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케냐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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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10.9



 케냐에서 확인할 일의 목록을 정리해둔다. 

  • 칼라일 탐사대 관련 기사: 애버데어 숲 근처 백인 학살. 칼라일 탐사대가 사파리 관광을 한다고 떠나, 나이로비 북서쪽 대지구대 탐험 예정.
  • 잭슨 엘리어스가 남긴 나이로비 메모: 존스턴 케냐타라는 이름. 검은 바람의 신에게 저주를 받은 곳, 피투성이 혀 사교 집단, 산의 본부.
  •  잭슨 엘리어스가 질문한 사람들의 목록: “샘 마리가, 기차역”, 네빌 저민, 스타렛 선생, 셀커크 중위, 엔디콧 대령.
  • 케냐 몸바사 칼린디니 항구 아자 싱 앞으로 가는 소포.


 이른 시각 몸바사에 도착했다. 태양이 선명한 채도로 내리쬐었고 그을린 공기에서는 짭조름한 냄새가 났다. 인도양의 파도가 밭은 숨을 내쉬며 흰 모래밭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드는 동안 먼저 도착한 배들이 항구에 매여 미적거렸다. 사람들은 온갖 말로 떠들며 적갈색으로 지어진 낮은 건물들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케냐는 사파리 목적의 관광객이 많아 비교적 총기에 관대했기에 큰 문제 없이 세관을 통과할 수 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배에서 내려 새로운 세상을 마주할 때는 묵은 후회와 잘못을 뒤로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오묘한 착각에 젖곤 하는데, 실비아는 큰 감흥이 없었다.
 실비아 펠튼은 중년의 딜레당트로 내가 호주에서 자리를 비운 동안 프리스비의 연락을 받고 합류했다. 과거에 우리와 비슷한 사건을 겪었다고만 들었는데, 사실이라면 얌전히 손을 씻고 물러나 쉬다가 다시 현장에 불려온 셈이었다. 나는 은퇴한 군인 중에 이런 부류를 몇 보았는데 제 안에 자기만의 성(城)이 있지만 매사에 무뚝뚝하고 퉁명스럽다.
 첫날은 몸바사의 캐슬 호텔에 묵었다. 실비아가 최고의 숙소를 고집해서 얼떨결에 그렇게 되었다. 불안정하고 축축한 배 위에서 한 달여를 보내다 깨끗한 시트 위에 누우니 그대로 침대에 영혼을 빼앗길까 봐 겁이 날 지경이었다.
 얼마간 기력을 회복한 뒤 아자 싱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는 영국령 케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도인 수출입업자로, 몸바사에 자기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현재 인도로 출장을 간 상태로 6주 뒤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한밤중에 그의 사무실에 몰래 잠입했으나 큰 수확은 없었다. 사무실 금고에는 돈과 함께 잡다한 송장, 흰 가루(설탕과 제습제), 힌두스탄어로 쓰인 장부가 있었다.

 

 

 

1925.10.10


 몸바사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할 수 없었기에 새벽같이 우간다 레일웨이를 타고 나이로비로 향했다. 이렇게 일찍 출발해도 밤이 늦어서야 도착할 예정이었다. 우간다 레일웨이는 몸바사에서 출발하여 북서쪽으로 진로를 펼치는 긴 철도다. 나는 프리스비와 함께 삼등칸으로 갔고 실비아는 일등칸에 타느라 일행이 잠시 갈라졌다.
 덜컹거리는 금속 소음, 긴 경적과 함께 기차가 출발하자 아침 햇살이 낀 창밖으로 아프리카가 펼쳐졌다. 떠날 때는 푸른 해안선 위로 부서지는 햇살을 볼 수 있었다. 자료를 정리하고 잡담을 나누고 담배를 피우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소금기 머금은 공기가 점점 멀어지면서 이내 잿빛 바오밥 나무와 가시 많은 아카시아, 누군가 손으로 가볍게 쥐었다 놓은 것 같은 모양의 이름 모를 관목이 드문드문 서 있는 넓은 초원이 나타났다. 선로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얼룩말 떼가 풀을 뜯었다. 고도가 올라가면서 주변이 어두워질 때쯤에는 저 멀리 서쪽으로 눈 덮인 킬리만자로 봉우리가 보였다.
 철도 여행은 순탄하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삼등칸 화장실 칸에 이 났다. 사람들이 놀라 웅성거렸고 새카만 연기가 금세 비좁은 기차 칸에 번졌다. 문득 섬뜩한 느낌이 들어 창밖을 보니 어둑한 아프리카의 풍경 위로 파란색 불꽃과 빨간색 불꽃이 나란히 떠올라 있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불꽃이라니, 묵시록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눈처럼 보이는 부분이 전혀 없는, 그저 불꽃 덩어리였는데도 그것들이 이쪽을 쳐다보는 듯이 느껴졌다. 불꽃은 잠시 춤추듯 부유하다가, 기관차 앞쪽으로 휙 사라졌다. 잠시 후 폭발음이 들렸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찬찬히 되짚어보니 예전에 책에서 본 불의 흡혈귀와 비슷했다. 지능이 있는 가스나 플라스마 형태로, 이들이 여기 있다는 건 이들을 소환한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굉음과 함께, 기차 앞쪽에도 불이 붙었다. 프리스비와 함께 식당칸으로 몸을 피하려 했으나, 직원이 문을 막고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흑인은 식당칸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큰 실랑이로 번지기 전에 식당칸에 있던 실비아가 직원을 밀치고 나와 주변을 훑어보았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탄수차와 식당칸에서 물을 끌어와 불을 껐다. 다행스럽게도 큰불로 번지기 전에 막을 수 있었으나 기차가 멈추고 말았다. 주변이 정리되는 것을 기다릴 시간이 없어, 근처에서 나귀를 빌려 타고 마저 나이로비로 향했다.

 

 

 

1925.10.11


 밤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반나절을 낭비해 다음 날 낮에야 나이로비 시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모두 녹초가 되어 노포크 호텔에 짐을 풀었다. 실비아가 합류한 뒤로 잠을 편히 자고 있다.


 호주에서 사교도들이 큰 의식을 치르는 날을 알아낸 것은 희소식이다.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적 여유가 촉박한 것도 알게 되었다. 호주에서 출발하기 전 메이벨에게 전보를 부처, 나이로비 조사를 부탁했다. 메이벨은 우리보다 먼저 나이로비에 도착한 뒤 작은 팀을 꾸려 할 일에 착수했다.
  오늘 메이벨 일행과 만났다. 메이벨은 여전했고, 그가 케냐에 도착해서 고용한 휴 레드우드와 맹수 사냥꾼 도리스 브렛츠와도 인사했다.
 여기부터는 메이벨 일행에게 받은 자료와 조사한 내용을 들은 대로 정리해둔다.

  • 나이로비의 신문사: 나이로비 스타, 이스트 아프리칸 스탠다드.
  • 나이로비 스타 - 나탈리 스마이드 부인.
     -칼라일 탐사대: 신문 기사는 대부분 기존에 알던 내용. 칼라일 탐사대는 이집트에서 얻은 정보를 확인하러 케냐로 왔는데, 그 정보란 이집트에서 케냐로 이주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주요 대원들이 햄프턴 하우스에서 묵었고 호러스 스타렛과 네빌 저민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당시 기사에 칼라일 탐사대의 사진이 동봉되어 있다. 펜휴는 전의 사진보다 뚜렷하게 젊어 보이는데, 반면에 하이파샤는 창백하고 아파 보였다.
     나탈리 부인도 당시 칼라일 탐사대의 방문을 직접 보았다고 한다. 기억하기로는, 초원에 엔디콧 대령이 사는데 그 집에도 며칠 묵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다들 어딘가 기묘한 분위기였고 건강이 안 좋아 보였다.
     하이파샤는 그중에서도 유달리 안색이 창백해 안쓰러울 정도였다. 특히 아침에 심했다.
     로저 칼라일은 위스키를 좋아하는 청년이었는데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허스턴이 몹시 쌀쌀맞았던데 반해 오브리 경은 활기도 있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격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렸다. 이를테면, 탄 카우르(작고 고약한 성격의 여자, 차 상인)가 햄프턴 하우스에 자주 들렀다.
     셀커크 중위: 아직 나이로비에 있을 텐데 소식을 들은 지 좀 되었다고 했다.
     존스턴 케냐타: 반체제 인사라며 악평했다. 키쿠유 중앙 협회 소속.


 그렇게 스마이드 부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술에 취한 중년 남성(사냥꾼 복장, 훈장 착용)이 쳐들어와서 화를 냈다. 엔디콧 대령이었다. 나이로비 스타의 기사 때문에 손님 다 떨어져 나가 먹고살 길이 없다며, 정정 보도를 낼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나탈리 부인은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기에 상황을 해결하고자 엔디콧 대령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는 나이로비 남서쪽에서 사냥꾼 쉼터를 운영했다. 나탈리 부인이 쓴 기사를 간추리자면, 숲속에 있는 쉼터에서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난다는 내용이었다. 일행이 미리 조사한 결과 6년 전부터 그 부근에서 12명이 사망했다. 그중 10명은 관광객으로, 6명은 미국인이고 4명은 영국인이었다. 남은 2명은 쉼터에서 고용한 하인들이었다. 모두 쉼터 부근으로 사파리를 나갔다가 죽었는데, 대체로 전망대 부근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들 일부는 원숭이 입 정도의 크기로 뜯어먹힌 채였다.
 나탈리 부인은 놀라긴 했으나 엔디콧 대령을 안쓰럽게 여기는 듯했다. 들어보니, 온 가족이 함께 이민 왔는데 얼마 안 되어 미지의 병으로 부인과 아들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았다. 그 뒤부터 사람이 조금 이상해졌다고 한다.

 

  • 이스트 아프리칸 스탠다드 신문사.
     1919년 난디족 다섯 명이 범인으로 체포당한 기사. 사람 다섯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진. 해당 기사에 칼라일 탐사대 사건 조사를 맡은 책임자는 정부청사 식민지 내무차관 로저 코리던이라고 나와 있다.
  • 호레스 스타렛:
     스와힐리 타운의 병원 및 미션스쿨에서 일하는 성공회 신부 겸 의사.
     칼라일 탐사대가 의약품을 구할 곳을 찾아 들렀다. 바셀린 등 기본적인 의료 도구를 받고 돈을 기부했다. 그리고 엔디콧 대령의 집으로 갔다. 스타렛은 이후 참사 소식을 받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칼라일 탐사대의 시체를 확인할 때 곁에 있었다고 증언했지만, 좀 더 추궁하자 사실대로 말했다. 실제로는 당국에서 스타렛의 입을 막은 것에 불과하며, 에리카 칼라일까지 케냐에 온 탓에 범인을 찾는 일이 급해지니 아무나 용의자로 몰아 상황을 대강 정리했다고 한다.
  • 네빌 저민:
     정부청사의 법정 변호사.
     오브리 경이 그에게 와서 특정 종교집단을 조사했다.
     네빌 저민의 증조할아버지뻘 되는 웨이드 저민 경이 18세기에 발견한 폐허 도시 이야기를 했다. 콩고 분지 깊은 곳에 폐허 도시가 있는데 과거 흰 고릴라를 숭배하는 종교집단이 살았다고 한다. 그곳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도 존재한다. 자신도 언젠가는 그곳에 가보는 것이 꿈인데, 오브리 펜휴도 그 도시를 찾으려 해서 도움을 줬다고 한다.
     저민이 말하길 칼라일 탐사대는 나이로비를 떠날 때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인원을 데리고 갔다. 듣기로는 오브리 경이 강력하게 주장한 탓이었다. 
  • 셀커크 중위:
     몇 주 전 본인 집에서 화재 사고로 사망했다. 짤막한 뉴스 기사만 남아 있었다.
  • 존스턴 케냐타:
     교단에 관해 묻자, 조용히 자기 방으로 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교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물어봐 가볍게 대답했다. 케냐타는 잭슨 엘리어스를 만났는데, 그가 불나방처럼 위태로웠고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보였다고 증언했다. 케냐타는 피투성이 혀 교단이 오래된 교단이라는 것만 알고 있고, 이들이 정확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고 했다.
     거짓말일 가능성이 있다. 일행이 충분히 아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 탄 카우르:
     아시아인 구역에서 제일 큰 차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조카로 추정되는 십 대 후반 정도의 젊은이가 가게를 보고 있었고, 본인을 만나지는 못했다.


 조사를 끝난 후 일행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엔디콧 대령의 쉼터로 향했다. 쉼터는 보요이 족 영토 부근에 있었는데 자칼 같은 고양잇과 맹수 서식지라, 원래부터도 관광객에게는 추천되지 않는 곳이었다. 동물들이 다니는 길 부근에 지어진 전형적인 수렵 사냥 숙소로, 바닥에는 사자 깔개 장식이 걸렸다. 쉼터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일꾼은 라는 이름의 흑인 한 사람으로, 50대 정도 되어 보였고 말을 못 했다. 쉼터에서 일한 지는 6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전망대 쪽에서 주로 사건이 일어났다는 건 앞선 조사로 알고 있었기에 일행은 곧장 전망대로 향했다. 주변을 꼼꼼히 살펴보니 전망대 아래쪽 모래에 찍힌 자국들이 있었다. 짐승의 손톱자국에 가까운데 사자는 확실히 아니었고, 사람이나 원숭이 정도 크기의 낯선 자국이었다. 부근에 얼룩말 같은 동물의 뼈가 굴러다녔다.
 같은 날 밤 전망대에서 밤을 보내다 습격을 받았다. 바닥 문 쪽에서 사람들이 기어 올라왔다. 모래 먼지가 바람에 날려 시야를 가렸다. 습격자는 백인 남자 둘에 중년 여자 하나, 어린애 하나였는데 등불 아래에서 보니 산 사람이 아니라 몸에서 모래를 뱉어내는 괴물이었다. 칼로 찌르자 모래 먼지로 흩어져 흔적도 남지 않았다.
 끔찍한 밤이었다. 그 소동에 전망대가 무너졌으며 도리스가 많이 다쳤다. 괴물들을 다 죽인 줄만 알고서 다음 날 엔디콧 대령과 함께 전망대 부근을 순찰했는데, 밤이 되자 또 모래바람이 불더니 괴물들이 나타났다. 어제보다 숫자가 더 늘어있었다. 엔디콧 대령은 아이와 여자를 보더니, 넋을 놓고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를 겨우 기절시킨 뒤 도망쳤다.
 정신을 차린 뒤로 대령은 술만 마셔댔다. 휴가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는 가족들이 병이 나서 죽고 말았다는, 스마이드 부인에게 들은 바 있는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6년 전 칼라일 탐사대가 왔을 때 그런 사연을 내보이자, 가족을 다시 만나게 해주겠다며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그 오두막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짓을 했다. 일이 끝나자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들이 일어났다. 엔디콧 대령은 까무러쳤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칼라일 탐사대는 떠나고 없었다.
 날이 밝은 후 전망대 부근을 철저하게 조사했으나 어떤 장치나 마법이 쓰였는지 알 수 없었다. 여유 시간이 적었기에 메이벨이 엔디콧 대령에게 전망대의 위치를 옮기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했다.
 여기까지가 우리와 만나기 전에 메이벨 일행에게 있었던 일이었다. 정보공유를 끝낸 뒤, 우리는 따로 조사를 계속하되 필요할 때 연락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1925.10.13


 메이벨에게 얻은 정보 중에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존스턴 케냐타를 찾아갔다. 메이벨 일행이 받았던 질문을 우리도 받았다. 이것저것 가늠할 여유는 없었기에 아는 바를 솔직히 대답했다. 잠깐 고민하던 케냐타는 입을 열었다.
 “저는 많은 걸 아는 건 아니고, 그들이 잔인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무로기(예언자)라서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이제야 그런 세계에서 벗어나 당신들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는데 당신들이 먼저 날 찾아오다니 묘하군요.”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라면 위대한 분다리를 만나보셔도 좋겠습니다.
 잭슨 엘리어스는 위태롭고 그의 운명은 이미 묶여 있었지만 우리는 아직 운명이 결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다.
 “밖에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데, 거리를 두고 그를 따라가세요. 그 친구가 멈추면 여러분도 멈추세요. 그가 노란 문으로 들어가면 재빨리 따라 들어가세요.”
 밖으로 나가보니 그 말대로 키가 크고 흰 셔츠를 입은 흑인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우리를 확인하고 싱긋 웃더니 몸을 돌려 스와힐리 타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맨발이었는데 팔다리를 사뿐하게 움직였다.
 그가 주변을 예의주시하는 눈치였기에 이쪽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미행이 있었다. 젊은 남자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도망을 쳤는데 인상이 낯이 익은 것이 몸바사에서도 언뜻 본 듯했다. 그곳에서부터 뒤따른 걸까.
 진흙으로 된 길을 지나 골목을 돌았다. 남자는 노란 문 앞에 멈춰서서 우리를 돌아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노란 문 안은 작은 헛간이었다.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노란 롤스로이스 로드스터가 세워져 있었다. 그걸 함께 타고 먼지가 자욱한 흙길을 달려서 또 한두 시간쯤 갔다. 주변으로 탁 트인 초원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나이로비를 벗어나 외딴 마을에 도착했다.


 차가 서고, 마을의 오두막에서 섬세한 인상의 남자가 나왔다. 우리를 데리고 온 남자가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어조를 봐서는 우리와 함께 온 사람이 그를 설득하는 듯했다. 기다리는 동안 동네 아이들이 근처로 모여들어 눈을 빛냈다.
 마을 남자의 이름은 오코무라고 했다. 오코무는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우리에게 왜 이곳에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피투성이 교단을 막으려고 하는데 케냐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되는대로 길을 찾고 있다고, 조언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코무는 우리를 살피는 것처럼 한번 쓱 보고는 따라오라고 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마사이 족 오두막이었다. 진흙으로 지어진 집이었는데 주변에 있는 다른 집들보다 더 컸고 형태가 조금 달랐다. 주변에 울타리가 쳐져 있고 문을 대신해 커튼이 달려 있었다. 오두막 내부는 긴 통로가 현관에서부터 한 바퀴 돌아서 방을 감싸는 형태였다. 통로 벽에 이것저것 가면이며 부적이 걸려 있었다. 창문도 조명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딘가로부터 빛이 들어와 주변이 잘 보였다. 가운데 방에는 다채로운 기호와 문양이 일정한 패턴을 두고 그려져 있었다. 일종의 보호진인 듯했다.
 입구 반대편에는 몸집이 작은 노인이 앉아있었는데, 어쩐지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오코무가 들어서서 노인의 발을 주물렀다. 이 노인이 바로 분다리였다. 오코무가 말하길, 분다리가 수련을 하다 보니 저편과 가까워졌고, 지금은 여기 있지 않아 그가 돌아오길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노인은 메마른 나무토막처럼 고요했고 우리는 반나절이 넘도록 기다렸다. 어느 순간 노인의 몸이 떨렸다. 이내 뻣뻣해지면서 부푸는 것처럼 생기가 돌았다. 그는 살아있는데도 미라처럼 주름이 많아 그 연배가 짐작되지 않았다. 노인이 방 안에 들어앉은 우리를 찬찬히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스와힐리어였고 옆에서 오코무가 통역해주었다.
 실비아를 보고서는 노란 옷의 왕이, 그 일이 완전히 다 끝난 게 아니라고 얘기했다. 실비아는 잔뜩 화가 나서는 뭐 씹은 표정으로 이마를 구겼다.
 내게는 집에 있는 가족에게, 형에게 연락하라고 조언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는데, 그쪽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연락하라고 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스비에게는, 그 친구(아마도 자오를 말하는 듯했다)한테 줘서 보낸 물건 말고, 새로 소포가 올 텐데 그건 잘 가지고 다니라고 했다. 누가 보내는지는 이미 본인이 잘 알 것이라며.


 그렇게 한 마디씩 말을 건네고 나서, 분다리는 너무 희미해서 거의 들리지도 않는 숨을 내쉬었다.
 “임무는 위험한데 시간이 급박하다. 좋은 말을 듣고 싶으냐, 진실을 듣고 싶으냐?”
 “진실이 필요합니다.”
 “입에 발린 말 하는 놈들은 지하철에만 가도 널렸구만. 그걸 들으려고 그 긴 시간을 기다렸겠어?” 실비아가 불평했다.
 “피투성이 혀가 오만해진다. 이 땅의 사람들이 닥쳐올 피의 제사 때문에 교단에 납치되어서 산으로 사라지는구나. 지도자들은 썩은 생각과 행동으로 타락하고 있다. 우리가 케레나가의 주인 은가이에게 이 사악한 것을 막아달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
 분다리의 말은 구슬을 던지듯 무심하고 또 신중했다.
 “이제, 알고 싶은 걸 물어보거라.”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호주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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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어째서 웨버 씨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일까요?
 저는 당장에 일행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머리를 모아 고민해보았습니다. 분명 까마득하게 오래된 고대 문명의 책이었습니다. 위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고, 그 필체도 앞에 쓰인 글자와 유사했습니다. 전혀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브레이디 씨는 일전에 웨버 씨가 저희에게 언질 없이 여기 들렀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눈치였고, 자오 군은 웨버 씨가 외계인이라고 주장했으며, 이외에도 동명이인일 수 있다는 둥 온갖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프리스비 씨는 말수가 적었고 내내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무슨 추측을 하건 의문만 더해갈 뿐 알아낼 수 있는 게 전혀 없었기에, 저희는 일단 가던 길을 마저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가다 보니 구덩이가 파인 평평한 공간이 나왔습니다. 전구가 바깥쪽에 달려서 그 아래 뭐가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다가갈수록 역겨운 냄새가 스멀거렸습니다. 주변은 저희 발소리 말고는 조용했는데, 그 정적을 뚫고 저 아래서부터 사람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어렴풋이 들렸습니다.
 프리스비 씨가 구덩이 안쪽으로 손전등을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밑에서 들리던 소리가 빛에 반응하듯 커졌습니다. 비명과 신음, 낮은 울부짖음이 울렸습니다. 프리스비 씨는 그 밑에서 뭘 본 건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손전등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손전등이 떨어지는 소리를 신호로, 불에 덴 듯 끔찍한 비명이 쏟아졌습니다. 우리는 혹여나 누가 그 소리를 듣고 뒤를 쫓기라도 할까 봐 황급히 움직였습니다. 흡사 지옥과 연결된 구멍을 본 기분이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대체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요?


 급하게 나아가다 보니 어둑한 대광장이 나왔습니다. 퀴퀴한 냄새에 기묘한 악취가 섞였고, 이성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내내 오싹하고 불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일 비슷한 감각을 빗대자면 동물원의 호랑이 앞에 서서 눈을 마주칠 때 뒷골에 오싹 스며드는 묘한 긴장감과 비슷했습니다. 어떤 장인의 솜씨인지 그 넓은 바닥이 타일 없이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고, 한가운데에 돌로 만든 거대한 고리 형태의 아치가 바닥을 뚫고 서 있었습니다.
 아치로 다가갈수록 불쾌한 느낌은 더 강해졌습니다. 고리의 이음새를 살펴보다 문득 온몸에 소름이 쭉 돋았습니다. 이 돌 고리는 사실 거대한 생물 위에 얹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닥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생물의 표면 위에 발을 대고 서 있었습니다!
 깨닫고 나니 피부 아래로 거대한 혈관이 펄떡거리는 게 보였습니다. 명백하게 살갗이었습니다. 원주민들이 말하던 지하의 거인 부나이 전설은 경악할만한 진실을 짚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괴물이 깨어나면 정말로 세상을 먹어치울까요?
 아연실색했던 것도 잠시, 뒤쪽에서부터 기묘한 휘파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본능적으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닥치며 사람을 끌어당겼습니다. 자오 군이 휩쓸려들 뻔한 것을 브레이디 씨가 자기 목숨을 바쳐 구했습니다. 우리는 겁에 질려 그곳에 다시 돌아가 보지도 못했습니다.
 발전기를 지나쳐 바닥에 붉은빛이 나는 광장에 다다라 겨우 쉴 수 있었습니다. 주변은 다시 고요에 잠겼습니다. 위험한 일에 끼어들게 만들어 미안하다며, 프리스비 씨는 이곳에 온 진정한 목적을 들려주었습니다. 세상을 위협하는 거대한 사교 집단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막아야 하는 사람에 대해서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프리스비 씨가 한 말을 이해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저희 셋이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방금 겪었듯 이 지하 도시는 위험으로 가득하니, 차라리 더 준비해서 돌아오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설득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데서 개죽음을 당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프리스비 씨도 제 말을 납득해 주었기에 이후로 저희는 침착하게 돌아갈 길을 찾았습니다.


 일단 전진하니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전등이 켜져 있었고, 길이 교차하는 공간에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세 층짜리 목조건물이 서 있었습니다.
 제일 왼쪽은 최근에 파기 시작한듯한 인공적인 길로, 드문드문 사람이 지나다녔습니다. 다들 땅을 파는 장비를 들고선 멍한 눈을 하고 비틀거리며 걸어갔습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 길은 이어지다 끊겨있었고, 세 번째 길은 아치형의 넓은 공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곳도 전에 본 광장처럼 넓고 어두웠습니다. 중앙 바닥에서 빛의 반구가 강렬한 보랏빛으로 주변을 물들이며 느리게 깜빡거렸습니다. 천장은 까마득하게 높아서 끝이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반구 옆에는 8m 정도 크기의 박쥐 날개가 달린 검은 형체의 입상이 서 있었습니다. 나뭇가지와 인간의 뼈 등을 얽어서 뼈대를 쌓고, 천과 살가죽으로 형태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위에 물감과 피로 칠을 입혀 피 냄새와 부취가 진동했습니다. 근처에 크기는 좀 더 작지만 비슷한 동상들이 여럿 서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불 피운 흔적이 있었고, 제단으로 사용한듯한 돌덩이에는 검은 피 얼룩이 묻어 있었습니다. 프리스비 씨가 중국에서 비슷한 광경을 봤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지하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이 잔혹한 행태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봤던 길은 나름대로 메모하며 부지런히 쏘다니다 보니 어렴풋하게나마 길을 파악해둘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금살금 숨어가며 차까지 훔쳐 빠져나왔습니다. 브레이디 씨를 저 아래 남겨두고 온 것 때문에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1925.8.4


 밖으로 나와보니 주변은 어두컴컴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웨버 씨를 맡겼던 원주민 마을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웨버 씨가 기어이 혼자 마을을 빠져나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맡겨두었던 얼마 안 되는 짐도 전부 챙겨 간 상태였습니다.
 다행히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그가 사막에 남긴 발자국을 뒤쫓았습니다. 발자국은 타이어 자국과 합류하면서 끊겼습니다. 아마도 지나가던 차를 얻어 타고 간 듯했습니다. 어쩔까 망설이는데 프리스비 씨가 쫓아가자고 강권해서, 결국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만 구한 뒤에 다급히 뒤를 밟았습니다. 이후 나흘간 흔적을 따라갔습니다.
 칸캇지리에 도착해 인상착의를 수소문한 끝에, 포트헤들랜드 기차역에서 겨우 웨버 씨와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습니다. 보기에는 그 사람이었는데, 말하는 뉘앙스도 달랐고 그런 척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저희를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며칠 만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싶을 정도였지요. 표정은 위화감이 들 정도로 차분하고 평온했습니다. 지낸 시간이 짧아 그런지 저는 웨버 씨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보았습니다.
 저와 자오 군은 함께 있어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기에, 프리스비 씨와 웨버 씨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도록 자리를 비켜주었습니다. 돌아온 프리스비 씨가 전해주기를, 웨버 씨는 시드니에 먼저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프리스비 씨의 눈가가 빨갰습니다. 분명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으셨던 거겠죠.


 저는 호주의 사막을 적잖이 탐험했는데 이번만큼 기묘하고 또 강렬한 여행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세상이 가진 비밀을 또 한 꺼풀 벗겨낸 기분이었지요. 필요한 장비와 인원을 갖춰서 지하 도시를 제대로 답사하고 또 관찰하고 싶어졌습니다. 그곳을 점령하고 있는 사람들과… 존재의 위험성을 보건대 쉽지 않은 바람이겠지만요.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 일단 도와드리고 있는 일부터 마무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저희는 사람을 더 구하고, 차에 짐을 새로 싣고 다시 사막으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원래 웨버 씨가 담당하고 있던 일이 많아서 이래저래 시간이 걸렸습니다. 콜즈 교수님의 집을 돌보는 일과 관련해 제게도 몇 가지 처리할 일이 남아 있기도 했고요.

 

 


 

 



1925.8.30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방금까지만 해도 차가운 사막의 밤하늘 아래 있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낯선 호텔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나는 외출복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목이 마른 것처럼 입안이 깔깔했고, 가진 돈이 꽤 사라졌고, 호텔 방 침대 위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대부분 역사책이었다. 고장 난 필름이 감기듯 드문드문 이 책을 읽었던 장면이 떠오르는데 그 내용은 단편적이고 흐렸다.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낯선 장소에 들렀던 기억이 깨진 파편처럼 흩어졌다. 그 불투명한 이미지들은 내가 붙잡으려고 애쓸 때마다 손 틈새의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더 깊이 떠올리려 하면 곧장 두통이 찾아왔다.
 뒤늦게 일지에 쓰여있는 글을 찾아 읽어보았다. 아무래도 그 기계 때문에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누군가의 농간일까? 누구의, 어쩌면 관찰하는 정신의? 아니면 그냥 내가 미쳐가는 걸까? 정신적인 문제일까?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달이 사라졌다. 내가 나를 잊은 사이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 시간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마다 제동이 걸리듯 내 몸이 나를 방해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기에 일단 일행을 찾아 나서려고 웃옷을 걸쳤다. 문득 외투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쪽지가 잡혔다.


 [지금 시간, 현재 위치, 무사한지, 나 기억나는지 다 적어서 포트헤들랜드 기차역으로 전보 부치세요. 프리스비.]


 나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시기 프리스비는 하루에 두 번씩 역에 들러 전보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후 내가 머무는 호텔로 전화가 왔다. 나는 수화기를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프리스비 씨,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쪽은 다들 괜찮은 건가요?” 
 “……일라이저 씨 맞죠?”
 프리스비의 음성은 낮게 깔려 있었다. 뒤에서 자오가 떠드는 게 들렸다. “뭐래요? 외계인이래요? 드디어 정체를 밝힐 생각이 들었대요?”
 “나 누군지 알겠어요?” 프리스비가 천천히 말했다.
 “무슨 말씀을….”
 나는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수화기 너머가 잠시 고요하다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프리스비가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어쩔 줄 몰라 더듬더듬 사과했다. 물을 게 산더미 같았는데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됐고 빨리 이쪽으로 와요!”
 아무래도 만나야 제대로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리스비는 펑펑 울면서, 재클린이 죽었다고 얘기해주었다. 그 한 마디뿐이었지만 나는 재클린이 약속을 지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최대한 서둘러 가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칸캇지리로 가는 내내, 나는 뒤죽박죽인 기억을 어떻게든 정리해보려 애썼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나는 이름을 바꿔가면서 지냈고 눈이 아플 정도로 책을 읽었다. 프리스비가 언성을 높이던 장면이나, 학자 행세를 하며 사람들과 이야기하던 장면 같은 것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되는대로 진통제를 삼켰으나 그마저도 잘 듣지 않았고, 무지근한 두통이 계속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마치 안갯속에 빠져 헤엄치는 것 같았다.



 

 

1925.9.1


 칸캇지리에 도착한 후, 내가 없었던 사이 있었던 일을 들었다. 일행이 내 이름이 쓰인 책을 보여주었는데, 나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어서 얼떨떨한 느낌 뿐이었다. 여전히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으나 한 달 동안 내가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브레이디의 마지막을 알고 나서, 나는 이제는 정말로 자오를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는 그를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자오,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내가 말을 꺼내자 자오는 단박에 표정을 구겼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주변이 고요해졌다.
 “형은 왜 자꾸 날 돌려보내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어려서 안 된다는 건 불합리하다고요!”
 “불합리하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아, 씨….”
 “자오, 그렇게 오기로 하는 거면…….” 지켜보던 프리스비가 한 마디 얹었다.
 “오기가 아니라니까요!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해요?”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자오가 벌컥 언성을 높였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걸 듣기는 했어요?!”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자오. 언성 높이지 마세요.”
 “X발, 장난하나… 형이 지금 높이게 만들잖아요! 어디서 한 달 동안 자빠져 있던 인간이 오자마자 한다는 얘기가…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진 알기나 해요? 형 없을 때 저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기나 하냐고요?!”
 자오는 내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그도 그 나름대로 눌러 참고 있던 것을 다 쏟아내려는 것처럼.
 “이참에 아예 솔직하게 말해보지 그래요. 지금 나를 돌려보내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옛날에 형이 돌려보내지 못했던 사람들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자오도 그런 내 기세를 알아챈 것처럼 말을 이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나보고 어리다고 하면서 형이야말로 뭐 얼마나, 얼마나 어른스럽게 굴고 있는데요?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그렇고, 왜 자꾸 자기가 마음먹으면 지킬 수 있는 것처럼 구는 거예요?”
 재클린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고 했잖아. 네가 여기 있는 모두의 보호자인 양 굴지 말라고.
 그저 습관이 되어서, 습관이 되어서였다.
 그 둘은, 정말로 어렸다. 돌아갈 곳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 애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했다. 이상하지. 이상하게도…… 그 습관과 멀어지면, 그 애들과도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얘기 다 했습니까?”
 내 목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는 것 같지 않고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오가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는 게 보였다. “…다 했는데요?”
 나는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선택지가 적었다.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 했으면… 저는 지금 자오 군한테 화내고 싶지 않으니까, 생각을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가는 거냐고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귓전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뭐라고 말하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잊고 있었던 한 달 동안 금연이라도 하며 지낸 건지, 담배를 좀 피웠기로서니 순간 확 오르면서 머리가 핑 돌았다. 이마를 붙잡고 난간에 기대어 있는데 프리스비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일라이저 씨. 괜찮아요?” 살피는 목소리였다.
 “자오도 지금 많이 심란해서 그래요. 방금 가족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예민해지는지 일라이저 씨도 알잖아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지금 이런 위로를 받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절로 입가에 쓴웃음이 머금어졌다. “죄송합니다. 프리스비 씨, 그간 신경 많이 쓰이셨겠죠.”
 프리스비가 내 쪽으로 다가와서 난간에 기대어 섰다.
 “솔직히, 화나 더 내려고 했는데. 돌아와서 이렇게 얻어맞고 있는 걸 보니까 저까지 그러면 안 될 것 같네요.” 프리스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짐짓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거기에 속지는 않았다. “당신이 잘못한 거 아니니까요. 여기서 그렇게 크게 잘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는 프리스비의 말을 들으며,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투명해지는 담배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칸캇지리의 밤은 채도가 낮고 푸르스름했다. 강렬한 사막의 낮과 대비되는, 무슨 죄라도 지어서 제 색깔을 잃어버린 것 같은 시간.
 “일라이저 씨가 없는 동안 제가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요.”
 프리스비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자오가 그동안 힘이 많이 되어줬거든요. 일라이저 씨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그 애 뜻을 존중해주는 건 어때요?”
 “…….”
 “좀 져주라는 거죠.”
 나는 그 밤에 기대서 다시금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잊을 수 없는 누군가를.
 “그래야 하는 것 압니다. 사실 내가 말릴 수 있는 일이 아닌 것도요.”
 알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말렸다고 한들 일어났을 일이었다. 그 애는 언제나 자기다웠고 내가 바꿀 수 있었던 건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알고 있는데도 역시 좀 더 말려보지 않은 게 후회가 되었다. 나는 하염없이 후회했다. 이번엔 얼마나 물고 늘어져야 내가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은 그 생각뿐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 되기를 이제는 포기했다. 미움받아도 상관없었다. 그게 나았다. 그냥 한 사람도 더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더 견디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담배를 느릿느릿 손가락 위에서 굴리다가 비벼 껐다. 불이 꺼진 자리에 남는 재와 연기. 나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내게 태울 것이라곤 이제 나 자신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내가 멈출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방으로 돌아간 나는 자오에게 더는 반대하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자오가 말하는 만큼 본인이 어른이라면 제 말을 스스로 감당할 것이라 믿는다고. 자오는 아까까지 씩씩거리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금세 화색이 되었다. 그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었다. 그는 어렸고,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이 자리에서 꺾이지 않은 승리자였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섰다. 이게 맞겠죠, 이게 맞는 일이겠죠, 나는 그저 누구든 붙잡고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브레이디든, 노라든, 누구든 대답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날 밤에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1925.9.5


 사막 아래에 잠든 지하 도시는 서늘하고 어둡고 드넓었다. 분명 처음 마주하는 장소였는데 그 기이한 아치와 복잡한 길들이 묘하게 낯익었다. 침입한 흔적을 들킨 것인지, 사교도들은 전보다 경비가 삼엄해진 상태였다.
 우리는 보라색 돔이 있는 광장에서 박쥐를 닮은 괴물 셋과 맞닥뜨렸다. 그 괴물들은 두꺼비와 박쥐를 섞어놓은 것 같은 형태에 눈코입이 없었고, 날개는 구겨진 종이처럼 주름이 잔뜩 져 있었다. 제코가 그린 그림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 박쥐 괴물이 레너드(우리가 고용한 사람 중 하나)를 붙잡고 날아가서 그를 기묘한 신상에 대고 짓눌렀다. 마구 소리를 지르던 레너드는 신상에 닿자 몸이 잠깐 축 늘어졌다가, 다시 깨어나 바둥거렸다. 우리는 그를 구하려고 애썼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를 두고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멈추지 않고 교차로가 있는 곳까지 향한 다음, 인원을 나누어 목조건물에 진입했다.
 허버트가 후에 알려주기를, 1층은 창고로 쓰는 듯한 공간이었다. 안에는 곡괭이나 밧줄 같은 채굴 장비가 든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광업용 장비나 커다란 수레도 보였고, 작은 사물함 옆에 발전기를 돌리는 데에 쓰는 석유통이 여덟 개였다. 바닥에 사람 십여 명 정도가 누워서 자고 있었다. 살금살금 진입하는 도중 감시하던 사람이 깨어났다. 그가 명령하자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벌떡 일어나서는 뒤를 쫓았다. 그 사람들은 마치 자기 의지가 없는 존재들 같았다. 이후로는 도망치느라 더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2층은 내가 직접 살펴볼 수 있었다. 자오와 지노가 함께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몹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안에 큰 우리가 일곱 개 있었는데 그 안에 전부 사람들이 들어차선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사교도들이 납치한 사람들을 가두어둔 곳이었다. 우리를 여는 데는 특별한 열쇠가 필요했다. 억지로 뜯어낼 궁리를 하고 있는데, 문득 한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몸을 비틀며 발작했다.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는 그의 가슴 부근이 울룩불룩하게 치솟다가 찢어졌다. 가죽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거기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사마귀와도 비슷하고, 파충류 같기도 한 괴물이었다.
 충격적인 광경 때문인지 자오의 상태가 나빠서 그를 다급히 바깥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는 갑자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 순간 위층에서 총성이 울렸고, 다급해진 나는 일단 지노에게 자오를 맡기고 뛰어 올라갔다.
 3층은 허스턴을 위한 공간으로, 이것저것 멀끔한 가구가 갖추어진 곳이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 앞서 올라갔던 프리스비와 다지 교수, 그리고 클로다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허스턴은 반대편 책상 쪽에 서 있었다. 갓 끓인듯한 차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총성이 들린 것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허스턴은 우리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전혀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그럴만했다. 허스턴은 내가 만난 자 중에 가장 말이 많은 사교도였다. 그가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얘기를 떠들어댔는지 모른다. 그는 내게도 자리를 권했다.

