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만약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라면

아직 엔딩을 안 보셨다면

미국편 후기부터는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조심합시다!

미국편 1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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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잭슨 엘리어스의 유언에 따라 구체적인 기금을 받는 탐사대로 재조직되었다. 붙는 이름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어느 한구석 특별히 빼어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 이름이 새삼스럽게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그래도 거기에는 다른 무게감이 있었다. 무게감. 어떤 사건들은 한번 겪고 나면 결코 예전과 같은 삶으로는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은 알게 되었다는 간략한 요약. 우리는 그 앎의 굴레, 같은 슬픔을 공유했다.

 

 

 수집한 자료를 정리한 보드를 펼쳤다. 몇 가지 의문들, 수상한 증거들이 어지러이 놓여있었다. 이번에는 그중에서도 제정신으로 쓰인 것 같지 않던 잭슨의 메모에 있는 ‘칼라일 가문의 금고’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칼라일 가문의 금고라면 분명 저택에 있을 터였다. 도둑질할 재주는 없으니 당당히 부딪혀야만 했다. 칼라일 저택은 삼엄한 경비 속에 요새 마냥 보호받고 있었다.

 우리는 칼라일 탐사대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칼라일 저택 사람들은 허풍선이들에게 자주 시달리는 모양인지, 우리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쫓겨나지 않기 위해 제이덕의 영민함과 ‘학위’를 팔아야 했다. 텍사스 대학 만세.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에리카 칼라일은, 이 집에서 만난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루빨리 귀찮은 불청객들을 쫓아내려던 그를 자리에 앉힌 것은 로저 칼라일이 살아있을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잭슨이 남긴 자료들을 십분 활용하여 에리카를 설득했다. 셀커크 중위와의 인터뷰(개중 정확히 “시체 중 백인은 없었다”는 부분), 살아있는 잭 브레이디가 목격되었다는 증언이 특히 유용했다. 에리카 칼라일은 칼라일 탐사대와 죽음숭배교단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얘기를 하는 목적이 뭐지요? 돈을 바라는 건가요?” 이런 말이 에리카의 입에서 나왔을 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희는 칼라일 탐사대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특정한 교단에 대해 조사하고 있습니다. 칼라일의 금고 안에 있는 책을 보고 싶습니다.” 해서, 대충 이렇게 대답하게 된 것이다.

 

 에리카 칼라일은 금고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한 적 없다며 놀랐다.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잭슨 엘리어스는 어떻게 알았을까. 금고에 대해 말할 때 잭슨의 메모는 제정신인 사람 같지 않았다. 환시일까? 열띤 백일몽 속에서, 꿈속에서, 어쩌면 광기 속에서 숨겨져 있던 칼라일의 비밀에 접촉하고야 만 것일까?

 에리카는 망설였지만, 최대한 솔직하게 자기가 아는 것을 설명하려 애쓰는, 어떻게 보든 남을 속일 깜냥은 되어 보이지 않는 시골 아가씨 노라 에버트의 모습에서 어떤 확신을 얻은 듯했다. 에리카는 우리를 서재로 안내했다.

 

 서재로 가는 길에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탐사대를 꾸려 떠나겠다고 했을 때, 로저 칼라일은 평소와 달랐다. 분명 부나이라는 흑인 여자에게 홀려서 저지른 짓이다. 부나이는 어느날 홀연히 나타났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는 자신도 전혀 모른다. 로저는 부나이를 자신의 여왕이라고 불렀고, 그가 자신이 원하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부나이는 칼라일 탐사대와 함께 떠났다.

 -떠나기 전에도 로저 칼라일은 악몽을 자주 꾸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고는 했다. 그래서 유명 정신분석가 허스턴 박사에게 진료를 받으라 추천했다. 하지만 허스턴 선생은 그의 병증을 치료하는 대신 오히려 부나이와 합세하여 그에게 바람을 넣은 것 같다.

