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냐루가면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라면?!?! 

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미국편 후기부터는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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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1. 6

 

 


 무슨 이유일까? 갑작스러운 폭설과 함께 전보가 실려 왔을 때, 진작 압살한 줄로만 알았던 내 안의 해묵은 감정들이 고개를 들었다. 버석거리는 전보 종이에 닿는 손끝에 페루 고원의 바람이 스치는 듯했다. 반가움. 걱정. 두려움. 불안감, 약간의 흥분감. 한꺼번에 몰려와 가벼운 멀미를 일으켰다.

 나는 약속 날짜보다 훨씬 앞서 제이덕의 집으로 출발했다. 혹시나 해서 미리 정리한 자료들과 함께였다. 며칠 밤을 새우고 그대로 기차에 올라 덕분에 추위에도 불구하고 내내 잘 수 있었다.

 

 

 칼라일 탐사대의 기록 정리


 제이덕의 결혼식에서 본 뒤 처음이었던가. 노라는 여전히 씩씩했고 걷는 폼이 컸다. 쩌렁쩌렁한 웃음소리도 여상했다. 그리고 에디 부부. 볼이 포동포동한 여자아이의 이름은 소피아라고 한다. 학자가 제 딸에게 붙일 만한 이름이다. 그 안온한 가정의 온기, 피어오르는 식사의 김, 신중하게 고른듯한 길이의 사라사 커튼. 돌보는 손을 타 빳빳하게 다듬어진 소매와 악수하고 따뜻한 모닥불 앞에 앉자, 기묘한 흥분이 차차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모두가 저 바깥의 차가운 세계를 구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이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내 아끼는 친구들에게, 이 모든 것을 남겨두고 떠날 거냐고 물었다. 죽으러 가는 것은 아니지만. 저번의 여행이 우리에게 던져줬던 날것의 위험을 생각하면 물어야만 하는 질문이었다. 그런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다. 잭슨 엘리어스가 우리를 안전한 여행에 초대했을 리는 없다.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망설였다. 알고 있지만, 자기 눈으로 봐야만 하는 것이 생겼다고. 봐야만 하고, 알아야만 하고, 그래서 떠나야만 한다고. 그런 대답을 들었다.

 남은 날들 내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들이 금방에라도 닳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렇게 풋내기 같았는데. 고작해야 4년이었는데. 우리에게 이 4년이 얼마나 길었는지! 또 짧은지. 갑작스러운 손님이 에디 부인에게는 실례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 죄책감은 짊어질 수 있다.

 

 

 

 

 


1925. 1. 14

 

 뉴욕행 열차를 탔다. 유독 잔인한 겨울이었다.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추위와 무거운 폭설. 눈발이 온 세상을 덮어버렸다. 거대한 침묵이 세상을 감쌌다. 뒷좌석의 노인이 내내 기침을 해댔다. 석간신문을 주워다 읽는데 빳빳하게 얼어 잘 넘겨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들리는 뉴욕은 여전히 숨 막히도록 붐비는 도시였다. 나는 동료 기자인 스티븐스의 아파트로 갔다. (그도 아컴에 있는 내 아파트의 위치를 알고 있다. 자주 자리를 비우곤 하는 기자들이 흔히 하는 아파트 셰어였다.) 1월이면 그는 아마 파리쯤 가있을 것이다. 두 사람 정도는 더 묵을 수 있을 것 같아 제이덕과 노라도 불렀지만, 제이덕이 적응하기에는 너무 좁은 방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두 사람은 따로 호텔로 보내고 첫날 밤을 지냈다.

 꿈도 없이 긴 밤이었다. 아파트에서는 묵은 먼지 냄새가 났다. 생활감이라고는 없는 집이었다. 아무리 담뱃재를 털고 시트를 구겨도 내가 여기 있다는 흔적을 남기기가 어려웠다. 뉴욕에 왔다. 모든 것이 지독하게 희미했다.







1925. 1. 15

 

 제이덕이 잭슨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오후 8시에 첼시 호텔 410호에서. 잭슨은 묘하게 다급했고 전화를 빨리 끊었다. 우리는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일찍 만나, 후추를 많이 뿌린 저녁 식사를 했다.

 제시간에 호텔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노크를 하고 불러도 410호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보니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불길했다. 긴장 때문에 입안이 말라 까끌까끌해졌다. 우리는 결국 힘으로 호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리고. 뭘 봤더라.



 

 아니. 그래. 난장판이 된 호텔 객실. 그 가운데 잭슨 엘리어스의 시체가 배가 갈린 채 누워있었다. 인영 셋이 비상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그들이 덮어쓴 가면으로부터 붉은 플란넬 천이 삐져나와 흔들렸다. 뒤를 쫓아가려 했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제이덕이 겨우 난간을 붙잡고 선 나를 넘어서 뛰어 내려갔다.

 나는 겨우 숨을 고르고 다시 나의 소중한 친구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리고. 지금. 이 짧은 순간. 목격자의 극단적인 행동이 용서되는 아주 찰나 패닉과 방황의 순간에. 뭘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침착해. 침착해. 침착해.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릴 때마다 되뇌었다. 머리가 아주 뜨겁다가도 차갑게 식었다. 결코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었다. 자연사도 병사도 사고사도 아닌. 살인 사건. 나의 친구는 살해당했다. 아주 불쾌하고, 아주 개성적인 방식으로. 난잡한 의식의 제물이라도 되는 양, 조악한 예술가의 퍼포먼스라도 되는 양. 그 모든 풍경이 지독한 농담 같았다. 바로 곁에서 노라 애버트가 오열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그 울음소리가 그렇게 선명하게 실감을 때려 박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말로 그렇게 믿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악몽에 한 장면을 더하는구나. 우리는 친구였는데. 아아. 친구일 것이다.

 나는 침착하게 잭슨의 품을 뒤졌다. 손에 피가 묻지 않도록 조심했다. 거기서 명함 한 장과 성냥갑 하나를 찾았다. 나는 그런 짓을 하면서 손 한 번 떨지 않았다. 그리고서는 그 얼굴, 공포에 질린 얼굴, 이마에 남은 문양을 몇 장 사진으로 남겼다. 그의 뜨인 눈과 함께. 그 정도는 용서하겠지.

