핢님의 인세인 시나리오 마법소녀 마성시 마기카..의 후기 로그?소설?입니다. PC3 시점으로 쓰여졌습니다. 시나리오를 와장창 스포하고 시나리오 내용 고대로 따라갑니다 주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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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에게 유배되면 쉽게 병든다 그리고 참 아프게 죽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여기서 참으로 아프게 죽을 것이다 (…)

-김경주, 비정성시 中



#. 1 꿈


햇살은 잿빛이었다. 그러다가 저물어가는 내색도 없이 밤이 되었다. 그림은. 자기가 언제 죽는지 궁금했다. 언제까지 살게 되는지도 궁금했다. 공기는 건조하고 언제나 아픈 냄새가 났다. 깨끗하게 소독한 병실은 거의 빈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림은 늘 약에 취해 떠있었다. 모르핀. 진통제. 차가운 알콜솜. 구멍난 핏줄에 링거 바늘이 들락거렸다. 자주 찔린 피부는 푸르게 죽어갔다. 제정신이 돌아오면 아팠다. 호흡기가 얼굴을 짓눌렀다. 엄마는, 네 영혼이 예민해서라고 했다. 영혼이 예민해서 남들한테 아프지 않을 것이 다 아프다고 했다. 처음에는 갈라진 기침. 그 다음에는 목소리가 안 나왔다. 이제는 혼자 숨을 못 쉬었다. 전에는 쉽고 단순했던 길이 엉켰다. 누구 탓을 할 수도 없었다. 선생님이 대신 병원에 데리고 갔다. 엄마는 새벽기도 나가던 것을 그만뒀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그림은 더 이상 그애가 웃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같이 있으면 옛날이 떠올랐다. 샴푸 냄새. 단팥크림빵. 유치한 이모티콘. 학종이. 연체된 만화책. 하교길에 따라오던 달. 잃어버린 딱풀. 빠진 이빨. 싫어하는 연예인. 딸기 요플레 뚜껑. 빌려준 교복 타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같이 밴드부를 하자고 했다. 예나랑 있으면. 재니스 조플린이 될 수 있었다. 그애는 마치 조플린을 보는 것처럼 그림을 봐줬다. 그러면 솜털이 쭈뼛 섰다.

예나는. 속눈썹이 길었다. 하릴없이 샐 수도 있었다. 늘 같은 눈동자였다. 변함없었다. 맑은 망막에 사람이 비쳤다. 전에는 그 너머에 있는 여자애를 알았던 것 같은데. 이젠 바닥에 떨어진 자기 모습만 보였다.


난 있잖아.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내뱉고 싶은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한테 다 잘 될 거라고 말하지 마.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 마. 넌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픈 게 뭔지도 모르면서. 나한테

그애가 떠났으면 좋겠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림이 상처받을까봐 말을 고르는 잠깐이 싫었다. 상냥한 인사가 싫었다. 멋대로 커튼을 걷어서. 새 친구 얘길해서. 창가에 화분을 둬서. 가습기를 켜서. 화를 내면 눈이 동그래졌다. 넌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동정하는 게 싫었다. 그 동정에 기대는 자신이 지겨웠다.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네가 날 진짜 아낀다면. 이 씨발 좆같은 호흡기나 떼줘. 죽고 싶어. 더는 싫어. 꼴도 보기 싫어.

아냐, 아냐!

와줘서 고마워. 응 그렇구나. 재밌었겠다. 나도. 너랑 같은 학교에 가고 싶었어. 괜찮아. 맨날 방학이라서 좋은데. CD는 이제 더 안 가져다 줘도 돼. 응. 머리가 아파서. 미안. 엄마가 버렸어. 안 들어. 토할 것 같아. 내가 심한 말을 했어? 미안해. 다 약 때문이야. 가지 마. 네가 싫어서 한 말이 아니야.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정말 네가 안 오면 어떡해.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더는 없어. 혼자야. 엄마는 울기만 한단 말이야. 아프기 싫어. 죽기 싫어. 외롭고 비참해.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데? 왜 나한테만? 어째서?