 -로저는 이들 탐사대가 정확히 뭘 찾으러 떠나는 건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에리카는 그가 나가서 고생하면 자기 꿈이 허황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리라 생각하며 탐사를 보내주었다.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칼라일 탐사대에 숨겨진 인물이 더 있었다고? 갑자기 나타났다는 이 여인의 이야기는 불안한 쪽의 흥미를 돋웠다.

 

 

 

 칼라일 가문의 서재는 많은 양의 서적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비밀 금고 안에 있었던 책은 고작 네 권이었다. 간추리자면:

 

 프나코티카 필사본. 은색 가죽 양장 제본. 하이퍼보리아, 목성, 아틀란티스에 대한 이야기.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지구에 생명을 뿌린 백합 모양 생명체에 대한 설명. 누군지 모를 인물이 주석을 달았다. 거기에는 호주 서부의 사막 지하 어딘가에 세워진, 위대한 종족의 도시에 대해 적혀 있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기묘한 경험을 했다. 눈앞에 굉장한 풍경이 펼쳐졌다. 넓게 펼쳐진 모래의 바다, 죽음도 죽고 의미도 의미로 존재하지 못하는 메마른 대지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기괴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환상이었다. 분명 난생처음 보는 장소인데도 너무나 그리웠다. 이 도시야말로, 내가 두 다리 두 팔이 없을 적부터 기어서 나온 곳 같았다. 눈물이 차올랐다. 적어두기 부끄럽지만, 나는 이 이후로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만나보지 못한 도시에 관한 미칠 것만 같은 향수만을 느꼈다. 위대한 자들, 내려다보는 자들, 관찰하는 존재들, 그들이 나를 멀리서 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을 부르고 있는 것은 나였다. 아! 나는 그들을 부르는 법을 알고 있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거기 닿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의 기분은 어떤 말로도 생생히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나의 글은, 아니 영어는, 인간의 언어로는 부족하다.

 

 신으로서의 삶. 몽고메리 크롬튼. 손글씨. 거무죽죽한 가죽은 인간의 살을 만지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 영국 미술가 크롬튼이 광기에 사로잡혀 쓴 일기. 이집트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검은 파라오, 어둠의 파라오, 살인과 인신 공양에 대한 상세한 묘사. 공양 의식에 쓰는 못이 박힌 짧은 몽둥이에 대한 언급.

 

 

 

신으로서의 삶

 

 

 셀렉시옹 드 리브르 디봉. 그리스어 원전을 라틴어로 옮김, 프랑스어 주석. 가죽 표지가 파랗게 썩어있다. 라틴어 부분을 제이덕이 읽어내었다. 13권짜리 서적의 일부분. 주문이나 마법의 실용에 관한 연구가 들어있다. 차토구아라는 신에 대한 숭배. 테두리에 뒤집히고 깨진 앙크를 닮은 문양이 있음. 파즈 로자와 노덴스라는 신들의 적대 관계에 대해 쓰여 있다.

 

돌들 틈에서. 저스틴 조프리. 최근에 쓰인 수기 원고. 살면서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기묘한 검정 가죽 재질 표지. 시가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여왕의 소품들이라는 시는 왕관, 허리띠, 목걸이 등 여왕이 사용하는 화려한 소품에 대해 자세한 묘사를 하고 있다.

 

 

 뭔가에 취한 듯 당시의 기억이 모호한데 읽은 책들의 모양이나 감촉, 내용은 보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이상하다. 그때는 내 행동이 내 것 같지 않았다. 책을 읽다 노라가 기절했는데, 평소와는 달리 인간적인 걱정이라곤 하나 없이 그저 혼자가 아니라는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어쩌면 그도 위대한 도시에 다녀온 것일까? 그 아름다운 광경을 봤던 걸까? 봤어? 본 거지? 나는 소름이 돋은 팔을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복도에 서 있었다.

 기억이 서서히 돌아오자 환상은 그저 꿈결처럼 느껴졌다. 잊히지 않는 꿈 말이다. 꿈은 묻어둘 수 있지만, 행동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에리카 칼라일에게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던 상태에서 벌였던 실례에 대해 사과하고, 이후 알아낸 내용이 있다면 연락을 주노라고 약조했다.