 어리석게도 그의 눈을 감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동시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에 자신이 보고 싶어 하던 것을 봤을까? 한 미치광이 의사의 기고문에서 망막광상이라는 개념에 대한 기묘한 주장을 읽은 적이 있었다. 개요는, 우리가 죽기 전에 본 마지막 풍경이 신경의 마술 같은 작용으로 망막에 사진처럼 뚜렷하게 새겨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연구하면 우리는 수많은 미제사건의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럴 때는 그런 황당무계한 소리도 사실이었더라면 싶다. 암실에서 그 눈을 인화하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멍청하기는. 안다.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어둠 속이 아니면 맘 편히 울 수도 없다.


 제이덕은 최선을 다했으나 범인들을 놓쳤다. 곧 경찰이 와서 현장을 조사하고 우리의 증언을 받아 갔다.

 마틴 풀 경위는 이런 살인사건이 벌써 9명째이고, 전부 이마에 이런 끔찍하고도 기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노라고 했다. 작년 할렘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 이야기였다. 그런데, 해당 사건에서는, 힐튼 애덤스가 벌써 범인으로 잡혀 교도소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범인이 이미 잡혀 있다면, 나의 살인자는 누구란 말인가?






1925. 1. 16

 

 

 

 결국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꿈이 두려웠다. 나는 내가 잭슨의 품에서 발견한 것들을 보여줬다. 우리는 밤이 지도록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지. 칼라일 탐사대와 이 사건이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아, 죽음이 얼마나 부당한지.

 내일 사이프러스 힐스 묘지에서 비종파 장례식이 열릴 예정이다. 내리 주저앉아 있다가는 슬픔이 너무 많은 것을 좀먹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고 세 명의 사람을 만났다.


 성냥갑에는 상하이의 주소가, 명함에는 뉴욕의 회사가 적혀있었다. 당장 상하이로 날아가 볼 수도 없는 일이니, 일단은 명함의 단서를 쫓았다.


 -애머슨 무역: 사장인 아서 애머슨은 그는 고작해야 1~2주 전에 잭슨을 만난 듯하다. 애머슨 무역은 주주하우스에 아프리카로부터 가져온 물품을 납품하고 있었다. 그는 주주 하우스의 기분 나쁜 노인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주주하우스: 우리는 곧장 할렘으로 향해 주주하우스의 사일러스 은콰네를 만났다. 노라는 눈에 띄게 그를 의심했다. 분명 무언가 숨기고 있고, 눈빛이 음험하고,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저 송장에 가까운 노인이었지만 역시 감이 좋지는 않다. 목에는 뭔가의 열쇠가 걸려 있었다. 그는 유의미한 정보라고는 하나도 주지 않았다. 모든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할 뿐이었다. 잭슨은 왜 이런 명함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뒤이어 프로스페로 하우스 출판사의 조나 켄싱턴을 만나러 갔다. 만날 때마다 둥글어지는 남자다. 우리는 애도의 말을 몇 마디 나누었다. 그는 잭슨이 남긴 편지와 자료들을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그중에는 잭슨을 걱정해야 할 만큼 정신이 불안정해 보이는 편지도 한 장 있었다(물론 쉽게 내놓지는 않았다). 이 편지 한 장을 읽기 위해, 그리고 이 자료들을 가지고 가기 위해, 나는 간만에 각서를 썼다.

 조나, 내가 왜 내 친구의 명예를 팔아 싸구려 기사를 쓸 거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기자로 산다는 건 이런 모욕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일라이저 웨버. 하하. 불평하기 어려울 만치 값싼 서명이었다.

 

 

 

 

잭슨 엘리어스의 메모 







1925. 1. 17


 장례식 당일. 우리 셋과 조나 외에는 고작 두 사람이 더 있을 뿐이었다. 엘리어스의 변호사인 칼튼 램지와 그 조카 윌라 슬라이. 흐린 하늘에서 눈발이 조금씩 날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 때문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상실은 억지로 찾아왔으니 대비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작별은 자발적으로 고하는 인사였다. 그래서 더 쉽지 않다.

 하고 싶은 말은 전부 했다. 인사하며 보낼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위험을 미들네임으로 삼고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던 떠돌이가 그래도 돌아와, 결국 미국 땅에서 죽어 묻히는 것이. 이런 게 섭리라면 섭리고 자비라면 자비일 것이다.

 손수건을 넉넉히 챙겨왔는데 노라가 다 썼다. 다정한 엘레노라. 제이덕은 사내다운 척 누구보다 소년 같은 고집을 피웠다. 칼튼 램지 씨가 월요일에 엘리어스의 유언장을 발표할 예정이니 그 자리에 참석해달라고 전했다.


 돌아가는 길에 기자 몇 명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몇은 아는 얼굴들이었다. 개중 뉴욕 타임즈의 기자 레베카 쇼젠버그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쇼젠버그는 잭슨의 죽음과 힐튼 애덤스 사건 사이에 연관성을 의심하고 있었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우리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레베카 쇼젠버그로부터 힐튼 사건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는데, 요약하자면:

-모데카이 레밍 박사가 이 사건과 죽음숭배교단과의 연관성을 밝혔다. 

-할렘 사건은 제법 오래 연관성을 부정당하다가 14분서의 롭슨 경관에게 넘어갔다. 

-힐튼은 8번째 살인사건에서 현행범으로 잡혔다.


 쇼젠버그 기자가 힐튼 애덤스의 아내 밀리 애덤스 씨와의 만남을 주선해주기로 했다. 이후 우리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쉼 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이 슬픈 생각을 멈추는 데 도움이 되었다.

 



 뉴욕 시립 도서관에서 얻은 자료 정리.

  1. 칼라일 탐사대에 대하여

 -칼라일 가문: 시조 에브너 베인 카렐이 “불건전하고 흉악한 행동”으로 영국에서 버지니아로 이송되었다. 그의 아들 애프라임이 뉴잉글랜드로 가서 성을 바꾸었다. 이후 남북전쟁 시기에 사업에 성공하여 부호 가문이 되었다. 현재는 에리카 칼라일이 운영하고 있다.

