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커미션글... 어둠칼탁 친구들이었어요 우리애들 사랑하네 / 욕설이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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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연기에 관하여

 




1.



 난 좆나 부자가 될 거야. 누가 봐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부자가 되어서 눈짓만으로 남 부려먹으면서 편하게 잘 먹고 잘살 거야. 아무한테도 안 지고 누구 눈치도 안 보고 떵떵거리면서 살 거라고. 멍청이들이나 비참하게 사는 거야.
 잿빛 포탄 연기와 살 타는 냄새와 타오르는 불꽃 사이를 비틀비틀 걸어 나가던 순간. 이 세계에서 목숨이 얼마나 천박하고 값어치가 없는지, 총알 한 발보다 못하게 쓰이는지 알았다. 매캐한 담배 연기로 가득 찬 좁은 방에서 촛불 하나에 의지해 눈이 침침할 때까지 카드 패를 들여다보고 단 한 순간도 내 것인 적 없었던 것들을 잃고 또 잃다 보면. 쓰레기나 다름없는 인간들 사이에서 쓰레기 같은 희열에 젖어 어슴푸레한 밤을 나고 또 나다 보면. 문득 숨이 막힐 정도로 밀려오는 무력감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눈앞에 들이 밀어진 패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차피 인생의 값어치란 많이 쳐봤자 싸구려에 불과해. 그러니까 전부 걸어. 앞면 아니면 뒷면에.
 선택을 해야 해. 다른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2.


 “하.”

 모스 하이에는 눈을 번쩍 떴다. 먹구름에 뒤덮여 별도 없는 밤하늘이 보였다. 옛날 꿈인가, 별 거지 같은……. 생각하며 상반신을 들어 올리는데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몸 이곳저곳이 다 쑤셨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모스는 먹먹한 귀를 후비며 주위를 살폈다. 마차 바퀴 자국이 난 진창길과 회칠이 된 벽. 그 가운데 단단히 닫힌 단골 도박장 문이 보였다. 기억은 잉크가 쏟아진 페이지처럼 가물가물했지만 그래도 상황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술을 마시고 도박장에 갔던가 도박장에서 술을 마셨던가, 아무튼 인사불성이 되어 행패를 부리다 쫓겨나듯 밖으로 내던져진 후 그대로 길바닥에 엎어져 잠들었을 것이다.
 물기 어린 흙바닥 때문에 등이 온통 축축했으나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모스는 황급히 제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마구잡이로 뒤적이다 안 되어 뒤집어 보기까지 했지만, 역시나 땡전 한 푼 없었다. 아, 설마 또! 그는 낭패감을 느끼며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헝클었다. 그러다 문득 벼락같이 찾아온 깨달음에 장화를 벗어 던졌다. 가죽 장화를 거꾸로 들고 탈탈 털자,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 숨겨둔 칩 두어 개가 떨어졌다. 이거면 됐어. 먼지 묻은 얼굴이 반색했다. 그는 아픈 것도 잊고 벌떡 몸을 일으켜서는 망설임 없이 도박장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아니, 가려고 했다.

 “이제 그만해요.”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췄다. 모스는 문 앞에 선 채 굳이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선생 납셨네. 그런 거 너한테 안 어울려.”
 “이쪽 봐요, 브롤.”
 “왜, 문 닫히기 전에 한 판이라도 더 뛰려면 빨리…….”

 한 자루 단도가 탁! 경쾌한 소리를 내며 말을 가르고 문에 꽂혔다. 비수가 날아오면서 일으킨 가벼운 바람이 그의 뺨을 간질였다. 농담할 기분도 대충 넘어갈 생각도 없다는 다소 과격하고도 명백한 표현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성가신데. 상대해주는 게 싸게 먹히겠다는 계산이 선 모스는 느릿느릿 몸을 돌렸다.
 칸드라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모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돌아본 그와 눈이 마주치자 숨기지도 않고 양미간을 좁혔다. 그의 꼴이 말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당신,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그렇게 쏘아붙이는 목소리는 걱정스러운 듯도, 화가 난 듯도 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당황스럽네.”

 모스는 굴하지 않고 짐짓 능청스럽기까지 한 태도로 양손을 들었다.
 그는 칸드라가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고집이 등을 떠미는 것에 가까웠지만, 모스는 그 둘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 구별할 필요를 모르고 살았다고나 할까.
 사시사철 어둠에 잠긴 더스크월에서 죽음은 그리 대단한 사건이 못 되었고 죽음 뒤에 일어나는 일이란 더 시시했다. 그냥 차갑고 무감각한 바보가 될 뿐, 그러니 죽는 걸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할 필요도 무서워할 필요도 없다고. 이건 누가 한 말이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아하니 아마 지금쯤 죽고 없는 장교거나 병사거나 했을 것이다. 삶의 무게는 각자에게 다 다르다지만 죽음은 대부분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가짜 어음보다도 못해서 그걸 대단한 일처럼 취급하는 게 되려 어색했다.
 사람들은 죽은 뒤 소각당해 재로 돌아가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직접 눈으로 보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재와 검댕의 도시답게 다들 재와 검댕이 되려고 살았다. 그것뿐이었다.
 고작 그것뿐인데 왜? 내가 뭐라도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 쬐그만 여자는. 왜 이런 표정으로 귀찮게 구는 걸까.

 “너야말로 왜 이렇게 꼬치꼬치 따지는 거야? 대장도 안 그러는데.”
 “지금 몰라서 하는 얘긴 아니겠죠! 그건 그 인간이 무신경한 거고요.”

 굳이 대장을 언급한 것도 기분 상하라고 일부러 꺼낸 얘기였는데, 칸드라는 눈썹 끝을 치켜올리면서도 그리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모스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짐짓 껄렁한 표정을 내비치며 양손을 주머니에 꽂았다.

 “모르겠는데. 내가 그 자식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서? 오해야.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난 원래 이렇게 살았거든.”
 “당신이 지금 당신 꼴을 보면 절대 그런 말 못 할걸요.”
 
 뭐 어때서. 속으로 투덜거리며 혀로 입안을 건드리자 피 맛이 느껴졌다. 왼쪽 어금니가 흔들렸다. 쫓겨날 때 얻어맞았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원래 판이 클 때는 쪽박도 차고 그러는 거야. 이런 거 무서워하면 이 짓거리 못 해. 괜한 동정 받는 거 기분 별로야.”
 “동정이랑 걱정은 달라요.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요? 난 그저…….” 속상한 구석 때문에 격양되었던 칸드라의 목소리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렇게 해야 할 것 같다고 느껴 행동하면서도 스스로 명확하게 짚지 못해 혼란스러웠던 심정이 말로 꺼내놓으면서 서서히 다듬어지는 듯했다.
 “당신이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구니까 두고 보기 힘든 것뿐이에요.”
 
 모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목숨을 걸고 함께 일하는 사이란 바라건 바라지 않건 한없이 내밀해지기 마련이어서, 모스가 그런 만큼 칸드라도 모스가 가진 나쁜 버릇을 알 만큼은 알았다. 심지 굳은 눈빛이 자신이 약한 순간에 파고드는 게 거슬렸다. 그런 눈빛이 자기 껍질을 벗겨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 자기도 반강제로 같이 직면해야만 하니까.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쉽게 느낄 수 있었기에 더 그랬다.
 지금은 누굴 너무 가까이하고 싶지도, 위로받고 싶지도 않았다. 간지럽고 나약한 짓이었다. 건전한 위안이고 나발이고 성실한 자기파괴로 도피하는 쪽이 편하고 익숙했다. 남의 얼굴 한복판에 주먹이라도 꽂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었다. 그 김에 내깃돈도 받으면 좋고…….

 “브롤.”

 나직한 부름이 이런저런 궁리에 빠져 입을 다물고 서 있는 모스를 끌어당겼다.

 “그만 놔줘야 해요.”

 차분하게 가라앉아 이제 슬프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는 말하는 이에게조차 명확한 의미가 되어 닿기보다는 그저 그 공간에 흘러나왔다. 사람이 몸 붙이고 사는 땅에서 누구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박는 말들이 있다면 이런 식일까. 유령들이 맨발로 거리를 거니는 이 땅에서조차 생과 사의 두 세계를 구별하고 갈라놓는 명확한 몇 마디들. 떠난 사람은 그저 떠난 사람이라고, 명징하게 나누어지는 몇 순간들.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모스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두통이 있는 와중에 머리에 훅 열이 끼쳐 시야가 일렁거렸다.

 “두어 번 말하게 하지 말라니까. 난 그냥…….”

 모스는 부자연스럽게 말을 멈추었다.
 옆을 돌아보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또 하나의 그림자가 회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느껴졌다. 보지 않고도 그냥 알 수 있었다. 새까만 코트 자락, 아무렇게나 걷어 올린 소매. 그 모든 것이 흘러넘치는 검은 물처럼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그려졌다. 모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포기하기 싫은 것뿐이겠지.”

 그가 말했다. 뱃사람 식 뚝뚝 끊는 억양, 굵고 탁한 목소리로 뇌까리는 말씨에는 자기가 한 말을 두 번 생각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 그 단호함은 눈물이 날 정도로 익숙했고 한숨이 나올 정도로 잔인하고,

 그리고 조악했다. 누덕누덕 기워 만든 환영이었다. 부러졌다가 붙은 뼈처럼 이음매가 선명했다. 그런데도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울컥 치솟았다.

 “짜증 나게. 말 걸지 마. 쳐다보지 마.”
 “뭐라고요?”
 “아니, 너 말고……. 젠장!”

 왜 지워지지 않는 거야? 왜 죽어도 죽지 않는 거야? 이 씨발 새끼, 듣고 있는 거야?
 이래서야 진짜 미치광이 같았다. 더는 이 모든 걸 견딜 수 없었다. 모스는 도망치듯 도박장 지붕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원래 술에 만취하고도 익숙하게 나다니던 길이었기에 조금 비틀거리기는 했어도 그럭저럭 가뿐한 곡예를 선보일 수 있었다.

 “잠깐만요, 브롤!”

 다급하게 부르는 칸드라의 목소리에도 그는 두 번 뒤돌아보지 않았다. 




 

3.



 포기하지 않았다, 라. 한 번 문 것을 놔주지 않는 버릇은 이미 몸에 밴 습관을 넘어서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다. 그가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발악하지 않았더라면 까마득한 옛날에 티케로스의 이름 모를 벌판에서 들짐승들의 밥이 되어 널브러졌을 것이었다. 한겨울의 포탄 밭에서 뜨거운 총신 하나만 붙잡고 벌벌 떨었던 때건, 사기를 치다 제대로 칼에 찔렸을 때건, 사랑해서 죽이겠다는 미친 여자에게 잡혔을 때건 매한가지였다. 순간순간이 절체절명의 고비였고 삐끗하면 져버릴 벼랑 끝 싸움과도 같았다. 그래도 그는 버텨냈다. 그 모든 일을 살아서 건너왔고 이를 가능하게 한 집념은 이제 본성에 가깝게 갈무리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야 했고 대박이건 쪽박이건 걸 수 있다면 걸어야 했다. 아무것도 없이 주저앉아 있는 건 질색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선택을 해야 했다.
 도망치듯 자리를 뜬 뒤로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 지긋지긋한 패배감, 실패한 도박이 가져다주는 경멸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 말대로 놓아주면 될 일인가? 놓아준다고 결심한들, 그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한 방법은 직면이었다.
 우나 스컬록과 우린 스컬록 쌍둥이는 언제나 말이 많은 반-유령들로, 식스타워즈의 무너져가는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그 음침한 언변과 최악의 다도 실력 때문에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은 인물들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가 못 됐다. 녹이 덕지덕지 붙은 펜스 문이 신경에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들은 모스가 드디어 세상이 두 동강 났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반겼다. 사람도 유령도 아닌 이들은 여전히 깔깔거리는 반존재적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변할 여지가 없는 자들이었다. 변화는 산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니까.

 “굉장한 일이었다고 들었어, 이쪽에도 소문이 쫙 퍼졌는걸.”
 “자세히 듣고 싶은데. 너희가 등대에서 뭘 봤는지 말해주지 않겠어?”

 그 재잘거림은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모스는 무심결에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가 그냥 내려놓았다. 또 괜히 독이라도 탔다면 곤란하니까. 전에 마신 차 맛이 아직도 입안에 깔깔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지금은 가타부타 떠들 시간 없어. 난 정보를 사려고 왔거든.”
 “그거야말로 우리가 잘하는 일이지.”
 “사교의 궁극이라고나 할까. 뭐가 궁금해?”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 넷이 이쪽을 보았다. 모스는 지끈거리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용건을 꺼냈다.

 “유령 하나를 찾아야 해.”
 “진부한걸!”
 “한편 고전적이네.”
 “뭐, 유령은 유령에게라는 말도 있잖아. 내가 방금 지어냈지만.”

 모스가 이죽거리듯 뱉어낸 말에 우나 스컬록은 뭐가 좋은지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
 “그래, 누굴 찾고 싶어? 위치를 알려주면 되는 걸까?”
 “어디 있는진 이미 알아.”

 모스가 사감을 뺀, 오로지 필요한 정보들을 늘어놓는 동안 반유령들은 그 가벼운 입을 다문 채 얌전히 들었다. 쓸데없는 질문으로 흐름을 끊지도, 이야기를 억지로 늘여놓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이건데,” 덕분에 모스는 단순한 결론으로 말을 맺을 수 있었다.

 “그 자식을 이쪽으로 불러올 수 있을까? 잠깐이라도.”

그가 말을 마치자 우나 스컬록은 갓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길고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고, 우린 스컬록은 티스푼으로 차를 저었다.

 “불가능해.”
 “그리고 무의미하지.”

 예상외로 단정적인 대답에 모스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방법이 없다고?”
 “방법 이전에 효용을 모르겠는걸. 그럴 필요, 그럴 쓸모를.”
 “영혼은 당사자가 아니야. 기껏해야 그가 흘린 일기 한 조각 정도나 될까. 분명 실망스럽고 소름 끼치는 만남이 될 거야.”
 “당연하지. 지성이 없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겠어? 내가 누군지 모르는 감각이라니.” 우린 스컬록이 과장되게 몸을 떨며 자기 팔뚝을 문질렀다.

 “뭐, 그 자식은 죽기 전이랑 별반 다를 것도 없겠네.”

 모스는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테이블 위에 양다리를 꼬아 올렸다. 이것도 일종의 거래 현장이니 괜히 초조한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분명하게 하자고. 아예 안 된다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쪽으로 불러오는 건 불가능해. 영혼이 그 등대 안에 있다면.”
 “등대는 등대니까. 누구도 등대를 옮길 수는 없어.”
 “하지만…….”

 두 스컬록은 말을 멈추고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더니, 한시에 고개를 돌려 모스를 보았다.
 
 “만나러 갈 수야 있겠지. 부르는 대신 찾아가는 거야.”

 모스는 괜한 기대감을 비추지 않으려 애쓰며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봐, 그 귀찮은 의식을 말하는 거라면…….”
 “아니. 그건 유령장 너머를 물질의 세계로 잠시 옮기는 방법이었지.”
 “그 반대의 방법은 시도해보지 않았잖아?”

 우린 스컬록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전등이 꺼지듯 주변이 어두워지며 낡은 저택의 모습으로 뒤바뀌었다. 거미줄이 뒤덮인 천장, 반쯤 부서지고 무너진 나무 기둥과 쥐 발자국이 다닥다닥 찍힌 먼지 가득한 바닥.
 모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우리 같은 존재가 되는 것 말이야.”

 우나 스컬록이 양 손바닥을 부딪쳤다. 그러자 다시금 화려한 저택의 모습이 돌아왔다. 눈부신 샹들리에, 벽을 장식한 금사 태피스트리, 색을 넣은 유리 램프, 사슴 머리 형상의 상아 조각품. 고색창연한 찻잔들.

 “두 세계가 얼마나 떨어져 있고 그 거리감은 견딜만한 것인가 아닌가? 그런 고민이야말로 불필요한 일이야. 둘 다 이 자리에 존재하니까.”
 “왼쪽 눈을 감으면 왼쪽 눈 밑의 세계와 오른눈이 보는 세계가 동시에 보이는 거랑 비슷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간 것뿐이야. 정말이야, 바뀌는 건 없을 거야.”

 이들은 그렇게 속삭였으나 모스는 알고 있었다. 이건 이미 실패한 실험이라는 것. 이 유령들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에 영원히 갇히고 말았다는 것. 두 세계 사이에 걸친다는 건 두 세계 모두 잃는 것과 진배없다는 것. 이건 도박일까? 도박이라면, 과연 걸 만한 도박일까?

 “어때? 만나러 가보겠어?”

 유령이 나긋하게 웃으며 물었다. 




 

4.



 생각해보겠다고 대꾸하고 스컬록 저택을 나선 뒤로, 온갖 상념이 그의 손님이 되려고 뒤따랐다. 뭘 생각해봐? 그냥 개죽음이면 어쩔 건데. 애초에 다 끝난 일인데 다시 봐서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딱 한 대만 제대로 갈겨준다던가. 두 대도 좋고. 근데 유령이 유령을 때릴 수 있던가? 그냥 왜 그랬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아니, 이유를 들어봤자 열 받기만 하겠지. 막상 다시 봐봤자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 허무할 테고. 그러면 그 나름 나도 편하게 잊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깔끔하게 단념이 될지도 모르고…….
 모스는 상념이 제멋대로 흐르도록 내버려 둔 채 손에 얹은 낡은 대검을 만지작거렸다. 흠집이 가득한 날에 문득문득 제 얼굴이 비쳤다. 먼지가 한 겹 쌓인 좁은 방, 제대로 균형이 맞지 않는 침대, 낡은 옷 몇 벌. 그가 남기고 간 건 정말 한 줌이었다. 그런 점조차 본인다웠다.
 이제 와 궁상맞게 되짚어본들 애당초 뭐 때문에 그를 그렇게까지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정말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다지만 그래도 이건 심했다. 카로는 무심하고 무뚝뚝하고, 제멋대로에 막무가내였다. 날이 갈수록 자기를 싫어해달라고 전심전력으로 시위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아예 얽히지 않는 게 나을 그런 놈.

 “너는 지겹지도 않냐?”

 모스는 돌아보지 않고 툭 내뱉었다.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그만 좀 따라다녀.”
 “소용없어. 이것도 결국 네가 바란 거니까.”
 “…….”

 모스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 말이 맞았다. 그는 그저 환각일 뿐이었으므로. 눈 감았다 뜨면 사라질 그림자였다. 쓸데없이 되새기지 않으면. 떠올리지 않으면.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하지만 외면하려 눈을 감을 때마다 어김없이, 부서진 파편들이 떠올랐다.
 틀어막는 손도 부질없이 흘러내린 붉은 피가 바닥을 적시고 짜 맞춘 돌 이음새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죽어가는 짐승처럼 얕게 그르렁거리다 서서히 멎어간 호흡. 그 뒤로 거짓말처럼 찾아온 정적. 카로 그라인은 그저 자는 듯이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는 얼굴은 지겨울 만큼 본 덕에 속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편안하게 잠든 적이 없었다. 불편하고 딱딱한 침대 위에서 습관처럼 한껏 찌푸리고는 매일매일 작은 전투와도 같은 밤을 넘겼다. 금방 일어나겠지, 그렇게 믿기에 이번의 잠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고요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게 질 나쁜 농담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조금의 불티도 남지 않은, 다 타버린 잿더미 같은 얼굴에 굵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붉은 액체가 촛농처럼 둥글게 뭉쳤다가 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모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실패한 내기. 처참한 패배.
 이 빌어먹을 자식은 단 한 번을 그냥 져주는 법이 없었지.

 “너도 후회라는 걸 해?”

 기억의 파편을 내던져버리려는 듯, 모스는 덜컥 말을 뱉었다. 

 “응? 너처럼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면 그딴 거 안 해도 되겠지?”
 “…….”
 “나한테 잘못했다고 생각한 적은 있냐? 미안한 적은 있고? 그딴 식으로 구는 게 나한테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네 멍청한 머리로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냐고.” 

