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연성...이라고하나 시나리오 스포있음~~ 군왕 시점으로 세션전까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후반에 조금 그렇고그런거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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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자락을 지그시 당기면 돌아다보던 형님의 앳된 얼굴을 생각한다. 그 작은 목과 둥근 이마. 그런데도 어딘지 넓고 어른스러워 보였던 한 소년을 생각한다. 그가 처음 제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얼마나 정답고 기뻤던가. 무겁게 짓눌린 어깨가 자신을 외면할 때 자신이 느낀 건 상실감이었던가. 한 소년이 청년으로 자라기까지 얼마나 많은 목숨이 필요했던가. 그 많은 피가 그 손을 어떤 빛깔로 적시었던가.
 형님은 어째서 변해버렸을까? 그는 먼저 답을 아는 질문을 했다. 드넓고 화려한 대현의 황실, 그 몸을 감싼 비단옷과 그가 보고 듣고 입는 모든 것이 형님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변한 그를 원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답을 모르는 질문이었다.

 황궁에서의 생활은 외줄 타기 묘기와도 같았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가차 없는 천 길 낭떠러지가 기다렸다. 귀에 닿은 속삭임, 멀거니 흘기는 눈빛 한 번만으로도 사람의 생사와 영욕이 오갔다. 유하의 어머니, 선황의 총애를 받는 리빈은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눈에 제 자식의 재질을 알아보았다. 이를테면 또박또박 되물어온 순간. “그러나 옳지 않습니다.” 받은 두구꽃 한 송이도 버리지 못할 때. 한 점 티끌의 의심도 없는 눈이 남에게 감당 못 할 도움의 손길을 뻗을 때.
 약점이 되는. 황궁에서는 개나 가지면 좋을. 제 목숨을 위협하는 자질들.

 “어마마마는 제가 지켜드리겠나이다.”

 아이가 책상에 기댄 리빈에게 다가와 그렇게 속삭였을 때, 그는 한 손을 들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런 말은 누구에게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사랑(四郞). 특히 네게 그럴 만한 힘이 없을 때는.”
 “소자, 그러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네 뜻은 기특하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리빈은 언제부터 책상 위에 놓여있었는지 모를, 작은 손이 정원에서 꺾어왔을 부드러운 자귀꽃을 어루만졌다. 

 “명(命)을 아는 자는 위험한 담 아래에 서지 않는다 하였다. 네가 살아남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그런 다음 남에게 마음을 써도 늦지 않아.”

 리빈은 생사를 다투는 각축장으로 자신과 아이를 내모는 대신, 그저 그가 그 무른 성정의 일부만이라도 지키며 연명하기만을 바랐다. 유하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그 뜻에 따랐다. 그는 맞지 않는 갑옷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듯 남의 비위를 맞추며 재능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제대로 된 추위를 알지 못하던 어린애도 그렇게 궁에서 커갔다. 당시에는 반도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말뜻을, 그는 곧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황궁 안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파도가 쳐서 그가 사랑하는 것들이 다치고 죽어 나갔다. 절로 거짓말이 늘었다. 
 그 가르침 덕분에 해유하는 보이는 것 이상을 보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한량에 겨우 못 미치는 넷째 황자로서 있는 듯 없는 듯 자라날 수 있었다. 수많은 피보라가 그저 가벼이 옷깃에 튀는 핏방울처럼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손위 두 형제가 유건에게 목숨을 잃었을 때도, 그는 살아남았다.



 그날 목에 겨눠진 칼끝을 생각한다. 핏줄을 따라 서리가 에일 만큼 추운 겨울날이었다. 달마저 냉기에 질려 버석거렸고, 사람의 마음이 얼어붙어 형제간의 온정과 미덕도 빛을 잃었다. 숨을 길게 내쉴 때마다 가까운 검날에 맺히는 제 입김이 보였다. 그 검날은 그 숨결마저 도려낼 것처럼 형형하고 날카로웠다.

