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연성 브라코이 섬의 스포일러가 있음 후반에 남캐끼리 좀 그렇고 그런거 있음...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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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벽에는 그 한마디가 쓰여있다. 그는 자부심에 차서, 한 번도 흔들려 본 적이 없는 자기 확신이 어린 눈으로 그 문장을 마주 보았다. 자신을 아는 것은 그가 겪어본 숙제 중에 가장 쉬웠다. 그는 그게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된다는 듯이 가볍게 벽을 짚으며, 나는 신의 아들이고, 비상하는 자라고 대답한다.

 북풍과 인간 여인 사이에서 난 쌍둥이 형제는 보레아다이라고 불렸다. 하늘만큼 푸른 눈을 가진 쪽이 칼리아스, 매의 날개가 달린 쪽이 시티르였다. 둘 다 반신반인이었지만 물려받은 것은 달랐다. 운명의 여신 클로토의 손길이 부드럽게 실을 꼬았다. 신성(神性)이란 본디 불공평하지. 그녀가 조소했다.
 형제가 나고 자란 곳은 지반이 높고 바다에 맞닿은 절벽 위의 도시였다. 시야를 어디로 던지건 언제나 넓고 푸른 하늘이 이마 위로 탁 트여있었다. 바람이 절벽과 절벽의 틈새를 휘돌아 달려갈 때면 언제나 깊고 음산한 음악이 울렸다. 어릴 적 시티르는 어머니의 무릎에 기대어, 달콤한 리라 연주라도 듣는 양 멀리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잠겨 들곤 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멀리서 울리는 섬뜩한 바람 소리였지만 소년에게 그것은 자장가고 약속이었다. 맹세이고 속삭임이었다.
 그는 걷기보다 날갯짓을 먼저 배웠다. 부드러운 솜털투성이였던 날개는 몸보다 빨리 자라서, 금새 뻣뻣하고 풍성한 깃털로 뒤덮였다. 오레이티아는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눈으로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그는 다루기 어려울 만큼 자기 세계가 뚜렷한 아이였고, 그녀는 그를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 아이에게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말과 사람 사이의 일, 태도와 방법 같은 것들뿐이었다. 시티르는 많은 것을 저 혼자 깨우친 양 굴었다. 제 동생과는 달리 단 한 순간도 아버지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한 편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말을 배우기 전부터 그는 바람의 속삭임을 들었으니까.


 바람과 보내는 시간은 찬란했다. 소년은 아버지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면 언제나 함께하는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신의 피로 데워진 몸은 가벼웠고 두 날개는 지치는 법을 몰랐다. 그는 그럴 수 있었던 순간부터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창공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얼핏 빈 듯 보이는 공간은 눈부신 에테르로 가득했고 바람은 그것을 순환하며 세상을 작동시키는 거대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사나운 북풍의 사랑하는 자식이었다. 내가 제피로스의 아들이었다면 좀 더 나긋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지. 서풍은 유려하고 따스하니까. 그러나 그의 신성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냉기로 지어졌다. 겨울을 불러오고야 마는, 목 뒤의 솜털을 쭈뼛 곤두서게 만드는 서늘한 숨으로부터. 한낮의 햇볕에 어깨를 그을어도 북풍이 손수 벼린 그의 날개는 녹아내리지 않았다. 깃과 깃 사이에는 언제나 차가운 바람이 맴돌았다. 먼 트라키아 땅을 넘어온 북녘 휘페르보레아의 향기가 거기 묻어있었다.
 그러니 단 한 순간도,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타고난 맹금의 눈은 바람의 결과 마디를 읽었고 날개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는 언제나 더 높이, 더 빠르게 상승했다. 인간의 공간과 신들의 공간, 그 어딘가 까마득한 곳까지 닿아 숨을 깊게 들이켜면 자유의 벅참과 공허감이 폐부에 가득 찼다. 그것을 오래 공들여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그가 지어온 생애의 전부였다. 
 자유로움. 길게 펼친 날개깃에는 저절로 그를 스쳐 간 바람의 무늬가 그려졌다. 그것이 그가 가진 신의 조각이 주는 영광이었다.

