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연성 브라코이 섬의 스포일러가 있음 후반에 남캐끼리 좀 그렇고 그런거 있음...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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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벽에는 그 한마디가 쓰여있다. 그는 자부심에 차서, 한 번도 흔들려 본 적이 없는 자기 확신이 어린 눈으로 그 문장을 마주 보았다. 자신을 아는 것은 그가 겪어본 숙제 중에 가장 쉬웠다. 그는 그게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된다는 듯이 가볍게 벽을 짚으며, 나는 신의 아들이고, 비상하는 자라고 대답한다.

 북풍과 인간 여인 사이에서 난 쌍둥이 형제는 보레아다이라고 불렸다. 하늘만큼 푸른 눈을 가진 쪽이 칼리아스, 매의 날개가 달린 쪽이 시티르였다. 둘 다 반신반인이었지만 물려받은 것은 달랐다. 운명의 여신 클로토의 손길이 부드럽게 실을 꼬았다. 신성(神性)이란 본디 불공평하지. 그녀가 조소했다.
 형제가 나고 자란 곳은 지반이 높고 바다에 맞닿은 절벽 위의 도시였다. 시야를 어디로 던지건 언제나 넓고 푸른 하늘이 이마 위로 탁 트여있었다. 바람이 절벽과 절벽의 틈새를 휘돌아 달려갈 때면 언제나 깊고 음산한 음악이 울렸다. 어릴 적 시티르는 어머니의 무릎에 기대어, 달콤한 리라 연주라도 듣는 양 멀리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잠겨 들곤 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멀리서 울리는 섬뜩한 바람 소리였지만 소년에게 그것은 자장가고 약속이었다. 맹세이고 속삭임이었다.
 그는 걷기보다 날갯짓을 먼저 배웠다. 부드러운 솜털투성이였던 날개는 몸보다 빨리 자라서, 금새 뻣뻣하고 풍성한 깃털로 뒤덮였다. 오레이티아는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눈으로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그는 다루기 어려울 만큼 자기 세계가 뚜렷한 아이였고, 그녀는 그를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 아이에게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말과 사람 사이의 일, 태도와 방법 같은 것들뿐이었다. 시티르는 많은 것을 저 혼자 깨우친 양 굴었다. 제 동생과는 달리 단 한 순간도 아버지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한 편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말을 배우기 전부터 그는 바람의 속삭임을 들었으니까.


 바람과 보내는 시간은 찬란했다. 소년은 아버지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면 언제나 함께하는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신의 피로 데워진 몸은 가벼웠고 두 날개는 지치는 법을 몰랐다. 그는 그럴 수 있었던 순간부터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창공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얼핏 빈 듯 보이는 공간은 눈부신 에테르로 가득했고 바람은 그것을 순환하며 세상을 작동시키는 거대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사나운 북풍의 사랑하는 자식이었다. 내가 제피로스의 아들이었다면 좀 더 나긋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지. 서풍은 유려하고 따스하니까. 그러나 그의 신성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냉기로 지어졌다. 겨울을 불러오고야 마는, 목 뒤의 솜털을 쭈뼛 곤두서게 만드는 서늘한 숨으로부터. 한낮의 햇볕에 어깨를 그을어도 북풍이 손수 벼린 그의 날개는 녹아내리지 않았다. 깃과 깃 사이에는 언제나 차가운 바람이 맴돌았다. 먼 트라키아 땅을 넘어온 북녘 휘페르보레아의 향기가 거기 묻어있었다.
 그러니 단 한 순간도,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타고난 맹금의 눈은 바람의 결과 마디를 읽었고 날개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는 언제나 더 높이, 더 빠르게 상승했다. 인간의 공간과 신들의 공간, 그 어딘가 까마득한 곳까지 닿아 숨을 깊게 들이켜면 자유의 벅참과 공허감이 폐부에 가득 찼다. 그것을 오래 공들여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그가 지어온 생애의 전부였다. 
 자유로움. 길게 펼친 날개깃에는 저절로 그를 스쳐 간 바람의 무늬가 그려졌다. 그것이 그가 가진 신의 조각이 주는 영광이었다.

 반신반인의 생애가 으레 그렇듯 그는 양쪽 세계 모두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가진 인간의 단면은 그가 이 땅에서 영원히 발을 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남들만큼은 아니어도 그 역시 잠을 자고 식사를 해야 했다. 금수가 될 수는 없으니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문안과 작별의 규칙을 배웠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시시했다. 가지고 태어난 축복은 그의 등 뒤에서 언제나 빛났고 이는 단 한 순간이라도 숨겨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듯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쏟아지는 관심은 언제나 당연했고 그에게는 늘 엇비슷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어머니의 말대로 친구를 만들려고 애써도 보았지만, 그는 그들이 가진 번민과 고통에 결코 온전히 공감할 수 없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무리 설명한들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이방인의 감각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었다.
 운이 좋았던 지점은 그가 왕자이고 잔인한 재치를 타고났다는 것이었다. 그는 원하는 순간에 남의 기분을 띄우고 망치며 매끄럽게 이야기하는 법을 쉽게 깨우쳤다. 이후로는 모든 것이 훨씬 편해졌다. 대화란 그저 허공을 맴도는 장식품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그 행위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그래도 별반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 종류의 외로움이란 홀로 찬란한 자가 짊어지는 멍에 같은 것이었고, 그에게는 언제나 다른 선택지가 있었으니까.
 비상하는 것. 위대해지기를 꿈꿀 무렵부터 바람이 그의 귓가에 지나간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들은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수납하며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 별에 닿을 만큼 가까이 오르면 그 별자리에 얽힌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는 전갈자리의 꼬리로부터 도망쳤고 사수자리의 화살촉 끝을 피했다. 아. 별이 되고 싶다. 그는 생각했다. 그러면 다시는 땅에 발을 디디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결국은 고개를 젓고 만다. 한 자리에 영영 붙박이는 것도 싫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다른 영웅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그가 브라코이에서 두 나라 간의 전쟁을 막고 남의 사랑을 이루어주려고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무게 없는 마음의 발로였다. 세상은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들로 가득했고 영웅의 수요는 늘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여유가 되는 만큼 오지랖을 부렸다. 거기에는 특별한 의무감도, 신실함도 없었다.
 그러나 섬의 주인이 누구인가? 무쇠를 닮은 살육과 전쟁의 신이 산꼭대기에 강림하자 자그마한 세상은 곧장 그의 위압에 짓눌렸다. 공기가 창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피부가 시큰할 정도였다. 공기의 흐름을 예민하게 느끼는 날개는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레스는 진노했다. 그는 이들 영웅의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피와 살육이 없으니 훼방이고 반칙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산꼭대기로부터 바위들이 쏟아져서 인간의 몸을 짓누르며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제대로 된 무덤도 묘비도 얻지 못할 가여운 시신들이 바닥에서 으스러지고 바다 위에 둥둥 떠 올랐다. 전쟁신의 새 떼들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그 붉은 피를 들이켰다. 신들이 이렇게 잔인했다. 헬레네는 바닥에 이마를 짓눌렸고, 그녀의 웅변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너희가 내 발밑으로 와서 직접 얘기해보아라. 어디 들어보겠다.”

 선심을 쓰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 깊은 곳에서 차가운 바람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티탄 신족의 피가 가진 고질적인 오만 때문이었을까? 그럴 수밖에 없는 신의 앞이라 한들,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경건함 대신 비틀린 마음만을 느낀다.
 “아레스시여. 당신에게 아프로디테가 있고, 저희의 행동이 그녀의 뜻을 따르는 일인데 어찌 이렇게 가혹하게 구십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서풍을 흉내 내듯 부드럽다. 신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어 음절을 내뱉을 때마다 목구멍이 따끔거린다.

 “두 사람에게 자비를 보여주심으로서 당신의 그녀에 대한 애정을 증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언제나 신의 앞에서 대담했지만, 그걸 받아주냐 마느냐는 신들의 마음이었다. 헤르메스는 광대를 좋아했고 아레스는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그렇게 단순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듯한 신의 음성이 그의 말을 동강 냈다.

 “감히 네가 신들 사이의 사랑에 대해 논하느냐. 네가 그토록 오만한 것이 그 날개 때문이냐.”

 이어진 손짓 한 번으로 그는 바닥에 처박혔다. 어쩔 겨를도 없이 거대한 바위가 몸을 짓눌렀다. 자랑스러운 날개가 기이한 방향으로 꺾이며 부러진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권능이 또 다른 권능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다. 갈색의 날갯죽지에 붉은 피가 번졌고 살을 뚫고 부러진 뼈가 드러났다. 짓이겨지는 고통 때문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낮은 곳에 닿는 바람에서는 흙먼지와 피와 쇠의 냄새가 났다. 그는 절실하게 깨닫는다. 진짜 권능 앞에서 반신반인이란, 반쪽짜리 인간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반쪽짜리 신은 될 수 없다. 서늘하게 뺨에 닿아온 대지는 네가 죽어 돌아갈 곳은 결국 여기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벗어날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아닌 척하더라도 말이야. 입안에 쓰고 비린 맛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를 진짜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은 신의 태도였다. 타르타로스에 집어던지며 영혼까지 불태우는 격노가 아닌, 하루살이를 눌러 죽이듯 무신경한 분노. 그의 존재 이유를 꺾고도 아레스는 아무런 마음의 거리낌이 없을 것이었다. 그는 신의 청동 조각 같은 위엄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고 그 마음에 한 점 티끌로도 남지 않을 것이었다.
 몸의 고통보다 더 치욕적인, 겪어본 적 없는 굴욕의 냄새. 그 안에서 숨쉬기조차 힘겨웠다. 아버지. 저를 이런 곳에 내버려 두지 마세요. 제가 당신의 영광에 누를 끼친 적이 있습니까. 어째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제발…….
 그렇게 빌고 싶어도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그의 몸을 짓누르던 바위가 폭발하듯 산산조각 났다.
 시간이 장난을 치는 듯 찰나의 모든 일이 느리게 흘러갔다.
 누가 감히 신의 벌을 거스르는가? 감히. 고통을 앞지르는 놀라움에 그는 힘겹게 고개를 움직였다. 부서진 돌의 파편들이 일으킨 먼지와 흙 보라 너머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러다 흐리던 시야가 서서히 또렷해지면서,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팔뚝에 핏줄이 일어날 정도로 세게 몽둥이를 쥐고, 그의 앞을 막아선 채로, 아레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그런 식으로 올려다보는 것. 인간에게 외경하는 마음이 인 것. 신에게 반항하는 자를 목도하는 것. 누군가를…….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상하게 눈이 뜨겁고 시려서 그는 속절없이 인상을 썼다. 그러나 시선을 뗄 수는 없었다. 어딘지 아득히 먼 곳에서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심장에 박히는 아픔. 이 순간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너무나 쉽게 이해해버린다. 레온티오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신들이 이렇게 잔인했다.