 시간은 결코 배신하는 법이 없으니 만년을 정정할 듯했던 부황도 시들었다. 회광반조의 부황이 찾은 자식이 그의 적장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처마 밑에서 작게 피어나다 꺼졌다. 그래서였을까. 불안이 그 남자를 좀먹었을까. 어디까지가 오롯이 제 것인 광기이고 어디까지가 불안이 낳은 퇴폐인지 저 자신조차 알 길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 실은 아주 멀쩡히 제정신인지도 몰랐다. 유하가 타고 나지 못한 귀한 재질이 그의 형에게는 있었던 것인지도. 유건의 행동은 단순한 광기라기에는 늘 일목요연하게 영리했고 선처럼 계획적인 데가 있었다. 적어도 친왕 시절까지는 그랬다. 이러한 절차는 짐짓 피에 미친 자의 행동처럼 보여도 철저히 계산된 결과일 수 있었다. 다 이겨놓은 장기의 마지막 수를 두듯 유건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하가 언제 남에게 위협이 된 적이 있던가? 어려운 차례는 앞서 다 넘긴 터였다.
 이미 유리와 유소의 피를 먹은 검은 만족스러울 정도로 곧게 뻗어 그의 목까지 가닿았다. 

 “어떠냐, 유하야. 내게 할 말이 있느냐?”
  
 그리 물으며 내려다보는 얼굴에 달빛이 가려 그림자가 드리웠다. 마주 그를 올려다보는 찰나 원망도 두려움도 아닌 슬픔이 유하를 짓눌렀다. 문득 두 눈을 감고 그 검날에 뛰어들고 싶은 기묘한 충동이 일었다. 같은 순간, 그는 자문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었다. 소년은 몸을 낮추어 엎드렸다. 무릎이 접히고 이마가 바닥에 닿았다.

 “형님.”
 “오냐, 말해 보아라.”
 “저는 단 한 순간도 그 자리를 넘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이었다. 
 “대현 황실의 황제 자리는 저 같은 아둔한 어린애가 탐내기에는 너무 과분하지 않습니까.”
 그는 그렇게 믿는다.
 “천하의 주인이 될 몸은 형님뿐이니 저는 그저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거짓말이어야 했는데. 왜 하필이면 지금일까. 옷자락을 지그시 당기면 돌아다보던, 형의 앳된 얼굴이 스친다. 그 순간의 의미를 그는 아직은 모른다.

 유건은 침묵에 잠겼다. 차분하고 비굴한 굴종의 선언 끝에, 유하는 일견 마지막 호흡이 될지도 모르는 몇 마디 숨을 흘렸다.
 돌연 유건이 폭소를 터트리며 정적을 깨뜨렸다. 그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무릎까지 쳐가며 웃었다. 유하는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기다렸다. 정자가 떠나가라 한바탕 웃음이 쏟아진 뒤에야, 유건이 유하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일어나거라, 소하야. 내 그저 농을 친 것이야.”
 거짓말.
 “내 어찌 소중한 아우를 그리 심하게 대하겠느냐?”
 거짓말.
 “내 너의 마음은 익히 알고 있으니 현을 위해 요긴히 쓸 것이다.”
 반쯤은 거짓말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군장을 질 만큼 장성하자 해유하는 곧장 군사와 함께 북방의 영토로 떠나야 했다. 살려둔 목숨을 귀하게 써서 싸우다 죽으라는 안배였다.
 해유하는 자라면서는, 어머니를 위해 오직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해야 했다.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자진이나 다름없었다. 그리 마음을 먹자 궁에서 마주치는 모든 미진하고 하찮은 죽음이, 이다음에는 필경 그의 차례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것이 그의 고질병이었다. 그는 마음 한편으로는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적어도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래서였을까. 싸움터에 온몸을 내던지는 하루가 궁에서의 십여 년 세월보다 나았다. 그것은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처럼 보였다.
 북방의 칼바람이 보드랍고 연약했던 뺨을 찢고 흉터를 아로새겼다. 어떤 날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며칠을 꼬박 말을 달려야 했고 또 어떤 날에는 버석거리는 모래가 씹히는 식사를 했다. 이 머디 먼 북쪽 땅에서는 한여름부터 눈이 왔다. 하지만 그곳에서 보내는 어떤 겨울밤도 제 목에 칼이 드리웠던 그 날만큼 춥지는 않았다. 몸에 박혀온 활촉이 마음에 에인 칼날보다 아프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이렇게 멀고 삭막한 땅에 다다라서야, 그는 잠시나마 자유로웠다. 상상만 했던 자유의 언저리를 만지고 더듬어 그 모양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스스로 죽을 자리를 고르지는 못했으나 이제는 그 방식이라도 직접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운명이 야속한 탓인지.
 아니, 어쩌면 하늘도 알아서일까. 죄 있는 자에게는 명예로울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해유하는 죄인이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람은 죄였으니.


