 내려다보며 손님이 툭 뱉었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정말로, 시간은 많았다. 그는 그것을 부지런하게 사용했다. 쇠를 덥혀 다림질을 하고, 늦은 밤에는 먹을 갈고 초롱불 아래에서 서신을 쓰고, 기르던 개가 새끼를 치는 것을 보았다. 가끔은 함박눈이 세상을 뿌듯하게 채우는 것을 보고, 갓 내린 눈에 자기가 만들어낸 발자국을 되짚고, 어떤 때는 어두운 하늘에서 길잃은 별 몇 개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기도 했다. 
 묵묵한 경탄으로 생을 노래하고 세상을 음미하다 마지막으로 더는 보이지 않는 눈을 감았을 때 한 인간으로서 그의 삶은 끝났다. 죽음이 한 겹의 흰 눈을 그 몸 위에 덮고 난 다음에 이어진 이야기는 이미 다른 존재의 것이라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는 거시적인 독법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 자신은 자신을 잊었을지언정 그가 믿는 세계가 그를 기억했기 때문에. 
 그는 갓난것으로 태어나 아주 처음부터 세상을 다시 배웠다. 모든 순간이 경이로웠다. 그는 껍질을 뛰쳐나간 봉숭아 씨앗처럼 햇볕에 그을렸고, 발장구를 쳤고, 숨이 차도록 날뛰었고, 그림처럼 그려졌다. 어떤 때는 깊고 아프게, 어떤 때는 흐리고 조심스럽게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면 세상은 돛을 편 배처럼 그를 태우고 나아갔다. 여정. 그 자체가 목적인 길고도 짧은 여정. 
 인간과 요괴와 그가 사랑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생육하고 번성했다. 그는 기꺼이 그 흐름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아주 먼 훗날 시간이 흘러 다른 누군가가 아닌 그들 자신의 선택으로 인간과 요괴 모두가 스러지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수호신이 지상에 내려와 다스리던 시절이 있었대.” 

 어린 요괴는 턱을 괴고 재잘거렸다. 음절마다 한껏 묻어난 웃음기가 구슬발에 부딪혀 깨어지는 햇살을 닮았다. 

 “그렇군. 재미있는 이야기구나.” 

 그러나 그런 세상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떤 때에 살아간다는 것은 달려 나가는 것이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매서운 발톱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는 원하는 만큼, 숨이 턱에 차도록 네 다리로 땅을 박찼다. 미풍이 뺨을 스치면서 그에게 세상의 온갖 비밀을 속삭였다. 길을 잃은 농부의 아들이 눈밭에 쓰러진 것을 물어다 마을로 돌려보내 줬을 때도, 겁에 질린 농부의 갈퀴질에 눈을 찍혔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했다.  

 어떤 때에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는 전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산 것의 살을 갈랐다. 피보라가 일어 눈앞을 흐렸다. 그것이 죄를 짓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는 목숨과 목숨 사이의 무게를 재었다. 종국에는 시체 더미 속에 쓰러져 자신의 무게를 더했다. 고통, 두려움, 슬픔, 죄악감, 회한, 그런 감정들이 뒤엉켜 가슴께에 고이다 피처럼 흘러갔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을 사랑했다. 

 어떤 때에는 태어나자마자 죽어갔다. 세상은 그저 그 무게에 짓눌려 죽어가는 곳이었다. 어떤 때에는 슬픔이 스스로를 살해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았다. 그는 생의 많은 시간 행복했고, 지난 세상의 자기 자신을 알지 못했고, 모르면서도 늘 조금쯤은 자신을 닮게 살았다. 존재의 사슬이 끝을 모르고 이어져 있었으나 그는 그것에 묶여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쥐고 있었다. 놓치지 않도록 단단히. 그것은 그의 선택이었다. 


 먼 곳의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귓가에 다가와 속삭였다. 세상은 너를 굴종하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다. 네가 서 있는 곳이 네 세상의 중심이 될 테고 거기서 너는 네 두 눈과 두 귀를 써서 직접 보고 들어야 한다. 너는 네가 원하는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네 본성이 어떻다고 정의하고 네 삶의 방향을 가르치고 인도하고 알리는 존재가 없으니 이제는 모든 것을 네 스스로 정해야 한다. 너는 원한다면 금수가 되어 그르치고 원한다면 한없이 고귀하고 높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세상이 네게 주는 선물이다. 시리고 벅차도 그것이 너의 생애다. 
 속삭임이 이어질수록 바람의 목소리는 점차 자신의 것을 닮아갔다. 그때의 그는 가진 목소리라고는 낮은 으르렁거림 뿐인 존재였지만 그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는 마지막 마디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시리고 벅차도, 
 그는 달려 나갔다.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땅을 밟고 다음 걸음을 디디기 위해서. 종착점도 목적지도 없이. 그러다 내키면 멈춰서서 계절의 갈피에 녹아드는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강가의 흰 자갈에 스며드는 맑은 빛을 살피거나, 너른 들판에 드러누워 이마 위로 드는 봄볕을 견디기도 하였다. 자유롭고,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세계에서. 그것이 주는 슬픔의 선물과 기쁨의 선물을 모두 맛보며. 나는 모든 시간과 모든 생애의 약동을 들여 그것을 긍정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에서 너를 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는 이따금씩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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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 일부 참조-변형하였습니다... 습관처럼 같탁친구 마음대로 훔쳐썼는데 캐붕이면 꼭말씀해주세요 꾸벅꾸벅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천재그림러.램님의.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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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2. 23

 

 블루 피라미드 클럽 1층의 창고는 사용한 흔적이 있는 밧줄과 핏자국을 그늘에 숨기고 있었다. 우리는 낮은 목소리로 두런거리며 창고를 둘러보았다. 한순간, 천장의 전구가 파직! 소리를 내며 터지더니 주변이 삽시간에 어둠에 잠겼다. 머리카락을 태우는 불유쾌한 냄새가 훅 끼쳤다. 시야가 새까맣게 물든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악취는 불길한 신호였다. 아니나 다를까 일행에게 채 괜찮냐고 묻기도 전에, 옆에서 우당탕 소란이 일었다. 나는 다급하게 손전등을 꺼내 그쪽을 비췄다.

 아주 찰나였지만 나는 똑똑히 보았다.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제이덕의 얼굴에 달라붙어 입과 코로 밀고 들어가는 광경을. 손전등 빛이 닿자 그것은 빠르게 모습을 감췄고 그는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거칠게 몰아쉬었다. 사방에서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옆으로 쓰러지는 노라를 겨우 부축하고서, 나는 사라진 괴물을 쫓아 전등으로 주변을 훑었다. 위협하듯 휘둘러지던 불빛이 뚝 멈추고 만 까닭은, 허여멀건 덩어리가 한쪽 벽에 우글우글 움튼 모습이 순간 나를 얼어붙게 했기 때문이다. 형체는 마치 전등 빛을 피하려는 것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하며 꿈틀거렸다.