 자, 지금까지 알던 세상을 잘 되짚어 봐라. 뭐가 진실인지 잘 생각해라. 아무리 진실을 외면하려고 해도 평소에 꾸는 꿈을 통해서 진실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이 모든 일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인류의 도태형, 고대부터 유전적으로 축적되어 온 집단 무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신이야말로 궁극의 진실이자 최종적인 현실이다.
 세상의 멸망은 위대한 신 니알라토텝의 뜻이다. 나를 죽인다고 해서 신의 뜻을 멈출 수는 없다. 나는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신들의 곁에 나란히 설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내가 그를 미치광이라고 믿는 만큼 굳건히.

 “내가 직접 보여줄 수도 있어. 같이 가세.”

 더 들을 필요가 없다며, 프리스비가 그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총알은 책상 위를 때렸다.
 안타깝게 됐구먼, 중얼거린 허스턴이 클로다를 향해 카메라 형태의 기묘한 물건을 들이대고 세 번 정도 버튼을 눌렀다. 그 앞에서 눈부신 전기가 튀더니 클로다가 순식간에 숯덩이로 변해버렸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우리는 적당히 눈짓하고 장단을 맞추는 척했다. 허스턴은 우리가 당연히 그 일에 참여하고 그 신을 숭배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 유일하게 논리적인 결론이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떠들어댔고 나는 이참에 궁금했던 것 몇 가지를 알아냈다.
 원래는 세계 곳곳에서 문을 열 예정이었는데 여러 군데에서 차질이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없다는 것. 이집트랑 케냐에서 여전히 그날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하이파샤와 부나이는 함께 케냐로 간 뒤 소식이 없다는 것.
 허스턴이 주장하기로는 신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 건 자신이라는 것. 진짜 중요한 건 호주라는 것. 1926년 1월 14일, 시계가 울렸을 때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 이들은 그날을 대비해 신상 안에 차곡차곡 힘을 축적해두고 있었다.
 “그러면 여기까지 왔으니 위대한 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게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앞으로 거대한 신상이 보였다. 사람의 뼈와 살로 세워진. 
 “충성을 맹세하면 신께서 임하셔서 모든 걸 증명해주실 걸세.”
 한평생 그렇게 역겨운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

 


 분명히 머리를 쐈다.
 그랬는데도 허스턴은 죽지 않았다. 그는 턱이 날아간 채 피거품과 함께 알아듣기도 어려운 말을 쏟아냈다. 프리스비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넣었을 때, 마지막으로 끄르륵거리며 웃었다.
 동시에 돔의 보라색 빛이 훅 꺼졌다. 주변이 온통 암흑에 잠겼다.
 그러다 주변이 서서히 다시 보이기 시작했는데, 빛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그때 느꼈던 것은 박쥐가 초음파를 쏴서 주변의 물체를 인식하는 것처럼 기묘하게 뒤틀린 시야였다.
 돔이 있던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갈라진 틈으로부터 무언가 쏟아졌다. 거대하고 너덜너덜한 날개가 허공을 잡아먹으며 천천히 펼쳐졌다. 날개에 달린 무수한 촉수가 춤추는 듯, 갈구하듯 꿈틀거렸다. 부글거리는 연기가 솟아나는 사이로 불타는 눈이 떠올랐다. 그 눈이 하늘로 솟구치면서, 완전한 어둠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드러났다.
 이후로는 아비규환이었다. 그 존재는 붙잡힌 사람들에게 촉수를 뻗었다. 근처에서 또 폭발이 있었는데도 그 괴물은 전혀 상처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자오는 다지가 업었고, 나는 프리스비를 붙잡은 채 빠져나왔다. 달려가다 문득 아까 본 광경이 뇌리를 스쳤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목조건물로 향했다. 냅다 2층으로 들어가 무식하게 우리를 열었다. 혼란을 틈타 거기 갇혔던 사람들을 내보내고 함께 도망쳤다.
 그곳의 육각형 타일, 복잡하게 꼬인 길들이 익숙했다. 그때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았다.

 

 

 

1925.9.6


 우리는 함께 빠져나온 사람들을 맡길 겸 근처 원주민 마을에 들렀다가 다시 돌아갔다. 하루가 지나자 다시 불이 켜져 있었고, 발굴 작업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듯했다.
 일단 목조건물로 돌아가 허스턴이 쓰던 3층을 뒤졌다. 어제 봤던 대로 침대, 탁자와 책상 등 생활공간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서류장에 고대어로 쓰인 서류가 들었고, 한쪽 벽에 항해용 크로노미터가 걸려 있었다. 전에 제이덕이 알려준 적 있는 꿈 보내기 구리 그릇도 있었다. 책상 위에는 타자기와 편지, 문서들이 놓여 있었다. 또 원뿔 모자처럼 생긴, 전선이 달린 금속 헬멧이 한구석에 걸려 있었다.
 책상 위에서 타자기로 친 600장 묶음 원고를 발견했는데, 대강 훑어보니 허스턴이 쓴 것이었다.

 

<현실의 신들>


 후에 천천히 읽어보니 거기에는 지하터널에서 발견한 고대의 기록, 핵연료로 움직이는 거대한 비행선을 타고 여행하는 문명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또 관련된 글과 장치들을 잘 포장해서 개비건과 펜휴에게 보낸 기록, 회룡도와 검은바람섬에 대한 언급, 1926년 1월 14일이라는 날짜와 그때 해야 하는 일도 자세히 적혀 있었다. 허스턴은 신상의 기능에 대해서도 적었는데, 정확히는 마력을 흡수하고 저장하는 용도라고 한다. 정신조종기라는 기계에 대한 설명과 그 사용 방법, 또 번개총이 휘파람 소리를 내는 괴물을 쫓아내고 죽일 수 있다는 사실, 허스턴이 니알라토텝의 은총으로 시간 너머에서 위대한 이스족을 끌고 온 일에 대해서도 쓰여있었다. 지식을 뽑아내려는 용도로 그를 지하에 가둬뒀다고 한다.

 또 구겨진 편지 한 장이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다.

 

에드워드 개비건의 편지


 금속 헬멧에는 전설이 연결되어 있고, 전선 끝에 삼각 패드가 달려 있었다. 허스턴은 이 물건을 잡혀 온 사람의 기억을 지우고 저항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리는 데 사용한 듯했다.



 그곳의 지하에서 허스턴이 가둬두었다는 위대한 이스족을 만났다. 전기가 흐르는 센서를 문간에 설치해서 출입이 어려운 감옥을 만들었는데, 사람을 가둬둘 곳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아래쪽에 공간이 있어 어찌어찌 안으로 기어들어 갈 수 있었다.
 안에 들어서니 불이 켜졌다. 좁은 방 안에 그가 있었다. 3m 정도 크기의 원통형 형체가 마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는 공중에 떠 있던 금속 집게 블록을 잡고는,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입으로 보이는 곳도 찾을 수 없었고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으나 머릿속에서 곧장 목소리가 울렸다.
 그 이스족의 이름은 카카카탁으로, 그는 나를 오랜 친구라고 불렀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었지만 그는 1차원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라며,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마치 나를 어르듯이 이야기했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인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면 자신도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오래전에 친구였고 서로 부탁을 하나씩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약속을 지키러 온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가둔 퓨즈를 꺼달라고 했다.

 우리는 카카카탁의 자유를 되찾아주었다. 그는 보답의 의미로 질문 하나를 해도 좋다고 말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사교도들을 막을 방법이 있을까요?”
 “세상이 멸망하는 건 이미 순리적으로 정해져 있는 일이네.”
 “그러면 그걸 미룰 방법이라도.”
 “내가 아는 미래는 그렇지만, 미래가 한 가지로 고정되어있는 건 아니야.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 이 말은, 당장 멸망을 막는다고 해서 세상이 온전히 안전해지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네. 사실이 그렇다 한들 해야 한다면 몇 가지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는 있겠지.”
 그는 차분하게 사교도들이 자리 잡은 몇 가지 장소와 방법,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이름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그의 감정 표현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 없기는 하지만 내가 알아들은 바가 옳다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자네가 지금 어느 시점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성공하기를 바라.”

 나 역시 그걸 바랐다.

 

 

 


1925.9.21


 달이 뜨는 날에 맞추어 동굴 입구 부근에 을 새겼다. 완성된 눈은 은은하게 빛이 났다. 이런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제대로 된 게 맞을까. 어지럼증 속에서 느리게 가늠하며 그 미약한 빛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전보다 더 어지러웠다. 오래 쓴 물건의 모서리가 닳듯 영혼의 일부분이 마모되는 기분이었다.
 더없이 선명하던 확신이 서서히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주저함, 망설임, 슬픔. 무력감. 그런 것들이 그림자처럼 들러붙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끝이 있을까? 있다면 나는 왜 더는 상상할 수가 없을까. 어째서 끝을 그릴 수가 없을까.

 

 

 

1925.9.27


 우리는 시드니에 도착했고 이번 여정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던 다지 교수와 작별했다. 또, 내내 고민에 잠겨 있던 자오가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짧고도 길었던 그의 가출이 바야흐로 끝난 것이었다.
 나는 맥이 탁 풀려서, 이렇게 바로 돌아간다고 얘기할 줄 알았으면 말리지 말 걸 그랬다고 농담을 걸었다. 기껏 허락해주자마자 돌아가겠다고 하다니요,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하고.
 원래 붙잡고 말리면 더 하고 싶은 법이라고요. 그것도 몰라요? 그는 불평하듯, 짐짓 쑥스러워하며 미간을 찡그렸지만 나는 아주 마음이 놓여서 그냥 웃기만 했다.
 중국에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고 그의 손은 그곳에서 고귀하게 쓰일 것이었다. 그거면 되는 이야기였다.
 무얼 보상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보상이 되지도 않을 테지만 짧은 며칠 동안 우리는 제법 잘 지냈다.
 그가 떠나기 전에 나는 묵혀둔 말을 꺼냈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 얘기인데, 혹여나 그때 했던 얘기는 마음에 두지 말라고, 나는 다 잊어버렸다고. 잘 지내라고.
 자오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머뭇거리다 툭 뱉었다.

 있잖아요… 형도 좋은 사람이에요.

 나는 그 말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자오가 돌아간 날에 프리스비와 술을 마셨다. 사겠다고 해서 산 것은 사실 핑계고 내가 마시고 싶었다.
 “이럴 거면 왜 그랬어요, 진짜? 솔직하지 못한 인간이네….” 프리스비는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듯 나를 봤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나는 손을 얼굴에 짚고 중얼댔다. “좀 더 좋게 얘기해줄 수 있었는데.”
 “어차피 똑같이 말했을 거잖아요.”
 “그래도 예전 같았으면…… 좀 더 잘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데 말해 뭐하냐고요.”
 “프리스비 씨가 다 맞아요….”
 “아, 그런 생각 좀 하지 말아요! 옆에 있는 사람이 더 보기 힘드니까.”
 “제가 너무 제 얘기를 많이 했나요?” 아무래도 그랬다. 프리스비에게는 지나치게 얘기를 털어놓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왜, 이제 제 얘기도 듣고 싶으세요?”
 “예….”
 나는 코를 박고 있던 잔에서 겨우 고개를 건져 프리스비를 쳐다보았다.
 그는 술잔을 가볍게 빙글 돌려 그 안에 소용돌이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저는, 그냥 습관이 그렇게 되어서…… 원래가 그렇게까지 정을 안 붙이려고 해요. 제가 일라이저 씨보다 더 무책임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프리스비 씨는 중국에는 다시 안 돌아가실 건가요?”
 “아. 그게요. 제가 사실 일라이저 씨한테 말 안 한 게 있는데. 중국에 가면 메이벨을 만나야 하잖아요. 근데 제가 사실 마지막 날에 메이벨이랑…… 잤어요.”
 나는 순간 멈칫했다. “메…이벨 씨랑요?”
 “어쩌다가 분위기가 그렇게 돼서~ 그래서 다시 만나면 좀 어색하지 않을까나~.”
 “아니 그때 저도 같이 있었는데 어떻게… 아. 아니요. 말하지 마세요….”
 프리스비가 킥킥 웃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자오한테 팔찌를 주셨길래. 다시 안 돌아가실 건가 했는데.”
 그 허티옥 팔찌는 제비 부인, 그러니까 린옌위가 프리스비에게 준 일종의 애정의 징표이자 부적이었다. 
 “글쎄. 린옌위 씨랑은 더 깊게 얽힐 일이 없지 않을까요.” 프리스비가 가볍게 대꾸했다.
 “프리스비 씨는… 정리가 빠르시네요.”
 “살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너무 깊으면 피곤하거든요.”
 나는 불쑥 물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왜 달랐죠?”
 잭슨 엘리어스 얘기였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캐묻진 않았을 텐데 그날은 나도 많이 취해 있었다. 프리스비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가벼운 웃음이 일순 사라졌다.
 “사람이 살다 보면 내 의지랑은 상관없이 마음에 깊게 남는 사람이 있잖아요? 잭슨이 저한텐 그런 사람이었어요. 잭슨이랑은 오래 같이 있고 싶었거든요.”
 “하필이면. 괜한 친구 때문에 고생이네요.”
 “예에. 그래서 끝을 봐야겠네요. 돌아갈 수가 없네, 이제.”
 별수가 없었다. 여기에는 잭슨 엘리어스와 그가 말아먹은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일라이저 씨는 다 끝나면 뭐 할 거예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건가요?” 프리스비가 물었다.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나는 느릿느릿 대답했다.
 글쎄, 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1925.9.27

 나와 프리스비는 케냐로 향했다. 화물용 증기선을 타고 수에즈 운하를 통했다. 날씨는 나쁘지 않았고 배는 부드러운 항적을 그렸다. 수면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나쁜 꿈을 꾸었다.
 새카만 어둠이 나를 감싸 안고 손짓했다.
 꿈에서 나는 피투성이가 된 제이덕을 하염없이 붙잡고 있거나, 쓰러진 프리스비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막으려 하거나, 이제는 몇 조각인지도 모를 자오를 다시 하나로 모으려고 했다. 나는 또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을 계속해서 겪었다.
 자, 지금까지 알던 세상을 잘 되짚어 보게. 뭐가 진실인지 잘 생각해보라고. 턱이 없는 허스턴이 그륵거리며 웃었다.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사실은 꿈속에서, 진실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그륵, 그르륵.
 닥쳐, 닥치라고… 나는 짓눌린 목소리를 겨우 뱉어낼 뿐 그 무엇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을 아는 괴물이 가까이에 있었고 나도 그의 이름을 알았다. 나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호주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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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황을 알아보기 위해 슬래터리 일가를 방문했다. 문을 두드리자 중년의 남자가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숨결에서 찌든 술 냄새가 풍겼고, 외지인에게 호의적인 기색은 아니었다. 우리는 학술 목적으로 부근에 들른 일행이라고 적당히 둘러댔다. 하룻밤만 묵게 해준다면 섭섭지 않게 보상하겠다고 설득해서 침실 하나를 얻었다.
 슬래터리 일가의 집은 방이라고는 세 칸이 전부인 좁은 오두막이었다. 여러모로 관리가 안 되어 어수선했다. 집에는 아들이 둘 있었다. 첫째는 열다섯 살 프랭크, 둘째는 열 살 제코였다. 제코는 손님이 오건 말건 주변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유독 프리스비에게는 꼭 달라붙었다.
 문득 거실 테이블에 놓인 그림이 눈에 띄었다. 삐뚤빼뚤 크레용으로 색을 입힌, 도마뱀 괴물을 그린 그림이었다. 팔다리와 날개가 달린 올챙이 비슷한 형체가 두 발로 서 있었다. 종이의 흰 공백 사이사이 세 개로 갈라진 눈이 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눈이었다.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이라고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어딘지 섬찟했다. 제코에게 묻자 꿈에서 본 형상을 그렸다고 했다. 어린 제코는 낡은 하모니카를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었는데, 그 물건에 과민하게 집착했다.
 슬래터리는 아주 늦은 시간까지 거실 테이블에 혼자 앉아 술을 마셨다. 합석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집안 사정까지 듣게 되었다. 그는 원래 근처에 있던 금맥을 캐어다 먹고 살았는데, 금맥이 마르고 지금은 돈 나올 구석이 전혀 없었다. 딩고 폭포에 출몰하는 빌 버클리의 유령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슬래터리가 사리 분별을 하기 힘들 만큼 취하자 프리스비가 빌 버클리의 이름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그 순간 슬래터리의 표정이 일변하더니 불콰한 안색으로 더듬더듬 문장도 안 되는 말을 내뱉었다. 그놈이 숨겨진 금을 내놓으라고 제미마를 때렸다는 둥, 그렇게 죽어도 싸다는 둥. 그러다 종국에는 자기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며 양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워낙 조각조각 파편화된 이야기들이어서 온전한 사정을 알기는 어려웠지만 슬래터리가 빌 버클리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졌다.
 아이들 방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 가보니 자라고 방에 둔 자오가 술을 훔쳐 여기 들른 모양이었다. 잠시라도 얌전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건지. 프랭크는 이미 술을 진탕 마시고 뻗었기에 제코와 대화를 나누었다. 제코가 가지고 있는 하모니카는 빌 버클리의 물건이 분명했다. 아이가 완강하게 하모니카를 내어주지 않으려고 들어서, 결국 내 손목시계를 주고 잠깐만 빌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물론 다시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
 다음날 날이 밝고 떠날 채비를 하는 우리에게 슬래터리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사막에서 벗어나는 길에 자기 자식들을 도시로 데려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런 벽지에서 먹고살 길이 막막하니 아이들에게나마 살길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사정을 들려달라고 했다.
 슬래터리의 이야기는 이렇다. 빌 버클리와 번 슬래터리는 친구이자 동업자였고, 둘은 15년 전 함께 금맥을 발견했다. 제미마는 사이좋게 지내던 원주민 여인으로 이따금 그들의 숙소를 방문하여 두 사람을 도와주었다. 일이 계속되면서 슬래터리와 빌 사이에 의심이 싹텄다. 그들은 서로 상대가 몰래 금을 빼돌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중 빌의 의심은 합당했다. 실제로 슬래터리는 캐낸 금의 일부를 가로채고 있었다. 이후 슬래터리와 제미마 사이에 아이가 들어서며 둘은 결혼하게 되었고, 빌과 슬래터리는 갈라섰다. 그러다 3년 전에 불쑥 빌 버클리가 찾아와서 빼돌린 금을 내놓으라며 제미마를 협박했다. 슬래터리가 도둑이 든 줄 알고 빌을 쐈는데, 눈먼 총알에 제미마가 맞고 말았다. 제미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슬래터리는 그 순간 눈이 돌아 살려달라고 비는 빌을 끌고 가서 태워 죽였다.
 우리는 슬래터리 가에 있던 빌 버클리의 소지품을 전부 가져와 그의 시체와 함께 묻어준 뒤 떠났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딩고 폭포에서 벗어나 한참 사막을 달리고 있는데 자오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가진 돈을 몽땅 털렸다는 것이다. 얼마 갖고 있지도 않았을 텐데 호들갑이 심해 물어보니,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의 집에서 훔친 돈을 조용히 혼자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 손버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자오는 아직도 뒷좌석에서 군소리하고 있다. 그 프랭크라는 소년도 어디에 내놓든 굶어 죽지는 않을 듯해 다행이다.

 

 


1925.8.1

 여전히 붉은 사막을 항해하고 있다. 울퉁불퉁한 흙이 쌓이고 다져진 바닥은 매우 거칠어서 지프를 타고 오래 달리다 보면 온몸이 다 쑤셨다. 간혹 흙먼지 냄새가 나는 바람을 뚫고 시선을 사로잡는 경이로운 풍경이 드러나면 기지개도 켤 겸 차를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이곳 불모지의 풍경은 도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원색적이고 강렬했지만 동시에 모든 일을 모래 밑에 파묻어놓고 말이 없는 성자처럼 고요했다. 태풍의 눈에 들어선 듯 막연한 정적의 순간 속에서 해묵은 긴장감만이 등 뒤로 그림자처럼 늘어졌다.
 오후 즈음엔가 반나절 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사막의 길 위로 인영이 하나 나타났다. 지친 모습의 원주민 여인이었는데, 사막 한가운데에서 만난 사람치고 제대로 된 짐이나 이동 수단 하나 없이 빈손이었다. 우리가 차의 속력을 줄이고 다가가자, 잔뜩 겁에 질려서 도망을 쳤다. 그 여인은 백인 남자를 무서워했다. 나는 차와 함께 좀 멀찍한 곳까지 떨어져서, 다른 일행이 그를 달래고 얘기를 나누는 동안 기다렸다.
 그 여인은 지하에 갇혀 살면서 강제로 땅을 파는 노역을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잡혀 온 사람들이 많았고, 모두가 감시하에 혹독한 노역에 시달렸다. 금광을 찾는 것도 아니면서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막연히 땅을 파라고 시켰다. 그는 그 끔찍한 장소에서 겨우 도망쳤다. 그런 일을 겪은 와중에 자동차가 뒤쫓아 오니 겁에 질릴 만도 했다.
 그는 며칠간 사막을 헤맨 탓에 자신이 도망쳐온 곳의 정확히 위치는 알지 못했다. 우리 일행의 목적지가 그가 갓 벗어난 사막 안쪽을 향하고 있다 보니, 함께 가자는 제안은 단칼에 거절당했다. 여분의 음식이며 모포 등 내줄 수 있는 걸 다 내주고 행운을 빌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맥퍼슨 산맥 사이를 지나 한참 나아가다 보니 비스듬한 바위 언덕 사이로 해가 걸쳤다. 야영 자리를 펴고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마른 장작을 모아다 불을 붙이자, 모닥불의 빛이 닿는 반경의 바깥은 온통 침침한 어둠에 잠겼다.
 나는 잠결에 뱀이 내 침낭 안에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극도로 차분해진다더니 정말이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불침번을 서던 프리스비를 불렀다. 프리스비와 브레이디가 도와준 덕택에, 군용 단도에 머리가 뚫린 뱀 사체를 두고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불길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데 마냥 기분 탓은 아닌듯했다.


 

1925.8.2

 저 멀리 동쪽 지평선에 걸친 아침 해가 흡사 반지에 박힌 진주알처럼 눈부셨다. 밤새 타오르던 모닥불은 재만 남아 곧 끊어질 실낱같은 연기 한 줄을 흘렸다. 아침 일찍 브레이디가 뱀의 머리에 꽂혀있던 단도를 묵묵히 뽑았다. 죽은 뱀은 피도 얼마 흘리지 않고 축 늘어져 있었다.
 말로와와 니빌 우물 사이의 길목에는 자동차 바퀴 자국이 흉터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다수의 차가 이 부근을 오간 듯했다. 그 역력한 흔적이 북쪽의 모래언덕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다지의 인도를 따라 캐닝 목축 도로를 벗어나 바퀴 자국들 위로 올랐다.
 모래언덕을 넘어가는데, 모래 사이에 묻혀 있던 돌을 잘못 밟았는지 차가 크게 덜컹하고 뛰었다. 그 뒤로 주행 방향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불안정했다. 내려서 살펴보니 자동차 바퀴 축에 문제가 생겼다. 트렁크에 있던 공구로 적당히 손을 봐두었지만 임시방편이었다. 사막을 벗어나면 제대로 정비를 맡겨야 했다.
 고생 끝에 언덕을 넘었다. 저 멀리 높다랗게 솟은 바위 부근에 방치된 텐트 골조 십여 개가 눈에 띄었다. 본디 멀끔한 텐트를 이루었을 천들은 삭고 찢어졌는지 골조에 겨우 발끝만 걸치고 나부꼈다. 폭발물 창고 건물과 목조건물이 그 사이에 우뚝했다. 골조 주변에는 짐이며 상자가 난잡하게 쌓여있었다. 버려진 광부들의 야영지 같았다. 우리는 부근을 찬찬히 탐색했다.

  • 상자 안에는 부품 조각, 튜브 같은 잡동사니뿐이었다.
  • 개중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텐트 내부에는 사람이 지낸 자취가 보였다. 유통기한이 남은 통조림과 먹다 남은 캔에, 기껏해야 어젯밤 아니면 오늘 아침에 자리를 뜬 듯했다.
  • 야영지 언저리에 주차된 낡은 포드 트럭은 흡사 거인이 밟은 것처럼 납작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날아온 돌에 맞은 것도 아니고 폐차된 것도 아닌데 기이하고 부자연스러웠다.
  • 텐트 뒤편 붉은 바위들 틈으로 어두운 얼룩이 보였다. 다가가 살펴보니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 흘렀고 그 아래 물을 받는 용도로 보이는 에나멜 대야가 놓여있었다. 다지는 이런 자연적인 샘물이 가능한지 의문을 품었다. 물은 맑고 시원했다.
  • 모래랑 자갈들 사이 드문드문 인간의 뼈처럼 생긴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대부분 형태가 온전했으나 부서진 것도 여기저기 보였다. 뼈에는 뾰족한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짐승이 씹은 흔적인 듯했다.
  • 텐트 주변에 거대한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무언가가 날아와서 앉았다가 다시 날아간 듯한 흔적인데, 발자국 형태로 보아 새는 아니었다. 발가락이 총 다섯 개 달렸고 발자국 하나 길이가 성인 남자 키만 했다. 
  • 폭발물 저장고 표시가 있는 창고 건물은 자물쇠가 뜯겨 있었다. 안에는 상자 두 개가 쌓여있었는데, 그 안에 모래에 반쯤 덮인 다이너마이트들이 들어있었다. 대략 40여 개 정도 되었다.
  • 목조건물은 갱도 입구였다. 승강기는 작동에 무리가 없었으나 갱도는 저 안쪽에서부터 무너져 내린 듯 토사에 파묻혀 있었다.

 

 승강기를 타고 올라오는데 밖에서 개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름 없는 언덕 쪽에서 딩고 네댓 마리가 우리를 지켜보듯 어슬렁거리다 그 너머에서 나는 휘파람 소리를 듣고는 휙 가버렸다.
 우리는 겁도 없이 딩고 발자국을 따라갔다. 가다 보니 개들 발자국 사이에 사람 신발 자국이 섞였다. 저 멀리 적갈색 개 여덟 마리가 보였다. 딩고 한 마리 한 마리가 거의 사람 만큼 컸고 개중에는 더 큰 녀석도 있었다. 그 사이에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오로지 옥스퍼드화 한 켤레만 단출하게 신은 남자가 서 있었다. 눈은 백내장이 낀 것처럼 뿌옇고 수염도 덥수룩해서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는 돌로 좁은 원을 만들어놓고는 그 안에 자신을 가둬놓았다. 우리를 보자마자 외쳤다. “이 사탄의 자식들아! 오지 마라! 개들이 너흴 찢어놓을 거다!”
 누가 봐도 광인이었지만 이런 불모의 허허벌판에 옷도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천천히 그를 달래며 담요며 입고 있던 외투를 건네주었다. 호의적인 제스처가 통한 것인지, 남자는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경계하듯 으르렁거리던 딩고들은 남자가 휘파람을 불자 뒤로 물러나 얌전해졌다.
 그의 이름은 제레미 그로건으로, 최근에 이 야영지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돌로 만든 원이 자기를 지켜줄 것이라며 절대 원 밖으로 나오려 들지 않았다. 우리를 보고 그 ‘미친놈들’이 온 줄 알았다면서, 사탄의 자식들이 와서 사람들을 때려죽였다는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그들이 못 달린 몽둥이를 들었냐고 묻자 어떻게 알았냐고 질겁하고, 우리를 의심하는 것처럼 빤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또 허공에 대고 자기 할 말을 중얼중얼 내뱉기도 했다.

 

제레미 그로건의 이야기

 

 존 카버북동쪽으로 남은 광부들을 데려간 것이 3년 전의 일이었다.
 누군가 이런 척박한 땅에서 3년을 홀로물론 개들과 함께하기는 하지만 살아남았다니 상상하기 힘들었다. 생활은 어떻게 유지하자고 묻자, 자기는 꿈에서 쉬고 먹어서 괜찮다고 했다. 꿈속에서 길손 여관이라는 곳에 자주 들린다며, 그곳 여관의 주인이 돌로 원을 만들어 몸을 지키는 법도 알려주었단다. 하지만 그는 자기 꿈속에서 있었던 일이며 나눴던 대화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했다. 묘한 이야기였다. 그는 꿈이라는 창구를 통해서 다른 세계나 존재와 접촉하는 게 아닐까? 호기심이 부푼 데다 마침 시간도 늦었기에 오늘은 그와 딩고들 곁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적갈색 황무지를 덮던 햇볕이 이울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모닥불을 켜고 일지를 정리하고도 시간이 조금 남아, 전에 랜돌프 운송 회사에서 가져온 기계를 만져보기로 했다. 사막의 풍경이 영감을 주는 건지 모호하게나마 방법이 떠올랐다. 심어진 씨앗이 기다리고 기다리다 알맞은 환경을 만나면 싹을 틔우듯이.

 

 

 


 일라이저 씨. 제레미 그 미친 노인네는 기억하시죠? 그 인간하고 머무는 중에, 당신이 그 단기 탐사 장비에서 뭘 봤는지 갑자기 쓰러졌어요. 깨어난 이후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여기는 다지 교수가 아는 원주민 숙영지에요. 어쩔 수 없이 맡기고 갑니다. 쉬고 계세요. 다 끝내고 돌아올게요. 프리스비.
 p.s. 일어나면 한 대 맞을 준비 해요.

 형, 정신 차리면 훔쳐 간 건 돌려줄게요. 자오.

 

 길이 엇갈릴 수 있으니 웬만하면 여기 있어. 볼일이 끝나면 케냐로 갈 예정.

 

 

 


 

 

1925.8.3

 프리스비 씨와 브레이디 씨는 밤을 꼬박 새운 듯했습니다. 건강에 좋지 않은데 말이죠. 걱정이 산더미 같은 상황이니 이해는 갑니다. 어젯밤 일행 중 한 분인 웨버 씨가 갑자기 쓰러진 뒤로 기억 상실 증세를 보였습니다. 아예 입을 열지 않고, 이쪽에서 먼저 말을 건네면 인상을 쓰거나 기묘한 표정을 짓고는 합니다. 저는 비록 정신병리 학문에는 문외한입니다만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마치 행동을 처음 배우는 어린애 같기도 하고 언어적, 문화적 사인이 다른 부족 간에 일어나는 소통의 삐걱거림 같기도 합니다. 그에게 접시를 들려주고 앞에서 먹는 시늉을 하자 저를 한참 쳐다보다가 제 행동을 따라 하는 식이었거든요. 아마도 일반적인 기억 상실의 형태는 아닐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래도 식사는 하셔서 다행이지요.
 이러니 어제보다 상태가 나아졌다고 판단하는 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관점일 겁니다. 자오 군은 여기 와서 죽을 건 각오했지만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다며 불평하더군요. 저는 솔직히 어리둥절해졌답니다. 아직 죽고 싶진 않은데 말이죠…… 무슨 무서운 농담을 하시는 걸까요, 다들? 든든한 사막 전문가 데이빗 다지―물론, 접니다!를 믿지 않는 걸까요? 아무튼, 소년이 겁을 먹은 듯해 사막에 들어온 사람들이 열사병에 걸려 이성을 잃거나 다치거나 하는 일은 언제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주었습니다.
 일행은 상의 끝에 웨버 씨를 근처 원주민 마을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한 달 반 정도 근방에 머무를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아예 처음도 아니거니와, 모두 저와는 안면이 있는 사이라서 흔쾌히 받아주었습니다. 물론 선금도 제대로 치렀지요. 웨버 씨가 가지고 있던 짐을 정리하면서, 일지와 펜은 그의 곁에 남겨두었습니다. 세 분이 돌아가며 빈 페이지에다 한 마디씩 적었고요. 그는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서 있었습니다.