 


 유하는 처음 자운명음을 눈에 담았을 때를 떠올렸다. 유건의 혼례식 이후 왕부에 따로 예를 올리러 갔던 날이었다. 그때의 명음은 왕부에 갓 시집온 새신부였다.
 아직도 그날의 모든 것이 잡힐 듯 눈에 선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두어 조각 떠서 흘러갔다. 저만치 멀리, 그녀가 정원의 꽃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자그마한 서책이 들려 있었고, 국화가 수 놓인 상앗빛 웃옷에 단아한 감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수묵화로 그린 듯한 사람이었다. 섬세하고 짙은 속눈썹 아래 그늘진 눈가가 붉게 물든 채였다. 그 시선은 어딘지 먼 곳을 향했다. 닿을 수 없는 어떤 피안을 바라보는, 그 눈에 담긴 영원한 슬픔. 소년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 자리에 덜컥 발이 묶였다. 다만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찰나 매화 꽃잎 하나가 날려 그녀의 귀밑머리로 떨어졌다. 백옥으로 깎은 흰 손이 가만 제 살결을 더듬더니, 그 위로 내려앉은 꽃잎을 찾았다. 엄지와 검지손가락 끝이 모여 그 작고 가냘픈 꽃잎을 짓이겼다. 의식하지 않은 듯한 그 모든 행동이 우아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녀의 주변을 얇은 막처럼 감싼 유장한 슬픔에, 그 작은 몸짓에, 주변의 모든 소란스러운 것들은 색을 잃고 순식간에 배경으로 스러졌다. 그 세계에는 오로지 그녀만이 존재했다. 동시에 그녀는 이 현실에서 아득히 떨어져 있었다. 그 순간부터 소년에게 온 세상의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었고, 모든 의미는 의미를 잃었다.
 어린 황자는 붉어진 얼굴을 숨길 생각도 못 한 채 속절없이 뒤돌아 도망쳤다.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기억을 자신이 가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드높고 별이 짙은 야만의 밤하늘 아래서,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보석인 양 나유타의 시간 동안 아끼며 돌려보고 되짚고 들여다볼 적마다, 그는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만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그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우연한 몸짓을 눈에 담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는 그녀에게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었을까? 다른 길을 갈 수 있었을까? 그녀를 평범히 또 무심히 형수로 대하고, 후에 다정한 말씨에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을 만나, 백년해로를 약속하며 함께 매듭을 묶고 그리고, 그 여인을 군왕부의 안주인으로 삼아, 두 사람을 똑 닮은 아이를 가지고…
 생각이 여기까지 흐르면 그는 결국 힘겹게 고개를 털어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것 같아서.
 그만큼 그녀는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자신에게 영원한 족쇄가 채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처음 그녀를 바라본 순간부터 유하는 명음을 연모하게 되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관계였는데도 그리는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여인의 이름을 입속말로 되뇔 때는 뱃속에 나비가 흩어졌다. 입에 들어오는 가장 신 탱자도 다디달았다. 줄곧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곽휘원의 텅 빈 편지를 이해했다. 정인에게 쓰는 편지에 실수로 백지를 한 장 담아 보내었다는 실없는 남자의 이야기였으나, 나 역시도 직접 배를 갈라 내보이는 것이 아닌 이상, 일평생 작고 미천한 몇 마디 줄글을 배운 것만으로는 이 마음을 감히 어디에도 꺼내다 놓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했다.