 기침을 잇던 제이덕이 비틀거리면서도 그 괴물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려 했다. 나는 되는대로 손전등을 입에 물고 그의 팔을 붙잡았다. 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둘을 이끌어 창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독한 냄새는 계속 뒤따라왔다. 한밤중이었다. 주변은 어두웠다. 어둠은 단 한 순간도 우리 편이 아니었다. 나는 입에 손전등을 물고, 기절한 노라를 부축한 채 한 손은 제이덕을 꽉 붙들고, 강을 따라 내달았.

 

 어떻게 다시 숙소로 돌아왔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계속 악물고 있던 턱은 얼얼하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너무 긴장했던 나머지 사지가 뻣뻣하게 떨려온다. 무서울 만도 한데, 제이덕은 그 괴물을 한사코 다시 봐야 한다고 우겼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끔찍한 일을 겪으면서 서서히 생겨난 조광(躁狂) 증세다. 이럴 때의 그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설득은 별로 의미가 없다.

 기절한 노라를 편히 눕혀두고, 제이덕과 나는 결국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내 이유는 조금 달랐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문도 잠그지 않고 빠져나온 터라 뒷정리를 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에는 절대 인정하지 못했겠지만 내 사고 또한 결코 멀쩡하다고는 봐줄 수 없는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었.

 

 그렇게 호텔에서 나와 밤거리로 막 빠져나왔을 때였다. 뒤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유령이라도 본 듯 창백한 얼굴의 노라가 서 있었다. 시선이 갈피를 못 잡고 떨렸다. 우리가 나가는 기척에 눈을 뜨고 보니 아무도 없는 호텔 방이어서 많이 놀랐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신발도 신지 못하고 뛰쳐나와야만 했을 정도로. 우리는 노라를 부축해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똑바로 달랠 수 있었을까. 모두에게 불안한 밤이었다. 우리는 그날 밤 내내 불을 밝혀놓았다. 회색 나방 한 마리가 느릿느릿 맴을 돌더니 기어코 촛불로 뛰어들었다. 뒤이어 타탁! 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윌리엄은 그 전쟁얘기를 자주 꺼내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전선 조광증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군인은 참호 속에 웅크려 포탄이 사방으로 빗발치는 소리와 땅 울림을 들으면서도 기어코 밖에서 죽어가며 울부짖는 개의 머리를 쏘러 나가려고 한다. 자기 파괴와 진배없는 자비심이다. 사실 그는 그저 정신이 나가버린 것이다. 끔찍한 긴장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된 바람에 그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각주:1]

 그럴 때는 말이야, 엘리. 그저 모두가 그를 꽉 붙들고,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할 때까지 두들겨 패는 수밖에 없었어. 그렇게밖엔 말릴 수가 없더구나. 그러면서도 나는 마음 한편으로 그가 뛰쳐나가려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지. 그를 붙잡느라고 다른 건 다 잊어버렸거든. 밖에서 개가 두어 번만 더 길게 울었더라면 뛰쳐나가는 건 내가 되었을 거다. 아멘.

 그 누구도 그런 상황에서 제정신일 수는 없어.

 

 

 눈을 뜨자마자 제이덕이 불쑥 책을 들이밀었다. 그 책에서 자기가 어제 겪은 일과 비슷한 내용을 발견했다고 한다. 역시 어젯밤도 그냥 잠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짚고 읽어준 내용은 간추리자면 이렇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 실체가 없어서 보이지도 않고 물리적으로 영향을 줄 수 없다(이 부분에는 제이덕의 첨삭이 더해져 있었다. ‘물리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호흡기로 들어가 숨통을 조인다.’). 굉장히 강한 빛이나 태양 빛을 받으면 모습을 유지할 수 없어 쫓겨난다.

 

 아무래도 블루 피라미드 클럽에서 뭔가를 더 알아내기는 요원해 보였기에, 우리는 다른 곳으로 관심사를 돌리기로 했다.

 

 

 펜휴 제단에서 발견된 명함도 그렇고 배링턴 경위도 언급한 적이 있는 만큼, 엠파이어 향신료도 수상했다. 새벽에 조용히 들러보기로 하고 낮에 잠깐 사전 조사를 해두었다. 근처에만 가도 이국적인 향신료 향이 물씬 풍겨오는 2층짜리 건물이었다. 오후 5시만 되면 문을 닫는다.

 오후에는 숙소로 돌아와 가져온 물건들을 이것저것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노라는 짧게 외출을 다녀왔다.

 시간이 꽤 넉넉했기에 제이덕이 신중하게 물품 하나를 분류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우리가 쉬플리의 집에서 가져온 약은 명계의 약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었다. 뱀 인간이 만드는데, 이 약을 사용하면 시간의 구석을 통해 정신이 과거로 여행했다가 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 쉬플리의 설명 그대로였다.

노라는 이집트 살인사건에 대해 놓친 소식이 있는지 여기저기서 살펴보고 돌아왔다. 관련된 것은 찾지 못했지만 대신 우리가 어제 겪었던 일과 비슷한 경험담을 다룬 기사를 찾았다.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도 미키 마호니 역시 교단과 많이 얽히는 듯하다.

 우리는 이 기사에 대해 더 상세히 묻기 위해 다시 더 스쿱 신문사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한 신문사 부근은 경찰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더 스쿱의 편집장 미키 마호니에게 변고가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소식으로 인해 우리는 충격에 휩싸였다. 범행 시간은 아마도 오늘 오전, 목격된 용의자는 없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가 교단의 희생자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에도 우리는 한 발짝 늦은 셈이다.

 경찰에 사정해서 미키 마호니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기로 했다. 신문사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갈수록 타는 냄새가 심해졌다. 어젯밤의 일이 떠오른 건지, 제이덕의 안색이 창백해서 결국 노라에게 그를 맡겨두고 혼자 다녀왔다. 냄새의 근원은 그을린 종이였다. 범인은 아마 더 스쿱이 보관하던 자료를 태운듯했다. 미키 마호니의 시체는 사무실에 있었다. 그는 마구 맞고 찔려 상처투성이에, 가슴에 말뚝을 박았다 뺀듯한 검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사후경직은 그의 얼굴을 경악으로 일그러진 그대로 영원히 고정해 놓았다. 참혹한 시신의 모습은 뉴욕에서 봤던 엘리어스의 그것과 겹치며 뇌리에 깊은 잔상을 남겼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미키 마호니는 우리에게 서신을 보내려고 했다. 거기에는 자신이 감시를 당하고 있으니 우리에게도 조심하라는 우려와 경고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마음이 무겁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잃어야 이 일이 끝날지 모르겠다.