 로저 베인 워딩턴 칼라일은 17세 때 친자 확인 소송을 면했다. 18, 20세 때 각각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았다. 고등학교는 명문 사립을 나왔는데 이후에는 온갖 명문대에서 신사적 자퇴를 했다. 부모는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마스터스 가문: 군수 기업 경영. 안전한 투자.

 -존 브레이디: 폭행, 도박에서부터 무죄 선고된 살인 혐의 등 전과가 다양하다. 그는 사건을 목격한 8명의 증언을 누르고 명백한 사건에서 무죄를 받았다. 칼라일이 뒷배를 봐줬나 본데.

 -로버트 허스턴: 존스홉킨스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프로이트, 융에게 배웠다. 염문이 있는 사람이었고 부자들을 주로 진료했다. 그의 환자 중에 로저 칼라일도 있었다. 사망 선고 이후 진료기록이 전부 뉴욕주 의료관리위원회로 넘어갔다. 


  1. 잭슨의 죽음에 대하여

 기호학: 피해자들의 이마에 있는 문양. 왕조 시대 이집트에서 쫓겨난 한 종파로부터 이어진 사교조직의 문양이라고 한다. 피투성이 혀 교단과 연관이 되어 있고 뿌리는 케냐. 지금도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

 

 

결국 노라와 제이덕 두 사람 모두 호텔을 떠나 아파트로 짐을 옮겼다. 이제야 슬슬 이 낡은 공간에 누군가가 머문 흔적이 보인다.

 






1925. 1. 18

 

 다들 웬일로 아침부터 부산스럽더라니 일요일이다. 신실한 신자들이로군. 나는 신성한 문턱을 넘는 대신 아침 시간을 달콤한 잠과 불경한 사건들에 대한 문서 정리로 때우기로 했다. 노라는 내가 교회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믿기지는 않겠지만 나는 가톨릭 신자고 내 이름은 세례명이고 내 형은 신부라고 대답해주었다(반쯤은 사실이다). 노라는 그러면 성당이라도 가던지, 아니 교회에 가야 한다고 대꾸했다(이럴 수가). 나는 슬프고 위험한 시기에 기도하면 손해를 보는 묘한 징크스가 있다고 덧붙여 설명했지만, 노라는 대략 '헛소리 하지 마세요'하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이런. 하지만 어린 동료에게 내 인생을 그 이상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진 않다. 신과 나의 복잡스럽고 서로 불편하고 그렇다고 사랑이 없지도 않은 지난한 관계가 대체 이 사건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동료들이 자리를 비운 동안 슬픈 타성에 젖어 벽에 지도를 붙이고 칼라일 탐사대의 행적을 정리했다. 꽤 품이 드는 일이어서 반나절이 종일 걸렸다. 붙이고, 쓰고, 붉은 실을 잇고, 바쁘게 손과 머리를 움직이니 두 사람의 공백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노라가 돌아오는 길에 샌드위치를 사다 줬다. 소스의 맛이 기름지고 부도덕했다. 냉담자에게 차려진 즐거운 식사였다.



 오후. 레베카 쇼젠버그와의 약속. 힐튼 애덤스의 아내인 밀리 애덤스와의 만남. 장소는 할렘 가에 위치한 라파예트 극장. 그곳이 밀리 애덤스의 일터인 듯 했다. 밀리 애덤스 씨는 인상이 강렬하게 남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렘 헬파이터 출신의 힐튼 애덤스는 경찰이 사건에 관심을 두기도 전에 친구들과 함께 자율 방범대 비슷한 활동을 해온 듯하다. 이미 2년 전부터, 할렘에서는 끔찍한 살인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었다. 피해자들의 신분은 다양했고 이마에 새겨진 문양, 그리고 모두 할렘에 다녀왔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었다. 경찰은 범죄 조직의 항쟁과 강도 사건으로 추정했지만, 애덤스 부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힐튼은 뉴욕시립도서관에서 이 사건과 특정한 교단이 연관되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또 다양한 일지와 기록을 남겼는데, 이 자료는 이후 경찰이 전부 압수해 갔다. 힐튼은 붉은 색의 긴 천 조각 같은 걸 이 자료의 책갈피로 쓰고 있었다. 붉은 천이라.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힐튼은 체포되기 얼마 전에 친구들과 함께 주주하우스에 대해 얘기를 했다. 그래서, 밀리는 할렘의 주주하우스를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 남편이 체포된 이후 직접 감시를 하기도 했다. 밀리가 본 것은:

 -한 달에 한 번씩 대략 2~30명 정도가 새벽에 한꺼번에 가게로 들어가는 모습. 

 -한번은 사람들이 오기 1시간 전에 비밀스러운 짐 상자가 가게로 들어갔다. 

 -낮에 형사들이 들어가는 것도. 뇌물을 받은 듯. 경찰도 한 패군.


 힐튼 애덤스는 작년 9월 뉴욕시립도서관 할렘 분관 근처, 으슥한 골목 중년 백인 남성의 시체 옆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목격자는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간 경찰 한 사람. 힐튼은 피 묻은 단도를 버리고 있었다고. 흉기는 힐튼이 군대에서 받았던 볼로 나이프라고 한다. 하지만 밀리에 의하면 그는 그 칼을 순찰 나가면서 한 번도 가져간 적이 없고, 집에 있었던 것을 경찰이 압수해갔다고 한다.


 고작해야 두 사람, 평범한 일상을 살던 부부가 겪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밀리 애덤스는 초연하고 담담해 보였다. 종합해보았을 때, 힐튼 애덤스에게 누명이 씌워진 정황은 분명했다. 경찰까지 이런 방식으로 사건에 연관이 되어 있다면, 믿을 사람이 대체 얼마나 있을까. 그 말인즉슨 내가 직접 찾아 나서지 않는 이상 잭슨을 해친 살인자가 경찰에 의해 명명백백히 밝혀질 일은 없을 것이란 뜻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의 누명을 밝히겠노라 다짐하고, 힐튼 애덤스와의 면회 약속을 잡았다.