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그렇게 고요히 그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지나자 어리지 않은 유하는 더는 그녀 앞에서 도망가지 않았다. 그 앞에서 감히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온갖 시고 쓰고 달콤한 색으로 팔랑거리던 나비들을 쇠로 된 함에 넣고 조용히 그 문을 걸어 잠갔다. 그 안에 든 것이 짓눌린 채 저 혼자 얼마큼 부풀고 커지건, 그는 외면했다. 천진했으나 바보는 아니었기에, 감히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미몽은 품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놓지 못한 바람이 있다면 그저 지켜보는 것. 적어도 먼 발치에서라도, 그녀가 사랑하지는 않을지언정 그녀의 삶을 평안케 하는 모래로 쌓은 황실을, 그 명예를 지키는 것…….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자기 손으로 무너뜨린 날은 머지않아 찾아왔다.
 그날 유하는 수행원 두엇만을 데리고 잠시 황궁에 들렀다. 부름을 받고 이 주 정도를 머무를 예정이었는데 일정이 엇갈려 황제는 지방 순시에 나가고 없었다. 기다리는 일은 익숙했으니 유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해 봄 청명원에는 한참 배꽃이 만발하여 온 사방에 부서진 옥가루처럼 날렸다. 유하는 술병 하나만을 든 채 배를 탔다. 황제의 동생이라는 이름이 주는 몇 안 되는 재미가 바로 이 실없는 풍류였다. 그는 신선놀음인 척하는 장난을 이 나이까지도 좋아했다. 황후가 그날 옥음루에 머무른다는 사실을 그가 알았던가? 배에 탈 때부터 이미 술이 올라 있었기에 기억은 가물거린다. 그러나 알았더라도 감히 직접 얼굴을 볼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그저 먼 발치에서,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안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는 호수 한가운데서 울리는 칠현금 연주를 들었다. 그녀였다.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밤바람이 화답하듯 고요하게 물살을 밀었다. 유하는 몇 번인가 노를 젓다가 마음이 뜨자 이내 그만두고 배 위에 드러누웠다. 그는 입술을 병에 대고 연거푸 들이켰다. 마음이 차고 또 뜨겁게 젖어 들었다. 술보다 그 음색에 더 취했다. 이 곡이 끝나면 돌아가야지, 이다음 곡이 지나면 뒤돌아야지. 그러다 보니 어느새 조각배에 물이 찼다.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호수의 반절을 넘게 건너온 뒤였다. 청명호는 수면 아래로 연꽃 뿌리가 엉켰으며 꽤 깊은 못이었다. 만취한 그는 당황해서 휘청거렸고 그 순간 조각배가 넘어졌다. 첨벙! 물소리가 호수를 크게 울렸다. 연주가 뚝 멈췄다.
 해유하가 구사일생으로 옥음루에 다다랐을 때 눈앞에는 놀란 송하의 둥그런 눈이 보였다. 제 주인을 참으로 곤란하게 할 테니 저 애가 나를 미워해도 할 말이 없겠다, 아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명음은 놀라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날 그가 한 어떤 행동도 그녀를 놀래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차분하게 송하를 시켜 난로에 탄을 태우게 하고 마른 옷가지를 준비시켰다. 아득히 멀리서 탁, 문을 닫는 기척이 났던가. 한참을 떨다 정신을 차리니 시녀들은 보이지 않았고 그녀만 남아 그의 앞에 다과와 과일 몇 개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방안에는 훈훈한 공기가 돌았다. 잔뜩 젖었던 그의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고였다. 창밖 너머에서 이따금 바람 소리와 함께 미약한 풀벌레 소리가 울렸다. 옥음루 한구석에는 아직도 그녀가 타던 칠현금이 놓여 있었고, 탁자 위에는 다과 접시와 함께 술잔이 보였다. 의아한 눈빛을 마주하자 그녀가 덤덤하게 말했다.

