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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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2. 11

 

 영국행 여객선에 탑승했다.

 상태가 좋지 않았던 두 사람이 객실에서 쉬는 동안, 나는 갑판으로 나왔다. 배의 난간에 양팔을 기대고 뉴욕의 부두가 나를 배웅하게 두었다. 기름과 쇠와 젖은 나무와 소금 냄새. 어딘가로 떠나는 것은 다시 돌아오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었으므로 그 사실에 바치는 작은 의식이자 습관.

 짧은 의식은 예상치 못한 방해를 받았다. 부두에 무심히 시선을 두고 있던 나는, 한순간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찰나임에도 분명한 적대감이 피부 위로 소금기처럼 달라붙었다. 그 눈길은 배도 바다도 아닌 나를 향했다. 내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오래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시선의 의미는 섬뜩하리만치 분명했다.

 긴 기적 소리가 나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육중한 배는 바다 위로 금방 지워질 흔적을 그리며 나아갔다. 흰 포말이 흘수선을 적셨다. 부두가 시야 속 자그마한 점으로 오그라드는 동안,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그 눈길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다시 선실로 돌아왔을 때는 온몸이 꽁꽁 얼어있었다.

 

 우리는 일주일 정도 배에 머물렀다. 내내 날씨가 맑았다. 바다는 자신의 다정한 면만을 보여주었다. 극심한 뱃멀미에 시달리던 노라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제이덕의 상태를 살필 겸 그와 같은 선실을 썼다. 그는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을 한시도 놓지 않으면서 가끔 다른 물건들도 일삼아 들여다보고는 했다. 제이덕이 알아낸 것은 이 정도다:

 

 구리 그릇. 꿈 보내기 주문에 사용되는 그릇이다. 구리를 닮긴 했지만, 사실 구리가 아닌 정체 모를 금속 재질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사용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항해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노라는 출렁이는 바닥에 적응했다. 하지만 제이덕은 여전히 책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혼잣말이나 비정상적인 연구욕은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기운을 차린 노라가 겨우 그를 끌어내서, 간만에 셋이 바닷바람을 쐬러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멀고도 가까운 겨울 바다를 바라보면서, 몇 가지 짧은 얘기를 나누었다.

 어느 방향을 살펴봐도 육지는 없고 까마득한 수평선만이 시야에 가득했다. 막막하고 거대한 바다는 사람의 악의와 그것이 불러올 수 있는 비극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듯했다. 그런 광막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정말 미욱하고 하찮은 존재처럼 느끼게 한다. 이 거대한 세상에 고작 내가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하는 자조부터, 작은 내가 사라진 뒤에도 아무렇지 않게 흐를 무신경한 세상에 대한 통찰까지 이어진다. 허무, 허탈감, 경외심,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를 초월한 거대한 것에 의한 열병. 인류를 오래도록 사로잡았을 감정이다. 여러 가지 대처법이 있어왔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이렇게 스스로가 먼지처럼 작은 존재로 느껴질 때 오히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뒤틀린 용기를 얻는다.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1925. 2. 18

 

 사우스햄프턴에 도착해서 곧장 런던 행 기차를 탔다. 입국 심사 중 제이덕에게 난처한 일이 생겨서,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훌쩍 늦은 시간이었다. 역에 가까운 아무 방을 급하게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은 따지는 게 많은 편이었는데, 노라가 능숙하게 대처했다. 씩씩한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된다. 노라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다. 

 

 

 

 

 

1925. 2. 19

 

 시내로 들어가 적당한 중저가 호텔을 새로 잡았다.

 숙소를 옮긴 뒤, 먼저 조사할만한 장소의 목록을 정리했다. 지도를 펴고, 서적과 안내서도 꺼냈다. 잭슨이 영국의 더 스쿱 신문사에 자주 들락거렸다는 얘기를 조나가 해준 적이 있다. 참고하여 작성했다. 비자는 한 달여를 생각해두었으므로 그렇게 빡빡한 일정은 아니다.

 

  •  더 스쿱 신문사
  •  센트럴 뉴스 에이전시
  •  언론 협회
  •  영국 박물관
  •  런던 도서관
  •  펜휴 재단

 

 일정은 여유로운데 마음이 급한 게 문제랄까. 제법 바쁜 하루였다.

 들른 장소와 얻은 정보를 정리해둔다.

 

 

 

 런던 도서관

 -펜휴 재단

 이집트 학자 오브리 펜휴 경이 1890년에 설립하였다. 

 주로 이집트 탐사를 지원하고 감독한다. 이집트 역사/유물 연구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한다. 이집트 당국의 허가를 받고 합법적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현재 재단 대표는 에드워드 개비건.

 

 영국 박물관

 펜휴 재단에서 지원한 사업이 20여 건 정도 되는데, 오브리 펜휴 생전에 직접 참여한 탐사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현재 재단의 지원을 받는 탐사대로는 기자 고원에서 발굴 작업 중인 헨리 크라이브 탐사대가 있다.

 

 펜휴 재단

 철제 울타리로 둘린 건물에 경비원이 서 있다. 정문은 열려 있고, 사람들이 여럿 나다녔다. 복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에는 서고와 사무실이 대부분이다.

 2층의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전시된 이집트 유물들은 고고학 박사 제이덕을 매우 흥분시켰다. 따로 허가를 받고, 3왕조 말기 시대의 자료를 온종일 찾아 헤맨 끝에 딱 하나를 건졌다.