 

 


 

 

 일행은 다시금 항해 길에 올랐다. 그는 그 상황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보살핌을 받았다. 날개에는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았다. 상처를 돌봐준 선원은 한동안 날개를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새를 치료해본 사람은 있어도 날개 달린 반신을 치료해본 사람은 없으니 그가 나을지 말지는 미지수였다. 운명의 여신께서 결정할 일이죠. 선원은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들었더라면 분명 코웃음을 쳤을 텐데. 지금은 씁쓸하게 끄덕이는 게 고작이었다.
 배에서 시티르가 즐겨 쉬던 자리는 높은 망루나 돛대 위쪽이었는데, 지금의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갑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절실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럴 정성을 들일 기운도 모자랐다.
 자신을 감당하는 일이 처음으로 벅찼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색을 잃은 잿빛으로 보였다. 오이지스가 다정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불안의 여신이 그 자신의 목소리가 되어 속삭였다.

 ‘만약 다시 날아오를 수 없다면 나는 뭐지?’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벽에는 그 한마디가 쓰여있었다. 나는…… 그는 비참한 탄원자가 되어 손톱으로 벽을 긁었다. 자기 확신은 신기루처럼 무너졌다. 고뇌가 그를 한입에 집어삼켰다. 그는 손쉬운 먹이였다. 그를 평소처럼 움직이고 말하게 하는 것은 하늘의 천장에 닿았던 자존심 하나뿐이었다.

 대부분의 선원은 그를 어려워했고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더했다. 그에게도 달가운 일이었다. 관심 없는 이들의 시선까지 신경 쓰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헬레네가 다가온 기척을 느끼자, 그는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내주었다. 그녀는 시티르가 배 안에서 존중하는 몇 안 되는 인간이었다.
 동정일까? 그는 생각한다. 누군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긴다니, 감히, 그런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약하고 어린 면이 그런 관심을 갈구했다.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자유의 선택지는 부러져서 그의 등에 짐짝처럼 매달려 있었다. 시티르는 평소 같은 불투명한 웃음을 머금고 헬레네를 보았다. 마주 돌아오는 것은 정중한 전사의 시선이다.

 “괜찮나?” 
 “저야 멀쩡해요. 헬레네는 좀 어떤가요?”

 그렇게 물으며 시티르는 그녀의 이마에 붙은 아마포 붕대에 시선을 둔다. 신에게 해코지를 당한 것은 그 하나만이 아니다. 그녀에게도 흉터가 남을까? 또 한 번 부아가 치밀기 전에 그녀가 그의 주의를 환기한다.

 “나야 익숙하지만. 자넨 좀 다르지 않나.”
 “뭐가 얼마나 다르겠어요?” 그는 가볍게 대꾸했다.

 하지만 달랐다. 두 사람 다 그걸 알았다. 카산드라의 후예는 신이 준 굴욕의 맛을 입에 물고 태어나 씹고 되새김질하고 짓이기며 살아왔다. 그녀는 단단하게 디뎌진 땅 같다. 아하, 아는 맛이라는 건가요? 그의 속내에서 불쑥 어린애가 튀어나와 이죽거린다. 말씀 좀 해보세요,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양 살 수 있는 거죠? 어떻게 그걸 다 감당하나요?
 한 손이 배의 난간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꺼내 물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조잡하고 유치한 분노는 애초부터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니까. 헬레네에게 화를 내는 것은 부당하다. 자신은 지금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짜증스러울 뿐이다. 고약한 상태를 기분으로 착각하기에는 그는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시선이 먼 수평선을 향했다가 돌아온다.

 “헬레네. 걱정해주는 건가요?”
 “당연히 걱정되지. 힘든 일을 함께 겪지 않았나.”

 이쪽을 똑바로 응시하는 곧은 눈동자가 보인다. 거기 비친 자신은 굴절된 상(狀)이다. 호의, 그 이면에 담긴 뜻을 알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약점이 드러난 상태인 그는 제 상처를 핥는 짐승처럼 자기도 모르게 벽을 세운다.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상상한 것보다 딱딱하다.

 “그럴 것 없어요.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앞으로도.”

 순간, 헬레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마디가 단단하고 심지가 있으며 언제나 옳은 방향만을 가리키는 손이다. 남을 지키는 사람의 것. 그의 당황하는 기색에도 아랑곳없이, 헬레네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를 본다.

 “나는 단 한 번도 자네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네.”
 “…….”
 “자네가 있어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 그런 생각 말아. 다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예상하지 못한 위로에 그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파도가 간헐적으로 뱃전을 때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메운다.
 이상한 기분이다. 그 잔물결이 가슴 안쪽까지 번지는 것 같다. 파도는 따뜻한 색깔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세련되지 못하게,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왕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옥좌는 솔직함으로 닦이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전사들과 보낸 몇 년의 세월도 무관심한 그의 태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아무런 말도 내보일 수가 없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그를 읽는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린다. 평화로운 침묵이 감돈다. 그는 울적한 표정을 더는 숨기지 않고 얌전해진다. 소용이 없다는 걸 안다.

 “어쩌다 이렇게 멀리까지 나왔나?”

 문득 파도 소리와 어울리는 물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아무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는 갈라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어떡하죠? 불안의 목소리가 끈질기게 그를 쫓아와 귓가에다 속삭인다. 난간에 기댄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당신은요?”
 그의 물음에 그녀는 먼 곳에 시선을 둔 채 대답했다. 세상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도 있다고. 실은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산다고. 어떤 옳은 일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자신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전쟁은 천 명의 사람에게 천 가지 모양이고 그것은 그녀에게 당연했다. 이유가 없어도, 애써 영광을 좇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 사람은 다시 밑바닥에서 출발하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스스로 빛을 낸다.
 그게 그녀가 가진 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는 마른 침과 함께 몇 마디 투정을 삼켰다. 당신처럼은 못 해요. 날지 못하는 삶은 살 수 없어요. 그럴 자신이 없어요.
 다행스럽게도 그런 말들은 그의 안에서 혼자 멈추었다. 헬레네가 품위를 지키는 사람이기에 그 또한 가까스로 자신의 것을 보전한다.

 

 


 

 

 레온티오스를 다시 쳐다보는 일은 힘겨웠다. 그는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시티르의 머릿속에서 그날의 일은 지워지지 않았고 신전 벽에 새겨진 손톱자국처럼 남았다. 해묵은 상처의 껍질이 벗겨지듯 그 기억도 금방 빛이 바랠 줄 알았는데. 전부 그의 순진한 기대일 뿐이었다. 어쩌면 평생 지워지지 않을지도 몰라. 그가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낭패감이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레온티오스는 가끔 들러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병실 대신 쓰는 자그마한 선실에 레온티오스가 들어서면 주변이 가득 찼다. 서슬 퍼런 존재감이 의도 없이도 공기를 가볍게 눌렀다.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지 않아도 돼요.” 시티르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티르의 말에 대놓고 늘어진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큰 손을 남의 머리 위에 올려 마구잡이로 머리칼을 흩어놓았다. 표현 방식이 투박해서 그렇지 거기 위로가 담겨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음 한쪽이 참을 수 없이 울렁거리고 간지럽다. 
 시티르는 잠깐 그의 손이 닿았다 떨어진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꺼내 보여야만 하는데 어려운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었다. 그는 한참을 더듬어 찾아낸다.

 “저,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힘겹게 꺼낸 것이 다 허탈할 정도로, 돌아온 대답은 호쾌하고 퉁명스러웠다.

 “전쟁에서 무슨 감사 인사야. 살아남았으면 됐지.”

 그는 늘 이런 식이다. 뭐 하나 어려울 것 있냐는 듯이. 그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시티르는 예전 같은 차분함을 유지하려면 애간장을 쥐어짜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도 마음에 짐으로 남는 게 싫어서요.”
 “야. 그게 왜 짐이야?” 마치 그런 갑갑한 말은 난생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투였다.

 “같이 싸우는 사람인데. 너도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도왔을 거잖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으리라 예상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런 말은 아니었다.  레온티오스 씨도 정말 특이한 사람이에요. 시티르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과 함께, 정돈되지 않은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런 말을 잘도… 참 쉽게 하시네요.”

 신에게 반항할 거라고?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지? 그는 이해가 안 됐다. 사람이 사람에게 당연한 듯이 하는 기대치고는 숨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몸이 떨리고 당장에라도 가라앉아 죽어버릴 것 같은데, 그는 무엇 하나 무거울 것 없다는 듯이 말을 했다. 시선을 떨구자 그의 손에 감긴 붕대가 보였다. 신의 불꽃이 할퀴고 간 상처였다. 신에게 해코지를 당한 것은 그 하나뿐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굴 수 있는 거지, 당신들은?
 마음 안쪽에서 무언가 울컥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가 한 것처럼 당연한 듯이?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확신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뭐라고. 너희가 대체 뭐길래. 시티르는 겁에 질려 있었고 그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짜증스러웠다. 내가 정말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라면, 사람 잘못 봤어. 꼬인 속내에서 어린애가 빈정거린다. 그는 참지 못하고 내뱉는다.

 “절 그렇게 믿어요?”
 “동료를 안 믿으면 대체 누굴 믿어?”

 가져본 적 없는 어둡고 저열한 질투심이 타오른다. 한 편으로 너무 찬란하고 눈부시다. 시티르에게는 이 모든 감정이 낯설고 괴롭다. 무슨 짓을 해야 이 사람을 동요시킬 수 있을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건 너무 쉬운 일이었는데, 갑자기 전혀 할 줄 모르게 된다. 망설임 하나 없이 돌아오는 일직선의 대답에 그는 거의 바보가 된 기분이다.