 

 

 

 

 

1925. 2. 24

 

 늦은 새벽. 엠파이어 향신료.

 우리는 건물 뒤편의 담을 넘었다. 잠긴 뒷문을 열기 어려워서 하는 수 없이 석탄 출입구에 몸을 구겨 들어갔다. 순식간에 모두 검댕 덩어리가 되었다. 떨어지고 보니 주변은 낡은 나무상자와 석탄 더미가 쌓인 깜깜한 지하실이었다.

지하실에는 숨겨진 문이 하나 있었다. 그냥 힘으로 밀면 꿈쩍도 하지 않고, 상자로 가려진 곳에 채워진 자물쇠를 풀어야 한다. 낡은 자물쇠인데 열기가 쉽지 않아 일단 가게를 마저 살펴보고 돌아오기로 했다.

지하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위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몽둥이를 든 남자였다. 옥신각신한 끝에 제압하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노라가 많이 다쳤다. 머리의 상처를 겨우 지혈하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날이 밝자마자 병원에 뛰어가 봐야 하는 상처다.

그 남자는 갈비뼈가 부러지고도 밖으로 도망치려 했다. 제이덕이 겨우 붙잡은 뒤에도 여왕님께서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가 뭐라고 말하건 제대로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결국 지하실에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엠파이어 향신료의 1층에는 가게 공간과 사무실이 있었다. 제이덕이 이리저리 장부를 살펴보더니, 어디서 이만한 돈이 났을까요? 하고 지적했다. 잘 되는 사업이기는 하지만, 장부에 쓰인 것과 비교해 지나치게 인테리어가 화려하다는 것이다. 가게의 2층은 더 심했다. 장식과 가구에 아낌없이 자본을 쏟아부은 티가 났다. 공기는 훈훈해서 약간 더울 정도였다. 난로가 켜져 있다. 누군가 여기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잔뜩 긴장한 채 둘러봤으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자흐라 샤피크의 방이리라 짐작되는 가장 화려한 개인실에서 몇 가지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눈에 띈 것은 금박으로 된 장식 거울이었다. 틀에 기이한 도형이 새겨져 있고 묘하게 비대칭이었다. 책상의 비밀 공간에도 무언가 숨겨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오래된 파피루스 두루마리, 금속 사슬에 달린 뒤집힌 앙크, 검은 결정 가루가 든 병, 불그스름한 시럽 같은 액체가 든 병. 원래는 긴 막대나 홀 두 개가 놓여있었던 것 같은 공간은 움푹 파인 채 비어있다. 제이덕이 거기 있던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챙겼다.

 

 

 다시 지하로 돌아와 비밀 문의 낡은 자물쇠를 건드리자, 아까와는 달리 매우 쉽게 열렸다. 헐거워졌던 걸까? 문 너머에는 음침하고 불길한 공간이 도사리고 있었다. 정면에 사슬과 쇠갈고리가 붙어 있는 벽이 보이고, 방 한쪽 끝에 검은 양초로 둘린 검은 파라오의 흑단 입상이 서 있었다. 제단 앞에는 피로 물든 나무 블록이 놓여있었다. 블록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블록 근처에 1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우리는 모두 놀라서 그쪽으로 달려갔다.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흔들어 깨우자 곧 정신을 차렸다. 매우 겁에 질려 있는 것을 차근차근 진정시키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름은 니트라, 자기가 검은 파라오의 결사에게 잡혀 온 것 같으며, 자기 남동생이 살해당해서 조사하다가 이런 일을 당했다고 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들키기 전에 니트라를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니트라를 숙소까지 안내하고 따뜻한 차를 타주었다. 상황이 안정되자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펜휴 제단의 사람을 미행하다가 납치를 당했다. 니트라가 조사한 결과, 펜휴 제단을 관리하는 에드워드 개비건이 바로 이 끔찍한 사교의 수장이다. 우리는 엠파이어 향신료 가게 주인에 대해서도 물어봤지만, 그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그믐밤에 교외에 모여서 끔찍한 의식을 치른다. 장소는 미스르 하우스라 이름 붙은, 에식스의 늪지 섬에 지어진 개비건의 전원 저택이다. 니트라의 생각으로는 검은 파라오의 결사를 와해시키는 방법은 수장 에드워드 개비건을 죽이는 수밖에 없는데,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바로 이 미스르 하우스다. 종교의식을 치룰 때라면 이들은 비교적 무방비해질 테고, 개비건에게 다른 호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라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소녀의 모습에 조금 놀란듯했다. 물론 개비건이 영국에서 명망 높은 귀족임을 생각하면 그가 감옥에 갇힌다고 간단히 해결이 될 것 같진 않지만, 그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이 노라에게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우리는 당장 뚜렷한 대답을 주는 대신 생각을 해보겠다고 약조하고는, 오늘은 많이 놀랐을 테니 이만 쉬라고 니트라를 다독였다.

 

 노라는 상태가 좋지 않다. 그 애는 상황이 일단락되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빨리 병원을 가봐야 한다. 제이덕은 오늘 밤도 깨어서 가져온 파피루스를 살피고 그 문자를 해독했다. 해독문을 간추려 옮겨둔다:

 갈의 거울 사용법. 갈의 거울은 강력한 점술 도구이자 무기다. 거울의 능력을 전부 사용하려면 오브라안과 가베슈갈이라는 물건이 필요하다. 거울로 특정한 대상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무기로 사용해서 대상을 해칠 수도 있다. 오브라안을 사용하여 거울에 뒤집힌 앙크 모양을 그린 뒤,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면 그 모습이 보인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다. 무기로 사용할 때는 일단 그렇게 대상을 불러낸 뒤, 가베슈갈을 사용해 거울을 다 덮는다. 그러면 대상의 숨이 막히게 된다. 이 행위에도 대가가 필요하며, 더 지불하면 숨을 끊을 수 있다.

 

 

 

1925. 2. 25

 

 

 새벽.

 바깥이 소란스러워 잠에서 깼다. 나가보니 제이덕과 니트라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니트라가 제이덕의 가방을 뒤져, 갈의 거울과 약병을 들고 몰래 나가려다 들킨 것이었다. 니트라는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다간 저주를 받으니 가져다 버려야 한다고 우겼고, 제이덕은 몹시 화가 나서 그가 자기 연구 자료를 훔치려 했다며 쏘아붙였다. 나는 두 사람을 어떻게든 말리려고 했다. 니트라의 태도는 아까와는 아주 달랐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나는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기꺼이 도울 테니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저는 도움 받을 게 없어요. 이만 가보겠어요.”

 니트라가 그렇게 말하고 떠나려 했을 때 제이덕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주지?” 옆에서 내가 말리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제이덕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니트라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주문을 외웠다.