 부질없이 허공에 부르짖는 일인 걸 알면서도, 그는 꾸역꾸역 노기를 쏟았다. 갈데없는 분노가 쌓이고 쌓여 목 끝까지 꽉 채워서 이제 더 담아둘 데가 없었다.
 환영은 그저 오래된 벽처럼 서 있었다. 얼마나 평소다운지. 사소한 행동이나 표정까지 이렇게 잘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진짜 거지 같네. 시발. 다 짜증 나.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한 거다.”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하. 그래서 속 편하시겠…….”
 “그래도 해.”

 후회한다고. 나직한 말이 무딘 칼처럼 찔렀다.

 “후회는 선택했다는 증거니까. 너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브롤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가, 이내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개새끼…… 넌 진짜 개새끼야. 절대로 용서 못 해.”
 
 차라리 끝까지 나쁜 새끼였어야지. 그렇게 굴 거였으면 뒈지질 말던가. 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됐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고.
 제 이름처럼 앞뒤 재어보지 않고 위험에 달려드는 성정. 부싯돌처럼 부딪히던 순간, 불꽃을 피우던 순간. 그 불꽃이 스스로 태우고 무너져 재로 흩어지던 순간.
 모스는 그 재를 붙잡으려 애썼고 그 연기를 들이마셨다. 알고 있었기에 더 용서할 수 없었다.
 카로 그라인은 선택을 했다.
 그 뒤에 덧붙여질 어떤 말도 이 사실을 바꾸지는 못했다.




 

5.



 모스는 느릿느릿 스컬록 저택을 나섰다. 펜스 너머로 쪼그려 앉은 인영이 보였다. 설마설마했지만 그 조그만 몸집을 못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낡은 문이 녹슨 쇳소리를 내자, 칸드라는 제 무릎에 푹 묻은 고개를 굳이 돌리지 않은 채 모스에게 힐끔 눈길을 보냈다.

 “이제 어쩔 거예요?”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여기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모스는 이걸 어떻게 놀릴까 궁리하다가, 이번 한 번은 특별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어쩌긴 뭘 어째. 놀다가 때 되면 일하러 가야지.”
 “…….”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따라 죽기라도 할 줄 알았어?”
 “……그런 거 아니면 됐어요.”

 칸드라는 짐짓 무신경을 가장해 대꾸하고는, 툭툭 옷을 털고 일어났다. 그 얼굴에 담긴 옅은 안도감은 쉽사리 읽혔다. 모스가 멀뚱멀뚱 쳐다보는 동안 칸드라는 새침한 동작으로 빙글 돌아 앞서 걸어갔다. 모스는 한 발짝 늦게 뒤따르며 깍지 낀 양손을 제 뒤통수에 대었다.

 “어디 가? 바빠?”
 “왜 물어요?”
 “할 일 없으면 내가 잔뜩 따게 해줄 테니까 같이 가자고.”
 “브롤, 당신 정말……!”

 칸드라가 눈썹을 치켜세운 채 휙 돌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스는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뺀질거렸다.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흐른 끝에, 칸드라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번만이에요.”

 알았어, 알았어. 대꾸하며 그가 히죽거렸다.
 삶이란 언제 던질지 모르는 마지막 주사위 같은 것이어서, 제대로 걸어볼 만한 순간이 올 때까지 그는 그저 손안에 움켜쥐고 굴리며 그 뭉툭한 모서리를 외울 셈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 그는 생각했다. 분명히 올 거야. 비록 이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6.



 파도 소리가 들렸다. 물안개가 일어난 검은 바다 위로 등댓불이 비쳤다. 일렁이는 빛은 파도 위에 물비늘을 그리며 천천히 주변을 쓸었다. 빛이 닿은 물마루는 잠시나마 새파랗게 물들었다. 바다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육지를 희구하며 떠돌다 그 빛에 의지하여 비틀거리면서도 자기가 있을 곳을 찾아갔다.
 등댓불을 지키는 유령은 자기 자신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눈앞에 망연히 펼쳐진 것은 별이 박힌 하늘과 바다. 그리고 그사이에 그어진 이름 모를 경계선. 새카맣게 점멸했다가 다시 번지며 이어지는 순간과 순간들. 의미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영원히 멈추어 있다. 그저 이따금 고장 난 기록기처럼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의 꿈을 꾸거나,

 

섬스포가...어디보자...프로피티아(팬)... 아틀란티스 넥소스(팬) 코르디아(공식)...정도인가?? 프로피티아빼고는 스포가 쎄진 않고 자잘하게 나오는 정도인데 아무튼 다 개짱재밌는 섬이랍니다

내용도 세션중에 있었던 일 띄엄띄엄에 날조에 적고 싶은 것만 적어서 이쯤대면 같탁피플정도만 이해가능하지 않을지요 아무튼 전 재밌었으니까 됐죠?????

++맞다 벨요소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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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로피티아에서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혈육 폴리케와 재회했을 때 헬레네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동생이 오만의 제물이 되어 자기 자신을 좀먹고 제멋대로 섬을 주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헬레네는 동생을 믿었다. 시티르는 이해할 수 없는 초조함을 갖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폴리케의 방자함을 벌하기 위해 하늘에서 제우스가 내던진 벼락이 세상을 뒤흔드는 순간에도 헬레네는 사랑하는 동생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폴리케가 여전히 그녀가 사랑하는 작고 귀여운 아이라도 되는 양 그러안고 벼락을 맞았다. 그 순간 헬레네가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데메테르의 가지가 삽시간에 나무로 자라나며 그 둘을 떨어트려 놓았다. 하늘을 향해 소리치던 폴리케는 그녀의 눈앞에서 숯덩이가 되었다. 순식간에 새카맣게 익어버린 몸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올라왔다.
 헬레네는 울부짖었다. 절규가 땅을 가득 채웠다. 시티르는 그 목소리를 듣는 일이 괴로웠다.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로? 그는 헬레네와는 달리 그 오만한 사제를 처음부터 포기했고 그녀에게 이런 결말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망이 눈을 가려 신에게 감당 못 할 거래를 걸 만큼 오만한 자들은 결국 타르타로스의 명부에 그 이름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요,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런데 왜.
 왜 그렇게 슬퍼해야만 해요? 고통은 너무 쉽게 전해졌고 숨이 가쁠 정도로 거슬렸다. 폭풍 속에서 온 날개깃이 뻣뻣하게 섰고 흉곽 안쪽으로 마구잡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정돈된 사고를 뒤흔들었다. 목 뒤가 뜨겁게 타올랐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날개를 펼쳤다. 자기가 무얼 하는지도 모른 채, 곧장 날아올랐다. 단 한 순간도 아래로 눈을 돌리지 않았던 까닭에 그는 깨닫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일 만큼 까마득한 높이까지 날아오른 후에도 그 비명은 여전히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만.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길게 펼쳐진 날개가 바람을 거스르고 때때로 그 틈 사이를 비틀어 율동하면서 마구잡이로 공기를 갈랐다. 하늘과 땅 사이의 높이는 땅과 타르타로스 사이의 높이와 같았다. 시인들이 즐겨 말하기를 청동 모루가 아홉 날 아홉 밤 동안 떨어지는 간격이었다. 직접 날아 올라본 적이 없는 자들의 과장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여도 잠깐 숨 돌릴 시간도 없이 이렇게 높은 곳까지 한달음에 올라와 본 적은 없었다. 세찬 비에 젖고 온갖 방식으로 학대당한 날개 근육에서 뜨거운 김과 서리가 동시에 피었다. 너무 가까이서 천둥 치는 소리를 들어서 귀가 먹먹하게 울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찼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무언가 씌인 사람처럼 벼락과 벼락 사이를 잽싸게 통과하며 몇 번의 날갯짓으로 구름 사이를 헤쳤다.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신과 인간의 세계 사이를 벗어났다. 그 너머에 닿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서 당장이라도 입으로 뱉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으려고 했어요, 그땐.”

 공허한 말이었다. 그는 자기가 본 찰나를 떠올렸다. 그 순간이 도자기 조각처럼 눈에 박혀 아무리 애를 써도 잊히지 않았다. 구름 위 젖빛 대리석으로 눈부시게 빛나던 세상. 시야를 채우던 거대한 손. 연회의 유희에 젖을 때 신들이 취하는 부드러운 외양이 아니었다. 자기 광휘를 최대한 끌어올려 무언가를 짓누르려 할 때의 모습. 제단에 나른하게 걸터앉아 기름과 뼈의 연기를 들이마실 때가 아닌, 죄지은 먹이를 낚아채기 직전의 찬란하고 영광으로 가득 찬 모습.
 진저리 날 정도로 잘 알았다. 나 자신의 한계 정도는. 막을 수 없다는 것쯤은. 하지만 아직도 귓가에서 그 비명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제발 멈춰줘. 더 듣고 싶지 않아. 뻗어오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은 그랬다.
시티르는 바다로 추락했다. 그가 바다에 뛰어들어 자신을 받았다고 했다.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또 이럴 생각이냐?”

 레온티오스의 불퉁한 목소리가 시티르를 다시 현실에 데려다 놓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시티르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지금 시티르가 머무르는 곳은 전에도 신세 진 바 있었던 좁은 침대 위였다.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목숨이 붙어 있는 게 기적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 순간 제우스는 관통하는 벼락의 주인이자 그 자체였고 그의 부드러운 인간의 살을 한 겹 덮고 있던 냉기의 바람은 갈가리 찢어져버렸다. 그의 날개는 불타서 사라졌다. 몸은 뜨거운 열기가 훑고 간 통증에 시달렸고 그는 며칠 내내 겪어본 적 없던 고통스러운 밤을 보냈다. 신체의 고통은 일부에 불과했다. 신의 선물은 그의 영혼에도 상흔을 남겼다.
 그래도 어쨌든 농담할 정신은 있었다. 이전에 겪은 바 있었던, 세상이 무너지는 절망은 아니었다. 신들이 자신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는 바. 

 “기회가 있겠어요?” 시티르는 그의 물음을 자조적인 방식으로 빠져나갔다. 정말로 또 그럴 계획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스스로 확신이 없어서였다.
 레온티오스가 앞에서 짧게 혀를 찼다. “다시는 그러지 마. 그런 일 없게 할 테니까.”
 “알아요. 나랑 어울리는 일은 아니었죠.”
 아직 한참은 일렀지만 이런 기억은 차라리 까마득히 지나간 일 취급하고 싶어서, 그는 현실의 풍경에 집중하며 눈앞에 있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왜 답지 않게 그런 짓을 하느냐고, 마저 덧붙이는 퉁명스러운 목소리. 찡그린 미간. 제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 눈매가 보였다.
 “그런데, 계속 서서 얘기할 거예요?” 대놓고 말을 돌리는 듯한 기색에 레온티오스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럼 내가 환자 자리를 뺏겠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온티오스는 시티르가 걸터앉은 침대 앞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팔짱을 낀 채였다. 올려다봐야만 했던 눈높이가 조금 아래로 옮겨갔다. 

 “그 위쪽은 어땠어?”

 레온티오스가 물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 몇 마디가 근처를 스치는 것만으로 각인된 그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도망가고 싶은 감각까지 뒤쫓아왔지만 더는 날개가 없었다.
 “별것 없던데요.” 시티르는 허세를 섞어가며 평소보다 가벼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새삼스러운 감상이 남을 만큼 오래 머물렀던 것도 아니었다. 멋지고 새하얀 곳이긴 했으나 그걸 떠올리고 부러워하면서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들기도 싫었다. 하지만 눈앞의 레온티오스는 여전히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재밌지 않아?”
 “내가 신이라도 됐다면 그랬겠죠. 난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는 법은 잘 몰라요.”

 송진처럼 뭉근하고 끈적하게 몸에 달라붙어 있는 통증, 평소보다 날을 세운 자기방어가 평소였다면 쉽게 읽어낼 만한 것들을 방해했다. 시티르는 그가 무슨 의도로 그렇게 물어오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는 원래 신들의 세계 같은 것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두던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레온티오스 씨가 그쪽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는데.”

 그는 순간 허를 찔린 표정을 했다. 이내 입술이 단단하게 다물렸다. 얼핏 무언가를 걱정하는 것 같기도, 막연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의아해진 시티르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느릿한 움직임으로 그의 뺨에 한 손을 얹었다. 자기가 모르는 게 뭐건 간에 펼쳐놓고 조금 더 만지작거리고 싶었다. 불건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관심 있어요? 궁금해요?”
 그는 한참을 침묵했다.
 “아냐.” 그러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관심 없으면 됐어.”

 레온티오스는 그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만지작거리던 손안이 허전하게 비었다. 그 존재감은 좁은 방을 채우다가 몇 번의 발걸음으로 너무 쉽게 빠져나가려 했다.
 그 순간 텅 빈 손끝에서부터 묘한 한기가 일었다. 겪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견디기 힘들 만큼 생소한 느낌이었다. 고작 몇 걸음 움직인 것뿐인데 그가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곳까지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한 시티르는 자기도 모르게 툭 뱉었다. “가지 말아요.”
 “조금만 더 여기 있어요.”

 그리고 찰나의 정적. 살짝 벌어진 나무의 틈새로 미약한 빛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공기 중에 가볍게 먼지가 떠도는 게 보였다. 반응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을 먼저 내던지는 일은 늘 낯설어서 시티르는 말과 말 사이의 공백에 묘한 긴장감까지 느꼈다. 지금이라도 그냥 장난이었다고 둘러댈까? 그가 정말로 그 말까지 토해놓기 직전에 레온티오스가 묵묵히 뒤돌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서 시티르가 비워둔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짚을 깐 리넨 천이 옆으로 조금 기울었다. 시티르는 자기도 모르게 시트를 구겨 쥐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을 풀었다.
 둘은 한참을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나뭇결 너머로 파도가 뱃전을 건드리고 가는 소리만이 미약하게 울렸다. 시티르는 아주 느리게 깨달았다. 자신이 겁에 질렸다는 것. 이 비좁은 배 안에 갇혀 더는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 적어도 지금 당장 혼자 있고 싶지는 않다는 것. 그런 나약함은 직접 이해한 뒤에도 그다지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꾸며도 매끄러운 말로 나오지 않았고 자기 약점을 투박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게 최선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레온티오스였다.
 
 “너 아직도 고향에 돌아갈 마음 없어?”
 “그다지요.”

 평소 같았더라면 뒤에 올 말을 기민하게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었다. 질문 자체보다는 질문 너머를 보면서.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는 자신을 뒤따라올 재앙, 날아서 지나치던 곳을 두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미래, 그런 것들이 먼저 떠올랐다.
 레온티오스는 어울리지 않게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럼, 너만 생각 있으면 나랑 같이 갈래? 내 고향에.”

 ……네? 시티르는 순간 눈이 동그래져서 돌아보았다.

 


 
  2
 헬레네는 화상에 바를 쓸만한 연고를 들고 왔다. 그녀는 늘 그랬듯 신중했다. 그의 등에 임시로 덮어둔 천을 떼어내고 그을린 상처를 확인했을 때도 그저 짧게 숨을 들이켰을 뿐 티를 내지 않았다. 지금 당장 그런 순간까지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았던 시티르는 그런 배려가 고마웠다.
 헬레네는 곧 소식이기도 했다. 그가 하늘에서 떨어진 직후 정신을 잃었기에 듣지 못했던 섬의 뒷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데메테르 여신의 도움으로, 그리고 그 뜻을 짐작하기 힘든 운명의 여신들의 안배로, 폴리케가 새카맣게 불타 죽었던 그 자리에서 붉은 꽃이 피어났고 그녀가 여신 휘브리스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걸로 괜찮은 건가요?” 여동생에게 일어난 이 일이 헬레네에게 무슨 의미인지 단박에 이해하기 어려웠기에, 침대에 엎드려 있던 시티르는 고개를 돌려 찬찬히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살아 있으니까. 비록 내게 익숙한 형태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헬레네는 어딘지 홀가분해 보였다.
 다행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제 팔들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더는 그런 슬픈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내게 눈에 보이는 증거보다 중요한 건 살아가다 보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감각이라네. 그 마음 하나만으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왜, 함께 별을 바라보고 있다면 멀리 있어도 닿아있는 기분이 들지 않나.”
 “흐음. 같은 걸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받는 건가요?” 알 듯 말 듯 했다. 그는 갑자기 주어진 문제를 고민하느라 두 다리를 번갈아 까딱거렸다.

 “그렇네. 그 애도 어딘가에서 나처럼 무사히 별들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당장 곁에 함께 있는 게 아니더라도요.”
 “자네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지 않나?”

 그런가, 그는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항상 그의 곁에서 자기 힘을 증명하는 아버지조차 헬레네가 자기 동생에게 하듯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북풍은 태어나기를 차갑고 날카로우며 폭력적인 바람이었고 그를 들어 올리는 힘이었다. 하지만 헬레네가 동생에게 보인 애정은, 글쎄, 한없이 따뜻하다가도 가끔은 너무 뜨거워서 자기 자신까지 파괴하는 힘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턱없이 위험했다. 사람을 순식간에 번개에 뛰어드는 바보로 만들질 않나, 척 봐도 자기를 죽이려는 수작에 걸려들 만큼 이성을 날려버렸다. 그런 열기를 탐냈다가는 그 불씨가 순식간에 자신을 태울 걸 알고 있었다. 이번만 하더라도 충분히 배운 참이었다. 그저 그 끄트머리에 스치듯 닿았을 뿐인데 자기 통제를 잃고 날뛰다 바다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그렇게까지 다 죽어가면서 생각하고 싶은 남이 있냐고?
 “아뇨.” 마음의 문제라는 게 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기만 했더라면, 분명 사양했을 것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진저리를 치고 도망갔을 것이었다.

 “정말 없나?”

 하지만 헬레네는 레온티오스가 아니었다. 눈치가 좋았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녀의 눈썹이 파도처럼 물결치는 게 느껴졌다. 시티르는 못 이기겠다는 듯 웃었다.

 “헬레네 씨……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왜 또 모르지 않나. 자네에게도 소중한 사람이 있을지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전적으로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시티르는 순순히 인정했다.

 “정말이지, 헬레네 씨 반만이라도 눈치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다. “어쩌겠나? 그렇게 눈치 없는 놈인 걸 알고 반한 거 아닌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또 할 말이 없긴 한데요.”

 하긴 이제 와 누굴 원망하는 것도 우습기만 했다. 시티르는 제 팔 위에 턱을 괸 채 한숨을 쉬었다. 네가 관심 없으면 됐어. 레온티오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을 때 그 빈 자리에 남았던 소슬한 한기가 떠올랐다. 어떤 뜨거운 것이 놓였다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는 휑한 느낌. 그런 감각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서 못내 거슬렸다. 자기 자신도 제대로 모르니 남에게 설명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추위를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스스로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여기면서 살았는데,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그렇지가 않네요. 전적으로 당신들이 원인인데, 나는 아무래도 탈 배를 단단히 잘못 고른 것 같아요. 이 배에 너무 오래 있어서 이상한 물이 들어 나까지 바보가 되는 기분이라고요. 샐쭉하게 불평을 할 수도 있었겠으나 헬레네에게 그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생각의 가닥을 옮겨 다른 얘깃거리를 더듬었다.

 “저, 헬레네 씨는 애초에 왜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던 건가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얘길 들으니 궁금해져서요.”

 그 물음에 헬레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가늠하는 것 같기도 했고, 눈을 감지 않고도 한참 먼 곳에 닿았다가 온 듯도 했다. 그는 날개가 있어도 못 하는 재주였다. 그녀는 편안한 동작으로 굳은살이 박인 한 손을 자기 무릎에 내려놓았다. 뿌리가 깊은 사람 특유의 선명한 눈동자가 있었다.

 “언젠간 자네도 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거야. 거기에 무언가 있다, 없다 하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일 뿐이라네.”
 “그만큼 중요한 곳이라서?”
 “아무것도 없어도 그게 내 고향이니까.”

 있을 자리가 있다는 감각이 꼭 그럴까?
 온 하늘이 내 것 같던 날들, 한없이 자유로웠던 날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는 어디든 갈 수 있었고 원한다면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빛날 수 있었다. 그런 것을 다 내버리고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레온티오스에게 함께 가자는 얘기를 들은 뒤로, 시티르가 막연하게 상상이나 해보던 그 감각을 헬레네는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듯했다.