 “좋은 날을 그냥 흘려보내기 아쉬워 독작하던 참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녀의 두 뺨에 진 불그스름한 그림자가 촛불 때문이 아니라 취기 때문인 것도 같았다. 그런데도 그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곧고 발라서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어찌 이리 늦은 밤까지… 주무시지 않고요.”

 그가 더듬더듬 여쭈었다.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몸이 떨리는 듯하니 군왕도 한잔하시겠습니까.”

 한참 전부터 혼이 날 것을 각오했는데도, 명음은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없이 나긋한 얼굴로 물어왔다. 평소의 그녀와 달랐다. 이런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그러니 이건 아마도 꿈인 거겠지, 호수 바닥에서 마지막으로 꾸는.
 그런 생각이 들자 유하는 조금 대담해져서, 접시에 놓인 복숭아를 하나 집었다. 한입 가득 과육을 머금자 즙액이 터져 나왔다. 과즙은 손등을 타고 내려와 팔뚝의 핏줄을 따라 흘렀다. 과실의 투명한 피를 마시는 듯한 섬뜩한 단맛에 몽롱한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듯했다. 유하는 그제야 문득 제 처지가 우스워져 저도 모르게 나른한 웃음을 흘렸다. 그토록 연모하던 가을 국화 같은 여인과 잔을 나눌 꿈 같은 일이 생겼는데 볼품없이 물에 젖은 생쥐 꼴이라니.
 대답은 뒤늦게 한숨처럼 세어나왔다.
 
 “소왕은 괜찮습니다. 더 큰 결례를 범하지 않으려면 이제 깨야 할 것 같습니다만.”

 꿈이라 여기면서도 그는 그렇게밖에 말할 줄 몰랐다. 대답을 듣는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쉽게 읽히지 않았다. 그 고요한 미소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골몰하려던 차에,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유하, 내가 내리는 잔을 거절할 셈입니까?”

 그것은 그가 저항할 수 없는 한마디였다. 그녀는 그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되짚어보면, 그날의 모든 일이 그랬다. 이상하고 흐리고 아름다웠다. 그는 몇 잔을 연거푸 더 마셨다. 방안은 따뜻하게 데워졌고, 부드러운 향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도 묘한 추위가 가시지 않아서, 그는 한참을 떨었다.
 그 섬섬하고 미약한 한기는 제 욕망을 눌러 담고 있는 보루였다. 그녀는 지나치게 가까이에 있었다. 너무나 다정한 말씨로 다정한 말을 건넸다. 무엇 하나 익숙하게 여길 일이 없었는데도 무심하고 자연스럽게 아름다웠다. 그녀가 던져주는 이 덧없는 한 줄기 희망을 어찌 다뤄야 할지 모른 그가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연정을 내리누르기 위하여 쌓아 올린 벽이 안에서부터 무너지며 파편이 가슴을 찔러왔다. 한평생 짓눌려왔던 것들이 희미하게 비추는 빛을 찾아 하염없이 부풀어 올랐다. 그는 눈앞의 칼로 뛰어들고 싶었던 그때의 그 나직한 충동이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자유를 향한 열망과 한 여인에 대한 목마름이 같은 이름으로 그의 안에 눌러 담겨 있었다.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사는 일은 자진이나 다름없는데도.
 그녀의 물기 어린 눈동자는 처음 본 그때와 똑같았다. 그는 갈망과 체념을 동시에 담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자기가 지금 무얼 바라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애원하는 눈을 했다. 손을 뻗어 가볍게 흩자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명주실처럼 흘러내렸다.
 그날 알았다. 그녀는 붓으로 그려진 사람이 아니라 살과 피가 도는 사람이었다. 만지고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사실이 그렇게 미칠 것 같았다. 움켜쥐자 부드러운 살결이 손 모양에 맞게 눌렸고 체취가 느껴질 만큼 몸과 몸이 가까이 닿았다. 타는 불에 손을 집어넣은 듯한 아찔함에 찰나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이미 그녀를 제품에 세게 가두어 안고 있었다.
 이 순간을 놓치면 더는, 탐하는 마음을 붙잡아 놓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녀를 만지고 안고 파고들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됐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닿을 수 없는 것에 닿은 채로 그는 생각했다. 명음.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테지요. 이번 생의 내게 그런 행운은 없을 것을 압니다. 어째서 나를 허락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마마. 저는….”

 탁해진 목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상처에서 고인 피가 흘러나오듯이.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한다고 제가 감히 그리 여겨도 되겠습니까? 묻고 싶은 것은 그 어떤 것도 묻지 못한 채.

 “유하.”