 반신반인의 생애가 으레 그렇듯 그는 양쪽 세계 모두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가진 인간의 단면은 그가 이 땅에서 영원히 발을 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남들만큼은 아니어도 그 역시 잠을 자고 식사를 해야 했다. 금수가 될 수는 없으니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문안과 작별의 규칙을 배웠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시시했다. 가지고 태어난 축복은 그의 등 뒤에서 언제나 빛났고 이는 단 한 순간이라도 숨겨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듯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쏟아지는 관심은 언제나 당연했고 그에게는 늘 엇비슷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어머니의 말대로 친구를 만들려고 애써도 보았지만, 그는 그들이 가진 번민과 고통에 결코 온전히 공감할 수 없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무리 설명한들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이방인의 감각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었다.
 운이 좋았던 지점은 그가 왕자이고 잔인한 재치를 타고났다는 것이었다. 그는 원하는 순간에 남의 기분을 띄우고 망치며 매끄럽게 이야기하는 법을 쉽게 깨우쳤다. 이후로는 모든 것이 훨씬 편해졌다. 대화란 그저 허공을 맴도는 장식품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그 행위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그래도 별반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 종류의 외로움이란 홀로 찬란한 자가 짊어지는 멍에 같은 것이었고, 그에게는 언제나 다른 선택지가 있었으니까.
 비상하는 것. 위대해지기를 꿈꿀 무렵부터 바람이 그의 귓가에 지나간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들은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수납하며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 별에 닿을 만큼 가까이 오르면 그 별자리에 얽힌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는 전갈자리의 꼬리로부터 도망쳤고 사수자리의 화살촉 끝을 피했다. 아. 별이 되고 싶다. 그는 생각했다. 그러면 다시는 땅에 발을 디디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결국은 고개를 젓고 만다. 한 자리에 영영 붙박이는 것도 싫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다른 영웅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그가 브라코이에서 두 나라 간의 전쟁을 막고 남의 사랑을 이루어주려고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무게 없는 마음의 발로였다. 세상은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들로 가득했고 영웅의 수요는 늘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여유가 되는 만큼 오지랖을 부렸다. 거기에는 특별한 의무감도, 신실함도 없었다.
 그러나 섬의 주인이 누구인가? 무쇠를 닮은 살육과 전쟁의 신이 산꼭대기에 강림하자 자그마한 세상은 곧장 그의 위압에 짓눌렸다. 공기가 창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피부가 시큰할 정도였다. 공기의 흐름을 예민하게 느끼는 날개는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레스는 진노했다. 그는 이들 영웅의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피와 살육이 없으니 훼방이고 반칙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산꼭대기로부터 바위들이 쏟아져서 인간의 몸을 짓누르며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제대로 된 무덤도 묘비도 얻지 못할 가여운 시신들이 바닥에서 으스러지고 바다 위에 둥둥 떠 올랐다. 전쟁신의 새 떼들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그 붉은 피를 들이켰다. 신들이 이렇게 잔인했다. 헬레네는 바닥에 이마를 짓눌렸고, 그녀의 웅변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너희가 내 발밑으로 와서 직접 얘기해보아라. 어디 들어보겠다.”

 선심을 쓰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 깊은 곳에서 차가운 바람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티탄 신족의 피가 가진 고질적인 오만 때문이었을까? 그럴 수밖에 없는 신의 앞이라 한들,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경건함 대신 비틀린 마음만을 느낀다.
 “아레스시여. 당신에게 아프로디테가 있고, 저희의 행동이 그녀의 뜻을 따르는 일인데 어찌 이렇게 가혹하게 구십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서풍을 흉내 내듯 부드럽다. 신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어 음절을 내뱉을 때마다 목구멍이 따끔거린다.

 “두 사람에게 자비를 보여주심으로서 당신의 그녀에 대한 애정을 증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언제나 신의 앞에서 대담했지만, 그걸 받아주냐 마느냐는 신들의 마음이었다. 헤르메스는 광대를 좋아했고 아레스는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그렇게 단순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듯한 신의 음성이 그의 말을 동강 냈다.

 “감히 네가 신들 사이의 사랑에 대해 논하느냐. 네가 그토록 오만한 것이 그 날개 때문이냐.”