 좌표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주변 풍경이 점차 사진과 비슷해졌습니다. 태곳적의 정취를 풍기는, 기이하게 풍화된 바위들이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일행은 바위들 사이로 차를 몰고 들어갔습니다.
 그때 저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는데, 순간 눈앞으로 뭔가가 휙 지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영원 같던 찰나가 지나자 차 유리창에 구멍이 뚫리더니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습니다. 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습니다. 머리 위쪽에서 다시 한번 총알이 스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차 어딘가에도 명중했는지 덜컹거렸고요. 운전석의 프리스비 씨가 액셀을 밟는데도 제대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요. 결국, 모두 차를 버리고 빠져나왔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차 뒤에 숨었습니다. 너머에서 빛이 반짝인 걸 보니 분명 저격수의 스코프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세 분은 그쪽으로 가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필요한 물건을 차에서 꺼내 주섬주섬 챙기며 다른 사람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긴 사막행 동안 정들었던 차가 완전히 고장 난 걸 보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릅니다. 자오 군이 저를 데리러 와서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짐작대로 저격수들이었다고 하더군요. 게릴라 무장 집단이 대체 사막 깊은 곳에서 뭘 하는 것일까요? 왜 호주에 그런 사람들이 있는 걸까요? 소년은 자기도 잘은 모르는데 아무튼 그 사람들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저는 아마도 어른들이 그에게는 복잡한 얘기를 생략하고 그렇게만 말해주었으리라고 짐작했습니다. (세상에, 안젤라. 아빠는 대체 무슨 일에 말려든 걸까?)
 다시 만난 프리스비 씨도 그리 시원하게 말씀해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는데. 고대도시 보고 싶으시죠?” “그렇죠.” “연구하다 보면 이상한 일 많이 보시잖아요?” “그……렇긴 하죠.” “한번 보시고 인상 깊은 것만 취사선택하세요. 상상 너머의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프리스비 씨는 앞으로는 더 위험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며 단단히 경고했습니다. 그런 곳에 이런 소년을 데려가는 게 너무 위험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자오 군은 열여덟이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안젤라 또래인 줄 알았기 때문에 조금 놀랐지요. “저희는 진짜 세계 멸망을 막으러 왔다니까요!” 열여덟 살 소년이 외쳤습니다.
 “어떻게 할래요, 지금이라도 돌아가실래요?” 프리스비 씨가 물었습니다.
 “이… 이걸 여기까지 와서 여쭤보시면 어떡합니까?!”
 “아니, 애초에 따라오실 때부터 경고했잖아요!” 사실 그땐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돌아갈 차도 없거니와 사막의 사 자도 모르는 사람들만 여기 두고 갈 수도 없었지요. 이게 만약에 정말 세계 멸망에 관련된 일이면 더더욱 가야 했지요.

 당시 제가 현장에 없었으므로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세 사람은 저격수들에게서 정보를 알아낸 듯했습니다. 그 뒤로 일행은 곧장 그들의 본거지로 향했습니다. 뒤따라 조금 걷자 사막 한가운데 뜬금없이 허름한 헛간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옆에는 차가 두 대 정도 주차 중이었고, 헛간 입구는 무장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들키지 않을만한 거리에서 기웃거리면서 헛간 주변의 기이한 바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위 밑 모래들은 인공적으로 파낸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 선 바위들은 하나하나 최소 만 년 이상 된 유물이었습니다. 그 표면에는 비록 세월과 바람에 마모되기는 했지만오목새김 그림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이 석조물들은 분명 문명의 표시였고 건축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습니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깨닫지 못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몹시 흥분해서 그곳에 새겨진 그림을 관찰하고 따라 그리며 기록을 남겼습니다. 정말이지 세기의 대발견을 목전에 둔 기분이었습니다. 당장 급한 일이 있어 기록에 원하는 만큼 시간을 쓸 수 없는 점만이 아쉬웠습니다.

 헛간 바깥쪽에는 광업 장비와 생필품, 기계 부품, 잡다한 무기 등이 쌓여있었습니다. 안쪽에는 발전기가 있고 계단을 따라 아래쪽으로 연결되어 있었지요. 일행이 헛간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람과 엎치락뒤치락했는데 그 과정에서 총이 발사되었습니다. 그러자 계단 아래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저희는 후다닥 뛰쳐나와서 숨었습니다. 간발의 차였습니다. 대여섯 정도의 무장인원이 두리번거리면서 저희를 찾더군요. 무장한 사람들로부터 급하게 도망치느라 사막으로 움직였는데 아뿔싸, 놀라서 허둥지둥한 나머지 방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한 시간 정도를 헤맸습니다. 정말 막막하고 면목이 없더군요. 제가 길을 잘 인도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그러다 대충 깎은 수염처럼 듬성듬성한 덤불이 있는 언덕을 넘었을 때 동굴이 보였습니다. 동굴 앞에 아까 헛간 앞에서 봤던 돌기둥 비슷한 바위들이 서 있었습니다. 전의 그 바위들과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진 듯했습니다. 이만치 떨어진 곳에도 건물이 존재했다는 건 정말로 이곳에 도시가 번성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제 추측은 확신의 색깔을 띠어갔습니다.
 문득 동굴 앞에서부터 이어진 2m 길이의 쓸린 자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커다란 자루로 쓸어내린 듯한 형태였습니다. 사막에 있을 법한 동물의 흔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의 흔적 같지도 않았습니다. 아주 거대한 새가 움직였다거나, 아니면 거대한 뱀이 기어갔거나, 황당한 추측 몇 가지만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확신할 수 있는 점 하나는, 만약 이 흔적에 호주의 대자연이 아닌 다른 원인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건 아주 거대한 존재이리라는 것입니다. 
 널찍한 동굴 입구에 서자 안에서 밖으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퀴퀴하고 묵은 공기가 느껴졌습니다. 순간 털이 쭈뼛 설 정도로 긴장이 되었습니다. 사막이 벌린 아가리 속의 새카만 어둠은 분명 제가 닿아본 적 없는 미지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지요. 그래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동굴 안에서 넘어지거나 길을 잃을 염려가 있으니 근처의 바위에 밧줄을 묶어놓고 늘어뜨린 뒤 움직였습니다. 내려가는 길은 몹시 경사가 가팔랐습니다.

 밑은 어둡고 서늘하고 고요했습니다. 헤드 랜턴을 켜고 둘러봤는데, 주변에 사람의 자취는 전혀 없었습니다. 먼지가 어찌나 두껍게 쌓였던지 그 위를 지나가면 발자국이 남으며 연기처럼 피어올랐습니다. 저희는 넓은 인공 건축물 내부로 들어온 듯했습니다. 돌을 자르고 짜 맞춰 만든 벽에 아치형 천장을 가진 건물이었습니다. 천장이 높고 주변이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드러난 모서리로 궁륭 형태를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벽을 이루는 돌에는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닥은 팔각형 블록이 깔린 평평한 길이었고, 복도는 일직선으로 쭉 이어졌습니다. 모든 광경이 경이로웠습니다.
 나아가다 보니 복도에 뚫린 정사각형의 거대한 구멍과 맞닥뜨려 더는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구멍의 너비는 4m 정도 되었습니다. 한때는 양옆에 지나갈 수 있는 다리가 있었던 듯한데 세월에 무너진 것인지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봐도 심연의 깊이를 알기 어려웠습니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저희가 있는 방향에 구멍과 비슷한 크기의 크고 얇은 판이 있었습니다. 경첩과 걸쇠가 매우 특이하게 생겼는데, 이 판이 구멍 덮개 겸 다리 역할을 하는듯했습니다. 다 함께 힘을 합쳐 판을 들어 올려 보려고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쩔까 궁리하다가 밧줄을 이용해서 한 명씩 차분하게 건너갔습니다.
 첫 번째 위기가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림길과 맞닥뜨렸습니다. 오른쪽 길은 어두컴컴하고 고요했습니다. 왼쪽 길은 저 멀리 희미한 빛이 보였고 어렴풋한 소리가 들렸는데, 공간이 워낙 넓어 소리의 정체를 분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저희는 왼쪽으로 나아갔습니다. 불빛의 정체는 인간의 발명품인 전구였습니다. 거기까지 걸어오니 자연스럽게 소리의 정체도 밝혀졌는데, 바로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음이었습니다. 이 길은 바닥에 쌓인 먼지도 적었고 사람이 다닌 자취가 남아 있었습니다. 복도 끝에서 또 갈림길이 나타나 망설이는데, 저 멀리서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희는 다급히 빛이 들지 않는 곳에 몸을 숨겼습니다.
 “입구 쪽에 누가 당했대. 그 녀석들 아냐?” “그럴지도.” “허스턴 님이 잡으라고 명령을 내리셨던걸.” “그 녀석들이 잡아주지 않을까?”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일행은 서로 무언의 눈짓을 나누더니 두 사람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기절시켰습니다. 무슨 특공 임무에라도 참여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순찰하던 친구 중 하나가 총을 발사하는 바람에 소리가 크게 울렸습니다. 또 누가 오는 건 아닌가 싶어 모두 바짝 긴장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멀리서, 정확히 방향은 알기 어려웠지만, 가냘픈 휘파람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희는 기절한 친구들을 잘 묶어서 숨겨둔 다음 도망치듯 갈림길 왼쪽으로 향했습니다.

 쭉 가다 보니 방의 입구가 보였습니다. 문은 없었고, 안쪽에서부터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웅장한 팔각형 공간이 드러났습니다. 너비도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천장은 까마득해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바닥의 육각형 타일은 정교하게 짜 맞춰져 있었고 어떤 원리인지 알 수 없지만 타일 아래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토록 드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빛은 대체 어떤 문명의 역작이며, 이들은 경이로움만을 남긴 채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요?
 어찌나 넓었던지 그 방을 가로지르는 데에만 십 분이 넘게 걸렸습니다. 반대쪽 입구로 나가자 다시 전구가 붙은 복도가 나왔습니다. 저희는 찾아오는 갈림길마다 꾸준히 왼쪽을 선택했습니다.
 그 너머에 사람 손길이 닿은 생활공간이 있었습니다. 방은 네 칸이었고 각각 사람이 만든 가림막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서 빈방을 둘러보니, 사감 없는 남자 기숙사 같은 풍경이 드러났습니다. 침낭이며 이불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벽에는 문란한 포스터가 붙어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곰팡이 핀 과일 껍질,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에 뼈까지 굴러다녔습니다. 엄연한 고대 유물의 일부에 이렇게 존중 없는 행패를 부리다니 충격이었습니다. 어지러운 바닥에서 구겨진 메모를 하나 발견해서 프리스비 씨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지하에서 찾은 쪽지

 

 이곳 복도의 발전기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계단 쪽에서 빛이 들어왔고 꾸준히 사람이 왕래했습니다. 더 다가갔다가는 들킬 위험이 커 보였기에, 저희는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가 반대쪽으로 향했습니다.

 이쪽은 길이 험준했습니다. 원래는 평범한 복도였다가 세월 때문에 무너져 없던 복도와 경사로가 생긴 듯했습니다. 길 한복판에 무너진 천장 때문에 생긴 돌무더기 언덕이 우뚝했습니다. 저희는 안전에 유의하며 천천히 언덕을 넘어갔습니다.
 언덕 너머로는 복도가 여러 갈래로 이어졌고, 보이는 방도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더러는 방 입구가 무너져 진입이 어려웠고 더러는 잘 보전되어 있었습니다. 시험 삼아 멀쩡한 곳에 들어가 살펴보았습니다. 이 방도 역시나 일종의 생활공간으로 보였는데 특이한 점은, 현생 인류에게 맞춘 공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공간 자체도 확연히 넓었고 가구는 하나같이 길쭉하고 기이하게 생겼습니다. 가구라는 명칭도 사실 추측입니다. 가구처럼 보이는 물건들이긴 했으나 우리가 쓰는 가구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데다 용도를 짐작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문고리, 손잡이로 추정되는 부분도 기묘한 생김을 하고 있어서 인간의 손으로 잡기에는 불편해 보였습니다. 전체적으로 키가 현생 인류보다 1.5~2배 정도는 큰, 대략 3m 정도 되는 생물에게 맞춰서 지어진 공간이었습니다.
 방 여기저기에 책장, 장식, 각종 미술품이 놓여있었습니다. 이런 유물들은 주민들의 생활 양식을 추측할만한 좋은 증거물이 되어주기에 문화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미술품에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는데 눈여겨볼 만한 특정한 형상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아마 주민들 자신, 혹은 그들이 모시는 신을 그린 것으로 보였습니다. 원통형 몸체에 위쪽에는 촉수처럼 신축하는 기관이 달린 존재였습니다. 머리처럼 달린 촉수에 입 대신 꽃을 닮은 섭식 기관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곳 어디를 가도 랜턴 빛이 공간의 끝까지 닿지를 않았습니다. 그만큼 이곳이 넓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공간 너머에 무엇이 있고 이 세계가 어디까지 확장될지 짐작도 가지 않았습니다. 경이로운 거대도시가 사막 밑바닥에 존재했습니다. 학계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물론 준비가 안 되어도 받아들여야겠지만! 발견이 언제 사람들을 기다려준답니까!


 이런저런 생각에 희희낙락하며 주변을 훑다 보니 문서로 추측되는 물건들도 찾았습니다. 한 장짜리도 있었고 여러 장을 엮어 제본한 물건도 있었는데, 비록 크기는 달랐지만 어딜 어떻게 보건 그 형태는 분명 이었습니다. 섬유질 종이는 긴 세월을 기적적으로 견디고 있었으나 조심스럽게 취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3m짜리 존재의 물건이라 일반적인 서적을 만질 때보다는 팔 힘이 더 필요했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고서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극도로 섬세하게 손끝의 움직임을 조율했습니다. 이런 순간마다 작은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마음이 경건해지곤 하지요.
 저는 이들 문명의 문자 체계를 살펴볼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안에 적힌 것은 역시 그 기원을 알기 힘든 문양 형태의 상형문자로, 자체적인 문자 체계가 존재하는 건 확실했으나 지금의 제가 가진 제반 지식으로는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쓰인 건지도 제대로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계속 들여다보고 싶더군요. 저는 꿈 꾸는 듯한 기분으로 그곳에 새겨진 기이한 문자들을 눈으로 훑었습니다. 랜턴 불빛이 비칠 때마다 말라붙은 글자가 기묘한 색으로 번들거렸고 종이가 한 장씩 팔랑팔랑 넘어갔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멈췄습니다. 더 넘길 낱장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맨 끝 페이지에서, 저는 이 책에서 제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단 한 줄, 서명, 같은 안료에 같은 필체로 이어져 쓰인 것은 로마자 알파벳이었습니다.

 

 일라이저 웨버.

 

 저는 순간 소중한 유물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중국편 요약 / 호주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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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요약.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면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게 기적에 가깝다. 내가 조금만 더 종교적인 인간이었다면 소명 의식마저 느꼈을 것이다. 몇 가지 주요한 사건들 위주로 간략하게 기록해둔다.
 먼저 다크 미스트리스 호에 몰래 잠입했다가, 배가 그대로 출발해버린 황당한 사건이 있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우리는 회룡도에 도착해 간단한 정찰을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하얀 뱀, A.P. 혹은 오브리 펜휴라고 불리는 칼라일 탐사대의 일원을 만났다. 그는 기묘하게 젊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불쾌한 주술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그를 물리쳤다. 아니, 물리쳤다고 생각했다.
 회룡도에서 탈출해 돌아오는 길에 배가 폭풍우에 뒤집혔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당시에 가지고 있던 대다수의 메모와 기록이 소실되었다. 카메라도 새로 구해야만 했다.
 그 뒤 간단한 정비의 시간을 가지던 중, 다가올 새 중국의 투사들(새중국)이라는 중국 내 게릴라 단체에 납치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들은 상하이의 부패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였다. 새중국은 사교도들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로 회룡도를 노리고 있었고, 우리는 마침 그곳에 다녀온 참이었다. 어렵지 않게 협력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곳에서 재클린 브레이디를 만났다. 그로부터 칼라일 탐사대에게 있었던 일과, 로저 칼라일의 행방을 들을 수 있었다.

 

012
브레이디의 진술

 

 호팡의 집에 브레이디의 연인인 췌이메이링이 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그를 도와 호팡의 집에 잠입했다. 새중국 소속의 어린애, 아니 젊은이 하나가(이름은 자오웨이라고 한다) 잭 브레이디를 지나치게 동경하는 데다 철이 없었는데, 이런 경향의 청년들이 흔히 저지르는 비행을 그도 저질렀다. 그러니까 몰래 숨어서 우리를 따라왔다. 중독되어 목숨을 잃을 뻔도 했고 누군가는 기묘한 주술이 걸린 끔찍한 방에 영영 갇힐 뻔하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해냈다. 췌이메이링은 고문으로 쇠약해진 상태긴 해도 구출에 성공했고, 다들 겨우 목숨은 붙인 채 살아 돌아왔다. 
 이후 호팡의 계획을 막기 위해 새중국 무리와 함께 회룡도에 잠입했다. 회룡도의 어두운 동굴은 심해에서 올라온 끔찍한 존재들과 그들이 부리는 질퍽한 액체 괴물들, 의식의 날을 맞은 사교도들로 붐볐다. 그들은 잡혀 있던 가엾은 사람들을 학대하면서 의식을 치렀다. 그곳에서 나는 직접 강림한 비대한 여인, 끔찍한 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이 촉수를 뻗어 펜휴의 머리를 쓰다듬자 죽은 몸이 움직였다. 되살아난 그의 동공은 저 너머의 숨겨진 비밀들을 담은 듯 어두웠다. 제사장이 돌아오자 사람들은 환호하면서 그들의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괴물은 자기 신도들을 게걸스럽게 잡아먹었다. 우리는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괴물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우리는 새중국 젊은이들과 함께 남은 사교도들을 상대했다. 적지 않은 희생이 뒤따랐다. 오브리 펜휴가 지옥에서 기어 나오는 일이 다시 없기를.

 

0123
사교도들의 기록

 

 우리가 호팡의 집에서 고생할 무렵 메이벨과 무셴의 현군칠장비경 연구가 진척을 보여, ‘눈’을 새기는 주문을 알아냈다.

 

눈을 새기는 법

 

 우리는 만월이 뜨는 날에 회룡도로 되돌아갔다. 우리가 겪었던 그 끔찍한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숨겨진 장소에 봉인의 문양을 새겼다. 이 세상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는데, 그날 이후로 무언가 중요한 것, 내 안의 작은 일부를 영원히 잃어버린 기분이다.
 메이벨은 중국에 남아 자료를 연구하면서 도움을 주기로 했다. 프리스비와 잭 브레이디는 함께 호주로 간다. 고작 몇 달을 함께했을 뿐인데 이제는 없었던 시절이 기억이 나지 않는, 슬픔이 맨 마지막으로 나를 뒤쫓아왔다. 꿈속의 불길한 목소리와 함께. 

 


 낭패다.
 뭐가 낭패냐고 하면…… 그러니까. 초대한 적 없는 진짜 마지막 손님. 새파란 어린애. 자기가 지금 뭘 하는 건지, 어디에 끼어든 건지도 모르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7월 4일에 상하이를 떠나 호주행 배에 올랐다. 그리고. 자오가 배에 탔다. 몰래. 이런 식의 사고를 예상했어야 하는데. 아니, 그런가? 이런 걸 어떻게 예상하지? 여권은 재클린이 구해준 모양이었다. 아무리 대책이 없는 막무가내라도 이런 일은 사전에 상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쏘아붙여도 전혀 듣는 눈치가 아니다. 자오 본인을 붙잡고 어른스럽게 설득해보려 했으나, 처음부터 듣는 시늉도 안 하더니 이젠 내 코빼기만 보여도 도망을 친다. 말이라도 한마디 걸려면 눈에 불을 켜고 온 배를 뒤져야 한다. 프리스비 씨마저 말리지 않는다.
 그래. 그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이런 걸 허락할 수는 없다. 그는 회룡도에서 있었던 끔찍한 일도 보지 못했다. 그런 건 영영 보지 않고 사는 게 좋다. 대체 이 배에 탄 사람들은 양식이라는 게 있는 건가? 어른이 되어서 하나같이— (쓰다 말고 줄이 죽죽 그어진 부분)
 ……이런 문제에 쓸 시간과 정신적 연료가 더는 없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내가 붙잡고 늘어져봤자 기름을 붓는 꼴이 될 것이다. 일단은 보류. 적당한 순간에 잘 설득해서 돌려보낼 것.

 

 

 

1925.7.22

 두통과 함께 시작해서였는지, 그게 무슨 징조라도 됐던 건지 이번의 항해는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 파도가 거칠었고 바람이 궂었다. 예상보다 시간을 더 써가며 호주에 도착했다. 적도를 지나온 이곳은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호주에서 확인할 일들의 목록을 몇 가지 정리해둔다.

  •  앤서니 콜즈 교수(시드니 캠퍼다운) 방문, 그에게 들은 ‘박쥐들의 아버지’ 기록.
  • 헨슨 공업 지하에서 발견한 운송장에 적힌 정보: 호주 랜돌프 운송회사 허스턴 앞 독사들의 아버지 황금상/고대 기계 부품/기술 도면과 청사진을 보낸 기록.
  • 펜휴 제단 지하에서 발견한 정보: ‘포트 다윈, 노던 준주, 호주’ 주소. 날개에 사슴 머리가 달린 스텐실에 ‘랜돌프 씨 직접 수령 요망’이라고 쓰여 있었던, 비만한 용의 조각상.
  • 미국: 프나코티카 필사본이 보여준 사막 위 고대도시의 환상. 관찰하는 정신들을 부르는 방법.
  • 중국: 호팡의 사무실에서 발견한, 호주 칸캇지리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에게 광업 장비를 보낸 기록.

 이렇게 정리를 마치고 나니, 새삼 내게도 정보가 하나의 무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이들 사교에 대해 아는 것이 이제는 적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 소유물, 장기 말들, 신의 이름까지. 동물들이 다른 무엇보다 자기 천적을 가장 잘 알듯이 그렇게 나는 매 순간 그들에게 골몰했다. 그들의 계획을 훼방 놓을 대책을 강구하고, 가진 지식을 되새김질하며 이따금 그 광기의 끄트머리라도 읽어보기 위해서 혹은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끔찍한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기도 한다.
 다행스럽게도 미움에는 이해가 필요 없다.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의 항구 도시 프리맨틀.
 입국 과정에서 프리스비가 세관에서 총을 압수당했다. 호주의 차별적인 정책 때문이었다. 남이 알아주길 바라서 하는 일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훼방이 놓일 때마다 지친다. 무기를 추가로 갖춰 둘 필요가 있다.
 배를 타고 퍼스로 곧장 이동했다. 도착한 직후 제이덕에게 받은 전화번호로 콜즈 교수에게 연락했다. 그의 대리인 데이빗 다지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콜즈 교수는 아직 미국에 있었다. 10월에나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으니, 다지에게 대신 연구 자료를 살펴볼 수 있겠느냐고 요청했다.
 이후 배편으로 시드니에 닿았다. 고층 건물들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기묘한 불균형의 그림을 그리는, 한창 개발 중인 도시의 모습이 만연했다. 콜즈 교수의 집은 시드니 대학 근처의 주거지 캠퍼다운에 있었다. 다소 헐렁한 인상의 다지는 스스로 콜즈 교수의 부교수라고 소개했다. 
 박쥐들의 아버지에 대한 자료는 전화로 들었던 내용과 일치했다. 눈여겨 볼만한 유리 건판 사진이 네 장 있었는데, 거대한 바위 옆에서 땀을 흘리는 남자들의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남자들 옆의 바위는 심하게 풍화된 상태였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광업 엔지니어 아서 맥워로, 콜즈 교수는 이것을 맥워의 재산 관리인 로버트 매킨지에게 받았다. 다음은 맥워가 직접 쓴 일기다.

 

01
 아서 맥워의 일기 (1921년)

 

 다지가 옆에서 끊임없이 호기심을 보여서 결국에는 콜즈 교수의 자료를 함께 보았다. 그는 보는 데서 끝낼 생각이 없었는지, 자신이 포트 헤들랜드에 사는 매킨지를 직접 소개해주겠다며 열성을 보였다. 우리는 그 도움을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한시가 급했다. 다음날로 출발 날짜를 잡고, 그에게 감사 인사를 표한 뒤 나왔다.
 더 이동하기 전에 프리스비의 총을 구해두기 위해 함께 외출했다. 호주로 오기 전 할 수 있는 만큼 현금화해둔 돈이 있어서, 사는 김에 모자라지 않을 만큼 무기를 채웠다.
 출발하기 전, 시드니에서 조사한 자료들을 정리해둔다.


 셰익스피어 플레이스 시드니 미술관.
 검게 부풀어 죽어가는 원주민 그림, 박쥐 숭배 종교의 인신 공양 의식을 형상화한 원주민 그림. 이들은 박쥐들의 아버지라는 존재를 숭배했다.

 시드니 대학 주립 도서관.
 1. 호주 원주민들과 관련된 책: 박쥐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박쥐를 닮은 날개에 세 개로 갈라진 붉은 눈을 가진 거대한 존재의 이야기가 쓰여 있다.
 2. 지하 도시의 전설과 노래를 서술한 옛 탐험가들의 일지: 고대 종족, 신들이 지하 도시를 지었다. 그 신이 바람과 싸웠다는 전설이 있다. 신들은 바람에 패배했고 그 때문에 멸망했다.
 익숙한 이야기였다. 그 도시가 아직도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박물관
 호주 원주민 관:
 박쥐들의 아버지 조각상. 붉은색과 갈색의 진흙을 섞어 강조했다. 안면 조각상 위에 부조로 새겼다.
 폴리네시아 관:
 특이한 부조로 덮인 현무암 덩어리 세 개. 부조들 속에 전에 본 적 있는 거대한 용의 형상이 있다. 이 물건은 신이 잠들어있는 가라앉은 도시에서 왔다고 한다.

 

 

 

 1925.7.29

 시드니에서 포트 해들랜드로 이동했다. 대략 나흘 정도 걸렸다.
 포트 헤들랜드는 금맥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있어 금을 찾으러 온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그중에서도 칸캇지리가 제일 유명했다. 이곳에는 1921년에 건설된 비행장이 있어서, 퍼스와 연결된 비행선이 다녔다. 근처 주점에서 듣기로, 랜돌프 운송회사 지점도 한 곳 있었다.

 먼저 다지와 함께 매킨지를 만나러 갔다.
 그로부터 몇 가지 얘기를 들었다. 맥워는 그 뒤로 건강이 안 좋아져서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가 멀쩡히 살아있을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매킨지는 원래 맥워의 자료를 더 갖고 있었다. 그러나 2~3년 전 한 미국인이 찾아와서는, 그 기록을 ‘빌려 가’ 돌려주지 않았다. 사진 원판과 더불어 맥워가 추가로 조사해둔 자료들이 전부 사라졌다. 도둑의 이름은 로버트 휴스턴이었다. 브레이디는 매킨지에게 칼라일 탐사대의 일원 로버트 허스턴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매킨지는 사진을 가져간 인물이 그가 맞다고 확언했다.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이 사진 속의 장소는 분명 사교도들과 관련이 있었다. 우리는 맥워 일행이 사진을 찍었다는 그 장소, 사막을 향해 가보기로 결정했다. 경험이 많은 매킨지가 사막행 준비를 도와주기로 했다. 다지도 꾸준히 거들었다. 이 사람, 계속 따라올 생각인 걸까?


 밤에는 랜돌프 운송회사의 지점에 잠입해 살폈다.
 서랍 속 장부는 랜돌프 운송회사가 전 세계 각지의 사교도 지점에 화물을 옮긴 기록이었다. 이 장부에 따르면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에게 보내는 물품들이 배편으로 포트 헤들랜드에 온 다음 기차로 운송되었다. 케냐의 아자 싱이 호팡에게 전보를 몇 번 보낸 내역도 존재했다. 그리고 영국의 펜휴에게 갈 화물이 두 개였다. 하나는 조각품이고 하나는 취급 주의 물품으로, 사슴뿔 모양 기호가 그려진 상자에 각각 담겨 있었다.
 상자 하나는 회사 건물 바깥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기하학적 흰색 선에 덮인 나무 조각상이 들었다. 조각상은 인간형 대머리에 둥글고 긴 수염이 촉수처럼 나 있고, 손발 끝에 갈퀴가 달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사진을 남겼다.
 또 다른 상자는 1m가 안 되는 크기였다. 안에는 기계장치와 함께, 로버트 허스턴이 개비건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편지에 따르면 이것은 ‘이스 족이 사용하던 단기 탐사 장치’였다. 60cm 정도의 크기로, 막대에 바퀴가 달리고 그 외 거울과 망원경 등이 부착되어 있었다. 별다른 동력이 필요해 보이진 않았고, 바퀴를 돌려서 작동시키고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식으로 쓰는 듯했다. 무엇을 탐사하는 장치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해당 지점에서 우리가 들고나온 물건은 이 상자뿐이다.

 

 그날은 숙소로 돌아와서 잠시 여유를 부렸다. 줄곧 혹독한 일정이었던 데다가 매번 뭔가를 하지 말라고만 한 것 같아서, 자오가 술자리에 끼겠다는 걸 굳이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한 일이라고는 프리스비에게 놀림 받다가 취해 잠드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자오가 깨어있을 때는 왁자지껄했는데 그가 잠들자마자 급작스럽게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그때는 다들 피곤할 일이 많았으니 조금만 마시고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 오랜 여행 때문에 지쳐서였을 것이다. 있었던 일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평소보다 술이 오른 탓이거나. 그래도 아직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됐는데. 제대로 해결된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잔 속의 미약하게 흔들리는 표면을 바라보자 걷잡을 수 없는 회의감이 밀려왔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지금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안 해도 될 불평, 투정, 남의 등 위에 짐을 지우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프리스비는 너무 익숙해지지 말라고 했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그가 하듯 그렇게 가벼운 목소리로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만큼의 잠들지 못하는 밤이 필요한지.
 지금도 눈을 질끈 감으면 암막 뒤로 피투성이의 이미지들이 터진 포탄 파편처럼 스친다. 런던의 습한 밤, 도살장의 돼지처럼 목에서 피를 흘리던 사람들의 얼굴은 곧 잭슨 엘리어스의 찢어진 이마와 움직이는 시체와 두들겨 맞아 죽어가는 산제물들 그리고, 그리고, 노라의, 다 괜찮다고 말하던 목소리로 뒤바뀐다.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실재가 되어 엉킨다. 폭력이 얼마나 끔찍하게 인간의 영혼을 찢어놓는지,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안 것은 그저 문장이었을 뿐이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벌려 안을 다 내보이고 나서 나는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도 꺼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눈가를 문질렀다. 우리에게 달리 무슨 수가 있을까요. 너무 오래 들여다본 폭력에 닳아 가는 것은 나뿐이 아니므로 당신에게 위로를 받아서는 안 되는데. 누군가 내 앞에서 자기는 날 때부터 상처가 아닌 흉터만 안고 태어났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구는 건 형 한 사람으로 충분한데.
 그러나 나는 너무나 약해지고 말았다.
 “그 애들이 보고 싶어요.” 찰랑이던 잔이 넘치듯 턱, 말이 넘쳤다. 그 애들이 보고 싶다. 노라가 웃는 것을 한 번만 더 보고 싶다. 언젠가 내게 다시 그런 기회가 올까. 오래 고여 있던 바람을 입 밖으로 꺼내자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내 몸을 빠져나와 어디로든 도망치려다가 사람의 발목을 묶는 세상의 힘에 이끌려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툭. 투둑. 나는 느리게 깨달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울고 싶었다.


 “돌아간 친구는 잘 있죠?” 프리스비가 물었다. 나는 항구에서 본 제이덕의 마지막 모습이 아닌, 지난겨울 남부에 있는 그의 집에 들렀을 때 자기 집의 벽난로 앞에서 쉬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
 “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에 있는 친구도 지금 잘 쉬고 있을 거예요. 다 끝나고 만나죠.”
 “지금은 그것밖에는 바라는 게 없어요.” 그해 겨울에는 노라도 거기 있었다. 나는 사진처럼 남은 기억 속 한 장면을 꼭꼭 씹어서 삼켰다.
 프리스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나 봐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
 “내가 안 미더울 순 있는데 그래도 많이 힘들면 얘기해요. 적어도 놀리진 않을 테니까.” 나는 머뭇거리다 감사 인사를 했다. 이 말 한마디에 담긴 것보다 더 표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걱정되면 그 친구한테 연락 한 번 해보는 건 어때요?”
 “제가 연락하면 자연스럽게 괴로운 일들이 다시 떠오를까 해서요. 모든 게 끝나면……. 다 잘 끝났다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잘 끝날 거에요.”
 “그래야죠. 그러려고 하는 거니까.”
 “다시 말하지만, 힘들면 너무 참지 말아요. 나도 같이 일하려고 온 거잖아요.”
 “괜한 부담을 주기 싫어서…….”
 “그래 보여요. 무슨 생각하는 건진 알겠는데. 너무 스스로 몰아붙이지 말라구요. 힘들잖아요, 당신도 그렇고 다들 사람인데. 우리가 그 자식들처럼 미쳐있는 것도 아니고. 자오 군한테는 말 못하더라도…… 아, 당연히 못 하겠지만.”
 “자오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어른들이 서슴없이 저지르는 어두운 일에 아주 익숙한 그 젊은이에게서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겹쳐본다. 그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는 내가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 돌려보내고 싶어요?”
 나는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까?
 브레이디는 우리 대화를 툭 무지르고 들어왔다. 
 “애한테는 무슨 일 없게 할 테니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그가 뭐든 쉬운 일처럼 말하는 사람인 걸 알고 있는데도 그 말을 들으니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들었죠? 여기 어른이 셋이나 있는데 애 하나 못 지키겠어요. 프리스비는 곁에서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왼손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본다. 이번엔 다르겠지. 그런 희망을 품는 건 어리석은 짓일까.
 “애는 돌려보내야죠.”
 “프리스비 씨도…….”
 “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너는,”
 브레이디가 말했다.
 “그게 문제야. 네가 여기 있는 모두의 보호자인 양 굴지 말라고.”
 내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었나? 그의 말에 잠깐 멍해졌다.
 그랬나. 그간 노라와 제이덕과 오래 함께하면서 그런 역할에 익숙해진 건지도 몰랐다. 그 둘은, 정말로 어렸다. 돌아갈 곳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애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했다. 내 실패와는 상관없이 몸에 익은 습관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새삼스레 깨닫고 나니 현실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였는데도, 나는.
 “자오는 걱정할 만한데요. 어휴, 이 사람 덩치를 보세요~.” 프리스비가 넉살을 피우면서 브레이디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도 딱히 떨쳐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도, 이렇게 해 먹고 산 세월이 얼만데.” 어조는 장난스러웠으나 그렇게 말하는 눈빛은 자기 방식대로 단단했다.
 “팔 하나 없는 사람한테 그런 염려 기껍게 받을 만큼 약한 사람 없어. 너는 네 걱정이나 해.”
 이어진 브레이디의 심드렁한 목소리와 그 날것의 내용에, 결국에는 나도 모르게 툭 웃음이 터졌다.
 “습관이 되어서 그런가 봅니다. 쉽지 않네요.”
 문득 이렇게 목에 걸리는 느낌 없이 웃어본 게 몹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25.7.30

 자오는 아침부터 숙취에 시달렸다. 매킨지와는 역에서 헤어졌고, 우리는 8시간 정도 걸려서 화물용 열차를 타고 칸캇지리로 갔다. 헤어지는 길에 매킨지는 사막 진입 전 마지막 물자를 충당할만한 곳으로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의 가게를 추천했다.
 화물용 열차는 하루에 한 번 칸캇지리와 오간다. 우리 말고도 몇 명의 승객들이 있었다. 나는 낯선 이들의 힐끔거리는 눈빛에 지나치게 예민해져서, 구석 자리에서 잠시 쉬었다. 그러는 동안 프리스비와 자오가 이것저것 알아 왔다.
 야말 족 사람 몇이 사막에 얽힌 얘기를 일러주었다고 한다. 정리해두자면:

  • 이 사막에는 고대도시가 있는데, 고대도시에 출입하는 입구는 모래에 묻혔다가 드러났다가 한다. 그 안에 사악한 것들이 살고 있다.
  • 부다이라는 늙은 거인이 그 아래서 머리에 팔을 묻고 코를 골면서 잔다. 언젠가 부다이가 깨어나서 세상을 먹어 치울 거라는 전설이 있다.
  • 사막에 가면 독사가 많으니 주의할 것.
  • 자기 마을의 낙타 상단 주인이 ‘박쥐 신’을 본 적 있는데, 자기가 본 것 중에 가장 끔찍한 괴물이었다

 그런 얘기를 전해 듣고 있자니 저 멀리 탁 트인 사막의 하늘 너머로 거대한 새 세 마리가 날아갔다. 자오가 부탁해서 몇 장을 사진으로 남겼다.