 “누가… 그렇게 솔직하게 얘기를 해요.” 시티르는 머뭇거렸다. 이 사람이랑 더 얘기하면 안 돼. 부러진 신의 일부로부터 엄중한 경고가 번졌다. 너 지금 엉망이야. 분명 후회할걸. 그러나 그의 다른 부분은 자기가 지금 뭐에 말려드는 줄도 모르고, 여기서 쭉, 계속, 그를 보고 듣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면 그렇게 안 했겠지. 하지만 너는… 우리는 좀 다르잖아.”

 …….
 이건 또… 무슨 말인데?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그는 생각했다. 머리가 어지럽다 못해 아찔해서 쥐어뜯고 싶었다. 마음 안쪽에서 멍청한 희망이 부풀었다가 꺼졌다. 남이 던져주는 무심한 호의를 붙잡고 구성맞게 구는 건 그의 방식이 전혀 아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짜증 나. 그런데 난 지금 이게 필요해. 절실하게.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거예요?”
 “안될 건 뭐가 있어.” 레온티오스는 덤덤하게 대답한다. 
 시티르는 당황스럽고 화가 난다. 그의 거리낌 없음에, 그 말에 담긴 사심 없는 호의에. 자기가 자기답지 않게 굴고 있다는 사실에. 자기가 힘주어 그어둔 선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에. 자기가 한낱 인간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린다는 점에. 누가 제 안을 끔찍하게 어지럽히고 제멋대로 거기서 뛰어놀게 두기는 싫었다. 그것도 이런 무신경한- 사람 때문에 혼자만 조급해지고 속이 타는 건 절대로 사양이었다.
 이미 그러고 있다는 게 제일 미칠 지경이지만. 그는 입술을 깨문다. 

 “레온티오스 씨는 가끔 자기가 하는 말이 어떻게 들릴지 전혀 생각을 안 하고 말씀하세요.”
 “어떻게 들리는데?”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시티르는 오래도록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을 굴린다. 그야 그렇고 그렇게 들리는데요. 이렇게 말할 수는…… 하지만 그는 그가 오래 골몰하고 품위 있는 말을 고르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말하기 싫으면 됐어.”

 뚝,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진다. 이거 전부 멍청한 짓이야. 자기 자신을 진짜 바보로 만들 셈이야. 그래도 참을 수가 없다. 평소라면 몸을 조금 위로 띄우면 될 일이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시티르는 어색하게 발꿈치를 들고, 그의 몸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긴다. 입술과 입술이 닿는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뛴다. 맨 처음으로 고속 비행을 하고, 곤두박질치듯 활강했을 때 같다. 그 감촉은 어릴 적 상상한 넥타르의 맛처럼 오묘하고 복잡하고 달큰했다. 신들의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끝이 있는 모든 순간처럼 슬펐다.
 영원 같은 찰나가 지났다. 이대로 돌이라도 되었으면. 그러면 많은 일이 훨씬 편해질 텐데. 그는 잡아당겼던 손을 놓고 뒤로 조금 물러났다. 레온티오스는 조금 놀란 듯 한쪽 눈썹을 꿈틀해 보일 뿐이었다. 이어진 감상은 단순했다. 그렇게 들렸어?
 반면 시티르는, 방금 그 한 번의 행동만으로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그는 겨우겨우 피로 섞인 웃음을 지어 보이며 핀잔을 준다. 몇 번을 대답해야 만족하는 거예요?
 만족이라. 애당초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남의 말과 행동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 깊이 궁리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다. 생각 못 한 재미있는 일이라는 듯, 그는 호탕한 웃음을 짓는다. 

 “뭐, 나쁘지 않지. 이렇게 하고 싶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안 놀라네요.”

 평소 그의 반응을 생각하면 의외였다. 자신이 알던 사람이 맞는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는 데 움켜쥔 손마디가 축축하다. 시티르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그가 뒤로 물러난 만큼 성큼 다가와서 이쪽을 본다.

 “서로 재밌으면 됐지.”

 시티르의 입가에 곤란한 미소가 떠오른다. 아, 그거참…… 재미있겠네요.




 시티르는 제 영광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이 다른 인간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 내던져져도 전사보다는 때와 장소를 잘못 찾은 어린 신처럼 보인다는 것. 그것은 장점이자 약점이었다. 그는 새매들이 흔히 그러하듯 눈가가 짙었고 팔다리가 길었다. 살결은 햇볕 아래 오래 두어 살짝 녹은 밀랍처럼 말랑했고 코를 대면 바람 냄새가 났다. 그러니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 말을 그렇게 자조적으로 떠올린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사랑받는 데는 익숙했고 사랑하는 데는 영 젬병, 젬병이었다.
 정신은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았고 온몸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자세 때문에 무리가 가서 뼈마디 여기저기가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힘든 내색을 하기에 그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되는 도피란 착각이고 기만이며, 그저 머릿속이 한 사람으로 가득 찰 뿐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잠시도 멈추기 싫었다. 소금기 어린 냄새. 겹쳐 닿는 맨살은 단단하고 거칠었으며 흉터 위를 손으로 쓸면 우둘투둘했다. 그가 자기 쪽으로 몸을 숙이자 짙은 사향이 물씬 넘쳤고 뜨거운 심장이 피부와 근육 너머에서 멈춤 없이 뛰며 피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 탄탄한 몸에서 흥분의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충분히 능숙했지만 사실 그리 대단한 기교도 필요 없었다. 단순한 몸짓 하나로 충분했다. 시티르는 이미 사로잡혀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신세였다. 이름처럼 사자를 닮은 야성 어린 그 눈이 이쪽을 바라보기만 해도 저 깊은 곳에서 전류가 튀었다. 자기 것이 아닌, 잠깐 머물 뿐인 열락을 놓치기 싫어 숨이 차도록 들이마셨다. 누군가를 바란다는 건 이다지도 낯선 감각이었다. 그가 가진 인간의 물성(物性)이 몇 번이고 그를 배신했다. 목이 잠길 정도의 희열에 젖어 있으면서도 나약한 부분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제 살을 뜯어 먹는 에리식톤이라도 된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내가 내가 아니었더라면 하고 바란 적이 없었다.
 재미있을 수 있을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힘겨운 실험이었고 그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상처가 있는 손이 그의 머리카락 사이를 가볍게 흩었다. 밤물결을 닮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서 굽이쳤다. 방안은 아직 가시지 않은 잔열 때문에 후끈했고 습했다. 레온티오스는 천장을 보며 드러누운 채였고, 시티르는 그 옆에서 오래 참았던 사람처럼 긴 숨을 내쉬었다.
 줄곧 그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레온티오스 씨는…… 살면서 무서웠던 적이 있어요?”

 이 물음 하나를 꺼내기가 몹시 어렵고 벅찼다.

 “생각해본 적 없어.” 

 그 목소리에 가라앉아 가던 상념이 다시 요동친다. 시티르는 참지 못하고 상체를 일으켜 그를 내려다보았다. 대답하는 얼굴을, 표정을 읽고 싶었다. 자신이 거기서 무얼 찾고 싶어 하는 지는 몰랐다. 고뇌? 망설임? 미약한 달빛을 머금은 맹금의 눈이 감출 수 없는 당혹과 혼란으로 흔들렸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요? 그냥 인간인데도요?” 
 “그런 걸 생각하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지금은 생각 안 해.”

 명쾌한 말이었다. 그는 그가 원하던 먹이를 던져주지 않는다. 그저 한없이 자기 자신이다. 끔찍하게 얄밉고 안달이 날 정도로 사랑스럽다. 제 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한심하다. 평범한 인간처럼 바닥에 처박히는 것이 두려워 번민하면서 인간을 부러워하고 있다. 왜 내게 없는 것이 그에게는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사랑한다.
 레온티오스는 정자세로 누워있던 몸을 돌려, 시선을 그에게로 향했다. 호박금 색의 눈동자가 마주 보았다. 밤을 보는 짐승의 것. 삼키고 탐색하는, 힘의 우위를 쉽게 점지하는 시선. 날개가 부러진 매와 배부른 사자. 시티르는 그의 눈에 담긴 우월감을 한참 전부터 읽고 있었다.

 “넌 무서운 거 있어?” 그는 빙그레 웃고 있다. 서로 재밌으면 됐지. 그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아서 시티르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다시 표정을 갈무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스쳐 가는 답은 많았다. 다시 날지 못하게 되는 것.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이 되는 것. 미래를 모이라이의 손에 맡기고 그 불확실함만을 믿는 것. 지금 당장은, 당신 같은 사람한테 빠지는 거요. 

 “저는 레온티오스 씨처럼 솔직하게 얘기 못 해요.”
 “그래, 관둬. 말하기 싫으면.”

 묵직한 손이 그의 손목 위로 얹어진다. 시티르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구명줄 같기도 올가미 같기도 하다. 하지만, 레온티오스 씨. 그거 아나요?

 “할 말 없으면 한 번 더하자.” 

 나는 혼자 빠져 죽지는 않을 거예요. 그는 생각한다.

후기연성...이라고하나 시나리오 스포있음~~ 군왕 시점으로 세션전까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후반에 조금 그렇고그런거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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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자락을 지그시 당기면 돌아다보던 형님의 앳된 얼굴을 생각한다. 그 작은 목과 둥근 이마. 그런데도 어딘지 넓고 어른스러워 보였던 한 소년을 생각한다. 그가 처음 제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얼마나 정답고 기뻤던가. 무겁게 짓눌린 어깨가 자신을 외면할 때 자신이 느낀 건 상실감이었던가. 한 소년이 청년으로 자라기까지 얼마나 많은 목숨이 필요했던가. 그 많은 피가 그 손을 어떤 빛깔로 적시었던가.
 형님은 어째서 변해버렸을까? 그는 먼저 답을 아는 질문을 했다. 드넓고 화려한 대현의 황실, 그 몸을 감싼 비단옷과 그가 보고 듣고 입는 모든 것이 형님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변한 그를 원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답을 모르는 질문이었다.

 황궁에서의 생활은 외줄 타기 묘기와도 같았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가차 없는 천 길 낭떠러지가 기다렸다. 귀에 닿은 속삭임, 멀거니 흘기는 눈빛 한 번만으로도 사람의 생사와 영욕이 오갔다. 유하의 어머니, 선황의 총애를 받는 리빈은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눈에 제 자식의 재질을 알아보았다. 이를테면 또박또박 되물어온 순간. “그러나 옳지 않습니다.” 받은 두구꽃 한 송이도 버리지 못할 때. 한 점 티끌의 의심도 없는 눈이 남에게 감당 못 할 도움의 손길을 뻗을 때.
 약점이 되는. 황궁에서는 개나 가지면 좋을. 제 목숨을 위협하는 자질들.