 이어진 손짓 한 번으로 그는 바닥에 처박혔다. 어쩔 겨를도 없이 거대한 바위가 몸을 짓눌렀다. 자랑스러운 날개가 기이한 방향으로 꺾이며 부러진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권능이 또 다른 권능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다. 갈색의 날갯죽지에 붉은 피가 번졌고 살을 뚫고 부러진 뼈가 드러났다. 짓이겨지는 고통 때문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낮은 곳에 닿는 바람에서는 흙먼지와 피와 쇠의 냄새가 났다. 그는 절실하게 깨닫는다. 진짜 권능 앞에서 반신반인이란, 반쪽짜리 인간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반쪽짜리 신은 될 수 없다. 서늘하게 뺨에 닿아온 대지는 네가 죽어 돌아갈 곳은 결국 여기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벗어날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아닌 척하더라도 말이야. 입안에 쓰고 비린 맛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를 진짜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은 신의 태도였다. 타르타로스에 집어던지며 영혼까지 불태우는 격노가 아닌, 하루살이를 눌러 죽이듯 무신경한 분노. 그의 존재 이유를 꺾고도 아레스는 아무런 마음의 거리낌이 없을 것이었다. 그는 신의 청동 조각 같은 위엄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고 그 마음에 한 점 티끌로도 남지 않을 것이었다.
 몸의 고통보다 더 치욕적인, 겪어본 적 없는 굴욕의 냄새. 그 안에서 숨쉬기조차 힘겨웠다. 아버지. 저를 이런 곳에 내버려 두지 마세요. 제가 당신의 영광에 누를 끼친 적이 있습니까. 어째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제발…….
 그렇게 빌고 싶어도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그의 몸을 짓누르던 바위가 폭발하듯 산산조각 났다.
 시간이 장난을 치는 듯 찰나의 모든 일이 느리게 흘러갔다.
 누가 감히 신의 벌을 거스르는가? 감히. 고통을 앞지르는 놀라움에 그는 힘겹게 고개를 움직였다. 부서진 돌의 파편들이 일으킨 먼지와 흙 보라 너머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러다 흐리던 시야가 서서히 또렷해지면서,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팔뚝에 핏줄이 일어날 정도로 세게 몽둥이를 쥐고, 그의 앞을 막아선 채로, 아레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그런 식으로 올려다보는 것. 인간에게 외경하는 마음이 인 것. 신에게 반항하는 자를 목도하는 것. 누군가를…….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상하게 눈이 뜨겁고 시려서 그는 속절없이 인상을 썼다. 그러나 시선을 뗄 수는 없었다. 어딘지 아득히 먼 곳에서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심장에 박히는 아픔. 이 순간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너무나 쉽게 이해해버린다. 레온티오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신들이 이렇게 잔인했다.

 

 


 

 

 일행은 다시금 항해 길에 올랐다. 그는 그 상황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보살핌을 받았다. 날개에는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았다. 상처를 돌봐준 선원은 한동안 날개를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새를 치료해본 사람은 있어도 날개 달린 반신을 치료해본 사람은 없으니 그가 나을지 말지는 미지수였다. 운명의 여신께서 결정할 일이죠. 선원은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들었더라면 분명 코웃음을 쳤을 텐데. 지금은 씁쓸하게 끄덕이는 게 고작이었다.
 배에서 시티르가 즐겨 쉬던 자리는 높은 망루나 돛대 위쪽이었는데, 지금의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갑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절실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럴 정성을 들일 기운도 모자랐다.
 자신을 감당하는 일이 처음으로 벅찼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색을 잃은 잿빛으로 보였다. 오이지스가 다정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불안의 여신이 그 자신의 목소리가 되어 속삭였다.

 ‘만약 다시 날아오를 수 없다면 나는 뭐지?’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벽에는 그 한마디가 쓰여있었다. 나는…… 그는 비참한 탄원자가 되어 손톱으로 벽을 긁었다. 자기 확신은 신기루처럼 무너졌다. 고뇌가 그를 한입에 집어삼켰다. 그는 손쉬운 먹이였다. 그를 평소처럼 움직이고 말하게 하는 것은 하늘의 천장에 닿았던 자존심 하나뿐이었다.