 

칸캇지리에 도착한 후, 매킨지가 알려준 대로 소형 트럭을 구하고 물자를 조달했다.
 수소문할 겸 술집에 들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새로 발견한 노천 금광 얘기를 떠들고 있었다.

  • 전에 존 카버라는 이름의 미국인 남자가 땅을 파야 한다며 사람들을 스무 명 정도 데려가서, 10m 정도 깊이를 파게 하고 보너스를 주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케닝 목축 도로에서 이뤄진 탐광작업으로, 모티머의 백화점에서 일하던 더비 데이브라는 사람이 소식을 듣고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 두 주 전에 몹시 큰 새를 본 사람이 있다. 날개를 쭉 펼쳤을 때 2m는 됐다. 총을 쐈으나 높이 떠 있었는지 닿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기차에서 본 새들이 떠올랐다.
  • 북쪽의 딩고 폭포에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다. 진저 몰든이라는 미치광이 노인이 한 말이라는데.
     자오가 노인에게 듣고 온 사건의 경위는 대강 이렇다: “내가 유령이랑 싸워서 이겼어. 내 패기에 눌린 거지! 4일 전에 딩고 폭포 근처에 야영했는데. 근데 거기 딩고도 없고! 폭포도 없어! 그냥 작은 샘만 있다니까. 그 근처에 슬래터리네 집이 있긴 한데 그 미친 주정뱅이랑 아들내미한테 몸을 맡기느니 그냥 길바닥에서 자는 게 나아서. 자려고 하는데 불이 비쳐서, 그놈들이 날 쫓아내려는 줄 알았는데. 유령이었다고! 비명을 지르는데 소리가 안 났어! 내가 막대기를 휘둘러서 쫓아내지 않았더라면……” 자기가 용감하게 싸웠다고 얘기하고 있으나 정황상 무서워서 도망쳤다가 돌아간 듯하다.
     슬래터리 일가에 대해 수소문해본 결과 좋은 얘기를 해주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다. 모두 사막에서 쉬어가기에 마땅한 집은 아니라며 입을 모았다. 빌 버클리가 일부러 그 집에 찾아가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20년 전 둘이 함께 동업하다가 슬래터리가 결혼을 하면서 갈라섰다. 하모니카도 잘 불고 술도 잘 사주는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요즘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의 가게. 가게 옆쪽에서 주인의 딸들로 보이는 10대 셋이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평범하게 말 상대를 해주었지만, 프리스비가 지하 도시 이야기를 하자마자 그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내부는 평범한 잡화점이었다. U자형 계산대에 턱을 팔에 괸 퀭한 남자가 주인 모티머였다. 간단한 물건 하나를 사며 분위기를 살폈는데 손님을 환영하는 눈치는 전혀 아니었다.

 새벽 세 시쯤 마을을 떠나기 전에 몰래 모티머의 가게에 잠입했다. 1층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자오가 이런 쪽에는 특기가 있다며 벽을 타고 몰래 2층으로 올라갔다. 나머지는 아래쪽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한참 동안 고요했다. 그러다 갑자기 창문이 열리고, 창밖을 향해 산탄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온 동네를 울렸다. 들킨 것이었다.
 프리스비는 망설임 없이 1층의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이후로는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든 와이크로프트 일가를 제압했으나 프리스비도 그렇고 브레이디도 심하게 다쳤다.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야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쓰러진 모티머 딸들의 팔목 안쪽에 사슴뿔 문신이 보였다. 사교의 징표였다.
 2층의 방 모티머의 침대 밑에서 오래 읽은 책 한 권을 발견해 챙겼다. 제임스 우드빌의 <경이로운 지성>.
 우리는 엉망이 된 잡화점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그레이트 샌드 사막으로 출발했다.

 

 

 

1925.7.31

 다지와 내가 돌아가면서 운전대를 잡으며 상당 시간 사막을 달렸다. 포장되지 않은 길을 나아가자니 사정이 편치 않아 뒷좌석에 누운 환자들이 이따금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지프 바퀴가 지나간 자리에 흙바람이 일었다. 한낮의 그레이트 샌드는 불타는 주홍빛으로 달궈졌다. 겨울인데도 덥고, 건조했다.
 문득 저 멀리서 피로에 젖은 사람이 낙타를 타고 가는 모습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물자를 조금 나누어주는 김에 그에게 이것저것 사정을 물었다. 그는 문명이 있는 메타카라로 향하고 있었다. 사막은 더 살만한 곳이 못 된다고 했다. 땅이 흔들리고, 박쥐들이 나오고, 원주민들이 사라졌다. 바람이 불지 않는 때에도 저 멀리서부터 회오리바람을 닮은, 휘파람 소리를 내는 이상한 형체가 보이기도 하고. 원래 그는 인부로 광산에서 일을 받고는 했는데, 예전에 존 카버라는 미국인에게 일감을 받은 이후로 사막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이름은 더비 데이브. 칸캇지리의 술집에서 들었던 이름이라 그곳 출신이냐고 물었지만, 자기는 잡화점에 일했던 적이 없고, 그 마을에서 산 적도 없다고 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기묘했다.

 주변은 온통 붉었다. 하늘만 역설적으로 푸르렀다. 간혹 주변을 굴러다니는 트리오디아가 민머리 위에 난 잔털처럼 붉고 단단한 땅 위를 가려 묘한 명암을 그려냈다. 삐죽삐죽 내키는 아무 곳으로나 팔을 뻗은 나무들은 모두 앙상하게 말랐다. 줄기가 흰 유칼립투스와 멀가나무, 백단향이 그 뻣뻣하고 날카로운 가지를 그물처럼 뻗어 하늘을 꽉 메울 듯 드리운 양털 구름을 야금야금 낚아채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더라. 사막은 묘하게 시간관념을 희박하게 만든다. 우리는 딩고 폭포에 다다랐다. 샘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울퉁불퉁한 산마루에 붉은 바위가 마치 파도가 굳은 것 같은 형태로 서 있었다. 아래 웅덩이에는 바위 그늘이 드리워졌다. 동쪽으로 3km 정도 거리에 오두막집이 한 채 보였다.
 진저 노인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여기서 야영을 했다. 물이 있는 장소라 야영하기 좋은 자리였다. 밤이 되자 일교차가 뚝 떨어져서 모두 모포를 둘렀다. 사막은 금세 차게 식어버렸고 눈을 얼얼하게 만들던 강렬한 붉은빛도 지금만은 놓아주겠다는 듯 떠났다. 온기라고는 앞에 놓인 모닥불이 전부였다. 귓가를 지글거리던 열기가 가라앉고, 지프의 덜컹거리는 소음과 엔진음이 사라지니 주변이 훨씬 고요하게 느껴졌다. 드문드문 모닥불에서 불티가 타오르는 소리만 들렸다. 탁 트인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별이 박혀 있었다. 만약 별들이 말을 한다면 그 속삭임까지 들릴 만큼 가까웠다. 그 가운데 창백함을 흠뻑 머금은 남십자성이 눈부시게 빛났다. 낯설고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나는 모닥불의 불빛에 의지해 모티머의 집에서 가져온 책을 마저 읽었다.

<경이로운 지성>. 제임스 우드빌. 17세기 영어. 앞쪽의 지루한 자화자찬과 눈 뜨고 봐주기 힘든 성적 능력에 대한 자랑을 참고 넘기면 읽을만한 부분이 나온다. 위대한 이스족과 어두운 동굴 속의 휘파람 소리를 내고 창문 없는 현무암 탑에 사는 무서운 존재 사이의 전쟁을 그렸다. 끔찍한 전쟁의 묘사가 상세했다. 4억 년 전~5천만 년 전에 융성했던 위대한 종족 이스는 이 전쟁에 패배해 멸종했다.

 읽은 책의 내용을 일행에게 대강 설명해주고 담배를 피우러 잠깐 나왔다. 그 뒤에 사건이 일어났다.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은 들은 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자오의 휘파람 소리 사이를 가르고, 어디선가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바위 너머에서 희끄무레한 사람 형체가 보였다. 챙이 넓은 펠트 모자에 헐렁한 바지, 낡은 셔츠를 입고 턱에는 붉은 수염이 난 남자였다. 그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데, 갑자기 그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살과 기름이 타들어 가면서 연기를 뿜어내고 눈구멍 안에서 눈이 캐러멜처럼 녹았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그 발은 흙투성이가 된 채로, 그는 불타는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달려왔다. 고통에 찬 표정 그대로 멜리사에게 뛰어들어 몸을 차지했다. 멜리사는 소름이 쭈뼛 끼치는 비명을 지르면서, 눈앞에서 타고 있던 모닥불에 뛰어들려고 했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내가 다급하게 멜리사를 붙잡았다. 그러는 사이 브레이디가 불을 껐다. 멜리사는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정말로 유령이었다. 다들 충격에 제대로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할 즈음, 저 먼 곳에서부터 다시 하모니카 소리가 들렸다. 유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왔던 길을 걸어왔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어 바짝 긴장했지만, 그는 다시 한번 불타오르는 대신 우리를 향해 따라오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딩고 폭포 위쪽에는 동굴이 세 개 있었는데, 유령은 개중 세 번째 동굴로 우리를 인도했다. 내부는 깊이가 깊고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유령이 이끌고 간 저 안쪽에서, 우리는 타다 남은 옷과 그을린 뼈를 발견했다. 유령의 시체가 분명했다.
 빌 버클리의 유령은 자기 뼈 앞에 서서, 갈망하는 시선으로 이쪽을 보았다. 그는 복수를 원하고 있었다. 이 일이 슬래터리 일가와 관련되어 있냐는 물음에, 유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중국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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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6.2


정신없이 숙소를 옮기느라 밤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가방을 잃어버린 것은 끔찍한 손실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넋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1925.6.3


 펜휴 제단 지하에서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케냐의 푸니 초다리는 아이보리 윈드 호를 통해 상하이의 호팡에게 골동품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부두 술집에서 아침 일찍부터 술에 취한 아이보리 윈드 호의 선장 토르박을 찾을 수 있었다. 술을 사주며 자세한 사정을 캐내자 그는 불법적으로 미등록 골동품을 운송하고 있노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세관에 신고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그 물건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방수천으로 덮인 상자 안에는 밸브나 복잡한 전선이 달린 기계들—생소한 형태의 부품이 여럿 들어있었다. 또 다른 상자에는 다양한 석상이나 조각품이 가득했다.

 

  • 60cm 정도 되는 사암 조각에 박쥐 날개가 달린 생물이 역동적인 자세로 내려앉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얼굴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는 얼굴 대신 3개로 갈라진 둥글넓적한 눈이 달려있다.
  • 대형 검은 파라오 석상. 얼굴이 정교하게 세공된 수많은 벌레로 뒤덮여 있다.
  • 15cm 정도의 인간과 염소를 섞은 얼굴의 나무 조각품. 17세기 뉴잉글랜드 시대의 물건이다. 
  • 날의 면을 따라 오래된 기호가 새겨진 부식되고 마모된 단도. 
  • 내부가 자개 빛으로 반짝이는 커다란 고둥 껍데기.
  • 사람 발 가죽이 마치 신발 마냥 그 형태를 유지한 채 청동 고리에 걸려 있다. 최소 100여 년은 되어 보이는, 20~30대 남자의 발이다.
  • 잉글랜드 교외 묘지를 그린 그림. 짐승을 닮은 형체가 땅을 짚고 나오고 있다. M.S. 1924. 서명으로 봐서는 마일스 쉬플리의 그림인듯하다.

 

 이제 나는 이런 물건들을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없었다. 깊은 안쪽에서부터 너무나 많은 사건과 상념들이 동시에 끓어올랐다 사그라들었다. 나는 전과 달라져 버린 것이다. 그것도 내가 가장 원하지 않던 방식으로. 그러니 새 동료들의 도움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선장에게 다크 미스트리스 호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 배의 선원들은 개구리를 닮은 묘한 생김새에 다른 선원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점심때가 되어 맥첨을 만났다. 맥첨은 어제보다 솔직한 태도로 답했다. 조심해야 하는 때와 아닌 때를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로부터 잭 브레이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잭 브레이디는 자기 얘기를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맥첨도 시시콜콜하게 캐묻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그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잭 브레이디의 랑군 행은 묻는 사람들에게 둘러대기 위한 낭설이다. 그는 아직 상하이에 있다. 사정은 몰라도 그가 위험한 일에 뛰어든 것만은 분명하다. 잭슨이 비틀거리는 주점에 들렀을 때, 둘은 대화를 나누었다.
 잭 브레이디를 뒤쫓는 사교 집단은 비대한 여인의 종단이라는 이름으로, 아마도 온 중국 또는 상하이 전체에 그 그림자를 펼치고 있다. 종단의 우두머리 호팡 대인은 관리들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위치의 인물이다. 호팡 대인의 저택은 프랑스 조계지에 있었다. 맥첨은 정확한 주소를 알려주었다.
 우리는 다크 미스트리스 호에 대해서도 물었는데, 가끔 상하이에 들러 짐을 싣는 배이며, 사람들이 선원들의 수상한 외모에 대해 뒤에 수군거린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 국기를 달고 있어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한다.


 상하이 쿠리어.
 작은 신문사. 대표는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앤서니 창이라는 남자다. 영문과 한문을 병기하기에 상하이에서 기사를 발간한 일이 있다면 이쪽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료실에서 특별히 건질 건 없었고, 고대 종교와 관련된 자료는 박물관에 소속된 번역가나 학자들을 통해 알아보라는 추천을 받았다.


 상하이 박물관.
 공공 조계지와 프랑스 조계지 사이에 있는, 영국식 시계탑이 달린 건물이었다. 내부에 전시된 건 전부 중국 유물로, 도자기나 병풍 등이 죽 늘어섰다. 제이덕이 있었더라면 유물의 가치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거나 능숙하게 대처하기라도 했을 텐데, 그의 공백이 느껴졌다.
 우리는 박물관 큐레이터에게 물어 전문가를 여럿 소개받을 수 있었다. 34명이 목록에 있었다. 개중 여건과 위치를 고려해 추려서 세 사람을 만나보기로 했다. 역사학자 창닝, 예술 애호가 린옌위, 전임 보조 큐레이터 무셴.



 제일 먼저 창닝 박사를 찾아갔다. 그는 나이가 좀 있는 학자로, 책으로 벽을 세운 작은 성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학술적인 자문을 부탁하러 왔다고 하고 그의 시간을 빌렸다. 그는 우리의 질문에 상세하게 대답해주었고, 여러 자료를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비대한 여인의 종단은 한때 중국에서 가장 두려움을 샀던 비밀 종교 집단이다.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근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그랬고, 현재로서는 대가 끊겼다. 푸젠 지역의 해안에서 해적이 창궐하던 시절 그 해적들이 이 단체의 지시를 받는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종단의 신도들이 적에게 강력한 마법을 쓴다는 전설도 내려왔다. 이들은 농기구를 주 무기로 사용하면서 특유의 잔인함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들이 섬기는 어둠의 신은 거대한 인간 여성을 닮은 형태에, 바닷가의 영향인지 촉수가 잔뜩 달려있었다. 원래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내륙까지 퍼졌다. 전설에 따르면 바다 밑까지 위세를 떨쳤다고 한다. 물론 이런 기록이 흔히 그렇듯 그 위용을 드높이기 위해 가공된 이야기일 확률이 높지요, 하고 창닝이 덧붙였다.
 창닝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지식은 도움이 되었다. 결론에 경험적 사료를 더하기만 하면 된다. 검은 파라오의 교단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고려하면, 또 내가 직접 겪고 배운 바에 의하면, 이들은 절대 사멸하지 않았다. 대신 시대의 흐름이 이끌어감에 따라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었을 뿐이다. 학문 밖의 영역으로, 음모의 영역으로. 



 호팡의 창고.
 늦은 시각, 야음을 틈타 호팡 대인의 창고에 잠입하기로 했다. 창고는 부두에 근접한 곳으로, 강기슭에 걸쳐 건물 일부가 물 위에 선 구조였다. 화물칸과 업무공간이 나뉘어 화물이 이동하는 커다란 문이 한 면에 달렸고, 사무실용 문도 따로 있었다.
 우리는 창고 한구석의 문을 따고 최대한 조심해서 들어갔다. 하지만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건물 안쪽에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다급히 위층으로 도망쳤다. 올라가는 계단이 헐거워 빠질 뻔했으나, 운 좋게 들키지 않았다.
 그 김에 2층을 먼저 살펴보았다. 한쪽 방에는 캐비닛과 서류, 장부가 놓인 사업가의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에 거래 명세 서류, 둘둘 말린 항해도 같은 것들이 놓여 있다. 영국 런던, 케냐, 이집트 카이로, 호주, 회룡도의 지도다. 책상 바닥에는 열쇠가 달린 금고가 있었다.
 서류를 뒤져서 펜휴 제단으로 미술품을 수송한 명세나, 이집트의 오마르 알 샤크티에게 미술품을 보낸 기록, 케냐의 아자 싱에게 화물을 보낸 기록 등을 찾았다. 화물 대부분은 미술품이지만 가끔 책을 수송한 기록도 있었다. 또 호주의 랜돌프 운송회사를 통해 칸캇지리의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에게 광업 장비를 보낸 기록도 존재했다.
 아래로 내려가던 프리스비가 빠진 계단 밑으로 공간이 보인다며 모두를 불렀다. 아마 물건을 쌓아두는 별개의 창고인 듯했다. 창고 안에는 철문이 있고, 철문에 달린 창밖으로 사람이 오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우리는 1층 사무실을 지나 화물 더미로 향했다. 프리스비는 순찰하던 남자 하나를 기절시키고 그 손전등을 빼앗았다. 창고에는 순찰하는 사람을 포함해 다섯 정도가 있었다. 최대한 조심하려 했으나 결국 난투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프리스비와 메이벨은 둘 다 몸놀림이 굉장했다(해결사인 프리스비는 그렇다 쳐도 메이벨은 의외였는데, 나중에 듣기로 선원들과의 생활은 꽤 거칠었다고 한다). 경비원들은 역시 일반인답지 않았다. 이들은 상황이 험악해지자 낫을 꺼내서 덤벼들었다.
 내 목이 거의 베일 뻔했던 흔적은 가느다란 생채기로 남았다. 메이벨은 낫에 허리를 찔렸고, 프리스비 씨는 다친 머리를 또 다쳤다. 비록 엉망진창이 되기는 했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우리는 간단한 응급 처치만을 끝낸 뒤, 경비원에게 빼앗은 열쇠로 계단 밑으로 보이던 예의 창고에 들어갔다. 그 안에는 교단의 물건이라 짐작되는 화물이 쌓여있었다.

 

  • 용의 뼈라고 쓰여 있는 거대한 짐승의 뼈 무더기, 상아색 가면, 청동으로 만든 궤. 궤의 손잡이에는 날개 달린 생물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다름 아닌 영국의 그 날 밤하늘을 뒤덮었던 괴물의 모습이었다.
  • 다양한 크기와 재질로 만들어진 풍만한 여인의 조각상. 중국 전통 복식을 입고 부채로 얼굴을 가렸는데, 아래로는 발 대신 촉수가 달렸다. 촉수는 기묘하게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A.P라는 머리글자가 적힌 상자 6개에는 각각 기계 부품들이 들어있었다.
  • 또 다른 상자에는 검은색과 노란색으로 된 풍성한 제사용 로브가 들었다. 로브의 등 부분에는 위로는 부채, 그 아래로 촉수인지 갈고리가 나온 원형의 마크가 그려져 있다.
  • 다양한 화물들에 주소가 붙어 있다. 잡히는 대로 메모하자면: 호주 칸캇지리,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 토머스 가 7번지, 매사추세츠주 던위치, 아컴 미스카토닉 대학 의학부 허버트 웨스트 등. 

 

 창고 바닥에도 문이 달려있다. 열어보니 아래쪽으로 뻥 뚫려 바닷물이 지나가고 있었다. 바다로 연결된 것이다. 어떤 용도로 쓰이는 문일까?

 

 

 창고를 속속들이 뒤진 후, 나는 상태가 안 좋은 두 사람을 앞서 보냈다. 마지막으로 나가려는데, 문득 창고 구석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뒷모습이었지만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노라였다. 노라? 나지막이 부르자 이쪽을 돌아보았다. 눈동자는 물먹은 도화지 같았다. 가만 마주치는 것만으로 익숙한 색이 번졌다.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전에 자신을 멈춰버렸다. 이해가 그 얼굴을 흩어 버릴까 봐 이해를 버렸다. 그러면서 내 말에 익사해버리기 직전의 사람처럼 말을 토해냈다. 여기서- 뭐 해요? 비틀어 쥐어짠 목소리는 거의 남의 것처럼 들렸다. 노라는 돌아온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에 내가 모르던 끔찍한 비밀이 있다면 내가 모르던 상냥한 비밀도 있을 법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설득하는 데 거의, 거의 성공한다.
 그러나 노라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여기 없어요. 나는 그 애의 눈동자에 비친 나 자신을 본다. 내가 그 애를 다정하게 여기기 때문에, 내가 만들어낸 환각 속에서조차 노라는 내가 이해를 거부하게 두지 않는다. 나는 환영의 세계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아직 숨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익사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슬픔은 칼을 들고 있다. 그런데 내 목에는 한 줄 빗금이 갔을 뿐이다.
 추방령의 마지막 선고처럼 창고의 문이 닫혔다.

 

 

 위층의 금고에서 돈을 조금 챙겨 빠져나온 뒤, 곧장 프리스비와 메이벨을 입원시켰다.
 긴장이 풀리자 섬뜩함이 몰려왔다. 두 사람은 있었던 일을 소화해내려고 한다. 비록 무단 침입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일이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낫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직접 보는 것은 수십 번의 말보다 값진 경고가 된다. 나는 앞으로 더한 일들이 기다리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준다. 그것을 의무처럼 느꼈다.
 두 사람이 안정을 취하는 동안에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메이벨이 지출을 감내하고 사람을 고용했다. 호팡의 저택에 직접 잠입하기는 위험하니 전문가들을 쓰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간만의 휴식을 취했다.

 

 


1925.6.5


 투자의 결과는 금방 밝혀졌다. 메이벨이 고용한 사람은 셋인데, 그중 단 한 사람 보퍼드 존스만이 돌아올 수 있었다. 그도 온전한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횡설수설 들은 얘기를 간략하게 재구성하자면 이러하다.

 호팡 저택은 그 부근의 저택들이 으레 그렇듯 높은 담장에 위쪽으로는 사금파리와 철조망이 감겨 있었다. 정문을 24시간 경비하는 데다, 안쪽이 바로 경비실이며 내부에도 늘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이들은 담을 넘어 들어갔다. 담을 넘자 곧장 거대한 연못이 보였다. 그 안에는 커다란 커튼을 닮은, 난생처음 보는 생물이 헤엄을 치고 있었고 주변에는 시종들이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녔다.
 꽤 넓은 저택이었다. 이들은 들어온 방향에서 곧장 보이는 북동쪽 건물 먼저 뒤졌다. 불상이 있는 방은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불상의 목을 왼쪽으로 두 번 돌리자 숨겨진 문이 열린 것이다. 숨겨진 문 너머에는 무기 창고, 약과 비커들이 줄지은 방이 있었다. 더 안쪽으로는 철창이 달린 문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 옆 방에는 호팡의 딸로 짐작되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민달팽이나 지렁이 같은 것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비위가 상하는 광경이었다. 바로 옆에 붙은 화려한 방에는 다양한 귀중품들과 조각상들이 즐비했다. 풍만한 여인이 입은 중국식 복장 아래로 다리 대신 촉수가 빠져나오는 듯한 모습의 조각상이라든지. 보퍼드는 그곳에서 물건을 훔쳤다고 하는데, 사교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귀중품이었다.
 이후 인공 연못을 두른 손님 방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그중 한 곳에 안경을 쓴 백인 남자가 묵고 있었다. 시종으로 분하고 그 남자에게 말을 건 동료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에 쓰러지고, 뒤따라간 동료도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등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보퍼드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목숨을 구걸했다. ‘살려 보내는 것도 괜찮겠지.’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뇌리에 뚜렷하게 새겨졌다. 주변이 온통 새카맣게 변하고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동시에 수천 수백 개의 눈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이는 찰나의 일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총을 발사했으나,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맨발로 황푸강 기슭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주머니에는 본인이 챙긴 금반지들과 함께 기억에 없는 접힌 종이가 한 장 들어있었다. 거기 찍힌 것은 사교도들의 마크였다.
 잠입한 일행이 겪은 일을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자흐라 샤피크 같은 사교도들은 기묘한 마법을 쓰고는 했다. 그들이 만난 남자도 그런 사술을 부리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온몸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고통, 갑작스럽게 정신을 나가게 만들고 수족이 썩어들어가게 만드는 끔찍한 속삭임들. 갑자기 머릿속에 밀려드는 불유쾌한 감각. 나는 진저리를 치며 생각을 털어버렸다.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되었기에, 직접 호팡 대인의 집에 잠입하는 계획은 잠시 미뤄졌다.



 두 사람을 무리시키지 않는 선에서, 우리는 조금씩 움직임을 재개했다. 먼저 린옌위를 찾아갔다. 메이벨이 말하길 그는 사업가, 예술 애호가이자 큰손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현재 상하이의 별장에 머무르고 있었다. 언제나 머리에 제비 브로치를 달고 있다고 해서 제비 부인이라고 불린다.
 미리 약속을 잡지 않아서, 우리는 희귀한 골동품들이 전시된 응접실로 안내받은 뒤 꽤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다. 응접실에는 뱀과 거북이가 섞인 생물의 조각이나 황금으로 된 앙크, 티베트 종교화 탕카, 용 장식이 새겨진 청동 종(여러 마리가 얽혀 있는데 그중 영국에서 본 그 끔찍한 괴물도 섞여 있다, 이 괴물은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는 걸까?) 등이 있었다. 제비 부인은 아름다운 시종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마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듯한, 고대에서나 존재했을 법한 비현실적인 화려함이 중국에서는 아직 가능한 일인듯했다.
 첫 번째 질문을 들은 제비 부인은 고상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데에 관심을 가지면 큰 화를 입을 수 있어요.”
 “하지만 부인 정도면 누군가에게 쉽게 화를 입을 만한 인물은 아니시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넘어야 하는 산이 너무 크면 얘기가 달라지는 법이죠.”
 호팡을 거스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진 신의 모습 중 하나를 섬기는 위험한 종교 집단이 존재하고, 호팡은 이들의 대사제 역할을 맡고 있다. 제비 부인은 그를 직접 거스를 만큼 어리석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를 도울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덕분에 우리는 호팡에 대해 캐낼 기회를 얻었다.
 우리는 들었던 파편적인 정보들을 꺼내놓았다. 부인은 호팡 대인의 집에 칼 스탠포드라는 이름의 위험한 마법사가 묵고 있다고 일러주었다. 아무래도 호팡을 돕기 위해서인듯한데, 그 마법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호팡 대인에게 딸이 있는 것도 사실이며, 호팡은 그 아이를 꼭꼭 숨겨 밖에 내보내지 않는다. 또, 그가 회룡도에서 강력한 기계를 만든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자세한 정보는 불명이지만 아마 거짓 소문은 아닐 것이다. 제비 부인은 직접 정보원들을 섬으로 보냈지만, 돌아온 정보원들이 이상할 정도로 말을 아꼈다. 마치 부인보다 더 두려운 무언가가 그 섬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다크 미스트리스 호의 선장은 쥘 사부아야르라는 이름인데, 싸구려 매음굴을 즐겨 다니는 인물로 행동거지에 문제가 있어 부인의 가게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잭 브레이디의 이름을 꺼내자, 제비 부인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 ‘좀도둑놈’이 자신의 책 현군칠장비경을 훔쳐 갔기 때문이었다. 제비 부인은 그를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를 찾게 되면 사례하겠다며 우리에게도 부탁했다. 이런 말을 하는 내내 제비 부인의 시선은 계속 프리스비에게 머물러 있었다.
 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 부인이 서랍을 열어 산가지가 든 통을 꺼냈다. 그리고 점괘를 보듯 흔들어 수납장 위에 펼치더니, 거치대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 읽었다. 이전과 달리 중국어로 이야기했기에, 메이벨이 통역해주었다.

 


 제비 부인은 손목에 있던 옥 팔찌를 빼서 프리스비에게 건네주었다. 선물이라면서, 곤륜산 아래 고대도시 허티엔에서 나온 허티옥으로 만든 팔찌인데, 이것이 당신을 지켜줄 거라고 속삭였다. 옆에서 메이벨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후에 메이벨이 설명하기를 중국에서 옥 팔찌란 어릴 적부터 손에 꼭 맞게 만들어 평생 끼는 것으로, 아주 소중한 사람한테 주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프리스비는 어쩌다 본인도 모르는 새 제비 부인의 마음을 훔친 것일까? 어리둥절하던 찰나, 밖에서 시종이 가방을 하나 들고 들어왔다. 어디서 많이 본 가방이다 싶었는데- 내 것이었다! 나는 침착을 유지하려 애썼다. 노력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곧장 펄쩍 뛰어올랐을 것이다.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비록 제 부하의 팔에 상처를 남기셨지만, 호의의 표시로 돌려드리니 사양 없이 받으셔도 돼요.”
 천연덕스러운 말씨에 곧장 허탈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도둑은 사교도들이 아니라 제비 부인의 부하였다. 맥첨이 잭 브레이디와 친한 사이였으니, 잭 브레이디를 쫓는 제비 부인이 그의 술집을 감시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인제 보니 프리스비에게 이런 열렬한 관심이 쏟아지는 것도 이해가 갔다. 프리스비가 부인의 부하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으니까. 나는 가방을 돌려받았다는 사실에 그저 안도하고 또 맥이 탁 풀려서, 물건을 받은 이상 없던 일로 하겠노라고 말했다.
 저택을 나서면서 프리스비는 자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 같다며 내게 사과했다. 사실 누구도 이런 식으로 흘러가게 될지 예상하지 못했을 사건이니 그의 탓을 할 수는 없다. 또 제비 부인과의 만남에서 귀중한 정보를 많이 얻었다. 불운이 행운으로 이끌어준 셈이다. 중국에서는 이런 상황을 빗대어 전화위복이라고 한다.

 




1925.6.6


 다음날, 이른 시각 제비의 봉인이 찍힌 저녁 식사 초대장이 도착했다. 수신자는 프리스비였다. 나와 메이벨은 부인의 열렬한 러브콜을 받는 프리스비를 놀리면서 다음 일정을 준비했다. 오늘은 목록의 세 번째 인물인 무셴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무셴은 청나라풍의 외투를 입은, 왜소한 노인이었다. 그의 집은 허름했다. 노인의 눈가를 뒤덮은 주름에서 특유의 완고함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노인을 앞에 두고 이전에 다른 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비대한 여인의 종단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자 노인이 되물었다.
 “그들을 알고자 하는 이유가 뭔가?” 차분하고 한 편으로는 감정을 읽기 어려운 목소리였다.
 “저희는 죽음 숭배 교단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중 한 갈래로…”
 노인은 핵심을 비껴간 답변을 무질렀다.
 “애초에 그걸 조사하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없을 리 없다. 프리스비의 이유는 잭슨 엘리어스다. 프리스비는 맡은 임무를 수행하러 미국에서 이 먼 땅까지 왔다. 그는 사교 집단을 조사하다 죽은 친구의 유지를 이어받았다. 메이벨 역시 이 일에 자신을 바쳤던 사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은, 차마 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찾아내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호기심. 그렇다면 일라이저 웨버는? 막기 위해 있다.
 노인은 고개를 메이벨 쪽으로 향했다.
 “정말로 호기심 때문인가? 알아내고 들은 바가 있다면서. 자네는 그 위험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맞나?”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알아야겠어요.”

 노인은 메이벨의 대답을 듣고 한참 동안 가만 생각에 잠겼다. 침묵을 깨고 나온 말소리는 무거웠다.

 “지금까지 이들로 인해 조각나고 깨지고 부서져 인생이 엉망이 되어버린 사람들 가운데 그 이야기가 남에게 발견되는 행운을 누린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네. 자네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것 또한 빙산의 일각이고, 분명히 그 아래 더 깊고 까마득한 시체의 산이 쌓여있을 걸세. 그 산은 지금도 쉼 없이 그 부피를 늘리고 있으며 하늘에 닿으려는 그 욕심은 멈춤을 모르네.
 그런데 지금의 중국은, 그러한 무고한 사람의 죽음조차도 사소한 일이 되어버린 곳일세. 그렇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여겨질 수 있는데도, 정말 괜찮은 건가?”

 나는 목숨을 잃을 뻔한 사람과 잃은 사람,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을 보아왔다. 이유도 당위도 없이 가라앉은 사람들.
 이 괴물을 잡아 반으로 가르면 그 검은 바다에 잠겼던 시체들이 떠오를까? 그렇게 하면 그들도 이제 편히 쉴 수 있을까? 아, 그들의 얼굴은 마침내 편안할까? 내가 본 환상 속에서 노라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더라. 어쩌면, 이미 떠난 사람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실 미치기 직전인 것은 나여서, 그들의 위안을 핑계 삼아, 내가 편해지고 싶어서, 그래서 나는 멈추지 못하는 걸까?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들 대신에 내가 거기 누워있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슬퍼할 사람도 없고, 집이라 부를 곳도 없는 내가. 잭슨 엘리어스가 살아남았다면 우리는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용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많은 일이 훨씬 쉬워졌겠지. 노라 에버트가, 살아있었다면, 그냥, 그것만으로 세상은 조금 더 그럴 가치가 있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부질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무엇이건 가끔은 그저 멈출 수가 없는 때가 있다.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런 끔찍한 짓거리를 차마 내버려 둘 수 없기에. 더는 누군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기에. 페루에서 돌아섰더라면, 어쩌면. 아니면 적어도 미국에서. 이제는 늦었다.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내가 평생을 들여 보고자 했던 세상의 진실은 사람을 삼키는 모래 늪과 같았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와 같았다. 나는 그만두는 방법을 잊었다. 용기와 어리석음과 관성을 겨우 그러쥐고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도 나아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나는 잠겨 죽거나 폭사할 것이다. 혹은 상상을 웃도는 더 끔찍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 혼자만 끝장날 생각은 없다.
 프리스비가 눈썹을 세웠다. 저는 항상 위험 속에서 살아왔어요,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겁준다고 해서 달라질 것 없다고요, 노인네. 원래 하던 일이 덩치가 조금 커진 것뿐이지.” 그 목소리에는 날것의 반항심이 묻어있다. 이를 느꼈는지 무셴은 한 발짝 물러났다.

 “질문이 무례할 수 있었을 텐데, 대답해주어서 고맙네.”
 그래서, 답을 들은 노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얘기를 해주었다.


 “이 사교들은 사람들의 을 잘라간다네. 사람이 피를 흘리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걸 좋아하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추측에 가까우니 완전히 믿지는 말게.” 그는 여기서 잠시 멈추고 거친 목을 다듬었다.