 “그런 곳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나한테도 좋은 일일까요.”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지만. 시티르는 한쪽 팔에 고개를 기댄 채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매번 헬레네 씨를 보면 신기하다고 할지 배울 게 많다고 할지, 제가 전혀 모르는 걸 많이 아시네요.”
 “사람마다 사는 게 다르니 말이야. 나도 똑같이 자네에게 배운 점도 많고 새로 이해하는 것들도 많다네. 그러니 재밌는 것 아니겠나?”
 “그러면 나쁘지 않은 친구인 셈이죠?”

 둘은 어울리지 않게 작당 모의를 하는 어린애들이라도 된 양 마주 웃었다.


 
 
  3  
 “다시 날 수 있을 거야.” 그가 자기 세계에서 기다리는 결말을 향해 떠나며 남긴 말이었다. 내 몫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너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4
 애착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 외에 다른 무언가가 내 마음 위로 비집고 들어오는 걸 무력하게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아낀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왜 간단한 생각 하나조차 내 마음대로 멈출 수가 없게 되었을까. 그리 세게 붙잡은 것도 아닌 손길 하나도 뿌리치지 못하게 되었을까. 언제든 내가 원하는 대로,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었는데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어버린 걸까. 거슬려. 생각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한껏 입꼬리를 휘어도 보았다. 거슬렸다. 아무 효과도 없었다. 몸이 끔찍하게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한순간도 홀가분하지 않았다. 가슴을 감싼 뼈마디 사이사이로 실밥이 마구 엉켜 있는 기분.
 끈질기게 훼방 놓던 운명의 실이 결국 나를 지하로 끌어당긴 그 순간조차, 어떻게 보면 이미 예정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추락이란 그런 의미였다. 신들의 뜻은 인간의 이해 너머에 있고 한번 운명이 꺾인 존재는 기어이 바닥을 본다는 것이 극작가의 순리였다. 나는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은 것들이 나를 아래로만 잡아당길까? 하나같이. 내가 저 먼 데까지 날아오르도록 도와주질 않아.
 그렇게 불평해도 개운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원인을 알고 있었다. 몇 마디 볼멘소리를 더 해봤자 정해진 사실은 확고했다.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이 아래에 정을 붙이고 머뭇거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헤어나기 힘든 사랑에 빠진 것도, 자신과 운명이 묶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그 노인을 구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고향에 돌려보내길 선택한 것도, 남의 슬픔 때문에 이성을 잃고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은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러니 결과도 스스로 감당해야만 했다. 갈라진 땅의 살갗에서는 아레스의 발밑에서 나던 진한 흙냄새가 진동했다. 그 밑에 숨겨진 시체 구덩이의 악취, 수천수만 구의 냄새를 함께 맡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운명이 다하기 전까지 그가 행복하니 불행하니 쉽게 평가하지 말라고 했던가. 일이 모두 마무리된 다음에야 그 속뜻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있고 인간의 운명도 결국은 거기에 속했다. 그러니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바닥을 치는 게 어떤 기분인지. 
 


  

  5
 밤바다의 숨죽인 어둠을 가르는 대신 그 어둠에 기꺼이 잠기며, 헬레니우스 호가 나아가고 있었다. 뱃마루가 느릿하게 흔들렸다. 그는 갑판에 맨발을 디디고 선 채 둘러보았다. 바다는 역청처럼 검었고, 하늘에는 별 한 점 없었다. 새카만 해무에 싸인 듯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희미했다. 신들이 태어나기 전 태초의 공허가 이런 색이었을까? 까마득히 높은 곳에 뜬 은빛 달만이 반쯤 감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 단조롭고도 비현실적인 풍경을 보며 시티르는 생각했다. 꿈이구나.
 꿈은 아름답지만 언제나 미심쩍고 의뭉스러운 신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거쳐 나오는 문은 두 가지였다. 진실한 예지의 소식이 걸어 나오는 뿔의 문. 괴이하고 망령된 속삭임이 태어나는 상아로 된 문.
 이 누추한 곳까지 도착한 이야기는 어느 쪽일까? 그는 기지개를 켜듯 양팔을 죽 늘이고는 갑판에 팔꿈치를 댔다. 지금쯤 그의 잠든 몸은 카론의 배에 실려 아케론의 가장자리를 떠돌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깜빡 조는 중인가 보지. 아무렴 사자의 강변의 시시하고 소름 끼치는 풍경에 비하면 익숙한 이곳이 훨씬 나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랐을 때,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티르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얼굴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아래로 훅 내려앉았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얼굴이었는데 보자마자 눈을 뗄 수 없었다. 시티르는 제자리에 굳어버린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시티르가 그러건 말건, 레온티오스는 성큼성큼 다가와 곧장 그를 끌어안았다. 오래 머뭇거릴 새도 없이 익숙한 묵직함이 온몸을 감쌌고 순식간에 오감이 한 사람으로 가득 찼다. 익숙한 살갗의 냄새, 금방까지 따뜻한 불 가에 있다가 온 사람한테서 나는 옅은 그을음 향기가 났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게 신들의 자비일까. 아니면 더 큰 비극을 위한 조금의 유흥일까. 목구멍 안쪽이 따끔거렸다. 이건 그저 꿈이야. 알고 있는데도. 모든 일이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그가 곁에 있는듯한 현실감에 묶였다. 붙잡듯 자신을 끌어안은 손길은 뱃고물을 항구에 매는 밧줄처럼 단단했다. 한편으로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신기루를 안는 것처럼 조심스러우면서.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목소리는 닿은 몸의 울림을 통해 전해졌다. 가라앉은 숨결이 바로 귓가에 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도 확신도 없으면서, 시티르는 달래듯 속삭였다. 정말로 그렇게 믿는 사람처럼 다정한 말씨였다. 그 말은 허공에 잠시 떠 있다가 의미 없이 흩어졌다.
 그의 품은 따뜻하기보단 뜨거웠다. 정돈되지 않은, 거친 맥박이 느껴졌다. 억누르고 있었지만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울고 있다는 것쯤은. 시티르는 천천히 양손을 들어 그를 마주 안았다. 그가 자신을 완전히 품에 가둔 것에 비해 지금 자기가 덮어줄 수 있는 공간은 미약했다. 날개가 있었다면 전부 가려주었을 텐데.

 “네가 얘기하던 걸 들었어.” 문득 그가 말했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자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깨어진 하늘의 조각에서 튀어나온 다른 세계의 자신은 신들의 뜻을 전해주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있었다. 지겨워. 재미없고, 시시해. 그저 그렇게 불평을 늘어놓을 뿐 이유는 전혀 몰랐다. 그런 모습이 예전의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해주어야만 했다. 그의 옆에 앉아서 듬성듬성 꿰맨 이야기를 내려놓을 때만 해도 자신의 말을 누군가 듣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당황한 시티르가 뭐라 입을 뻐끔거리려는데 메마른 여름 땅처럼 갈라진 그의 목소리가 꽂혔다.

 “넌… 대체 왜 그래? 뭐가 그렇게 매번 지겹고, 재미가 없어?”

 원망하는 투는 아니었다. 그저 말소리도, 태도도, 평소 같지 않을 뿐이었다. 평소 같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시티르는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것도 잊은 채 놀랐다.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내가 나로 있는 것이 그를 상처 주기라도 한 걸까? 내가 뿌리내리지 못해서, 그 모든 순간이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언젠가는 질려서 떠나버릴까 봐? 좁은 방에서 망연히 한발 물러서던 그 모습에서, 읽지 못했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았다. 그 자리의 이면에 서 있었던 건 선명한 불안감이었다. 그 순간에는 읽을 수 없었을 법도 했다. 서로 재밌으면 됐지. 그렇게 말하며 자신만만하게 눈을 빛내던 그의 모습만 보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더 많이 알았다. 차마 뿌리치지 못했던 손길, 되묻던 목소리. 모든 것을 잃은 눈을 알았다.
 그가 이렇게 날것의 자신을 내보일 때마다 시티르는 헤아릴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맨몸에 드러난 흉터를 하나씩 짚고 이야기해주었을 때, 코르디아의 절벽 아래서 본, 자기가 갈구하던 그러나 가지지 못했던 과거를 화난 목소리로 하나하나 씹어서 뱉어냈을 때. 아버지, 그렇게 발음할 때의 표정. 그는 자기가 느끼는 거라곤 무엇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했다. 부서지든 부서트리든 부딪혔고, 좋든 싫든 분명히 떠오르는 것이라면 내보이고야 말았다. 그 모든 움직임이 못내 낯설었다. 적어도 그가 배운 왕의 화법은 그런 식이 아니었다.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내 흠집을 남에게 내보여서 득이 될 거라 여겨본 적도 없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온전히 눈부신 신의 자식, 흠집 없이 닦인 조각상이어야 했으니까. 내 상처는 내가 아니니까. 그런 것은 가져본 적도 없으니까. 그게 그의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이었다. 언어의 세계에서는 거짓과 기만이야말로 무기고 방패였다. 그런데 그는 매번 서슴없이 무장을 내던졌다. 이상하지 않나요. 약점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마음껏 드러내니 모르기가 더 어려운데. 내가 이걸로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남이 걸어온 여정의 단면을 훔쳐보는 기분으로, 인생의 지도처럼 펼쳐진 상처를 만지작거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더라. 손으로 쓸면 단면이 거칠고 가끔은 움푹 들어간 흉터들. 몸과 마음에 각각 기록된 한 인간의 역사. 바꾸지 않기를 선택했던 당신이 당신이라는 증거들을 더듬어 읽으면서. 천성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있기 때문일까. 정말로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아서일까. 어쩌면 아무래도 상관없기 때문일까. 짐작만 더해갈 뿐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쉽게 옮아버리고 마는 것은, 아직 그가 어린 탓이었다. 아니면 사랑 때문에 정말 바보가 되었거나. 스스로 원하던 만큼 충분히 세련되지 못해서인지도. 혹은, 내심 부러웠기 때문인지도. 긍정도 부정도 없이 그저 한없이 자기 자신인 태도가. 그걸 보면 조금쯤은 털어놔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도해보기로 했다. 설명하고 싶었다. 닿을 수 있다면 닿고 싶었다. 그간 들여다본 적 없던 자기 자신의 약한 면은 암시와 방어기제로 가득 차 모호하고, 꿈속의 해안선처럼 안개에 덮여 있으면서, 잘못 건드리면 덜 아문 상처처럼 따끔거렸다. 직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말을 자주 멈추고, 이따금 더듬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길을 헤매는 듯 조심스럽고 불분명한 태도였다.
 나는 허전해요. 가끔 아주 텅 빈 것 같은 기분을 느껴요. 금방이라도 공기 중에 흩어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될 때가 있어요. 내가 희미해지는 순간이 있어요. 무슨 짓을 해서든 정적을 메우지 않으면 그 순간은 아주 빨리, 긴박하게 다가와요. 단편적인 즐거움 때문에 그 감각이 멈추는 건 아주 찰나고 모든 것은 이내 끔찍하게 지루해지지만 어쩔 수 없어요. 내가 아는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그래서 천천히 습관이 되었을 거예요. 기억하기도 힘든 먼 옛날부터 이 모든 게 내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나는 내가 비어있는 줄도 몰랐어요. 계속 추위 속에 있는 사람이 추운 걸 모르는 것처럼요. 바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여겼는데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람은 부정형이니까. 내가 아무리 용을 쓴들 멈출 수 없는 움직임이고 힘이지 가슴을 채우는 것이 아니니까. 불어오고 떠나면 그만이니까.
 그래도 말이죠.

 “당신이랑 있을 때는 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

 꿈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곁에 있는데도 말을 이어나갈수록 이상하게 그리운 기분이 목울대를 채웠고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다친 육식동물처럼 굴면서 고개를 더 깊이 파묻을 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시티르는 결국 상체를 조금 아래로 빼고는, 레온티오스가 덮어쓴 사자 가죽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 시선을 찾아갔다. 지금은 어떤 표정이어도 좋을 듯했다. 제대로 눈을 마주 보고 싶었는데 그럴 틈도 없이 입술이 겹쳤다.
 모든 것은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번만은 져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눈을 감고 천천히 받아들였다. 길지 않은 입맞춤이었다. 막 돋아난 깃털처럼 연약하면서 다시는 없을 것처럼 갈급했다. 마지막인 것처럼 힘겨웠다. 그 순간만은 그와 맞닿아 있는 부분만 온기를 알았다. 다른 부분은 그냥 꿈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난생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장 그럴 수 없는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각도 없이. 자기도 모르게 껴안은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영영 내려앉고 싶어. 이대로 질식하고 만대도 좋아. 딱 그만큼의 전율. 그만큼의 슬픔이었다.

 “데리러 갈게.”

 오래 참은 숨을 내쉬듯 쏟아져 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내가 어떻게든 할 거야. 다시 돌아오면… 너한테 빈 부분이 뭐든, 내가 채워줄게.”

 그 어떤 신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도 맹세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이런 마술은 그에게만 있는 재주였다. 시티르는 눈썹 끝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힘없이 웃었다. 내가 얘기하는 걸 다 들었다면서. 당신은 역시 전혀 모르네요.

 “이미 그러고 있는걸요.”

 그러니 데리러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려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차가운 안개에 덮이며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사라져갔다.
 시티르는 흐려지는 그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새길 듯 바라보았다. 노 젓는 소리가 오수에 스며들어 가까워졌다. 벌써 저만치 잠이 멀어지고 있었다.
 
 


 
  6
 “좋은 꿈 꿨어, 왕자?”

 시티르는 그렇게 하면 남은 꿈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오래도록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헤르메스의 매끄러운 입가에 파인 볼우물이 깊어졌다.

 “그건…… 관점에 따라 다른데. 부탁드릴 게 있어요, 아르고스의 살해자.”
 “말해 봐.”

 그편이 재미있어 보였기에, 헤르메스는 기꺼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황금 샌들의 전령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다. 그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헬레니우스 호는 정말로 저승의 입구에 걸쳐 있었다. 데리러 온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상아색 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잠깐이지만 정말로…… 그를 다시 만났던 걸까. 시티르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사실이라면 더더욱, 둘이 이쪽으로 넘어오게 둘 순 없었다. 여차하면 줄줄이 사이좋게 여기 갇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막무가내들만 두고 왔으니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최대한 빨리, 알아서 탈출해야만 했다. 거짓말이건 도둑질이건 할 수 있는 건 다 쥐어짜서라도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그 어떤 때보다 머리가 복잡했다.
 남의 타들어 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뱃사공은 꾸준히 노를 저어 나아가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이 강을 건너게 될 줄은, 아니, 설혹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짐작했어도 이 순간까지 이렇게 잔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시티르는 강에 어슴푸레하게 비친 자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조금의 웃음기도 남지 않은 얼굴. 노의 규칙적인 움직임에 간헐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드는.
 운명의 실이 어떤 식으로 꼬이고 얽혀버린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의 인생에 지독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무서워하던 모든 일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날지 못하게 되는 것,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되는 것, 운명의 불확실함만을 믿고…… 하여간 전부 지독한 농담 같았다. 한 철 폭풍처럼 몰아치고 쏟아져 내렸다. 이제는 남들은 모든 불행의 진정한 결말이라고 한숨 지을 하데스까지 와서.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게 인간이잖아. 아주 바닥까지 떨어지고서야 알았으니까,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 남아 있는 선물을, 나 역시 받았다는 걸.
 시티르는 자기 머리가 집안의 마지막 재산이라도 되는 양 하염없이 붙잡고 있다가, 무언가 즐거운 일을 관람하듯 턱을 괸 신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존경스러운 마이아의 아드님.”
 “으응. 듣고 있어.”
 “제가 하데스는 처음이라 그런데, 조언해줄 만한 건 없으신가요?”

 어디까지 알려줘야 재미있을까? 황금빛 시선 뒤로 저울이 돌아가는 게 보였다. 마음대로 재어보라지. 원하는 건 뭐든지 내어줄 수 있었다. 신의 광대 짓이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어디보자, 한 가지 정도는 괜찮겠지.”

 헤르메스는 얼굴에 드리운 미소를 감추지 않은 채로 가볍게 손짓했다. 시티르는 그에게 고개를 가까이했다. 신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후기연성 브라코이 섬의 스포일러가 있음 후반에 남캐끼리 좀 그렇고 그런거 있음...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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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벽에는 그 한마디가 쓰여있다. 그는 자부심에 차서, 한 번도 흔들려 본 적이 없는 자기 확신이 어린 눈으로 그 문장을 마주 보았다. 자신을 아는 것은 그가 겪어본 숙제 중에 가장 쉬웠다. 그는 그게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된다는 듯이 가볍게 벽을 짚으며, 나는 신의 아들이고, 비상하는 자라고 대답한다.

 북풍과 인간 여인 사이에서 난 쌍둥이 형제는 보레아다이라고 불렸다. 하늘만큼 푸른 눈을 가진 쪽이 칼리아스, 매의 날개가 달린 쪽이 시티르였다. 둘 다 반신반인이었지만 물려받은 것은 달랐다. 운명의 여신 클로토의 손길이 부드럽게 실을 꼬았다. 신성(神性)이란 본디 불공평하지. 그녀가 조소했다.
 형제가 나고 자란 곳은 지반이 높고 바다에 맞닿은 절벽 위의 도시였다. 시야를 어디로 던지건 언제나 넓고 푸른 하늘이 이마 위로 탁 트여있었다. 바람이 절벽과 절벽의 틈새를 휘돌아 달려갈 때면 언제나 깊고 음산한 음악이 울렸다. 어릴 적 시티르는 어머니의 무릎에 기대어, 달콤한 리라 연주라도 듣는 양 멀리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잠겨 들곤 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멀리서 울리는 섬뜩한 바람 소리였지만 소년에게 그것은 자장가고 약속이었다. 맹세이고 속삭임이었다.
 그는 걷기보다 날갯짓을 먼저 배웠다. 부드러운 솜털투성이였던 날개는 몸보다 빨리 자라서, 금새 뻣뻣하고 풍성한 깃털로 뒤덮였다. 오레이티아는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눈으로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그는 다루기 어려울 만큼 자기 세계가 뚜렷한 아이였고, 그녀는 그를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 아이에게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말과 사람 사이의 일, 태도와 방법 같은 것들뿐이었다. 시티르는 많은 것을 저 혼자 깨우친 양 굴었다. 제 동생과는 달리 단 한 순간도 아버지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한 편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말을 배우기 전부터 그는 바람의 속삭임을 들었으니까.


 바람과 보내는 시간은 찬란했다. 소년은 아버지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면 언제나 함께하는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신의 피로 데워진 몸은 가벼웠고 두 날개는 지치는 법을 몰랐다. 그는 그럴 수 있었던 순간부터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창공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얼핏 빈 듯 보이는 공간은 눈부신 에테르로 가득했고 바람은 그것을 순환하며 세상을 작동시키는 거대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사나운 북풍의 사랑하는 자식이었다. 내가 제피로스의 아들이었다면 좀 더 나긋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지. 서풍은 유려하고 따스하니까. 그러나 그의 신성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냉기로 지어졌다. 겨울을 불러오고야 마는, 목 뒤의 솜털을 쭈뼛 곤두서게 만드는 서늘한 숨으로부터. 한낮의 햇볕에 어깨를 그을어도 북풍이 손수 벼린 그의 날개는 녹아내리지 않았다. 깃과 깃 사이에는 언제나 차가운 바람이 맴돌았다. 먼 트라키아 땅을 넘어온 북녘 휘페르보레아의 향기가 거기 묻어있었다.
 그러니 단 한 순간도,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타고난 맹금의 눈은 바람의 결과 마디를 읽었고 날개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는 언제나 더 높이, 더 빠르게 상승했다. 인간의 공간과 신들의 공간, 그 어딘가 까마득한 곳까지 닿아 숨을 깊게 들이켜면 자유의 벅참과 공허감이 폐부에 가득 찼다. 그것을 오래 공들여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그가 지어온 생애의 전부였다. 
 자유로움. 길게 펼친 날개깃에는 저절로 그를 스쳐 간 바람의 무늬가 그려졌다. 그것이 그가 가진 신의 조각이 주는 영광이었다.