 대부분의 선원은 그를 어려워했고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더했다. 그에게도 달가운 일이었다. 관심 없는 이들의 시선까지 신경 쓰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헬레네가 다가온 기척을 느끼자, 그는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내주었다. 그녀는 시티르가 배 안에서 존중하는 몇 안 되는 인간이었다.
 동정일까? 그는 생각한다. 누군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긴다니, 감히, 그런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약하고 어린 면이 그런 관심을 갈구했다.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자유의 선택지는 부러져서 그의 등에 짐짝처럼 매달려 있었다. 시티르는 평소 같은 불투명한 웃음을 머금고 헬레네를 보았다. 마주 돌아오는 것은 정중한 전사의 시선이다.

 “괜찮나?” 
 “저야 멀쩡해요. 헬레네는 좀 어떤가요?”

 그렇게 물으며 시티르는 그녀의 이마에 붙은 아마포 붕대에 시선을 둔다. 신에게 해코지를 당한 것은 그 하나만이 아니다. 그녀에게도 흉터가 남을까? 또 한 번 부아가 치밀기 전에 그녀가 그의 주의를 환기한다.

 “나야 익숙하지만. 자넨 좀 다르지 않나.”
 “뭐가 얼마나 다르겠어요?” 그는 가볍게 대꾸했다.

 하지만 달랐다. 두 사람 다 그걸 알았다. 카산드라의 후예는 신이 준 굴욕의 맛을 입에 물고 태어나 씹고 되새김질하고 짓이기며 살아왔다. 그녀는 단단하게 디뎌진 땅 같다. 아하, 아는 맛이라는 건가요? 그의 속내에서 불쑥 어린애가 튀어나와 이죽거린다. 말씀 좀 해보세요,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양 살 수 있는 거죠? 어떻게 그걸 다 감당하나요?
 한 손이 배의 난간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꺼내 물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조잡하고 유치한 분노는 애초부터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니까. 헬레네에게 화를 내는 것은 부당하다. 자신은 지금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짜증스러울 뿐이다. 고약한 상태를 기분으로 착각하기에는 그는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시선이 먼 수평선을 향했다가 돌아온다.

 “헬레네. 걱정해주는 건가요?”
 “당연히 걱정되지. 힘든 일을 함께 겪지 않았나.”

 이쪽을 똑바로 응시하는 곧은 눈동자가 보인다. 거기 비친 자신은 굴절된 상(狀)이다. 호의, 그 이면에 담긴 뜻을 알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약점이 드러난 상태인 그는 제 상처를 핥는 짐승처럼 자기도 모르게 벽을 세운다.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상상한 것보다 딱딱하다.

 “그럴 것 없어요.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앞으로도.”

 순간, 헬레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마디가 단단하고 심지가 있으며 언제나 옳은 방향만을 가리키는 손이다. 남을 지키는 사람의 것. 그의 당황하는 기색에도 아랑곳없이, 헬레네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를 본다.

 “나는 단 한 번도 자네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네.”
 “…….”
 “자네가 있어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 그런 생각 말아. 다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예상하지 못한 위로에 그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파도가 간헐적으로 뱃전을 때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메운다.
 이상한 기분이다. 그 잔물결이 가슴 안쪽까지 번지는 것 같다. 파도는 따뜻한 색깔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세련되지 못하게,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왕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옥좌는 솔직함으로 닦이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전사들과 보낸 몇 년의 세월도 무관심한 그의 태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아무런 말도 내보일 수가 없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그를 읽는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린다. 평화로운 침묵이 감돈다. 그는 울적한 표정을 더는 숨기지 않고 얌전해진다. 소용이 없다는 걸 안다.

 “어쩌다 이렇게 멀리까지 나왔나?”

 문득 파도 소리와 어울리는 물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아무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는 갈라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어떡하죠? 불안의 목소리가 끈질기게 그를 쫓아와 귓가에다 속삭인다. 난간에 기댄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당신은요?”
 그의 물음에 그녀는 먼 곳에 시선을 둔 채 대답했다. 세상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도 있다고. 실은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산다고. 어떤 옳은 일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자신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전쟁은 천 명의 사람에게 천 가지 모양이고 그것은 그녀에게 당연했다. 이유가 없어도, 애써 영광을 좇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 사람은 다시 밑바닥에서 출발하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스스로 빛을 낸다.
 그게 그녀가 가진 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는 마른 침과 함께 몇 마디 투정을 삼켰다. 당신처럼은 못 해요. 날지 못하는 삶은 살 수 없어요. 그럴 자신이 없어요.
 다행스럽게도 그런 말들은 그의 안에서 혼자 멈추었다. 헬레네가 품위를 지키는 사람이기에 그 또한 가까스로 자신의 것을 보전한다.