그날은 길거리에 캐럴이 울리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진부했지만 의미있었다. 그림은 씻은 듯이 나았다. 곧 퇴원했다. 의사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의사가 말을 골랐는데도, 엄마는 교회에서 나올 생각을 안했다. 그림은 만약 신이 진짜로 있다면 일단 존나 패고, 그다음 존나 껴안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누워보는 집 침대가 낯설었다. 낯설고 떨려서,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하나님. 이거 꿈이라면. 꿈이면. 내일 일어나기 전에 꼭 죽게 해주세요. 그림은 죽지 않고 깨어났다. 숨 쉴 때 목에 뭐가 걸리지도 않았다. 천장에 붙은 야광별이 보였다. 창문을 열었다. 늦은 아침 공기가 찼다. 뺨이 얼어붙었다. 그 앞에 오래오래 서있었다. 그림은 이불도 개지 않고 이빨을 닦았다. 입안이 화하고 따끔거렸다. 혼자서 이상한 웃음을 웃었다. 다섯 번을 더 했다. 너무 재미있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가 다시 차가워졌다. 책상을 붙잡고 웃으면서 울었다. 한껏 유치한 척을 했다. 예나가 대신 받아다 준 새 교과서에 이름을 썼다. 임그림. 똑바로 썼다. 매직 냄새가 좋았다. 모든 게 다 좋았다.






#. 2 은화 서른 닢


“나 마법소녀가 됐어.”


그런 말을 들었다. 아마 학기 초였던 것 같다. 아직 찬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날렸다. 그림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예나한테서는 늘 좋은 냄새가 났다. 라일락 비누. 상냥한 사람한테서 나는 향기. 솜사탕 색깔의 뺨. 크고 둥그런 눈망울. 거짓말 같은 건 모르는 거울 같은 눈. 거기에 흘러가는 구름이 비쳤다. “아, 털어놓으니까 개운하다!” 예나가 웃었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예나니까. 이건 고작해야 여자애들 얘기니까. 하예나는 언제나 주인공이고. 그게 잘 어울렸다. 대단하신. 하예나. 누구나 다 널 좋아하지. 그림은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렇게 하면 나쁜 생각이 털어지기라도 하는 마냥. “너한테 처음으로 말하는 거야. 아직 언니한테도 얘기 못했어. 걱정할까봐…….” 예나는 그림이 나았을 때.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줬다. 하나도 짜증나지 않았다. 아냐. 가증스럽지 않아. 안 미워. 예나는 착한 애야. 하나뿐인 내 친구야. 그러니까. 이건. 하나도. 다 괜찮아야 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쓰라렸다. 근질거렸다. 화가 났다. 몸 위로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그림은 더덕더덕 붙인 밴드 위를 신경질적으로 긁어댔다. 눈을 굴렸다. 말은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럼. 그럼 이제 바쁘겠네. 그럼 우리 이제. 같이, 같이 못 놀아? 우리 영화도 보러가기로 했고. 또. 또…….

“아냐, 아냐!”


세상이 느리게 보였다. 연분홍색 입술이 움직였다. 예나가 말했다.


“우린 변하지 않을 거야. 친구잖아.”


그런 대답이었다. 하예나가 할만한. 단어 단어가 내리꽂혔다. 신경을 괴롭혔다. 우린. 변하지. 않을 거야. 친구잖아.

으응. 그림은 억지로 입끝을 올려 웃었다.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넌 나 같은 건 금방 잊어버리겠지. 아. 다행이다. 다행이네. 더 이상 날 불쌍하게 쳐다보지도 않겠네. 드디어. 다 보여. 난 다 알아. 잘 어울리네. 귀여운 리본. 그런 귀여운 거 너나 해. 유치해. 보기 좋네. 선물 포장지 같다. 존나 존나 예쁘네.