 “어마마마는 제가 지켜드리겠나이다.”

 아이가 책상에 기댄 리빈에게 다가와 그렇게 속삭였을 때, 그는 한 손을 들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런 말은 누구에게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사랑(四郞). 특히 네게 그럴 만한 힘이 없을 때는.”
 “소자, 그러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네 뜻은 기특하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리빈은 언제부터 책상 위에 놓여있었는지 모를, 작은 손이 정원에서 꺾어왔을 부드러운 자귀꽃을 어루만졌다. 

 “명(命)을 아는 자는 위험한 담 아래에 서지 않는다 하였다. 네가 살아남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그런 다음 남에게 마음을 써도 늦지 않아.”

 리빈은 생사를 다투는 각축장으로 자신과 아이를 내모는 대신, 그저 그가 그 무른 성정의 일부만이라도 지키며 연명하기만을 바랐다. 유하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그 뜻에 따랐다. 그는 맞지 않는 갑옷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듯 남의 비위를 맞추며 재능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제대로 된 추위를 알지 못하던 어린애도 그렇게 궁에서 커갔다. 당시에는 반도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말뜻을, 그는 곧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황궁 안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파도가 쳐서 그가 사랑하는 것들이 다치고 죽어 나갔다. 절로 거짓말이 늘었다. 
 그 가르침 덕분에 해유하는 보이는 것 이상을 보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한량에 겨우 못 미치는 넷째 황자로서 있는 듯 없는 듯 자라날 수 있었다. 수많은 피보라가 그저 가벼이 옷깃에 튀는 핏방울처럼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손위 두 형제가 유건에게 목숨을 잃었을 때도, 그는 살아남았다.



 그날 목에 겨눠진 칼끝을 생각한다. 핏줄을 따라 서리가 에일 만큼 추운 겨울날이었다. 달마저 냉기에 질려 버석거렸고, 사람의 마음이 얼어붙어 형제간의 온정과 미덕도 빛을 잃었다. 숨을 길게 내쉴 때마다 가까운 검날에 맺히는 제 입김이 보였다. 그 검날은 그 숨결마저 도려낼 것처럼 형형하고 날카로웠다.

 시간은 결코 배신하는 법이 없으니 만년을 정정할 듯했던 부황도 시들었다. 회광반조의 부황이 찾은 자식이 그의 적장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처마 밑에서 작게 피어나다 꺼졌다. 그래서였을까. 불안이 그 남자를 좀먹었을까. 어디까지가 오롯이 제 것인 광기이고 어디까지가 불안이 낳은 퇴폐인지 저 자신조차 알 길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 실은 아주 멀쩡히 제정신인지도 몰랐다. 유하가 타고 나지 못한 귀한 재질이 그의 형에게는 있었던 것인지도. 유건의 행동은 단순한 광기라기에는 늘 일목요연하게 영리했고 선처럼 계획적인 데가 있었다. 적어도 친왕 시절까지는 그랬다. 이러한 절차는 짐짓 피에 미친 자의 행동처럼 보여도 철저히 계산된 결과일 수 있었다. 다 이겨놓은 장기의 마지막 수를 두듯 유건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하가 언제 남에게 위협이 된 적이 있던가? 어려운 차례는 앞서 다 넘긴 터였다.
 이미 유리와 유소의 피를 먹은 검은 만족스러울 정도로 곧게 뻗어 그의 목까지 가닿았다. 

 “어떠냐, 유하야. 내게 할 말이 있느냐?”
  
 그리 물으며 내려다보는 얼굴에 달빛이 가려 그림자가 드리웠다. 마주 그를 올려다보는 찰나 원망도 두려움도 아닌 슬픔이 유하를 짓눌렀다. 문득 두 눈을 감고 그 검날에 뛰어들고 싶은 기묘한 충동이 일었다. 같은 순간, 그는 자문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었다. 소년은 몸을 낮추어 엎드렸다. 무릎이 접히고 이마가 바닥에 닿았다.

 “형님.”
 “오냐, 말해 보아라.”
 “저는 단 한 순간도 그 자리를 넘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이었다. 
 “대현 황실의 황제 자리는 저 같은 아둔한 어린애가 탐내기에는 너무 과분하지 않습니까.”
 그는 그렇게 믿는다.
 “천하의 주인이 될 몸은 형님뿐이니 저는 그저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거짓말이어야 했는데. 왜 하필이면 지금일까. 옷자락을 지그시 당기면 돌아다보던, 형의 앳된 얼굴이 스친다. 그 순간의 의미를 그는 아직은 모른다.

 유건은 침묵에 잠겼다. 차분하고 비굴한 굴종의 선언 끝에, 유하는 일견 마지막 호흡이 될지도 모르는 몇 마디 숨을 흘렸다.
 돌연 유건이 폭소를 터트리며 정적을 깨뜨렸다. 그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무릎까지 쳐가며 웃었다. 유하는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기다렸다. 정자가 떠나가라 한바탕 웃음이 쏟아진 뒤에야, 유건이 유하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일어나거라, 소하야. 내 그저 농을 친 것이야.”
 거짓말.
 “내 어찌 소중한 아우를 그리 심하게 대하겠느냐?”
 거짓말.
 “내 너의 마음은 익히 알고 있으니 현을 위해 요긴히 쓸 것이다.”
 반쯤은 거짓말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군장을 질 만큼 장성하자 해유하는 곧장 군사와 함께 북방의 영토로 떠나야 했다. 살려둔 목숨을 귀하게 써서 싸우다 죽으라는 안배였다.
 해유하는 자라면서는, 어머니를 위해 오직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해야 했다.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자진이나 다름없었다. 그리 마음을 먹자 궁에서 마주치는 모든 미진하고 하찮은 죽음이, 이다음에는 필경 그의 차례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것이 그의 고질병이었다. 그는 마음 한편으로는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적어도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래서였을까. 싸움터에 온몸을 내던지는 하루가 궁에서의 십여 년 세월보다 나았다. 그것은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처럼 보였다.
 북방의 칼바람이 보드랍고 연약했던 뺨을 찢고 흉터를 아로새겼다. 어떤 날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며칠을 꼬박 말을 달려야 했고 또 어떤 날에는 버석거리는 모래가 씹히는 식사를 했다. 이 머디 먼 북쪽 땅에서는 한여름부터 눈이 왔다. 하지만 그곳에서 보내는 어떤 겨울밤도 제 목에 칼이 드리웠던 그 날만큼 춥지는 않았다. 몸에 박혀온 활촉이 마음에 에인 칼날보다 아프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이렇게 멀고 삭막한 땅에 다다라서야, 그는 잠시나마 자유로웠다. 상상만 했던 자유의 언저리를 만지고 더듬어 그 모양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스스로 죽을 자리를 고르지는 못했으나 이제는 그 방식이라도 직접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운명이 야속한 탓인지.
 아니, 어쩌면 하늘도 알아서일까. 죄 있는 자에게는 명예로울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해유하는 죄인이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람은 죄였으니.


 