 반신반인의 생애가 으레 그렇듯 그는 양쪽 세계 모두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가진 인간의 단면은 그가 이 땅에서 영원히 발을 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남들만큼은 아니어도 그 역시 잠을 자고 식사를 해야 했다. 금수가 될 수는 없으니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문안과 작별의 규칙을 배웠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시시했다. 가지고 태어난 축복은 그의 등 뒤에서 언제나 빛났고 이는 단 한 순간이라도 숨겨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듯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쏟아지는 관심은 언제나 당연했고 그에게는 늘 엇비슷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어머니의 말대로 친구를 만들려고 애써도 보았지만, 그는 그들이 가진 번민과 고통에 결코 온전히 공감할 수 없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무리 설명한들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이방인의 감각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었다.
 운이 좋았던 지점은 그가 왕자이고 잔인한 재치를 타고났다는 것이었다. 그는 원하는 순간에 남의 기분을 띄우고 망치며 매끄럽게 이야기하는 법을 쉽게 깨우쳤다. 이후로는 모든 것이 훨씬 편해졌다. 대화란 그저 허공을 맴도는 장식품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그 행위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그래도 별반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 종류의 외로움이란 홀로 찬란한 자가 짊어지는 멍에 같은 것이었고, 그에게는 언제나 다른 선택지가 있었으니까.
 비상하는 것. 위대해지기를 꿈꿀 무렵부터 바람이 그의 귓가에 지나간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들은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수납하며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 별에 닿을 만큼 가까이 오르면 그 별자리에 얽힌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는 전갈자리의 꼬리로부터 도망쳤고 사수자리의 화살촉 끝을 피했다. 아. 별이 되고 싶다. 그는 생각했다. 그러면 다시는 땅에 발을 디디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결국은 고개를 젓고 만다. 한 자리에 영영 붙박이는 것도 싫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다른 영웅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그가 브라코이에서 두 나라 간의 전쟁을 막고 남의 사랑을 이루어주려고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무게 없는 마음의 발로였다. 세상은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들로 가득했고 영웅의 수요는 늘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여유가 되는 만큼 오지랖을 부렸다. 거기에는 특별한 의무감도, 신실함도 없었다.
 그러나 섬의 주인이 누구인가? 무쇠를 닮은 살육과 전쟁의 신이 산꼭대기에 강림하자 자그마한 세상은 곧장 그의 위압에 짓눌렸다. 공기가 창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피부가 시큰할 정도였다. 공기의 흐름을 예민하게 느끼는 날개는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레스는 진노했다. 그는 이들 영웅의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피와 살육이 없으니 훼방이고 반칙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산꼭대기로부터 바위들이 쏟아져서 인간의 몸을 짓누르며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제대로 된 무덤도 묘비도 얻지 못할 가여운 시신들이 바닥에서 으스러지고 바다 위에 둥둥 떠 올랐다. 전쟁신의 새 떼들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그 붉은 피를 들이켰다. 신들이 이렇게 잔인했다. 헬레네는 바닥에 이마를 짓눌렸고, 그녀의 웅변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너희가 내 발밑으로 와서 직접 얘기해보아라. 어디 들어보겠다.”

 선심을 쓰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 깊은 곳에서 차가운 바람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티탄 신족의 피가 가진 고질적인 오만 때문이었을까? 그럴 수밖에 없는 신의 앞이라 한들,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경건함 대신 비틀린 마음만을 느낀다.
 “아레스시여. 당신에게 아프로디테가 있고, 저희의 행동이 그녀의 뜻을 따르는 일인데 어찌 이렇게 가혹하게 구십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서풍을 흉내 내듯 부드럽다. 신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어 음절을 내뱉을 때마다 목구멍이 따끔거린다.

 “두 사람에게 자비를 보여주심으로서 당신의 그녀에 대한 애정을 증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언제나 신의 앞에서 대담했지만, 그걸 받아주냐 마느냐는 신들의 마음이었다. 헤르메스는 광대를 좋아했고 아레스는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그렇게 단순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듯한 신의 음성이 그의 말을 동강 냈다.

 “감히 네가 신들 사이의 사랑에 대해 논하느냐. 네가 그토록 오만한 것이 그 날개 때문이냐.”

 이어진 손짓 한 번으로 그는 바닥에 처박혔다. 어쩔 겨를도 없이 거대한 바위가 몸을 짓눌렀다. 자랑스러운 날개가 기이한 방향으로 꺾이며 부러진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권능이 또 다른 권능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다. 갈색의 날갯죽지에 붉은 피가 번졌고 살을 뚫고 부러진 뼈가 드러났다. 짓이겨지는 고통 때문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낮은 곳에 닿는 바람에서는 흙먼지와 피와 쇠의 냄새가 났다. 그는 절실하게 깨닫는다. 진짜 권능 앞에서 반신반인이란, 반쪽짜리 인간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반쪽짜리 신은 될 수 없다. 서늘하게 뺨에 닿아온 대지는 네가 죽어 돌아갈 곳은 결국 여기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벗어날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아닌 척하더라도 말이야. 입안에 쓰고 비린 맛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를 진짜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은 신의 태도였다. 타르타로스에 집어던지며 영혼까지 불태우는 격노가 아닌, 하루살이를 눌러 죽이듯 무신경한 분노. 그의 존재 이유를 꺾고도 아레스는 아무런 마음의 거리낌이 없을 것이었다. 그는 신의 청동 조각 같은 위엄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고 그 마음에 한 점 티끌로도 남지 않을 것이었다.
 몸의 고통보다 더 치욕적인, 겪어본 적 없는 굴욕의 냄새. 그 안에서 숨쉬기조차 힘겨웠다. 아버지. 저를 이런 곳에 내버려 두지 마세요. 제가 당신의 영광에 누를 끼친 적이 있습니까. 어째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제발…….
 그렇게 빌고 싶어도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그의 몸을 짓누르던 바위가 폭발하듯 산산조각 났다.
 시간이 장난을 치는 듯 찰나의 모든 일이 느리게 흘러갔다.
 누가 감히 신의 벌을 거스르는가? 감히. 고통을 앞지르는 놀라움에 그는 힘겹게 고개를 움직였다. 부서진 돌의 파편들이 일으킨 먼지와 흙 보라 너머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러다 흐리던 시야가 서서히 또렷해지면서,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팔뚝에 핏줄이 일어날 정도로 세게 몽둥이를 쥐고, 그의 앞을 막아선 채로, 아레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그런 식으로 올려다보는 것. 인간에게 외경하는 마음이 인 것. 신에게 반항하는 자를 목도하는 것. 누군가를…….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상하게 눈이 뜨겁고 시려서 그는 속절없이 인상을 썼다. 그러나 시선을 뗄 수는 없었다. 어딘지 아득히 먼 곳에서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심장에 박히는 아픔. 이 순간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너무나 쉽게 이해해버린다. 레온티오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신들이 이렇게 잔인했다.

 

 


 

 

 일행은 다시금 항해 길에 올랐다. 그는 그 상황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보살핌을 받았다. 날개에는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았다. 상처를 돌봐준 선원은 한동안 날개를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새를 치료해본 사람은 있어도 날개 달린 반신을 치료해본 사람은 없으니 그가 나을지 말지는 미지수였다. 운명의 여신께서 결정할 일이죠. 선원은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들었더라면 분명 코웃음을 쳤을 텐데. 지금은 씁쓸하게 끄덕이는 게 고작이었다.
 배에서 시티르가 즐겨 쉬던 자리는 높은 망루나 돛대 위쪽이었는데, 지금의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갑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절실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럴 정성을 들일 기운도 모자랐다.
 자신을 감당하는 일이 처음으로 벅찼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색을 잃은 잿빛으로 보였다. 오이지스가 다정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불안의 여신이 그 자신의 목소리가 되어 속삭였다.

 ‘만약 다시 날아오를 수 없다면 나는 뭐지?’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벽에는 그 한마디가 쓰여있었다. 나는…… 그는 비참한 탄원자가 되어 손톱으로 벽을 긁었다. 자기 확신은 신기루처럼 무너졌다. 고뇌가 그를 한입에 집어삼켰다. 그는 손쉬운 먹이였다. 그를 평소처럼 움직이고 말하게 하는 것은 하늘의 천장에 닿았던 자존심 하나뿐이었다.

 대부분의 선원은 그를 어려워했고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더했다. 그에게도 달가운 일이었다. 관심 없는 이들의 시선까지 신경 쓰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헬레네가 다가온 기척을 느끼자, 그는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내주었다. 그녀는 시티르가 배 안에서 존중하는 몇 안 되는 인간이었다.
 동정일까? 그는 생각한다. 누군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긴다니, 감히, 그런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약하고 어린 면이 그런 관심을 갈구했다.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자유의 선택지는 부러져서 그의 등에 짐짝처럼 매달려 있었다. 시티르는 평소 같은 불투명한 웃음을 머금고 헬레네를 보았다. 마주 돌아오는 것은 정중한 전사의 시선이다.

 “괜찮나?” 
 “저야 멀쩡해요. 헬레네는 좀 어떤가요?”

 그렇게 물으며 시티르는 그녀의 이마에 붙은 아마포 붕대에 시선을 둔다. 신에게 해코지를 당한 것은 그 하나만이 아니다. 그녀에게도 흉터가 남을까? 또 한 번 부아가 치밀기 전에 그녀가 그의 주의를 환기한다.

 “나야 익숙하지만. 자넨 좀 다르지 않나.”
 “뭐가 얼마나 다르겠어요?” 그는 가볍게 대꾸했다.

 하지만 달랐다. 두 사람 다 그걸 알았다. 카산드라의 후예는 신이 준 굴욕의 맛을 입에 물고 태어나 씹고 되새김질하고 짓이기며 살아왔다. 그녀는 단단하게 디뎌진 땅 같다. 아하, 아는 맛이라는 건가요? 그의 속내에서 불쑥 어린애가 튀어나와 이죽거린다. 말씀 좀 해보세요,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양 살 수 있는 거죠? 어떻게 그걸 다 감당하나요?
 한 손이 배의 난간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꺼내 물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조잡하고 유치한 분노는 애초부터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니까. 헬레네에게 화를 내는 것은 부당하다. 자신은 지금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짜증스러울 뿐이다. 고약한 상태를 기분으로 착각하기에는 그는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시선이 먼 수평선을 향했다가 돌아온다.

 “헬레네. 걱정해주는 건가요?”
 “당연히 걱정되지. 힘든 일을 함께 겪지 않았나.”

 이쪽을 똑바로 응시하는 곧은 눈동자가 보인다. 거기 비친 자신은 굴절된 상(狀)이다. 호의, 그 이면에 담긴 뜻을 알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약점이 드러난 상태인 그는 제 상처를 핥는 짐승처럼 자기도 모르게 벽을 세운다.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상상한 것보다 딱딱하다.

 “그럴 것 없어요.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앞으로도.”

 순간, 헬레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마디가 단단하고 심지가 있으며 언제나 옳은 방향만을 가리키는 손이다. 남을 지키는 사람의 것. 그의 당황하는 기색에도 아랑곳없이, 헬레네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를 본다.

 “나는 단 한 번도 자네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네.”
 “…….”
 “자네가 있어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 그런 생각 말아. 다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예상하지 못한 위로에 그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파도가 간헐적으로 뱃전을 때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메운다.
 이상한 기분이다. 그 잔물결이 가슴 안쪽까지 번지는 것 같다. 파도는 따뜻한 색깔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세련되지 못하게,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왕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옥좌는 솔직함으로 닦이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전사들과 보낸 몇 년의 세월도 무관심한 그의 태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아무런 말도 내보일 수가 없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그를 읽는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린다. 평화로운 침묵이 감돈다. 그는 울적한 표정을 더는 숨기지 않고 얌전해진다. 소용이 없다는 걸 안다.

 “어쩌다 이렇게 멀리까지 나왔나?”

 문득 파도 소리와 어울리는 물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아무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는 갈라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어떡하죠? 불안의 목소리가 끈질기게 그를 쫓아와 귓가에다 속삭인다. 난간에 기댄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당신은요?”
 그의 물음에 그녀는 먼 곳에 시선을 둔 채 대답했다. 세상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도 있다고. 실은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산다고. 어떤 옳은 일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자신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전쟁은 천 명의 사람에게 천 가지 모양이고 그것은 그녀에게 당연했다. 이유가 없어도, 애써 영광을 좇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 사람은 다시 밑바닥에서 출발하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스스로 빛을 낸다.
 그게 그녀가 가진 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는 마른 침과 함께 몇 마디 투정을 삼켰다. 당신처럼은 못 해요. 날지 못하는 삶은 살 수 없어요. 그럴 자신이 없어요.
 다행스럽게도 그런 말들은 그의 안에서 혼자 멈추었다. 헬레네가 품위를 지키는 사람이기에 그 또한 가까스로 자신의 것을 보전한다.

 

 


 

 

 레온티오스를 다시 쳐다보는 일은 힘겨웠다. 그는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시티르의 머릿속에서 그날의 일은 지워지지 않았고 신전 벽에 새겨진 손톱자국처럼 남았다. 해묵은 상처의 껍질이 벗겨지듯 그 기억도 금방 빛이 바랠 줄 알았는데. 전부 그의 순진한 기대일 뿐이었다. 어쩌면 평생 지워지지 않을지도 몰라. 그가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낭패감이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레온티오스는 가끔 들러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병실 대신 쓰는 자그마한 선실에 레온티오스가 들어서면 주변이 가득 찼다. 서슬 퍼런 존재감이 의도 없이도 공기를 가볍게 눌렀다.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지 않아도 돼요.” 시티르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티르의 말에 대놓고 늘어진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큰 손을 남의 머리 위에 올려 마구잡이로 머리칼을 흩어놓았다. 표현 방식이 투박해서 그렇지 거기 위로가 담겨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음 한쪽이 참을 수 없이 울렁거리고 간지럽다. 
 시티르는 잠깐 그의 손이 닿았다 떨어진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꺼내 보여야만 하는데 어려운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었다. 그는 한참을 더듬어 찾아낸다.

 “저,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힘겹게 꺼낸 것이 다 허탈할 정도로, 돌아온 대답은 호쾌하고 퉁명스러웠다.

 “전쟁에서 무슨 감사 인사야. 살아남았으면 됐지.”

 그는 늘 이런 식이다. 뭐 하나 어려울 것 있냐는 듯이. 그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시티르는 예전 같은 차분함을 유지하려면 애간장을 쥐어짜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도 마음에 짐으로 남는 게 싫어서요.”
 “야. 그게 왜 짐이야?” 마치 그런 갑갑한 말은 난생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투였다.

 “같이 싸우는 사람인데. 너도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도왔을 거잖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으리라 예상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런 말은 아니었다.  레온티오스 씨도 정말 특이한 사람이에요. 시티르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과 함께, 정돈되지 않은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런 말을 잘도… 참 쉽게 하시네요.”

 신에게 반항할 거라고?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지? 그는 이해가 안 됐다. 사람이 사람에게 당연한 듯이 하는 기대치고는 숨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몸이 떨리고 당장에라도 가라앉아 죽어버릴 것 같은데, 그는 무엇 하나 무거울 것 없다는 듯이 말을 했다. 시선을 떨구자 그의 손에 감긴 붕대가 보였다. 신의 불꽃이 할퀴고 간 상처였다. 신에게 해코지를 당한 것은 그 하나뿐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굴 수 있는 거지, 당신들은?
 마음 안쪽에서 무언가 울컥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가 한 것처럼 당연한 듯이?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확신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뭐라고. 너희가 대체 뭐길래. 시티르는 겁에 질려 있었고 그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짜증스러웠다. 내가 정말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라면, 사람 잘못 봤어. 꼬인 속내에서 어린애가 빈정거린다. 그는 참지 못하고 내뱉는다.

 “절 그렇게 믿어요?”
 “동료를 안 믿으면 대체 누굴 믿어?”

 가져본 적 없는 어둡고 저열한 질투심이 타오른다. 한 편으로 너무 찬란하고 눈부시다. 시티르에게는 이 모든 감정이 낯설고 괴롭다. 무슨 짓을 해야 이 사람을 동요시킬 수 있을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건 너무 쉬운 일이었는데, 갑자기 전혀 할 줄 모르게 된다. 망설임 하나 없이 돌아오는 일직선의 대답에 그는 거의 바보가 된 기분이다.

 “누가… 그렇게 솔직하게 얘기를 해요.” 시티르는 머뭇거렸다. 이 사람이랑 더 얘기하면 안 돼. 부러진 신의 일부로부터 엄중한 경고가 번졌다. 너 지금 엉망이야. 분명 후회할걸. 그러나 그의 다른 부분은 자기가 지금 뭐에 말려드는 줄도 모르고, 여기서 쭉, 계속, 그를 보고 듣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면 그렇게 안 했겠지. 하지만 너는… 우리는 좀 다르잖아.”

 …….
 이건 또… 무슨 말인데?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그는 생각했다. 머리가 어지럽다 못해 아찔해서 쥐어뜯고 싶었다. 마음 안쪽에서 멍청한 희망이 부풀었다가 꺼졌다. 남이 던져주는 무심한 호의를 붙잡고 구성맞게 구는 건 그의 방식이 전혀 아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짜증 나. 그런데 난 지금 이게 필요해. 절실하게.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거예요?”
 “안될 건 뭐가 있어.” 레온티오스는 덤덤하게 대답한다. 
 시티르는 당황스럽고 화가 난다. 그의 거리낌 없음에, 그 말에 담긴 사심 없는 호의에. 자기가 자기답지 않게 굴고 있다는 사실에. 자기가 힘주어 그어둔 선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에. 자기가 한낱 인간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린다는 점에. 누가 제 안을 끔찍하게 어지럽히고 제멋대로 거기서 뛰어놀게 두기는 싫었다. 그것도 이런 무신경한- 사람 때문에 혼자만 조급해지고 속이 타는 건 절대로 사양이었다.
 이미 그러고 있다는 게 제일 미칠 지경이지만. 그는 입술을 깨문다. 

 “레온티오스 씨는 가끔 자기가 하는 말이 어떻게 들릴지 전혀 생각을 안 하고 말씀하세요.”
 “어떻게 들리는데?”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시티르는 오래도록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을 굴린다. 그야 그렇고 그렇게 들리는데요. 이렇게 말할 수는…… 하지만 그는 그가 오래 골몰하고 품위 있는 말을 고르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말하기 싫으면 됐어.”

 뚝,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진다. 이거 전부 멍청한 짓이야. 자기 자신을 진짜 바보로 만들 셈이야. 그래도 참을 수가 없다. 평소라면 몸을 조금 위로 띄우면 될 일이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시티르는 어색하게 발꿈치를 들고, 그의 몸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긴다. 입술과 입술이 닿는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뛴다. 맨 처음으로 고속 비행을 하고, 곤두박질치듯 활강했을 때 같다. 그 감촉은 어릴 적 상상한 넥타르의 맛처럼 오묘하고 복잡하고 달큰했다. 신들의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끝이 있는 모든 순간처럼 슬펐다.
 영원 같은 찰나가 지났다. 이대로 돌이라도 되었으면. 그러면 많은 일이 훨씬 편해질 텐데. 그는 잡아당겼던 손을 놓고 뒤로 조금 물러났다. 레온티오스는 조금 놀란 듯 한쪽 눈썹을 꿈틀해 보일 뿐이었다. 이어진 감상은 단순했다. 그렇게 들렸어?
 반면 시티르는, 방금 그 한 번의 행동만으로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그는 겨우겨우 피로 섞인 웃음을 지어 보이며 핀잔을 준다. 몇 번을 대답해야 만족하는 거예요?
 만족이라. 애당초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남의 말과 행동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 깊이 궁리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다. 생각 못 한 재미있는 일이라는 듯, 그는 호탕한 웃음을 짓는다. 

 “뭐, 나쁘지 않지. 이렇게 하고 싶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안 놀라네요.”

 평소 그의 반응을 생각하면 의외였다. 자신이 알던 사람이 맞는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는 데 움켜쥔 손마디가 축축하다. 시티르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그가 뒤로 물러난 만큼 성큼 다가와서 이쪽을 본다.

 “서로 재밌으면 됐지.”

 시티르의 입가에 곤란한 미소가 떠오른다. 아, 그거참…… 재미있겠네요.