 

 

 

 

 우리는 칼라일 가문의 차를 얻어 타고 뉴욕주 의료관리 위원회로 향했다. 내려서 잠시 의논했다. 칼라일 탐사대가 이집트로 향했으니 어쩌면 이 책 중에서는 ‘신으로서의 삶’이 특히 로저 칼라일에게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검은 파라오, 검은 파라오… 분명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당시에는 떠오르는 내용을 모호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는데 제대로 찾아서 여기 붙여둔다.

 

 (자료가 보강되어 있다) 이집트 3왕조 시대 말기에 아라비아 사막의 고대도시에서 왔다는 네프렌 카라는 강력한 마법사가 검은 파라오라는 악신을 숭배했다. 사람들은 악신과 마법사를 구분하지 않고 그를 검은 파라오라고 불렀다. 네프렌 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제3왕조와 지배권을 다투었다. 그가 한동안 나일강 일대를 다스리다가, 결국 알려진 대로 스네프루가 제4왕조를 세우고 이시스의 도움으로 네프렌카를 죽였다.

 

 이 얘기를 들은 제이덕은 어거스터스 라킨의 몸에서 흘렀던 검은 피를 우리에게 주지시켰다. 어쩌면 그것과 이 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서부터 출발한 불길한 파장으로 인해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우리는 불안의 가지를 더 뻗어 나가는 대신, 의료관리위원회 건물로 들어갔다. 거기에 보관되어 있다는 허스턴 박사의 진료 기록에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열람하고 싶다고 정중하게 요청하여 위원회 비서관 아드리안 페리스를 만났다. 그의 허락을 받고, 제이덕이 연구 목적으로만 사용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서야 필요한 내용을 읽어볼 수 있었다.

 

 

 

허스턴의 의료 기록

 

 

 

 베인, 베인이라. 꿈속의 목소리는 로저를 혼내고 싶었나? 아니, 칼라인 가문의 시조는 분명 에브너 베인 칼라일이지.

 허스턴 박사는 최근의 날짜로 내려갈수록 칼라일에 대한 기록을 적게 남기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에리카는 허스턴 박사를 부나이의 공조자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허스턴 박사의 기록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대체 이들 탐사대 사이에는 무슨 모종의 관계가 있었던 걸까. 이들에 대해 조금씩 알아낼 수록 사실이 명확히 밝혀지기보다는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다.

 

 -에리카 칼라일: 에리카 칼라일은 오빠와의 관계 때문에 괴로워했다. 상담 한 번에 90달러씩 청구하곤 했던 명세가 남아있다. 상담 비용치고는 지나친 가격이다.

 -이멜다 보쉬: 로버트 허스턴의 연인. 자살했다. 허스턴 박사와 사귀다 탐사대에 들어가기 직전에 헤어졌다.

 

 

 

 아파트에 돌아와 레베카 쇼젠버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힐튼 씨와 면회 일정이 잡혔다. 내일 아침 오전 9시. 역에서 만나 전철을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노라는 처음 타보는 지하철에 기대가 컸다. 반면 제이덕은 알게 모르게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득실대는 피라미드에도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 나는 속절없이 웃고 말았다.

 그런 즐거운 시간도 잠깐이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밖에는 정복 경관들이 여럿 서 있었다. 그들은 우리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만 들쑤시고 다니라는 협박을 나름대로 고운 말로 포장해서 지껄여댔다. 내 어깨를 당장 뽑아가기라도 할 기세로 꽉 쥐면서 얘기했으니,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힌 편이었다.

 지방의 유지나 돈과 결탁한 구리배지들이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협박하는 이야기야 LA에서든 뉴욕에서든 흔하다. 잘릴 직장이 있는 기자들이라면야 그런 말에 겁을 먹겠지.

 하지만 내 어린 동료들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런 일을 누군가 함께 해본 적이 없으니 그들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기 어려웠다. 내 한 몸만 걱정 없이 내던져서 되는 일이 아니니. 어렵다.