 유하는 처음 자운명음을 눈에 담았을 때를 떠올렸다. 유건의 혼례식 이후 왕부에 따로 예를 올리러 갔던 날이었다. 그때의 명음은 왕부에 갓 시집온 새신부였다.
 아직도 그날의 모든 것이 잡힐 듯 눈에 선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두어 조각 떠서 흘러갔다. 저만치 멀리, 그녀가 정원의 꽃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자그마한 서책이 들려 있었고, 국화가 수 놓인 상앗빛 웃옷에 단아한 감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수묵화로 그린 듯한 사람이었다. 섬세하고 짙은 속눈썹 아래 그늘진 눈가가 붉게 물든 채였다. 그 시선은 어딘지 먼 곳을 향했다. 닿을 수 없는 어떤 피안을 바라보는, 그 눈에 담긴 영원한 슬픔. 소년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 자리에 덜컥 발이 묶였다. 다만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찰나 매화 꽃잎 하나가 날려 그녀의 귀밑머리로 떨어졌다. 백옥으로 깎은 흰 손이 가만 제 살결을 더듬더니, 그 위로 내려앉은 꽃잎을 찾았다. 엄지와 검지손가락 끝이 모여 그 작고 가냘픈 꽃잎을 짓이겼다. 의식하지 않은 듯한 그 모든 행동이 우아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녀의 주변을 얇은 막처럼 감싼 유장한 슬픔에, 그 작은 몸짓에, 주변의 모든 소란스러운 것들은 색을 잃고 순식간에 배경으로 스러졌다. 그 세계에는 오로지 그녀만이 존재했다. 동시에 그녀는 이 현실에서 아득히 떨어져 있었다. 그 순간부터 소년에게 온 세상의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었고, 모든 의미는 의미를 잃었다.
 어린 황자는 붉어진 얼굴을 숨길 생각도 못 한 채 속절없이 뒤돌아 도망쳤다.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기억을 자신이 가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드높고 별이 짙은 야만의 밤하늘 아래서,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보석인 양 나유타의 시간 동안 아끼며 돌려보고 되짚고 들여다볼 적마다, 그는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만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그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우연한 몸짓을 눈에 담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는 그녀에게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었을까? 다른 길을 갈 수 있었을까? 그녀를 평범히 또 무심히 형수로 대하고, 후에 다정한 말씨에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을 만나, 백년해로를 약속하며 함께 매듭을 묶고 그리고, 그 여인을 군왕부의 안주인으로 삼아, 두 사람을 똑 닮은 아이를 가지고…
 생각이 여기까지 흐르면 그는 결국 힘겹게 고개를 털어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것 같아서.
 그만큼 그녀는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자신에게 영원한 족쇄가 채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처음 그녀를 바라본 순간부터 유하는 명음을 연모하게 되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관계였는데도 그리는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여인의 이름을 입속말로 되뇔 때는 뱃속에 나비가 흩어졌다. 입에 들어오는 가장 신 탱자도 다디달았다. 줄곧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곽휘원의 텅 빈 편지를 이해했다. 정인에게 쓰는 편지에 실수로 백지를 한 장 담아 보내었다는 실없는 남자의 이야기였으나, 나 역시도 직접 배를 갈라 내보이는 것이 아닌 이상, 일평생 작고 미천한 몇 마디 줄글을 배운 것만으로는 이 마음을 감히 어디에도 꺼내다 놓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했다.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그렇게 고요히 그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지나자 어리지 않은 유하는 더는 그녀 앞에서 도망가지 않았다. 그 앞에서 감히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온갖 시고 쓰고 달콤한 색으로 팔랑거리던 나비들을 쇠로 된 함에 넣고 조용히 그 문을 걸어 잠갔다. 그 안에 든 것이 짓눌린 채 저 혼자 얼마큼 부풀고 커지건, 그는 외면했다. 천진했으나 바보는 아니었기에, 감히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미몽은 품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놓지 못한 바람이 있다면 그저 지켜보는 것. 적어도 먼 발치에서라도, 그녀가 사랑하지는 않을지언정 그녀의 삶을 평안케 하는 모래로 쌓은 황실을, 그 명예를 지키는 것…….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자기 손으로 무너뜨린 날은 머지않아 찾아왔다.
 그날 유하는 수행원 두엇만을 데리고 잠시 황궁에 들렀다. 부름을 받고 이 주 정도를 머무를 예정이었는데 일정이 엇갈려 황제는 지방 순시에 나가고 없었다. 기다리는 일은 익숙했으니 유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해 봄 청명원에는 한참 배꽃이 만발하여 온 사방에 부서진 옥가루처럼 날렸다. 유하는 술병 하나만을 든 채 배를 탔다. 황제의 동생이라는 이름이 주는 몇 안 되는 재미가 바로 이 실없는 풍류였다. 그는 신선놀음인 척하는 장난을 이 나이까지도 좋아했다. 황후가 그날 옥음루에 머무른다는 사실을 그가 알았던가? 배에 탈 때부터 이미 술이 올라 있었기에 기억은 가물거린다. 그러나 알았더라도 감히 직접 얼굴을 볼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그저 먼 발치에서,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안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는 호수 한가운데서 울리는 칠현금 연주를 들었다. 그녀였다.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밤바람이 화답하듯 고요하게 물살을 밀었다. 유하는 몇 번인가 노를 젓다가 마음이 뜨자 이내 그만두고 배 위에 드러누웠다. 그는 입술을 병에 대고 연거푸 들이켰다. 마음이 차고 또 뜨겁게 젖어 들었다. 술보다 그 음색에 더 취했다. 이 곡이 끝나면 돌아가야지, 이다음 곡이 지나면 뒤돌아야지. 그러다 보니 어느새 조각배에 물이 찼다.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호수의 반절을 넘게 건너온 뒤였다. 청명호는 수면 아래로 연꽃 뿌리가 엉켰으며 꽤 깊은 못이었다. 만취한 그는 당황해서 휘청거렸고 그 순간 조각배가 넘어졌다. 첨벙! 물소리가 호수를 크게 울렸다. 연주가 뚝 멈췄다.
 해유하가 구사일생으로 옥음루에 다다랐을 때 눈앞에는 놀란 송하의 둥그런 눈이 보였다. 제 주인을 참으로 곤란하게 할 테니 저 애가 나를 미워해도 할 말이 없겠다, 아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명음은 놀라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날 그가 한 어떤 행동도 그녀를 놀래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차분하게 송하를 시켜 난로에 탄을 태우게 하고 마른 옷가지를 준비시켰다. 아득히 멀리서 탁, 문을 닫는 기척이 났던가. 한참을 떨다 정신을 차리니 시녀들은 보이지 않았고 그녀만 남아 그의 앞에 다과와 과일 몇 개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방안에는 훈훈한 공기가 돌았다. 잔뜩 젖었던 그의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고였다. 창밖 너머에서 이따금 바람 소리와 함께 미약한 풀벌레 소리가 울렸다. 옥음루 한구석에는 아직도 그녀가 타던 칠현금이 놓여 있었고, 탁자 위에는 다과 접시와 함께 술잔이 보였다. 의아한 눈빛을 마주하자 그녀가 덤덤하게 말했다.

 “좋은 날을 그냥 흘려보내기 아쉬워 독작하던 참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녀의 두 뺨에 진 불그스름한 그림자가 촛불 때문이 아니라 취기 때문인 것도 같았다. 그런데도 그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곧고 발라서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어찌 이리 늦은 밤까지… 주무시지 않고요.”

 그가 더듬더듬 여쭈었다.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몸이 떨리는 듯하니 군왕도 한잔하시겠습니까.”

 한참 전부터 혼이 날 것을 각오했는데도, 명음은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없이 나긋한 얼굴로 물어왔다. 평소의 그녀와 달랐다. 이런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그러니 이건 아마도 꿈인 거겠지, 호수 바닥에서 마지막으로 꾸는.
 그런 생각이 들자 유하는 조금 대담해져서, 접시에 놓인 복숭아를 하나 집었다. 한입 가득 과육을 머금자 즙액이 터져 나왔다. 과즙은 손등을 타고 내려와 팔뚝의 핏줄을 따라 흘렀다. 과실의 투명한 피를 마시는 듯한 섬뜩한 단맛에 몽롱한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듯했다. 유하는 그제야 문득 제 처지가 우스워져 저도 모르게 나른한 웃음을 흘렸다. 그토록 연모하던 가을 국화 같은 여인과 잔을 나눌 꿈 같은 일이 생겼는데 볼품없이 물에 젖은 생쥐 꼴이라니.
 대답은 뒤늦게 한숨처럼 세어나왔다.
 
 “소왕은 괜찮습니다. 더 큰 결례를 범하지 않으려면 이제 깨야 할 것 같습니다만.”

 꿈이라 여기면서도 그는 그렇게밖에 말할 줄 몰랐다. 대답을 듣는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쉽게 읽히지 않았다. 그 고요한 미소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골몰하려던 차에,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유하, 내가 내리는 잔을 거절할 셈입니까?”

 그것은 그가 저항할 수 없는 한마디였다. 그녀는 그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되짚어보면, 그날의 모든 일이 그랬다. 이상하고 흐리고 아름다웠다. 그는 몇 잔을 연거푸 더 마셨다. 방안은 따뜻하게 데워졌고, 부드러운 향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도 묘한 추위가 가시지 않아서, 그는 한참을 떨었다.
 그 섬섬하고 미약한 한기는 제 욕망을 눌러 담고 있는 보루였다. 그녀는 지나치게 가까이에 있었다. 너무나 다정한 말씨로 다정한 말을 건넸다. 무엇 하나 익숙하게 여길 일이 없었는데도 무심하고 자연스럽게 아름다웠다. 그녀가 던져주는 이 덧없는 한 줄기 희망을 어찌 다뤄야 할지 모른 그가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연정을 내리누르기 위하여 쌓아 올린 벽이 안에서부터 무너지며 파편이 가슴을 찔러왔다. 한평생 짓눌려왔던 것들이 희미하게 비추는 빛을 찾아 하염없이 부풀어 올랐다. 그는 눈앞의 칼로 뛰어들고 싶었던 그때의 그 나직한 충동이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자유를 향한 열망과 한 여인에 대한 목마름이 같은 이름으로 그의 안에 눌러 담겨 있었다.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사는 일은 자진이나 다름없는데도.
 그녀의 물기 어린 눈동자는 처음 본 그때와 똑같았다. 그는 갈망과 체념을 동시에 담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자기가 지금 무얼 바라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애원하는 눈을 했다. 손을 뻗어 가볍게 흩자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명주실처럼 흘러내렸다.
 그날 알았다. 그녀는 붓으로 그려진 사람이 아니라 살과 피가 도는 사람이었다. 만지고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사실이 그렇게 미칠 것 같았다. 움켜쥐자 부드러운 살결이 손 모양에 맞게 눌렸고 체취가 느껴질 만큼 몸과 몸이 가까이 닿았다. 타는 불에 손을 집어넣은 듯한 아찔함에 찰나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이미 그녀를 제품에 세게 가두어 안고 있었다.
 이 순간을 놓치면 더는, 탐하는 마음을 붙잡아 놓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녀를 만지고 안고 파고들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됐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닿을 수 없는 것에 닿은 채로 그는 생각했다. 명음.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테지요. 이번 생의 내게 그런 행운은 없을 것을 압니다. 어째서 나를 허락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마마. 저는….”

 탁해진 목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상처에서 고인 피가 흘러나오듯이.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한다고 제가 감히 그리 여겨도 되겠습니까? 묻고 싶은 것은 그 어떤 것도 묻지 못한 채.

 “유하.”

 그녀는 나직한 한 마디로 모든 말을 막았다. 그리고 무언가 더 덧붙이는 대신 그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그걸로 끝이었다.
  팽팽하게 당긴 줄 같던 긴장감이 깨어지고, 그는 바로 입가에 와 닿는 목덜미에 입 맞추며 파멸을 향해 나아갔다. 입술이 닿은 그녀의 얇고 가는 목선 아래로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가벼운 손짓 몇 번으로 옷가지가 바스락거리며 흘러내려 둥글고 고운 어깨선이 드러났다. 탄성을 담은 눈길이 그 위에 잠시 머물렀다. 그의 심장은 당장이라도 제 껍질을 벗어던지고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살결이 마주 닿고 스치는 곳마다 불꽃이 피어나 아까의 추위는 간데도 없이,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전소해 사라질 것만 같은 열기가 그를 태웠다. 목 뒤까지 뻣뻣할 정도로 몸이 달아올랐다. 그는 다분히 갈급한 몸짓으로 그 턱선에, 고운 어깨에, 나긋한 빗장뼈에 입을 맞추었다. 달뜬 숨결이 가슴께에 닿자, 그녀의 몸이 조금 떨리며 뒤로 살며시 젖혀졌다.
 그는 자신이 감히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그녀의 표정들을 눈에 담았다. 흉터 진 손이 나긋하게 접히는 팔꿈치, 가는 허리,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결과 복숭아뼈를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은 부서지기 쉬운 보물을 다루는 아이의 그것처럼 신중하면서도 간혹 서툴렀다. 그녀는 그가 간지러운 곳에 닿을 때면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것이 달콤한 탄식과 속삭임에 서서히 녹아내릴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길고도 짧게 이어지는 입맞춤은 몇 번을 해도 모자란 것처럼 느껴졌다. 입술이 포개어지고 남의 숨을 훔치고 들이마실 때마다 입안에 남은 과실의 잔향이 짓눌리며 번졌다. 늦봄이어서 모든 것이 그렇게 무르익는듯했다. 매끈매끈하게 땀에 젖은 몸이 겹쳐오면 그녀는 어딘가 힘에 겨운 듯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여러 번 입술 속에서 굴려보았고 나직이 마주 부르기도 했다. 더는 바싹 붙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닿아 여린 살결을 파고들면서도 그는 더, 더 원했다. 숨이 차고 넘칠 때까지 놓아줄 수가 없었다. 