 시티르는 제 영광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이 다른 인간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 내던져져도 전사보다는 때와 장소를 잘못 찾은 어린 신처럼 보인다는 것. 그것은 장점이자 약점이었다. 그는 새매들이 흔히 그러하듯 눈가가 짙었고 팔다리가 길었다. 살결은 햇볕 아래 오래 두어 살짝 녹은 밀랍처럼 말랑했고 코를 대면 바람 냄새가 났다. 그러니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 말을 그렇게 자조적으로 떠올린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사랑받는 데는 익숙했고 사랑하는 데는 영 젬병, 젬병이었다.
 정신은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았고 온몸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자세 때문에 무리가 가서 뼈마디 여기저기가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힘든 내색을 하기에 그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되는 도피란 착각이고 기만이며, 그저 머릿속이 한 사람으로 가득 찰 뿐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잠시도 멈추기 싫었다. 소금기 어린 냄새. 겹쳐 닿는 맨살은 단단하고 거칠었으며 흉터 위를 손으로 쓸면 우둘투둘했다. 그가 자기 쪽으로 몸을 숙이자 짙은 사향이 물씬 넘쳤고 뜨거운 심장이 피부와 근육 너머에서 멈춤 없이 뛰며 피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 탄탄한 몸에서 흥분의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충분히 능숙했지만 사실 그리 대단한 기교도 필요 없었다. 단순한 몸짓 하나로 충분했다. 시티르는 이미 사로잡혀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신세였다. 이름처럼 사자를 닮은 야성 어린 그 눈이 이쪽을 바라보기만 해도 저 깊은 곳에서 전류가 튀었다. 자기 것이 아닌, 잠깐 머물 뿐인 열락을 놓치기 싫어 숨이 차도록 들이마셨다. 누군가를 바란다는 건 이다지도 낯선 감각이었다. 그가 가진 인간의 물성(物性)이 몇 번이고 그를 배신했다. 목이 잠길 정도의 희열에 젖어 있으면서도 나약한 부분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제 살을 뜯어 먹는 에리식톤이라도 된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내가 내가 아니었더라면 하고 바란 적이 없었다.
 재미있을 수 있을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힘겨운 실험이었고 그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상처가 있는 손이 그의 머리카락 사이를 가볍게 흩었다. 밤물결을 닮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서 굽이쳤다. 방안은 아직 가시지 않은 잔열 때문에 후끈했고 습했다. 레온티오스는 천장을 보며 드러누운 채였고, 시티르는 그 옆에서 오래 참았던 사람처럼 긴 숨을 내쉬었다.
 줄곧 그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레온티오스 씨는…… 살면서 무서웠던 적이 있어요?”

 이 물음 하나를 꺼내기가 몹시 어렵고 벅찼다.

 “생각해본 적 없어.” 

 그 목소리에 가라앉아 가던 상념이 다시 요동친다. 시티르는 참지 못하고 상체를 일으켜 그를 내려다보았다. 대답하는 얼굴을, 표정을 읽고 싶었다. 자신이 거기서 무얼 찾고 싶어 하는 지는 몰랐다. 고뇌? 망설임? 미약한 달빛을 머금은 맹금의 눈이 감출 수 없는 당혹과 혼란으로 흔들렸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요? 그냥 인간인데도요?” 
 “그런 걸 생각하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지금은 생각 안 해.”

 명쾌한 말이었다. 그는 그가 원하던 먹이를 던져주지 않는다. 그저 한없이 자기 자신이다. 끔찍하게 얄밉고 안달이 날 정도로 사랑스럽다. 제 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한심하다. 평범한 인간처럼 바닥에 처박히는 것이 두려워 번민하면서 인간을 부러워하고 있다. 왜 내게 없는 것이 그에게는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사랑한다.
 레온티오스는 정자세로 누워있던 몸을 돌려, 시선을 그에게로 향했다. 호박금 색의 눈동자가 마주 보았다. 밤을 보는 짐승의 것. 삼키고 탐색하는, 힘의 우위를 쉽게 점지하는 시선. 날개가 부러진 매와 배부른 사자. 시티르는 그의 눈에 담긴 우월감을 한참 전부터 읽고 있었다.

 “넌 무서운 거 있어?” 그는 빙그레 웃고 있다. 서로 재밌으면 됐지. 그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아서 시티르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다시 표정을 갈무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스쳐 가는 답은 많았다. 다시 날지 못하게 되는 것.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이 되는 것. 미래를 모이라이의 손에 맡기고 그 불확실함만을 믿는 것. 지금 당장은, 당신 같은 사람한테 빠지는 거요. 

 “저는 레온티오스 씨처럼 솔직하게 얘기 못 해요.”
 “그래, 관둬. 말하기 싫으면.”

 묵직한 손이 그의 손목 위로 얹어진다. 시티르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구명줄 같기도 올가미 같기도 하다. 하지만, 레온티오스 씨. 그거 아나요?

 “할 말 없으면 한 번 더하자.” 

 나는 혼자 빠져 죽지는 않을 거예요. 그는 생각한다.

후기연성...이라고하나 시나리오 스포있음~~ 군왕 시점으로 세션전까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후반에 조금 그렇고그런거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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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자락을 지그시 당기면 돌아다보던 형님의 앳된 얼굴을 생각한다. 그 작은 목과 둥근 이마. 그런데도 어딘지 넓고 어른스러워 보였던 한 소년을 생각한다. 그가 처음 제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얼마나 정답고 기뻤던가. 무겁게 짓눌린 어깨가 자신을 외면할 때 자신이 느낀 건 상실감이었던가. 한 소년이 청년으로 자라기까지 얼마나 많은 목숨이 필요했던가. 그 많은 피가 그 손을 어떤 빛깔로 적시었던가.
 형님은 어째서 변해버렸을까? 그는 먼저 답을 아는 질문을 했다. 드넓고 화려한 대현의 황실, 그 몸을 감싼 비단옷과 그가 보고 듣고 입는 모든 것이 형님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변한 그를 원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답을 모르는 질문이었다.

 황궁에서의 생활은 외줄 타기 묘기와도 같았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가차 없는 천 길 낭떠러지가 기다렸다. 귀에 닿은 속삭임, 멀거니 흘기는 눈빛 한 번만으로도 사람의 생사와 영욕이 오갔다. 유하의 어머니, 선황의 총애를 받는 리빈은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눈에 제 자식의 재질을 알아보았다. 이를테면 또박또박 되물어온 순간. “그러나 옳지 않습니다.” 받은 두구꽃 한 송이도 버리지 못할 때. 한 점 티끌의 의심도 없는 눈이 남에게 감당 못 할 도움의 손길을 뻗을 때.
 약점이 되는. 황궁에서는 개나 가지면 좋을. 제 목숨을 위협하는 자질들.

 “어마마마는 제가 지켜드리겠나이다.”

 아이가 책상에 기댄 리빈에게 다가와 그렇게 속삭였을 때, 그는 한 손을 들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런 말은 누구에게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사랑(四郞). 특히 네게 그럴 만한 힘이 없을 때는.”
 “소자, 그러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네 뜻은 기특하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리빈은 언제부터 책상 위에 놓여있었는지 모를, 작은 손이 정원에서 꺾어왔을 부드러운 자귀꽃을 어루만졌다. 

 “명(命)을 아는 자는 위험한 담 아래에 서지 않는다 하였다. 네가 살아남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그런 다음 남에게 마음을 써도 늦지 않아.”

 리빈은 생사를 다투는 각축장으로 자신과 아이를 내모는 대신, 그저 그가 그 무른 성정의 일부만이라도 지키며 연명하기만을 바랐다. 유하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그 뜻에 따랐다. 그는 맞지 않는 갑옷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듯 남의 비위를 맞추며 재능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제대로 된 추위를 알지 못하던 어린애도 그렇게 궁에서 커갔다. 당시에는 반도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말뜻을, 그는 곧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황궁 안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파도가 쳐서 그가 사랑하는 것들이 다치고 죽어 나갔다. 절로 거짓말이 늘었다. 
 그 가르침 덕분에 해유하는 보이는 것 이상을 보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한량에 겨우 못 미치는 넷째 황자로서 있는 듯 없는 듯 자라날 수 있었다. 수많은 피보라가 그저 가벼이 옷깃에 튀는 핏방울처럼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손위 두 형제가 유건에게 목숨을 잃었을 때도, 그는 살아남았다.



 그날 목에 겨눠진 칼끝을 생각한다. 핏줄을 따라 서리가 에일 만큼 추운 겨울날이었다. 달마저 냉기에 질려 버석거렸고, 사람의 마음이 얼어붙어 형제간의 온정과 미덕도 빛을 잃었다. 숨을 길게 내쉴 때마다 가까운 검날에 맺히는 제 입김이 보였다. 그 검날은 그 숨결마저 도려낼 것처럼 형형하고 날카로웠다.

 시간은 결코 배신하는 법이 없으니 만년을 정정할 듯했던 부황도 시들었다. 회광반조의 부황이 찾은 자식이 그의 적장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처마 밑에서 작게 피어나다 꺼졌다. 그래서였을까. 불안이 그 남자를 좀먹었을까. 어디까지가 오롯이 제 것인 광기이고 어디까지가 불안이 낳은 퇴폐인지 저 자신조차 알 길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 실은 아주 멀쩡히 제정신인지도 몰랐다. 유하가 타고 나지 못한 귀한 재질이 그의 형에게는 있었던 것인지도. 유건의 행동은 단순한 광기라기에는 늘 일목요연하게 영리했고 선처럼 계획적인 데가 있었다. 적어도 친왕 시절까지는 그랬다. 이러한 절차는 짐짓 피에 미친 자의 행동처럼 보여도 철저히 계산된 결과일 수 있었다. 다 이겨놓은 장기의 마지막 수를 두듯 유건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하가 언제 남에게 위협이 된 적이 있던가? 어려운 차례는 앞서 다 넘긴 터였다.
 이미 유리와 유소의 피를 먹은 검은 만족스러울 정도로 곧게 뻗어 그의 목까지 가닿았다. 

 “어떠냐, 유하야. 내게 할 말이 있느냐?”
  
 그리 물으며 내려다보는 얼굴에 달빛이 가려 그림자가 드리웠다. 마주 그를 올려다보는 찰나 원망도 두려움도 아닌 슬픔이 유하를 짓눌렀다. 문득 두 눈을 감고 그 검날에 뛰어들고 싶은 기묘한 충동이 일었다. 같은 순간, 그는 자문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었다. 소년은 몸을 낮추어 엎드렸다. 무릎이 접히고 이마가 바닥에 닿았다.

 “형님.”
 “오냐, 말해 보아라.”
 “저는 단 한 순간도 그 자리를 넘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이었다. 
 “대현 황실의 황제 자리는 저 같은 아둔한 어린애가 탐내기에는 너무 과분하지 않습니까.”
 그는 그렇게 믿는다.
 “천하의 주인이 될 몸은 형님뿐이니 저는 그저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거짓말이어야 했는데. 왜 하필이면 지금일까. 옷자락을 지그시 당기면 돌아다보던, 형의 앳된 얼굴이 스친다. 그 순간의 의미를 그는 아직은 모른다.

 유건은 침묵에 잠겼다. 차분하고 비굴한 굴종의 선언 끝에, 유하는 일견 마지막 호흡이 될지도 모르는 몇 마디 숨을 흘렸다.
 돌연 유건이 폭소를 터트리며 정적을 깨뜨렸다. 그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무릎까지 쳐가며 웃었다. 유하는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기다렸다. 정자가 떠나가라 한바탕 웃음이 쏟아진 뒤에야, 유건이 유하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일어나거라, 소하야. 내 그저 농을 친 것이야.”
 거짓말.
 “내 어찌 소중한 아우를 그리 심하게 대하겠느냐?”
 거짓말.
 “내 너의 마음은 익히 알고 있으니 현을 위해 요긴히 쓸 것이다.”
 반쯤은 거짓말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군장을 질 만큼 장성하자 해유하는 곧장 군사와 함께 북방의 영토로 떠나야 했다. 살려둔 목숨을 귀하게 써서 싸우다 죽으라는 안배였다.
 해유하는 자라면서는, 어머니를 위해 오직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해야 했다.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자진이나 다름없었다. 그리 마음을 먹자 궁에서 마주치는 모든 미진하고 하찮은 죽음이, 이다음에는 필경 그의 차례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것이 그의 고질병이었다. 그는 마음 한편으로는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적어도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래서였을까. 싸움터에 온몸을 내던지는 하루가 궁에서의 십여 년 세월보다 나았다. 그것은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처럼 보였다.
 북방의 칼바람이 보드랍고 연약했던 뺨을 찢고 흉터를 아로새겼다. 어떤 날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며칠을 꼬박 말을 달려야 했고 또 어떤 날에는 버석거리는 모래가 씹히는 식사를 했다. 이 머디 먼 북쪽 땅에서는 한여름부터 눈이 왔다. 하지만 그곳에서 보내는 어떤 겨울밤도 제 목에 칼이 드리웠던 그 날만큼 춥지는 않았다. 몸에 박혀온 활촉이 마음에 에인 칼날보다 아프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이렇게 멀고 삭막한 땅에 다다라서야, 그는 잠시나마 자유로웠다. 상상만 했던 자유의 언저리를 만지고 더듬어 그 모양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스스로 죽을 자리를 고르지는 못했으나 이제는 그 방식이라도 직접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운명이 야속한 탓인지.
 아니, 어쩌면 하늘도 알아서일까. 죄 있는 자에게는 명예로울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해유하는 죄인이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람은 죄였으니.


 


 유하는 처음 자운명음을 눈에 담았을 때를 떠올렸다. 유건의 혼례식 이후 왕부에 따로 예를 올리러 갔던 날이었다. 그때의 명음은 왕부에 갓 시집온 새신부였다.
 아직도 그날의 모든 것이 잡힐 듯 눈에 선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두어 조각 떠서 흘러갔다. 저만치 멀리, 그녀가 정원의 꽃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자그마한 서책이 들려 있었고, 국화가 수 놓인 상앗빛 웃옷에 단아한 감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수묵화로 그린 듯한 사람이었다. 섬세하고 짙은 속눈썹 아래 그늘진 눈가가 붉게 물든 채였다. 그 시선은 어딘지 먼 곳을 향했다. 닿을 수 없는 어떤 피안을 바라보는, 그 눈에 담긴 영원한 슬픔. 소년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 자리에 덜컥 발이 묶였다. 다만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찰나 매화 꽃잎 하나가 날려 그녀의 귀밑머리로 떨어졌다. 백옥으로 깎은 흰 손이 가만 제 살결을 더듬더니, 그 위로 내려앉은 꽃잎을 찾았다. 엄지와 검지손가락 끝이 모여 그 작고 가냘픈 꽃잎을 짓이겼다. 의식하지 않은 듯한 그 모든 행동이 우아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녀의 주변을 얇은 막처럼 감싼 유장한 슬픔에, 그 작은 몸짓에, 주변의 모든 소란스러운 것들은 색을 잃고 순식간에 배경으로 스러졌다. 그 세계에는 오로지 그녀만이 존재했다. 동시에 그녀는 이 현실에서 아득히 떨어져 있었다. 그 순간부터 소년에게 온 세상의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었고, 모든 의미는 의미를 잃었다.
 어린 황자는 붉어진 얼굴을 숨길 생각도 못 한 채 속절없이 뒤돌아 도망쳤다.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기억을 자신이 가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드높고 별이 짙은 야만의 밤하늘 아래서,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보석인 양 나유타의 시간 동안 아끼며 돌려보고 되짚고 들여다볼 적마다, 그는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만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그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우연한 몸짓을 눈에 담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는 그녀에게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었을까? 다른 길을 갈 수 있었을까? 그녀를 평범히 또 무심히 형수로 대하고, 후에 다정한 말씨에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을 만나, 백년해로를 약속하며 함께 매듭을 묶고 그리고, 그 여인을 군왕부의 안주인으로 삼아, 두 사람을 똑 닮은 아이를 가지고…
 생각이 여기까지 흐르면 그는 결국 힘겹게 고개를 털어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것 같아서.
 그만큼 그녀는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자신에게 영원한 족쇄가 채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처음 그녀를 바라본 순간부터 유하는 명음을 연모하게 되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관계였는데도 그리는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여인의 이름을 입속말로 되뇔 때는 뱃속에 나비가 흩어졌다. 입에 들어오는 가장 신 탱자도 다디달았다. 줄곧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곽휘원의 텅 빈 편지를 이해했다. 정인에게 쓰는 편지에 실수로 백지를 한 장 담아 보내었다는 실없는 남자의 이야기였으나, 나 역시도 직접 배를 갈라 내보이는 것이 아닌 이상, 일평생 작고 미천한 몇 마디 줄글을 배운 것만으로는 이 마음을 감히 어디에도 꺼내다 놓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했다.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그렇게 고요히 그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지나자 어리지 않은 유하는 더는 그녀 앞에서 도망가지 않았다. 그 앞에서 감히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온갖 시고 쓰고 달콤한 색으로 팔랑거리던 나비들을 쇠로 된 함에 넣고 조용히 그 문을 걸어 잠갔다. 그 안에 든 것이 짓눌린 채 저 혼자 얼마큼 부풀고 커지건, 그는 외면했다. 천진했으나 바보는 아니었기에, 감히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미몽은 품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놓지 못한 바람이 있다면 그저 지켜보는 것. 적어도 먼 발치에서라도, 그녀가 사랑하지는 않을지언정 그녀의 삶을 평안케 하는 모래로 쌓은 황실을, 그 명예를 지키는 것…….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자기 손으로 무너뜨린 날은 머지않아 찾아왔다.
 그날 유하는 수행원 두엇만을 데리고 잠시 황궁에 들렀다. 부름을 받고 이 주 정도를 머무를 예정이었는데 일정이 엇갈려 황제는 지방 순시에 나가고 없었다. 기다리는 일은 익숙했으니 유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해 봄 청명원에는 한참 배꽃이 만발하여 온 사방에 부서진 옥가루처럼 날렸다. 유하는 술병 하나만을 든 채 배를 탔다. 황제의 동생이라는 이름이 주는 몇 안 되는 재미가 바로 이 실없는 풍류였다. 그는 신선놀음인 척하는 장난을 이 나이까지도 좋아했다. 황후가 그날 옥음루에 머무른다는 사실을 그가 알았던가? 배에 탈 때부터 이미 술이 올라 있었기에 기억은 가물거린다. 그러나 알았더라도 감히 직접 얼굴을 볼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그저 먼 발치에서,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안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는 호수 한가운데서 울리는 칠현금 연주를 들었다. 그녀였다.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밤바람이 화답하듯 고요하게 물살을 밀었다. 유하는 몇 번인가 노를 젓다가 마음이 뜨자 이내 그만두고 배 위에 드러누웠다. 그는 입술을 병에 대고 연거푸 들이켰다. 마음이 차고 또 뜨겁게 젖어 들었다. 술보다 그 음색에 더 취했다. 이 곡이 끝나면 돌아가야지, 이다음 곡이 지나면 뒤돌아야지. 그러다 보니 어느새 조각배에 물이 찼다.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호수의 반절을 넘게 건너온 뒤였다. 청명호는 수면 아래로 연꽃 뿌리가 엉켰으며 꽤 깊은 못이었다. 만취한 그는 당황해서 휘청거렸고 그 순간 조각배가 넘어졌다. 첨벙! 물소리가 호수를 크게 울렸다. 연주가 뚝 멈췄다.
 해유하가 구사일생으로 옥음루에 다다랐을 때 눈앞에는 놀란 송하의 둥그런 눈이 보였다. 제 주인을 참으로 곤란하게 할 테니 저 애가 나를 미워해도 할 말이 없겠다, 아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명음은 놀라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날 그가 한 어떤 행동도 그녀를 놀래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차분하게 송하를 시켜 난로에 탄을 태우게 하고 마른 옷가지를 준비시켰다. 아득히 멀리서 탁, 문을 닫는 기척이 났던가. 한참을 떨다 정신을 차리니 시녀들은 보이지 않았고 그녀만 남아 그의 앞에 다과와 과일 몇 개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방안에는 훈훈한 공기가 돌았다. 잔뜩 젖었던 그의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고였다. 창밖 너머에서 이따금 바람 소리와 함께 미약한 풀벌레 소리가 울렸다. 옥음루 한구석에는 아직도 그녀가 타던 칠현금이 놓여 있었고, 탁자 위에는 다과 접시와 함께 술잔이 보였다. 의아한 눈빛을 마주하자 그녀가 덤덤하게 말했다.