 “교단의 신도들은 그들이 믿는 신을 이 땅 위로 불러오려 하네. 날짜는 머지않았네. 아마 기계 같은 걸 만들어서, 하늘에 독을 푸는 방법을 쓸 거야. 그렇게 하늘이 바뀌고 1년만 지나도 이제 세계는 사악한 존재들로 가득 차게 될 테지. 그렇게 하늘이 오염되고 세상에 사악한 것으로 가득 차면, 별들이 자리를 바꾸고 툴루 같은 고대의 존재들이 몸을 일으킬 걸세.”
 무셴은 뒤이어 몇 가지 낯선 이름을 댔다. “니오그타, 아자 토스, 요그 소 토스 같은 신들이 숭배될 때가 올 거야.”
 “그 사교도들이 모시는 신의 이름은 뭡니까?” 내가 물었다.
 “그 신은 너무나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 그중 하나가 비대한 여인이지.

 그는 니알라토텝이라고 불리는 존재네.”

 “검은 파라오나 박쥐들의 아버지, 비대한 여인… 그 모든 신이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모두 같은 존재이면서 각자 다른 존재이기도 하네. 이들은 결국 한 신의 여러 가지 모습이야.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어.”
 “이런 지식을 어떻게 알게 되신 거죠?”
 “공부를 하다 보니 알지 말아야 하는 것까지 알아버렸지.”

 얘기를 마친 노인은 몇 번의 잔기침을 뱉었다. 그는 느린 동작으로 우리 각자의 얼굴을 살펴보고, 단호하게 맺었다.
 “자네들은 여기 너무 오래 있었네. 위험하니 다신 오지 말게.”
 그러면서 노인은, 만약 연락할 창구가 필요하다면 상하이 유치우편에 펑우페이라는 이름 앞으로 편지를 남기라고 덧붙였다.

 그는 우리를 문 앞까지 배웅해주었다. 밖으로 걸어 나오는 내내 오로지 한 이름이 입속에 맴돌았다. 니알라토텝. 괴물의 실체는 보다 선명해졌다. 그를 뚜렷하게 느낄수록,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손을 뻗어 만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광대하고 고독하고 으스스한 공간에 툭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태평양을 가로지르던 배의 항적을 기억한다. 거기서 느꼈던 아득함과, 뒤틀린 용기를 생각한다.  “절대 그들이 바라는 만큼 쉽게 되진 않을 겁니다.”

 “자네들이 해준 말은 잊지 않겠네.”
 노인이 말했다.
 “자네들 본인도 그걸 잊지 말길 바라네.”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천재그림러.램님의.그림.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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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2. 23

 

 블루 피라미드 클럽 1층의 창고는 사용한 흔적이 있는 밧줄과 핏자국을 그늘에 숨기고 있었다. 우리는 낮은 목소리로 두런거리며 창고를 둘러보았다. 한순간, 천장의 전구가 파직! 소리를 내며 터지더니 주변이 삽시간에 어둠에 잠겼다. 머리카락을 태우는 불유쾌한 냄새가 훅 끼쳤다. 시야가 새까맣게 물든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악취는 불길한 신호였다. 아니나 다를까 일행에게 채 괜찮냐고 묻기도 전에, 옆에서 우당탕 소란이 일었다. 나는 다급하게 손전등을 꺼내 그쪽을 비췄다.

 아주 찰나였지만 나는 똑똑히 보았다.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제이덕의 얼굴에 달라붙어 입과 코로 밀고 들어가는 광경을. 손전등 빛이 닿자 그것은 빠르게 모습을 감췄고 그는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거칠게 몰아쉬었다. 사방에서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옆으로 쓰러지는 노라를 겨우 부축하고서, 나는 사라진 괴물을 쫓아 전등으로 주변을 훑었다. 위협하듯 휘둘러지던 불빛이 뚝 멈추고 만 까닭은, 허여멀건 덩어리가 한쪽 벽에 우글우글 움튼 모습이 순간 나를 얼어붙게 했기 때문이다. 형체는 마치 전등 빛을 피하려는 것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하며 꿈틀거렸다.

 기침을 잇던 제이덕이 비틀거리면서도 그 괴물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려 했다. 나는 되는대로 손전등을 입에 물고 그의 팔을 붙잡았다. 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둘을 이끌어 창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독한 냄새는 계속 뒤따라왔다. 한밤중이었다. 주변은 어두웠다. 어둠은 단 한 순간도 우리 편이 아니었다. 나는 입에 손전등을 물고, 기절한 노라를 부축한 채 한 손은 제이덕을 꽉 붙들고, 강을 따라 내달았.

 

 어떻게 다시 숙소로 돌아왔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계속 악물고 있던 턱은 얼얼하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너무 긴장했던 나머지 사지가 뻣뻣하게 떨려온다. 무서울 만도 한데, 제이덕은 그 괴물을 한사코 다시 봐야 한다고 우겼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끔찍한 일을 겪으면서 서서히 생겨난 조광(躁狂) 증세다. 이럴 때의 그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설득은 별로 의미가 없다.

 기절한 노라를 편히 눕혀두고, 제이덕과 나는 결국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내 이유는 조금 달랐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문도 잠그지 않고 빠져나온 터라 뒷정리를 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에는 절대 인정하지 못했겠지만 내 사고 또한 결코 멀쩡하다고는 봐줄 수 없는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었.

 

 그렇게 호텔에서 나와 밤거리로 막 빠져나왔을 때였다. 뒤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유령이라도 본 듯 창백한 얼굴의 노라가 서 있었다. 시선이 갈피를 못 잡고 떨렸다. 우리가 나가는 기척에 눈을 뜨고 보니 아무도 없는 호텔 방이어서 많이 놀랐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신발도 신지 못하고 뛰쳐나와야만 했을 정도로. 우리는 노라를 부축해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똑바로 달랠 수 있었을까. 모두에게 불안한 밤이었다. 우리는 그날 밤 내내 불을 밝혀놓았다. 회색 나방 한 마리가 느릿느릿 맴을 돌더니 기어코 촛불로 뛰어들었다. 뒤이어 타탁! 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윌리엄은 그 전쟁얘기를 자주 꺼내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전선 조광증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군인은 참호 속에 웅크려 포탄이 사방으로 빗발치는 소리와 땅 울림을 들으면서도 기어코 밖에서 죽어가며 울부짖는 개의 머리를 쏘러 나가려고 한다. 자기 파괴와 진배없는 자비심이다. 사실 그는 그저 정신이 나가버린 것이다. 끔찍한 긴장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된 바람에 그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각주:1]

 그럴 때는 말이야, 엘리. 그저 모두가 그를 꽉 붙들고,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할 때까지 두들겨 패는 수밖에 없었어. 그렇게밖엔 말릴 수가 없더구나. 그러면서도 나는 마음 한편으로 그가 뛰쳐나가려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지. 그를 붙잡느라고 다른 건 다 잊어버렸거든. 밖에서 개가 두어 번만 더 길게 울었더라면 뛰쳐나가는 건 내가 되었을 거다. 아멘.

 그 누구도 그런 상황에서 제정신일 수는 없어.

 

 

 눈을 뜨자마자 제이덕이 불쑥 책을 들이밀었다. 그 책에서 자기가 어제 겪은 일과 비슷한 내용을 발견했다고 한다. 역시 어젯밤도 그냥 잠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짚고 읽어준 내용은 간추리자면 이렇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 실체가 없어서 보이지도 않고 물리적으로 영향을 줄 수 없다(이 부분에는 제이덕의 첨삭이 더해져 있었다. ‘물리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호흡기로 들어가 숨통을 조인다.’). 굉장히 강한 빛이나 태양 빛을 받으면 모습을 유지할 수 없어 쫓겨난다.

 

 아무래도 블루 피라미드 클럽에서 뭔가를 더 알아내기는 요원해 보였기에, 우리는 다른 곳으로 관심사를 돌리기로 했다.

 

 

 펜휴 제단에서 발견된 명함도 그렇고 배링턴 경위도 언급한 적이 있는 만큼, 엠파이어 향신료도 수상했다. 새벽에 조용히 들러보기로 하고 낮에 잠깐 사전 조사를 해두었다. 근처에만 가도 이국적인 향신료 향이 물씬 풍겨오는 2층짜리 건물이었다. 오후 5시만 되면 문을 닫는다.

 오후에는 숙소로 돌아와 가져온 물건들을 이것저것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노라는 짧게 외출을 다녀왔다.

 시간이 꽤 넉넉했기에 제이덕이 신중하게 물품 하나를 분류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우리가 쉬플리의 집에서 가져온 약은 명계의 약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었다. 뱀 인간이 만드는데, 이 약을 사용하면 시간의 구석을 통해 정신이 과거로 여행했다가 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 쉬플리의 설명 그대로였다.

노라는 이집트 살인사건에 대해 놓친 소식이 있는지 여기저기서 살펴보고 돌아왔다. 관련된 것은 찾지 못했지만 대신 우리가 어제 겪었던 일과 비슷한 경험담을 다룬 기사를 찾았다.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도 미키 마호니 역시 교단과 많이 얽히는 듯하다.

 우리는 이 기사에 대해 더 상세히 묻기 위해 다시 더 스쿱 신문사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한 신문사 부근은 경찰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더 스쿱의 편집장 미키 마호니에게 변고가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소식으로 인해 우리는 충격에 휩싸였다. 범행 시간은 아마도 오늘 오전, 목격된 용의자는 없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가 교단의 희생자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에도 우리는 한 발짝 늦은 셈이다.

 경찰에 사정해서 미키 마호니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기로 했다. 신문사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갈수록 타는 냄새가 심해졌다. 어젯밤의 일이 떠오른 건지, 제이덕의 안색이 창백해서 결국 노라에게 그를 맡겨두고 혼자 다녀왔다. 냄새의 근원은 그을린 종이였다. 범인은 아마 더 스쿱이 보관하던 자료를 태운듯했다. 미키 마호니의 시체는 사무실에 있었다. 그는 마구 맞고 찔려 상처투성이에, 가슴에 말뚝을 박았다 뺀듯한 검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사후경직은 그의 얼굴을 경악으로 일그러진 그대로 영원히 고정해 놓았다. 참혹한 시신의 모습은 뉴욕에서 봤던 엘리어스의 그것과 겹치며 뇌리에 깊은 잔상을 남겼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미키 마호니는 우리에게 서신을 보내려고 했다. 거기에는 자신이 감시를 당하고 있으니 우리에게도 조심하라는 우려와 경고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마음이 무겁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잃어야 이 일이 끝날지 모르겠다.

 

 

 

 

 

1925. 2. 24

 

 늦은 새벽. 엠파이어 향신료.

 우리는 건물 뒤편의 담을 넘었다. 잠긴 뒷문을 열기 어려워서 하는 수 없이 석탄 출입구에 몸을 구겨 들어갔다. 순식간에 모두 검댕 덩어리가 되었다. 떨어지고 보니 주변은 낡은 나무상자와 석탄 더미가 쌓인 깜깜한 지하실이었다.

지하실에는 숨겨진 문이 하나 있었다. 그냥 힘으로 밀면 꿈쩍도 하지 않고, 상자로 가려진 곳에 채워진 자물쇠를 풀어야 한다. 낡은 자물쇠인데 열기가 쉽지 않아 일단 가게를 마저 살펴보고 돌아오기로 했다.

지하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위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몽둥이를 든 남자였다. 옥신각신한 끝에 제압하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노라가 많이 다쳤다. 머리의 상처를 겨우 지혈하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날이 밝자마자 병원에 뛰어가 봐야 하는 상처다.

그 남자는 갈비뼈가 부러지고도 밖으로 도망치려 했다. 제이덕이 겨우 붙잡은 뒤에도 여왕님께서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가 뭐라고 말하건 제대로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결국 지하실에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엠파이어 향신료의 1층에는 가게 공간과 사무실이 있었다. 제이덕이 이리저리 장부를 살펴보더니, 어디서 이만한 돈이 났을까요? 하고 지적했다. 잘 되는 사업이기는 하지만, 장부에 쓰인 것과 비교해 지나치게 인테리어가 화려하다는 것이다. 가게의 2층은 더 심했다. 장식과 가구에 아낌없이 자본을 쏟아부은 티가 났다. 공기는 훈훈해서 약간 더울 정도였다. 난로가 켜져 있다. 누군가 여기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잔뜩 긴장한 채 둘러봤으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자흐라 샤피크의 방이리라 짐작되는 가장 화려한 개인실에서 몇 가지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눈에 띈 것은 금박으로 된 장식 거울이었다. 틀에 기이한 도형이 새겨져 있고 묘하게 비대칭이었다. 책상의 비밀 공간에도 무언가 숨겨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오래된 파피루스 두루마리, 금속 사슬에 달린 뒤집힌 앙크, 검은 결정 가루가 든 병, 불그스름한 시럽 같은 액체가 든 병. 원래는 긴 막대나 홀 두 개가 놓여있었던 것 같은 공간은 움푹 파인 채 비어있다. 제이덕이 거기 있던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챙겼다.

 

 

 다시 지하로 돌아와 비밀 문의 낡은 자물쇠를 건드리자, 아까와는 달리 매우 쉽게 열렸다. 헐거워졌던 걸까? 문 너머에는 음침하고 불길한 공간이 도사리고 있었다. 정면에 사슬과 쇠갈고리가 붙어 있는 벽이 보이고, 방 한쪽 끝에 검은 양초로 둘린 검은 파라오의 흑단 입상이 서 있었다. 제단 앞에는 피로 물든 나무 블록이 놓여있었다. 블록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블록 근처에 1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우리는 모두 놀라서 그쪽으로 달려갔다.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흔들어 깨우자 곧 정신을 차렸다. 매우 겁에 질려 있는 것을 차근차근 진정시키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름은 니트라, 자기가 검은 파라오의 결사에게 잡혀 온 것 같으며, 자기 남동생이 살해당해서 조사하다가 이런 일을 당했다고 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들키기 전에 니트라를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니트라를 숙소까지 안내하고 따뜻한 차를 타주었다. 상황이 안정되자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펜휴 제단의 사람을 미행하다가 납치를 당했다. 니트라가 조사한 결과, 펜휴 제단을 관리하는 에드워드 개비건이 바로 이 끔찍한 사교의 수장이다. 우리는 엠파이어 향신료 가게 주인에 대해서도 물어봤지만, 그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그믐밤에 교외에 모여서 끔찍한 의식을 치른다. 장소는 미스르 하우스라 이름 붙은, 에식스의 늪지 섬에 지어진 개비건의 전원 저택이다. 니트라의 생각으로는 검은 파라오의 결사를 와해시키는 방법은 수장 에드워드 개비건을 죽이는 수밖에 없는데,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바로 이 미스르 하우스다. 종교의식을 치룰 때라면 이들은 비교적 무방비해질 테고, 개비건에게 다른 호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라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소녀의 모습에 조금 놀란듯했다. 물론 개비건이 영국에서 명망 높은 귀족임을 생각하면 그가 감옥에 갇힌다고 간단히 해결이 될 것 같진 않지만, 그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이 노라에게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우리는 당장 뚜렷한 대답을 주는 대신 생각을 해보겠다고 약조하고는, 오늘은 많이 놀랐을 테니 이만 쉬라고 니트라를 다독였다.

 

 노라는 상태가 좋지 않다. 그 애는 상황이 일단락되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빨리 병원을 가봐야 한다. 제이덕은 오늘 밤도 깨어서 가져온 파피루스를 살피고 그 문자를 해독했다. 해독문을 간추려 옮겨둔다:

 갈의 거울 사용법. 갈의 거울은 강력한 점술 도구이자 무기다. 거울의 능력을 전부 사용하려면 오브라안과 가베슈갈이라는 물건이 필요하다. 거울로 특정한 대상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무기로 사용해서 대상을 해칠 수도 있다. 오브라안을 사용하여 거울에 뒤집힌 앙크 모양을 그린 뒤,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면 그 모습이 보인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다. 무기로 사용할 때는 일단 그렇게 대상을 불러낸 뒤, 가베슈갈을 사용해 거울을 다 덮는다. 그러면 대상의 숨이 막히게 된다. 이 행위에도 대가가 필요하며, 더 지불하면 숨을 끊을 수 있다.

 

 

 

1925. 2. 25

 

 

 새벽.

 바깥이 소란스러워 잠에서 깼다. 나가보니 제이덕과 니트라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니트라가 제이덕의 가방을 뒤져, 갈의 거울과 약병을 들고 몰래 나가려다 들킨 것이었다. 니트라는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다간 저주를 받으니 가져다 버려야 한다고 우겼고, 제이덕은 몹시 화가 나서 그가 자기 연구 자료를 훔치려 했다며 쏘아붙였다. 나는 두 사람을 어떻게든 말리려고 했다. 니트라의 태도는 아까와는 아주 달랐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나는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기꺼이 도울 테니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저는 도움 받을 게 없어요. 이만 가보겠어요.”

 니트라가 그렇게 말하고 떠나려 했을 때 제이덕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주지?” 옆에서 내가 말리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제이덕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니트라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주문을 외웠다.

 불타오르던 눈빛이 삽시간에 흐려졌다.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중에 알았는데, 니트라는 그때 제이덕의 머릿속에서 거울과 자신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당시의 나는 제이덕이 무슨 해코지를 당했는지 알 길이 없었고 그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제이덕은 순식간에 얌전해져서, 니트라의 손길에 이끌려 의자에 앉혀졌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대답 대신 그는 곧장 나를 보며 무언가 속삭였다. 발음과 소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람의 목에서 나오는 말 같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안개가 밀려드는 느낌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키웠다. “괜찮아요, 제이덕? 이 사람, 마법을 씁니다.”

 나는 머릿속의 안개를 밀어내려 애쓰며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떻게든 그가 주문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옆구리 쪽에서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숨을 끊어 내쉬며 아래를 내려다본다. 니트라의 손에 들린 작은 단도가 내 옆구리에 수납되어 있다.

 

 옆에서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면 막 잠에서 깨어난 노라가 보인다. 노라는 몹시 놀라서는 옆에 있던 꽃병을 들어 휘둘렀다. 나는 니트라가 칼을 쥔 손을 붙잡아 어떻게든 그가 피하지 못하도록 했다. 꽃병이 쨍그랑, 깨어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소녀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배의 고통 때문에 점점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더 몸싸움을 이어가지 못하고 니트라는 쓰러진 내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옆구리에 꽂혀있던 칼을 뽑아, 두 사람을 겨냥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노라가 외쳤다.

 “조용히 가려고 했는데 잡은 건 너희 쪽이야.” 니트라는 피 묻은 칼끝으로 제이덕을 가리켰다. 제이덕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거잖아요! 어째서 이런 짓을.”

 “먼저 내 몸에 손댔다니까.” 니트라의 어투는 노라의 격양된 목소리와 대비되게 차갑다. 나는 그 밑에서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이 사람 마법을, 써요. 조심해.”

 “우릴 속인 건가요?! 왜 거짓말을 한 거예요! 저희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노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그 애의 다정한 믿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게 보인다. 니트라는, 아니, 자흐라 샤피크는 몇 마디 주문을 외더니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아이의 모습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고, 화려한 인상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이자 새까만 머리카락이 따라 흘러내렸다.

 “목표가 같은 게 아니야.”

 단호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너희한테 더 볼 일은 없어. 개비건만 제대로 없애버린다면.”

 “당신도 개비건과 같은 검은 파라오의 신도 아닌가요? 어째서 그를 노리는 거죠?”

 “내가 꼭 대답을 해줘야 알겠어?”

 자흐라는 한 손으로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꾹 눌렀다. 나는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채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이 사람보내면 안 돼.” 이 한마디를 뱉어내는 데도 숨이 턱까지 찼다.

 “그러면, 저희가 협조하면 좋게 끝낼 수 있는 거죠? 일단 칼 내려놓고 얘기해요!”

 초조한 목소리가 귀 양쪽에서 웅웅 울렸다서서히 혼미해지는 와중에 나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안 돼, 보내면 안

 “조용히 해.” 자흐라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순간 왼손이 엄청난 고통과 함께 오그라지며 새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관절을 모든 방향으로 꺾고 우그러트리는 것 같다. 나는 견디기 힘든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트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안 그러겠다고 했잖아요!” 두 사람은 경악해서 외쳤다.

 “할 거야 말 거야?”

 “한다고요! 할게요! 말 들을 테니까 그만 해요!”

 그 말에 묻어난 절박함이 자흐라 샤피크를 만족시킨 듯하다. 그는 방금까지 내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으로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조용히 하랬잖아.”

 그리고 물러나면서,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그냥 떠나는 게 어제 받은 찻값이라고 생각해.”

 자흐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다. 멀리서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제이덕과 노라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내 비명이 내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멀게 들린다.

 

 

 

1925. 2. 28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독한 소독약 냄새와, 은은한 커피 냄새였다. 눈을 뜨니 흐릿한 시야 사이로 울고 있는 노라와, 그 뒤에 선 제이덕이 보였다.

 “일라이저 씨. 정신이 드세요?”

 대답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굉장히 오래 걸렸다. 목 뒤쪽이 깔깔하고 입안이 메말라 말하기가 힘들었다.

 “제가 얼마나 누워있었죠?”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 있으세요?”

 나는 멍한 정신으로 기억을 되짚었다. “그 여자는.”

 “나흘 지났습니다.” 제이덕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의사를 불러올게요.”

 노라가 너무 슬프게 펑펑 울고 있어서, 나는 그 애를 달랬다. 안 그래도 슬픈 일이 너무 많았는데. 익숙한 손을 들어 올리려다 몰려오는 뭉툭한 통증에 멈칫해서 왼손을 내려다봤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 느껴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약이 너무 독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시선이 머물러 있다가 떨어진다. 나는 오른손으로 노라의 등을 쓰다듬는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언제 다시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두 사람은 매일매일 찾아왔다. 어느 아침에는 제이덕이 옆에 와 앉아서 그간 조사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그에게 대답할 말을 찾아 돌아보니 어느새 침대는 주황색으로 물들었고, 그가 앉았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스스로가 유령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눈을 감으면 침대 시트와 살이 맞닿은 자리에서부터 엉킨 실 같은 뿌리들이 뻗어내리는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 날 그대로 돌이나 나무 같은 무정물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떤 날은 아주 컨디션이 좋았다가도 순식간에 열이 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상한 꿈을 자주 꿨다. 나른하고, 멍하고, 일생을 날카롭게 세워둔 긴장의 첨단이 둔해졌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될 것만 같은 감각에 서서히 질려버렸다. 나는 진통제를 조금씩 덜 쓴다. 아픔 때문에 서서히 정신이 뚜렷해졌다.

기력이 조금씩 돌아오자 오른손으로 글 쓰는 연습을 했다. 스스로를 동정할 여유도 없었다. 잭슨 엘리어스의 무덤 위에는 이제 눈발이 내려앉고 미키 마호니의 관 위로 새로 흙이 덮일 것이다. 그러나 일라이저 웨버는 살아있다. 살아있다면 무언가 써야 한다. 애석하게도, 소위 문필가라는 작자들은, 도무지 조용히 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믐까지 날짜 여유가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회복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수술은 놀랄 만큼 경과가 좋아서, 상처는 덧나거나 하는 일 없을 뿐만 아니라 경이적인 속도로 아물고 있다. 나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그믐날에도 영락없이 쉬어야만 했다면 창문을 깨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내가 병실에 누워있는 동안 제이덕과 노라 두 사람은 쉬지 않고 조사에 착수했다. 주로 미스르 하우스와 헨슨 공업에 대해 알아보았다. 아래에 그들이 조사한 내용을 정리해둔다.

 

  •  미스르 하우스. 2400 헥타르가 넘는 넓은 부지. 원래 소유자는 이집트학자 네빌 로이드 프라이스였으며, 땅을 개비건에게 팔고 2년 전에 소식을 감췄다. 빚이 너무 많아서 파산하는 바람에 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현재 소유자는 에드워드 개비건. 저택은 원래 롱뷰라는 이름이었다가, 15년에 소유주가 넘어가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사람을 보내 알아본 결과 미스르 하우스는 작은 섬 위의 저택으로, 해자와 긴 담장으로 둘려 있었다. 들어갈 방법을 골몰하다가 미리 뱃사공과 배를 구하고, 차도 빌려두었다.

 

  •  헨슨 공업. 1921년에 아서 헨슨이 가지고 있던 회사를 에드워드 개비건에게 판매했다. 헨슨은 콘월로 은퇴했고, 그의 연락처는 찾을 수 없었다.

 

 37, 더비의 헨슨 공업을 직접 방문했다.

 헨슨 공업은 주변에는 그 용도를 뚜렷하게 알리지 않고 물건을 제작하는 공장이었다. 특기할만한 것은 공장 내부, 사무실의 기묘한 청사진들과 주 작업장의 주철금고였다.

 청사진들은 이때까지 봤던 어떤 청사진과도 달랐다. 척 보기에도 복잡한 데다 빽빽한 주석에 휘갈긴 글씨는 알아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구석에는 특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고,하얀 뱀이라는 서명이 적혀 있었다. 오래된 청사진을 베껴서 새로 그린듯한 것들도 섞여 있었다. 확인한 뒤에 대부분 못쓰게 만들어버렸다.

 금고 안에는 다양한 소형 기계 장치들이 들어있었다. 부품이 낡고 오래된 것들도 많았다. 한쪽 구석에 랜돌프 주식회사 포트 다윈 노던 준주 호주 자치령이라고 쓰인 포장 라벨이 쌓여있었다.

 

 

 더비에서 런던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포스터를 한 장 보게 되었다. 반갑게도 우리 얼굴이 거기 그려져 있었다. ‘펜휴 제단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폭행한 혐의로 펜휴 제단으로부터 현상금이 붙었다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배링턴 경위에게 연락했다. 이미 포스터를 본 모양인지 수화기 너머의 그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설명을 요구했다. 우리는 펜휴 제단과 이집트 살인의 혐의가 있는 특정 종교 집단의 관련성을 의심해서 이를 확인했으며, 사진을 남기기는 했지만 달리 누구를 때리거나 훔치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물론 물건을 가지고 나온 게 있으니 뒷부분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거기에 더해서 그들의 혐의를 강조하며 미스르 하우스에 잠입하는 일에 도움을 요청했다. 내가 찍어둔 사진을 보고 싶다고 해서 늦은 밤에 경위를 만났다.

 인화해둔 사진을 확인한 배링턴 경위는 사진을 증거물로써 윗선에 제출해볼 수는 있겠으나, 이 정도로는 개비건 정도 되는 귀족이라면 기소를 당하더라도 필시 어떻게 손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다. 우리 또한 확실한 사건 현장과 발뺌할 수 없는 증거를 손에 넣어 제대로 된 조처가 취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그믐에 미스르 하우스를 직접 찾아갈 계획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경찰력을 움직이기 위해서 더 큰 카드가 필요한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끈질기게 배링턴을 설득했다.

 배링턴 경위는 한참을 심사숙고하다 대답을 내놓았다.

 “이 사건을 맡은 지 1년 정도 되었는데.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경찰직을 내려놓을 각오로 움직여보겠습니다.”

 에식스는 그의 관할지도 아니었기에, 그는 직속의 경관 몇 명만 데리고 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정도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그 각오에 자못 큰 감동을 받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도박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옳은 쪽에 거는 도박이었다. 부디 증거를 찾을 수 있길.

 

 

 

 

 

 

1925. 3. 21

 

 

 우리는 해안에서 배를 타고 강을 따라 흘러 저택의 해자 쪽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얼굴이 쭈글쭈글한 뱃사공이 기슭에서 몰래 배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물가에서는 끈적끈적한 비린내가 진동했다.

 저물녘에 출발해 저택 부근에 도착할 즈음에는 소슬하게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습지의 섬, 그 한가운데 오래된 저택이 보였다. 세월의 무게에 저택의 하부가 가라앉아 미묘하게 뒤틀린 정취를 자아냈다. 주변은 습기 때문에 과다하게 발육한 이끼와 덩굴이 카펫 대신 깔려있었다. 안개 낀 밤의 암울한 분위기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다. 폐와 정신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오래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장소였다. 늪지에 사는 괴물에게 잡아먹힐 만큼 운이 좋지 않다면 어느날 직접 가라앉아 괴물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낡은 배는 끼익 소리를 내며 물가에 정박했다. 나는 땅에 발을 내디뎠다. 습윤한 땅은 제 형체를 유지하는 대신 발자국 모양으로 깊게 짓눌리며 탁한 강물을 꿀럭꿀럭 뱉어냈다. 주변이 어두워서 습지와 단단한 땅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공기는 축축하고 주변이 온통 물안개로 가득해 걷는다기보다 헤엄치는 기분이 들었다.

 정문 방향에서 사람 그림자 여럿이 다리를 가로질러 저택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불이 켜진 저택이 안개 속에서 음산하고 희뿌연 빛을 냈다.

 

 

 경찰들은 배 부근에서 대기하다가 필요한 때 진입하기로 합의했다. 우리는 곧장 저택 뒷문으로 숨어들었다. 저택은 넓고 안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 주의를 기울이면 숨어다닐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이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개비건 정도 되는 인물의 저택이라고 보기에는 관리 상태가 썩 좋지 않고, 가구 수도 몹시 적은 편이었다. , 사람들은 저택에 모이는 게 아니었다. 모두 저택에 들어와서는 검은 로브로 갈아입더니, 오래 머무는 대신 몽둥이를 하나씩 든 채 삼삼오오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제이덕이 일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스르 하우스처럼 17세기에 지어진 영국의 오래된 저택에는 비밀 공간이 있기 마련이라고 한다. 16~17세기는 엘리자베스 1세가 박해하던 시대라, 가톨릭 사제들이 숨는 곳을 마련해 놓고는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유의하며 각각 흩어져서 건물을 살폈다.

 제이덕과 노라가 함께 2, 3층을 둘러봤다. 손님방 가방 안에서 어쩐지 익숙한 물건을 봤다며 가져왔는데, 확인해보니 갈의 거울과 함께 쓰는 그 약병들이었다. 아마 자흐라 샤피크도 여기 온 모양이었다. 옆에는 쪽지도 하나 놓여있었다.

 

 

 

 

 

 또, 파라오를 그린 거대한 벽화에다 왕관 비슷한 것을 거는 전시대도 보았노라고 전해주었다. 스위스제 크로노미터 시계가 벽에 달려있었고, 금은으로 만든 앙크 목걸이도 여러 개 걸려 있어서 제이덕이 하나씩 들고 왔다.

 

 나는 1층을 둘러보았다. 휴게실의 사교도들은 낮은 목소리로 오늘 밤의 큰 의식에 대해, 또 오늘 새로 가입한 신입에 대해 속삭이고 있었다. 말랐다가 젖었다가를 반복하면서 돌이킬 수 없이 휘어지고 뒤틀려버린 나무 바닥은 걸음걸음 죽어가는 사람처럼 신음했다. 가는 방마다 숨길 수 없는 곰팡내가 났고 낡은 문은 여닫힐 때마다 끼익 거리며 신경을 긁었다. 검은 로브를 쓴 사람들은 그림자처럼 조용히 지나다녔다.

나는 벌레 먹고 망가진 책들만 가득한 서재를 지나쳐 메인 홀로 들어갔다. 쌍여닫이문이 있는 탁 트인 공간에 망가진 샹들리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방 한쪽에는 벽난로가 있고, 그 양옆으로 먼지가 뽀얗게 앉은 갑옷 장식이 서 있었다. 갑옷 장식 밑의 판이 움직인 흔적이 선명했다. 어렵지 않게 벽난로 양쪽에 붙은 장치를 찾을 수 있었다. 사교들의 일관적이고 음침한 취향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곳에서 조금 기다려 두 사람과 합류했다.

왼쪽의 장치를 누르자 갑옷 장식이 바닥에 난 자취를 따라 움직였다. 곧 아래로 내려가는 좁은 돌계단이 나타났다. 누가 메인홀로 들어오기 전에 재빨리 손전등을 켜고 내려갔다.

 

 지하는 더더욱 습하고 눅눅해서 조금 춥기까지 했다. 이 아래에는 고문 도구들이 즐비했다. 중세에나 쓰던 녹슨 아이언메이든과 부지깽이, 집게, 죔쇠와 함께 눈에 띄게 새 물건으로 보이는 신식 단도 몇 종류가 섞여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함께 끔찍한 용도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화로가 있다. 물건 대부분이 사용감이 있다. 인간이 바닥을 치기로 마음먹으면 어디까지 곤두박질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반대편에는 수납 선반과 책상, 탁자 셋이 나란하다. 선반에는 시든 것 같은 식물이 하나 놓여있었다. 책상 위에는 장부가 여러 권 쌓였고, 그 외에도 편지나 조각품, 책이나 두루마리들이 즐비했다. 우리는 먼저 열쇠 꾸러미를 챙기고, 거기 놓인 물건들을 빠르게 훑었다.

 조각품들은 종류가 다양했다. 흑단과 대리석으로 만든 파라오의 흉상, 머리가 악어이고 몸은 사람인 존재의 목각상, 상형문자 위를 뒤집힌 앙크 문양으로 덮은 석판 같은 것들이 있었다. 메모와 서신은 이렇게 두 장을 가지고 왔다.

 

 

  

 

 

 칼라일 탐사대의 일원이었던 잭 브레이디의 이름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칼라일 탐사대가 사교도들과 연관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당최 어떤 정황인지를 알 수 없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나는 그들이 사교의 일원이 되었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두루마리며 책들이 잔뜩 쌓여있었는데, 제이덕이 그중에서 영어로 된 것 하나와 검은 염소 가죽 표지에 잠금쇠가 걸린 16절판 아랍어 서책 하나를 챙겼다. 자기가 아는 교수에게 번역을 부탁하겠노라는 심산인듯했다. <오그니아트 민 알 진>.

 

 잡동사니로 가득한 공간을 지나 안쪽으로 철창이 달린 감옥이 열 칸 정도 이어졌다. 아주 최근까지도 사람이 갇혔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잠금장치만 신식인 걸 보니 꾸준히 사람을 납치하고 여기 가둬둔 거겠지. 내부를 쭉 훑는데, 물이 고인 웅덩이 안에 떨어져 있는 가죽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닳아 해진 지갑 안에서 그레고리 먼든 경위의 신분증이 발견되었다. 배링턴 경위의 전임자, 실종된 먼든 경위는 여기서 끝을 맞았던 것이다.

 

 

 우리는 배링턴 경위와 합류해서 그 지갑을 보여주었다. 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것은 암울한 선고이자, 확실한 증거품이다. 그는 젊은 순경 하나에게 증거품과 사진들을 쥐여주고 지금이라도 서에 지원을 요청하게끔 했다.

 

 남은 우리는 사교들이 남긴 발자국을 좇았다. 한밤중의 숲은 어둡고 을씨년스럽다. 높게 자란 나무들이 빽빽이 하늘을 막고 땅에는 제대로 된 길도 없어서 매 걸음을 조심히 내디뎌야 했다. 늪지의 음산한 숲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니 저 멀리 한 편이 불빛과 음악으로 소란스러웠다. 그 빛을 따라가자 이내 너른 공간에 도달했다. 우리는 그 공간의 초입에 다다라 몸을 숨겼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본 것을 되도록 정확하게 기록하려고 한다. 이후로 수없이 꿈에 찾아와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되었기에 복기는 어렵지 않았다. 인공적으로 다져서 만든 공터 한가운데에 거대한 이집트식 석비가 세워져 있었다. 2.5m 정도 되는 어두운 사각 돌기둥 석비에는 상형 문자들이 빽빽하게 쓰였고, 쇠고랑이 걸려 있는데 거기 산 사람이 여럿 매달려 있었다. 화톳불과 횃불이 주변에서 일렁였다.

 6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비밀스러운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전원이 새까만 로브를 입고, 석비를 중심으로 원을 이루었다. 한쪽에서는 북과 핑거 심벌즈, 기묘한 피리까지 더해서 국적이 불분명한 노래가 연주되었고, 그 리듬에 맞추어 로브 입은 사람들이 풀쩍풀쩍 뛰어다녔다. 저 멀리 사람들의 중심에 자흐라 샤피크에드워드 개비건이 보였다. 둘 다 몹시 화려한 로브를 입고 양손에 홀을 한 쌍씩 들고 있었다.