 머뭇거리다, 결국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일렀다. 그래도 노라는 그럴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럴 수는 없구나. 그렇다면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익숙해져야죠. 세상이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에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들이 정말로 그렇게 되면 조금쯤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력감에서 오는 오기로 부나방처럼 사는 것은 불행하다. 우리는 내일 거처를 옮기기로 하고 잠이 들었다.

 

 

 

 

 

1925. 1. 20

 

 복잡한 뉴욕 거리에서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짐작하기로는 교단의 끄나풀인 듯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황급히 아무 건물에 들어가 버거를 한 개씩 물고 가게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여차하면 사람들 사이에 섞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뉴 그랜드 호텔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짐을 내려놓고 나서 바로 레베카 쇼젠버그와 합류해 싱싱 교도소로 향했다. 안내를 받아 힐튼 애덤스를 만날 수 있었다.

 힐튼 애덤스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으면서도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는 선한 사내였다. 30분의 짧은 면회 시간 동안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이렇다:

 

 -‘피투성이 혀 교단’은 뉴욕에서 활개를 치며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힐튼은 시립도서관에서 모데카이 레밍 박사가 아프리카 죽음숭배교단에 대해 한 이야기를 듣고 도서관에 찾아갔다. 지금은 경찰들이 압수해간 자료는 오래전에 사라진 동아프리카 교단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들 교단은 케냐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데, 할렘 근방에서 아프리카와 관련된 물건을 취급하는 것은 주주하우스 뿐이다. 주주하우스는 아프리카에서 정기적으로 물건을 받고 있기도 하다. 여러모로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는 가게다.

 -힐튼은 웨스트 137번가를 따라서 레녹스 가와 할렘 강 사이의 두 블록 반경에서는 절대로 납치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구역에 주주하우스가 포함되어 있다. 납치가 일어난 지역은 그 구역을 중심으로 할렘강 서쪽에서 약 1.6km 반경 내에 분포되어 있다. 실종 자체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발생한 것 같다. 매 그믐밤, 한 달에 한 번.

 -힐튼은 주주하우스에서 나온 30~40대 정도의 남자를 미행한 적이 있었다. 남자는 팻 메이벨스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 사람들은 그 남자를 두려워했다. 남자의 이름은 무쿵가 음다리였다. 힐튼은 살인의 배후지가 자신을 위협으로 인식한 것이 카페에서 그 남자에 관해 묻고 다녔을 때라고 확신한다. 

 

 힐튼의 사형 날짜는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 멀지 않았다는 사실은 누구든 알 수 있다. 최대한 빨리 사건을 해결해야만 이 무고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

 

 

 

 

 면회를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서, 나는 뉴욕의 연예 사건을 주로 취급하는 동료 기자에게 연락해 이멜다 보쉬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했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냥 쉬었어야 했는데. 발 빠르고 말 많은 인간들 사이에 벌써 불유쾌한 낭설이 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라이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너는 기자가 그런 걸 믿냐.

 믿을 게 있고 안 믿을 게 있는 건 아는데 이런 건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전화를 한 번 더 돌린 뒤에야 로버트 허스턴이 자기 애인을 죽였다는 소문을 주워들었다. 얻은 건 쥐꼬리만 한데 열심히 달린 뒤처럼 입안이 달았다. 어쩌다, 일라이저 웨버. 이 꼬락서니냐. 그야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잭슨 엘리어스. 이 빌어먹을.

 

 내가 혼자 화를 삭이는 와중에 제이덕은 잭슨이 남긴 팜플렛에 적혀 있던 이름, 앤서니 콜즈 교수에게 연락했다. 이 뒤로는 그가 정리해준 내용을 옮긴다.