 불타오르던 눈빛이 삽시간에 흐려졌다.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중에 알았는데, 니트라는 그때 제이덕의 머릿속에서 거울과 자신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당시의 나는 제이덕이 무슨 해코지를 당했는지 알 길이 없었고 그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제이덕은 순식간에 얌전해져서, 니트라의 손길에 이끌려 의자에 앉혀졌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대답 대신 그는 곧장 나를 보며 무언가 속삭였다. 발음과 소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람의 목에서 나오는 말 같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안개가 밀려드는 느낌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키웠다. “괜찮아요, 제이덕? 이 사람, 마법을 씁니다.”

 나는 머릿속의 안개를 밀어내려 애쓰며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떻게든 그가 주문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옆구리 쪽에서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숨을 끊어 내쉬며 아래를 내려다본다. 니트라의 손에 들린 작은 단도가 내 옆구리에 수납되어 있다.

 

 옆에서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면 막 잠에서 깨어난 노라가 보인다. 노라는 몹시 놀라서는 옆에 있던 꽃병을 들어 휘둘렀다. 나는 니트라가 칼을 쥔 손을 붙잡아 어떻게든 그가 피하지 못하도록 했다. 꽃병이 쨍그랑, 깨어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소녀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배의 고통 때문에 점점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더 몸싸움을 이어가지 못하고 니트라는 쓰러진 내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옆구리에 꽂혀있던 칼을 뽑아, 두 사람을 겨냥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노라가 외쳤다.

 “조용히 가려고 했는데 잡은 건 너희 쪽이야.” 니트라는 피 묻은 칼끝으로 제이덕을 가리켰다. 제이덕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거잖아요! 어째서 이런 짓을.”

 “먼저 내 몸에 손댔다니까.” 니트라의 어투는 노라의 격양된 목소리와 대비되게 차갑다. 나는 그 밑에서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이 사람 마법을, 써요. 조심해.”

 “우릴 속인 건가요?! 왜 거짓말을 한 거예요! 저희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노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그 애의 다정한 믿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게 보인다. 니트라는, 아니, 자흐라 샤피크는 몇 마디 주문을 외더니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아이의 모습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고, 화려한 인상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이자 새까만 머리카락이 따라 흘러내렸다.

 “목표가 같은 게 아니야.”

 단호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너희한테 더 볼 일은 없어. 개비건만 제대로 없애버린다면.”

 “당신도 개비건과 같은 검은 파라오의 신도 아닌가요? 어째서 그를 노리는 거죠?”

 “내가 꼭 대답을 해줘야 알겠어?”

 자흐라는 한 손으로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꾹 눌렀다. 나는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채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이 사람보내면 안 돼.” 이 한마디를 뱉어내는 데도 숨이 턱까지 찼다.

 “그러면, 저희가 협조하면 좋게 끝낼 수 있는 거죠? 일단 칼 내려놓고 얘기해요!”

 초조한 목소리가 귀 양쪽에서 웅웅 울렸다서서히 혼미해지는 와중에 나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안 돼, 보내면 안

 “조용히 해.” 자흐라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순간 왼손이 엄청난 고통과 함께 오그라지며 새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관절을 모든 방향으로 꺾고 우그러트리는 것 같다. 나는 견디기 힘든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트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안 그러겠다고 했잖아요!” 두 사람은 경악해서 외쳤다.

 “할 거야 말 거야?”

 “한다고요! 할게요! 말 들을 테니까 그만 해요!”

 그 말에 묻어난 절박함이 자흐라 샤피크를 만족시킨 듯하다. 그는 방금까지 내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으로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조용히 하랬잖아.”

 그리고 물러나면서,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그냥 떠나는 게 어제 받은 찻값이라고 생각해.”

 자흐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다. 멀리서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제이덕과 노라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내 비명이 내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멀게 들린다.

 

 

 

1925. 2. 28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독한 소독약 냄새와, 은은한 커피 냄새였다. 눈을 뜨니 흐릿한 시야 사이로 울고 있는 노라와, 그 뒤에 선 제이덕이 보였다.

 “일라이저 씨. 정신이 드세요?”

 대답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굉장히 오래 걸렸다. 목 뒤쪽이 깔깔하고 입안이 메말라 말하기가 힘들었다.

 “제가 얼마나 누워있었죠?”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 있으세요?”

 나는 멍한 정신으로 기억을 되짚었다. “그 여자는.”

 “나흘 지났습니다.” 제이덕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의사를 불러올게요.”

 노라가 너무 슬프게 펑펑 울고 있어서, 나는 그 애를 달랬다. 안 그래도 슬픈 일이 너무 많았는데. 익숙한 손을 들어 올리려다 몰려오는 뭉툭한 통증에 멈칫해서 왼손을 내려다봤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 느껴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약이 너무 독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시선이 머물러 있다가 떨어진다. 나는 오른손으로 노라의 등을 쓰다듬는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언제 다시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두 사람은 매일매일 찾아왔다. 어느 아침에는 제이덕이 옆에 와 앉아서 그간 조사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그에게 대답할 말을 찾아 돌아보니 어느새 침대는 주황색으로 물들었고, 그가 앉았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스스로가 유령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눈을 감으면 침대 시트와 살이 맞닿은 자리에서부터 엉킨 실 같은 뿌리들이 뻗어내리는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 날 그대로 돌이나 나무 같은 무정물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떤 날은 아주 컨디션이 좋았다가도 순식간에 열이 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상한 꿈을 자주 꿨다. 나른하고, 멍하고, 일생을 날카롭게 세워둔 긴장의 첨단이 둔해졌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될 것만 같은 감각에 서서히 질려버렸다. 나는 진통제를 조금씩 덜 쓴다. 아픔 때문에 서서히 정신이 뚜렷해졌다.

기력이 조금씩 돌아오자 오른손으로 글 쓰는 연습을 했다. 스스로를 동정할 여유도 없었다. 잭슨 엘리어스의 무덤 위에는 이제 눈발이 내려앉고 미키 마호니의 관 위로 새로 흙이 덮일 것이다. 그러나 일라이저 웨버는 살아있다. 살아있다면 무언가 써야 한다. 애석하게도, 소위 문필가라는 작자들은, 도무지 조용히 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믐까지 날짜 여유가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회복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수술은 놀랄 만큼 경과가 좋아서, 상처는 덧나거나 하는 일 없을 뿐만 아니라 경이적인 속도로 아물고 있다. 나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그믐날에도 영락없이 쉬어야만 했다면 창문을 깨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내가 병실에 누워있는 동안 제이덕과 노라 두 사람은 쉬지 않고 조사에 착수했다. 주로 미스르 하우스와 헨슨 공업에 대해 알아보았다. 아래에 그들이 조사한 내용을 정리해둔다.