 “좋은 날을 그냥 흘려보내기 아쉬워 독작하던 참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녀의 두 뺨에 진 불그스름한 그림자가 촛불 때문이 아니라 취기 때문인 것도 같았다. 그런데도 그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곧고 발라서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어찌 이리 늦은 밤까지… 주무시지 않고요.”

 그가 더듬더듬 여쭈었다.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몸이 떨리는 듯하니 군왕도 한잔하시겠습니까.”

 한참 전부터 혼이 날 것을 각오했는데도, 명음은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없이 나긋한 얼굴로 물어왔다. 평소의 그녀와 달랐다. 이런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그러니 이건 아마도 꿈인 거겠지, 호수 바닥에서 마지막으로 꾸는.
 그런 생각이 들자 유하는 조금 대담해져서, 접시에 놓인 복숭아를 하나 집었다. 한입 가득 과육을 머금자 즙액이 터져 나왔다. 과즙은 손등을 타고 내려와 팔뚝의 핏줄을 따라 흘렀다. 과실의 투명한 피를 마시는 듯한 섬뜩한 단맛에 몽롱한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듯했다. 유하는 그제야 문득 제 처지가 우스워져 저도 모르게 나른한 웃음을 흘렸다. 그토록 연모하던 가을 국화 같은 여인과 잔을 나눌 꿈 같은 일이 생겼는데 볼품없이 물에 젖은 생쥐 꼴이라니.
 대답은 뒤늦게 한숨처럼 세어나왔다.
 
 “소왕은 괜찮습니다. 더 큰 결례를 범하지 않으려면 이제 깨야 할 것 같습니다만.”

 꿈이라 여기면서도 그는 그렇게밖에 말할 줄 몰랐다. 대답을 듣는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쉽게 읽히지 않았다. 그 고요한 미소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골몰하려던 차에,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유하, 내가 내리는 잔을 거절할 셈입니까?”

 그것은 그가 저항할 수 없는 한마디였다. 그녀는 그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되짚어보면, 그날의 모든 일이 그랬다. 이상하고 흐리고 아름다웠다. 그는 몇 잔을 연거푸 더 마셨다. 방안은 따뜻하게 데워졌고, 부드러운 향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도 묘한 추위가 가시지 않아서, 그는 한참을 떨었다.
 그 섬섬하고 미약한 한기는 제 욕망을 눌러 담고 있는 보루였다. 그녀는 지나치게 가까이에 있었다. 너무나 다정한 말씨로 다정한 말을 건넸다. 무엇 하나 익숙하게 여길 일이 없었는데도 무심하고 자연스럽게 아름다웠다. 그녀가 던져주는 이 덧없는 한 줄기 희망을 어찌 다뤄야 할지 모른 그가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연정을 내리누르기 위하여 쌓아 올린 벽이 안에서부터 무너지며 파편이 가슴을 찔러왔다. 한평생 짓눌려왔던 것들이 희미하게 비추는 빛을 찾아 하염없이 부풀어 올랐다. 그는 눈앞의 칼로 뛰어들고 싶었던 그때의 그 나직한 충동이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자유를 향한 열망과 한 여인에 대한 목마름이 같은 이름으로 그의 안에 눌러 담겨 있었다.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사는 일은 자진이나 다름없는데도.
 그녀의 물기 어린 눈동자는 처음 본 그때와 똑같았다. 그는 갈망과 체념을 동시에 담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자기가 지금 무얼 바라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애원하는 눈을 했다. 손을 뻗어 가볍게 흩자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명주실처럼 흘러내렸다.
 그날 알았다. 그녀는 붓으로 그려진 사람이 아니라 살과 피가 도는 사람이었다. 만지고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사실이 그렇게 미칠 것 같았다. 움켜쥐자 부드러운 살결이 손 모양에 맞게 눌렸고 체취가 느껴질 만큼 몸과 몸이 가까이 닿았다. 타는 불에 손을 집어넣은 듯한 아찔함에 찰나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이미 그녀를 제품에 세게 가두어 안고 있었다.
 이 순간을 놓치면 더는, 탐하는 마음을 붙잡아 놓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녀를 만지고 안고 파고들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됐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닿을 수 없는 것에 닿은 채로 그는 생각했다. 명음.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테지요. 이번 생의 내게 그런 행운은 없을 것을 압니다. 어째서 나를 허락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마마. 저는….”

 탁해진 목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상처에서 고인 피가 흘러나오듯이.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한다고 제가 감히 그리 여겨도 되겠습니까? 묻고 싶은 것은 그 어떤 것도 묻지 못한 채.

 “유하.”

 그녀는 나직한 한 마디로 모든 말을 막았다. 그리고 무언가 더 덧붙이는 대신 그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그걸로 끝이었다.
  팽팽하게 당긴 줄 같던 긴장감이 깨어지고, 그는 바로 입가에 와 닿는 목덜미에 입 맞추며 파멸을 향해 나아갔다. 입술이 닿은 그녀의 얇고 가는 목선 아래로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가벼운 손짓 몇 번으로 옷가지가 바스락거리며 흘러내려 둥글고 고운 어깨선이 드러났다. 탄성을 담은 눈길이 그 위에 잠시 머물렀다. 그의 심장은 당장이라도 제 껍질을 벗어던지고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살결이 마주 닿고 스치는 곳마다 불꽃이 피어나 아까의 추위는 간데도 없이,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전소해 사라질 것만 같은 열기가 그를 태웠다. 목 뒤까지 뻣뻣할 정도로 몸이 달아올랐다. 그는 다분히 갈급한 몸짓으로 그 턱선에, 고운 어깨에, 나긋한 빗장뼈에 입을 맞추었다. 달뜬 숨결이 가슴께에 닿자, 그녀의 몸이 조금 떨리며 뒤로 살며시 젖혀졌다.
 그는 자신이 감히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그녀의 표정들을 눈에 담았다. 흉터 진 손이 나긋하게 접히는 팔꿈치, 가는 허리,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결과 복숭아뼈를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은 부서지기 쉬운 보물을 다루는 아이의 그것처럼 신중하면서도 간혹 서툴렀다. 그녀는 그가 간지러운 곳에 닿을 때면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것이 달콤한 탄식과 속삭임에 서서히 녹아내릴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길고도 짧게 이어지는 입맞춤은 몇 번을 해도 모자란 것처럼 느껴졌다. 입술이 포개어지고 남의 숨을 훔치고 들이마실 때마다 입안에 남은 과실의 잔향이 짓눌리며 번졌다. 늦봄이어서 모든 것이 그렇게 무르익는듯했다. 매끈매끈하게 땀에 젖은 몸이 겹쳐오면 그녀는 어딘가 힘에 겨운 듯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여러 번 입술 속에서 굴려보았고 나직이 마주 부르기도 했다. 더는 바싹 붙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닿아 여린 살결을 파고들면서도 그는 더, 더 원했다. 숨이 차고 넘칠 때까지 놓아줄 수가 없었다. 


 흰 손끝이 잠시 그의 어깨에 난 흉터를 따라 몸 위로 나긋한 선을 그었다. 손가락 사이에 들어온 꽃잎을 짓이기는 것과 같이 무의식적인 행동. 그 한순간이 그의 영혼을 어떻게 묶어놓았던가. 그는 그녀의 옆자리에 늘어져 눈을 감고 있었고, 아주 가까이에서 그녀의 숨결을 느꼈다. 그 영원과 같은 찰나가 지나자 모든 것이 끝났다.
 그녀가 옷을 입는 기척이 들렸다. 그는 자는 척을 했지만, 그녀는 이미 알았다.

 “전부 잊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그럴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호수의 신기루이고 봄밤의 꿈이려니 잊고 당신의 자리로 돌아가세요.”
 그 목소리의 높낮이, 발음에 숨이 섞이던 순간까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것만이 살길입니다.”

 


 해유하는 그날 곧장 도망치듯 궁을 떠났다. 그러나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없었다. 어디로 가서 무슨 짓을 하건, 어느 때건, 몸에 걸린 족쇄가 뻐근할 정도로 무거웠다. 온갖 잡다한 감정이 시도때도 없이 쏟아져나와 그를 괴롭혔다. 할 수만 있다면 떼어다 버리고픈, 추악한 욕심. 영글어 터져서 더는 어떻게 다듬을 수도 없는 날것의 연정. 그리고 숨길 수 없는 희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그럴 수는 없었다. 금수가 아니라 인간 된 자로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몇 번을 되짚어도 스스로 저지른 일, 스스로 끌어다 맨 죄였다. 그 순간 그녀는 칼날이었고 그는 숨도 참지 않고 뛰어들었다. 원치 않아도 그는 그녀를 다치게 할 수 있으니 양날의 검이었고 조금의 구원도 없을 관계였다. 그러나 자신이 여전히 그녀 말고는 그 무엇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아직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명예도 일말의 품위도 없이.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렇게 해가 지고 날이 가고, 그저 도망치기 위해 베어 넘기는 살의 산이 눈앞에 쌓여갔지만. 무용도 군공도 지은 죄를 덮을 수는 없었다.
 죄책감.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바야흐로 황태후의 탄신연이 다가오고 있었다.

 

맨덜리 저택의 강도 님의 인세인 시나리오 업야담의 pc마무리 글로그... 같은 것입니다... PC3입니다. 시나리오 스포가 있습니다. 123부 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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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세상을 사랑했다. 
 거기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그런 마음을 불가피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눈이 오기 직전에 들여다본 하늘은 잿빛이었다. 손으로 지은 엉성한 오두막은 시간이 지나면서 제법 살만한 보금자리 꼴을 갖추어 갔다. 그는 정성을 들여 주변을 돌보았다. 손길은 투박했지만 게으름을 부리는 법이 없었다. 
 한때 그는 이 설원의 눈 속에 유배되어 있었다. 신의 욕심과 그것이 자아낸 지독한 굴레가 그에게 선사한 형벌로써. 얼고 부서지고 서리가 낀 영혼은 결국 육체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하고, 그는 마땅히 예법에 따라 묻혀야 했을 동사한 몸을 보았다. 그가 자기 자신을 보며 느끼는 감각은 부조리했다. 자신을 달래주고 싶다가도 목을 조르고 싶었다. 타는듯한 갈증을 느끼다가도 순식간에 익사할 것만 같았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섬세한 동작으로 가만 눈을 감겨주고 싶었다. 
 육신이 없는 눈물은 영혼 안에 고여서 강처럼 흘렀다. 그는 한순간도 스스로 울 수 없었기에, 그저 눈물을 제자리로 돌려주려 애쓸 뿐이었다. 결국 죽은 몸은 또 다른 가엾은 영혼과 함께 제 무덤에 바쳐진 한 송이 꽃이 되었다.
 그 모든 일이 끝난 후, 서리는 다시 설원으로 돌아왔다. 그 위에 작은 집을 짓고, 좁다란 지붕의 눈을 걷고, 산가지를 꺾고, 죽은 꿩의 깃털을 뽑고, 이따금씩 눈밭 위에서 장작을 패다 손을 멈추고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면 그곳은 언제나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얼어 죽는 줄 알았어.” 

 눈밭 사이에서 반가운 얼굴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머리 위로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먼 곳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아.” 그는 잠시 넋을 놓은 채 나타난 인영을 바라보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을 골라냈다. 혼자 오래 산 사람의 습관대로. 

 “오랜만이군. 안 그래도 버찌 술을 딸 때가 되었다.” 

 남쪽에서 온 손님이 추위를 탔기 때문에 그는 평소보다 뜨겁게 군불을 때고, 불쏘시개로 아궁이 속 장작을 두어 번 들췄다. 그리고 부엌 한구석에 놓인 술동이와 잔 두 개를 들고 문지방을 넘었다. 

 “이렇게 내내 구석에 박혀서 살 필요는 없잖아. 오가기 힘들어서 원.” 
 “매번 같은 불평이군. 다음에는 내가 찾아가겠다.” 

 그해 첫술을 뜯어 맛을 보는 것은 오랜 친구와 하는 작은 의식으로 굳어졌다. 술맛은 늘 작년보다 조금 나았다. 처음에는 결코 누군가와 나눠 마실 물건이 아니었는데, 꾸준히 만들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솜씨도 붙었다. 이 세상에서 해내는, 해내야 하는 모든 일이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손님은 몇 가지 흥미로운 소식을 전해준다. 눈에 파묻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살던 그와는 달리, 손님은 이야깃거리를 이것저것 가지고 있다. 반면 그가 기껏 전할만한 소식이라고는 자신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뿐이다. 

 “요즘은 시력이 예전 같지 않다. 눈밭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그렇다더군.” 
 “다음에 근방에 오면 의원에 먼저 들러 보는 게 좋겠어. 염려해서 하는 말인데, 더 안 좋아지면 여차하면 도움받을 만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나을 거다.” 

 그는 한참 대답이 없다. 긍정도 부정도 하기 어려운 말에 으레 흘리는 고집스러운 침묵이었다. 손님은 익숙한 듯 술잔을 비웠다. 얼마 안 가 생뚱맞게 불쑥 튀어나온 물음이 적막을 깼다. 

 “염. 사람들 곁에서 지내는 게 행복한가? 이런 방식으로 말이다.” 
 “너는 가끔 정말 말도 안 되게 당연한 걸 물어보는군그래.” 
 “인간을 아끼고 비호하는 것과 인간이 되어보는 것은 다르지 않나. 어떤가.” 
 “다르지. 하지만 완전히 다르지만도 않아.” 

 서리는 이어지는 손님의 대답을 잠자코 듣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순간에는 그 안에 깃든 불잉걸이 비쳐 보이는 듯하다. 대답을 아는 질문을 자꾸 묻게 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어쩌면 그가 내려놓은 신성은 이런 식으로 유지되는 것 같다. 서리는 신기해한다. 그리고 자신의 것과는 다른 그의 심성을 귀하게 여긴다. 그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자신도 차일피일 답변을 미루는 행동을 그만두기로 한다. 

 “어차피 나는 세상 모든 곳에 살아볼 작정이다. 그리고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을 전부 들을 생각이다. 그러니 조급할 것 없다.” 
  
 이번에는 이곳에 머물겠다는 뜻이었다. 온통 희기만 한 세상에 한 점 얼룩으로. 그것도 나쁘지 않나, 찰랑거리는 술잔을 내려다보며 손님이 툭 뱉었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정말로, 시간은 많았다. 그는 그것을 부지런하게 사용했다. 쇠를 덥혀 다림질을 하고, 늦은 밤에는 먹을 갈고 초롱불 아래에서 서신을 쓰고, 기르던 개가 새끼를 치는 것을 보았다. 가끔은 함박눈이 세상을 뿌듯하게 채우는 것을 보고, 갓 내린 눈에 자기가 만들어낸 발자국을 되짚고, 어떤 때는 어두운 하늘에서 길잃은 별 몇 개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기도 했다. 
 묵묵한 경탄으로 생을 노래하고 세상을 음미하다 마지막으로 더는 보이지 않는 눈을 감았을 때 한 인간으로서 그의 삶은 끝났다. 죽음이 한 겹의 흰 눈을 그 몸 위에 덮고 난 다음에 이어진 이야기는 이미 다른 존재의 것이라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는 거시적인 독법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 자신은 자신을 잊었을지언정 그가 믿는 세계가 그를 기억했기 때문에. 
 그는 갓난것으로 태어나 아주 처음부터 세상을 다시 배웠다. 모든 순간이 경이로웠다. 그는 껍질을 뛰쳐나간 봉숭아 씨앗처럼 햇볕에 그을렸고, 발장구를 쳤고, 숨이 차도록 날뛰었고, 그림처럼 그려졌다. 어떤 때는 깊고 아프게, 어떤 때는 흐리고 조심스럽게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면 세상은 돛을 편 배처럼 그를 태우고 나아갔다. 여정. 그 자체가 목적인 길고도 짧은 여정. 
 인간과 요괴와 그가 사랑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생육하고 번성했다. 그는 기꺼이 그 흐름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아주 먼 훗날 시간이 흘러 다른 누군가가 아닌 그들 자신의 선택으로 인간과 요괴 모두가 스러지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수호신이 지상에 내려와 다스리던 시절이 있었대.” 

 어린 요괴는 턱을 괴고 재잘거렸다. 음절마다 한껏 묻어난 웃음기가 구슬발에 부딪혀 깨어지는 햇살을 닮았다. 

 “그렇군. 재미있는 이야기구나.” 

 그러나 그런 세상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떤 때에 살아간다는 것은 달려 나가는 것이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매서운 발톱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는 원하는 만큼, 숨이 턱에 차도록 네 다리로 땅을 박찼다. 미풍이 뺨을 스치면서 그에게 세상의 온갖 비밀을 속삭였다. 길을 잃은 농부의 아들이 눈밭에 쓰러진 것을 물어다 마을로 돌려보내 줬을 때도, 겁에 질린 농부의 갈퀴질에 눈을 찍혔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했다.  

 어떤 때에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는 전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산 것의 살을 갈랐다. 피보라가 일어 눈앞을 흐렸다. 그것이 죄를 짓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는 목숨과 목숨 사이의 무게를 재었다. 종국에는 시체 더미 속에 쓰러져 자신의 무게를 더했다. 고통, 두려움, 슬픔, 죄악감, 회한, 그런 감정들이 뒤엉켜 가슴께에 고이다 피처럼 흘러갔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을 사랑했다. 

 어떤 때에는 태어나자마자 죽어갔다. 세상은 그저 그 무게에 짓눌려 죽어가는 곳이었다. 어떤 때에는 슬픔이 스스로를 살해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았다. 그는 생의 많은 시간 행복했고, 지난 세상의 자기 자신을 알지 못했고, 모르면서도 늘 조금쯤은 자신을 닮게 살았다. 존재의 사슬이 끝을 모르고 이어져 있었으나 그는 그것에 묶여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쥐고 있었다. 놓치지 않도록 단단히. 그것은 그의 선택이었다. 


 먼 곳의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귓가에 다가와 속삭였다. 세상은 너를 굴종하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다. 네가 서 있는 곳이 네 세상의 중심이 될 테고 거기서 너는 네 두 눈과 두 귀를 써서 직접 보고 들어야 한다. 너는 네가 원하는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네 본성이 어떻다고 정의하고 네 삶의 방향을 가르치고 인도하고 알리는 존재가 없으니 이제는 모든 것을 네 스스로 정해야 한다. 너는 원한다면 금수가 되어 그르치고 원한다면 한없이 고귀하고 높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세상이 네게 주는 선물이다. 시리고 벅차도 그것이 너의 생애다. 
 속삭임이 이어질수록 바람의 목소리는 점차 자신의 것을 닮아갔다. 그때의 그는 가진 목소리라고는 낮은 으르렁거림 뿐인 존재였지만 그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는 마지막 마디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시리고 벅차도, 
 그는 달려 나갔다.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땅을 밟고 다음 걸음을 디디기 위해서. 종착점도 목적지도 없이. 그러다 내키면 멈춰서서 계절의 갈피에 녹아드는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강가의 흰 자갈에 스며드는 맑은 빛을 살피거나, 너른 들판에 드러누워 이마 위로 드는 봄볕을 견디기도 하였다. 자유롭고,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세계에서. 그것이 주는 슬픔의 선물과 기쁨의 선물을 모두 맛보며. 나는 모든 시간과 모든 생애의 약동을 들여 그것을 긍정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에서 너를 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는 이따금씩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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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 일부 참조-변형하였습니다... 습관처럼 같탁친구 마음대로 훔쳐썼는데 캐붕이면 꼭말씀해주세요 꾸벅꾸벅

9999님의 coc 타이만 시나리오 불사의 마법사와 사랑하는 인형의 짧은 후기로그?글?소설? 매번 쓸 때마다 뭐라 적어야할지 모르겠는 그것입니다. 세션 내에서 털지 못한 얘기라던가 더 할 이야기만을 조금 채워서 빈 곳이 많습니다. 1대1시날의 후기글은 처음인데 커플덕질로그가 되는군요...

개변이 다방면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스포일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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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윤동주

 

 

 1.