 흰 손끝이 잠시 그의 어깨에 난 흉터를 따라 몸 위로 나긋한 선을 그었다. 손가락 사이에 들어온 꽃잎을 짓이기는 것과 같이 무의식적인 행동. 그 한순간이 그의 영혼을 어떻게 묶어놓았던가. 그는 그녀의 옆자리에 늘어져 눈을 감고 있었고, 아주 가까이에서 그녀의 숨결을 느꼈다. 그 영원과 같은 찰나가 지나자 모든 것이 끝났다.
 그녀가 옷을 입는 기척이 들렸다. 그는 자는 척을 했지만, 그녀는 이미 알았다.

 “전부 잊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그럴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호수의 신기루이고 봄밤의 꿈이려니 잊고 당신의 자리로 돌아가세요.”
 그 목소리의 높낮이, 발음에 숨이 섞이던 순간까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것만이 살길입니다.”

 


 해유하는 그날 곧장 도망치듯 궁을 떠났다. 그러나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없었다. 어디로 가서 무슨 짓을 하건, 어느 때건, 몸에 걸린 족쇄가 뻐근할 정도로 무거웠다. 온갖 잡다한 감정이 시도때도 없이 쏟아져나와 그를 괴롭혔다. 할 수만 있다면 떼어다 버리고픈, 추악한 욕심. 영글어 터져서 더는 어떻게 다듬을 수도 없는 날것의 연정. 그리고 숨길 수 없는 희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그럴 수는 없었다. 금수가 아니라 인간 된 자로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몇 번을 되짚어도 스스로 저지른 일, 스스로 끌어다 맨 죄였다. 그 순간 그녀는 칼날이었고 그는 숨도 참지 않고 뛰어들었다. 원치 않아도 그는 그녀를 다치게 할 수 있으니 양날의 검이었고 조금의 구원도 없을 관계였다. 그러나 자신이 여전히 그녀 말고는 그 무엇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아직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명예도 일말의 품위도 없이.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렇게 해가 지고 날이 가고, 그저 도망치기 위해 베어 넘기는 살의 산이 눈앞에 쌓여갔지만. 무용도 군공도 지은 죄를 덮을 수는 없었다.
 죄책감.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바야흐로 황태후의 탄신연이 다가오고 있었다.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중국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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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6.2


정신없이 숙소를 옮기느라 밤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가방을 잃어버린 것은 끔찍한 손실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넋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1925.6.3


 펜휴 제단 지하에서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케냐의 푸니 초다리는 아이보리 윈드 호를 통해 상하이의 호팡에게 골동품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부두 술집에서 아침 일찍부터 술에 취한 아이보리 윈드 호의 선장 토르박을 찾을 수 있었다. 술을 사주며 자세한 사정을 캐내자 그는 불법적으로 미등록 골동품을 운송하고 있노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세관에 신고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그 물건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방수천으로 덮인 상자 안에는 밸브나 복잡한 전선이 달린 기계들—생소한 형태의 부품이 여럿 들어있었다. 또 다른 상자에는 다양한 석상이나 조각품이 가득했다.

 

  • 60cm 정도 되는 사암 조각에 박쥐 날개가 달린 생물이 역동적인 자세로 내려앉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얼굴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는 얼굴 대신 3개로 갈라진 둥글넓적한 눈이 달려있다.
  • 대형 검은 파라오 석상. 얼굴이 정교하게 세공된 수많은 벌레로 뒤덮여 있다.
  • 15cm 정도의 인간과 염소를 섞은 얼굴의 나무 조각품. 17세기 뉴잉글랜드 시대의 물건이다. 
  • 날의 면을 따라 오래된 기호가 새겨진 부식되고 마모된 단도. 
  • 내부가 자개 빛으로 반짝이는 커다란 고둥 껍데기.
  • 사람 발 가죽이 마치 신발 마냥 그 형태를 유지한 채 청동 고리에 걸려 있다. 최소 100여 년은 되어 보이는, 20~30대 남자의 발이다.
  • 잉글랜드 교외 묘지를 그린 그림. 짐승을 닮은 형체가 땅을 짚고 나오고 있다. M.S. 1924. 서명으로 봐서는 마일스 쉬플리의 그림인듯하다.

 

 이제 나는 이런 물건들을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없었다. 깊은 안쪽에서부터 너무나 많은 사건과 상념들이 동시에 끓어올랐다 사그라들었다. 나는 전과 달라져 버린 것이다. 그것도 내가 가장 원하지 않던 방식으로. 그러니 새 동료들의 도움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선장에게 다크 미스트리스 호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 배의 선원들은 개구리를 닮은 묘한 생김새에 다른 선원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점심때가 되어 맥첨을 만났다. 맥첨은 어제보다 솔직한 태도로 답했다. 조심해야 하는 때와 아닌 때를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로부터 잭 브레이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잭 브레이디는 자기 얘기를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맥첨도 시시콜콜하게 캐묻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그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잭 브레이디의 랑군 행은 묻는 사람들에게 둘러대기 위한 낭설이다. 그는 아직 상하이에 있다. 사정은 몰라도 그가 위험한 일에 뛰어든 것만은 분명하다. 잭슨이 비틀거리는 주점에 들렀을 때, 둘은 대화를 나누었다.
 잭 브레이디를 뒤쫓는 사교 집단은 비대한 여인의 종단이라는 이름으로, 아마도 온 중국 또는 상하이 전체에 그 그림자를 펼치고 있다. 종단의 우두머리 호팡 대인은 관리들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위치의 인물이다. 호팡 대인의 저택은 프랑스 조계지에 있었다. 맥첨은 정확한 주소를 알려주었다.
 우리는 다크 미스트리스 호에 대해서도 물었는데, 가끔 상하이에 들러 짐을 싣는 배이며, 사람들이 선원들의 수상한 외모에 대해 뒤에 수군거린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 국기를 달고 있어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한다.


 상하이 쿠리어.
 작은 신문사. 대표는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앤서니 창이라는 남자다. 영문과 한문을 병기하기에 상하이에서 기사를 발간한 일이 있다면 이쪽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료실에서 특별히 건질 건 없었고, 고대 종교와 관련된 자료는 박물관에 소속된 번역가나 학자들을 통해 알아보라는 추천을 받았다.


 상하이 박물관.
 공공 조계지와 프랑스 조계지 사이에 있는, 영국식 시계탑이 달린 건물이었다. 내부에 전시된 건 전부 중국 유물로, 도자기나 병풍 등이 죽 늘어섰다. 제이덕이 있었더라면 유물의 가치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거나 능숙하게 대처하기라도 했을 텐데, 그의 공백이 느껴졌다.
 우리는 박물관 큐레이터에게 물어 전문가를 여럿 소개받을 수 있었다. 34명이 목록에 있었다. 개중 여건과 위치를 고려해 추려서 세 사람을 만나보기로 했다. 역사학자 창닝, 예술 애호가 린옌위, 전임 보조 큐레이터 무셴.



 제일 먼저 창닝 박사를 찾아갔다. 그는 나이가 좀 있는 학자로, 책으로 벽을 세운 작은 성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학술적인 자문을 부탁하러 왔다고 하고 그의 시간을 빌렸다. 그는 우리의 질문에 상세하게 대답해주었고, 여러 자료를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비대한 여인의 종단은 한때 중국에서 가장 두려움을 샀던 비밀 종교 집단이다.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근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그랬고, 현재로서는 대가 끊겼다. 푸젠 지역의 해안에서 해적이 창궐하던 시절 그 해적들이 이 단체의 지시를 받는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종단의 신도들이 적에게 강력한 마법을 쓴다는 전설도 내려왔다. 이들은 농기구를 주 무기로 사용하면서 특유의 잔인함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들이 섬기는 어둠의 신은 거대한 인간 여성을 닮은 형태에, 바닷가의 영향인지 촉수가 잔뜩 달려있었다. 원래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내륙까지 퍼졌다. 전설에 따르면 바다 밑까지 위세를 떨쳤다고 한다. 물론 이런 기록이 흔히 그렇듯 그 위용을 드높이기 위해 가공된 이야기일 확률이 높지요, 하고 창닝이 덧붙였다.
 창닝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지식은 도움이 되었다. 결론에 경험적 사료를 더하기만 하면 된다. 검은 파라오의 교단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고려하면, 또 내가 직접 겪고 배운 바에 의하면, 이들은 절대 사멸하지 않았다. 대신 시대의 흐름이 이끌어감에 따라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었을 뿐이다. 학문 밖의 영역으로, 음모의 영역으로. 