 

하워드 카터는 투탕카멘의 발굴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부두의 그 눈길을 잊기 어렵다. 사실 과민반응은 아니었다. 런던에서도 벌써 감시가 붙었기 때문이다. 잭슨 엘리어스는 이런 일을 혼자서 어떻게 감당했던 걸까.

 생각보다 자료 탐색이 길어져, 노라가 몹시 가고 싶어 했던 대영박물관의 제국 박람회 일정은 미뤄졌다. 노라는 매우 아쉬워했다. 제이덕과는 달리 노라는 책이 별 재미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한 달 내리 책에만 파묻혀 지낼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아주 운이 좋은 상황일 것이다.

 

 

 

 

 

1925. 2. 20

 

 제이덕의 증상이 심각하다. 그러니까, 이상한 얘기를 한다. 무슨 일이 있건, 우리는 함께 있을 수 있어요! 우리는 함께할 수 있어요. 이런 식이다. 그렇게 뇌까리는 눈빛이 묘하다.

 제이덕이 씻는 동안 노라와 긴급회의를 가졌다. 역시 저 책이 문제다. 제이덕은 씻으러 들어가면서도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을 욕실 문 바로 앞에 뒀다. 설마 씻는 내내 문틈 사이로 저 책을 보고 있기라도…… 말이 끝난 순간 소름이 쭉 돋으며, 방 안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 지점에 집중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나와 노라는 정말 애를 썼다. 어떻게든 그 책을 빼돌리고, 끈적한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다.

 물론 실패했다. 광인의 감각은 날카롭고 예리한 법이다. 결국에는 연구가 끝날 때까지만 더 지켜보기로 타협했다. 그 이후로도 계속 저렇게 상태가 좋지 않을 시 미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최선이다. 제이덕 본인을 위해서라도.

 

 

 

 더 스쿱 신문사.

 사장 미키 마호니와 만나 잭슨 엘리어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보를 전하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마호니는 시가를 뻑뻑 피워댔다.

 그에게 들은 얘기를 요약하자면: 잭슨은 이 도시의 교단을 조사하면서 그의 도움을 받았다. 잭슨은 미키 마호니에게 교단에 대한 기사를 약속했으나,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도망치듯 황급히 영국을 떠나야만 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몰랐다. 

 우리는 마호니의 도움을 받아 잭슨 엘리어스가 흥미를 보였던 기사 몇 개를 찾았다. 

 

 

 

 

 세 기사는 전부 기자 서명이 없었다. 통신사에서 기사를 받아 더 스쿱에서 고쳐 쓴 글이라 그런 모양이다. 엘리어스는 이 기사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한 것 같다. 그는 배링턴 경위를 직접 만나러 가기도 했고, 이집트 살인 사건과 더불어 펜휴 재단에도 관심이 많았다.

 쉬플리의 경우에는 살인 사건과 직접 연관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자기 집에서 그림을 상시판매한다. 주소는 기사 아래쪽에.

 

 미키 마호니는 여전히 사교에 대한 기사를 살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나쁘지 않은 일감이다. 그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조사에도 더 뚜렷한 방향성이 잡혔다. 들를 곳이 늘었다고 할까.

 

  •  마일스 쉬플리의 집.
  •  뉴 스코틀랜드 야드.

 

 더 스쿱에서 빠져나온 뒤, 먼저 배링턴 경위에게 연락해서 내일의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오늘의 남은 시간은 쉬플리의 집을 방문하는 데 쓰기로 했다.

 

 

 

 

 마일스 쉬플리의 집. 첼시.

 문을 두드리자 허리가 굽은 노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쉬플리의 어머니인듯했다. 우리는 그림을 보러 왔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안에 들어서고 나서 제일 처음 느낀 것은 집 전체에서 나는 기묘한 냄새였다. 농장 출신 노라 에버트는 그것이 파충류 냄새와 비슷하다고 짐작했다. 냄새는 집 전체를 떠다녔다.

 조금 기다리자 비쩍 마른 남자가 계단 위에서 내려왔다. 마일스 쉬플리는 말을 심하게 더듬고,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 불안정한 사내였다. 그는 다락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작업실로 쓰이는 다락방은 휑했다. 천에 덮인 그림이 여럿. 가운데에는 이젤과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쉬플리는 떨리는 손으로 자기 그림을 보여주었다. 대강 글로 요약해두자면:

 

-초록색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약병들 앞에, 파충류 인간이 덩어리지고 피투성이인 무언가를 해부하고 있는 그림.

-고대 이집트의 행렬 그림. 수많은 이들이 무릎을 꿇은 앞에 파라오가 탄 황금 전차가 지나간다. 파라오는 검은색, 금색으로 된 로브를 입은 뒷모습. 전차의 뒤에는 배가 갈라진 사람이 양쪽에 말뚝으로 꿰여 있다. 자칼 무리가 그 배에서 흘러나온 내장을 쫓는다.

-언덕 위 하얀 건물과 호수 그림. 거대한 용이 솟아올라 있고, 그 아래 수백 명의 사람이 묻혔다. 서로 물어뜯으면서 피와 내장을 쏟는다. 

-한밤중의 숲 그림. 모닥불 주위를 벌거벗은 남녀가 뛰어다닌다. 노란 달이 떴다. 불꽃 위에 염소 머리를 한 남자가 보이고, 그 앞에 세 명의 소녀가 선다. 그 환영이 긴 팔을 뻗어서 마술을 부린다.

-인신 공양 의식 그림.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이 제물의 배를 가른다. 제물의 가슴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나중에 들었는데, 제이덕은 이 문양이 순간 꿈틀거리는 환상을 보았다.— 피가 바닥에 놓인 책으로 떨어진다. 그 책에는 벌레가 우글거린다.