 우리가 숨을 죽이고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는 동안, 신입을 맞이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가운데에서 우두머리 두 사람이 그 사실을 알리면 신입들이 나와 사람들이 만든 원 바깥을 돌았다. 둥근 원 안의 사람들은 자기 앞을 지나가는 신입을 몽둥이로 한 대씩 때렸다. 대부분이 가볍게 치지만, 있는 힘껏 때리는 사람도 있었다. 앓는 소리와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중간에 못 견디고 쓰러지는 사람이 있는데도 아무도 개의치 않았고, 심지어는 밟고 지나가기까지 했다.

 한 바퀴를 그렇게 다 돌고 나면 중앙의 자흐라와 개비건이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신도들은 그 기도를 따라 읊었다. 목소리는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점점 줄어들어 속삭임이 되었다. 누군가는 너무 격양된 나머지 쓰러지기까지 했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이 몇 더 끌려와 석비에 묶였다. 사교도들이 묶인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돌아가며 한 대씩 때렸다.

 

 경찰 둘이 배링턴 경위를 향해 어쩔 줄 모르는 눈길을 보냈다. 물론 배링턴 경위에게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막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당장 눈앞에 무기를 든 60여 명의 광신도가 있었다. 우리는 경찰과 따로 고용한 이들까지 다 합쳐도 여덟이었다. 이대로 나서는 것은 자살 행위에 불과했다. 우리는 개죽음을 당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었다.

 우리가 서로를 당혹감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이, 고통에 찬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 비명이 너무 적나라해서 온몸의 피가 다 식어버린다.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끔찍한 무력감에 저절로 이를 악물게 된다. 노라가 바로 곁에서 라이플을 들어 올린 채 손을 떨고 있다. 나는 오른손으로 총신을 내려주었다. 그 애는 고개를 수그리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제이덕이 나직한 말 몇 마디로 노라를 위로했다.

사교도들은 사람 하나를 중점적으로 때려서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곤죽을 만들어 놓았다. 그는 죽을 지경이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를 가운데에 두고, 누군가 쐐기를 가져왔다. 그는 곧 가슴에 커다란 못이 박혀 죽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구할 순 없어. 텅 비어버린 말이다. 스스로가 사람이 아니라 슬픔과 분노에 얇은 막을 덧입혔을 뿐인 무언가로 느껴졌다.

 

 한 사람이 제물로 바쳐진 다음에는 나머지 사람들도 서서히 비슷한 꼴이 되어갔다. 개비건이 갑자기 하늘에 손을 치켜들더니 주문을 외웠다.

 그 순간 허공이 서서히 갈라졌다. 찢어진 차원의 틈새로 뭔가 거대한 것이 비집고 나왔다. 그 역겨운 몸체는 지나치게 길어서 아주 오래, 한참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날개를 펄럭이면서 내려온 괴물은 공터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쫙 펼친 날개는 공터를 다 덮을 정도의 크기였다. 공터 위를 밝히던 달빛마저 가려져 어둠은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화톳불의 불빛은 그 몸체보다 더 거대한 그림자를 자아내 춤추게 했다. 그것의 온몸에서 촉수가 뻗어 나와 어지럽게 일렁였다. 어떤 구조로 움직여지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검은 우리 신의 말씀을 전하러 왔다.

 

 사교도 몇이 자발적으로 괴물에게 다가가 자신을 바쳤다. “저를 파라오께 바칩니다!” 뒤이어 고깃덩어리를 뼈째 으깨는 소리가 났다.

 괴물은 자기 앞에 당도한 신도들을 반쯤 삼켜버렸다. 그런 괴물이 눈앞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모습을 보면서도, 사교도들은 그를 숭앙했다. 살아남는 자는 승급 의식을 통과한 것이었다. 개비건은 검은 파라오를 칭송하는 글을 읊으면서 화강암 그릇에 자기 피를 바쳤다.

 뒤이어, 사교도들은 하나둘씩 로브를 벗어던졌다. 이들은 로브 밑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대로 제 몸을 여기저기 찧으며 자해를 하거나 광기에 빠져서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점차 흥분이 고조되자, 이들은 서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괴물은 그 모습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자기가 나왔던 틈새로 돌아갔다.

 

 나는 제대로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자리에 붙박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배링턴 경위의 손짓에 겨우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투입 준비가 되었다는 사인이었다. 목격한 장면이 자아낸 충격의 여파가 채 가지기도 전에 습격 작전이 시작되었다. 다수의 경찰이 난교 중인 사람들 사이로 들이닥쳐 하나둘씩 제압했다. 우리도 곧장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군중은 혼란에 휩싸여서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온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와 노라, 그리고 고용인 하나가 자흐라 샤피크의 뒤를 쫓았다. 오밤중에 어딜 어떻게 긁히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달렸다. 분명히 다리를 겨냥한 사격이었으나 무언가에 보호받는 것처럼 총의 궤도가 살짝 바뀌어 생채기로 그쳤다.

 자흐라는 도망치는 데에도 질렸다는 듯이, 마치 변덕을 부리듯 멈춰 섰다. 앞서 달려가던 노라가 그대로 자흐라에게 달려들었다. 자흐라는 곧장 품에서 날카로운 단도를 꺼냈다. 달빛이 반사된 날이 섬뜩하게 번쩍였다. 붕대로 동여맨 상처가 아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 분명히 한 발을 제대로 쏘아 맞혔는데도 칼을 든 그 손은 잠깐 비틀거렸을 뿐 굳건한 궤도를 그렸다.

 “이 칼 기억나?”

 즐거운 추억이라도 되짚는 목소리로 물어오면서, 자흐라는 칼을 휘둘렀다. 단도가 노라의 옆구리를 깊게 파고들었다.

 노라가 자기 품으로 무너지자, 그는 다정한 손길로 머리칼을 정돈하더니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애를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총에 맞은 곳이 피로 물들고 있다. 그런데도 걸음걸이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투다.

 “역시 오른손을 남겨두지 말 걸 그랬어.”

 그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아주 가까이에서 날카로운 단도가 쇄도했다. 나는 들고 있던 총을 던져버렸다. 그가 지근거리에 붙어 휘두른 칼에 내 오른팔이 길게 베이며 핏방울이 튀었다. 나는 베이는 것을 감수하고 칼을 쥐었다. 익숙하지 않은 손동작으로 휘두른 칼이 자흐라의 샤피크의 복부에 꽂혔다. 그는 우뚝 멈춰서서는, 당혹감이 어린 동작으로 내 오른손을 꽉 붙잡았다. 나는 마주 칼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코앞에서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자흐라는 희미하게 꺼져가는 목소리로 주문을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도망갈 곳이 없다. 눈구멍의 깊은 안쪽에서부터 개미 떼가 수백 마리 기어 다니는 듯한 근질거림이 인다. 서서히 시야가 흐릿해진다.

 그 순간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칼날이 자흐라 샤피크의 목에 박혔다.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자흐라의 눈이 흡뜨이고, 입술이 꿈틀거리는데 말 대신 꾸르륵거리는 소리만 몇 번 흘러나왔을 뿐이었다. 그는 곧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있다가, 역시나 자기가 한 행동에 놀란 기색인 제이덕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숲을 헤치고 뛰어온 듯 생채기투성이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노라에게 달려갔다.

 

 

 제이덕이 노라를 부축하는 것을 도우려는데, 곁에서 살펴보니 숨이 너무 가늘고 얕다. 맥박은 놀랄 만큼 느리고 그 얼굴은 창백했다. 이런 얼굴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덜컥 샘솟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손짓으로 제이덕을 제지하고 먼저 상처를 지혈하려 했다.

 깊게 찔린 상처에서부터 피가 끔찍하게 많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처를 틀어막는 손은 금세 피범벅이 된다. 몸이 너무 차갑다. 불안감을 가르고, 노라가 물어왔다.

 “어떻게 됐어요?”

 “다 끝났어요.”

 그렇구나. 목 안쪽에서부터 작게 가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두 사람 다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노라는 정말로 안심한 것 같다저는 괜찮아요. 고마워요. 미안하고, 그리고다행이에요. 나직한 말들이 이어진다. 나는 차마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 망연자실하게 그 애의 얼굴만 바라본다.

 사실 괜찮은 것은 하나도 없다. 흘러나오는 피는 멈출 줄 모른다. 나는 이미 상황이 누군가 손쓸 수 있는 영역을 아득히 넘어섰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나 자신을 어른 취급해온 죄로 그저 내 동요가 그에게까지 전해지지 않기를 빌며, 제이덕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해야 하는 얘기가 있으면, 지금 해요.”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이루던 것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와중에 우리에게는 몇 마디 짧은 말을 나눌 시간밖에 없다.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그 애는 시시껄렁한 농담에 핀잔을 주고 매일 늦게 잠드는 제이덕을 걱정하고, 많은 것을 두려워하고, 분해하고 또 슬퍼하면서 아닌 척하고 늘 그다음에 있을 좋은 일들을 씩씩하게 이야기했다. 정말로 괜찮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그 애는 이제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노라의 표정은 졸음에 취한 듯 흐릿하다. 정말로 편안한 표정인지, 자길 걱정하는 사람을 위한 다정함인지 나는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 가족이 가족을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제이덕은 울지 않았다.

 노라가 자기를 안심시키려고 하는 걸, 그 애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그 애들은 그런 것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고마워. 노라.”

 “이제집에 가자. 집 가서 쉬자.”

 

 노라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이덕은 이후로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두 사람이 아무런 방해 없이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를 도왔다. 그는 자기 짐과 연구 자료는 내버려 두고 노라의 짐만을 챙겼다. 남은 것은 내가 분류해서 추후에 부쳐줄 생각이다. 그가 배편을 기다리며 대합실에 앉아있을 때 잠깐 곁에 앉아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조심히 돌아가고, 그럴 수 있다면 있는 힘껏 잘 지내라고, 장례식에 못 가서 미안하다고, 그런 흔해 빠진 이야기를 몇 마디 했다. 닿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그가 내게 소중한 동료였고 친구였으므로, 아마 나 자신에게도 그런 인사를 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제이덕은 그렇게 노라를 데리고 텍사스로 돌아갔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 우리는 램지를 통해서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추후 배링턴 경위의 지휘 아래 경찰이 현장을 수습했다. 개비건과 사교 집단의 혐의를 분명히 할 증거는 말 그대로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그가 개비건이 아니라 조지 5세 본인이었더라도 이만한 증거를 덮을 도리는 없을 것이었다. 개비건은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고, 자흐라 샤피크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대부분의 사교도가 당일 현장에서 붙잡혔다. 남은 잔당들은 미미한 수준이니 런던에서 활동을 존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머지않아 재판이 열릴 예정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집트 살인사건이 전부 사교 집단의 짓이라는 걸 밝혀낼 수 있었다. 나는 런던의 사교 집단의 내막과 그 배후에 대한 기사를 작성해서, 더 스쿱의 이름을 단 마지막 기사로 내보냈다. 조나 켄싱턴이 요청했기에 미국에도 한 부를 부쳤다.

다음에는 얄레샤 엣삼을 찾아갔다. 그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있었던 일들에 대해 짤막하게 얘기해주었다. 노라의 소식을 듣자, 얄레샤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펑펑 울었다. 어쩐지 두 사람이 조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얄레샤가 앞으로도 무탈하게만 지낸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정신없이 숙소로 돌아왔을 때, 나는 손에 가득했던 일감을 어느새 탕진해버렸음을 깨달았다. 숙소가 턱없이 넓게 느껴졌다. 공허한 집안은 냉기마저 흐르는 것 같다. 나는 반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분명 익숙한 일이었음에도 어쩐지 익숙한 척도 할 수가 없었다. 견딜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서, 책상 위를 닥치는 대로 뒤졌다. 그리고 텅 빈 바닥에 자료를 하나씩 펼쳐나간다. 바닥이 점점 빼곡하게 들어찬다. 억지로라도 돌려보내야 했던 걸까? 그랬더라면 최소한……. 아니, 소용없는 생각이다.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무슨 억지를 부리건 간에 그 애들은 돌아가지 않았을 거다. 노라는 아주 정이 많았다. 자기 손에 닿는 것들은 전부 도우려고 했다. 제이덕은, 굳이 자기 일이 아니어도 될 일에까지 호기심과 책임감을 함께 느꼈다. 그것뿐이다. 나는 그 애들에 대해 가족들이, 친구들이 아는 것만큼 많이 알지 못한다.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은 비일상에 가까웠다. 그래도 딱 하나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 애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내가 사람의 어떤 점을 소중하게 여겼는지 선명하게 되새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런던에서 진통제에 취해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노라는 이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 땅속에 묻혔을 것이다. 그 애가 두 손을 모으고 누워있으면 그 애를 사랑하는 가족들이 둘러서서 인사를 나누고, 교구 목사는 그 애가 언제나 신실했고 사랑받아 마땅했기 때문에 일찍 하나님 곁으로 데려가셨다고 기도했을 것이다. 제이덕은 쭉 그 애의 곁에 있어 줬을 테고. 그리고 노라는,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들도 다 위로해주고 싶어 할 것이다. 나는. 바스락, 바스락, 종이들이 흩어졌다. 세상에 신이 있고 응당 그렇게 되어야 하는 순리라는 게 정말 있다면 그저 그 애들이 다치지 않길 바랐다. 한 손이 바삐 움직여 글자들 위를 훑어내린다. 하지만. 늘 그렇듯 바람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손끝이 이름, 이름, 이름들 위를 스친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뭐든 스스로 해내야 한다. 손끝이 한달음에 바다와 산맥과 강을 건넌다. 나는 세상의 밝은 곳을 지키고 싶어 애쓰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의 비극을 막지 못했다. 나는 다시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

 손가락이 우뚝 멈춰서서 지도 위의 한 점을 두드렸다.

 “상하이.”

 넓은 방에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낯설다.

 

 

 

 방향을 결정하고 나서, 나는 그대로 쓰러지듯 드러눕는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오른손을 쥐었다 편다. 그 빌어먹을 자식들은 런던에서 내 양팔을 다 자르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1. 전선 조광증 이야기는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 오마주하였습니다. [본문으로]</서부전선>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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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2. 11

 

 영국행 여객선에 탑승했다.

 상태가 좋지 않았던 두 사람이 객실에서 쉬는 동안, 나는 갑판으로 나왔다. 배의 난간에 양팔을 기대고 뉴욕의 부두가 나를 배웅하게 두었다. 기름과 쇠와 젖은 나무와 소금 냄새. 어딘가로 떠나는 것은 다시 돌아오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었으므로 그 사실에 바치는 작은 의식이자 습관.

 짧은 의식은 예상치 못한 방해를 받았다. 부두에 무심히 시선을 두고 있던 나는, 한순간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찰나임에도 분명한 적대감이 피부 위로 소금기처럼 달라붙었다. 그 눈길은 배도 바다도 아닌 나를 향했다. 내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오래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시선의 의미는 섬뜩하리만치 분명했다.

 긴 기적 소리가 나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육중한 배는 바다 위로 금방 지워질 흔적을 그리며 나아갔다. 흰 포말이 흘수선을 적셨다. 부두가 시야 속 자그마한 점으로 오그라드는 동안,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그 눈길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다시 선실로 돌아왔을 때는 온몸이 꽁꽁 얼어있었다.

 

 우리는 일주일 정도 배에 머물렀다. 내내 날씨가 맑았다. 바다는 자신의 다정한 면만을 보여주었다. 극심한 뱃멀미에 시달리던 노라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제이덕의 상태를 살필 겸 그와 같은 선실을 썼다. 그는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을 한시도 놓지 않으면서 가끔 다른 물건들도 일삼아 들여다보고는 했다. 제이덕이 알아낸 것은 이 정도다:

 

 구리 그릇. 꿈 보내기 주문에 사용되는 그릇이다. 구리를 닮긴 했지만, 사실 구리가 아닌 정체 모를 금속 재질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사용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항해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노라는 출렁이는 바닥에 적응했다. 하지만 제이덕은 여전히 책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혼잣말이나 비정상적인 연구욕은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기운을 차린 노라가 겨우 그를 끌어내서, 간만에 셋이 바닷바람을 쐬러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멀고도 가까운 겨울 바다를 바라보면서, 몇 가지 짧은 얘기를 나누었다.

 어느 방향을 살펴봐도 육지는 없고 까마득한 수평선만이 시야에 가득했다. 막막하고 거대한 바다는 사람의 악의와 그것이 불러올 수 있는 비극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듯했다. 그런 광막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정말 미욱하고 하찮은 존재처럼 느끼게 한다. 이 거대한 세상에 고작 내가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하는 자조부터, 작은 내가 사라진 뒤에도 아무렇지 않게 흐를 무신경한 세상에 대한 통찰까지 이어진다. 허무, 허탈감, 경외심,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를 초월한 거대한 것에 의한 열병. 인류를 오래도록 사로잡았을 감정이다. 여러 가지 대처법이 있어왔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이렇게 스스로가 먼지처럼 작은 존재로 느껴질 때 오히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뒤틀린 용기를 얻는다.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1925. 2. 18

 

 사우스햄프턴에 도착해서 곧장 런던 행 기차를 탔다. 입국 심사 중 제이덕에게 난처한 일이 생겨서,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훌쩍 늦은 시간이었다. 역에 가까운 아무 방을 급하게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은 따지는 게 많은 편이었는데, 노라가 능숙하게 대처했다. 씩씩한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된다. 노라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다. 

 

 

 

 

 

1925. 2. 19

 

 시내로 들어가 적당한 중저가 호텔을 새로 잡았다.

 숙소를 옮긴 뒤, 먼저 조사할만한 장소의 목록을 정리했다. 지도를 펴고, 서적과 안내서도 꺼냈다. 잭슨이 영국의 더 스쿱 신문사에 자주 들락거렸다는 얘기를 조나가 해준 적이 있다. 참고하여 작성했다. 비자는 한 달여를 생각해두었으므로 그렇게 빡빡한 일정은 아니다.

 

  •  더 스쿱 신문사
  •  센트럴 뉴스 에이전시
  •  언론 협회
  •  영국 박물관
  •  런던 도서관
  •  펜휴 재단

 

 일정은 여유로운데 마음이 급한 게 문제랄까. 제법 바쁜 하루였다.

 들른 장소와 얻은 정보를 정리해둔다.

 

 

 

 런던 도서관

 -펜휴 재단

 이집트 학자 오브리 펜휴 경이 1890년에 설립하였다. 

 주로 이집트 탐사를 지원하고 감독한다. 이집트 역사/유물 연구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한다. 이집트 당국의 허가를 받고 합법적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현재 재단 대표는 에드워드 개비건.

 

 영국 박물관

 펜휴 재단에서 지원한 사업이 20여 건 정도 되는데, 오브리 펜휴 생전에 직접 참여한 탐사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현재 재단의 지원을 받는 탐사대로는 기자 고원에서 발굴 작업 중인 헨리 크라이브 탐사대가 있다.

 

 펜휴 재단

 철제 울타리로 둘린 건물에 경비원이 서 있다. 정문은 열려 있고, 사람들이 여럿 나다녔다. 복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에는 서고와 사무실이 대부분이다.

 2층의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전시된 이집트 유물들은 고고학 박사 제이덕을 매우 흥분시켰다. 따로 허가를 받고, 3왕조 말기 시대의 자료를 온종일 찾아 헤맨 끝에 딱 하나를 건졌다.

 

하워드 카터는 투탕카멘의 발굴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부두의 그 눈길을 잊기 어렵다. 사실 과민반응은 아니었다. 런던에서도 벌써 감시가 붙었기 때문이다. 잭슨 엘리어스는 이런 일을 혼자서 어떻게 감당했던 걸까.

 생각보다 자료 탐색이 길어져, 노라가 몹시 가고 싶어 했던 대영박물관의 제국 박람회 일정은 미뤄졌다. 노라는 매우 아쉬워했다. 제이덕과는 달리 노라는 책이 별 재미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한 달 내리 책에만 파묻혀 지낼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아주 운이 좋은 상황일 것이다.

 

 

 

 

 

1925. 2. 20

 

 제이덕의 증상이 심각하다. 그러니까, 이상한 얘기를 한다. 무슨 일이 있건, 우리는 함께 있을 수 있어요! 우리는 함께할 수 있어요. 이런 식이다. 그렇게 뇌까리는 눈빛이 묘하다.

 제이덕이 씻는 동안 노라와 긴급회의를 가졌다. 역시 저 책이 문제다. 제이덕은 씻으러 들어가면서도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을 욕실 문 바로 앞에 뒀다. 설마 씻는 내내 문틈 사이로 저 책을 보고 있기라도…… 말이 끝난 순간 소름이 쭉 돋으며, 방 안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 지점에 집중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나와 노라는 정말 애를 썼다. 어떻게든 그 책을 빼돌리고, 끈적한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다.

 물론 실패했다. 광인의 감각은 날카롭고 예리한 법이다. 결국에는 연구가 끝날 때까지만 더 지켜보기로 타협했다. 그 이후로도 계속 저렇게 상태가 좋지 않을 시 미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최선이다. 제이덕 본인을 위해서라도.

 

 

 

 더 스쿱 신문사.

 사장 미키 마호니와 만나 잭슨 엘리어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보를 전하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마호니는 시가를 뻑뻑 피워댔다.

 그에게 들은 얘기를 요약하자면: 잭슨은 이 도시의 교단을 조사하면서 그의 도움을 받았다. 잭슨은 미키 마호니에게 교단에 대한 기사를 약속했으나,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도망치듯 황급히 영국을 떠나야만 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몰랐다. 

 우리는 마호니의 도움을 받아 잭슨 엘리어스가 흥미를 보였던 기사 몇 개를 찾았다. 

 

 

 

 

 세 기사는 전부 기자 서명이 없었다. 통신사에서 기사를 받아 더 스쿱에서 고쳐 쓴 글이라 그런 모양이다. 엘리어스는 이 기사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한 것 같다. 그는 배링턴 경위를 직접 만나러 가기도 했고, 이집트 살인 사건과 더불어 펜휴 재단에도 관심이 많았다.

 쉬플리의 경우에는 살인 사건과 직접 연관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자기 집에서 그림을 상시판매한다. 주소는 기사 아래쪽에.

 

 미키 마호니는 여전히 사교에 대한 기사를 살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나쁘지 않은 일감이다. 그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조사에도 더 뚜렷한 방향성이 잡혔다. 들를 곳이 늘었다고 할까.

 

  •  마일스 쉬플리의 집.
  •  뉴 스코틀랜드 야드.

 

 더 스쿱에서 빠져나온 뒤, 먼저 배링턴 경위에게 연락해서 내일의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오늘의 남은 시간은 쉬플리의 집을 방문하는 데 쓰기로 했다.

 

 

 

 

 마일스 쉬플리의 집. 첼시.

 문을 두드리자 허리가 굽은 노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쉬플리의 어머니인듯했다. 우리는 그림을 보러 왔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안에 들어서고 나서 제일 처음 느낀 것은 집 전체에서 나는 기묘한 냄새였다. 농장 출신 노라 에버트는 그것이 파충류 냄새와 비슷하다고 짐작했다. 냄새는 집 전체를 떠다녔다.

 조금 기다리자 비쩍 마른 남자가 계단 위에서 내려왔다. 마일스 쉬플리는 말을 심하게 더듬고,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 불안정한 사내였다. 그는 다락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작업실로 쓰이는 다락방은 휑했다. 천에 덮인 그림이 여럿. 가운데에는 이젤과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쉬플리는 떨리는 손으로 자기 그림을 보여주었다. 대강 글로 요약해두자면:

 

-초록색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약병들 앞에, 파충류 인간이 덩어리지고 피투성이인 무언가를 해부하고 있는 그림.

-고대 이집트의 행렬 그림. 수많은 이들이 무릎을 꿇은 앞에 파라오가 탄 황금 전차가 지나간다. 파라오는 검은색, 금색으로 된 로브를 입은 뒷모습. 전차의 뒤에는 배가 갈라진 사람이 양쪽에 말뚝으로 꿰여 있다. 자칼 무리가 그 배에서 흘러나온 내장을 쫓는다.

-언덕 위 하얀 건물과 호수 그림. 거대한 용이 솟아올라 있고, 그 아래 수백 명의 사람이 묻혔다. 서로 물어뜯으면서 피와 내장을 쏟는다. 

-한밤중의 숲 그림. 모닥불 주위를 벌거벗은 남녀가 뛰어다닌다. 노란 달이 떴다. 불꽃 위에 염소 머리를 한 남자가 보이고, 그 앞에 세 명의 소녀가 선다. 그 환영이 긴 팔을 뻗어서 마술을 부린다.

-인신 공양 의식 그림.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이 제물의 배를 가른다. 제물의 가슴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나중에 들었는데, 제이덕은 이 문양이 순간 꿈틀거리는 환상을 보았다.— 피가 바닥에 놓인 책으로 떨어진다. 그 책에는 벌레가 우글거린다.

-높은 산 위의 괴물 그림. 머리는 피에 젖은 거대한 촉수 한 줄기 같다. 그 산에는 사원이 있다. 사원 근처에서 사람 형상들이 손을 하늘로 뻗고 애원한다. 사람 형상들의 머리에도 촉수 비슷한 것이 돋아 있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촉수가 붙은 의식용 가면이다.

 

 

 심약한 화가의 겉모습이 품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잔학한 이미지였다. 비현실적인 입체감이 있었다. 나는 쉬플리의 그림이 싫었다. 거칠고 강렬한 붓 터치가 망막에 폭력적으로 인상을 새겨넣는 듯했다. 불쾌하고 끔찍하고 유독한 인상을. 그저 본다는 행위 하나를 선택한 결과로 감내하기에는 지나치고 부당한 폭력이다.

 나는 그림에 집중하지 않기 위해 쉬플리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어디서 영감을 얻었냐는 질문에, 쉬플리는 자기가 과거의 편린을 보고 그린 것이라 대답했다. 그는 지나치게 긴장했고, 불안해했다. 그 밖의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은 대부분 얼버무렸고…… 그의 옆에는 대조적으로 평온한 얼굴의 노인이 서 있었다. 나는 무심코 시선을 떨구었다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경험을 했다.

 그림자가 이상했다. 주변이 어두웠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왜소한 노인에게서 생길 크기의 그것이 아니었다. 의심을 가지고 살피자 상황이 더 분명하게 보였다. 두 사람은 가족인 척 대화를 했으나, 아들은 분명 엄마에게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집안에 가득 찬 역겨운 냄새와 끔찍한 그림 때문에 상태가 나빠진 노라는 결국 바닥에 토했다. 속을 게우기 위해 고개를 숙였던데다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던 노라는, 자기가 본 것을 표현해버렸다. 그러니까, 그림자와 노인을 번갈아 손가락질했다.

 노인은 무표정했다. 뭐라고 말을 중얼거렸던가? 노라는 순식간에 마법에 걸린 것처럼 차분해졌다. 나는 경악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봤지만, 거기에 노인은 없었다. 인간의 형상이 찌그러지더니 몸집이 부풀었다. 허물 벗듯 드러난 모습은 비늘 달린 괴물이었다.

 나는 제이덕이 괴물에게 다가가려는 걸 말리며, 다급하게 총부리를 들이댔다. 당신 뭡니까?

 그것은 쉭쉭 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복종해라. 인간. 복종해.

 내가 바라던 대답은 아니다.

 

 "싫어."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쉬플리는 잔뜩 겁에 질려, 벽에 구겨져 들어가려고 했다. 탄환이 질긴 가죽을 뚫었다. 상처에서 끈적한 피가 흘렀다. 괴물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총알이 상처를 냈다는 것은, 죽일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무언가 내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걸었다. 그 불쾌한 침입에 대한 감상을 말로 뱉기도 전에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 끔찍했다. 산 채로 천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목 안쪽으로 신맛이 났고,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눈에 피가 맺혀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온통 흐리고 붉었다. 이상하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얼굴이 하나 있었다. 보고 싶지 않았는데, 고통 때문에 벌레처럼 나약해져서 보는 걸 멈출 수가 없다. …….

 아주 어렸을 적의 나는 너무 겁에 질렸을 때 그대로 가만히 있기만 하면, 그러니까 숨도 쉬지 않고 눈도 깜빡이지 않으면, 무서운 일이 그대로 지나가 줄 거라고 믿었다.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숨을 참으면서, 나는 이대로 돌이 될 테니까, 세상은 나를 모른 척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내가 정말로 굳어서가 아니라 긴장과 두려움 때문에 죽어버리기 전에, 윌리엄은 늘 먼저 나를 찾아냈다. 형에게는 그런 이상한 초능력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하지만, 하필이면. 지금. 왜? 

 

 

 한참 지나서야 다시 정신이 들었다. 환상도 없고, 고통은 견딜만한 정도로 줄어들었다. 주변은 지독한 파충류 냄새가 났고 몹시 어두컴컴했다. 노라는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는 꽁꽁 묶인 채 벽 안쪽의 공간에 갇혀 있었다. 문 너머에서 쉬플리와 괴물의 대화가 들렸다. 괴물은 쉬플리에게 우리를 감시할 것을 명령하고 떠났다.

 몇 마디 속삭임 끝에 겨우 밧줄을 풀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방의 선반 위에는 어두운 물질이 든 유리병이 몇 개. 벽에는 기묘한 기호가 가득하고 한쪽에는 금속판이 달린, 돌 욕조가 있었다. 욕조를 살짝 열어봤다가 잘린 머리와 인사하고 다시 덮어두었다. 호기심이 일라이저 웨버를 죽인다. 

 한참 생각에 골몰하던 제이덕은, 우릴 가둔 괴물에 관한 내용을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아주 고대에 지구에 살았던 종족인 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 존재가 런던 한복판에서 화가와 함께 살고 있다니. 여러모로 나의 이해를 초월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벽 너머의 쉬플리를 설득했다. 괴물에게 협박당하고 있다면 도와주겠노라고,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고 얘기했다. 설득이 잘 먹혀들어서, 우리는 괴물이 뒤뜰로 나간 사이 부엌에 매복할 수 있었다.

 그 짧은 사이 괴물은 다시 노인의 거죽을 쓰고 있었다. 유약한 노인의 겉모습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으나 결국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아까 같은 경험은 다시는, 절대로 사양이었다. 총에 맞자 인두겁이 벗겨졌다. 찢어지는 비명. 괴물은 온 집안을 기름때처럼 덮었던 그 지독한 악취를 풍기면서 무너져내렸다.

 

 

 이 뒤로는 마일스 쉬플리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다. 그가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말했기에 정황이 다소 왜곡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이 괴물은 갑자기 쉬플리에게 찾아와서, 굉장한 소재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을 만들어주었다. 쉬플리는 괴물이 준 약을 사용해 과거에 다녀왔다. 과거의 충격적인 장면들은 그의 뇌에 큰 상흔을 남겼고, 화가는 이상한 그림을 잔뜩 그렸다. 괴물은 화가의 어머니를 잡아먹고 어머니의 모습으로 변했다.

 

 쉬플리는 지저분한 방에서 마지막으로 조금 남은 녹색의 약을 꺼내주었다. 그리고 잠겨 있던 다락의 벽장도 열었다. 벽장 안에는 천에 덮인 커다란 캔버스가 있었다. 뱀의 제단이라는 제목의 미완성품으로, 괴물의 명령을 듣고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뱀이 들끓는 고대의 늪지대를 그린 그림이었다. 늪지 중앙의 작은 섬에는 석제 제단이 있었다. 속이 매스껍다 싶더니, 문득 그림이 일렁였다. 벌레 울음, 물소리가 멀었다가 가까워졌다. 줄기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꿈틀대는 뱀 비늘이 어지러이 빛을 산란했다. 제단은 그 빛을 머금었다…… 풍경이 서서히 현실을 잠식했다. 흡사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재빨리 나를 붙잡아준 제이덕이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이덕이 살펴본 결과 그림 속 식물들은 2억만 년 전 페름기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뱀 인간이 정말 고대의 존재라면 설명이 되는 이야기다. 인간 화가를 시켜 그들에게 남은 어떤 유산을 그려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괴물이 죽은 이상 목적은 영영 알 수 없지만, 그 어떤 낙관주의자도 그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이유이리라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그림은 이제 산산이 조각나서 더는 찾을 수 없다.

 쉬플리는 죽음숭배교단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림들은 분명 교단이 묘사하는 어두운 신과 연관되어 있다. 더 깊게 엮이지 않는 편이 이 화가에게도 좋을 것이다.

 밖으로 나왔을 즈음에는 새벽이었다. 어떻게 숙소로 돌아왔는지도 잘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1925. 2. 21

 

 아침 일찍 센트럴 뉴스 에이전시에 들렀다. 간단하게 몇 가지를 알아냈다:

 -1년 전 즈음에 일명 이집트 살인사건을 조사하던 그레고리 먼든 경위의 실종 사건과 관련된 기사. 경위는 목격자도 흔적도 없이 증발하였다.

 -이집트인들이 살해당한 사건에 대한 제보를 부탁하는 기사도 있다.

 

 

 점심을 먹고 뉴 스코틀랜드 야드로 배링턴 경위를 만나러 갔다.

 그는 50대 정도 되는, 격무에 치인 남자였다. 처음에는 우리를 신용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마도 정보를 캐내서 기사를 쓰려 한다고 의심하는 것 같았다. 죽음숭배교단에 대한 얘기는 허무맹랑한 희언으로 취급했다. 제이덕의 학위 검증과 장구한 설득이 있고 나서야 제대로 사건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집트 살인사건: 피해자가 주로 이집트인(19명 중 17명)이고 비슷한 흉기에 찔려 죽은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

 -수법: 머리와 몸통 곳곳에 맞고 찔린 상처가 있다. 거대한 못이나 바늘이 달린 몽둥이가 흉기일 것으로 추정.

 피해자 중에서 소호에 있는 블루 피라미드 클럽(영국 내 이집트인들이 많이 모이는 클럽) 단골들이 많아 따로 감시해본 적이 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관계자들의 자문: 종교 살인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펜휴 재단의 에드워드 개비건과 대화했다. ‘검은 파라오의 결사’라는 단체의 수법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 단체는 이미 수백 년 전에 사라졌다.

 자흐라 샤피크라는 향신료 상인과도 이야기를 해보았는데(펜휴 재단에서 일한 적 있음, 이집트인), 역시나 옛날얘기에나 나오지 실제로 있는 종교이지는 않을 거라고 한다. 그가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아 미행해봤지만, 역시나 건진 건 없었다.

 -목격자의 증언: 소란스러워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봤더니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피해자가 ‘호텝’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고대 이집트어로 휴식이나 평화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먼든 경위가 1년 전에 그렇게 사라진 후 배링턴이 뒤이어 사건을 맡아 조사하게 되었다. 먼든 경위는 너무 깊은 곳까지 발을 들였던 것일까? 뉴욕에서 벌어졌던 사건과도 여러모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 또 못이 박힌 몽둥이라면, 콜즈 교수가 얘기했던 오스트레일리아의 종교도 연상된다. 생각해볼 점이 많다.

 우리는 더 자세히 알아보고, 제보할 게 생기면 꼭 제보를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서를 빠져나왔다.

 

 

 

 저녁에는 드디어 노라가 궁금해하던 박람회에 들렀는데, 제이덕이 헛것을 보는 바람에 빨리 숙소에 돌아가 쉬게 되었다. 그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거대한 여인, 팔에 코브라를 감은 여인의 환상을 설명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앉아서는 아내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말씨도 차분했다. 어쩌면 연구의 끝이 보이는 탓일까? 좋은 신호일까.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긴 한데, 노라는 내심 안도한 듯하다. 나는 어디까지 낙관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좋은 환각은 없다. 환각이 좋을 수는 없다. 그 내용이 어떻건 간에 현실에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이덕이니만큼, 더 나은 쪽을 희망하게 된다.