“마성시를 잘 부탁해.”


그러고 뭘 했더라. 옥상에서 밀어버렸나. 목을 졸랐나. 그런 상상을 하긴 했지. 다시 되짚으며 수천 번도 더 했다. 아니. 둘이서 슬러시를 먹으러 갔다. 중간에 예나는 마성시를 구하러 급히 가야했다. 자그마한 뒷모습이 보였다. 지독하게 허전했다. 그림은 집에 와서 전부 게워냈다. 화가 났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화가 나는 지를 몰랐다. 입에서 위액 맛이 났다. 입을 헹구고 또 헹궜다. 수건을 걸었다. 비틀거리며 방으로 갔다. 왠 못생긴 인형 같은 게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안녕. 난 QB라고 해. 나랑 계약해서 마법소녀가 되지 않을래?”


그림은 인형을 냅다 밀치고 자기 침대에 누웠다. 그대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싫어. 기분 나빠. 다들 나 좀 그만 괴롭혀. 꺼져.


“나랑 계약하면 대가로 소원을 하나 이루어줄게. 뭐든.”


꺼지라고 했잖아. 남들한테 관심 없어. 귀찮기만 하고. 다 망해버리라지. 알 게 뭐야. 난 바라는 거 없어. 예전이라면 또 몰랐겠지. 하지만 난 이미 다 나았다고. 아프지 않아. 기침도 안 해. 의사 선생님도 다시 병원 올 필요 없댔어. 노래도 잘해. 오히려 전보다 더 잘해. 내일 밴드부 오디션도 있어. 난, 난 그러니까…….


“하예나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림은 덜컥 뱉어냈다. 자기 입에서 나오는 발음이 섬뜩했다. 낯설었다. 수십 번 수백 번 생각했는데. 직접 말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차갑고 단호했다. 다른 사람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쓰레기. 쓰레기. 인간 쓰레기. 뒤돌아보기 무서웠다. 솜인형 새끼. 너도 내가 쓰레기 같다고 생각하지? 그렇게 말할 거지. 그러니까, 이런 게 될 리가……


“그래! 계약은 완료되었어. 네 소울젬은 여기 둘게.”

……?


인기척이 사라졌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림은 한참동안 이불을 덮어쓰고 있었다. 느리게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순간,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야, 장난치지 마.”


적막했다.


“아니 잠깐, 잠깐! 야! 어디갔어, 어디, 아니. 씨발, 취소할래, 취소!”


그림은 벌떡 일어났다.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오다 바닥에 고꾸라졌다. 온 방을 다 뒤졌지만 큐비는 없었다. 그래서 휴대폰을 찾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예나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어떡해. 어떡해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찾을 정신이 없어서 오랜만에 번호를 쳤다. 아직 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예나가 받지 않았다. 전에는 자기가 걸으면, 한 번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야 내가 불쌍하니까. 그랬겠지만. 아니. 예나야. 내가 잘못했어. 네가 없으면 난. 난, 이제 친구도 없고. 난…….

직접 찾아가볼 용기는 없었다. 임그림은 비겁했다. 확인해야 하는 사실이 무서웠다. 무거웠다. 욱신거렸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림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시끄러웠다. 시끄러워. 입으로 그냥 꺼내서, 뱉어버리고 싶어. 거짓말. 거짓말이지. 이거 전부 다 꿈일 거야.

세상은 하루만에 무너지지도 달라지지도 않았다. 왜 무너지질 않는 거야. 나 때문에. 하예나가 죽었을 지도 모르는데. 비정한 새끼들. 무신경한 새끼들. 니들이 그애에 대해 뭘 알아. 대체 뭘 알아. 그림은 침대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그러도록 두지 않았다. 학교에 갔다. 그애 자리가. 뒷 자리가 비어있었다.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었다. 심장 씨발. 그냥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자기 자리에 엎드렸다. 어떻게 하지. 하예나가 없으면 예나가 기준이라곤 없는 큐비 새끼 어쩔 줄 몰라 고민하다 들고 나온 소울젬이 가슴을 딱딱하게 눌렸다. 엎드려 있기 불편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기도 싫었다.