-높은 산 위의 괴물 그림. 머리는 피에 젖은 거대한 촉수 한 줄기 같다. 그 산에는 사원이 있다. 사원 근처에서 사람 형상들이 손을 하늘로 뻗고 애원한다. 사람 형상들의 머리에도 촉수 비슷한 것이 돋아 있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촉수가 붙은 의식용 가면이다.

 

 

 심약한 화가의 겉모습이 품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잔학한 이미지였다. 비현실적인 입체감이 있었다. 나는 쉬플리의 그림이 싫었다. 거칠고 강렬한 붓 터치가 망막에 폭력적으로 인상을 새겨넣는 듯했다. 불쾌하고 끔찍하고 유독한 인상을. 그저 본다는 행위 하나를 선택한 결과로 감내하기에는 지나치고 부당한 폭력이다.

 나는 그림에 집중하지 않기 위해 쉬플리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어디서 영감을 얻었냐는 질문에, 쉬플리는 자기가 과거의 편린을 보고 그린 것이라 대답했다. 그는 지나치게 긴장했고, 불안해했다. 그 밖의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은 대부분 얼버무렸고…… 그의 옆에는 대조적으로 평온한 얼굴의 노인이 서 있었다. 나는 무심코 시선을 떨구었다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경험을 했다.

 그림자가 이상했다. 주변이 어두웠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왜소한 노인에게서 생길 크기의 그것이 아니었다. 의심을 가지고 살피자 상황이 더 분명하게 보였다. 두 사람은 가족인 척 대화를 했으나, 아들은 분명 엄마에게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집안에 가득 찬 역겨운 냄새와 끔찍한 그림 때문에 상태가 나빠진 노라는 결국 바닥에 토했다. 속을 게우기 위해 고개를 숙였던데다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던 노라는, 자기가 본 것을 표현해버렸다. 그러니까, 그림자와 노인을 번갈아 손가락질했다.

 노인은 무표정했다. 뭐라고 말을 중얼거렸던가? 노라는 순식간에 마법에 걸린 것처럼 차분해졌다. 나는 경악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봤지만, 거기에 노인은 없었다. 인간의 형상이 찌그러지더니 몸집이 부풀었다. 허물 벗듯 드러난 모습은 비늘 달린 괴물이었다.

 나는 제이덕이 괴물에게 다가가려는 걸 말리며, 다급하게 총부리를 들이댔다. 당신 뭡니까?

 그것은 쉭쉭 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복종해라. 인간. 복종해.

 내가 바라던 대답은 아니다.

 

 "싫어."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쉬플리는 잔뜩 겁에 질려, 벽에 구겨져 들어가려고 했다. 탄환이 질긴 가죽을 뚫었다. 상처에서 끈적한 피가 흘렀다. 괴물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총알이 상처를 냈다는 것은, 죽일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무언가 내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걸었다. 그 불쾌한 침입에 대한 감상을 말로 뱉기도 전에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 끔찍했다. 산 채로 천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목 안쪽으로 신맛이 났고,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눈에 피가 맺혀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온통 흐리고 붉었다. 이상하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얼굴이 하나 있었다. 보고 싶지 않았는데, 고통 때문에 벌레처럼 나약해져서 보는 걸 멈출 수가 없다. …….

 아주 어렸을 적의 나는 너무 겁에 질렸을 때 그대로 가만히 있기만 하면, 그러니까 숨도 쉬지 않고 눈도 깜빡이지 않으면, 무서운 일이 그대로 지나가 줄 거라고 믿었다.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숨을 참으면서, 나는 이대로 돌이 될 테니까, 세상은 나를 모른 척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내가 정말로 굳어서가 아니라 긴장과 두려움 때문에 죽어버리기 전에, 윌리엄은 늘 먼저 나를 찾아냈다. 형에게는 그런 이상한 초능력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하지만, 하필이면. 지금. 왜? 

 

 

 한참 지나서야 다시 정신이 들었다. 환상도 없고, 고통은 견딜만한 정도로 줄어들었다. 주변은 지독한 파충류 냄새가 났고 몹시 어두컴컴했다. 노라는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는 꽁꽁 묶인 채 벽 안쪽의 공간에 갇혀 있었다. 문 너머에서 쉬플리와 괴물의 대화가 들렸다. 괴물은 쉬플리에게 우리를 감시할 것을 명령하고 떠났다.

 몇 마디 속삭임 끝에 겨우 밧줄을 풀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방의 선반 위에는 어두운 물질이 든 유리병이 몇 개. 벽에는 기묘한 기호가 가득하고 한쪽에는 금속판이 달린, 돌 욕조가 있었다. 욕조를 살짝 열어봤다가 잘린 머리와 인사하고 다시 덮어두었다. 호기심이 일라이저 웨버를 죽인다. 

 한참 생각에 골몰하던 제이덕은, 우릴 가둔 괴물에 관한 내용을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아주 고대에 지구에 살았던 종족인 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 존재가 런던 한복판에서 화가와 함께 살고 있다니. 여러모로 나의 이해를 초월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벽 너머의 쉬플리를 설득했다. 괴물에게 협박당하고 있다면 도와주겠노라고,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고 얘기했다. 설득이 잘 먹혀들어서, 우리는 괴물이 뒤뜰로 나간 사이 부엌에 매복할 수 있었다.