 

 


 

 

 레온티오스를 다시 쳐다보는 일은 힘겨웠다. 그는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시티르의 머릿속에서 그날의 일은 지워지지 않았고 신전 벽에 새겨진 손톱자국처럼 남았다. 해묵은 상처의 껍질이 벗겨지듯 그 기억도 금방 빛이 바랠 줄 알았는데. 전부 그의 순진한 기대일 뿐이었다. 어쩌면 평생 지워지지 않을지도 몰라. 그가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낭패감이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레온티오스는 가끔 들러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병실 대신 쓰는 자그마한 선실에 레온티오스가 들어서면 주변이 가득 찼다. 서슬 퍼런 존재감이 의도 없이도 공기를 가볍게 눌렀다.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지 않아도 돼요.” 시티르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티르의 말에 대놓고 늘어진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큰 손을 남의 머리 위에 올려 마구잡이로 머리칼을 흩어놓았다. 표현 방식이 투박해서 그렇지 거기 위로가 담겨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음 한쪽이 참을 수 없이 울렁거리고 간지럽다. 
 시티르는 잠깐 그의 손이 닿았다 떨어진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꺼내 보여야만 하는데 어려운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었다. 그는 한참을 더듬어 찾아낸다.

 “저,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힘겹게 꺼낸 것이 다 허탈할 정도로, 돌아온 대답은 호쾌하고 퉁명스러웠다.

 “전쟁에서 무슨 감사 인사야. 살아남았으면 됐지.”

 그는 늘 이런 식이다. 뭐 하나 어려울 것 있냐는 듯이. 그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시티르는 예전 같은 차분함을 유지하려면 애간장을 쥐어짜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도 마음에 짐으로 남는 게 싫어서요.”
 “야. 그게 왜 짐이야?” 마치 그런 갑갑한 말은 난생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투였다.

 “같이 싸우는 사람인데. 너도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도왔을 거잖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으리라 예상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런 말은 아니었다.  레온티오스 씨도 정말 특이한 사람이에요. 시티르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과 함께, 정돈되지 않은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런 말을 잘도… 참 쉽게 하시네요.”

 신에게 반항할 거라고?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지? 그는 이해가 안 됐다. 사람이 사람에게 당연한 듯이 하는 기대치고는 숨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몸이 떨리고 당장에라도 가라앉아 죽어버릴 것 같은데, 그는 무엇 하나 무거울 것 없다는 듯이 말을 했다. 시선을 떨구자 그의 손에 감긴 붕대가 보였다. 신의 불꽃이 할퀴고 간 상처였다. 신에게 해코지를 당한 것은 그 하나뿐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굴 수 있는 거지, 당신들은?
 마음 안쪽에서 무언가 울컥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가 한 것처럼 당연한 듯이?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확신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뭐라고. 너희가 대체 뭐길래. 시티르는 겁에 질려 있었고 그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짜증스러웠다. 내가 정말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라면, 사람 잘못 봤어. 꼬인 속내에서 어린애가 빈정거린다. 그는 참지 못하고 내뱉는다.

 “절 그렇게 믿어요?”
 “동료를 안 믿으면 대체 누굴 믿어?”

 가져본 적 없는 어둡고 저열한 질투심이 타오른다. 한 편으로 너무 찬란하고 눈부시다. 시티르에게는 이 모든 감정이 낯설고 괴롭다. 무슨 짓을 해야 이 사람을 동요시킬 수 있을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건 너무 쉬운 일이었는데, 갑자기 전혀 할 줄 모르게 된다. 망설임 하나 없이 돌아오는 일직선의 대답에 그는 거의 바보가 된 기분이다.

 “누가… 그렇게 솔직하게 얘기를 해요.” 시티르는 머뭇거렸다. 이 사람이랑 더 얘기하면 안 돼. 부러진 신의 일부로부터 엄중한 경고가 번졌다. 너 지금 엉망이야. 분명 후회할걸. 그러나 그의 다른 부분은 자기가 지금 뭐에 말려드는 줄도 모르고, 여기서 쭉, 계속, 그를 보고 듣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면 그렇게 안 했겠지. 하지만 너는… 우리는 좀 다르잖아.”