 할렘을 벗어난 이후로는 내리 허탕이었다. 기록의 전당을 뒤졌지만 사일러스 은콰네는 시민으로 등록 되지 않았다. 에리카 칼라일의 법무법인이 던스턴 휘틀비 앤드 그레이라는 것 정도만 알아낼 수 있었고. 이후로 모데카이 레밍을 만났다. 정식 학위도 없는 박사에게 뭔가 많은 것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시간 낭비가 될 줄은 몰랐다. 이런 시간 많은 호구 새끼가 주주 하우스의 돈줄 중 하나라니.

 

 

 

 

 


1925. 1. 19

 

 아침 일찍 램지 사무소로 왔다. 자그마한 공간이었지만 모든 물건과 사람이 제자리에 들어차 있어 제법 바쁘게 돌아가는 곳이었다. 우리는 잭슨 엘리어스의 유언장 집행에 참석했다.

 램지 씨는 먼저, 잭슨이 죽기 대략 3일쯤 전에 와서 맡기고 간 것들을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잭슨 엘리어스가 램지에게 남기고 간 것

 

 

 또, 잭슨은 죽기 전날 밤에 와서 자신의 유언장을 고치고 갔다고 했다.

그렇게 예감될만한 죽음이었다면, 아예 작정하고 우리를 목격자로 선별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잭슨 엘리어스의 유언장

 

 

 잭슨 엘리어스. 이 빌어먹을 자식. 살아있었더라면 거하게 한 대 갈겼을 거다. 살아있었더라면.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핸드아웃은 혹시나 해서... 김칠이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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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3. 18

 

 내 이름은 일라이저 웨버.



이것은 저의 기록입니다.

 

 

 

 

 


 

 

 

 

 

 

 

 

 

 

페루로 간다.

형에게 편지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의 답신 끄트머리마다 으레 적히곤 하는, 나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그 말이 내게 주는 묘한 죄책감 때문이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탐사기자의 삶이 주는 자유로움이란 이런 것이다.

언제든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릴 수 있는, 식물을 몇이고 말려 죽이다 결국 반려를 포기하는 삶.

내게 있어 저널리즘이란, 진실을 밝혀내는 행위 전반에 붙여진 이름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이성의 불빛이 세상을 한번 밝힌 이후로, 그걸 들고 불 붙은 회전초처럼 쏘다니며 어두운 단면을 비춰보는 것이 나의 천직이 되었다.

진실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명예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전부다.

 

 

 


 

 

 

 



 리마에 도착했다. 탐험가 오거스터스 라킨 씨와 그의 조수 루이스 데 멘도사, 그리고 다른 탐사대 멤버들을 만났다.

우리는 마우리 호텔에, 라킨과 멘도사는 에스파냐 호텔에 묵기로 했다. 굳이 숙소를 다른 곳에 잡은 점이 의아했지만, 아쉽게도 에스파냐 호텔에 더는 빈 방이 없었다고 한다.

고고학자인 제이덕 에디 박사는 지나치게 젊고, 그의 하녀인 노라 애버트 양 또한 젊다. 처음에는 그가 탐사 캠프에 참여한 대학생인 줄로만 알았다. 어린 천재들이 갖곤 하는 그 치기어린 분위기 때문에, 그가 처음 입을 연 뒤로도 한참이나 편견을 갖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노라 양은 자기가 만난 억척스러운 어른들을 따라 하려 하지만, 그 흉내가 오히려 그를 더 소녀처럼 보이게 한다. 반면에 인류학자인 제시 휴즈 박사는 점잖은 사람이다.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하나 이상 있으면 자리에 활기가 돌기 마련이다.

 학자들은 자기 분야를 이야기할 때 들뜨는 경향이 있어 대화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21일에 피라미드가 위치한 쿠노로 출발하는 여정에 대해 안내를 받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석연치 않은 점:

*루이스 데 멘도사는 지나치게 말이 없고, 불쾌할 정도로 사람을 노려본다. 시선이 거칠고 날카로워서 라킨 씨의 자질구레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해 의심하게 만든다.

* 유물을 얻는 과정에 대한 라킨 씨의 설명은 부자연스럽다. 사전 연구 자료를 몽땅 폐기했다는 점도 수상하다. 아무리 경쟁자를 걱정한다지만 너무 과한 대처가 아니었는지?

 

* 라킨은 아프다. 말라리아 후유증?

* 동료들이 지나치게 풋내기처럼 보인다.

 

 

라킨 씨가 보여준, 알파카 농부 에르네스토 몰로로부터 얻은 유물(사진이 붙어있다. 하나는 금잔, 하나는 펜던트).

몰로의 할아버지가 피라미드 내부에서 나왔다고 한다. 각자 다른 시기의 유물로 보인다.

 동료 학자들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조금은 들뜬 태도로, 이 유물이 발견된 피라미드와 티와나쿠 문명 사이의 연관성을 짐작했다. 티와나쿠 문명에 대한 연구는 학계에서도 갓 시작된 상황이고, 지금으로서는 밝혀진 자료나 정보가 거의 없다. 유물들의 출처가 정말 알파카 농부의 말대로라면 이 피라미드에 대한 조사는 굉장한 학술적 업적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형이 이걸 본다면 또, 내 명예욕이 내 목을 조른다고 생각하겠지. 이렇게 찜찜한데도 당장 미국행 배표를 끊지 않은 건 바보짓이라고 말이야. 윌리엄. 나도 동감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알아. 이게 내 천성이거든.



 

아니나 다를까. 라킨과 멘도사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팀의 인류학자가, 자신이 실은 제시 휴즈가 아니라 잭슨 엘리어스이며 작가라고 밝힌 것이다(이런 반전을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이후에 이어진 이야기들은 더 믿기 어려웠다. 술 취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농인지, 진심인지를 분간하느라 제법 시간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죽음숭배 교단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방을 빨아먹는 흰 얼굴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 카리시리 전설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카리시리 전설이 이들 교단의 제물 의식과 관련될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었다. 전설이나 민담이 인간이 괴악한 현실을 설명하려고 떠들어댄 소리라 본다면, 얼핏 그럴듯하게도 들린다. 하지만 애초에 가짜 신분을 들이대고 참여한 사람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

 멘도사가 카리시리다? 설마.

 

 어차피 21일까지 일정이 여유로웠기 때문에, 내일은 모두 그와 함께 고고학 교수 네메시오 산체스를 만나 본격적인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날 밤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나는 묘한 풀 냄새가 나는 호텔 방에 누워 잠을 청했다.