 

  •  미스르 하우스. 2400 헥타르가 넘는 넓은 부지. 원래 소유자는 이집트학자 네빌 로이드 프라이스였으며, 땅을 개비건에게 팔고 2년 전에 소식을 감췄다. 빚이 너무 많아서 파산하는 바람에 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현재 소유자는 에드워드 개비건. 저택은 원래 롱뷰라는 이름이었다가, 15년에 소유주가 넘어가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사람을 보내 알아본 결과 미스르 하우스는 작은 섬 위의 저택으로, 해자와 긴 담장으로 둘려 있었다. 들어갈 방법을 골몰하다가 미리 뱃사공과 배를 구하고, 차도 빌려두었다.

 

  •  헨슨 공업. 1921년에 아서 헨슨이 가지고 있던 회사를 에드워드 개비건에게 판매했다. 헨슨은 콘월로 은퇴했고, 그의 연락처는 찾을 수 없었다.

 

 37, 더비의 헨슨 공업을 직접 방문했다.

 헨슨 공업은 주변에는 그 용도를 뚜렷하게 알리지 않고 물건을 제작하는 공장이었다. 특기할만한 것은 공장 내부, 사무실의 기묘한 청사진들과 주 작업장의 주철금고였다.

 청사진들은 이때까지 봤던 어떤 청사진과도 달랐다. 척 보기에도 복잡한 데다 빽빽한 주석에 휘갈긴 글씨는 알아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구석에는 특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고,하얀 뱀이라는 서명이 적혀 있었다. 오래된 청사진을 베껴서 새로 그린듯한 것들도 섞여 있었다. 확인한 뒤에 대부분 못쓰게 만들어버렸다.

 금고 안에는 다양한 소형 기계 장치들이 들어있었다. 부품이 낡고 오래된 것들도 많았다. 한쪽 구석에 랜돌프 주식회사 포트 다윈 노던 준주 호주 자치령이라고 쓰인 포장 라벨이 쌓여있었다.

 

 

 더비에서 런던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포스터를 한 장 보게 되었다. 반갑게도 우리 얼굴이 거기 그려져 있었다. ‘펜휴 제단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폭행한 혐의로 펜휴 제단으로부터 현상금이 붙었다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배링턴 경위에게 연락했다. 이미 포스터를 본 모양인지 수화기 너머의 그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설명을 요구했다. 우리는 펜휴 제단과 이집트 살인의 혐의가 있는 특정 종교 집단의 관련성을 의심해서 이를 확인했으며, 사진을 남기기는 했지만 달리 누구를 때리거나 훔치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물론 물건을 가지고 나온 게 있으니 뒷부분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거기에 더해서 그들의 혐의를 강조하며 미스르 하우스에 잠입하는 일에 도움을 요청했다. 내가 찍어둔 사진을 보고 싶다고 해서 늦은 밤에 경위를 만났다.

 인화해둔 사진을 확인한 배링턴 경위는 사진을 증거물로써 윗선에 제출해볼 수는 있겠으나, 이 정도로는 개비건 정도 되는 귀족이라면 기소를 당하더라도 필시 어떻게 손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다. 우리 또한 확실한 사건 현장과 발뺌할 수 없는 증거를 손에 넣어 제대로 된 조처가 취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그믐에 미스르 하우스를 직접 찾아갈 계획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경찰력을 움직이기 위해서 더 큰 카드가 필요한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끈질기게 배링턴을 설득했다.

 배링턴 경위는 한참을 심사숙고하다 대답을 내놓았다.

 “이 사건을 맡은 지 1년 정도 되었는데.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경찰직을 내려놓을 각오로 움직여보겠습니다.”

 에식스는 그의 관할지도 아니었기에, 그는 직속의 경관 몇 명만 데리고 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정도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그 각오에 자못 큰 감동을 받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도박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옳은 쪽에 거는 도박이었다. 부디 증거를 찾을 수 있길.

 

 

 

 

 

 

1925. 3. 21

 

 

 우리는 해안에서 배를 타고 강을 따라 흘러 저택의 해자 쪽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얼굴이 쭈글쭈글한 뱃사공이 기슭에서 몰래 배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물가에서는 끈적끈적한 비린내가 진동했다.

 저물녘에 출발해 저택 부근에 도착할 즈음에는 소슬하게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습지의 섬, 그 한가운데 오래된 저택이 보였다. 세월의 무게에 저택의 하부가 가라앉아 미묘하게 뒤틀린 정취를 자아냈다. 주변은 습기 때문에 과다하게 발육한 이끼와 덩굴이 카펫 대신 깔려있었다. 안개 낀 밤의 암울한 분위기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다. 폐와 정신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오래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장소였다. 늪지에 사는 괴물에게 잡아먹힐 만큼 운이 좋지 않다면 어느날 직접 가라앉아 괴물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낡은 배는 끼익 소리를 내며 물가에 정박했다. 나는 땅에 발을 내디뎠다. 습윤한 땅은 제 형체를 유지하는 대신 발자국 모양으로 깊게 짓눌리며 탁한 강물을 꿀럭꿀럭 뱉어냈다. 주변이 어두워서 습지와 단단한 땅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공기는 축축하고 주변이 온통 물안개로 가득해 걷는다기보다 헤엄치는 기분이 들었다.

 정문 방향에서 사람 그림자 여럿이 다리를 가로질러 저택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불이 켜진 저택이 안개 속에서 음산하고 희뿌연 빛을 냈다.

 

 

 경찰들은 배 부근에서 대기하다가 필요한 때 진입하기로 합의했다. 우리는 곧장 저택 뒷문으로 숨어들었다. 저택은 넓고 안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 주의를 기울이면 숨어다닐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이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개비건 정도 되는 인물의 저택이라고 보기에는 관리 상태가 썩 좋지 않고, 가구 수도 몹시 적은 편이었다. , 사람들은 저택에 모이는 게 아니었다. 모두 저택에 들어와서는 검은 로브로 갈아입더니, 오래 머무는 대신 몽둥이를 하나씩 든 채 삼삼오오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제이덕이 일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스르 하우스처럼 17세기에 지어진 영국의 오래된 저택에는 비밀 공간이 있기 마련이라고 한다. 16~17세기는 엘리자베스 1세가 박해하던 시대라, 가톨릭 사제들이 숨는 곳을 마련해 놓고는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유의하며 각각 흩어져서 건물을 살폈다.

 제이덕과 노라가 함께 2, 3층을 둘러봤다. 손님방 가방 안에서 어쩐지 익숙한 물건을 봤다며 가져왔는데, 확인해보니 갈의 거울과 함께 쓰는 그 약병들이었다. 아마 자흐라 샤피크도 여기 온 모양이었다. 옆에는 쪽지도 하나 놓여있었다.

 

 

 

 

 

 또, 파라오를 그린 거대한 벽화에다 왕관 비슷한 것을 거는 전시대도 보았노라고 전해주었다. 스위스제 크로노미터 시계가 벽에 달려있었고, 금은으로 만든 앙크 목걸이도 여러 개 걸려 있어서 제이덕이 하나씩 들고 왔다.