 그 짧은 사이 괴물은 다시 노인의 거죽을 쓰고 있었다. 유약한 노인의 겉모습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으나 결국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아까 같은 경험은 다시는, 절대로 사양이었다. 총에 맞자 인두겁이 벗겨졌다. 찢어지는 비명. 괴물은 온 집안을 기름때처럼 덮었던 그 지독한 악취를 풍기면서 무너져내렸다.

 

 

 이 뒤로는 마일스 쉬플리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다. 그가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말했기에 정황이 다소 왜곡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이 괴물은 갑자기 쉬플리에게 찾아와서, 굉장한 소재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을 만들어주었다. 쉬플리는 괴물이 준 약을 사용해 과거에 다녀왔다. 과거의 충격적인 장면들은 그의 뇌에 큰 상흔을 남겼고, 화가는 이상한 그림을 잔뜩 그렸다. 괴물은 화가의 어머니를 잡아먹고 어머니의 모습으로 변했다.

 

 쉬플리는 지저분한 방에서 마지막으로 조금 남은 녹색의 약을 꺼내주었다. 그리고 잠겨 있던 다락의 벽장도 열었다. 벽장 안에는 천에 덮인 커다란 캔버스가 있었다. 뱀의 제단이라는 제목의 미완성품으로, 괴물의 명령을 듣고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뱀이 들끓는 고대의 늪지대를 그린 그림이었다. 늪지 중앙의 작은 섬에는 석제 제단이 있었다. 속이 매스껍다 싶더니, 문득 그림이 일렁였다. 벌레 울음, 물소리가 멀었다가 가까워졌다. 줄기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꿈틀대는 뱀 비늘이 어지러이 빛을 산란했다. 제단은 그 빛을 머금었다…… 풍경이 서서히 현실을 잠식했다. 흡사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재빨리 나를 붙잡아준 제이덕이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이덕이 살펴본 결과 그림 속 식물들은 2억만 년 전 페름기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뱀 인간이 정말 고대의 존재라면 설명이 되는 이야기다. 인간 화가를 시켜 그들에게 남은 어떤 유산을 그려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괴물이 죽은 이상 목적은 영영 알 수 없지만, 그 어떤 낙관주의자도 그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이유이리라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그림은 이제 산산이 조각나서 더는 찾을 수 없다.

 쉬플리는 죽음숭배교단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림들은 분명 교단이 묘사하는 어두운 신과 연관되어 있다. 더 깊게 엮이지 않는 편이 이 화가에게도 좋을 것이다.

 밖으로 나왔을 즈음에는 새벽이었다. 어떻게 숙소로 돌아왔는지도 잘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1925. 2. 21

 

 아침 일찍 센트럴 뉴스 에이전시에 들렀다. 간단하게 몇 가지를 알아냈다:

 -1년 전 즈음에 일명 이집트 살인사건을 조사하던 그레고리 먼든 경위의 실종 사건과 관련된 기사. 경위는 목격자도 흔적도 없이 증발하였다.

 -이집트인들이 살해당한 사건에 대한 제보를 부탁하는 기사도 있다.

 

 

 점심을 먹고 뉴 스코틀랜드 야드로 배링턴 경위를 만나러 갔다.

 그는 50대 정도 되는, 격무에 치인 남자였다. 처음에는 우리를 신용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마도 정보를 캐내서 기사를 쓰려 한다고 의심하는 것 같았다. 죽음숭배교단에 대한 얘기는 허무맹랑한 희언으로 취급했다. 제이덕의 학위 검증과 장구한 설득이 있고 나서야 제대로 사건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집트 살인사건: 피해자가 주로 이집트인(19명 중 17명)이고 비슷한 흉기에 찔려 죽은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

 -수법: 머리와 몸통 곳곳에 맞고 찔린 상처가 있다. 거대한 못이나 바늘이 달린 몽둥이가 흉기일 것으로 추정.

 피해자 중에서 소호에 있는 블루 피라미드 클럽(영국 내 이집트인들이 많이 모이는 클럽) 단골들이 많아 따로 감시해본 적이 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관계자들의 자문: 종교 살인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펜휴 재단의 에드워드 개비건과 대화했다. ‘검은 파라오의 결사’라는 단체의 수법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 단체는 이미 수백 년 전에 사라졌다.

 자흐라 샤피크라는 향신료 상인과도 이야기를 해보았는데(펜휴 재단에서 일한 적 있음, 이집트인), 역시나 옛날얘기에나 나오지 실제로 있는 종교이지는 않을 거라고 한다. 그가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아 미행해봤지만, 역시나 건진 건 없었다.

 -목격자의 증언: 소란스러워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봤더니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피해자가 ‘호텝’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고대 이집트어로 휴식이나 평화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먼든 경위가 1년 전에 그렇게 사라진 후 배링턴이 뒤이어 사건을 맡아 조사하게 되었다. 먼든 경위는 너무 깊은 곳까지 발을 들였던 것일까? 뉴욕에서 벌어졌던 사건과도 여러모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 또 못이 박힌 몽둥이라면, 콜즈 교수가 얘기했던 오스트레일리아의 종교도 연상된다. 생각해볼 점이 많다.

 우리는 더 자세히 알아보고, 제보할 게 생기면 꼭 제보를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서를 빠져나왔다.

 

 

 

 저녁에는 드디어 노라가 궁금해하던 박람회에 들렀는데, 제이덕이 헛것을 보는 바람에 빨리 숙소에 돌아가 쉬게 되었다. 그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거대한 여인, 팔에 코브라를 감은 여인의 환상을 설명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앉아서는 아내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말씨도 차분했다. 어쩌면 연구의 끝이 보이는 탓일까? 좋은 신호일까.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긴 한데, 노라는 내심 안도한 듯하다. 나는 어디까지 낙관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좋은 환각은 없다. 환각이 좋을 수는 없다. 그 내용이 어떻건 간에 현실에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이덕이니만큼, 더 나은 쪽을 희망하게 된다.