 

 

 

 



1912. 3. 19

 

 산 마르코스 국립 대학 고고학 및 인류학 박물관.

 대화를 길게 나누지는 못했지만 산체스 교수는 양식 있는 인물로 보인다. 그의 영어는 능숙하고, 연구에 대한 태도는 진중하다. 나는 탐험대의 일원인 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최소한 지금 나와 동행한 애송이 고고학 박사의 모습보다는 자연스럽다(그의 천재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현장에서는 경험 있는 사람을 더 믿는다).

 하지만 어거스터스 라킨은 산체스 교수의 탐사대 지원을 일방적으로 무시해왔다고 한다. 어째서? 산체스 교수는 팀을 외지인으로만 꾸린 라킨을 수상쩍다고 여기며, 도굴꾼으로 의심하고 있다. 벌써부터 책임자를 흰눈 뜨고 보고 싶지는 않지만, 합리적인 주장이다.



 

(이 뒤는 온통 휘갈겨 쓴 글씨로 적혀 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믿을 수밖에 없다.

나와 노라 양, 제이덕 박사 셋이 자료를 가지러 가서 돌아오지 않는 조교 리소를 찾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미라가 된 그의 시체를 발견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지방을 빼앗긴 시체(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그의 옆에 있던 거대한 황금 판에는 타버린 살점이 붙어있다(사진).

 처음 시체를 발견했을 때, 나는 숨이 막히고 방이 조여오는 듯한 감각에 거의 도망치듯 현장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현장의 사진은 평정을 찾은 뒤 돌아가서 찍은 것이다. 카리시리. 카리시리가 있어! 그런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고작해야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지방이 말라붙은 시체를 보고서.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사람을 부르러 올라간 복도에는 칼을 맞은 이가 쓰러져 있었다. 소리를 듣고 사무실에서 나온 잭슨이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어째서인지 뱀의 혀가 목 뒤를 핥는 것 같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아닌데. 이건 아냐. 불길한 직감에 다급히 사무실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산체스 교수는 고통에 젖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교수는 거의 숨을 쉬지 못하고 헐떡이면서도, 자신이 누군가의 키스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비틀린 농담이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의 입 주위에는 정말로 허여멀건 뭔가가 말라붙어 있었다. 다급히 조처한 끝에, 그는 입에서 하얀 액체 덩어리 같은 것을 뱉고 쓰러졌다. 그 액체 덩어리가 마치 살아있는 존재인 양 내 쪽으로 달려오던 모습은, 제기랄, 맹세컨대 착각이 아니었다. 동행한 잭슨이 아니었더라면 나도 위험했을 것이다.

 산체스 교수는 그대로 병원으로 실려갔다. 상황이 안정되자 모두가 머리를 맡대었다. 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우리는 그 존재가 무슨 이유 때문이건간에, 시체 옆의 뜯어진 황금 판을 노렸으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제이덕 박사는 이 판에 쓰인 글자를 살면서 한 번도 본 일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지금껏 발견된 어떤 고고학적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고 유사하지도 않다고 한다. 인간 문명사와는 동떨어진 문맥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은, 어떤 멸실의 문명.

 

현실을 유지하고자 하는 감각이 부닥친 모든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명백히 보이는 진실을 외면하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애초에 기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이다. 나는, 이제와서는 시간 낭비에 불과한 신랄한 태도를 빠르게 내다버렸다.

 

 

 

 

연구자 트리니다드 리소가 평안 속에 잠들길.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번역물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쓰여있었다. 

 



 1541년. 스페인 정복자들. 사원. 죽은 사람. 저주. 황금 판. 역겨운 구토. 에리식톤과 같은 영원한 굶주림. 그런 저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내 안의 무언가를 파괴한다. 곱씹을수록 모래 위에 쌓인 성에 금이 가고야 마는 기분이다. 그러나 거기에 유난 떨며 애도하기에는 현실이 지나치게 끔찍하고, 나도 지쳤다. 지금은 내가 지킬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로 한다. 

 루이스 데 멘도사가 진짜 카리시리라면, 다른 무엇보다 멘도사의 학대 아래에 있을 라킨 씨가 걱정되었다. 그의 핏물 빠진 시체마냥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얼마나 알고 또 얼마나 이용당하고 있는 것일까? 본인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었다. 우리는 그를 구하기 위하여, 에스파냐 호텔에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역시 에스파냐 호텔에 남은 방이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걱정이 컸지만, 힘을 합쳐 무사히 라킨 씨를 구해왔다. 그가 헤로인에 찌들어 있어 황급히 산체스 교수가 입원한 같은 병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의사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살아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검은 피가 흐르는 정맥, 곱아드는 나선의 기이한 문신과 먼듯 가까운 곳에서 풍기는 썩은 내.

 그것들의 의미를 곱씹기 전에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자 한다.

어차피. 살아있는 사람은 무슨 이유가 있든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 내버려 둘 수도 없었던 것이다. 모두가 찬찬히 설득하자 라킨 씨도 경계를 풀고, 결국에는 눈물을 보였다. 의뭉스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를 동정한다. 아무래도 그의 기억은 부분적이거나 흐려지는 일이 잦은 듯하다. 아마도 멘도사의 영향이겠지.

 

 제이덕 박사는 피라미드에 이 황금 판을 되돌려놓을 생각이다. 우리는 멘도사를 따돌리고자, 내일 아침 곧장 푸노를 향해 출발하기로 했다.



 

 

 

 

 1921. 3. 23

 

 푸노에 도착했다. 그간 특별히 일기를 적을 만한 사건은 없었다. 고원 지대로 향하면서 날이 추워져 모두가 판초를 둘렀다는 것 정도.

 동료 탐사대와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제이덕 박사와 노라 양은 좋은 사람이고, 잭슨 씨에게는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인다. 각자에게 귀찮은 면이 있지만. 이 정도 척박한 환경에서 남과 지냈는데 그리 지치지 않았다는 것만 해도 선방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라킨 씨는 계속 아프다. 서둘러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여기서부터는 트럭이 가지 못하는 길이라 노새와 짐승들을 빌렸다.