 

 나는 1층을 둘러보았다. 휴게실의 사교도들은 낮은 목소리로 오늘 밤의 큰 의식에 대해, 또 오늘 새로 가입한 신입에 대해 속삭이고 있었다. 말랐다가 젖었다가를 반복하면서 돌이킬 수 없이 휘어지고 뒤틀려버린 나무 바닥은 걸음걸음 죽어가는 사람처럼 신음했다. 가는 방마다 숨길 수 없는 곰팡내가 났고 낡은 문은 여닫힐 때마다 끼익 거리며 신경을 긁었다. 검은 로브를 쓴 사람들은 그림자처럼 조용히 지나다녔다.

나는 벌레 먹고 망가진 책들만 가득한 서재를 지나쳐 메인 홀로 들어갔다. 쌍여닫이문이 있는 탁 트인 공간에 망가진 샹들리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방 한쪽에는 벽난로가 있고, 그 양옆으로 먼지가 뽀얗게 앉은 갑옷 장식이 서 있었다. 갑옷 장식 밑의 판이 움직인 흔적이 선명했다. 어렵지 않게 벽난로 양쪽에 붙은 장치를 찾을 수 있었다. 사교들의 일관적이고 음침한 취향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곳에서 조금 기다려 두 사람과 합류했다.

왼쪽의 장치를 누르자 갑옷 장식이 바닥에 난 자취를 따라 움직였다. 곧 아래로 내려가는 좁은 돌계단이 나타났다. 누가 메인홀로 들어오기 전에 재빨리 손전등을 켜고 내려갔다.

 

 지하는 더더욱 습하고 눅눅해서 조금 춥기까지 했다. 이 아래에는 고문 도구들이 즐비했다. 중세에나 쓰던 녹슨 아이언메이든과 부지깽이, 집게, 죔쇠와 함께 눈에 띄게 새 물건으로 보이는 신식 단도 몇 종류가 섞여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함께 끔찍한 용도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화로가 있다. 물건 대부분이 사용감이 있다. 인간이 바닥을 치기로 마음먹으면 어디까지 곤두박질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반대편에는 수납 선반과 책상, 탁자 셋이 나란하다. 선반에는 시든 것 같은 식물이 하나 놓여있었다. 책상 위에는 장부가 여러 권 쌓였고, 그 외에도 편지나 조각품, 책이나 두루마리들이 즐비했다. 우리는 먼저 열쇠 꾸러미를 챙기고, 거기 놓인 물건들을 빠르게 훑었다.

 조각품들은 종류가 다양했다. 흑단과 대리석으로 만든 파라오의 흉상, 머리가 악어이고 몸은 사람인 존재의 목각상, 상형문자 위를 뒤집힌 앙크 문양으로 덮은 석판 같은 것들이 있었다. 메모와 서신은 이렇게 두 장을 가지고 왔다.

 

 

  

 

 

 칼라일 탐사대의 일원이었던 잭 브레이디의 이름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칼라일 탐사대가 사교도들과 연관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당최 어떤 정황인지를 알 수 없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나는 그들이 사교의 일원이 되었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두루마리며 책들이 잔뜩 쌓여있었는데, 제이덕이 그중에서 영어로 된 것 하나와 검은 염소 가죽 표지에 잠금쇠가 걸린 16절판 아랍어 서책 하나를 챙겼다. 자기가 아는 교수에게 번역을 부탁하겠노라는 심산인듯했다. <오그니아트 민 알 진>.

 

 잡동사니로 가득한 공간을 지나 안쪽으로 철창이 달린 감옥이 열 칸 정도 이어졌다. 아주 최근까지도 사람이 갇혔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잠금장치만 신식인 걸 보니 꾸준히 사람을 납치하고 여기 가둬둔 거겠지. 내부를 쭉 훑는데, 물이 고인 웅덩이 안에 떨어져 있는 가죽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닳아 해진 지갑 안에서 그레고리 먼든 경위의 신분증이 발견되었다. 배링턴 경위의 전임자, 실종된 먼든 경위는 여기서 끝을 맞았던 것이다.

 

 

 우리는 배링턴 경위와 합류해서 그 지갑을 보여주었다. 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것은 암울한 선고이자, 확실한 증거품이다. 그는 젊은 순경 하나에게 증거품과 사진들을 쥐여주고 지금이라도 서에 지원을 요청하게끔 했다.

 

 남은 우리는 사교들이 남긴 발자국을 좇았다. 한밤중의 숲은 어둡고 을씨년스럽다. 높게 자란 나무들이 빽빽이 하늘을 막고 땅에는 제대로 된 길도 없어서 매 걸음을 조심히 내디뎌야 했다. 늪지의 음산한 숲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니 저 멀리 한 편이 불빛과 음악으로 소란스러웠다. 그 빛을 따라가자 이내 너른 공간에 도달했다. 우리는 그 공간의 초입에 다다라 몸을 숨겼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본 것을 되도록 정확하게 기록하려고 한다. 이후로 수없이 꿈에 찾아와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되었기에 복기는 어렵지 않았다. 인공적으로 다져서 만든 공터 한가운데에 거대한 이집트식 석비가 세워져 있었다. 2.5m 정도 되는 어두운 사각 돌기둥 석비에는 상형 문자들이 빽빽하게 쓰였고, 쇠고랑이 걸려 있는데 거기 산 사람이 여럿 매달려 있었다. 화톳불과 횃불이 주변에서 일렁였다.

 6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비밀스러운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전원이 새까만 로브를 입고, 석비를 중심으로 원을 이루었다. 한쪽에서는 북과 핑거 심벌즈, 기묘한 피리까지 더해서 국적이 불분명한 노래가 연주되었고, 그 리듬에 맞추어 로브 입은 사람들이 풀쩍풀쩍 뛰어다녔다. 저 멀리 사람들의 중심에 자흐라 샤피크에드워드 개비건이 보였다. 둘 다 몹시 화려한 로브를 입고 양손에 홀을 한 쌍씩 들고 있었다.

 우리가 숨을 죽이고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는 동안, 신입을 맞이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가운데에서 우두머리 두 사람이 그 사실을 알리면 신입들이 나와 사람들이 만든 원 바깥을 돌았다. 둥근 원 안의 사람들은 자기 앞을 지나가는 신입을 몽둥이로 한 대씩 때렸다. 대부분이 가볍게 치지만, 있는 힘껏 때리는 사람도 있었다. 앓는 소리와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중간에 못 견디고 쓰러지는 사람이 있는데도 아무도 개의치 않았고, 심지어는 밟고 지나가기까지 했다.