 

 

 우리는 늦은 시간에 블루 피라미드 클럽으로 향했다.

 1층에는 청과상이 있고, 계단이나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2층에 클럽이 있다. 

 문 앞에는 문지기가 서서 회원 카드 확인을 했다. 회원제 클럽으로, 가입이 필요했다. 우리는 입장 데스크에서 따로 돈을 내고 명단에 적당한 가명을 썼다. 빠르게 훑어본 결과, 그 명단에서 자흐라 샤피크와 에드워드 개비건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들어가서 적당히 자리를 잡고 손님들을 살펴보았다. 화려한 밸리 댄스 공연이 끝나고, 댄서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손님들 사이를 누볐다. 무용수에게 손을 대기라도 하면 경비원에게 끌려갔는데, 개중 어떤 손님들은 그 규칙에 좌우되지 않는 특별 대우를 받는 것 같았다.

 웨이터에게 그 손님들에 관해 슬쩍 물어보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굴하지 않고 바텐더에게도 가서, 적당히 아무개 작가인 척 수작을 걸었다. 그러다 비싼 술을 사면 내밀한 공간으로 안내해준다는 제안을 들었다. 나는 반신반의했지만, 망설여봤자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지 싶었다.

 안내를 받은 곳은 바 뒤쪽을 통해 들어가는, 아늑하고 불건전한 방이었다. 나는 얼마 기다리지도 않고 덩치 큰 남자 둘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말 한마디 없이 바로 내게 덤벼들었다. 내가 총을 꺼냈는데도 주춤하는 기색이 없어, 결국 위협용으로 발포했다. 총성이 울리고, 스쳐서 피가 났는데도 둘은 포기할 줄 몰랐다.

 남자 하나가 옆에서 의자를 들고 내 머리를 후려쳤다. 눈앞에 불이 번쩍하고, 의자가 그대로 작살났다. 거의 동시에 문이 활짝 열렸다. 한쪽 눈앞이 축축해져서 잘 보이지 않았던 데다 역광이 져서,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일라이저 씨, 거기 있어요? 괜찮아요?”

 

 조금 어눌한 듯 용감한,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안도감에 맥이 풀렸다.

 

 “아, 예. 괜찮아요.”

 

 달릴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앞의 남자를 밀치고 제이덕이 있는 곳까지 달렸다. 우리는 그대로 정신없이 도망쳤다. 어디로든 뛰어들어 숨었다. 아마 강변의 수풀이었던 것 같다. 이어서 뒤쫓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지나가고, 곧 조용해졌다.

 우리는 긴장 후의 늘어짐 상태로 조금 떠들었다. 그런 데는 어쩌려고 따라갔느냐고 혼나기도 했다. 처음부터 함정이었거나, 내가 티가 많이 났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튼, 블루 피라미드 클럽이 수상한 교단과 관련된 장소인 것은 확실해졌다. 노라가 손수건을 꺼내서 상처를 닦아줬다. 제이덕은 그 사이 무용수 한 사람에게 쪽지를 받았다고 한다. 얻은 게 아예 없지는 않았던 셈이다. 내용은 이랬다. ‘자정에 아래쪽 길가 근처 다리 밑에서 봐요.’

 

 

 

 자정.

 다리 밑의 무용수는 자신을 얄레샤 엣삼이라고 소개했다.

 얄레샤의 남자친구는 이집트 살인의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얄레샤에게 찝쩍거리던 손님 중 하나를 위협했다가 끔찍한 보복 살인을 당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은 것은 복수에의 의지 때문이다. 다만 어설프게 시도했다가 겪게 될 교단의 보복도 두렵거니와, 경찰 내에 조력자가 있을 수 있다는 위험 때문에 직접 고발하지 못하고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얄레샤가 알아차릴 만큼 우리는…… 그래. 티가 많이 났던 모양이다.

 얄레샤는 우리에게 가게에 대한 정보를 몇 가지 알려주었다.

 

 -한 달에 한 번 자정 전후에 트럭이 와서 손님들을 태우고 간다. 목적지는 런던 밖의 어딘가.

 -손님은 전부 검은 파라오의 결사 소속이며, 자흐라 샤피크가 그들을 이끌고 있다. 자흐라 샤피크는 엠파이어 향신료 가게 주인이다.

 -직원들도 대부분 검은 파라오의 결사 소속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직원 중 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못 들어가는 공간은 1층의 창고.

 

 

 얄레샤를 돌려보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살폈다. 우리는 줄곧 감시당하곤 했으니. 누군가 얄레샤와 우리와 만난 장면을 보기라도 했다면 큰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 건너편에서 사람 셋 정도가 그가 사라진 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기우이길 바라면서도 황급히 뒤를 쫓았다.

 그들은 어두운 골목에서 얄레샤를 습격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뒤따라갔기에 비교적 손쉽게 이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얄레샤는 눈물범벅인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얄레샤를 진정시키면서, 우리는 쓰러진 습격자들의 처우에 대해 고민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결국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경찰에 넘기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경찰이 제대로 대처할까? 고작해야 습격 미수라면. 이들은 언제든 풀려나거나 교단의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얄레샤 엣삼은 순식간에 처리당할 테고. 우리는 떠나면 그만이지만, 얄레샤는 계속 런던에 살아야 한다. 이 셋이 자기가 본 걸 말하게 둘 수는 없다.

 주주 하우스 지하에서 봤던 시체들이 떠올랐다. 죽은 뒤에도 자유롭지 못했던 사람들. 그 위로 잭슨 엘리어스의 마지막 모습도 겹쳤다.

 

 

 뉴욕의 부두에서 나를 노려보던 싸늘한 눈빛.

 런던 행 내내 나는 그 눈빛의 의미에 대해 골몰했다.

 그들이 믿는 신이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안다. 그러나 도시의 그림자에 숨어 살면서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배를 가르는 것은 인간이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인간성을 잃은 인간들과 싸우고 있다. 인간 거죽을 덮어쓴 뱀 인간과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사람인 척하지만 사실은 사람이 아니다. 쉽게 뿌리뽑히지도 않는다. 반푼어치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믿으며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나를 노려보고 있다. 이제 편안한 밤은 다시 없을 것이다.

 

 얄레샤가 너무 겁에 질려 있어서, 우리 숙소에 하룻밤 머무르게 하기로 했다. 가는 동안 감시를 조심하라고 단단히 일러두고 세 사람을 먼저 돌려보냈다.

 물론 나는 경찰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습격자들의 소지품을 뒤졌다. 대형 단도와 몽둥이가 하나씩 나왔다. 이들이 빈손이었더라면 생각이 바뀌었을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들이 무기를 가졌다는 사실이 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 했다.

 마침 주변에 제법 큰 쓰레기통이 있었다. 나는 아주 세심한 동작으로 쓰러진 몸을 옮겼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커다란 단도를 썼다. 한 명씩 쓰레기통에 넣고 조심스럽게 목을 찔렀다. 손에 쥔 흉기를 타고, 피부 아래 연약한 살과 단단한 뼈 사이로 불청객을 욱여넣는 느낌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남자는 고통을 느꼈는지 눈을 부릅떴다. 그 얼굴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마치 뇌에 사진으로 찍어 남긴듯하다. 그렇게 어두운 밤중이었는데. 뭐라 비명을 지르려고 했던 것 같은데, 피거품 섞인 목소리는 말이 되지 못하고 울컥울컥 쏟아졌다. 눈에 들어왔던 빛은 금방 꺼졌다. 눈을 뜬 그대로 절명해서, 표정은 마치 왜?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어째서? 사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인데. 하지만 굳이 깨워서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대화를 시도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이들을 사람처럼 느끼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들은 내 미약하고 말도 안 되는 소망처럼, 죽었다고 껍질이 벗겨져 괴물의 본모습을 드러내거나 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생각보다 금방 해낼 수 있었다. 바닥으로 피가 많이 흘렀기에 밟지 않도록 조심했다. 손발과 머리는 줄곧 찼다. 나는 꽤 다양한 살인자를 만났고 그들에 대한 기사를 썼다. 그들과 그들의 실수를 알았다. 되도록 생각을 두 번 세 번 하지 않고, 알고 있는 대로만 행동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산책 나온 사람처럼 걸을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 수 있었고,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그늘 속에서 눈을 감으면 아직도 부두의 그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내 이름은 일라이저 웨버.

 

 이것은 나의 기록이다.

 한때는 사람의, 사람을 위한 밝고 명징한 기호와 세상을 믿었다.

 살아온 세월이 그리 길지는 않아도 언제나 그런 것들을 위해 발을 내딛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어떤 것은 어둠 속에 영원히 묻어 두어야만 한다.

 

 

 

 

 

 제이덕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온몸이 꽁꽁 얼었다. 걱정을 시켰구나 싶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방에서는 알코올 향과 섞인 달짝지근한 냄새가 조금 났다. 얄레샤는 일찍 곯아떨어져 있었다. 노라가 위로를 잘해준 모양이었다.

 

 "얄레샤가 열아홉 살이래요. 남자친구는 고작 스물하나였대요."

 

 그렇게 말할 때 노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갈라진 것처럼 들렸다.

 씻으러 들어갔다가 조금 놀랐다. 온몸에 기묘한 상처 자국 같은 게 남아 있었다. 그 끔찍한 주문의 여파일까? 자각하지 못했는데, 상처는 서서히 희미해지는 중인 것 같았다. 별수 없이 긴소매를 골라 입었다. 노라가 붕대를 새로 감아주는 동안, 나는 생각해뒀던 변명을 읊조렸다. 경찰을 불렀고, 머리의 상처를 빌미로, 내가 이들에게 공격받았다고 신고했다는 식이다.

 그리고 바로 누우려 했는데, 제이덕이 연구 때문인지 많이 심란해해서 함께 술을 좀 마셨다. 새삼, 이 애들과도 기묘한 애착이 생겨버린 것이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너무 오래, 함께 노출되어서겠지. 도움을 받고 도움을 준다. 믿고 의지한다. 혼자 내키는 대로 나다닐 때는 그저 머리로만 알던 문장이다. 밝은 창가에 얼굴을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다. 인간이 인간을 돕는 것은 본성이다. 그리고 나는 지옥에 떨어질 거다. 

 

 

 

 

 

 

1925. 2. 22

 

 제이덕이 연구를 마무리했다. 아침 일찍, 이룬 성과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에는 기묘한 주문이 하나 들어있다고 한다. 

 

 

 나이젤 블랙웰.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

쉼바 생성. 마력 12. 이성 1d6. 꼬박 하루의 시전 시간. 이 주문의 유래는 케냐. 케냐의 키쿠유족 주술사가 개발한 주문으로, 언데드 하인을 만든다. 쉼바가 될 사람은 의식에 따라 상처를 내서 죽여야 한다. 의식의 순서나 내용도 책 안에 쓰여있다. 시체의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18~20시간 동안 시체를 굽어보면서 주문을 외워야 한다. 되살아난 존재는 간단한 명령을 듣는다. 쉼바는 점점 썩어서 못쓰게 되기 때문에 하인이 필요하면 계속 사람을 죽여 만들어야 한다. 

 

 제이덕은 우리에게 일전에 읽었던 키쿠유족에 대한 기사를 주지시켰다. 주주하우스. 쉼바. 키쿠유족. 칼라일 탐사대. 어떤 미약한 연결고리가 보인다. 만약 키쿠유족 또한 이 사악한 교단의 일원이라면? 애초에 칼라일 탐사대의 사고 기사가 거짓말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마크 셀커크 중위와 키쿠유족. 두 사람의 증언이 모순된다면 둘 중 누구 하나의 말은 필연적으로 거짓일 터다.

 우리는 새벽에 블루 피라미드 1층의 창고를 가보기로 하고, 일과를 시작했다.

 

 

 

 

 노라의 강권으로 병원을 들렀다. 그리고 쇼핑을 조금 했다. 이젠 거의 강박적인 시선으로 감시를 찾는다. 아침 일찍부터 따라붙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노려보자, 곧장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숙소로 돌아온 뒤, 노라는 거절하는 얄레샤에게 이것저것 잔뜩 안겨서 보냈다.

 

 하오를 바쁘게 보내기 위해서, 우리는 수상한 펜휴 재단을 다시 찾아갔다. 오늘은 개비건 씨가 계시느냐고 안내 데스크에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개비건에 대한 것은 개인 비서인 토머스 키너리가 전부 처리한다는 답을 들었다. 일단 그의 사무실 위치를 알아두고, 펜휴 재단을 돌아다보았다.

 두 사람이 뒷마당에서 묘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보통 건물과는 다르게 엉뚱한 위치에 환기 파이프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기에는 찜찜해서, 그 부근의 벽을 따라 건물을 조금 돌았다. 결국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물론 문이 잠겨 있었고, 여러모로 시도를 해봤지만 열 수는 없었다. 조금 고민하다가 승강기로 가서 지하층 표시가 있는지 살폈다. 표시는 있는데 버튼이 눌리지 않았다. 이리저리 건드리다 보니 제이덕이 뭘 잘못 만졌는지 지하층을 향해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지하에는 소각로, 석탄 창고, 잡동사니가 쌓인 평범한 창고 정도가 있었다. 석탄 창고의 벽 안쪽으로 전기선, 배기 파이프, 냉온수 파이프가 들어간 것이 보였다. 잡동사니 창고는 말 그대로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하지만 명징한 의혹을 가지고 선반에 있는 물건을 치우자 곧 틈새가 보였다. 문이 있었다. 양쪽으로 열리는 쌍여닫이문.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쪽은 캄캄했다. 손전등으로 비춰서 내부를 훑었다. 초 연기 냄새가 났다. 사방에 잘 관리된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먼지도 적고, 한쪽에는 상자들, 벽에는 그림이 여럿 걸려 있었다. 스위치를 찾아 누르자 가운데에 있는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우리는 이 숨겨진 방을 아주 샅샅이 뒤졌다. 책상과 가까운 쪽에 놓인 상자에는 꽤 많은 비상식량, 옷과 식수 등의 물품이 들어있었다. 책상 밑 금속 상자에는 잡다한 서류가 가득했다. 특히 영수증이 많이 나왔다. 특기할만한 것은 이 정도다.

 

 

 -헨슨 공업에 목재, 석탄, 철괴, 구리 선, 고가의 주철 금고를 설치한 영수증(사진).

 -트럭을 6개월 임대한 영수증.

 -라임하우스 로프메이커스 필즈의 푸닛 초다리가 아이보리 윈드 호로 보내는 편지. 상하이로 보내는 다양한 골동품의 보관과 배송에 관한 내용.

 -영수증 더미 밑의 명함(사진).

 

 

 

 책상 서랍에는 32구경 리볼버와 위조 여권 2개, 상당한 양의 사용된 수표가 들어있었다. 5, 10파운드 짜리인데 총액은 어림잡아 2000파운드 정도. 발행인은 펜휴 재단.

 

 반대쪽에는 뚜껑이 열리거나 비어 있는 상자 여럿 있었다. 개중 닫히고 스텐실이 붙은 큰 나무 상자를 살폈다. 호팡 수출입 상사 카오양 가 15번지, 상하이, 중국. 작은 글씨로 ‘호팡 대인께.’라고 쓰여있다. 안에 든 것은 중국식 삿갓을 쓴 둥그런 생물체를 조각한 청동상이다. 삿갓 아래에서 촉수 다발이 뻗어 나오는 모양새다. 청동상인데 굉장히 차갑고 미끌거리는 질감이다.

 그 옆에 있던 작은 상자는 이랬다. 랜돌프 운송회사. 포트 다윈, 노던 준주, 호주. 길쭉한 사슴 머리에 날개가 달린 존재를 도안화한 마크가 스텐실에 찍혀 있다. 스텐실 옆에 ‘랜돌프 씨 직접 수령 요망.’이라고 쓰여 있었다. 안에는 든 것은 40cm 정도 되는 뚱뚱한 용의 조각. 용의 머리에도 촉수가 잔뜩 달렸고, 재질은 불명이다. 그걸 집어 든 순간, 팔과 몸통에 이상하게 찌릿한 감각이 쫙 퍼졌다. 순간 깜짝 놀라서 조각상을 떨어트렸다. 어리둥절해서 손을 살폈지만, 어제 봤던 주문의 미미한 흔적이 남아있을 뿐 달라진 점은 없었다. 영 찜찜해서 이 조각상을 챙겼다.

 그리고 고급 호두나무로 만든 책장. 유리문이 달려 있고 그 안에 책이나 두루마리가 잔뜩 쌓여 있었다. 돌로 만든 작은 병이 하나 있었는데, 안에 회색 재 같은 것이 들었다. 책과 두루마리는 몹시 다양한 언어로 되어있었다. 아랍어, 라틴어, 중세 프랑스어, 고대 영어, 그리스어, 이집트 상형문자…….

 라틴어로 된 두루마리를 제이덕이 읽었는데, 신을 찬양하는 시라고 했다. 고대 영어로 된 두루마리 또한 검은 남자라는 신을 찬양하는 시였다. 우리가 읽을 수 있었던, 스페인어와 영어로 된 책들은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다.

 

 

 제이덕이 알려준 것들을 요약해 적어둔다.

 -리베르 이보니스. 가죽 장정에 잠금쇠. 가장자리가 검게 칠해져 있음. 퀴퀴한 냄새가 나고 페이지가 드문드문 비었다. 고대의 조형이나 존재의 원초적 물질, 자연철학에 대한 논의나 실험을 말한다. 사코체라는 존재가 언급된다. 사코체 본인이 직접 해설과 견해를 남겼는데, 몇몇 문구는 라틴어가 아닌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여 있다. 사코체는 스스로가 파즈 루자라고 알려져 있다고 적었다.

 -쟌의 서. 영어. 4절판. 유황 냄새가 난다. 저자, 번역자 미상. 샴발라에서 가장 고귀한 대스승들의 현명하고도 덕망 높은 말들을 적은 책이다. 벨라로스라는 행성에서 시작된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서 지구에서 끝나는 어떤 의식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다양한 문명의 융성과 몰락을 예언한다. 푸르고 흰 물 위를 걷는 자, 유혹하는 혼돈의 힘, 피에 젖은 혀, 뜨거운 산에 걸터앉은 자라는 존재가 언급된다. 공허 현자의 조언이라는 주문도 적혀 있는 듯하다.

 제이덕이 알기로는, 푸르고 흰 물 위를 걷는 자란 검은 파라오를 의미한다. 뜨거운 산에 걸터앉은 자, 피에 젖은 혀, 유혹하는 혼돈의 힘은 전부 피투성이 혀를 뜻하는 말이다.

 

 

 원숭이랑 파충류를 섞어놓은 듯한 기묘한 생물을 조각한 상자 안에는 장식된 은 단도 두 개가 들어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은 대부분 고대 회화였다. 진짜 전시장처럼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날개가 달린 검은 생물의 조각은 썩어 문드러진 것 같은 형상이었다. 역시나 날개가 있는 거대한 짐승을 그린 회화도 있었다. 짐승은 용과 흡사하고 입에는 송곳니가 빼곡했다. 또 뒤틀린 얼굴에 거대한 눈이 달린 괴물, 붉은빛의 군집이 검은 인간형 생물 주위에 모여 있는 그림도 있었다.

 제이덕에 따르면 이 작품들은 전부 엄청나게 오래된 것이다. 기원전 900~700년 사이(이집트 22왕조 부근)로 추정된다. 개중 파라오의 얼굴에 촉수 다발이 달린 벽화가 하나 있었는데, 이건 제3왕조 시대의 작품이라고 한다.

 

 사진을 찍고 있자니 저 바깥에서부터 인기척이 들렸다. 우리는 황급히 불을 끄고, 한쪽 벽의 계단으로 올라갔다. 나와 제이덕이 위쪽의 문을 힘으로 열어보려 용쓰는 동안 똑똑한 노라가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빠져나와 둘러보니, 파라오의 형태로 된 석관이 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긴가민가하다 파라오의 눈을 누르자 석관이 다시 닫혔다.

 주변은 짐이 가득한 창고였다. 상자들 너머로 나가는 문이 보였다. 바닥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는데, 석관에서부터 이어진 먼지 없는 길이 한 줄 있었다. 그 길은 갑작스레 벽에서 끝났다. 나와 제이덕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 길을 따라가 보았다.

 벽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그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었다. 호칭으로 미루어보아 비서가 에드워드 개비건에게 무언가를 보고하는 듯했다. 사업 논의가 좀 이어지더니, 뒤이어 블루 피라미드 클럽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블루 피라미드에서 크게 난리가 났고, 귀찮은 쥐새끼들이 도망갔으며…… 잭슨 엘리어스의 이름도 언급되었다. 지독한 작가랑 얽혀서 운이 안 좋다는 불평이었는데, 하하. 공감이다.

 그러고 있자니 노라가 문 쪽에서 손짓했다. 우리는 문밖이 고요해진 틈을 타 잽싸게 빠져나왔다.

 

 

 숙소로 돌아와서 주워 온 물건 몇 개를 대강 펼쳐보았다. 뚱뚱한 용의 조각상, 쟌의 서, 은 단도 두 개, 돌로 된 병, 쉬플리의 집에서 가져온 녹색 병과 검은색 병. 영수증과 편지. 그리고 육중한 피로감. 예상치 못한 모험을 한 우리는 블루 피라미드 클럽에 가기 전에 잠깐 눈을 붙이기로 합의했다.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만약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라면

아직 엔딩을 안 보셨다면

미국편 후기부터는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조심합시다!

미국편 1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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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잭슨 엘리어스의 유언에 따라 구체적인 기금을 받는 탐사대로 재조직되었다. 붙는 이름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어느 한구석 특별히 빼어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 이름이 새삼스럽게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그래도 거기에는 다른 무게감이 있었다. 무게감. 어떤 사건들은 한번 겪고 나면 결코 예전과 같은 삶으로는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은 알게 되었다는 간략한 요약. 우리는 그 앎의 굴레, 같은 슬픔을 공유했다.

 

 

 수집한 자료를 정리한 보드를 펼쳤다. 몇 가지 의문들, 수상한 증거들이 어지러이 놓여있었다. 이번에는 그중에서도 제정신으로 쓰인 것 같지 않던 잭슨의 메모에 있는 ‘칼라일 가문의 금고’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칼라일 가문의 금고라면 분명 저택에 있을 터였다. 도둑질할 재주는 없으니 당당히 부딪혀야만 했다. 칼라일 저택은 삼엄한 경비 속에 요새 마냥 보호받고 있었다.

 우리는 칼라일 탐사대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칼라일 저택 사람들은 허풍선이들에게 자주 시달리는 모양인지, 우리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쫓겨나지 않기 위해 제이덕의 영민함과 ‘학위’를 팔아야 했다. 텍사스 대학 만세.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에리카 칼라일은, 이 집에서 만난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루빨리 귀찮은 불청객들을 쫓아내려던 그를 자리에 앉힌 것은 로저 칼라일이 살아있을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잭슨이 남긴 자료들을 십분 활용하여 에리카를 설득했다. 셀커크 중위와의 인터뷰(개중 정확히 “시체 중 백인은 없었다”는 부분), 살아있는 잭 브레이디가 목격되었다는 증언이 특히 유용했다. 에리카 칼라일은 칼라일 탐사대와 죽음숭배교단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얘기를 하는 목적이 뭐지요? 돈을 바라는 건가요?” 이런 말이 에리카의 입에서 나왔을 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희는 칼라일 탐사대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특정한 교단에 대해 조사하고 있습니다. 칼라일의 금고 안에 있는 책을 보고 싶습니다.” 해서, 대충 이렇게 대답하게 된 것이다.

 

 에리카 칼라일은 금고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한 적 없다며 놀랐다.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잭슨 엘리어스는 어떻게 알았을까. 금고에 대해 말할 때 잭슨의 메모는 제정신인 사람 같지 않았다. 환시일까? 열띤 백일몽 속에서, 꿈속에서, 어쩌면 광기 속에서 숨겨져 있던 칼라일의 비밀에 접촉하고야 만 것일까?

 에리카는 망설였지만, 최대한 솔직하게 자기가 아는 것을 설명하려 애쓰는, 어떻게 보든 남을 속일 깜냥은 되어 보이지 않는 시골 아가씨 노라 에버트의 모습에서 어떤 확신을 얻은 듯했다. 에리카는 우리를 서재로 안내했다.

 

 서재로 가는 길에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탐사대를 꾸려 떠나겠다고 했을 때, 로저 칼라일은 평소와 달랐다. 분명 부나이라는 흑인 여자에게 홀려서 저지른 짓이다. 부나이는 어느날 홀연히 나타났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는 자신도 전혀 모른다. 로저는 부나이를 자신의 여왕이라고 불렀고, 그가 자신이 원하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부나이는 칼라일 탐사대와 함께 떠났다.

 -떠나기 전에도 로저 칼라일은 악몽을 자주 꾸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고는 했다. 그래서 유명 정신분석가 허스턴 박사에게 진료를 받으라 추천했다. 하지만 허스턴 선생은 그의 병증을 치료하는 대신 오히려 부나이와 합세하여 그에게 바람을 넣은 것 같다.

 -로저는 이들 탐사대가 정확히 뭘 찾으러 떠나는 건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에리카는 그가 나가서 고생하면 자기 꿈이 허황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리라 생각하며 탐사를 보내주었다.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칼라일 탐사대에 숨겨진 인물이 더 있었다고? 갑자기 나타났다는 이 여인의 이야기는 불안한 쪽의 흥미를 돋웠다.

 

 

 

 칼라일 가문의 서재는 많은 양의 서적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비밀 금고 안에 있었던 책은 고작 네 권이었다. 간추리자면:

 

 프나코티카 필사본. 은색 가죽 양장 제본. 하이퍼보리아, 목성, 아틀란티스에 대한 이야기.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지구에 생명을 뿌린 백합 모양 생명체에 대한 설명. 누군지 모를 인물이 주석을 달았다. 거기에는 호주 서부의 사막 지하 어딘가에 세워진, 위대한 종족의 도시에 대해 적혀 있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기묘한 경험을 했다. 눈앞에 굉장한 풍경이 펼쳐졌다. 넓게 펼쳐진 모래의 바다, 죽음도 죽고 의미도 의미로 존재하지 못하는 메마른 대지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기괴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환상이었다. 분명 난생처음 보는 장소인데도 너무나 그리웠다. 이 도시야말로, 내가 두 다리 두 팔이 없을 적부터 기어서 나온 곳 같았다. 눈물이 차올랐다. 적어두기 부끄럽지만, 나는 이 이후로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만나보지 못한 도시에 관한 미칠 것만 같은 향수만을 느꼈다. 위대한 자들, 내려다보는 자들, 관찰하는 존재들, 그들이 나를 멀리서 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을 부르고 있는 것은 나였다. 아! 나는 그들을 부르는 법을 알고 있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거기 닿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의 기분은 어떤 말로도 생생히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나의 글은, 아니 영어는, 인간의 언어로는 부족하다.

 

 신으로서의 삶. 몽고메리 크롬튼. 손글씨. 거무죽죽한 가죽은 인간의 살을 만지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 영국 미술가 크롬튼이 광기에 사로잡혀 쓴 일기. 이집트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검은 파라오, 어둠의 파라오, 살인과 인신 공양에 대한 상세한 묘사. 공양 의식에 쓰는 못이 박힌 짧은 몽둥이에 대한 언급.

 

 

 

신으로서의 삶

 

 

 셀렉시옹 드 리브르 디봉. 그리스어 원전을 라틴어로 옮김, 프랑스어 주석. 가죽 표지가 파랗게 썩어있다. 라틴어 부분을 제이덕이 읽어내었다. 13권짜리 서적의 일부분. 주문이나 마법의 실용에 관한 연구가 들어있다. 차토구아라는 신에 대한 숭배. 테두리에 뒤집히고 깨진 앙크를 닮은 문양이 있음. 파즈 로자와 노덴스라는 신들의 적대 관계에 대해 쓰여 있다.

 

돌들 틈에서. 저스틴 조프리. 최근에 쓰인 수기 원고. 살면서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기묘한 검정 가죽 재질 표지. 시가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여왕의 소품들이라는 시는 왕관, 허리띠, 목걸이 등 여왕이 사용하는 화려한 소품에 대해 자세한 묘사를 하고 있다.

 

 

 뭔가에 취한 듯 당시의 기억이 모호한데 읽은 책들의 모양이나 감촉, 내용은 보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이상하다. 그때는 내 행동이 내 것 같지 않았다. 책을 읽다 노라가 기절했는데, 평소와는 달리 인간적인 걱정이라곤 하나 없이 그저 혼자가 아니라는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어쩌면 그도 위대한 도시에 다녀온 것일까? 그 아름다운 광경을 봤던 걸까? 봤어? 본 거지? 나는 소름이 돋은 팔을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복도에 서 있었다.

 기억이 서서히 돌아오자 환상은 그저 꿈결처럼 느껴졌다. 잊히지 않는 꿈 말이다. 꿈은 묻어둘 수 있지만, 행동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에리카 칼라일에게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던 상태에서 벌였던 실례에 대해 사과하고, 이후 알아낸 내용이 있다면 연락을 주노라고 약조했다.

 

 

 

 

 우리는 칼라일 가문의 차를 얻어 타고 뉴욕주 의료관리 위원회로 향했다. 내려서 잠시 의논했다. 칼라일 탐사대가 이집트로 향했으니 어쩌면 이 책 중에서는 ‘신으로서의 삶’이 특히 로저 칼라일에게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검은 파라오, 검은 파라오… 분명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당시에는 떠오르는 내용을 모호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는데 제대로 찾아서 여기 붙여둔다.

 

 (자료가 보강되어 있다) 이집트 3왕조 시대 말기에 아라비아 사막의 고대도시에서 왔다는 네프렌 카라는 강력한 마법사가 검은 파라오라는 악신을 숭배했다. 사람들은 악신과 마법사를 구분하지 않고 그를 검은 파라오라고 불렀다. 네프렌 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제3왕조와 지배권을 다투었다. 그가 한동안 나일강 일대를 다스리다가, 결국 알려진 대로 스네프루가 제4왕조를 세우고 이시스의 도움으로 네프렌카를 죽였다.

 

 이 얘기를 들은 제이덕은 어거스터스 라킨의 몸에서 흘렀던 검은 피를 우리에게 주지시켰다. 어쩌면 그것과 이 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서부터 출발한 불길한 파장으로 인해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우리는 불안의 가지를 더 뻗어 나가는 대신, 의료관리위원회 건물로 들어갔다. 거기에 보관되어 있다는 허스턴 박사의 진료 기록에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열람하고 싶다고 정중하게 요청하여 위원회 비서관 아드리안 페리스를 만났다. 그의 허락을 받고, 제이덕이 연구 목적으로만 사용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서야 필요한 내용을 읽어볼 수 있었다.

 

 

 

허스턴의 의료 기록

 

 

 

 베인, 베인이라. 꿈속의 목소리는 로저를 혼내고 싶었나? 아니, 칼라인 가문의 시조는 분명 에브너 베인 칼라일이지.

 허스턴 박사는 최근의 날짜로 내려갈수록 칼라일에 대한 기록을 적게 남기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에리카는 허스턴 박사를 부나이의 공조자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허스턴 박사의 기록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대체 이들 탐사대 사이에는 무슨 모종의 관계가 있었던 걸까. 이들에 대해 조금씩 알아낼 수록 사실이 명확히 밝혀지기보다는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다.

 

 -에리카 칼라일: 에리카 칼라일은 오빠와의 관계 때문에 괴로워했다. 상담 한 번에 90달러씩 청구하곤 했던 명세가 남아있다. 상담 비용치고는 지나친 가격이다.

 -이멜다 보쉬: 로버트 허스턴의 연인. 자살했다. 허스턴 박사와 사귀다 탐사대에 들어가기 직전에 헤어졌다.

 

 

 

 아파트에 돌아와 레베카 쇼젠버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힐튼 씨와 면회 일정이 잡혔다. 내일 아침 오전 9시. 역에서 만나 전철을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노라는 처음 타보는 지하철에 기대가 컸다. 반면 제이덕은 알게 모르게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득실대는 피라미드에도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 나는 속절없이 웃고 말았다.

 그런 즐거운 시간도 잠깐이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밖에는 정복 경관들이 여럿 서 있었다. 그들은 우리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만 들쑤시고 다니라는 협박을 나름대로 고운 말로 포장해서 지껄여댔다. 내 어깨를 당장 뽑아가기라도 할 기세로 꽉 쥐면서 얘기했으니,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힌 편이었다.

 지방의 유지나 돈과 결탁한 구리배지들이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협박하는 이야기야 LA에서든 뉴욕에서든 흔하다. 잘릴 직장이 있는 기자들이라면야 그런 말에 겁을 먹겠지.

 하지만 내 어린 동료들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런 일을 누군가 함께 해본 적이 없으니 그들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기 어려웠다. 내 한 몸만 걱정 없이 내던져서 되는 일이 아니니. 어렵다.

 머뭇거리다, 결국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일렀다. 그래도 노라는 그럴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럴 수는 없구나. 그렇다면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익숙해져야죠. 세상이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에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들이 정말로 그렇게 되면 조금쯤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력감에서 오는 오기로 부나방처럼 사는 것은 불행하다. 우리는 내일 거처를 옮기기로 하고 잠이 들었다.

 

 

 

 

 

1925. 1. 20

 

 복잡한 뉴욕 거리에서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짐작하기로는 교단의 끄나풀인 듯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황급히 아무 건물에 들어가 버거를 한 개씩 물고 가게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여차하면 사람들 사이에 섞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뉴 그랜드 호텔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짐을 내려놓고 나서 바로 레베카 쇼젠버그와 합류해 싱싱 교도소로 향했다. 안내를 받아 힐튼 애덤스를 만날 수 있었다.

 힐튼 애덤스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으면서도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는 선한 사내였다. 30분의 짧은 면회 시간 동안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이렇다:

 

 -‘피투성이 혀 교단’은 뉴욕에서 활개를 치며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힐튼은 시립도서관에서 모데카이 레밍 박사가 아프리카 죽음숭배교단에 대해 한 이야기를 듣고 도서관에 찾아갔다. 지금은 경찰들이 압수해간 자료는 오래전에 사라진 동아프리카 교단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들 교단은 케냐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데, 할렘 근방에서 아프리카와 관련된 물건을 취급하는 것은 주주하우스 뿐이다. 주주하우스는 아프리카에서 정기적으로 물건을 받고 있기도 하다. 여러모로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는 가게다.

 -힐튼은 웨스트 137번가를 따라서 레녹스 가와 할렘 강 사이의 두 블록 반경에서는 절대로 납치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구역에 주주하우스가 포함되어 있다. 납치가 일어난 지역은 그 구역을 중심으로 할렘강 서쪽에서 약 1.6km 반경 내에 분포되어 있다. 실종 자체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발생한 것 같다. 매 그믐밤, 한 달에 한 번.

 -힐튼은 주주하우스에서 나온 30~40대 정도의 남자를 미행한 적이 있었다. 남자는 팻 메이벨스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 사람들은 그 남자를 두려워했다. 남자의 이름은 무쿵가 음다리였다. 힐튼은 살인의 배후지가 자신을 위협으로 인식한 것이 카페에서 그 남자에 관해 묻고 다녔을 때라고 확신한다. 

 

 힐튼의 사형 날짜는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 멀지 않았다는 사실은 누구든 알 수 있다. 최대한 빨리 사건을 해결해야만 이 무고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

 

 

 

 

 면회를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서, 나는 뉴욕의 연예 사건을 주로 취급하는 동료 기자에게 연락해 이멜다 보쉬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했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냥 쉬었어야 했는데. 발 빠르고 말 많은 인간들 사이에 벌써 불유쾌한 낭설이 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라이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너는 기자가 그런 걸 믿냐.