 알파카의 형태가 어린 사람들에게 어필하는가? (왜 이렇게들 좋아하는 건지.)






새벽.

잠들지 못하니 뭐라도 적는다.

 

우리는 간밤에 산속에서 야영했다. 불침번을 서던 나는, 멘도사가 노새 한 마리를 뜯어먹고 노라 양을 공격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입이 마치 악몽에 나오는 괴물처럼 비틀리고 촘촘한 이빨로 빼곡한 것도 보았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카리시리다. 대체 카리시리가 뭔데? 이 세상이 신의 창조물이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물리적 균형과 과학적 법칙의 결과물 또한 아니라면? 우리가 죽여서 불태워버린 것이 사람 형태의 괴물인지 세상에 대한 얄팍한 믿음인지? 혹은 둘 다인지. 우리는 그 재를 땅에 묻었다.

 

 멘도사는 거울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뒷편에는 가면의 형태가 새겨져 있는 황금 거울 유물이었다.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이 내게 기묘한 환상을 보여주었다. 나는 수천 갈래 터널 속을 나아갔다. 뜨거운 바위, 체온이 느껴지는 바위를 보았다. 그 옆으로는 구덩이가 파여있었다. 짐승의 울음소리, 울음소리, 울음소리를 들었다. 울음소리를 들었다. 울부짖음, 을 들었다. 울음소리를 들었다.

 

 블레즈 파스칼은 “삶은 덜 불안정한 꿈일 뿐이다.”라고 적었다. “우리가 매일 밤 똑같은 꿈을 꾸게 된다면 우리는 그 꿈을 일상의 모든 것처럼 똑같이 여기게 될 것”이고 다만 그렇지 않은 이유는 “현실에서는 삶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지만 꿈속에서는 그렇게 지속적이고 한결같지 않기 때문”일 뿐이라고.

 그 말을 빌어 적는다. 내가 지속되는 환상 속에서 바위의 뜨거움을 느끼고 인간의 형상을 한 그러나 인간과는 수억광년 멀어진 그 무엇이 인간의 기름을 빨아먹는 것을 보고 수천갈래로 끔찍하게 찢어지는 비명이 고막을 쟁쟁하게 울리는 것을 듣는데 그것이 내게 어떤 연속성을 가진다면 이것은 별반 나의 현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환상은 그저 환상일 뿐이라고, 꿈은 그저 꿈일 뿐이라고, 결코 온전히 믿지 못한다. 며칠 전까지 한낱 유물론자였던 사람으로서 이 명제가 어느 정도는 참일 수도 있다는 점이 나를 절망케 한다.

 숨이 찼다. 절망에서 기어 나오기 위해 나는 걷기로 했다.





 

 1921. 3. 24

 

 우리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멀리서 해가 밝아오는 대로 출발했다. 현지인 농부의 아들이 칼리시리들에게 습격당해 다친 것을 도와주었다. 농부는 몹시 예민해져 있어서 우리를 거의 쏠 뻔했다. 예상대로, 칼리시리 몇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가엾은 소년은 무참하게 피를 흘리고 있었다.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상처를 동여매고 지혈하자 호흡이 조금은 편해졌다.

인간이 인간을 돕는 것은 본성이다. 십여 년의 관찰이 있었지만 이 믿음은 변함없다.

 우리는 피라미드 근처로 다가가지 말라는 농부의 만류를 뒤로하고 그곳을 향해 나아갔다.

단지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 본 것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고 싶지 않다.

  -푸노의 계곡

  -풀을 눕히며 기어가는 두 사람. 아냐. 사람이 아닐 것이다. 스페인 정복자 남성과 현지 여인의 차림이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번갈아 구토하는 칼리시리들의 기묘한 행위.

  -파리들. 빌어먹을 파리들.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고산지대의 풍광은 춥고 무심하다. 제 안에 무슨 독을 품고 있는 지 모르고 관심도 없는 듯하다. 우리는 계곡에 난 위험한 길을 갔다. 돌담이 피라미드 주변에 둘려 있고, 입구에는 고인돌 형태의 석문이 서 있었다. 지나간 시간에 닳았으나 여전히 끔찍한 모습의 부조가 돌담 사이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피라미드의 상당 부분은 쌓인 흙이 만든 세월의 바다에 잠기고, 다만 5층 정도만이 드러나있었다. 앞서간 칼리시리들의 모습을 보았기에 모두 끔찍하게 지치고 긴장한 상태였다.

 조심스럽게 피라미드의 주변을 뒤진 우리는 시체가 잔뜩 쌓여있는 구멍을 발견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어보였다. 폐소공포증이 있다는 라킨 씨와 죄 없는 동물들을 밖에 두기로 하고, 모두 그 무저갱 같은 어둠 아래로 내려갔다. 닷새 굶은 사람도 식욕을 잃을 만한 부취가 진동했고, 들러붙는 살찐 파리떼 때문에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다. 노라 양이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제이덕 박사를 과보호하려 들었다. 물론 그럴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구덩이 한가운데서 한시도 멈춰있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파리와 바싹 마른 나무토막 같은 시체들 사이를 지나쳐, 좁은 틈을 비집고 토기를 참으며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윌리엄. 나는 이날 지옥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게 되었어. 내 오만이 나를 거기로 이끌었어.

나는 내가 본 것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거야. 그런 걸 사람으로 태어난 예의라고 불러도 되겠지.



 유적에는 파리가 많았다. 지나치게 많았다. 게다가 평범하게 서서 지나가기에는 너무 좁았다. 목과 허리가 뻐근했지만 긴장 때문에 당시에는 제대로 깨닫지도 못했다. 갈림길의 한쪽에는 방이 있었다. 제이덕 박사가 해석하기로는, '충신의 방'이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잠든 칼리시리들을 보았다. 그들은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사람 같았다. 한쪽 벽에는 그들이 모은 것으로 보이는 재물이 쌓여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사람의 형상을 한 그들을 해코지 하는 데에 기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파리들도 우스운지 주변에서 윙윙 비웃어댔다. 그 잠이 깊어서 우리를 알아채지 못했기에, 결국은 조용히 문을 닫고 지나쳤다.