 앤서니 콜즈 교수는 호주 출신으로 뉴욕에 잠시 강연을 하러 들렀었고, 지금은 미스캐토닉 대학에 머무는 중이다. 그는 폴리네시아와 뉴질랜드를 중심으로 사교 집단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

 

 

콜즈 교수의 말

 

 

 

 콜즈 교수는 전화 통화로 사진 자료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7개월 이후에는 호주에서 있을 예정이니 그때 직접 사진 자료나, 일지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한다. 거대한 벽, 거대한 동굴이라……

 

 


 

 

 

 잭슨 엘리어스를 살해한 범인은 주주하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피투성이 혀 교단이다. 이들은 그믐달마다 사람을 납치한다. 입막음을 위해 살인을 벌인다. 경찰도 한패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누명을 쓰고 잡혀 있는 힐튼 애덤스를 구하려면, 진범의 증거를 잡아야 한다.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얻고, 그것을 믿을만한 사람에게 넘기고, 누군가 조작을 시도하기 전에 신문사 등을 이용해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터트린다. 그러려면 현장을 사진으로 남기던가 아니면 보다 확실한 증거품, 직접적인 자료를 찾아야 한다.

 믿을만한 사람이라. 경찰 중에서 믿을만한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고민 끝에, 잭슨의 사건 때 잠깐이나마 대화를 나누었던 마틴 풀 경위에게 연락했다. 경찰에게 협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뒤로는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할 수 있었다. 경찰 내부에 잭슨을 죽인 진범으로 추정되는 단체와 결탁한 세력이 있는 것 같다는 얘기에, 그는 아마도 롭슨 경감이 한 패일 것이라고 의견을 개진했다. 힐튼 애덤스에게 혐의를 씌워 잡아넣은 게 롭슨이고, 우리를 협박하러 왔던 젊은 경관도 그 밑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부패했다는 소문은 이미 공공연하다.

 풀 경위로부터 롭슨 경감을 통하지 않고 바로 위로 증거를 올릴 수 있게 힘써보겠노라는 약속을 받았다. 협조를 얻으니 그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는 주주하우스에 직접 진입해서 증거를 알아내는 일만 남았다. 그날 밤은 제법 애먹었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시선을 끌기도 했고, 잠시 물러났다 돌아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숨어있으려는데, 제이덕이 술에 취한 불량배들에게 시비가 붙어 지갑을 잃어버렸다.

 

 고생 끝에 주주하우스를 감시하고 얻은 정보:

 -백인 남자 둘이 두툼한 봉투를 품에 집어넣고 돌아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들 중 한 명은 분명 우리를 찾아왔던 경찰이었다.

 -사일러스 은콰네가 저녁에 식사라도 하러 나가는 건지 1시간 정도 가게를 비우는 것을 확인했다.

 

 

 잠긴 가게 문을 열어보려고 시도해보았으나 한계가 있었다. 전문적인 사람을 고용하기로 합의한 뒤에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내일 사일러스 은콰네가 같은 시간에 자리를 비운다면 그동안 내부를 뒤져볼 계획이다.

 

 

 

 

 

1925. 1. 21

 

 우리는 조심스럽게 주주하우스 안으로 들어가서 가게와 생활공간을 살펴보았다.

 침대 밑에 커다란 칼이 하나 놓여있었다. 볼로나이프와 비슷해 보이는 큼직한 날붙이. 시트 한쪽 구석에는 말라붙은 인간의 혀를 머금은 가면이 놓여있었다. 살인자들이 쓰고 있었던 가면과 닮았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이 말라붙은 혀가, 가게에서 볼 수 있었던 끔찍한 것들의 서막이었다.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가게 카운터 안쪽에서 장부를 챙겼다. 지출 항목에 일주일에 한 번 주기적으로 ‘경 14’라고 적힌 명세가 있다.

 카운터 바닥에 깔린 깔개를 들자, 자물쇠가 잠긴 문이 드러났다. 들고 다니던 작은 공구로 열어보려다 자물쇠 안에 공구 끄트머리가 끼인 채 부숴 먹었다. 쯧. 결국은 자물쇠를 뜯어낼 수밖에 없었다.

 

 열린 문 너머로 폭이 좁은 계단이 이어졌다. 계단 아래로 보이는 것은 역청처럼 어둡고 끈적한 암흑 그 자체였다.