 호팡의 창고.
 늦은 시각, 야음을 틈타 호팡 대인의 창고에 잠입하기로 했다. 창고는 부두에 근접한 곳으로, 강기슭에 걸쳐 건물 일부가 물 위에 선 구조였다. 화물칸과 업무공간이 나뉘어 화물이 이동하는 커다란 문이 한 면에 달렸고, 사무실용 문도 따로 있었다.
 우리는 창고 한구석의 문을 따고 최대한 조심해서 들어갔다. 하지만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건물 안쪽에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다급히 위층으로 도망쳤다. 올라가는 계단이 헐거워 빠질 뻔했으나, 운 좋게 들키지 않았다.
 그 김에 2층을 먼저 살펴보았다. 한쪽 방에는 캐비닛과 서류, 장부가 놓인 사업가의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에 거래 명세 서류, 둘둘 말린 항해도 같은 것들이 놓여 있다. 영국 런던, 케냐, 이집트 카이로, 호주, 회룡도의 지도다. 책상 바닥에는 열쇠가 달린 금고가 있었다.
 서류를 뒤져서 펜휴 제단으로 미술품을 수송한 명세나, 이집트의 오마르 알 샤크티에게 미술품을 보낸 기록, 케냐의 아자 싱에게 화물을 보낸 기록 등을 찾았다. 화물 대부분은 미술품이지만 가끔 책을 수송한 기록도 있었다. 또 호주의 랜돌프 운송회사를 통해 칸캇지리의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에게 광업 장비를 보낸 기록도 존재했다.
 아래로 내려가던 프리스비가 빠진 계단 밑으로 공간이 보인다며 모두를 불렀다. 아마 물건을 쌓아두는 별개의 창고인 듯했다. 창고 안에는 철문이 있고, 철문에 달린 창밖으로 사람이 오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우리는 1층 사무실을 지나 화물 더미로 향했다. 프리스비는 순찰하던 남자 하나를 기절시키고 그 손전등을 빼앗았다. 창고에는 순찰하는 사람을 포함해 다섯 정도가 있었다. 최대한 조심하려 했으나 결국 난투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프리스비와 메이벨은 둘 다 몸놀림이 굉장했다(해결사인 프리스비는 그렇다 쳐도 메이벨은 의외였는데, 나중에 듣기로 선원들과의 생활은 꽤 거칠었다고 한다). 경비원들은 역시 일반인답지 않았다. 이들은 상황이 험악해지자 낫을 꺼내서 덤벼들었다.
 내 목이 거의 베일 뻔했던 흔적은 가느다란 생채기로 남았다. 메이벨은 낫에 허리를 찔렸고, 프리스비 씨는 다친 머리를 또 다쳤다. 비록 엉망진창이 되기는 했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우리는 간단한 응급 처치만을 끝낸 뒤, 경비원에게 빼앗은 열쇠로 계단 밑으로 보이던 예의 창고에 들어갔다. 그 안에는 교단의 물건이라 짐작되는 화물이 쌓여있었다.

 

  • 용의 뼈라고 쓰여 있는 거대한 짐승의 뼈 무더기, 상아색 가면, 청동으로 만든 궤. 궤의 손잡이에는 날개 달린 생물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다름 아닌 영국의 그 날 밤하늘을 뒤덮었던 괴물의 모습이었다.
  • 다양한 크기와 재질로 만들어진 풍만한 여인의 조각상. 중국 전통 복식을 입고 부채로 얼굴을 가렸는데, 아래로는 발 대신 촉수가 달렸다. 촉수는 기묘하게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A.P라는 머리글자가 적힌 상자 6개에는 각각 기계 부품들이 들어있었다.
  • 또 다른 상자에는 검은색과 노란색으로 된 풍성한 제사용 로브가 들었다. 로브의 등 부분에는 위로는 부채, 그 아래로 촉수인지 갈고리가 나온 원형의 마크가 그려져 있다.
  • 다양한 화물들에 주소가 붙어 있다. 잡히는 대로 메모하자면: 호주 칸캇지리,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 토머스 가 7번지, 매사추세츠주 던위치, 아컴 미스카토닉 대학 의학부 허버트 웨스트 등. 

 

 창고 바닥에도 문이 달려있다. 열어보니 아래쪽으로 뻥 뚫려 바닷물이 지나가고 있었다. 바다로 연결된 것이다. 어떤 용도로 쓰이는 문일까?

 

 

 창고를 속속들이 뒤진 후, 나는 상태가 안 좋은 두 사람을 앞서 보냈다. 마지막으로 나가려는데, 문득 창고 구석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뒷모습이었지만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노라였다. 노라? 나지막이 부르자 이쪽을 돌아보았다. 눈동자는 물먹은 도화지 같았다. 가만 마주치는 것만으로 익숙한 색이 번졌다.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전에 자신을 멈춰버렸다. 이해가 그 얼굴을 흩어 버릴까 봐 이해를 버렸다. 그러면서 내 말에 익사해버리기 직전의 사람처럼 말을 토해냈다. 여기서- 뭐 해요? 비틀어 쥐어짠 목소리는 거의 남의 것처럼 들렸다. 노라는 돌아온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에 내가 모르던 끔찍한 비밀이 있다면 내가 모르던 상냥한 비밀도 있을 법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설득하는 데 거의, 거의 성공한다.
 그러나 노라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여기 없어요. 나는 그 애의 눈동자에 비친 나 자신을 본다. 내가 그 애를 다정하게 여기기 때문에, 내가 만들어낸 환각 속에서조차 노라는 내가 이해를 거부하게 두지 않는다. 나는 환영의 세계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아직 숨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익사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슬픔은 칼을 들고 있다. 그런데 내 목에는 한 줄 빗금이 갔을 뿐이다.
 추방령의 마지막 선고처럼 창고의 문이 닫혔다.

 

 

 위층의 금고에서 돈을 조금 챙겨 빠져나온 뒤, 곧장 프리스비와 메이벨을 입원시켰다.
 긴장이 풀리자 섬뜩함이 몰려왔다. 두 사람은 있었던 일을 소화해내려고 한다. 비록 무단 침입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일이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낫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직접 보는 것은 수십 번의 말보다 값진 경고가 된다. 나는 앞으로 더한 일들이 기다리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준다. 그것을 의무처럼 느꼈다.
 두 사람이 안정을 취하는 동안에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메이벨이 지출을 감내하고 사람을 고용했다. 호팡의 저택에 직접 잠입하기는 위험하니 전문가들을 쓰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간만의 휴식을 취했다.

 

 


1925.6.5


 투자의 결과는 금방 밝혀졌다. 메이벨이 고용한 사람은 셋인데, 그중 단 한 사람 보퍼드 존스만이 돌아올 수 있었다. 그도 온전한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횡설수설 들은 얘기를 간략하게 재구성하자면 이러하다.

 호팡 저택은 그 부근의 저택들이 으레 그렇듯 높은 담장에 위쪽으로는 사금파리와 철조망이 감겨 있었다. 정문을 24시간 경비하는 데다, 안쪽이 바로 경비실이며 내부에도 늘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이들은 담을 넘어 들어갔다. 담을 넘자 곧장 거대한 연못이 보였다. 그 안에는 커다란 커튼을 닮은, 난생처음 보는 생물이 헤엄을 치고 있었고 주변에는 시종들이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녔다.
 꽤 넓은 저택이었다. 이들은 들어온 방향에서 곧장 보이는 북동쪽 건물 먼저 뒤졌다. 불상이 있는 방은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불상의 목을 왼쪽으로 두 번 돌리자 숨겨진 문이 열린 것이다. 숨겨진 문 너머에는 무기 창고, 약과 비커들이 줄지은 방이 있었다. 더 안쪽으로는 철창이 달린 문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 옆 방에는 호팡의 딸로 짐작되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민달팽이나 지렁이 같은 것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비위가 상하는 광경이었다. 바로 옆에 붙은 화려한 방에는 다양한 귀중품들과 조각상들이 즐비했다. 풍만한 여인이 입은 중국식 복장 아래로 다리 대신 촉수가 빠져나오는 듯한 모습의 조각상이라든지. 보퍼드는 그곳에서 물건을 훔쳤다고 하는데, 사교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귀중품이었다.
 이후 인공 연못을 두른 손님 방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그중 한 곳에 안경을 쓴 백인 남자가 묵고 있었다. 시종으로 분하고 그 남자에게 말을 건 동료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에 쓰러지고, 뒤따라간 동료도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등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보퍼드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목숨을 구걸했다. ‘살려 보내는 것도 괜찮겠지.’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뇌리에 뚜렷하게 새겨졌다. 주변이 온통 새카맣게 변하고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동시에 수천 수백 개의 눈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이는 찰나의 일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총을 발사했으나,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맨발로 황푸강 기슭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주머니에는 본인이 챙긴 금반지들과 함께 기억에 없는 접힌 종이가 한 장 들어있었다. 거기 찍힌 것은 사교도들의 마크였다.
 잠입한 일행이 겪은 일을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자흐라 샤피크 같은 사교도들은 기묘한 마법을 쓰고는 했다. 그들이 만난 남자도 그런 사술을 부리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온몸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고통, 갑작스럽게 정신을 나가게 만들고 수족이 썩어들어가게 만드는 끔찍한 속삭임들. 갑자기 머릿속에 밀려드는 불유쾌한 감각. 나는 진저리를 치며 생각을 털어버렸다.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되었기에, 직접 호팡 대인의 집에 잠입하는 계획은 잠시 미뤄졌다.



 두 사람을 무리시키지 않는 선에서, 우리는 조금씩 움직임을 재개했다. 먼저 린옌위를 찾아갔다. 메이벨이 말하길 그는 사업가, 예술 애호가이자 큰손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현재 상하이의 별장에 머무르고 있었다. 언제나 머리에 제비 브로치를 달고 있다고 해서 제비 부인이라고 불린다.
 미리 약속을 잡지 않아서, 우리는 희귀한 골동품들이 전시된 응접실로 안내받은 뒤 꽤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다. 응접실에는 뱀과 거북이가 섞인 생물의 조각이나 황금으로 된 앙크, 티베트 종교화 탕카, 용 장식이 새겨진 청동 종(여러 마리가 얽혀 있는데 그중 영국에서 본 그 끔찍한 괴물도 섞여 있다, 이 괴물은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는 걸까?) 등이 있었다. 제비 부인은 아름다운 시종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마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듯한, 고대에서나 존재했을 법한 비현실적인 화려함이 중국에서는 아직 가능한 일인듯했다.
 첫 번째 질문을 들은 제비 부인은 고상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데에 관심을 가지면 큰 화를 입을 수 있어요.”
 “하지만 부인 정도면 누군가에게 쉽게 화를 입을 만한 인물은 아니시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넘어야 하는 산이 너무 크면 얘기가 달라지는 법이죠.”
 호팡을 거스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진 신의 모습 중 하나를 섬기는 위험한 종교 집단이 존재하고, 호팡은 이들의 대사제 역할을 맡고 있다. 제비 부인은 그를 직접 거스를 만큼 어리석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를 도울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덕분에 우리는 호팡에 대해 캐낼 기회를 얻었다.
 우리는 들었던 파편적인 정보들을 꺼내놓았다. 부인은 호팡 대인의 집에 칼 스탠포드라는 이름의 위험한 마법사가 묵고 있다고 일러주었다. 아무래도 호팡을 돕기 위해서인듯한데, 그 마법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호팡 대인에게 딸이 있는 것도 사실이며, 호팡은 그 아이를 꼭꼭 숨겨 밖에 내보내지 않는다. 또, 그가 회룡도에서 강력한 기계를 만든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자세한 정보는 불명이지만 아마 거짓 소문은 아닐 것이다. 제비 부인은 직접 정보원들을 섬으로 보냈지만, 돌아온 정보원들이 이상할 정도로 말을 아꼈다. 마치 부인보다 더 두려운 무언가가 그 섬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다크 미스트리스 호의 선장은 쥘 사부아야르라는 이름인데, 싸구려 매음굴을 즐겨 다니는 인물로 행동거지에 문제가 있어 부인의 가게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잭 브레이디의 이름을 꺼내자, 제비 부인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 ‘좀도둑놈’이 자신의 책 현군칠장비경을 훔쳐 갔기 때문이었다. 제비 부인은 그를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를 찾게 되면 사례하겠다며 우리에게도 부탁했다. 이런 말을 하는 내내 제비 부인의 시선은 계속 프리스비에게 머물러 있었다.
 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 부인이 서랍을 열어 산가지가 든 통을 꺼냈다. 그리고 점괘를 보듯 흔들어 수납장 위에 펼치더니, 거치대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 읽었다. 이전과 달리 중국어로 이야기했기에, 메이벨이 통역해주었다.