 중간에 시체 속에 깃든 흰 벌레에 습격당하는 사건이 있기는 했어도, 우리는 결국 황금 판이 뜯어진 곳을 찾아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뜯어진 구멍에서부터 하얀 액체가 새어 나와 그 밑으로 웅덩이를 만든 것이다. 웅덩이가 3m 정도의 넓이였기 때문에 당장 판을 제자리에 돌려놓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우리 중 누구도 그 웅덩이로 직접 걸어 들어갈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곳을 건너갈 간이 다리를 만들기 위해 노새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어거스터스 라킨이 아니었다.

 

 

 

 

 

 라킨의 몸에 깃든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목소리와 (이 뒤의 묘사는 검게 칠해져 있다)

 나는 알아. 악마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악마는 단지 사람의 창조물일 뿐이니까.

 그러나 사람이 악마, 마귀, 악귀, 이런 단어를 써서 어떻게든 설명하고자 했던, 설명하고 이름 붙임으로써 약하게 만들고 또 잊으려고 했던 어떤 존재,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나를 편안한 밤으로부터 영원히 추방한다. 내가 쏜 총알은 고작해야 어거스터스 라킨의 죽은 머리를 부쉈을 뿐이다. 그 안에 있었던 것은 일말의 생채기도 입지 않았다. 그냥 떠났다. 나는 안다.

 

 

 어거스터스 라킨, 그가 제 몸을 괴롭히던 지옥에서 벗어났기를 바란다. 나는 그의 시체를 묻어주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최대 4센치 정도 직경의 틈이 벌어져 있었다. 안에서는 지독한 썩은내가 났고 파리들이 피어올랐다. 나는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 ■■ ■■■ ■■ ■■■■■ ■■■ ■■■. ■■■■ ■■■■. ■, ■ ■■■■ ■■■■. ■■ ■■■■■ ■■■ ■■■ ■■.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경치는 거짓말처럼 평화로웠다.

 

 우리는 황금 판을 제자리에 돌려두었다.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두 칼리시리는 비명을 지르며 재가 되었고, 제이덕 박사와 잭슨 박사가 그들의 재물을 조금씩 챙겼다.

이후로는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거지꼴을 하고선 리마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제대로 된 기억조차 없다.

 

 



 

 

1921. 4. 4

 

 나는 진실 그 자체를 바꾸지 못하는 한 개인일 뿐이다.

 그러나 진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또 취할 것인가? 이것만은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다니며 현기증처럼 나를 쫓아온다. 나를 한없이 무력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더없이 강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 기록에서조차 거짓말을 했다.

 한때는 사람의, 사람을 위한 밝고 명징한 기호와 세상을 믿었다. 살아온 세월이 그리 길지는 않아도 언제나 그런 것들을 위해 발을 내딛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어떤 것은 어둠 속에 영원히 묻어 두어야만 한다. 결정은 횃불을 들고 멀리 나온 사람의 몫이다. 내가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단지 내가 본 것을 당신이 참아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제는 피라미드에서 빈손으로 나오다 못해, 그 깊은 곳에 어느 정도 나를 묻고 온 기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에 없이 인간적인 기분이기도 하다.

 내 명예욕이 아닌 인간성이 나를 죽이리라고 생각한다.

 혹시 그렇게 된다면, 부탁드리건대 이 기록은 불태워주시기 바랍니다.





 

 일라이저 웨버.












1925. 1. 3

 

 

잭슨으로부터 전보가 도착했다.

4년간 묻어두었던 기록을 다시 꺼내게 되었다.

 

 

 

 

 

to be continued

 

9999님의 coc 타이만 시나리오 불사의 마법사와 사랑하는 인형의 짧은 후기로그?글?소설? 매번 쓸 때마다 뭐라 적어야할지 모르겠는 그것입니다. 세션 내에서 털지 못한 얘기라던가 더 할 이야기만을 조금 채워서 빈 곳이 많습니다. 1대1시날의 후기글은 처음인데 커플덕질로그가 되는군요...

개변이 다방면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스포일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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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윤동주

 

 

 1.

 

 목 끝까지 검은 물이 가득 찼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물 밖에 둔 금붕어처럼 뻐끔대다 보면 마른 입술이 찢어져 틈새로 피가 고였다. 검은 물은 점막을 타고 눈앞을 흐리고 시끄럽게 귓바퀴를 흘러 사람을 미치게 하고 끝없이 끝없이 갉작거렸다. 녹아버린 정신이 곤죽이 되어서 바닥을 기었다. 내가 너무 작아. 너무 작아서. 그걸 내려다보고 있으면 욱, 구토감이 올라왔다. 어떤 날은 귀가 멀기라도 한 것처럼 비명만 겨우 지를 수 있었고 어떤 날은, 검은 물을 뱉어내고 싶어서 억지로 목젖을 후벼댔다. 맑은 위액을 실컷 토해내고 나면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잡고 겨우겨우 잠들었다. 

 

 나 갈라졌어. 찢어졌어. 산산이 조각났어. 살점 덩어리가 칠칠맞게 덜렁거리고 머리카락이 한 뭉텅이씩 뽑혀나갔어. 이빨이 다 부서져서 입술 사이로 후드득 흘러내렸어. 죽음이 앉았다가 버리고 간 몸을 꿰맨 후에도 나는 다시 비틀거리며 죽음을 찾아헤맸다. 어두운 동굴을 벗어나기 전 잠깐 우두커니 앉았던 것이 휴식의 전부였다. 그것이 인생에 단 한 번 찾아오는 축복임을 모르고 그것에게 버려졌다. 너무 쉽게 천국도 지옥도 날려버렸다. 이걸 사는 거라고 부를 수 있다면.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고 찬란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고 그저 지겹고 끊임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멈춰있는 것조차 못하는 지저분한, 추잡한, 역겨운, 더러운

 검은 물. 조각난다는 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네 몸을 조각내는 순간순간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부서지는 것 같아. 해버리고도 끔찍해, 끔찍한데도 해버려. 하지만, 왜, 왜 네가 그런 얼굴인 건데? 내가 지금 얼마나 괴로운지 