 손전등을 켜고 긴 계단을 한참 내려가자 복도가 나왔다. 절대 일반적인 지하실이 아니었다. 돌로 된 낡은 벽에는 기호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흔들린 사진, 노트에 옮겨 그린 기호들) 우리는 곧 쇠로 된 모서리를 두른 나무문에 다달았다.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 방은 횃불이 걸려 있어 복도보다는 조금 밝은 편이었다. 그래도 어슴푸레하고 퀴퀴한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문에도 방에도 무언가 글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방 한쪽에는 부자연스럽게 커다랗고 둥그런 석판이 누워있고, 대형 윈치가 석판에 달려 있었다. 윈치는 석판을 조절하는 장치인 것 같았다. 셋이서 힘을 합쳐 매달리자 겨우겨우 석판의 틈이 벌어졌다.

 

 벌어진 틈 사이로부터 끔찍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저 먼 안쪽에서부터 무언가 움직이는 실루엣.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손전등을 아래로 비추자, 그 미약한 빛에 원통형의 거대한 벌레 비스름한 존재의 모습이 드러났다. 몸통에는 듬성듬성 사람의 얼굴이 붙어서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찢어지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구덩이 안에서 용솟음치려는 듯 그 육중한 몸을 비틀고 스스로 짓이기고 꿈틀거렸다. 우리는 아연실색해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피라미드 꼭대기의 틈새에서 봤던 것이 떠올랐다.

 노라는 그 자리에서 다시 기절했다. 제이덕이 쓰러지는 그를 받았다.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아래턱이 덜덜 떨려왔다. 어떤 악의, 어떤 욕망이 이런 괴물을 만들어낸 걸까? 대체 뭘 하는 놈들이길래. 이런 끔찍한 걸 뉴욕 한복판에 숨겨두고 있냔 말이다.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다가 이내 메마른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래서야. 무서워서 어디 땅을 디디고 살 수나 있겠나. 여기는 분명 저 먼 나라의 봉인된 피라미드가 아니라, 내 이웃의 지하실일 텐데. 세상에 도망칠 수 있는 곳, 안전한 곳이라고는, 없구나.

 (정신이 나갔던 건지 그것의 사진을 몇 장 찍어두었는데 인화하는 내내 암실이 조금 더 추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착각한 게 아니라면, 그것이 내지르는 비명이 점점 커지는 것처럼 들렸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는 온갖 용을 써서 석판을 다시 닫았다.

 방에는 석판 외에도 피가 묻은 화물 상자, 의식용으로 보이는 아프리카 북 같은 것이 놓여있었다. 또 한쪽 벽면에 커튼으로 가려진 공간이 보였다. 나는 홀린 듯 커튼을 걷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직사각형 공간의 네 구석에 사람이 서 있었다. 모두 배가 열려서는, 이마에는 문양이 새겨진 채다. 마치 되돌아온 잭슨 엘리어스의 악몽 같았다. 아. 커튼이 열리자마자, 이들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피가 흐르는 귓가를 대충 압박하며 다시 커튼 안쪽을 살폈다. 늘어선 선반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먼저 가면. 은콰네의 방에 있던 것보다 훨씬 관리 상태가 좋은, 말라붙은 인간의 혀가 붙은 가면이었다. 화려한 로브, 사자 발톱 장갑, 책 한 권(<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 잭슨이 미스캐토닉 대학에서 찾던 그것이다). 희한하게 생긴 나무 조각 가면(사람 얼굴 네 개 정도가 붙어 있는 모양). 광택이 나는 구리 그릇. 긴 의식용 홀. 회색 금속으로 된 머리띠. 항해용 크로노미터. 잠겨있는 소형 금고.

 금고를 공구로 비틀어서 억지로 열었다. 내가 찾던 ‘정확한 증거’들이 여기 있었다. 살인자들은 무슨 끔찍한 악취미인지 피해자들의 물건을 수집했다. 그 물건 중에는 램지 씨에게 받았던 엘리어스의 단서 ‘원본’들도 있었다. 그리고 배들이 찍힌 묘한 사진 한 장도.