그 때 누군가 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림은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들자 거기에는.

하예나가 있었다.

아무 일도 없던 날들처럼. 그저 한참 뛰어왔는지 얼굴이 붉었다.


“어. 미안, 놀랐어? 어쩐지 늦잠을 자서.


입이 쩍 벌어졌다. 말라붙은 입술이 찢어졌다. 그림은 급히 예나를 잡았다. 팔다리를 만져봤다. 머리에도 손을 댔다. 따뜻했다. 그러니까. 살아있었다. 명백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씨발, 씨발! 너는 내가 얼마나, 얼마나…… 안심이 되자. 곧 울컥 짜증이 솟았다.


“왜 그래? 그림아?”


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림자 하나 없는 얼굴이 이쪽을 봤다. 눈을 깜빡였다.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자그마한 계집애. 네가 대체 뭘 지키겠다고. 뭘 지킬 수 있다고. 네가 뭔데…….


“하예나.”

“어, 어?”

“나도 그 마법 머시기인가 하기로 했어.”


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림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너랑 같이 있으려고. 넌 내…… 친구니까.”





#. 3 유다


그럴 수만 있다면 예전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고 싶었다. 자신이 얼마나 추하게 굴었는지. 죄없는 이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둘은 같은 학교 같은 부에 가자던 약속을 지켰다. 안 지켜진 것만 못한 약속이었다. 전엔 예나랑 함께 있으면 즐거웠는데 더는, 더는 그렇지 않았다. 예나를 온전히 예나로 볼 수 없었다. 자기가 비쳐보였다. 물론 그게 그애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화가 났다. 죄책감이 그림을 좀먹었다. 내리눌렀다. 압박했다. 질식했다. 숨이 막혔다. 이건 전혀 다른 병이었다. 면역이 없었다. 죽어갔다.

하예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쳐다볼 때. 기분이 나빴다. 그애는 가끔씩 쓸쓸한 것처럼 웃었다. 그러면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넌 친구들이 있잖아. 사람들은 다 널 좋아한다고. 너한텐. 하예림도 있잖아. 넌 예쁘고. 행복한 애잖아. 대체 왜 그딴 표정을 하는 거야. 몸서리가 쳐졌다. 큐비를 붙잡고 화를 내도 소원은 이루어졌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럼 내가 대화하고 있는 건 송장인가? 난 송장한테 화를 내고 있는 건가?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하예나가.

죽었다가 살아나기라도 했단 말이야?



그림은 미친 듯이 먹어댔다. 그래도 살이 붙지 않았다. 반쯤은 다시 토했다. 오히려 몸은 점점 가벼워졌다. 가끔은 머리카락이 뭉터기로 빠졌다. 됐어. 아직 많으니까 뭐.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무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림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다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별로 상관없어. 아무도 몰라. 난 여기 있어야 돼. 난, 난. 있어야만 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림은 부장이 좋았다. 배수아는 고작 한 살이 더 많았다. 1년은 긴 것 같으면서도 짧은데 어째서인지 수아는, 훨씬 더 어른 같았다. 뭐랄까. 태양 같았다. 그런 게 좋았다.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이 사람을 생각하면. 그래도 조금은. 끔찍한 일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나는 이제 아픈 애도 아니고. 그런 애였던 적도 없다고 거짓말이 하고 싶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잘할 수 있다고. 증명하고 싶었다.





#. 4 나쁜 생각


하예나의 소울젬에서 마녀의 흔적이 끊어졌다. 그림은 놀라지 않았다. 놀랄 수 없었다. 모든 일이 단순하게 그려졌다. 하예림이 그랬겠지. 죽어도 못 놓으시니까. 그랬겠지. 솔직히 하예림에게는 아주 약간, 안쓰러운 마음 뿐이다. 부장이랑 친한 것도, 사사건건 가르치려 드는 것도. 남의 소울젬을 멋대로 오염시킨 것도 다 싫었지만. 임그림이 하예림에게 한 짓에 비하면 전부 깃털 같이 가볍다. 그림도 그걸 알았다.