 …….
 이건 또… 무슨 말인데?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그는 생각했다. 머리가 어지럽다 못해 아찔해서 쥐어뜯고 싶었다. 마음 안쪽에서 멍청한 희망이 부풀었다가 꺼졌다. 남이 던져주는 무심한 호의를 붙잡고 구성맞게 구는 건 그의 방식이 전혀 아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짜증 나. 그런데 난 지금 이게 필요해. 절실하게.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거예요?”
 “안될 건 뭐가 있어.” 레온티오스는 덤덤하게 대답한다. 
 시티르는 당황스럽고 화가 난다. 그의 거리낌 없음에, 그 말에 담긴 사심 없는 호의에. 자기가 자기답지 않게 굴고 있다는 사실에. 자기가 힘주어 그어둔 선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에. 자기가 한낱 인간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린다는 점에. 누가 제 안을 끔찍하게 어지럽히고 제멋대로 거기서 뛰어놀게 두기는 싫었다. 그것도 이런 무신경한- 사람 때문에 혼자만 조급해지고 속이 타는 건 절대로 사양이었다.
 이미 그러고 있다는 게 제일 미칠 지경이지만. 그는 입술을 깨문다. 

 “레온티오스 씨는 가끔 자기가 하는 말이 어떻게 들릴지 전혀 생각을 안 하고 말씀하세요.”
 “어떻게 들리는데?”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시티르는 오래도록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을 굴린다. 그야 그렇고 그렇게 들리는데요. 이렇게 말할 수는…… 하지만 그는 그가 오래 골몰하고 품위 있는 말을 고르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말하기 싫으면 됐어.”

 뚝,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진다. 이거 전부 멍청한 짓이야. 자기 자신을 진짜 바보로 만들 셈이야. 그래도 참을 수가 없다. 평소라면 몸을 조금 위로 띄우면 될 일이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시티르는 어색하게 발꿈치를 들고, 그의 몸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긴다. 입술과 입술이 닿는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뛴다. 맨 처음으로 고속 비행을 하고, 곤두박질치듯 활강했을 때 같다. 그 감촉은 어릴 적 상상한 넥타르의 맛처럼 오묘하고 복잡하고 달큰했다. 신들의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끝이 있는 모든 순간처럼 슬펐다.
 영원 같은 찰나가 지났다. 이대로 돌이라도 되었으면. 그러면 많은 일이 훨씬 편해질 텐데. 그는 잡아당겼던 손을 놓고 뒤로 조금 물러났다. 레온티오스는 조금 놀란 듯 한쪽 눈썹을 꿈틀해 보일 뿐이었다. 이어진 감상은 단순했다. 그렇게 들렸어?
 반면 시티르는, 방금 그 한 번의 행동만으로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그는 겨우겨우 피로 섞인 웃음을 지어 보이며 핀잔을 준다. 몇 번을 대답해야 만족하는 거예요?
 만족이라. 애당초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남의 말과 행동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 깊이 궁리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다. 생각 못 한 재미있는 일이라는 듯, 그는 호탕한 웃음을 짓는다. 

 “뭐, 나쁘지 않지. 이렇게 하고 싶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안 놀라네요.”

 평소 그의 반응을 생각하면 의외였다. 자신이 알던 사람이 맞는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는 데 움켜쥔 손마디가 축축하다. 시티르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그가 뒤로 물러난 만큼 성큼 다가와서 이쪽을 본다.

 “서로 재밌으면 됐지.”

 시티르의 입가에 곤란한 미소가 떠오른다. 아, 그거참…… 재미있겠네요.