 

 목 끝까지 검은 물이 가득 찼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물 밖에 둔 금붕어처럼 뻐끔대다 보면 마른 입술이 찢어져 틈새로 피가 고였다. 검은 물은 점막을 타고 눈앞을 흐리고 시끄럽게 귓바퀴를 흘러 사람을 미치게 하고 끝없이 끝없이 갉작거렸다. 녹아버린 정신이 곤죽이 되어서 바닥을 기었다. 내가 너무 작아. 너무 작아서. 그걸 내려다보고 있으면 욱, 구토감이 올라왔다. 어떤 날은 귀가 멀기라도 한 것처럼 비명만 겨우 지를 수 있었고 어떤 날은, 검은 물을 뱉어내고 싶어서 억지로 목젖을 후벼댔다. 맑은 위액을 실컷 토해내고 나면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잡고 겨우겨우 잠들었다. 

 

 나 갈라졌어. 찢어졌어. 산산이 조각났어. 살점 덩어리가 칠칠맞게 덜렁거리고 머리카락이 한 뭉텅이씩 뽑혀나갔어. 이빨이 다 부서져서 입술 사이로 후드득 흘러내렸어. 죽음이 앉았다가 버리고 간 몸을 꿰맨 후에도 나는 다시 비틀거리며 죽음을 찾아헤맸다. 어두운 동굴을 벗어나기 전 잠깐 우두커니 앉았던 것이 휴식의 전부였다. 그것이 인생에 단 한 번 찾아오는 축복임을 모르고 그것에게 버려졌다. 너무 쉽게 천국도 지옥도 날려버렸다. 이걸 사는 거라고 부를 수 있다면.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고 찬란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고 그저 지겹고 끊임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멈춰있는 것조차 못하는 지저분한, 추잡한, 역겨운, 더러운

 검은 물. 조각난다는 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네 몸을 조각내는 순간순간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부서지는 것 같아. 해버리고도 끔찍해, 끔찍한데도 해버려. 하지만, 왜, 왜 네가 그런 얼굴인 건데? 내가 지금 얼마나 괴로운지 

 알기는 해? 안다면 돌아왔겠지. 예전처럼 그렇게 불러줬겠지. 그러니까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바보. 멍청이. 쓰레기. 네가 불쌍해. 네가 가엾어. 아니, 아니. 네게 그러고 싶지 않은데, 이럴 땐 내가 내가 아닌 것만 같아…. 어두워진 시야 가운데 숨 쉴 구멍이 떠오르면 배가 아프게 웃으며 뒤쫓았다. 세상이 여전하고 시간이 여전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나면 두 배 무겁게 절망이 내려앉았다. 가끔은 분노에 사로잡혔고 어떤 때는 우울에 잡아먹혔다. 정신을 차리면 방은 엉망이었다. 부서졌다 고치고 부서트렸다 고치고 무너트리고 망치고 그리고 다시 세웠다 다시 무너지는 것들의 탑. 아수라장이 된 방 한 가운데에 서있는데 절박하게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서걱서걱 모래가 갈라지는 시야 사이로 네가 보였다. 그 눈을 들여다 본 게 얼마만인지 너무 낯설고 두렵고 역겹고 사랑스럽고 이상해서 깜빡이지도 못하고 쳐다봤다.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네가 말했다. 다시 시작해요. 다 지워버리는 겁니다. 당신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만이래도 좋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2.

 

 부서진 세상에도 봄이 왔다. 숲은 하나밖에 남지 않아서 이름도 없이 그냥 숲이었다. 살 자리를 찾아 날아온 꽃씨들 덕에 숲에는 온갖 꽃이 다 피었다. 흐드러지고 겹이 많은 분홍색 꽃, 가지 끝에서부터 둥글게 뭉쳐 떨어지는 두껍고 흰 꽃, 흙과 가까이 자라는 보랏빛의 손톱만한 꽃이며 노란색의 자잘하고 술 많은 송이까지 온갖 것들을 다 보고 지나가는 계절이었지만, 그는 그것들의 이름을 몰랐다. 책을 온통 뒤져봐도 없었다. 마법사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물어오는 목소리에 그늘진 눈길이라도 던져주는 날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겨울에는 알이 굵은 흰 눈이 펑펑 내려 바싹 메마른 이파리마저 전부 덮어버렸다. 그럴 때의 숲은 야속하리만큼 고요해졌다. 그런 계절에는 미쳐서 내지르던 비명도 다 묻혀버리기 마련이었다. 그런 고요함이 차라리 좋았다. 첫눈이 뿌듯이 쌓인 날이면 마법사는 뭘 하고 있었건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면 저 멀리서 혼자 눈을 뭉치고 있는 게 보였다. 고장난 마음에 평화를 주는 얼마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무얼 만드는지는 잘 알기 어려웠지만 돌아보고 환하게 웃어주는 상상 같은 것을 했다. 짧은 하루가 지나면, 또 평소 같은 날들이 찾아왔다.

 마법사는 지겹게 변덕을 부렸다. 어떤 날은 눈밭이 너무 눈부시다고, 어떤 날은 꽃밭에 색이 너무 많다고 화를 냈다. 하늘에 별이 존나 많아서 그래서 너무 싫어서 죽여버리고 싶다고 했다. 그런 변덕에 맞춰 커튼을 치거나 하나 남은 눈을 가만 가려주는 게 그의 일과였다. 허락하면 뒤에서 마른 몸을 품에 댔다. 너무 괴로운 날엔 정말 심장이 멎은 사람 같이 움직이지도 않아서 그를 불안하게 했다. 일부러 불편하게 자세를 바꾸고 뒤척여도 미동 하나 없었다. 고통이 스민 일상이 단조롭게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갔다.

 

 

 3.

 

 아담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 어디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인간은 그리도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까?

 

 

 4.

 

 고리 걸듯 가볍게 걸쳐 잡은 손이 간질했다.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디터는 하고 싶은 얘기를 늘어놨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제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작고 보라색으로 우글우글한 것은 꽃잔디. 말하는 입이 즐거워 보였다. 아, 데이지. 교회 옆에 살던 노인이 이걸 앞마당 가득 키웠는데 한 송이라도 꺾어가면 화를 냈어. 잔뜩 쥐어박히고 울면서 돌아왔을 때는 그 사람이 너무 미웠지. 커서 알고 보니까 말이야, 전부 죽은 딸 거여서 그랬대. 죽기 전에 제일 좋아하는 꽃이었다는 거야. 내가 잘못한 거지. 이제는 꺾어가도 화낼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데이지가 계속 데이지여서 다행이야.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지났는데…… 감상은 더 이어지지 않고 입술이 다물어졌다. 뭐라 물어보기도 전에 변명 같은 말이 덧붙여졌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아파.

 물론 거짓말인 걸 알고 있었다. 상상하지 못하는 시절, 공유하지 못하는 추억이 어느새 물씬 다가와 눈앞에서 또 일렁이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그런 때에 초조해하며 서있지 않았다. 다정한 몸짓으로 몸을 겹치면, 그는 멀어졌던 것이 거짓말 같이 쫓아와 포갠 손 위에 손을 얹고는 했다.

 

 예뻐서요.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예뻤다. 느리게 붉고 다정한 색으로 물들었다. 리온. 그렇게 마주 불렀다. 그 이름을 말할 때 혀가 움직이고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새가 퍽 마음에 들었다. 왜 너를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렀을까?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수가 없어서? 그게 네 영혼에 붙은 이름이어서? 잘 몰랐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잊히고 만 이유였다. 가끔 그 이름 때문에, 자기가 그 이름 너머의 다른 사람을 찾는지 정말로 너를 찾는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묵혀둬 좋을 것이 없는 혼란이기에. 이내 고개를 털어냈다. 귓가에 곱게 고인 꽃 한 송이 때문에 하루종일 걸음걸음마다 향기가 났다. 그것 때문에, 어차피 오래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얼굴을 돌려 마주 봤다. 그리고 아주 미약한 움직임으로 속삭였다. 네가 사랑스러워.

 

 햇살이 좋아. 조금 더 걷자. 걷다 보면 꽃향기도 바스러지고, 너도 조금쯤은 졸음에 고개를 기울일 테지만, 그래도 봄이 오면 어김없이 숲을 거닐러 가겠지. 그러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슬픔 다음에 오기로 약속한 것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도 있을 거다.

 

 


핢님의 인세인 시나리오 마법소녀 마성시 마기카..의 후기 로그?소설?입니다. PC3 시점으로 쓰여졌습니다. 시나리오를 와장창 스포하고 시나리오 내용 고대로 따라갑니다 주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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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에게 유배되면 쉽게 병든다 그리고 참 아프게 죽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여기서 참으로 아프게 죽을 것이다 (…)

-김경주, 비정성시 中



#. 1 꿈


햇살은 잿빛이었다. 그러다가 저물어가는 내색도 없이 밤이 되었다. 그림은. 자기가 언제 죽는지 궁금했다. 언제까지 살게 되는지도 궁금했다. 공기는 건조하고 언제나 아픈 냄새가 났다. 깨끗하게 소독한 병실은 거의 빈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림은 늘 약에 취해 떠있었다. 모르핀. 진통제. 차가운 알콜솜. 구멍난 핏줄에 링거 바늘이 들락거렸다. 자주 찔린 피부는 푸르게 죽어갔다. 제정신이 돌아오면 아팠다. 호흡기가 얼굴을 짓눌렀다. 엄마는, 네 영혼이 예민해서라고 했다. 영혼이 예민해서 남들한테 아프지 않을 것이 다 아프다고 했다. 처음에는 갈라진 기침. 그 다음에는 목소리가 안 나왔다. 이제는 혼자 숨을 못 쉬었다. 전에는 쉽고 단순했던 길이 엉켰다. 누구 탓을 할 수도 없었다. 선생님이 대신 병원에 데리고 갔다. 엄마는 새벽기도 나가던 것을 그만뒀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그림은 더 이상 그애가 웃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같이 있으면 옛날이 떠올랐다. 샴푸 냄새. 단팥크림빵. 유치한 이모티콘. 학종이. 연체된 만화책. 하교길에 따라오던 달. 잃어버린 딱풀. 빠진 이빨. 싫어하는 연예인. 딸기 요플레 뚜껑. 빌려준 교복 타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같이 밴드부를 하자고 했다. 예나랑 있으면. 재니스 조플린이 될 수 있었다. 그애는 마치 조플린을 보는 것처럼 그림을 봐줬다. 그러면 솜털이 쭈뼛 섰다.

예나는. 속눈썹이 길었다. 하릴없이 샐 수도 있었다. 늘 같은 눈동자였다. 변함없었다. 맑은 망막에 사람이 비쳤다. 전에는 그 너머에 있는 여자애를 알았던 것 같은데. 이젠 바닥에 떨어진 자기 모습만 보였다.


난 있잖아.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내뱉고 싶은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한테 다 잘 될 거라고 말하지 마.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 마. 넌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픈 게 뭔지도 모르면서. 나한테

그애가 떠났으면 좋겠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림이 상처받을까봐 말을 고르는 잠깐이 싫었다. 상냥한 인사가 싫었다. 멋대로 커튼을 걷어서. 새 친구 얘길해서. 창가에 화분을 둬서. 가습기를 켜서. 화를 내면 눈이 동그래졌다. 넌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동정하는 게 싫었다. 그 동정에 기대는 자신이 지겨웠다.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네가 날 진짜 아낀다면. 이 씨발 좆같은 호흡기나 떼줘. 죽고 싶어. 더는 싫어. 꼴도 보기 싫어.

아냐, 아냐!

와줘서 고마워. 응 그렇구나. 재밌었겠다. 나도. 너랑 같은 학교에 가고 싶었어. 괜찮아. 맨날 방학이라서 좋은데. CD는 이제 더 안 가져다 줘도 돼. 응. 머리가 아파서. 미안. 엄마가 버렸어. 안 들어. 토할 것 같아. 내가 심한 말을 했어? 미안해. 다 약 때문이야. 가지 마. 네가 싫어서 한 말이 아니야.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정말 네가 안 오면 어떡해.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더는 없어. 혼자야. 엄마는 울기만 한단 말이야. 아프기 싫어. 죽기 싫어. 외롭고 비참해.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데? 왜 나한테만? 어째서?




그날은 길거리에 캐럴이 울리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진부했지만 의미있었다. 그림은 씻은 듯이 나았다. 곧 퇴원했다. 의사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의사가 말을 골랐는데도, 엄마는 교회에서 나올 생각을 안했다. 그림은 만약 신이 진짜로 있다면 일단 존나 패고, 그다음 존나 껴안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누워보는 집 침대가 낯설었다. 낯설고 떨려서,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하나님. 이거 꿈이라면. 꿈이면. 내일 일어나기 전에 꼭 죽게 해주세요. 그림은 죽지 않고 깨어났다. 숨 쉴 때 목에 뭐가 걸리지도 않았다. 천장에 붙은 야광별이 보였다. 창문을 열었다. 늦은 아침 공기가 찼다. 뺨이 얼어붙었다. 그 앞에 오래오래 서있었다. 그림은 이불도 개지 않고 이빨을 닦았다. 입안이 화하고 따끔거렸다. 혼자서 이상한 웃음을 웃었다. 다섯 번을 더 했다. 너무 재미있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가 다시 차가워졌다. 책상을 붙잡고 웃으면서 울었다. 한껏 유치한 척을 했다. 예나가 대신 받아다 준 새 교과서에 이름을 썼다. 임그림. 똑바로 썼다. 매직 냄새가 좋았다. 모든 게 다 좋았다.






#. 2 은화 서른 닢


“나 마법소녀가 됐어.”


그런 말을 들었다. 아마 학기 초였던 것 같다. 아직 찬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날렸다. 그림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예나한테서는 늘 좋은 냄새가 났다. 라일락 비누. 상냥한 사람한테서 나는 향기. 솜사탕 색깔의 뺨. 크고 둥그런 눈망울. 거짓말 같은 건 모르는 거울 같은 눈. 거기에 흘러가는 구름이 비쳤다. “아, 털어놓으니까 개운하다!” 예나가 웃었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예나니까. 이건 고작해야 여자애들 얘기니까. 하예나는 언제나 주인공이고. 그게 잘 어울렸다. 대단하신. 하예나. 누구나 다 널 좋아하지. 그림은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렇게 하면 나쁜 생각이 털어지기라도 하는 마냥. “너한테 처음으로 말하는 거야. 아직 언니한테도 얘기 못했어. 걱정할까봐…….” 예나는 그림이 나았을 때.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줬다. 하나도 짜증나지 않았다. 아냐. 가증스럽지 않아. 안 미워. 예나는 착한 애야. 하나뿐인 내 친구야. 그러니까. 이건. 하나도. 다 괜찮아야 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쓰라렸다. 근질거렸다. 화가 났다. 몸 위로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그림은 더덕더덕 붙인 밴드 위를 신경질적으로 긁어댔다. 눈을 굴렸다. 말은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럼. 그럼 이제 바쁘겠네. 그럼 우리 이제. 같이, 같이 못 놀아? 우리 영화도 보러가기로 했고. 또. 또…….

“아냐, 아냐!”


세상이 느리게 보였다. 연분홍색 입술이 움직였다. 예나가 말했다.


“우린 변하지 않을 거야. 친구잖아.”


그런 대답이었다. 하예나가 할만한. 단어 단어가 내리꽂혔다. 신경을 괴롭혔다. 우린. 변하지. 않을 거야. 친구잖아.

으응. 그림은 억지로 입끝을 올려 웃었다.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넌 나 같은 건 금방 잊어버리겠지. 아. 다행이다. 다행이네. 더 이상 날 불쌍하게 쳐다보지도 않겠네. 드디어. 다 보여. 난 다 알아. 잘 어울리네. 귀여운 리본. 그런 귀여운 거 너나 해. 유치해. 보기 좋네. 선물 포장지 같다. 존나 존나 예쁘네.


“마성시를 잘 부탁해.”


그러고 뭘 했더라. 옥상에서 밀어버렸나. 목을 졸랐나. 그런 상상을 하긴 했지. 다시 되짚으며 수천 번도 더 했다. 아니. 둘이서 슬러시를 먹으러 갔다. 중간에 예나는 마성시를 구하러 급히 가야했다. 자그마한 뒷모습이 보였다. 지독하게 허전했다. 그림은 집에 와서 전부 게워냈다. 화가 났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화가 나는 지를 몰랐다. 입에서 위액 맛이 났다. 입을 헹구고 또 헹궜다. 수건을 걸었다. 비틀거리며 방으로 갔다. 왠 못생긴 인형 같은 게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안녕. 난 QB라고 해. 나랑 계약해서 마법소녀가 되지 않을래?”


그림은 인형을 냅다 밀치고 자기 침대에 누웠다. 그대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싫어. 기분 나빠. 다들 나 좀 그만 괴롭혀. 꺼져.


“나랑 계약하면 대가로 소원을 하나 이루어줄게. 뭐든.”


꺼지라고 했잖아. 남들한테 관심 없어. 귀찮기만 하고. 다 망해버리라지. 알 게 뭐야. 난 바라는 거 없어. 예전이라면 또 몰랐겠지. 하지만 난 이미 다 나았다고. 아프지 않아. 기침도 안 해. 의사 선생님도 다시 병원 올 필요 없댔어. 노래도 잘해. 오히려 전보다 더 잘해. 내일 밴드부 오디션도 있어. 난, 난 그러니까…….


“하예나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림은 덜컥 뱉어냈다. 자기 입에서 나오는 발음이 섬뜩했다. 낯설었다. 수십 번 수백 번 생각했는데. 직접 말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차갑고 단호했다. 다른 사람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쓰레기. 쓰레기. 인간 쓰레기. 뒤돌아보기 무서웠다. 솜인형 새끼. 너도 내가 쓰레기 같다고 생각하지? 그렇게 말할 거지. 그러니까, 이런 게 될 리가……


“그래! 계약은 완료되었어. 네 소울젬은 여기 둘게.”

……?


인기척이 사라졌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림은 한참동안 이불을 덮어쓰고 있었다. 느리게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순간,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야, 장난치지 마.”


적막했다.


“아니 잠깐, 잠깐! 야! 어디갔어, 어디, 아니. 씨발, 취소할래, 취소!”


그림은 벌떡 일어났다.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오다 바닥에 고꾸라졌다. 온 방을 다 뒤졌지만 큐비는 없었다. 그래서 휴대폰을 찾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예나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어떡해. 어떡해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찾을 정신이 없어서 오랜만에 번호를 쳤다. 아직 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예나가 받지 않았다. 전에는 자기가 걸으면, 한 번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야 내가 불쌍하니까. 그랬겠지만. 아니. 예나야. 내가 잘못했어. 네가 없으면 난. 난, 이제 친구도 없고. 난…….

직접 찾아가볼 용기는 없었다. 임그림은 비겁했다. 확인해야 하는 사실이 무서웠다. 무거웠다. 욱신거렸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림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시끄러웠다. 시끄러워. 입으로 그냥 꺼내서, 뱉어버리고 싶어. 거짓말. 거짓말이지. 이거 전부 다 꿈일 거야.

세상은 하루만에 무너지지도 달라지지도 않았다. 왜 무너지질 않는 거야. 나 때문에. 하예나가 죽었을 지도 모르는데. 비정한 새끼들. 무신경한 새끼들. 니들이 그애에 대해 뭘 알아. 대체 뭘 알아. 그림은 침대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그러도록 두지 않았다. 학교에 갔다. 그애 자리가. 뒷 자리가 비어있었다.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었다. 심장 씨발. 그냥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자기 자리에 엎드렸다. 어떻게 하지. 하예나가 없으면 예나가 기준이라곤 없는 큐비 새끼 어쩔 줄 몰라 고민하다 들고 나온 소울젬이 가슴을 딱딱하게 눌렸다. 엎드려 있기 불편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기도 싫었다.

그 때 누군가 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림은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들자 거기에는.

하예나가 있었다.

아무 일도 없던 날들처럼. 그저 한참 뛰어왔는지 얼굴이 붉었다.


“어. 미안, 놀랐어? 어쩐지 늦잠을 자서.