하예나는 지금 무슨 기분일까? 궁금했다. 어떻게 이걸 다 알면서, 알면서. 그러면서 꿋꿋하게 마녀를 찾고 다 같이 무찌르자고 말할 수 있지? 그 마녀가 뭘로 만들어졌는지 알면서? 그런 모습을 볼수록 괴로웠다. 그냥 아무도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가 있구나 너는. 정말 대단해. 성스러워. 내가 졌어. 이제 그만할래. 탓하기도 지쳤다. 그냥 다 솔직하게 뱉어내고 싶었다. 될 수 있다면 사과하고 싶었다.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나 때문이야. 전부, 전부 다. 미안해. 미안해.

예나는 뛰쳐나온 그림을 쫓아왔다. 단 둘이 얘기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림은. 지금이 사과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 알면서도, 매섭게 예나를 추궁했다. 너 제대로 설명해봐. 대체 왜 너한테서 흔적이 끝나는 건데? 왜 말하지 않았어? 사람을 상처입히는 것은 너무 쉬웠다. 하예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예상한 것과는 달랐다.

그러니까. 그림이 나은 건 기적이 아니었다. 기도가 통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하예나의 희생이었을 뿐이었다. 착하고. 오지랖 넓은. 친구. 고작 그런 소원이었다고. 하예나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널 좋아하는 데 어떻게 그걸 얘기할 수가 있겠냐고. 좋아? 좋아한다고? …… 누가? 누구를?


귀가 울렸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턱까지 찼다. 손발에 감각이 없었다. 그림은 다시, 다시 도망쳐나왔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예나는 쫓아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쫓기는 기분이었다. 그림은 벽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예나가 날 위해 그랬을 리 없어. 걔가, 그애가, 나는……

아니, 그랬겠지. 그러셨겠지. 어련하셨겠어. 하예나는 존나, 존나 착하니까. 그래. 세상에 기적이 어딨냐. 좋아한다고? 웃기지 마. 내가 불쌍해서 그렇게 얘기해주는 것 뿐이겠지.

씨발. 씨발, 나는, 나는 그래서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죽여버렸다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착한 척하래, 그러면 나한테 말이라도,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말이라도…… 내가 네 병신같은 목숨 살렸다고. 가엾고 불쌍해서 살려줬다고 자랑이라도 하지 그랬냐고.

난 이젠 돌이킬 수도 없는데.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그러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 너도 그냥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잖아. 대체  왜……

왜 끝까지 이렇게.

나를.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 5 非情聖市 비정성시


기쁨의 마법소녀 하예나가 마녀가 된 건 임그림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녀가 세상에 남은 인간을 전부 죽여도 임그림은 할 말이 없다. 세상을 무너트려도 그러려니 한다. 사실 세상 같은 건 구하지 않아도 괜찮아. 괜찮아. 하예나가. 아님 하예림이 화가 나서 자길 죽인대도 기껍다. 어차피 이건 전부 임그림 때문이니까. 온세상 사람들이 모두 임그림이 추한 인간인 걸 안대도 아무 상관 없다. 하지만, 하지만

부장은 몰랐으면 좋겠다. 부장이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니가……


마녀가 나긋하게 날갯짓을 했다. 꿈이 조금씩 부서져내렸다.


수아는 단호했다. 낫 끝이 예나를 향했다. 예나는 그 선택을 받아들였다. 단 한 사람, 거기에 반발할 수 있었던 건 하예림이었다.

그래서, 임그림은 수아를 밀치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부드러운 허밍이 들렸다. 꿈이 부서져내렸다.