 알기는 해? 안다면 돌아왔겠지. 예전처럼 그렇게 불러줬겠지. 그러니까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바보. 멍청이. 쓰레기. 네가 불쌍해. 네가 가엾어. 아니, 아니. 네게 그러고 싶지 않은데, 이럴 땐 내가 내가 아닌 것만 같아…. 어두워진 시야 가운데 숨 쉴 구멍이 떠오르면 배가 아프게 웃으며 뒤쫓았다. 세상이 여전하고 시간이 여전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나면 두 배 무겁게 절망이 내려앉았다. 가끔은 분노에 사로잡혔고 어떤 때는 우울에 잡아먹혔다. 정신을 차리면 방은 엉망이었다. 부서졌다 고치고 부서트렸다 고치고 무너트리고 망치고 그리고 다시 세웠다 다시 무너지는 것들의 탑. 아수라장이 된 방 한 가운데에 서있는데 절박하게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서걱서걱 모래가 갈라지는 시야 사이로 네가 보였다. 그 눈을 들여다 본 게 얼마만인지 너무 낯설고 두렵고 역겹고 사랑스럽고 이상해서 깜빡이지도 못하고 쳐다봤다.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네가 말했다. 다시 시작해요. 다 지워버리는 겁니다. 당신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만이래도 좋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2.

 

 부서진 세상에도 봄이 왔다. 숲은 하나밖에 남지 않아서 이름도 없이 그냥 숲이었다. 살 자리를 찾아 날아온 꽃씨들 덕에 숲에는 온갖 꽃이 다 피었다. 흐드러지고 겹이 많은 분홍색 꽃, 가지 끝에서부터 둥글게 뭉쳐 떨어지는 두껍고 흰 꽃, 흙과 가까이 자라는 보랏빛의 손톱만한 꽃이며 노란색의 자잘하고 술 많은 송이까지 온갖 것들을 다 보고 지나가는 계절이었지만, 그는 그것들의 이름을 몰랐다. 책을 온통 뒤져봐도 없었다. 마법사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물어오는 목소리에 그늘진 눈길이라도 던져주는 날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겨울에는 알이 굵은 흰 눈이 펑펑 내려 바싹 메마른 이파리마저 전부 덮어버렸다. 그럴 때의 숲은 야속하리만큼 고요해졌다. 그런 계절에는 미쳐서 내지르던 비명도 다 묻혀버리기 마련이었다. 그런 고요함이 차라리 좋았다. 첫눈이 뿌듯이 쌓인 날이면 마법사는 뭘 하고 있었건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면 저 멀리서 혼자 눈을 뭉치고 있는 게 보였다. 고장난 마음에 평화를 주는 얼마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무얼 만드는지는 잘 알기 어려웠지만 돌아보고 환하게 웃어주는 상상 같은 것을 했다. 짧은 하루가 지나면, 또 평소 같은 날들이 찾아왔다.

 마법사는 지겹게 변덕을 부렸다. 어떤 날은 눈밭이 너무 눈부시다고, 어떤 날은 꽃밭에 색이 너무 많다고 화를 냈다. 하늘에 별이 존나 많아서 그래서 너무 싫어서 죽여버리고 싶다고 했다. 그런 변덕에 맞춰 커튼을 치거나 하나 남은 눈을 가만 가려주는 게 그의 일과였다. 허락하면 뒤에서 마른 몸을 품에 댔다. 너무 괴로운 날엔 정말 심장이 멎은 사람 같이 움직이지도 않아서 그를 불안하게 했다. 일부러 불편하게 자세를 바꾸고 뒤척여도 미동 하나 없었다. 고통이 스민 일상이 단조롭게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갔다.

 

 

 3.

 

 아담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 어디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인간은 그리도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까?

 

 

 4.

 

 고리 걸듯 가볍게 걸쳐 잡은 손이 간질했다.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디터는 하고 싶은 얘기를 늘어놨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제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작고 보라색으로 우글우글한 것은 꽃잔디. 말하는 입이 즐거워 보였다. 아, 데이지. 교회 옆에 살던 노인이 이걸 앞마당 가득 키웠는데 한 송이라도 꺾어가면 화를 냈어. 잔뜩 쥐어박히고 울면서 돌아왔을 때는 그 사람이 너무 미웠지. 커서 알고 보니까 말이야, 전부 죽은 딸 거여서 그랬대. 죽기 전에 제일 좋아하는 꽃이었다는 거야. 내가 잘못한 거지. 이제는 꺾어가도 화낼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데이지가 계속 데이지여서 다행이야.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지났는데…… 감상은 더 이어지지 않고 입술이 다물어졌다. 뭐라 물어보기도 전에 변명 같은 말이 덧붙여졌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아파.

 물론 거짓말인 걸 알고 있었다. 상상하지 못하는 시절, 공유하지 못하는 추억이 어느새 물씬 다가와 눈앞에서 또 일렁이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그런 때에 초조해하며 서있지 않았다. 다정한 몸짓으로 몸을 겹치면, 그는 멀어졌던 것이 거짓말 같이 쫓아와 포갠 손 위에 손을 얹고는 했다.

 

 예뻐서요.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예뻤다. 느리게 붉고 다정한 색으로 물들었다. 리온. 그렇게 마주 불렀다. 그 이름을 말할 때 혀가 움직이고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새가 퍽 마음에 들었다. 왜 너를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렀을까?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수가 없어서? 그게 네 영혼에 붙은 이름이어서? 잘 몰랐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잊히고 만 이유였다. 가끔 그 이름 때문에, 자기가 그 이름 너머의 다른 사람을 찾는지 정말로 너를 찾는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묵혀둬 좋을 것이 없는 혼란이기에. 이내 고개를 털어냈다. 귓가에 곱게 고인 꽃 한 송이 때문에 하루종일 걸음걸음마다 향기가 났다. 그것 때문에, 어차피 오래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얼굴을 돌려 마주 봤다. 그리고 아주 미약한 움직임으로 속삭였다. 네가 사랑스러워.

 

 햇살이 좋아. 조금 더 걷자. 걷다 보면 꽃향기도 바스러지고, 너도 조금쯤은 졸음에 고개를 기울일 테지만, 그래도 봄이 오면 어김없이 숲을 거닐러 가겠지. 그러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슬픔 다음에 오기로 약속한 것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도 있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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