 

 

 우리는 늦은 시간에 블루 피라미드 클럽으로 향했다.

 1층에는 청과상이 있고, 계단이나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2층에 클럽이 있다. 

 문 앞에는 문지기가 서서 회원 카드 확인을 했다. 회원제 클럽으로, 가입이 필요했다. 우리는 입장 데스크에서 따로 돈을 내고 명단에 적당한 가명을 썼다. 빠르게 훑어본 결과, 그 명단에서 자흐라 샤피크와 에드워드 개비건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들어가서 적당히 자리를 잡고 손님들을 살펴보았다. 화려한 밸리 댄스 공연이 끝나고, 댄서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손님들 사이를 누볐다. 무용수에게 손을 대기라도 하면 경비원에게 끌려갔는데, 개중 어떤 손님들은 그 규칙에 좌우되지 않는 특별 대우를 받는 것 같았다.

 웨이터에게 그 손님들에 관해 슬쩍 물어보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굴하지 않고 바텐더에게도 가서, 적당히 아무개 작가인 척 수작을 걸었다. 그러다 비싼 술을 사면 내밀한 공간으로 안내해준다는 제안을 들었다. 나는 반신반의했지만, 망설여봤자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지 싶었다.

 안내를 받은 곳은 바 뒤쪽을 통해 들어가는, 아늑하고 불건전한 방이었다. 나는 얼마 기다리지도 않고 덩치 큰 남자 둘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말 한마디 없이 바로 내게 덤벼들었다. 내가 총을 꺼냈는데도 주춤하는 기색이 없어, 결국 위협용으로 발포했다. 총성이 울리고, 스쳐서 피가 났는데도 둘은 포기할 줄 몰랐다.

 남자 하나가 옆에서 의자를 들고 내 머리를 후려쳤다. 눈앞에 불이 번쩍하고, 의자가 그대로 작살났다. 거의 동시에 문이 활짝 열렸다. 한쪽 눈앞이 축축해져서 잘 보이지 않았던 데다 역광이 져서,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일라이저 씨, 거기 있어요? 괜찮아요?”

 

 조금 어눌한 듯 용감한,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안도감에 맥이 풀렸다.

 

 “아, 예. 괜찮아요.”

 

 달릴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앞의 남자를 밀치고 제이덕이 있는 곳까지 달렸다. 우리는 그대로 정신없이 도망쳤다. 어디로든 뛰어들어 숨었다. 아마 강변의 수풀이었던 것 같다. 이어서 뒤쫓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지나가고, 곧 조용해졌다.

 우리는 긴장 후의 늘어짐 상태로 조금 떠들었다. 그런 데는 어쩌려고 따라갔느냐고 혼나기도 했다. 처음부터 함정이었거나, 내가 티가 많이 났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튼, 블루 피라미드 클럽이 수상한 교단과 관련된 장소인 것은 확실해졌다. 노라가 손수건을 꺼내서 상처를 닦아줬다. 제이덕은 그 사이 무용수 한 사람에게 쪽지를 받았다고 한다. 얻은 게 아예 없지는 않았던 셈이다. 내용은 이랬다. ‘자정에 아래쪽 길가 근처 다리 밑에서 봐요.’

 

 

 

 자정.

 다리 밑의 무용수는 자신을 얄레샤 엣삼이라고 소개했다.

 얄레샤의 남자친구는 이집트 살인의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얄레샤에게 찝쩍거리던 손님 중 하나를 위협했다가 끔찍한 보복 살인을 당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은 것은 복수에의 의지 때문이다. 다만 어설프게 시도했다가 겪게 될 교단의 보복도 두렵거니와, 경찰 내에 조력자가 있을 수 있다는 위험 때문에 직접 고발하지 못하고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얄레샤가 알아차릴 만큼 우리는…… 그래. 티가 많이 났던 모양이다.

 얄레샤는 우리에게 가게에 대한 정보를 몇 가지 알려주었다.

 

 -한 달에 한 번 자정 전후에 트럭이 와서 손님들을 태우고 간다. 목적지는 런던 밖의 어딘가.

 -손님은 전부 검은 파라오의 결사 소속이며, 자흐라 샤피크가 그들을 이끌고 있다. 자흐라 샤피크는 엠파이어 향신료 가게 주인이다.

 -직원들도 대부분 검은 파라오의 결사 소속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직원 중 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못 들어가는 공간은 1층의 창고.

 

 

 얄레샤를 돌려보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살폈다. 우리는 줄곧 감시당하곤 했으니. 누군가 얄레샤와 우리와 만난 장면을 보기라도 했다면 큰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 건너편에서 사람 셋 정도가 그가 사라진 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기우이길 바라면서도 황급히 뒤를 쫓았다.

 그들은 어두운 골목에서 얄레샤를 습격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뒤따라갔기에 비교적 손쉽게 이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얄레샤는 눈물범벅인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얄레샤를 진정시키면서, 우리는 쓰러진 습격자들의 처우에 대해 고민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결국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경찰에 넘기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경찰이 제대로 대처할까? 고작해야 습격 미수라면. 이들은 언제든 풀려나거나 교단의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얄레샤 엣삼은 순식간에 처리당할 테고. 우리는 떠나면 그만이지만, 얄레샤는 계속 런던에 살아야 한다. 이 셋이 자기가 본 걸 말하게 둘 수는 없다.