눈앞이 흐릿했다. 조금 멀리서, 당황한 기색의 하예림이 보였다.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자기 동생을 지키려고 버둥대고 있었다. 뭐야. 뭐야 하나같이. 마법이고 뭐고 다 세상은 안중에도 없구만…… 어쩌면 이렇게 되었어야 하는 일이었다. 언니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하예림은 처음부터 조준을 잘못하고 있었던 거다. 하나같이 멍청해서. 아. 지겨운. 소독약 냄새.


꿈이 무너져내렸다.


멀리서 부장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파. 아팠다. 아니 이 정돈 아픈 것도 아냐. 나는, 나는……. 차츰 의식이 흐려졌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언니. 저 잘했죠. 다치진 않았나요? 나 괜찮았죠? 나는, 나는 존나 나쁜년이에요. 모든 걸 다 망쳐버렸어요. 저. 있잖아요 언니. 그래도 나. 열심히 했어요. 언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요. 언니가 좋았어요. 언니랑 있으면 좀 숨쉬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나 잘했다고 한 번만 해주세요. 응? 언니. 언니는. 나 미워하지 않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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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 빈 내용을 더 채우고 싶은데 힘이 모자랍니다. 저희 파티는 전멸엔딩을 보았습니다. 제 PC3은 PC2의 빔을 맞고 탈락했습니다. 욕이..많이 들어가있고 워딩이 센데요, 캐적인 요소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마성시! 비정하고 성스러운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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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리 씨가 떠났다. 우리는 23 제곱미터의 좁은 공간을 급히 벗어나고도 갈 곳이 없어 계단에 앉아 술을 마셨다. 그녀가 있던 공간의 빈 자리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와, 그녀를 비우고 있던 것과 우리는 어쩔 도리 없이 이 세상에서 잠시간 공존했다. 정확히 공존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공존은 함께 존재한다는 뜻인데, 비움을 존재로 치부하는 건 틀림없이 모순이 될 테니까. 하지만 다른 대체어를 찾기 어렵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깊은 대화를 피했다. 나는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침 상황도 도왔다. 그녀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고, 우리는 쫓기고 있었다. 나는 차라리 모래를 밟는 감촉과 좋아하는 노래에 대해 묻기로 했다. 

 아첨으로 길들였던 혀를 남의 진실한 안부를 묻는 데에 쓰는 게 낯설어서 나는 자주 말을 더듬었다. 그런 말들은 진심 뒤에서 맴도는 것이어서 서투르고 낮았다. 나는 그녀의 입술 속에 사는 검은 공간을 쉽게 마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사과하는 것을 잊었다. 그 때 두고 도망쳐서 미안하다고, 미처 화면을 쳐다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고, 그런 일은 이 세상의 누구도 겪어서는 안되는 거였다고 제대로 말했어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죄책감을 목졸랐어야 했다. 그녀가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알고 있었는데. 다만 하기 어려운 말이었으므로 피했을 뿐. 

 차라리 버클리의 말을 믿고 싶다. 이 좁고 더러운 계단에서 눈 감는 것만으로 위안할 수 있도록. 속눈썹과 가죽과 붉은 실핏줄로 덮어서. 눈꺼풀 안과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을 싸그리 지워버릴 수 있다면. 시발 잠깐. 그런게 공허가 하는 일이지. 끔찍하다.  

 하긴 이제는 무언가를 새로이 믿는 일이 힘들다. 


 기껏 유리잔을 두 개 갖고 나왔는데 그는 병째로 마신다. 나는 최근 알게 모르게 그를 조금씩 따라한다. 잔을 얌전히 구석에 내려놓고 병을 들었다. 

 한 씨는 늘 짐이 적다. 