 시티르는 제 영광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이 다른 인간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 내던져져도 전사보다는 때와 장소를 잘못 찾은 어린 신처럼 보인다는 것. 그것은 장점이자 약점이었다. 그는 새매들이 흔히 그러하듯 눈가가 짙었고 팔다리가 길었다. 살결은 햇볕 아래 오래 두어 살짝 녹은 밀랍처럼 말랑했고 코를 대면 바람 냄새가 났다. 그러니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 말을 그렇게 자조적으로 떠올린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사랑받는 데는 익숙했고 사랑하는 데는 영 젬병, 젬병이었다.
 정신은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았고 온몸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자세 때문에 무리가 가서 뼈마디 여기저기가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힘든 내색을 하기에 그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되는 도피란 착각이고 기만이며, 그저 머릿속이 한 사람으로 가득 찰 뿐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잠시도 멈추기 싫었다. 소금기 어린 냄새. 겹쳐 닿는 맨살은 단단하고 거칠었으며 흉터 위를 손으로 쓸면 우둘투둘했다. 그가 자기 쪽으로 몸을 숙이자 짙은 사향이 물씬 넘쳤고 뜨거운 심장이 피부와 근육 너머에서 멈춤 없이 뛰며 피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 탄탄한 몸에서 흥분의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충분히 능숙했지만 사실 그리 대단한 기교도 필요 없었다. 단순한 몸짓 하나로 충분했다. 시티르는 이미 사로잡혀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신세였다. 이름처럼 사자를 닮은 야성 어린 그 눈이 이쪽을 바라보기만 해도 저 깊은 곳에서 전류가 튀었다. 자기 것이 아닌, 잠깐 머물 뿐인 열락을 놓치기 싫어 숨이 차도록 들이마셨다. 누군가를 바란다는 건 이다지도 낯선 감각이었다. 그가 가진 인간의 물성(物性)이 몇 번이고 그를 배신했다. 목이 잠길 정도의 희열에 젖어 있으면서도 나약한 부분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제 살을 뜯어 먹는 에리식톤이라도 된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내가 내가 아니었더라면 하고 바란 적이 없었다.
 재미있을 수 있을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힘겨운 실험이었고 그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상처가 있는 손이 그의 머리카락 사이를 가볍게 흩었다. 밤물결을 닮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서 굽이쳤다. 방안은 아직 가시지 않은 잔열 때문에 후끈했고 습했다. 레온티오스는 천장을 보며 드러누운 채였고, 시티르는 그 옆에서 오래 참았던 사람처럼 긴 숨을 내쉬었다.
 줄곧 그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레온티오스 씨는…… 살면서 무서웠던 적이 있어요?”

 이 물음 하나를 꺼내기가 몹시 어렵고 벅찼다.

 “생각해본 적 없어.” 

 그 목소리에 가라앉아 가던 상념이 다시 요동친다. 시티르는 참지 못하고 상체를 일으켜 그를 내려다보았다. 대답하는 얼굴을, 표정을 읽고 싶었다. 자신이 거기서 무얼 찾고 싶어 하는 지는 몰랐다. 고뇌? 망설임? 미약한 달빛을 머금은 맹금의 눈이 감출 수 없는 당혹과 혼란으로 흔들렸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요? 그냥 인간인데도요?” 
 “그런 걸 생각하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지금은 생각 안 해.”

 명쾌한 말이었다. 그는 그가 원하던 먹이를 던져주지 않는다. 그저 한없이 자기 자신이다. 끔찍하게 얄밉고 안달이 날 정도로 사랑스럽다. 제 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한심하다. 평범한 인간처럼 바닥에 처박히는 것이 두려워 번민하면서 인간을 부러워하고 있다. 왜 내게 없는 것이 그에게는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사랑한다.
 레온티오스는 정자세로 누워있던 몸을 돌려, 시선을 그에게로 향했다. 호박금 색의 눈동자가 마주 보았다. 밤을 보는 짐승의 것. 삼키고 탐색하는, 힘의 우위를 쉽게 점지하는 시선. 날개가 부러진 매와 배부른 사자. 시티르는 그의 눈에 담긴 우월감을 한참 전부터 읽고 있었다.

 “넌 무서운 거 있어?” 그는 빙그레 웃고 있다. 서로 재밌으면 됐지. 그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아서 시티르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다시 표정을 갈무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스쳐 가는 답은 많았다. 다시 날지 못하게 되는 것.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이 되는 것. 미래를 모이라이의 손에 맡기고 그 불확실함만을 믿는 것. 지금 당장은, 당신 같은 사람한테 빠지는 거요. 

 “저는 레온티오스 씨처럼 솔직하게 얘기 못 해요.”
 “그래, 관둬. 말하기 싫으면.”

 묵직한 손이 그의 손목 위로 얹어진다. 시티르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구명줄 같기도 올가미 같기도 하다. 하지만, 레온티오스 씨. 그거 아나요?

 “할 말 없으면 한 번 더하자.” 

 나는 혼자 빠져 죽지는 않을 거예요. 그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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