 


 제비 부인은 손목에 있던 옥 팔찌를 빼서 프리스비에게 건네주었다. 선물이라면서, 곤륜산 아래 고대도시 허티엔에서 나온 허티옥으로 만든 팔찌인데, 이것이 당신을 지켜줄 거라고 속삭였다. 옆에서 메이벨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후에 메이벨이 설명하기를 중국에서 옥 팔찌란 어릴 적부터 손에 꼭 맞게 만들어 평생 끼는 것으로, 아주 소중한 사람한테 주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프리스비는 어쩌다 본인도 모르는 새 제비 부인의 마음을 훔친 것일까? 어리둥절하던 찰나, 밖에서 시종이 가방을 하나 들고 들어왔다. 어디서 많이 본 가방이다 싶었는데- 내 것이었다! 나는 침착을 유지하려 애썼다. 노력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곧장 펄쩍 뛰어올랐을 것이다.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비록 제 부하의 팔에 상처를 남기셨지만, 호의의 표시로 돌려드리니 사양 없이 받으셔도 돼요.”
 천연덕스러운 말씨에 곧장 허탈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도둑은 사교도들이 아니라 제비 부인의 부하였다. 맥첨이 잭 브레이디와 친한 사이였으니, 잭 브레이디를 쫓는 제비 부인이 그의 술집을 감시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인제 보니 프리스비에게 이런 열렬한 관심이 쏟아지는 것도 이해가 갔다. 프리스비가 부인의 부하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으니까. 나는 가방을 돌려받았다는 사실에 그저 안도하고 또 맥이 탁 풀려서, 물건을 받은 이상 없던 일로 하겠노라고 말했다.
 저택을 나서면서 프리스비는 자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 같다며 내게 사과했다. 사실 누구도 이런 식으로 흘러가게 될지 예상하지 못했을 사건이니 그의 탓을 할 수는 없다. 또 제비 부인과의 만남에서 귀중한 정보를 많이 얻었다. 불운이 행운으로 이끌어준 셈이다. 중국에서는 이런 상황을 빗대어 전화위복이라고 한다.

 




1925.6.6


 다음날, 이른 시각 제비의 봉인이 찍힌 저녁 식사 초대장이 도착했다. 수신자는 프리스비였다. 나와 메이벨은 부인의 열렬한 러브콜을 받는 프리스비를 놀리면서 다음 일정을 준비했다. 오늘은 목록의 세 번째 인물인 무셴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무셴은 청나라풍의 외투를 입은, 왜소한 노인이었다. 그의 집은 허름했다. 노인의 눈가를 뒤덮은 주름에서 특유의 완고함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노인을 앞에 두고 이전에 다른 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비대한 여인의 종단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자 노인이 되물었다.
 “그들을 알고자 하는 이유가 뭔가?” 차분하고 한 편으로는 감정을 읽기 어려운 목소리였다.
 “저희는 죽음 숭배 교단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중 한 갈래로…”
 노인은 핵심을 비껴간 답변을 무질렀다.
 “애초에 그걸 조사하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없을 리 없다. 프리스비의 이유는 잭슨 엘리어스다. 프리스비는 맡은 임무를 수행하러 미국에서 이 먼 땅까지 왔다. 그는 사교 집단을 조사하다 죽은 친구의 유지를 이어받았다. 메이벨 역시 이 일에 자신을 바쳤던 사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은, 차마 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찾아내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호기심. 그렇다면 일라이저 웨버는? 막기 위해 있다.
 노인은 고개를 메이벨 쪽으로 향했다.
 “정말로 호기심 때문인가? 알아내고 들은 바가 있다면서. 자네는 그 위험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맞나?”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알아야겠어요.”

 노인은 메이벨의 대답을 듣고 한참 동안 가만 생각에 잠겼다. 침묵을 깨고 나온 말소리는 무거웠다.

 “지금까지 이들로 인해 조각나고 깨지고 부서져 인생이 엉망이 되어버린 사람들 가운데 그 이야기가 남에게 발견되는 행운을 누린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네. 자네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것 또한 빙산의 일각이고, 분명히 그 아래 더 깊고 까마득한 시체의 산이 쌓여있을 걸세. 그 산은 지금도 쉼 없이 그 부피를 늘리고 있으며 하늘에 닿으려는 그 욕심은 멈춤을 모르네.
 그런데 지금의 중국은, 그러한 무고한 사람의 죽음조차도 사소한 일이 되어버린 곳일세. 그렇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여겨질 수 있는데도, 정말 괜찮은 건가?”

 나는 목숨을 잃을 뻔한 사람과 잃은 사람,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을 보아왔다. 이유도 당위도 없이 가라앉은 사람들.
 이 괴물을 잡아 반으로 가르면 그 검은 바다에 잠겼던 시체들이 떠오를까? 그렇게 하면 그들도 이제 편히 쉴 수 있을까? 아, 그들의 얼굴은 마침내 편안할까? 내가 본 환상 속에서 노라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더라. 어쩌면, 이미 떠난 사람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실 미치기 직전인 것은 나여서, 그들의 위안을 핑계 삼아, 내가 편해지고 싶어서, 그래서 나는 멈추지 못하는 걸까?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들 대신에 내가 거기 누워있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슬퍼할 사람도 없고, 집이라 부를 곳도 없는 내가. 잭슨 엘리어스가 살아남았다면 우리는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용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많은 일이 훨씬 쉬워졌겠지. 노라 에버트가, 살아있었다면, 그냥, 그것만으로 세상은 조금 더 그럴 가치가 있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부질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무엇이건 가끔은 그저 멈출 수가 없는 때가 있다.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런 끔찍한 짓거리를 차마 내버려 둘 수 없기에. 더는 누군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기에. 페루에서 돌아섰더라면, 어쩌면. 아니면 적어도 미국에서. 이제는 늦었다.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내가 평생을 들여 보고자 했던 세상의 진실은 사람을 삼키는 모래 늪과 같았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와 같았다. 나는 그만두는 방법을 잊었다. 용기와 어리석음과 관성을 겨우 그러쥐고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도 나아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나는 잠겨 죽거나 폭사할 것이다. 혹은 상상을 웃도는 더 끔찍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 혼자만 끝장날 생각은 없다.
 프리스비가 눈썹을 세웠다. 저는 항상 위험 속에서 살아왔어요,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겁준다고 해서 달라질 것 없다고요, 노인네. 원래 하던 일이 덩치가 조금 커진 것뿐이지.” 그 목소리에는 날것의 반항심이 묻어있다. 이를 느꼈는지 무셴은 한 발짝 물러났다.

 “질문이 무례할 수 있었을 텐데, 대답해주어서 고맙네.”
 그래서, 답을 들은 노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얘기를 해주었다.


 “이 사교들은 사람들의 을 잘라간다네. 사람이 피를 흘리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걸 좋아하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추측에 가까우니 완전히 믿지는 말게.” 그는 여기서 잠시 멈추고 거친 목을 다듬었다.


 “교단의 신도들은 그들이 믿는 신을 이 땅 위로 불러오려 하네. 날짜는 머지않았네. 아마 기계 같은 걸 만들어서, 하늘에 독을 푸는 방법을 쓸 거야. 그렇게 하늘이 바뀌고 1년만 지나도 이제 세계는 사악한 존재들로 가득 차게 될 테지. 그렇게 하늘이 오염되고 세상에 사악한 것으로 가득 차면, 별들이 자리를 바꾸고 툴루 같은 고대의 존재들이 몸을 일으킬 걸세.”
 무셴은 뒤이어 몇 가지 낯선 이름을 댔다. “니오그타, 아자 토스, 요그 소 토스 같은 신들이 숭배될 때가 올 거야.”
 “그 사교도들이 모시는 신의 이름은 뭡니까?” 내가 물었다.
 “그 신은 너무나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 그중 하나가 비대한 여인이지.

 그는 니알라토텝이라고 불리는 존재네.”

 “검은 파라오나 박쥐들의 아버지, 비대한 여인… 그 모든 신이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모두 같은 존재이면서 각자 다른 존재이기도 하네. 이들은 결국 한 신의 여러 가지 모습이야.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어.”
 “이런 지식을 어떻게 알게 되신 거죠?”
 “공부를 하다 보니 알지 말아야 하는 것까지 알아버렸지.”

 얘기를 마친 노인은 몇 번의 잔기침을 뱉었다. 그는 느린 동작으로 우리 각자의 얼굴을 살펴보고, 단호하게 맺었다.
 “자네들은 여기 너무 오래 있었네. 위험하니 다신 오지 말게.”
 그러면서 노인은, 만약 연락할 창구가 필요하다면 상하이 유치우편에 펑우페이라는 이름 앞으로 편지를 남기라고 덧붙였다.

 그는 우리를 문 앞까지 배웅해주었다. 밖으로 걸어 나오는 내내 오로지 한 이름이 입속에 맴돌았다. 니알라토텝. 괴물의 실체는 보다 선명해졌다. 그를 뚜렷하게 느낄수록,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손을 뻗어 만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광대하고 고독하고 으스스한 공간에 툭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태평양을 가로지르던 배의 항적을 기억한다. 거기서 느꼈던 아득함과, 뒤틀린 용기를 생각한다.  “절대 그들이 바라는 만큼 쉽게 되진 않을 겁니다.”

 “자네들이 해준 말은 잊지 않겠네.”
 노인이 말했다.
 “자네들 본인도 그걸 잊지 말길 바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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