 믿을 게 있고 안 믿을 게 있는 건 아는데 이런 건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전화를 한 번 더 돌린 뒤에야 로버트 허스턴이 자기 애인을 죽였다는 소문을 주워들었다. 얻은 건 쥐꼬리만 한데 열심히 달린 뒤처럼 입안이 달았다. 어쩌다, 일라이저 웨버. 이 꼬락서니냐. 그야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잭슨 엘리어스. 이 빌어먹을.

 

 내가 혼자 화를 삭이는 와중에 제이덕은 잭슨이 남긴 팜플렛에 적혀 있던 이름, 앤서니 콜즈 교수에게 연락했다. 이 뒤로는 그가 정리해준 내용을 옮긴다.

 앤서니 콜즈 교수는 호주 출신으로 뉴욕에 잠시 강연을 하러 들렀었고, 지금은 미스캐토닉 대학에 머무는 중이다. 그는 폴리네시아와 뉴질랜드를 중심으로 사교 집단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

 

 

콜즈 교수의 말

 

 

 

 콜즈 교수는 전화 통화로 사진 자료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7개월 이후에는 호주에서 있을 예정이니 그때 직접 사진 자료나, 일지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한다. 거대한 벽, 거대한 동굴이라……

 

 


 

 

 

 잭슨 엘리어스를 살해한 범인은 주주하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피투성이 혀 교단이다. 이들은 그믐달마다 사람을 납치한다. 입막음을 위해 살인을 벌인다. 경찰도 한패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누명을 쓰고 잡혀 있는 힐튼 애덤스를 구하려면, 진범의 증거를 잡아야 한다.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얻고, 그것을 믿을만한 사람에게 넘기고, 누군가 조작을 시도하기 전에 신문사 등을 이용해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터트린다. 그러려면 현장을 사진으로 남기던가 아니면 보다 확실한 증거품, 직접적인 자료를 찾아야 한다.

 믿을만한 사람이라. 경찰 중에서 믿을만한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고민 끝에, 잭슨의 사건 때 잠깐이나마 대화를 나누었던 마틴 풀 경위에게 연락했다. 경찰에게 협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뒤로는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할 수 있었다. 경찰 내부에 잭슨을 죽인 진범으로 추정되는 단체와 결탁한 세력이 있는 것 같다는 얘기에, 그는 아마도 롭슨 경감이 한 패일 것이라고 의견을 개진했다. 힐튼 애덤스에게 혐의를 씌워 잡아넣은 게 롭슨이고, 우리를 협박하러 왔던 젊은 경관도 그 밑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부패했다는 소문은 이미 공공연하다.

 풀 경위로부터 롭슨 경감을 통하지 않고 바로 위로 증거를 올릴 수 있게 힘써보겠노라는 약속을 받았다. 협조를 얻으니 그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는 주주하우스에 직접 진입해서 증거를 알아내는 일만 남았다. 그날 밤은 제법 애먹었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시선을 끌기도 했고, 잠시 물러났다 돌아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숨어있으려는데, 제이덕이 술에 취한 불량배들에게 시비가 붙어 지갑을 잃어버렸다.

 

 고생 끝에 주주하우스를 감시하고 얻은 정보:

 -백인 남자 둘이 두툼한 봉투를 품에 집어넣고 돌아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들 중 한 명은 분명 우리를 찾아왔던 경찰이었다.

 -사일러스 은콰네가 저녁에 식사라도 하러 나가는 건지 1시간 정도 가게를 비우는 것을 확인했다.

 

 

 잠긴 가게 문을 열어보려고 시도해보았으나 한계가 있었다. 전문적인 사람을 고용하기로 합의한 뒤에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내일 사일러스 은콰네가 같은 시간에 자리를 비운다면 그동안 내부를 뒤져볼 계획이다.

 

 

 

 

 

1925. 1. 21

 

 우리는 조심스럽게 주주하우스 안으로 들어가서 가게와 생활공간을 살펴보았다.

 침대 밑에 커다란 칼이 하나 놓여있었다. 볼로나이프와 비슷해 보이는 큼직한 날붙이. 시트 한쪽 구석에는 말라붙은 인간의 혀를 머금은 가면이 놓여있었다. 살인자들이 쓰고 있었던 가면과 닮았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이 말라붙은 혀가, 가게에서 볼 수 있었던 끔찍한 것들의 서막이었다.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가게 카운터 안쪽에서 장부를 챙겼다. 지출 항목에 일주일에 한 번 주기적으로 ‘경 14’라고 적힌 명세가 있다.

 카운터 바닥에 깔린 깔개를 들자, 자물쇠가 잠긴 문이 드러났다. 들고 다니던 작은 공구로 열어보려다 자물쇠 안에 공구 끄트머리가 끼인 채 부숴 먹었다. 쯧. 결국은 자물쇠를 뜯어낼 수밖에 없었다.

 

 열린 문 너머로 폭이 좁은 계단이 이어졌다. 계단 아래로 보이는 것은 역청처럼 어둡고 끈적한 암흑 그 자체였다.

 손전등을 켜고 긴 계단을 한참 내려가자 복도가 나왔다. 절대 일반적인 지하실이 아니었다. 돌로 된 낡은 벽에는 기호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흔들린 사진, 노트에 옮겨 그린 기호들) 우리는 곧 쇠로 된 모서리를 두른 나무문에 다달았다.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 방은 횃불이 걸려 있어 복도보다는 조금 밝은 편이었다. 그래도 어슴푸레하고 퀴퀴한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문에도 방에도 무언가 글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방 한쪽에는 부자연스럽게 커다랗고 둥그런 석판이 누워있고, 대형 윈치가 석판에 달려 있었다. 윈치는 석판을 조절하는 장치인 것 같았다. 셋이서 힘을 합쳐 매달리자 겨우겨우 석판의 틈이 벌어졌다.

 

 벌어진 틈 사이로부터 끔찍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저 먼 안쪽에서부터 무언가 움직이는 실루엣.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손전등을 아래로 비추자, 그 미약한 빛에 원통형의 거대한 벌레 비스름한 존재의 모습이 드러났다. 몸통에는 듬성듬성 사람의 얼굴이 붙어서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찢어지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구덩이 안에서 용솟음치려는 듯 그 육중한 몸을 비틀고 스스로 짓이기고 꿈틀거렸다. 우리는 아연실색해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피라미드 꼭대기의 틈새에서 봤던 것이 떠올랐다.

 노라는 그 자리에서 다시 기절했다. 제이덕이 쓰러지는 그를 받았다.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아래턱이 덜덜 떨려왔다. 어떤 악의, 어떤 욕망이 이런 괴물을 만들어낸 걸까? 대체 뭘 하는 놈들이길래. 이런 끔찍한 걸 뉴욕 한복판에 숨겨두고 있냔 말이다.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다가 이내 메마른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래서야. 무서워서 어디 땅을 디디고 살 수나 있겠나. 여기는 분명 저 먼 나라의 봉인된 피라미드가 아니라, 내 이웃의 지하실일 텐데. 세상에 도망칠 수 있는 곳, 안전한 곳이라고는, 없구나.

 (정신이 나갔던 건지 그것의 사진을 몇 장 찍어두었는데 인화하는 내내 암실이 조금 더 추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착각한 게 아니라면, 그것이 내지르는 비명이 점점 커지는 것처럼 들렸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는 온갖 용을 써서 석판을 다시 닫았다.

 방에는 석판 외에도 피가 묻은 화물 상자, 의식용으로 보이는 아프리카 북 같은 것이 놓여있었다. 또 한쪽 벽면에 커튼으로 가려진 공간이 보였다. 나는 홀린 듯 커튼을 걷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직사각형 공간의 네 구석에 사람이 서 있었다. 모두 배가 열려서는, 이마에는 문양이 새겨진 채다. 마치 되돌아온 잭슨 엘리어스의 악몽 같았다. 아. 커튼이 열리자마자, 이들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피가 흐르는 귓가를 대충 압박하며 다시 커튼 안쪽을 살폈다. 늘어선 선반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먼저 가면. 은콰네의 방에 있던 것보다 훨씬 관리 상태가 좋은, 말라붙은 인간의 혀가 붙은 가면이었다. 화려한 로브, 사자 발톱 장갑, 책 한 권(<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 잭슨이 미스캐토닉 대학에서 찾던 그것이다). 희한하게 생긴 나무 조각 가면(사람 얼굴 네 개 정도가 붙어 있는 모양). 광택이 나는 구리 그릇. 긴 의식용 홀. 회색 금속으로 된 머리띠. 항해용 크로노미터. 잠겨있는 소형 금고.

 금고를 공구로 비틀어서 억지로 열었다. 내가 찾던 ‘정확한 증거’들이 여기 있었다. 살인자들은 무슨 끔찍한 악취미인지 피해자들의 물건을 수집했다. 그 물건 중에는 램지 씨에게 받았던 엘리어스의 단서 ‘원본’들도 있었다. 그리고 배들이 찍힌 묘한 사진 한 장도.

 

 

발견된 사진

 

 

 금고에 들어있었던 것은 전부, 밖의 물건 중에서는 몇 가지 들고 다닐 만큼만 챙겨서 가방에 넣고 빠져나왔다. 바닥에는 아까까지 살아 움직이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고, 내 어린 동료들은 벽에 기대, 비슷하게 피투성이인 모습으로 겨우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렇게 가엾은 꼴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세상일이 결코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곧장 램지의 변호사 사무실로 갔다. 거기에다 두 환자를 맡겨놓고, 나는 정신없는 밤을 보냈다. 찍어둔 사진 인화를 끝내자마자 풀 경위를 만났다. 사진과 장부, 금고 속 증거품을 모조리 보여주며 그에게 지하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물론 절대 믿어주지 않을 부분들은 제외하고.

 우리가 싸웠던 사진 속 시체들도 모두 실종자들로 확인되었다. 풀 경위는 증거품과 사진들을 받아서 돌아갔다. 그는 오늘 밤 내에 급습 작전을 실행할 것이라고 했다.

 풀 경위와 대화가 끝나자마자 레베카 쇼젠버그에게 연락했다. 나는 그와 협의하여 밤새 기사를 작성했다.

 

 내가 기사를 쓰는 사이, 주주하우스에서 들고나온 책을 제이덕이 읽었다. 그에게 이 책을 보여주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거기 파묻혀서는 나오려고 들질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그 책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이후 따로 부탁해서 요약본을 받을 수는 있었다.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 나이젤 블랙웰. 저자의 신원은 모호하고 출판사도 따로 적혀 있지 않다. 푸른색 합지 표지. 탐험가 나이젤 블랙웰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작성하였다. 각종 아프리카 종교 제의에 대한 설명. 끔찍하고 적나라한 묘사. 죽은 사람을 부리는 주문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뉴욕의 일들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 적어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풀 경위는 사일러스 은콰네를 체포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압수했다. 사교 집단의 잔악무도한 범죄와 경찰과의 유착 관계에 대한 폭로 기사가 1면에 실렸다. 힐튼 애덤스의 누명이 벗겨졌다는 것이 가장 다행스럽다.

 

 여기까지가 공적인 소식이고, 풀 경위에게 따로 들은 바로는 이렇다:

 당일의 출동에서 사일러스 은콰네는 체포가 되었고, 실종자들의 시체를 확인했다. 그러나 별다른 물건은 남아있지 않았다. 거대한 석판 안쪽도 비어있었다(어째서?). 은콰네는 그간의 연쇄살인과 실종사건의 범인으로서 응당한 처분을 받게 될 것이다.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입을 열지 않는다고 하지만.

 애덤스 부부는 감동의 재회를 했다. 레베카 쇼젠버그를 통해 그들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뉴욕을 떠나기 전에 한 번은 찾아가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을 돕는 것은 본성이다. 그들의 모습은 나의 오랜 믿음에 확신을 준다. 

 

 

 

 잭슨 엘리어스가 온 세상을 돌아다녔던 것은 죽음 숭배 교단이 전 세계에 퍼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뉴욕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고민 끝에, 칼라일 탐사대의 족적을 밟아 영국으로 향하기로 했다.

 

 영국행 배에 오르기 전, 노라의 입원 기간을 더해 총 3주의 준비 기간을 가졌다.

 제이덕은 여전히 미친 사람처럼 그 책에 푹 빠져있다. 집에 돌아가기로 약속해놓고 연락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인에게 전화가 와서 그를 바꿔주었는데 제대로 대화를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뭐라 몇 마디 하려다가 삼켰다. 그는 자기가 직접 이룬 가족이 있는 사람이고 그것은 내가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는 바다. 무슨 기분일지, 제대로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내가 무슨 권리로. 내가 뭐라고.

 노라는 제일 크게 다쳐서 2주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상처가 안심할 수 있을 만큼 아물자, 나는 출발 전에 집에 다녀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참에 노라가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서 좀 쉬다가, 마음이 바뀌었으니 아예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전보를 부쳐줘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혹시 후회하거나… 생각이 날까 봐 그래.

 생각은 항상 나는걸요.

 

  

  나는 그래도 몸이 성하니 그날 얻은 물건들에 대해 조사하며 돌아다녔다.

 

 -금고에서 발견한 사진은 상하이의 황푸강에서 찍힌 것으로 보인다.

 -크로노미터는 뉴욕보다 네 시간 빠른 영국 그리니치 표준시에 맞춰져 있다.

 -머리띠는 금속 재질인데 만지면 조금 따뜻하다. 긁어서 새긴 상형문자가 있다. 내가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 많지 않아 제이덕에게 연구를 부탁했다. 

 -나무 가면은 갈대와 깃털 천을 바구니처럼 엮어서 짠 목 부분 위로 끔찍한 얼굴 넷이 조각되어있다. 콩고 유물. 뉴욕대 식물학 교수를 찾아가서 재질을 알아보았는데, 이 수목은 지구상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고 한다. 

 -구리 그릇에 새겨진 기호의 의미는 불명이다. 역시나 제이덕에게 맡겼다.

 

 

 그러면서도 남는 시간은 지금까지 얻은 정보들을 정리하고, 경제적인 문제들을 처리하고, 비자를 확인하고 출발 계획을 짜는 데에 썼다. 아, 변호사도 바꾸고. 내 유언장도 조금 수정해서 램지 씨에게 맡겨뒀다.

 

 

 문득 병원에 있는 노라가 회계에 욕심을 부리던 것이 기억이 나, 어렵지 않은 몇 가지 일을 남겨놨다. 잔소리라도 하게 만들까 하면서 고를 수 있는 가장 못생긴 옷가지를 골라두는데, 그러는 스스로가 몹시 바보처럼 느껴졌다. 젠장, 제대로 위로하는 법 같은 건 모른다. 윌리엄이라면 이럴 때…

 

 윌리엄.

 우습다. 이제 와 가족 생각이 난다는 게. 나는 멈춰 있는 게 싫었다. 단단한 새 구두 밑창을 내버려두고 눌러앉는 것도, 쫓아야 할 세상이 저 바깥에 있는데 그게 보이지 않는 양 커튼을 치는 것도, 파도가 되지 않고 호수가 되려는 것도. 멈춘 세상은 분명 죽은 세상이다. 어떤 사람은 그냥 나서부터 이런 삶을 산다. 나의 길은 방향과 목적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림자는 한 방향으로만 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길이 나를 불렀다. 늘, 그랬다.

 이 애들은 이제서야 이런 삶에 뛰어들었는지 몰라도 나는 쭉 이렇게 살아왔다. 그러니까 제발 그러지 마,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말이 자꾸만 혀끝에서 맴도는 것이다. 그 지독함을 이미 알기 때문에. 한때 소중했던 것들이 이젠 내가 말하지 못하는 것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별것 아닌 듯 보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내 발목을 잡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기분. 끝에는 객사밖에 기다리지 않는 삶에, 사랑할 도리 외엔 없는 사람들이 가지는 나약하고도 가없는 의미. 오늘이 후회될 때 후회해. 인사할걸. 만나러 갈걸. 딱 한 번만 더 얼굴을 볼걸. 후회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지고, 바스러지고 굳어져서 이상하게 발을 걸친 바보만큼은 되지 마. 객지에 생길 무덤은 이름조차 남지 않는 편이 좋은 거다. 다 알고 있으면서.

 족쇄다. 걸음을 늦추는. 뒤돌아보게 하는. 나는 벌써 이만치 나왔는데. 이렇게나 멀리.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데.

 

 

 형.

 엘리. 뭐 하고 지내?

….

 왜 전화했어. 엘리. 너 무슨 일 있구나.

 ….

뛰었니? 숨소리가.

 나 또 배 타려고. 이번엔 오래 걸릴 거야. 

네 여정을 위해 기도하마. 너는 이런 말을 싫어했지만.

그래도 할 거잖아.

그래.

 

형. 

다음에… 봐. 내가, 돌아가면. 다음에.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냐루가면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라면?!?! 

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미국편 후기부터는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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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1. 6

 

 


 무슨 이유일까? 갑작스러운 폭설과 함께 전보가 실려 왔을 때, 진작 압살한 줄로만 알았던 내 안의 해묵은 감정들이 고개를 들었다. 버석거리는 전보 종이에 닿는 손끝에 페루 고원의 바람이 스치는 듯했다. 반가움. 걱정. 두려움. 불안감, 약간의 흥분감. 한꺼번에 몰려와 가벼운 멀미를 일으켰다.

 나는 약속 날짜보다 훨씬 앞서 제이덕의 집으로 출발했다. 혹시나 해서 미리 정리한 자료들과 함께였다. 며칠 밤을 새우고 그대로 기차에 올라 덕분에 추위에도 불구하고 내내 잘 수 있었다.

 

 

 칼라일 탐사대의 기록 정리


 제이덕의 결혼식에서 본 뒤 처음이었던가. 노라는 여전히 씩씩했고 걷는 폼이 컸다. 쩌렁쩌렁한 웃음소리도 여상했다. 그리고 에디 부부. 볼이 포동포동한 여자아이의 이름은 소피아라고 한다. 학자가 제 딸에게 붙일 만한 이름이다. 그 안온한 가정의 온기, 피어오르는 식사의 김, 신중하게 고른듯한 길이의 사라사 커튼. 돌보는 손을 타 빳빳하게 다듬어진 소매와 악수하고 따뜻한 모닥불 앞에 앉자, 기묘한 흥분이 차차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모두가 저 바깥의 차가운 세계를 구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이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내 아끼는 친구들에게, 이 모든 것을 남겨두고 떠날 거냐고 물었다. 죽으러 가는 것은 아니지만. 저번의 여행이 우리에게 던져줬던 날것의 위험을 생각하면 물어야만 하는 질문이었다. 그런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다. 잭슨 엘리어스가 우리를 안전한 여행에 초대했을 리는 없다.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망설였다. 알고 있지만, 자기 눈으로 봐야만 하는 것이 생겼다고. 봐야만 하고, 알아야만 하고, 그래서 떠나야만 한다고. 그런 대답을 들었다.

 남은 날들 내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들이 금방에라도 닳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렇게 풋내기 같았는데. 고작해야 4년이었는데. 우리에게 이 4년이 얼마나 길었는지! 또 짧은지. 갑작스러운 손님이 에디 부인에게는 실례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 죄책감은 짊어질 수 있다.

 

 

 

 

 


1925. 1. 14

 

 뉴욕행 열차를 탔다. 유독 잔인한 겨울이었다.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추위와 무거운 폭설. 눈발이 온 세상을 덮어버렸다. 거대한 침묵이 세상을 감쌌다. 뒷좌석의 노인이 내내 기침을 해댔다. 석간신문을 주워다 읽는데 빳빳하게 얼어 잘 넘겨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들리는 뉴욕은 여전히 숨 막히도록 붐비는 도시였다. 나는 동료 기자인 스티븐스의 아파트로 갔다. (그도 아컴에 있는 내 아파트의 위치를 알고 있다. 자주 자리를 비우곤 하는 기자들이 흔히 하는 아파트 셰어였다.) 1월이면 그는 아마 파리쯤 가있을 것이다. 두 사람 정도는 더 묵을 수 있을 것 같아 제이덕과 노라도 불렀지만, 제이덕이 적응하기에는 너무 좁은 방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두 사람은 따로 호텔로 보내고 첫날 밤을 지냈다.

 꿈도 없이 긴 밤이었다. 아파트에서는 묵은 먼지 냄새가 났다. 생활감이라고는 없는 집이었다. 아무리 담뱃재를 털고 시트를 구겨도 내가 여기 있다는 흔적을 남기기가 어려웠다. 뉴욕에 왔다. 모든 것이 지독하게 희미했다.







1925. 1. 15

 

 제이덕이 잭슨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오후 8시에 첼시 호텔 410호에서. 잭슨은 묘하게 다급했고 전화를 빨리 끊었다. 우리는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일찍 만나, 후추를 많이 뿌린 저녁 식사를 했다.

 제시간에 호텔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노크를 하고 불러도 410호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보니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불길했다. 긴장 때문에 입안이 말라 까끌까끌해졌다. 우리는 결국 힘으로 호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리고. 뭘 봤더라.



 

 아니. 그래. 난장판이 된 호텔 객실. 그 가운데 잭슨 엘리어스의 시체가 배가 갈린 채 누워있었다. 인영 셋이 비상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그들이 덮어쓴 가면으로부터 붉은 플란넬 천이 삐져나와 흔들렸다. 뒤를 쫓아가려 했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제이덕이 겨우 난간을 붙잡고 선 나를 넘어서 뛰어 내려갔다.

 나는 겨우 숨을 고르고 다시 나의 소중한 친구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리고. 지금. 이 짧은 순간. 목격자의 극단적인 행동이 용서되는 아주 찰나 패닉과 방황의 순간에. 뭘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침착해. 침착해. 침착해.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릴 때마다 되뇌었다. 머리가 아주 뜨겁다가도 차갑게 식었다. 결코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었다. 자연사도 병사도 사고사도 아닌. 살인 사건. 나의 친구는 살해당했다. 아주 불쾌하고, 아주 개성적인 방식으로. 난잡한 의식의 제물이라도 되는 양, 조악한 예술가의 퍼포먼스라도 되는 양. 그 모든 풍경이 지독한 농담 같았다. 바로 곁에서 노라 애버트가 오열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그 울음소리가 그렇게 선명하게 실감을 때려 박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말로 그렇게 믿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악몽에 한 장면을 더하는구나. 우리는 친구였는데. 아아. 친구일 것이다.

 나는 침착하게 잭슨의 품을 뒤졌다. 손에 피가 묻지 않도록 조심했다. 거기서 명함 한 장과 성냥갑 하나를 찾았다. 나는 그런 짓을 하면서 손 한 번 떨지 않았다. 그리고서는 그 얼굴, 공포에 질린 얼굴, 이마에 남은 문양을 몇 장 사진으로 남겼다. 그의 뜨인 눈과 함께. 그 정도는 용서하겠지.

 어리석게도 그의 눈을 감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동시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에 자신이 보고 싶어 하던 것을 봤을까? 한 미치광이 의사의 기고문에서 망막광상이라는 개념에 대한 기묘한 주장을 읽은 적이 있었다. 개요는, 우리가 죽기 전에 본 마지막 풍경이 신경의 마술 같은 작용으로 망막에 사진처럼 뚜렷하게 새겨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연구하면 우리는 수많은 미제사건의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럴 때는 그런 황당무계한 소리도 사실이었더라면 싶다. 암실에서 그 눈을 인화하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멍청하기는. 안다.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어둠 속이 아니면 맘 편히 울 수도 없다.


 제이덕은 최선을 다했으나 범인들을 놓쳤다. 곧 경찰이 와서 현장을 조사하고 우리의 증언을 받아 갔다.

 마틴 풀 경위는 이런 살인사건이 벌써 9명째이고, 전부 이마에 이런 끔찍하고도 기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노라고 했다. 작년 할렘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 이야기였다. 그런데, 해당 사건에서는, 힐튼 애덤스가 벌써 범인으로 잡혀 교도소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범인이 이미 잡혀 있다면, 나의 살인자는 누구란 말인가?






1925. 1. 16

 

 

 

 결국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꿈이 두려웠다. 나는 내가 잭슨의 품에서 발견한 것들을 보여줬다. 우리는 밤이 지도록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지. 칼라일 탐사대와 이 사건이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아, 죽음이 얼마나 부당한지.

 내일 사이프러스 힐스 묘지에서 비종파 장례식이 열릴 예정이다. 내리 주저앉아 있다가는 슬픔이 너무 많은 것을 좀먹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고 세 명의 사람을 만났다.


 성냥갑에는 상하이의 주소가, 명함에는 뉴욕의 회사가 적혀있었다. 당장 상하이로 날아가 볼 수도 없는 일이니, 일단은 명함의 단서를 쫓았다.


 -애머슨 무역: 사장인 아서 애머슨은 그는 고작해야 1~2주 전에 잭슨을 만난 듯하다. 애머슨 무역은 주주하우스에 아프리카로부터 가져온 물품을 납품하고 있었다. 그는 주주 하우스의 기분 나쁜 노인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주주하우스: 우리는 곧장 할렘으로 향해 주주하우스의 사일러스 은콰네를 만났다. 노라는 눈에 띄게 그를 의심했다. 분명 무언가 숨기고 있고, 눈빛이 음험하고,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저 송장에 가까운 노인이었지만 역시 감이 좋지는 않다. 목에는 뭔가의 열쇠가 걸려 있었다. 그는 유의미한 정보라고는 하나도 주지 않았다. 모든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할 뿐이었다. 잭슨은 왜 이런 명함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뒤이어 프로스페로 하우스 출판사의 조나 켄싱턴을 만나러 갔다. 만날 때마다 둥글어지는 남자다. 우리는 애도의 말을 몇 마디 나누었다. 그는 잭슨이 남긴 편지와 자료들을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그중에는 잭슨을 걱정해야 할 만큼 정신이 불안정해 보이는 편지도 한 장 있었다(물론 쉽게 내놓지는 않았다). 이 편지 한 장을 읽기 위해, 그리고 이 자료들을 가지고 가기 위해, 나는 간만에 각서를 썼다.

 조나, 내가 왜 내 친구의 명예를 팔아 싸구려 기사를 쓸 거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기자로 산다는 건 이런 모욕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일라이저 웨버. 하하. 불평하기 어려울 만치 값싼 서명이었다.

 

 

 

 

잭슨 엘리어스의 메모 







1925. 1. 17


 장례식 당일. 우리 셋과 조나 외에는 고작 두 사람이 더 있을 뿐이었다. 엘리어스의 변호사인 칼튼 램지와 그 조카 윌라 슬라이. 흐린 하늘에서 눈발이 조금씩 날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 때문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상실은 억지로 찾아왔으니 대비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작별은 자발적으로 고하는 인사였다. 그래서 더 쉽지 않다.

 하고 싶은 말은 전부 했다. 인사하며 보낼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위험을 미들네임으로 삼고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던 떠돌이가 그래도 돌아와, 결국 미국 땅에서 죽어 묻히는 것이. 이런 게 섭리라면 섭리고 자비라면 자비일 것이다.

 손수건을 넉넉히 챙겨왔는데 노라가 다 썼다. 다정한 엘레노라. 제이덕은 사내다운 척 누구보다 소년 같은 고집을 피웠다. 칼튼 램지 씨가 월요일에 엘리어스의 유언장을 발표할 예정이니 그 자리에 참석해달라고 전했다.


 돌아가는 길에 기자 몇 명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몇은 아는 얼굴들이었다. 개중 뉴욕 타임즈의 기자 레베카 쇼젠버그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쇼젠버그는 잭슨의 죽음과 힐튼 애덤스 사건 사이에 연관성을 의심하고 있었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우리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레베카 쇼젠버그로부터 힐튼 사건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는데, 요약하자면:

-모데카이 레밍 박사가 이 사건과 죽음숭배교단과의 연관성을 밝혔다. 

-할렘 사건은 제법 오래 연관성을 부정당하다가 14분서의 롭슨 경관에게 넘어갔다. 

-힐튼은 8번째 살인사건에서 현행범으로 잡혔다.


 쇼젠버그 기자가 힐튼 애덤스의 아내 밀리 애덤스 씨와의 만남을 주선해주기로 했다. 이후 우리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쉼 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이 슬픈 생각을 멈추는 데 도움이 되었다.

 



 뉴욕 시립 도서관에서 얻은 자료 정리.

  1. 칼라일 탐사대에 대하여

 -칼라일 가문: 시조 에브너 베인 카렐이 “불건전하고 흉악한 행동”으로 영국에서 버지니아로 이송되었다. 그의 아들 애프라임이 뉴잉글랜드로 가서 성을 바꾸었다. 이후 남북전쟁 시기에 사업에 성공하여 부호 가문이 되었다. 현재는 에리카 칼라일이 운영하고 있다.

 로저 베인 워딩턴 칼라일은 17세 때 친자 확인 소송을 면했다. 18, 20세 때 각각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았다. 고등학교는 명문 사립을 나왔는데 이후에는 온갖 명문대에서 신사적 자퇴를 했다. 부모는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마스터스 가문: 군수 기업 경영. 안전한 투자.

 -존 브레이디: 폭행, 도박에서부터 무죄 선고된 살인 혐의 등 전과가 다양하다. 그는 사건을 목격한 8명의 증언을 누르고 명백한 사건에서 무죄를 받았다. 칼라일이 뒷배를 봐줬나 본데.

 -로버트 허스턴: 존스홉킨스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프로이트, 융에게 배웠다. 염문이 있는 사람이었고 부자들을 주로 진료했다. 그의 환자 중에 로저 칼라일도 있었다. 사망 선고 이후 진료기록이 전부 뉴욕주 의료관리위원회로 넘어갔다. 


  1. 잭슨의 죽음에 대하여

 기호학: 피해자들의 이마에 있는 문양. 왕조 시대 이집트에서 쫓겨난 한 종파로부터 이어진 사교조직의 문양이라고 한다. 피투성이 혀 교단과 연관이 되어 있고 뿌리는 케냐. 지금도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

 

 

결국 노라와 제이덕 두 사람 모두 호텔을 떠나 아파트로 짐을 옮겼다. 이제야 슬슬 이 낡은 공간에 누군가가 머문 흔적이 보인다.

 






1925. 1. 18

 

 다들 웬일로 아침부터 부산스럽더라니 일요일이다. 신실한 신자들이로군. 나는 신성한 문턱을 넘는 대신 아침 시간을 달콤한 잠과 불경한 사건들에 대한 문서 정리로 때우기로 했다. 노라는 내가 교회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믿기지는 않겠지만 나는 가톨릭 신자고 내 이름은 세례명이고 내 형은 신부라고 대답해주었다(반쯤은 사실이다). 노라는 그러면 성당이라도 가던지, 아니 교회에 가야 한다고 대꾸했다(이럴 수가). 나는 슬프고 위험한 시기에 기도하면 손해를 보는 묘한 징크스가 있다고 덧붙여 설명했지만, 노라는 대략 '헛소리 하지 마세요'하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이런. 하지만 어린 동료에게 내 인생을 그 이상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진 않다. 신과 나의 복잡스럽고 서로 불편하고 그렇다고 사랑이 없지도 않은 지난한 관계가 대체 이 사건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동료들이 자리를 비운 동안 슬픈 타성에 젖어 벽에 지도를 붙이고 칼라일 탐사대의 행적을 정리했다. 꽤 품이 드는 일이어서 반나절이 종일 걸렸다. 붙이고, 쓰고, 붉은 실을 잇고, 바쁘게 손과 머리를 움직이니 두 사람의 공백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노라가 돌아오는 길에 샌드위치를 사다 줬다. 소스의 맛이 기름지고 부도덕했다. 냉담자에게 차려진 즐거운 식사였다.



 오후. 레베카 쇼젠버그와의 약속. 힐튼 애덤스의 아내인 밀리 애덤스와의 만남. 장소는 할렘 가에 위치한 라파예트 극장. 그곳이 밀리 애덤스의 일터인 듯 했다. 밀리 애덤스 씨는 인상이 강렬하게 남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렘 헬파이터 출신의 힐튼 애덤스는 경찰이 사건에 관심을 두기도 전에 친구들과 함께 자율 방범대 비슷한 활동을 해온 듯하다. 이미 2년 전부터, 할렘에서는 끔찍한 살인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었다. 피해자들의 신분은 다양했고 이마에 새겨진 문양, 그리고 모두 할렘에 다녀왔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었다. 경찰은 범죄 조직의 항쟁과 강도 사건으로 추정했지만, 애덤스 부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힐튼은 뉴욕시립도서관에서 이 사건과 특정한 교단이 연관되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또 다양한 일지와 기록을 남겼는데, 이 자료는 이후 경찰이 전부 압수해 갔다. 힐튼은 붉은 색의 긴 천 조각 같은 걸 이 자료의 책갈피로 쓰고 있었다. 붉은 천이라.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힐튼은 체포되기 얼마 전에 친구들과 함께 주주하우스에 대해 얘기를 했다. 그래서, 밀리는 할렘의 주주하우스를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 남편이 체포된 이후 직접 감시를 하기도 했다. 밀리가 본 것은:

 -한 달에 한 번씩 대략 2~30명 정도가 새벽에 한꺼번에 가게로 들어가는 모습. 

 -한번은 사람들이 오기 1시간 전에 비밀스러운 짐 상자가 가게로 들어갔다. 

 -낮에 형사들이 들어가는 것도. 뇌물을 받은 듯. 경찰도 한 패군.


 힐튼 애덤스는 작년 9월 뉴욕시립도서관 할렘 분관 근처, 으슥한 골목 중년 백인 남성의 시체 옆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목격자는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간 경찰 한 사람. 힐튼은 피 묻은 단도를 버리고 있었다고. 흉기는 힐튼이 군대에서 받았던 볼로 나이프라고 한다. 하지만 밀리에 의하면 그는 그 칼을 순찰 나가면서 한 번도 가져간 적이 없고, 집에 있었던 것을 경찰이 압수해갔다고 한다.


 고작해야 두 사람, 평범한 일상을 살던 부부가 겪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밀리 애덤스는 초연하고 담담해 보였다. 종합해보았을 때, 힐튼 애덤스에게 누명이 씌워진 정황은 분명했다. 경찰까지 이런 방식으로 사건에 연관이 되어 있다면, 믿을 사람이 대체 얼마나 있을까. 그 말인즉슨 내가 직접 찾아 나서지 않는 이상 잭슨을 해친 살인자가 경찰에 의해 명명백백히 밝혀질 일은 없을 것이란 뜻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의 누명을 밝히겠노라 다짐하고, 힐튼 애덤스와의 면회 약속을 잡았다.


 할렘을 벗어난 이후로는 내리 허탕이었다. 기록의 전당을 뒤졌지만 사일러스 은콰네는 시민으로 등록 되지 않았다. 에리카 칼라일의 법무법인이 던스턴 휘틀비 앤드 그레이라는 것 정도만 알아낼 수 있었고. 이후로 모데카이 레밍을 만났다. 정식 학위도 없는 박사에게 뭔가 많은 것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시간 낭비가 될 줄은 몰랐다. 이런 시간 많은 호구 새끼가 주주 하우스의 돈줄 중 하나라니.

 

 

 

 

 


1925. 1. 19

 

 아침 일찍 램지 사무소로 왔다. 자그마한 공간이었지만 모든 물건과 사람이 제자리에 들어차 있어 제법 바쁘게 돌아가는 곳이었다. 우리는 잭슨 엘리어스의 유언장 집행에 참석했다.

 램지 씨는 먼저, 잭슨이 죽기 대략 3일쯤 전에 와서 맡기고 간 것들을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잭슨 엘리어스가 램지에게 남기고 간 것

 

 

 또, 잭슨은 죽기 전날 밤에 와서 자신의 유언장을 고치고 갔다고 했다.

그렇게 예감될만한 죽음이었다면, 아예 작정하고 우리를 목격자로 선별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잭슨 엘리어스의 유언장

 

 

 잭슨 엘리어스. 이 빌어먹을 자식. 살아있었더라면 거하게 한 대 갈겼을 거다. 살아있었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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