 주주 하우스 지하에서 봤던 시체들이 떠올랐다. 죽은 뒤에도 자유롭지 못했던 사람들. 그 위로 잭슨 엘리어스의 마지막 모습도 겹쳤다.

 

 

 뉴욕의 부두에서 나를 노려보던 싸늘한 눈빛.

 런던 행 내내 나는 그 눈빛의 의미에 대해 골몰했다.

 그들이 믿는 신이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안다. 그러나 도시의 그림자에 숨어 살면서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배를 가르는 것은 인간이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인간성을 잃은 인간들과 싸우고 있다. 인간 거죽을 덮어쓴 뱀 인간과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사람인 척하지만 사실은 사람이 아니다. 쉽게 뿌리뽑히지도 않는다. 반푼어치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믿으며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나를 노려보고 있다. 이제 편안한 밤은 다시 없을 것이다.

 

 얄레샤가 너무 겁에 질려 있어서, 우리 숙소에 하룻밤 머무르게 하기로 했다. 가는 동안 감시를 조심하라고 단단히 일러두고 세 사람을 먼저 돌려보냈다.

 물론 나는 경찰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습격자들의 소지품을 뒤졌다. 대형 단도와 몽둥이가 하나씩 나왔다. 이들이 빈손이었더라면 생각이 바뀌었을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들이 무기를 가졌다는 사실이 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 했다.

 마침 주변에 제법 큰 쓰레기통이 있었다. 나는 아주 세심한 동작으로 쓰러진 몸을 옮겼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커다란 단도를 썼다. 한 명씩 쓰레기통에 넣고 조심스럽게 목을 찔렀다. 손에 쥔 흉기를 타고, 피부 아래 연약한 살과 단단한 뼈 사이로 불청객을 욱여넣는 느낌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남자는 고통을 느꼈는지 눈을 부릅떴다. 그 얼굴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마치 뇌에 사진으로 찍어 남긴듯하다. 그렇게 어두운 밤중이었는데. 뭐라 비명을 지르려고 했던 것 같은데, 피거품 섞인 목소리는 말이 되지 못하고 울컥울컥 쏟아졌다. 눈에 들어왔던 빛은 금방 꺼졌다. 눈을 뜬 그대로 절명해서, 표정은 마치 왜?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어째서? 사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인데. 하지만 굳이 깨워서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대화를 시도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이들을 사람처럼 느끼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들은 내 미약하고 말도 안 되는 소망처럼, 죽었다고 껍질이 벗겨져 괴물의 본모습을 드러내거나 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생각보다 금방 해낼 수 있었다. 바닥으로 피가 많이 흘렀기에 밟지 않도록 조심했다. 손발과 머리는 줄곧 찼다. 나는 꽤 다양한 살인자를 만났고 그들에 대한 기사를 썼다. 그들과 그들의 실수를 알았다. 되도록 생각을 두 번 세 번 하지 않고, 알고 있는 대로만 행동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산책 나온 사람처럼 걸을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 수 있었고,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그늘 속에서 눈을 감으면 아직도 부두의 그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내 이름은 일라이저 웨버.

 

 이것은 나의 기록이다.

 한때는 사람의, 사람을 위한 밝고 명징한 기호와 세상을 믿었다.

 살아온 세월이 그리 길지는 않아도 언제나 그런 것들을 위해 발을 내딛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어떤 것은 어둠 속에 영원히 묻어 두어야만 한다.

 

 

 

 

 

 제이덕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온몸이 꽁꽁 얼었다. 걱정을 시켰구나 싶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방에서는 알코올 향과 섞인 달짝지근한 냄새가 조금 났다. 얄레샤는 일찍 곯아떨어져 있었다. 노라가 위로를 잘해준 모양이었다.

 

 "얄레샤가 열아홉 살이래요. 남자친구는 고작 스물하나였대요."

 

 그렇게 말할 때 노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갈라진 것처럼 들렸다.

 씻으러 들어갔다가 조금 놀랐다. 온몸에 기묘한 상처 자국 같은 게 남아 있었다. 그 끔찍한 주문의 여파일까? 자각하지 못했는데, 상처는 서서히 희미해지는 중인 것 같았다. 별수 없이 긴소매를 골라 입었다. 노라가 붕대를 새로 감아주는 동안, 나는 생각해뒀던 변명을 읊조렸다. 경찰을 불렀고, 머리의 상처를 빌미로, 내가 이들에게 공격받았다고 신고했다는 식이다.

 그리고 바로 누우려 했는데, 제이덕이 연구 때문인지 많이 심란해해서 함께 술을 좀 마셨다. 새삼, 이 애들과도 기묘한 애착이 생겨버린 것이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너무 오래, 함께 노출되어서겠지. 도움을 받고 도움을 준다. 믿고 의지한다. 혼자 내키는 대로 나다닐 때는 그저 머리로만 알던 문장이다. 밝은 창가에 얼굴을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다. 인간이 인간을 돕는 것은 본성이다. 그리고 나는 지옥에 떨어질 거다. 

 

 

 

 

 

 

1925. 2. 22

 

 제이덕이 연구를 마무리했다. 아침 일찍, 이룬 성과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에는 기묘한 주문이 하나 들어있다고 한다. 