 그녀는 나직한 한 마디로 모든 말을 막았다. 그리고 무언가 더 덧붙이는 대신 그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그걸로 끝이었다.
  팽팽하게 당긴 줄 같던 긴장감이 깨어지고, 그는 바로 입가에 와 닿는 목덜미에 입 맞추며 파멸을 향해 나아갔다. 입술이 닿은 그녀의 얇고 가는 목선 아래로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가벼운 손짓 몇 번으로 옷가지가 바스락거리며 흘러내려 둥글고 고운 어깨선이 드러났다. 탄성을 담은 눈길이 그 위에 잠시 머물렀다. 그의 심장은 당장이라도 제 껍질을 벗어던지고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살결이 마주 닿고 스치는 곳마다 불꽃이 피어나 아까의 추위는 간데도 없이,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전소해 사라질 것만 같은 열기가 그를 태웠다. 목 뒤까지 뻣뻣할 정도로 몸이 달아올랐다. 그는 다분히 갈급한 몸짓으로 그 턱선에, 고운 어깨에, 나긋한 빗장뼈에 입을 맞추었다. 달뜬 숨결이 가슴께에 닿자, 그녀의 몸이 조금 떨리며 뒤로 살며시 젖혀졌다.
 그는 자신이 감히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그녀의 표정들을 눈에 담았다. 흉터 진 손이 나긋하게 접히는 팔꿈치, 가는 허리,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결과 복숭아뼈를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은 부서지기 쉬운 보물을 다루는 아이의 그것처럼 신중하면서도 간혹 서툴렀다. 그녀는 그가 간지러운 곳에 닿을 때면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것이 달콤한 탄식과 속삭임에 서서히 녹아내릴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길고도 짧게 이어지는 입맞춤은 몇 번을 해도 모자란 것처럼 느껴졌다. 입술이 포개어지고 남의 숨을 훔치고 들이마실 때마다 입안에 남은 과실의 잔향이 짓눌리며 번졌다. 늦봄이어서 모든 것이 그렇게 무르익는듯했다. 매끈매끈하게 땀에 젖은 몸이 겹쳐오면 그녀는 어딘가 힘에 겨운 듯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여러 번 입술 속에서 굴려보았고 나직이 마주 부르기도 했다. 더는 바싹 붙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닿아 여린 살결을 파고들면서도 그는 더, 더 원했다. 숨이 차고 넘칠 때까지 놓아줄 수가 없었다. 


 흰 손끝이 잠시 그의 어깨에 난 흉터를 따라 몸 위로 나긋한 선을 그었다. 손가락 사이에 들어온 꽃잎을 짓이기는 것과 같이 무의식적인 행동. 그 한순간이 그의 영혼을 어떻게 묶어놓았던가. 그는 그녀의 옆자리에 늘어져 눈을 감고 있었고, 아주 가까이에서 그녀의 숨결을 느꼈다. 그 영원과 같은 찰나가 지나자 모든 것이 끝났다.
 그녀가 옷을 입는 기척이 들렸다. 그는 자는 척을 했지만, 그녀는 이미 알았다.

 “전부 잊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그럴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호수의 신기루이고 봄밤의 꿈이려니 잊고 당신의 자리로 돌아가세요.”
 그 목소리의 높낮이, 발음에 숨이 섞이던 순간까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것만이 살길입니다.”

 


 해유하는 그날 곧장 도망치듯 궁을 떠났다. 그러나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없었다. 어디로 가서 무슨 짓을 하건, 어느 때건, 몸에 걸린 족쇄가 뻐근할 정도로 무거웠다. 온갖 잡다한 감정이 시도때도 없이 쏟아져나와 그를 괴롭혔다. 할 수만 있다면 떼어다 버리고픈, 추악한 욕심. 영글어 터져서 더는 어떻게 다듬을 수도 없는 날것의 연정. 그리고 숨길 수 없는 희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그럴 수는 없었다. 금수가 아니라 인간 된 자로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몇 번을 되짚어도 스스로 저지른 일, 스스로 끌어다 맨 죄였다. 그 순간 그녀는 칼날이었고 그는 숨도 참지 않고 뛰어들었다. 원치 않아도 그는 그녀를 다치게 할 수 있으니 양날의 검이었고 조금의 구원도 없을 관계였다. 그러나 자신이 여전히 그녀 말고는 그 무엇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아직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명예도 일말의 품위도 없이.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렇게 해가 지고 날이 가고, 그저 도망치기 위해 베어 넘기는 살의 산이 눈앞에 쌓여갔지만. 무용도 군공도 지은 죄를 덮을 수는 없었다.
 죄책감.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바야흐로 황태후의 탄신연이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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