입이 쩍 벌어졌다. 말라붙은 입술이 찢어졌다. 그림은 급히 예나를 잡았다. 팔다리를 만져봤다. 머리에도 손을 댔다. 따뜻했다. 그러니까. 살아있었다. 명백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씨발, 씨발! 너는 내가 얼마나, 얼마나…… 안심이 되자. 곧 울컥 짜증이 솟았다.


“왜 그래? 그림아?”


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림자 하나 없는 얼굴이 이쪽을 봤다. 눈을 깜빡였다.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자그마한 계집애. 네가 대체 뭘 지키겠다고. 뭘 지킬 수 있다고. 네가 뭔데…….


“하예나.”

“어, 어?”

“나도 그 마법 머시기인가 하기로 했어.”


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림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너랑 같이 있으려고. 넌 내…… 친구니까.”





#. 3 유다


그럴 수만 있다면 예전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고 싶었다. 자신이 얼마나 추하게 굴었는지. 죄없는 이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둘은 같은 학교 같은 부에 가자던 약속을 지켰다. 안 지켜진 것만 못한 약속이었다. 전엔 예나랑 함께 있으면 즐거웠는데 더는, 더는 그렇지 않았다. 예나를 온전히 예나로 볼 수 없었다. 자기가 비쳐보였다. 물론 그게 그애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화가 났다. 죄책감이 그림을 좀먹었다. 내리눌렀다. 압박했다. 질식했다. 숨이 막혔다. 이건 전혀 다른 병이었다. 면역이 없었다. 죽어갔다.

하예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쳐다볼 때. 기분이 나빴다. 그애는 가끔씩 쓸쓸한 것처럼 웃었다. 그러면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넌 친구들이 있잖아. 사람들은 다 널 좋아한다고. 너한텐. 하예림도 있잖아. 넌 예쁘고. 행복한 애잖아. 대체 왜 그딴 표정을 하는 거야. 몸서리가 쳐졌다. 큐비를 붙잡고 화를 내도 소원은 이루어졌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럼 내가 대화하고 있는 건 송장인가? 난 송장한테 화를 내고 있는 건가?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하예나가.

죽었다가 살아나기라도 했단 말이야?



그림은 미친 듯이 먹어댔다. 그래도 살이 붙지 않았다. 반쯤은 다시 토했다. 오히려 몸은 점점 가벼워졌다. 가끔은 머리카락이 뭉터기로 빠졌다. 됐어. 아직 많으니까 뭐.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무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림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다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별로 상관없어. 아무도 몰라. 난 여기 있어야 돼. 난, 난. 있어야만 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림은 부장이 좋았다. 배수아는 고작 한 살이 더 많았다. 1년은 긴 것 같으면서도 짧은데 어째서인지 수아는, 훨씬 더 어른 같았다. 뭐랄까. 태양 같았다. 그런 게 좋았다.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이 사람을 생각하면. 그래도 조금은. 끔찍한 일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나는 이제 아픈 애도 아니고. 그런 애였던 적도 없다고 거짓말이 하고 싶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잘할 수 있다고. 증명하고 싶었다.





#. 4 나쁜 생각


하예나의 소울젬에서 마녀의 흔적이 끊어졌다. 그림은 놀라지 않았다. 놀랄 수 없었다. 모든 일이 단순하게 그려졌다. 하예림이 그랬겠지. 죽어도 못 놓으시니까. 그랬겠지. 솔직히 하예림에게는 아주 약간, 안쓰러운 마음 뿐이다. 부장이랑 친한 것도, 사사건건 가르치려 드는 것도. 남의 소울젬을 멋대로 오염시킨 것도 다 싫었지만. 임그림이 하예림에게 한 짓에 비하면 전부 깃털 같이 가볍다. 그림도 그걸 알았다.

하예나는 지금 무슨 기분일까? 궁금했다. 어떻게 이걸 다 알면서, 알면서. 그러면서 꿋꿋하게 마녀를 찾고 다 같이 무찌르자고 말할 수 있지? 그 마녀가 뭘로 만들어졌는지 알면서? 그런 모습을 볼수록 괴로웠다. 그냥 아무도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가 있구나 너는. 정말 대단해. 성스러워. 내가 졌어. 이제 그만할래. 탓하기도 지쳤다. 그냥 다 솔직하게 뱉어내고 싶었다. 될 수 있다면 사과하고 싶었다.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나 때문이야. 전부, 전부 다. 미안해. 미안해.

예나는 뛰쳐나온 그림을 쫓아왔다. 단 둘이 얘기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림은. 지금이 사과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 알면서도, 매섭게 예나를 추궁했다. 너 제대로 설명해봐. 대체 왜 너한테서 흔적이 끝나는 건데? 왜 말하지 않았어? 사람을 상처입히는 것은 너무 쉬웠다. 하예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예상한 것과는 달랐다.

그러니까. 그림이 나은 건 기적이 아니었다. 기도가 통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하예나의 희생이었을 뿐이었다. 착하고. 오지랖 넓은. 친구. 고작 그런 소원이었다고. 하예나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널 좋아하는 데 어떻게 그걸 얘기할 수가 있겠냐고. 좋아? 좋아한다고? …… 누가? 누구를?


귀가 울렸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턱까지 찼다. 손발에 감각이 없었다. 그림은 다시, 다시 도망쳐나왔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예나는 쫓아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쫓기는 기분이었다. 그림은 벽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예나가 날 위해 그랬을 리 없어. 걔가, 그애가, 나는……

아니, 그랬겠지. 그러셨겠지. 어련하셨겠어. 하예나는 존나, 존나 착하니까. 그래. 세상에 기적이 어딨냐. 좋아한다고? 웃기지 마. 내가 불쌍해서 그렇게 얘기해주는 것 뿐이겠지.

씨발. 씨발, 나는, 나는 그래서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죽여버렸다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착한 척하래, 그러면 나한테 말이라도,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말이라도…… 내가 네 병신같은 목숨 살렸다고. 가엾고 불쌍해서 살려줬다고 자랑이라도 하지 그랬냐고.

난 이젠 돌이킬 수도 없는데.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그러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 너도 그냥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잖아. 대체  왜……

왜 끝까지 이렇게.

나를.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 5 非情聖市 비정성시


기쁨의 마법소녀 하예나가 마녀가 된 건 임그림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녀가 세상에 남은 인간을 전부 죽여도 임그림은 할 말이 없다. 세상을 무너트려도 그러려니 한다. 사실 세상 같은 건 구하지 않아도 괜찮아. 괜찮아. 하예나가. 아님 하예림이 화가 나서 자길 죽인대도 기껍다. 어차피 이건 전부 임그림 때문이니까. 온세상 사람들이 모두 임그림이 추한 인간인 걸 안대도 아무 상관 없다. 하지만, 하지만

부장은 몰랐으면 좋겠다. 부장이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니가……


마녀가 나긋하게 날갯짓을 했다. 꿈이 조금씩 부서져내렸다.


수아는 단호했다. 낫 끝이 예나를 향했다. 예나는 그 선택을 받아들였다. 단 한 사람, 거기에 반발할 수 있었던 건 하예림이었다.

그래서, 임그림은 수아를 밀치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부드러운 허밍이 들렸다. 꿈이 부서져내렸다.


눈앞이 흐릿했다. 조금 멀리서, 당황한 기색의 하예림이 보였다.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자기 동생을 지키려고 버둥대고 있었다. 뭐야. 뭐야 하나같이. 마법이고 뭐고 다 세상은 안중에도 없구만…… 어쩌면 이렇게 되었어야 하는 일이었다. 언니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하예림은 처음부터 조준을 잘못하고 있었던 거다. 하나같이 멍청해서. 아. 지겨운. 소독약 냄새.


꿈이 무너져내렸다.


멀리서 부장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파. 아팠다. 아니 이 정돈 아픈 것도 아냐. 나는, 나는……. 차츰 의식이 흐려졌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언니. 저 잘했죠. 다치진 않았나요? 나 괜찮았죠? 나는, 나는 존나 나쁜년이에요. 모든 걸 다 망쳐버렸어요. 저. 있잖아요 언니. 그래도 나. 열심히 했어요. 언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요. 언니가 좋았어요. 언니랑 있으면 좀 숨쉬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나 잘했다고 한 번만 해주세요. 응? 언니. 언니는. 나 미워하지 않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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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 빈 내용을 더 채우고 싶은데 힘이 모자랍니다. 저희 파티는 전멸엔딩을 보았습니다. 제 PC3은 PC2의 빔을 맞고 탈락했습니다. 욕이..많이 들어가있고 워딩이 센데요, 캐적인 요소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마성시! 비정하고 성스러운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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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리 씨가 떠났다. 우리는 23 제곱미터의 좁은 공간을 급히 벗어나고도 갈 곳이 없어 계단에 앉아 술을 마셨다. 그녀가 있던 공간의 빈 자리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와, 그녀를 비우고 있던 것과 우리는 어쩔 도리 없이 이 세상에서 잠시간 공존했다. 정확히 공존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공존은 함께 존재한다는 뜻인데, 비움을 존재로 치부하는 건 틀림없이 모순이 될 테니까. 하지만 다른 대체어를 찾기 어렵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깊은 대화를 피했다. 나는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침 상황도 도왔다. 그녀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고, 우리는 쫓기고 있었다. 나는 차라리 모래를 밟는 감촉과 좋아하는 노래에 대해 묻기로 했다. 

 아첨으로 길들였던 혀를 남의 진실한 안부를 묻는 데에 쓰는 게 낯설어서 나는 자주 말을 더듬었다. 그런 말들은 진심 뒤에서 맴도는 것이어서 서투르고 낮았다. 나는 그녀의 입술 속에 사는 검은 공간을 쉽게 마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사과하는 것을 잊었다. 그 때 두고 도망쳐서 미안하다고, 미처 화면을 쳐다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고, 그런 일은 이 세상의 누구도 겪어서는 안되는 거였다고 제대로 말했어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죄책감을 목졸랐어야 했다. 그녀가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알고 있었는데. 다만 하기 어려운 말이었으므로 피했을 뿐. 

 차라리 버클리의 말을 믿고 싶다. 이 좁고 더러운 계단에서 눈 감는 것만으로 위안할 수 있도록. 속눈썹과 가죽과 붉은 실핏줄로 덮어서. 눈꺼풀 안과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을 싸그리 지워버릴 수 있다면. 시발 잠깐. 그런게 공허가 하는 일이지. 끔찍하다.  

 하긴 이제는 무언가를 새로이 믿는 일이 힘들다. 


 기껏 유리잔을 두 개 갖고 나왔는데 그는 병째로 마신다. 나는 최근 알게 모르게 그를 조금씩 따라한다. 잔을 얌전히 구석에 내려놓고 병을 들었다. 

 한 씨는 늘 짐이 적다. 

 의도인지 아닌지는 알기 어렵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그렇게 꾸려둔 것 같다. 어딘가를 목적하기보다는 그저 도망치기 위해서. 모든 행동에 그런 습관이 든 사람이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그와 말할 때 전보다 자주 초조해졌다. 그가 변해서가 아니라 내가 needy해져서다. 혼자를 감당하기 싫으니까. 나는 농담조로, 분명 그가 베리보다 먼저 총에 맞거나 시멘트에 묻혀 바다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내기를 걸고는 했다. 그는 도박을 잘 하기에는 지나치게 -내가 그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착하다. 이번엔 내가 졌다. 아쉽냐면, 아쉽지 않다. 슬프냐면? 슬프다. 

 우리는 공통점이 별로 없다. 

 그때는 선한 의도와 좋은 인간, 더 나은 인간을 믿었었다. 그런 것들의 존재를 믿었다. 인간은 위대하니까. 어쩌면 무궁무진하니까. 더 나은 위치. 경지. 고도! 높낮이에 눈이 멀어 뒤돌아볼줄 모르는 이상주의자였다. 누가 뜯어말려도 귀막은 채 내가 맞다고 생각한 길을 걸었다. 좋은 향수와 가벼운 권력은 덤이었고. 우드워드는 돈이 있었고 후광도 있었다. 명성 있는 사람의 숨에서는 달콤한 맛이 났다. 너무 달아서 이가 다 썩었지만. 나는 그를 사랑했으므로 어떤 날은 슬퍼서 한숨짓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를 클라리사에 대입했다. 그걸 위해 가족과 의절하고 많은 친구를 버렸다. 아직도 동생은 번호를 바꿔가며 욕설을 보낸다. 지금은, 적어도 그 모든 일이 있고서야 내가 즐겼던 것들이 얼마나 한심한 신기루였는지 안다. 

 다만 배움의 대가가 너무 크다. 그녀는 좀더 나은 대접을 받았어야 했다. 


 대체 그때 우리가 갖고 있던 건 뭐였을까요? 가졌다고 생각했던 건? 

 어째서 인간은 기댈만한 관념을 만들어내야만 했던 걸까? 

 믿음이란 뭘까? 

 전에는 나를 살게 해줬던 것들이 이제는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손발에 감각이 없을 때는 어디로 도망쳐야 하지?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아니 

 이런 유치한 가정은 그만둔다. 나는 아직, 아직 후회하지 않는다. 깔끔한 화장실과 좋은 스킨을 쓰는 건 즐거웠지만. 누구도 나에게 그런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그 누구도 어떤 존재도 그런 것으로 사람을 유혹해선 안된다. 나는 우리가 적어도 인생을 걸만한 일에 사용되었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이 밤을 견딜 수 있다. 알아주는 사람이 옆자리에 앉은 도박 중독 불명예 퇴직자 뿐이더래도. 비록 서로 뿐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공허에 잡아먹혀 완전히 비어버리기 전에 집을 떠났다. 나는 이 순간을 예비하며 최근 몇 년간 그녀의 일부분을 외우려 애썼다.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 작은 유산이 오래도록 남기를 시간이 허락했으면 한다.

 이 집 또한 곧 빈다. 

 어떤 생은 쉽게 멈추지 않아서 눈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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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조한 글이라 다시 보니 민망하군요... 공간에 관하여 탐사자 데미안 드부아는 우드워드의 비서이자 연인으로 젊고 허영심 많은 광신도였습니다. 동료 탐사자 베리가 속성 비움을 당하자 나중에는 자기 손으로 이 끔찍한 영화 필름을 불태우는 선택을 했습니다.



coc 시나리오집 이름없는 공포들에 수록된 공간에 관하여 후기? 짧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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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예술품의 메세지 탐사자 엔조 리슐리외는 사고로 혼수상태인 쌍둥이 형 엔조의 이름과 신원을 훔쳐 유명 평론가 행세를 하는 캐릭터였습니다. 걸작을 완성하려 피나게 글을 썼지만 결국 영감의 씨앗이 터져 로스트했습니다. 이것은 깨어난 진짜 엔조 시점에서 쓴 뒷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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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조 리슐리외가 오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것은 189n년 n월 n일 아침이었다. 오래 굳어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이 낯설었다. 그가 눈을 뜬 것을 발견한 하녀가 급하게 물수건을 갖고 왔다. 그녀는 젖은 천 조각으로 익숙한 듯이 그의 얼굴과 몸을 닦았다. 내가 대체 얼마나 이런 상태였지? 엔조가 아직 저 너머에라도 있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거예요.

 엔조는 영락없이 휠체어 신세가 되었다. 아주 조금씩 움직이는 법을 다시 배워야했다. 의사는 모든 정황을 말해줄 테니 몇 년을 더 쉬라고 했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고는 그저 남 일 같았다. 부서졌다가 맞춰진 신체만이 엔조에게 남아있는 숙제였다. 펜을 쥐려고 하니 손이 덜덜 떨려 당최 글씨가 만들어지질 않았다. 음. 엔조는 차분하게 잉크를 적신 펜 끝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다시 나를 조립하는 동안, 무얼 해야 할까.


 엔조는 자신의 뿌리들을 찾아내는 데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하나뿐인 혈육인 동생은 자신의 이름을 빌려 평론가 행세를 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실종되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엔조는 동생의 행방보다 동생이 자신의 이름을 빌려 끼적인 글들을 먼저 찾았다. 몇 장 넘겨보니 절로 실소가 나왔다. 치열하게 엔조를 흉내 낸 글이었다. 편협한 취향이지만, 대체로 보는 눈은 있었다. 가끔은 돈을 받고 치졸한 기사도 써냈다. 그 애는 가장의 공백 동안 다행이도 굶어죽지는 않을 만큼 썼다.

 

 엔조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조사했다. 펠라당의 첫 전시회 직후까지 그 애는 증발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후 동생을 기차역에서 목격했다는 증언을 얻었다. 그 곳에 일했던 사람들을 캐자 그림 하나를 옮기는 일을 했던 다르크 가의 하인을 만날 수 있었다. 하인은 그때 당시의 일을 꽤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집안의 주인은 실종되었으며 자택은 공화 정부의 관리 하로 들어갔다고 했다. 같은 날 동행했던 사람들 중 동생과 함께, 예술계를 주로 다루던 로맹지의 젊은 기자 하나도 실종되었다. 그의 글도 모조리 찾아서 읽어보았으나 그저 마음이 다른 데에 가 있는, 가십에 충실한 잡지라는 인상 뿐이었다. 정치범의 망명에 어떤 식으로든 엮이게 된 것이었을까? 그들의 행적을 쫓으면 쫓을수록, 괜한 상상력만 불거졌다.

 엔조는 되도록 피하려고 했던 수단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동생과 함께 열차에서 목격되었던 사람들 중 행방이 분명한 이들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젊은 마드모아젤 클로에는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동생이 살아 돌아온 줄만 알고 조각칼을 떨어트렸다.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납득에는 시간이 필요해보였다. 조금 시간을 더 들인 후에야 엔조는 그녀에게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클로에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찾아간 두 번째의 사람도 같은 말을 했다. 파리 근교에서 살고 있던 무슈 브란트였다. 정돈되지 않은 수염에 앞치마에는 덕지덕지 물감이 묻어 있었다. 그들의 작품은 삐뚤어진 시선으로 먹고 살았던 엔조조차도 흠을 잡기 어렵게 완벽했다. 두 사람이 만들어낸 모든 창조물 하나하나가 신이 불공평하다는 명제의 경험적 증명 같았다. 이데아의 옷자락 끝을 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받았던 기묘한 시련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악몽과 불타는 집에 대해, 거기서 불꽃과 함께 사라진 것들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 젊고 안타까운 것들 중에 자신의 동생이 안고 간 자신의 영광, 이름, 명예가 있었다. 동생은 그날 밤 손끝에 쥐가 나도록 자판을 두드리고 펜을 움직였다. 오른손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자 왼손으로 바꿔서 썼다. 그러나 그 그릇은 날 때부터 영감의 씨앗을 받아내기에는 너무 작았다. 관절이 녹도록 춤을 추고 색채의 산을 쌓아도 아폴론의 뮤즈들은 그저 그들에게 안 돼, 라고 속삭이고 웃었던 것이었다.

 재밌기 전에 약간은 괴로워지는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엔조는 살짝 질투가 났다. 나라면, 나라면 달랐을 텐데, 그런 귀중한 기회를 그런 범재가 얻게 되다니, 사랑을 앞질러 이런 생각들이 튀어나온 것은 아무래도 그 씨앗을 틔워낸 두 사람이 만들어낸 작품들을 미리 만나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아름다운 것을 악마적이라고 하는 데는 늘 그렇듯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한참을 더 브란트의 그림 앞에 서 있은 후에야 휠체어를 돌릴 수 있었다. 천재들이 입을 맞추어 비밀 의식을 하고는 거짓말을 하는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으나 이런 숭고함 앞에서 그것이 거짓이든 아니든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모든 일들을 듣고 정리한 엔조는 결국 책상 앞에 앉았다. 엔조는 자기도 모르게 펜촉을 씹어대며 생각했다. 그저 있었던 일을 쓰자. 동생은 감당하지 못한 영감을 받고 머리가 터져서 죽었다. 그 애는 천재가 아니었다. 그저 말을 조금 할 줄 알고 글 욕심이 있었지. 그 애는 허영덩어리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혈육이었다. 엔조는 망설이다가 제목을 적어내려갔다.


1890년 프랑스 파리,

젊은 엔조 리슐리외의 실종에 대하여.

          -피에르 리슐리외 저(著)-






CoC 이름없는 공포들 시나리오집의 예술품의 메세지 짧은 후기..글..소설? 같은 것. 시나리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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