 

 

 나이젤 블랙웰.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

쉼바 생성. 마력 12. 이성 1d6. 꼬박 하루의 시전 시간. 이 주문의 유래는 케냐. 케냐의 키쿠유족 주술사가 개발한 주문으로, 언데드 하인을 만든다. 쉼바가 될 사람은 의식에 따라 상처를 내서 죽여야 한다. 의식의 순서나 내용도 책 안에 쓰여있다. 시체의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18~20시간 동안 시체를 굽어보면서 주문을 외워야 한다. 되살아난 존재는 간단한 명령을 듣는다. 쉼바는 점점 썩어서 못쓰게 되기 때문에 하인이 필요하면 계속 사람을 죽여 만들어야 한다. 

 

 제이덕은 우리에게 일전에 읽었던 키쿠유족에 대한 기사를 주지시켰다. 주주하우스. 쉼바. 키쿠유족. 칼라일 탐사대. 어떤 미약한 연결고리가 보인다. 만약 키쿠유족 또한 이 사악한 교단의 일원이라면? 애초에 칼라일 탐사대의 사고 기사가 거짓말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마크 셀커크 중위와 키쿠유족. 두 사람의 증언이 모순된다면 둘 중 누구 하나의 말은 필연적으로 거짓일 터다.

 우리는 새벽에 블루 피라미드 1층의 창고를 가보기로 하고, 일과를 시작했다.

 

 

 

 

 노라의 강권으로 병원을 들렀다. 그리고 쇼핑을 조금 했다. 이젠 거의 강박적인 시선으로 감시를 찾는다. 아침 일찍부터 따라붙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노려보자, 곧장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숙소로 돌아온 뒤, 노라는 거절하는 얄레샤에게 이것저것 잔뜩 안겨서 보냈다.

 

 하오를 바쁘게 보내기 위해서, 우리는 수상한 펜휴 재단을 다시 찾아갔다. 오늘은 개비건 씨가 계시느냐고 안내 데스크에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개비건에 대한 것은 개인 비서인 토머스 키너리가 전부 처리한다는 답을 들었다. 일단 그의 사무실 위치를 알아두고, 펜휴 재단을 돌아다보았다.

 두 사람이 뒷마당에서 묘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보통 건물과는 다르게 엉뚱한 위치에 환기 파이프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기에는 찜찜해서, 그 부근의 벽을 따라 건물을 조금 돌았다. 결국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물론 문이 잠겨 있었고, 여러모로 시도를 해봤지만 열 수는 없었다. 조금 고민하다가 승강기로 가서 지하층 표시가 있는지 살폈다. 표시는 있는데 버튼이 눌리지 않았다. 이리저리 건드리다 보니 제이덕이 뭘 잘못 만졌는지 지하층을 향해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지하에는 소각로, 석탄 창고, 잡동사니가 쌓인 평범한 창고 정도가 있었다. 석탄 창고의 벽 안쪽으로 전기선, 배기 파이프, 냉온수 파이프가 들어간 것이 보였다. 잡동사니 창고는 말 그대로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하지만 명징한 의혹을 가지고 선반에 있는 물건을 치우자 곧 틈새가 보였다. 문이 있었다. 양쪽으로 열리는 쌍여닫이문.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쪽은 캄캄했다. 손전등으로 비춰서 내부를 훑었다. 초 연기 냄새가 났다. 사방에 잘 관리된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먼지도 적고, 한쪽에는 상자들, 벽에는 그림이 여럿 걸려 있었다. 스위치를 찾아 누르자 가운데에 있는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우리는 이 숨겨진 방을 아주 샅샅이 뒤졌다. 책상과 가까운 쪽에 놓인 상자에는 꽤 많은 비상식량, 옷과 식수 등의 물품이 들어있었다. 책상 밑 금속 상자에는 잡다한 서류가 가득했다. 특히 영수증이 많이 나왔다. 특기할만한 것은 이 정도다.

 

 

 -헨슨 공업에 목재, 석탄, 철괴, 구리 선, 고가의 주철 금고를 설치한 영수증(사진).

 -트럭을 6개월 임대한 영수증.

 -라임하우스 로프메이커스 필즈의 푸닛 초다리가 아이보리 윈드 호로 보내는 편지. 상하이로 보내는 다양한 골동품의 보관과 배송에 관한 내용.

 -영수증 더미 밑의 명함(사진).

 

 

 

 책상 서랍에는 32구경 리볼버와 위조 여권 2개, 상당한 양의 사용된 수표가 들어있었다. 5, 10파운드 짜리인데 총액은 어림잡아 2000파운드 정도. 발행인은 펜휴 재단.

 

 반대쪽에는 뚜껑이 열리거나 비어 있는 상자 여럿 있었다. 개중 닫히고 스텐실이 붙은 큰 나무 상자를 살폈다. 호팡 수출입 상사 카오양 가 15번지, 상하이, 중국. 작은 글씨로 ‘호팡 대인께.’라고 쓰여있다. 안에 든 것은 중국식 삿갓을 쓴 둥그런 생물체를 조각한 청동상이다. 삿갓 아래에서 촉수 다발이 뻗어 나오는 모양새다. 청동상인데 굉장히 차갑고 미끌거리는 질감이다.

 그 옆에 있던 작은 상자는 이랬다. 랜돌프 운송회사. 포트 다윈, 노던 준주, 호주. 길쭉한 사슴 머리에 날개가 달린 존재를 도안화한 마크가 스텐실에 찍혀 있다. 스텐실 옆에 ‘랜돌프 씨 직접 수령 요망.’이라고 쓰여 있었다. 안에는 든 것은 40cm 정도 되는 뚱뚱한 용의 조각. 용의 머리에도 촉수가 잔뜩 달렸고, 재질은 불명이다. 그걸 집어 든 순간, 팔과 몸통에 이상하게 찌릿한 감각이 쫙 퍼졌다. 순간 깜짝 놀라서 조각상을 떨어트렸다. 어리둥절해서 손을 살폈지만, 어제 봤던 주문의 미미한 흔적이 남아있을 뿐 달라진 점은 없었다. 영 찜찜해서 이 조각상을 챙겼다.