 

 

발견된 사진

 

 

 금고에 들어있었던 것은 전부, 밖의 물건 중에서는 몇 가지 들고 다닐 만큼만 챙겨서 가방에 넣고 빠져나왔다. 바닥에는 아까까지 살아 움직이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고, 내 어린 동료들은 벽에 기대, 비슷하게 피투성이인 모습으로 겨우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렇게 가엾은 꼴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세상일이 결코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곧장 램지의 변호사 사무실로 갔다. 거기에다 두 환자를 맡겨놓고, 나는 정신없는 밤을 보냈다. 찍어둔 사진 인화를 끝내자마자 풀 경위를 만났다. 사진과 장부, 금고 속 증거품을 모조리 보여주며 그에게 지하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물론 절대 믿어주지 않을 부분들은 제외하고.

 우리가 싸웠던 사진 속 시체들도 모두 실종자들로 확인되었다. 풀 경위는 증거품과 사진들을 받아서 돌아갔다. 그는 오늘 밤 내에 급습 작전을 실행할 것이라고 했다.

 풀 경위와 대화가 끝나자마자 레베카 쇼젠버그에게 연락했다. 나는 그와 협의하여 밤새 기사를 작성했다.

 

 내가 기사를 쓰는 사이, 주주하우스에서 들고나온 책을 제이덕이 읽었다. 그에게 이 책을 보여주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거기 파묻혀서는 나오려고 들질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그 책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이후 따로 부탁해서 요약본을 받을 수는 있었다.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 나이젤 블랙웰. 저자의 신원은 모호하고 출판사도 따로 적혀 있지 않다. 푸른색 합지 표지. 탐험가 나이젤 블랙웰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작성하였다. 각종 아프리카 종교 제의에 대한 설명. 끔찍하고 적나라한 묘사. 죽은 사람을 부리는 주문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뉴욕의 일들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 적어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풀 경위는 사일러스 은콰네를 체포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압수했다. 사교 집단의 잔악무도한 범죄와 경찰과의 유착 관계에 대한 폭로 기사가 1면에 실렸다. 힐튼 애덤스의 누명이 벗겨졌다는 것이 가장 다행스럽다.

 

 여기까지가 공적인 소식이고, 풀 경위에게 따로 들은 바로는 이렇다:

 당일의 출동에서 사일러스 은콰네는 체포가 되었고, 실종자들의 시체를 확인했다. 그러나 별다른 물건은 남아있지 않았다. 거대한 석판 안쪽도 비어있었다(어째서?). 은콰네는 그간의 연쇄살인과 실종사건의 범인으로서 응당한 처분을 받게 될 것이다.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입을 열지 않는다고 하지만.

 애덤스 부부는 감동의 재회를 했다. 레베카 쇼젠버그를 통해 그들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뉴욕을 떠나기 전에 한 번은 찾아가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을 돕는 것은 본성이다. 그들의 모습은 나의 오랜 믿음에 확신을 준다. 

 

 

 

 잭슨 엘리어스가 온 세상을 돌아다녔던 것은 죽음 숭배 교단이 전 세계에 퍼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뉴욕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고민 끝에, 칼라일 탐사대의 족적을 밟아 영국으로 향하기로 했다.

 

 영국행 배에 오르기 전, 노라의 입원 기간을 더해 총 3주의 준비 기간을 가졌다.

 제이덕은 여전히 미친 사람처럼 그 책에 푹 빠져있다. 집에 돌아가기로 약속해놓고 연락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인에게 전화가 와서 그를 바꿔주었는데 제대로 대화를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뭐라 몇 마디 하려다가 삼켰다. 그는 자기가 직접 이룬 가족이 있는 사람이고 그것은 내가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는 바다. 무슨 기분일지, 제대로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내가 무슨 권리로. 내가 뭐라고.

 노라는 제일 크게 다쳐서 2주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상처가 안심할 수 있을 만큼 아물자, 나는 출발 전에 집에 다녀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참에 노라가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서 좀 쉬다가, 마음이 바뀌었으니 아예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전보를 부쳐줘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혹시 후회하거나… 생각이 날까 봐 그래.