 한 바퀴를 그렇게 다 돌고 나면 중앙의 자흐라와 개비건이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신도들은 그 기도를 따라 읊었다. 목소리는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점점 줄어들어 속삭임이 되었다. 누군가는 너무 격양된 나머지 쓰러지기까지 했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이 몇 더 끌려와 석비에 묶였다. 사교도들이 묶인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돌아가며 한 대씩 때렸다.

 

 경찰 둘이 배링턴 경위를 향해 어쩔 줄 모르는 눈길을 보냈다. 물론 배링턴 경위에게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막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당장 눈앞에 무기를 든 60여 명의 광신도가 있었다. 우리는 경찰과 따로 고용한 이들까지 다 합쳐도 여덟이었다. 이대로 나서는 것은 자살 행위에 불과했다. 우리는 개죽음을 당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었다.

 우리가 서로를 당혹감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이, 고통에 찬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 비명이 너무 적나라해서 온몸의 피가 다 식어버린다.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끔찍한 무력감에 저절로 이를 악물게 된다. 노라가 바로 곁에서 라이플을 들어 올린 채 손을 떨고 있다. 나는 오른손으로 총신을 내려주었다. 그 애는 고개를 수그리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제이덕이 나직한 말 몇 마디로 노라를 위로했다.

사교도들은 사람 하나를 중점적으로 때려서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곤죽을 만들어 놓았다. 그는 죽을 지경이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를 가운데에 두고, 누군가 쐐기를 가져왔다. 그는 곧 가슴에 커다란 못이 박혀 죽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구할 순 없어. 텅 비어버린 말이다. 스스로가 사람이 아니라 슬픔과 분노에 얇은 막을 덧입혔을 뿐인 무언가로 느껴졌다.

 

 한 사람이 제물로 바쳐진 다음에는 나머지 사람들도 서서히 비슷한 꼴이 되어갔다. 개비건이 갑자기 하늘에 손을 치켜들더니 주문을 외웠다.

 그 순간 허공이 서서히 갈라졌다. 찢어진 차원의 틈새로 뭔가 거대한 것이 비집고 나왔다. 그 역겨운 몸체는 지나치게 길어서 아주 오래, 한참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날개를 펄럭이면서 내려온 괴물은 공터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쫙 펼친 날개는 공터를 다 덮을 정도의 크기였다. 공터 위를 밝히던 달빛마저 가려져 어둠은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화톳불의 불빛은 그 몸체보다 더 거대한 그림자를 자아내 춤추게 했다. 그것의 온몸에서 촉수가 뻗어 나와 어지럽게 일렁였다. 어떤 구조로 움직여지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검은 우리 신의 말씀을 전하러 왔다.

 

 사교도 몇이 자발적으로 괴물에게 다가가 자신을 바쳤다. “저를 파라오께 바칩니다!” 뒤이어 고깃덩어리를 뼈째 으깨는 소리가 났다.

 괴물은 자기 앞에 당도한 신도들을 반쯤 삼켜버렸다. 그런 괴물이 눈앞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모습을 보면서도, 사교도들은 그를 숭앙했다. 살아남는 자는 승급 의식을 통과한 것이었다. 개비건은 검은 파라오를 칭송하는 글을 읊으면서 화강암 그릇에 자기 피를 바쳤다.

 뒤이어, 사교도들은 하나둘씩 로브를 벗어던졌다. 이들은 로브 밑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대로 제 몸을 여기저기 찧으며 자해를 하거나 광기에 빠져서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점차 흥분이 고조되자, 이들은 서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괴물은 그 모습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자기가 나왔던 틈새로 돌아갔다.

 

 나는 제대로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자리에 붙박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배링턴 경위의 손짓에 겨우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투입 준비가 되었다는 사인이었다. 목격한 장면이 자아낸 충격의 여파가 채 가지기도 전에 습격 작전이 시작되었다. 다수의 경찰이 난교 중인 사람들 사이로 들이닥쳐 하나둘씩 제압했다. 우리도 곧장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군중은 혼란에 휩싸여서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온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와 노라, 그리고 고용인 하나가 자흐라 샤피크의 뒤를 쫓았다. 오밤중에 어딜 어떻게 긁히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달렸다. 분명히 다리를 겨냥한 사격이었으나 무언가에 보호받는 것처럼 총의 궤도가 살짝 바뀌어 생채기로 그쳤다.

 자흐라는 도망치는 데에도 질렸다는 듯이, 마치 변덕을 부리듯 멈춰 섰다. 앞서 달려가던 노라가 그대로 자흐라에게 달려들었다. 자흐라는 곧장 품에서 날카로운 단도를 꺼냈다. 달빛이 반사된 날이 섬뜩하게 번쩍였다. 붕대로 동여맨 상처가 아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 분명히 한 발을 제대로 쏘아 맞혔는데도 칼을 든 그 손은 잠깐 비틀거렸을 뿐 굳건한 궤도를 그렸다.

 “이 칼 기억나?”

 즐거운 추억이라도 되짚는 목소리로 물어오면서, 자흐라는 칼을 휘둘렀다. 단도가 노라의 옆구리를 깊게 파고들었다.

 노라가 자기 품으로 무너지자, 그는 다정한 손길로 머리칼을 정돈하더니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애를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총에 맞은 곳이 피로 물들고 있다. 그런데도 걸음걸이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투다.

 “역시 오른손을 남겨두지 말 걸 그랬어.”

 그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아주 가까이에서 날카로운 단도가 쇄도했다. 나는 들고 있던 총을 던져버렸다. 그가 지근거리에 붙어 휘두른 칼에 내 오른팔이 길게 베이며 핏방울이 튀었다. 나는 베이는 것을 감수하고 칼을 쥐었다. 익숙하지 않은 손동작으로 휘두른 칼이 자흐라의 샤피크의 복부에 꽂혔다. 그는 우뚝 멈춰서서는, 당혹감이 어린 동작으로 내 오른손을 꽉 붙잡았다. 나는 마주 칼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코앞에서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자흐라는 희미하게 꺼져가는 목소리로 주문을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도망갈 곳이 없다. 눈구멍의 깊은 안쪽에서부터 개미 떼가 수백 마리 기어 다니는 듯한 근질거림이 인다. 서서히 시야가 흐릿해진다.

 그 순간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칼날이 자흐라 샤피크의 목에 박혔다.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자흐라의 눈이 흡뜨이고, 입술이 꿈틀거리는데 말 대신 꾸르륵거리는 소리만 몇 번 흘러나왔을 뿐이었다. 그는 곧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있다가, 역시나 자기가 한 행동에 놀란 기색인 제이덕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숲을 헤치고 뛰어온 듯 생채기투성이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노라에게 달려갔다.

 

 

 제이덕이 노라를 부축하는 것을 도우려는데, 곁에서 살펴보니 숨이 너무 가늘고 얕다. 맥박은 놀랄 만큼 느리고 그 얼굴은 창백했다. 이런 얼굴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덜컥 샘솟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손짓으로 제이덕을 제지하고 먼저 상처를 지혈하려 했다.

