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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리 씨가 떠났다. 우리는 23 제곱미터의 좁은 공간을 급히 벗어나고도 갈 곳이 없어 계단에 앉아 술을 마셨다. 그녀가 있던 공간의 빈 자리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와, 그녀를 비우고 있던 것과 우리는 어쩔 도리 없이 이 세상에서 잠시간 공존했다. 정확히 공존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공존은 함께 존재한다는 뜻인데, 비움을 존재로 치부하는 건 틀림없이 모순이 될 테니까. 하지만 다른 대체어를 찾기 어렵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깊은 대화를 피했다. 나는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침 상황도 도왔다. 그녀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고, 우리는 쫓기고 있었다. 나는 차라리 모래를 밟는 감촉과 좋아하는 노래에 대해 묻기로 했다. 

 아첨으로 길들였던 혀를 남의 진실한 안부를 묻는 데에 쓰는 게 낯설어서 나는 자주 말을 더듬었다. 그런 말들은 진심 뒤에서 맴도는 것이어서 서투르고 낮았다. 나는 그녀의 입술 속에 사는 검은 공간을 쉽게 마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사과하는 것을 잊었다. 그 때 두고 도망쳐서 미안하다고, 미처 화면을 쳐다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고, 그런 일은 이 세상의 누구도 겪어서는 안되는 거였다고 제대로 말했어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죄책감을 목졸랐어야 했다. 그녀가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알고 있었는데. 다만 하기 어려운 말이었으므로 피했을 뿐. 

 차라리 버클리의 말을 믿고 싶다. 이 좁고 더러운 계단에서 눈 감는 것만으로 위안할 수 있도록. 속눈썹과 가죽과 붉은 실핏줄로 덮어서. 눈꺼풀 안과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을 싸그리 지워버릴 수 있다면. 시발 잠깐. 그런게 공허가 하는 일이지. 끔찍하다.  

 하긴 이제는 무언가를 새로이 믿는 일이 힘들다. 


 기껏 유리잔을 두 개 갖고 나왔는데 그는 병째로 마신다. 나는 최근 알게 모르게 그를 조금씩 따라한다. 잔을 얌전히 구석에 내려놓고 병을 들었다. 

 한 씨는 늘 짐이 적다. 

 의도인지 아닌지는 알기 어렵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그렇게 꾸려둔 것 같다. 어딘가를 목적하기보다는 그저 도망치기 위해서. 모든 행동에 그런 습관이 든 사람이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그와 말할 때 전보다 자주 초조해졌다. 그가 변해서가 아니라 내가 needy해져서다. 혼자를 감당하기 싫으니까. 나는 농담조로, 분명 그가 베리보다 먼저 총에 맞거나 시멘트에 묻혀 바다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내기를 걸고는 했다. 그는 도박을 잘 하기에는 지나치게 -내가 그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착하다. 이번엔 내가 졌다. 아쉽냐면, 아쉽지 않다. 슬프냐면? 슬프다. 

 우리는 공통점이 별로 없다. 

 그때는 선한 의도와 좋은 인간, 더 나은 인간을 믿었었다. 그런 것들의 존재를 믿었다. 인간은 위대하니까. 어쩌면 무궁무진하니까. 더 나은 위치. 경지. 고도! 높낮이에 눈이 멀어 뒤돌아볼줄 모르는 이상주의자였다. 누가 뜯어말려도 귀막은 채 내가 맞다고 생각한 길을 걸었다. 좋은 향수와 가벼운 권력은 덤이었고. 우드워드는 돈이 있었고 후광도 있었다. 명성 있는 사람의 숨에서는 달콤한 맛이 났다. 너무 달아서 이가 다 썩었지만. 나는 그를 사랑했으므로 어떤 날은 슬퍼서 한숨짓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를 클라리사에 대입했다. 그걸 위해 가족과 의절하고 많은 친구를 버렸다. 아직도 동생은 번호를 바꿔가며 욕설을 보낸다. 지금은, 적어도 그 모든 일이 있고서야 내가 즐겼던 것들이 얼마나 한심한 신기루였는지 안다. 

 다만 배움의 대가가 너무 크다. 그녀는 좀더 나은 대접을 받았어야 했다. 


 대체 그때 우리가 갖고 있던 건 뭐였을까요? 가졌다고 생각했던 건? 

 어째서 인간은 기댈만한 관념을 만들어내야만 했던 걸까? 

 믿음이란 뭘까? 

 전에는 나를 살게 해줬던 것들이 이제는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손발에 감각이 없을 때는 어디로 도망쳐야 하지?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아니 

 이런 유치한 가정은 그만둔다. 나는 아직, 아직 후회하지 않는다. 깔끔한 화장실과 좋은 스킨을 쓰는 건 즐거웠지만. 누구도 나에게 그런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그 누구도 어떤 존재도 그런 것으로 사람을 유혹해선 안된다. 나는 우리가 적어도 인생을 걸만한 일에 사용되었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이 밤을 견딜 수 있다. 알아주는 사람이 옆자리에 앉은 도박 중독 불명예 퇴직자 뿐이더래도. 비록 서로 뿐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공허에 잡아먹혀 완전히 비어버리기 전에 집을 떠났다. 나는 이 순간을 예비하며 최근 몇 년간 그녀의 일부분을 외우려 애썼다.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 작은 유산이 오래도록 남기를 시간이 허락했으면 한다.

 이 집 또한 곧 빈다. 

 어떤 생은 쉽게 멈추지 않아서 눈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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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조한 글이라 다시 보니 민망하군요... 공간에 관하여 탐사자 데미안 드부아는 우드워드의 비서이자 연인으로 젊고 허영심 많은 광신도였습니다. 동료 탐사자 베리가 속성 비움을 당하자 나중에는 자기 손으로 이 끔찍한 영화 필름을 불태우는 선택을 했습니다.



coc 시나리오집 이름없는 공포들에 수록된 공간에 관하여 후기? 짧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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