 생각은 항상 나는걸요.

 

  

  나는 그래도 몸이 성하니 그날 얻은 물건들에 대해 조사하며 돌아다녔다.

 

 -금고에서 발견한 사진은 상하이의 황푸강에서 찍힌 것으로 보인다.

 -크로노미터는 뉴욕보다 네 시간 빠른 영국 그리니치 표준시에 맞춰져 있다.

 -머리띠는 금속 재질인데 만지면 조금 따뜻하다. 긁어서 새긴 상형문자가 있다. 내가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 많지 않아 제이덕에게 연구를 부탁했다. 

 -나무 가면은 갈대와 깃털 천을 바구니처럼 엮어서 짠 목 부분 위로 끔찍한 얼굴 넷이 조각되어있다. 콩고 유물. 뉴욕대 식물학 교수를 찾아가서 재질을 알아보았는데, 이 수목은 지구상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고 한다. 

 -구리 그릇에 새겨진 기호의 의미는 불명이다. 역시나 제이덕에게 맡겼다.

 

 

 그러면서도 남는 시간은 지금까지 얻은 정보들을 정리하고, 경제적인 문제들을 처리하고, 비자를 확인하고 출발 계획을 짜는 데에 썼다. 아, 변호사도 바꾸고. 내 유언장도 조금 수정해서 램지 씨에게 맡겨뒀다.

 

 

 문득 병원에 있는 노라가 회계에 욕심을 부리던 것이 기억이 나, 어렵지 않은 몇 가지 일을 남겨놨다. 잔소리라도 하게 만들까 하면서 고를 수 있는 가장 못생긴 옷가지를 골라두는데, 그러는 스스로가 몹시 바보처럼 느껴졌다. 젠장, 제대로 위로하는 법 같은 건 모른다. 윌리엄이라면 이럴 때…

 

 윌리엄.

 우습다. 이제 와 가족 생각이 난다는 게. 나는 멈춰 있는 게 싫었다. 단단한 새 구두 밑창을 내버려두고 눌러앉는 것도, 쫓아야 할 세상이 저 바깥에 있는데 그게 보이지 않는 양 커튼을 치는 것도, 파도가 되지 않고 호수가 되려는 것도. 멈춘 세상은 분명 죽은 세상이다. 어떤 사람은 그냥 나서부터 이런 삶을 산다. 나의 길은 방향과 목적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림자는 한 방향으로만 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길이 나를 불렀다. 늘, 그랬다.

 이 애들은 이제서야 이런 삶에 뛰어들었는지 몰라도 나는 쭉 이렇게 살아왔다. 그러니까 제발 그러지 마,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말이 자꾸만 혀끝에서 맴도는 것이다. 그 지독함을 이미 알기 때문에. 한때 소중했던 것들이 이젠 내가 말하지 못하는 것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별것 아닌 듯 보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내 발목을 잡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기분. 끝에는 객사밖에 기다리지 않는 삶에, 사랑할 도리 외엔 없는 사람들이 가지는 나약하고도 가없는 의미. 오늘이 후회될 때 후회해. 인사할걸. 만나러 갈걸. 딱 한 번만 더 얼굴을 볼걸. 후회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지고, 바스러지고 굳어져서 이상하게 발을 걸친 바보만큼은 되지 마. 객지에 생길 무덤은 이름조차 남지 않는 편이 좋은 거다. 다 알고 있으면서.

 족쇄다. 걸음을 늦추는. 뒤돌아보게 하는. 나는 벌써 이만치 나왔는데. 이렇게나 멀리.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데.

 

 

 형.

 엘리. 뭐 하고 지내?

….

 왜 전화했어. 엘리. 너 무슨 일 있구나.

 ….

뛰었니? 숨소리가.

 나 또 배 타려고. 이번엔 오래 걸릴 거야. 

네 여정을 위해 기도하마. 너는 이런 말을 싫어했지만.

그래도 할 거잖아.

그래.

 

형. 

다음에… 봐. 내가, 돌아가면.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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