 깊게 찔린 상처에서부터 피가 끔찍하게 많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처를 틀어막는 손은 금세 피범벅이 된다. 몸이 너무 차갑다. 불안감을 가르고, 노라가 물어왔다.

 “어떻게 됐어요?”

 “다 끝났어요.”

 그렇구나. 목 안쪽에서부터 작게 가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두 사람 다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노라는 정말로 안심한 것 같다저는 괜찮아요. 고마워요. 미안하고, 그리고다행이에요. 나직한 말들이 이어진다. 나는 차마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 망연자실하게 그 애의 얼굴만 바라본다.

 사실 괜찮은 것은 하나도 없다. 흘러나오는 피는 멈출 줄 모른다. 나는 이미 상황이 누군가 손쓸 수 있는 영역을 아득히 넘어섰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나 자신을 어른 취급해온 죄로 그저 내 동요가 그에게까지 전해지지 않기를 빌며, 제이덕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해야 하는 얘기가 있으면, 지금 해요.”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이루던 것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와중에 우리에게는 몇 마디 짧은 말을 나눌 시간밖에 없다.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그 애는 시시껄렁한 농담에 핀잔을 주고 매일 늦게 잠드는 제이덕을 걱정하고, 많은 것을 두려워하고, 분해하고 또 슬퍼하면서 아닌 척하고 늘 그다음에 있을 좋은 일들을 씩씩하게 이야기했다. 정말로 괜찮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그 애는 이제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노라의 표정은 졸음에 취한 듯 흐릿하다. 정말로 편안한 표정인지, 자길 걱정하는 사람을 위한 다정함인지 나는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 가족이 가족을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제이덕은 울지 않았다.

 노라가 자기를 안심시키려고 하는 걸, 그 애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그 애들은 그런 것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고마워. 노라.”

 “이제집에 가자. 집 가서 쉬자.”

 

 노라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이덕은 이후로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두 사람이 아무런 방해 없이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를 도왔다. 그는 자기 짐과 연구 자료는 내버려 두고 노라의 짐만을 챙겼다. 남은 것은 내가 분류해서 추후에 부쳐줄 생각이다. 그가 배편을 기다리며 대합실에 앉아있을 때 잠깐 곁에 앉아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조심히 돌아가고, 그럴 수 있다면 있는 힘껏 잘 지내라고, 장례식에 못 가서 미안하다고, 그런 흔해 빠진 이야기를 몇 마디 했다. 닿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그가 내게 소중한 동료였고 친구였으므로, 아마 나 자신에게도 그런 인사를 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제이덕은 그렇게 노라를 데리고 텍사스로 돌아갔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 우리는 램지를 통해서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추후 배링턴 경위의 지휘 아래 경찰이 현장을 수습했다. 개비건과 사교 집단의 혐의를 분명히 할 증거는 말 그대로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그가 개비건이 아니라 조지 5세 본인이었더라도 이만한 증거를 덮을 도리는 없을 것이었다. 개비건은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고, 자흐라 샤피크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대부분의 사교도가 당일 현장에서 붙잡혔다. 남은 잔당들은 미미한 수준이니 런던에서 활동을 존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머지않아 재판이 열릴 예정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집트 살인사건이 전부 사교 집단의 짓이라는 걸 밝혀낼 수 있었다. 나는 런던의 사교 집단의 내막과 그 배후에 대한 기사를 작성해서, 더 스쿱의 이름을 단 마지막 기사로 내보냈다. 조나 켄싱턴이 요청했기에 미국에도 한 부를 부쳤다.

다음에는 얄레샤 엣삼을 찾아갔다. 그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있었던 일들에 대해 짤막하게 얘기해주었다. 노라의 소식을 듣자, 얄레샤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펑펑 울었다. 어쩐지 두 사람이 조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얄레샤가 앞으로도 무탈하게만 지낸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정신없이 숙소로 돌아왔을 때, 나는 손에 가득했던 일감을 어느새 탕진해버렸음을 깨달았다. 숙소가 턱없이 넓게 느껴졌다. 공허한 집안은 냉기마저 흐르는 것 같다. 나는 반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분명 익숙한 일이었음에도 어쩐지 익숙한 척도 할 수가 없었다. 견딜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서, 책상 위를 닥치는 대로 뒤졌다. 그리고 텅 빈 바닥에 자료를 하나씩 펼쳐나간다. 바닥이 점점 빼곡하게 들어찬다. 억지로라도 돌려보내야 했던 걸까? 그랬더라면 최소한……. 아니, 소용없는 생각이다.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무슨 억지를 부리건 간에 그 애들은 돌아가지 않았을 거다. 노라는 아주 정이 많았다. 자기 손에 닿는 것들은 전부 도우려고 했다. 제이덕은, 굳이 자기 일이 아니어도 될 일에까지 호기심과 책임감을 함께 느꼈다. 그것뿐이다. 나는 그 애들에 대해 가족들이, 친구들이 아는 것만큼 많이 알지 못한다.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은 비일상에 가까웠다. 그래도 딱 하나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 애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내가 사람의 어떤 점을 소중하게 여겼는지 선명하게 되새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런던에서 진통제에 취해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노라는 이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 땅속에 묻혔을 것이다. 그 애가 두 손을 모으고 누워있으면 그 애를 사랑하는 가족들이 둘러서서 인사를 나누고, 교구 목사는 그 애가 언제나 신실했고 사랑받아 마땅했기 때문에 일찍 하나님 곁으로 데려가셨다고 기도했을 것이다. 제이덕은 쭉 그 애의 곁에 있어 줬을 테고. 그리고 노라는,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들도 다 위로해주고 싶어 할 것이다. 나는. 바스락, 바스락, 종이들이 흩어졌다. 세상에 신이 있고 응당 그렇게 되어야 하는 순리라는 게 정말 있다면 그저 그 애들이 다치지 않길 바랐다. 한 손이 바삐 움직여 글자들 위를 훑어내린다. 하지만. 늘 그렇듯 바람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손끝이 이름, 이름, 이름들 위를 스친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뭐든 스스로 해내야 한다. 손끝이 한달음에 바다와 산맥과 강을 건넌다. 나는 세상의 밝은 곳을 지키고 싶어 애쓰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의 비극을 막지 못했다. 나는 다시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

 손가락이 우뚝 멈춰서서 지도 위의 한 점을 두드렸다.

 “상하이.”

 넓은 방에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낯설다.

 

 

 

 방향을 결정하고 나서, 나는 그대로 쓰러지듯 드러눕는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오른손을 쥐었다 편다. 그 빌어먹을 자식들은 런던에서 내 양팔을 다 자르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1. 전선 조광증 이야기는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 오마주하였습니다. [본문으로]</서부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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