 그리고 고급 호두나무로 만든 책장. 유리문이 달려 있고 그 안에 책이나 두루마리가 잔뜩 쌓여 있었다. 돌로 만든 작은 병이 하나 있었는데, 안에 회색 재 같은 것이 들었다. 책과 두루마리는 몹시 다양한 언어로 되어있었다. 아랍어, 라틴어, 중세 프랑스어, 고대 영어, 그리스어, 이집트 상형문자…….

 라틴어로 된 두루마리를 제이덕이 읽었는데, 신을 찬양하는 시라고 했다. 고대 영어로 된 두루마리 또한 검은 남자라는 신을 찬양하는 시였다. 우리가 읽을 수 있었던, 스페인어와 영어로 된 책들은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다.

 

 

 제이덕이 알려준 것들을 요약해 적어둔다.

 -리베르 이보니스. 가죽 장정에 잠금쇠. 가장자리가 검게 칠해져 있음. 퀴퀴한 냄새가 나고 페이지가 드문드문 비었다. 고대의 조형이나 존재의 원초적 물질, 자연철학에 대한 논의나 실험을 말한다. 사코체라는 존재가 언급된다. 사코체 본인이 직접 해설과 견해를 남겼는데, 몇몇 문구는 라틴어가 아닌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여 있다. 사코체는 스스로가 파즈 루자라고 알려져 있다고 적었다.

 -쟌의 서. 영어. 4절판. 유황 냄새가 난다. 저자, 번역자 미상. 샴발라에서 가장 고귀한 대스승들의 현명하고도 덕망 높은 말들을 적은 책이다. 벨라로스라는 행성에서 시작된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서 지구에서 끝나는 어떤 의식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다양한 문명의 융성과 몰락을 예언한다. 푸르고 흰 물 위를 걷는 자, 유혹하는 혼돈의 힘, 피에 젖은 혀, 뜨거운 산에 걸터앉은 자라는 존재가 언급된다. 공허 현자의 조언이라는 주문도 적혀 있는 듯하다.

 제이덕이 알기로는, 푸르고 흰 물 위를 걷는 자란 검은 파라오를 의미한다. 뜨거운 산에 걸터앉은 자, 피에 젖은 혀, 유혹하는 혼돈의 힘은 전부 피투성이 혀를 뜻하는 말이다.

 

 

 원숭이랑 파충류를 섞어놓은 듯한 기묘한 생물을 조각한 상자 안에는 장식된 은 단도 두 개가 들어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은 대부분 고대 회화였다. 진짜 전시장처럼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날개가 달린 검은 생물의 조각은 썩어 문드러진 것 같은 형상이었다. 역시나 날개가 있는 거대한 짐승을 그린 회화도 있었다. 짐승은 용과 흡사하고 입에는 송곳니가 빼곡했다. 또 뒤틀린 얼굴에 거대한 눈이 달린 괴물, 붉은빛의 군집이 검은 인간형 생물 주위에 모여 있는 그림도 있었다.

 제이덕에 따르면 이 작품들은 전부 엄청나게 오래된 것이다. 기원전 900~700년 사이(이집트 22왕조 부근)로 추정된다. 개중 파라오의 얼굴에 촉수 다발이 달린 벽화가 하나 있었는데, 이건 제3왕조 시대의 작품이라고 한다.

 

 사진을 찍고 있자니 저 바깥에서부터 인기척이 들렸다. 우리는 황급히 불을 끄고, 한쪽 벽의 계단으로 올라갔다. 나와 제이덕이 위쪽의 문을 힘으로 열어보려 용쓰는 동안 똑똑한 노라가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빠져나와 둘러보니, 파라오의 형태로 된 석관이 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긴가민가하다 파라오의 눈을 누르자 석관이 다시 닫혔다.

 주변은 짐이 가득한 창고였다. 상자들 너머로 나가는 문이 보였다. 바닥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는데, 석관에서부터 이어진 먼지 없는 길이 한 줄 있었다. 그 길은 갑작스레 벽에서 끝났다. 나와 제이덕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 길을 따라가 보았다.

 벽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그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었다. 호칭으로 미루어보아 비서가 에드워드 개비건에게 무언가를 보고하는 듯했다. 사업 논의가 좀 이어지더니, 뒤이어 블루 피라미드 클럽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블루 피라미드에서 크게 난리가 났고, 귀찮은 쥐새끼들이 도망갔으며…… 잭슨 엘리어스의 이름도 언급되었다. 지독한 작가랑 얽혀서 운이 안 좋다는 불평이었는데, 하하. 공감이다.

 그러고 있자니 노라가 문 쪽에서 손짓했다. 우리는 문밖이 고요해진 틈을 타 잽싸게 빠져나왔다.

 

 

 숙소로 돌아와서 주워 온 물건 몇 개를 대강 펼쳐보았다. 뚱뚱한 용의 조각상, 쟌의 서, 은 단도 두 개, 돌로 된 병, 쉬플리의 집에서 가져온 녹색 병과 검은색 병. 영수증과 편지. 그리고 육중한 피로감. 예상치 못한 모험을 한 우리는 블루 피라미드 클럽에 가기 전에 잠깐 눈을 붙이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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