 의도인지 아닌지는 알기 어렵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그렇게 꾸려둔 것 같다. 어딘가를 목적하기보다는 그저 도망치기 위해서. 모든 행동에 그런 습관이 든 사람이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그와 말할 때 전보다 자주 초조해졌다. 그가 변해서가 아니라 내가 needy해져서다. 혼자를 감당하기 싫으니까. 나는 농담조로, 분명 그가 베리보다 먼저 총에 맞거나 시멘트에 묻혀 바다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내기를 걸고는 했다. 그는 도박을 잘 하기에는 지나치게 -내가 그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착하다. 이번엔 내가 졌다. 아쉽냐면, 아쉽지 않다. 슬프냐면? 슬프다. 

 우리는 공통점이 별로 없다. 

 그때는 선한 의도와 좋은 인간, 더 나은 인간을 믿었었다. 그런 것들의 존재를 믿었다. 인간은 위대하니까. 어쩌면 무궁무진하니까. 더 나은 위치. 경지. 고도! 높낮이에 눈이 멀어 뒤돌아볼줄 모르는 이상주의자였다. 누가 뜯어말려도 귀막은 채 내가 맞다고 생각한 길을 걸었다. 좋은 향수와 가벼운 권력은 덤이었고. 우드워드는 돈이 있었고 후광도 있었다. 명성 있는 사람의 숨에서는 달콤한 맛이 났다. 너무 달아서 이가 다 썩었지만. 나는 그를 사랑했으므로 어떤 날은 슬퍼서 한숨짓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를 클라리사에 대입했다. 그걸 위해 가족과 의절하고 많은 친구를 버렸다. 아직도 동생은 번호를 바꿔가며 욕설을 보낸다. 지금은, 적어도 그 모든 일이 있고서야 내가 즐겼던 것들이 얼마나 한심한 신기루였는지 안다. 

 다만 배움의 대가가 너무 크다. 그녀는 좀더 나은 대접을 받았어야 했다. 


 대체 그때 우리가 갖고 있던 건 뭐였을까요? 가졌다고 생각했던 건? 

 어째서 인간은 기댈만한 관념을 만들어내야만 했던 걸까? 

 믿음이란 뭘까? 

 전에는 나를 살게 해줬던 것들이 이제는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손발에 감각이 없을 때는 어디로 도망쳐야 하지?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아니 

 이런 유치한 가정은 그만둔다. 나는 아직, 아직 후회하지 않는다. 깔끔한 화장실과 좋은 스킨을 쓰는 건 즐거웠지만. 누구도 나에게 그런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그 누구도 어떤 존재도 그런 것으로 사람을 유혹해선 안된다. 나는 우리가 적어도 인생을 걸만한 일에 사용되었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이 밤을 견딜 수 있다. 알아주는 사람이 옆자리에 앉은 도박 중독 불명예 퇴직자 뿐이더래도. 비록 서로 뿐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공허에 잡아먹혀 완전히 비어버리기 전에 집을 떠났다. 나는 이 순간을 예비하며 최근 몇 년간 그녀의 일부분을 외우려 애썼다.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 작은 유산이 오래도록 남기를 시간이 허락했으면 한다.

 이 집 또한 곧 빈다. 

 어떤 생은 쉽게 멈추지 않아서 눈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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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조한 글이라 다시 보니 민망하군요... 공간에 관하여 탐사자 데미안 드부아는 우드워드의 비서이자 연인으로 젊고 허영심 많은 광신도였습니다. 동료 탐사자 베리가 속성 비움을 당하자 나중에는 자기 손으로 이 끔찍한 영화 필름을 불태우는 선택을 했습니다.



coc 시나리오집 이름없는 공포들에 수록된 공간에 관하여 후기? 짧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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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예술품의 메세지 탐사자 엔조 리슐리외는 사고로 혼수상태인 쌍둥이 형 엔조의 이름과 신원을 훔쳐 유명 평론가 행세를 하는 캐릭터였습니다. 걸작을 완성하려 피나게 글을 썼지만 결국 영감의 씨앗이 터져 로스트했습니다. 이것은 깨어난 진짜 엔조 시점에서 쓴 뒷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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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엔조 리슐리외가 오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것은 189n년 n월 n일 아침이었다. 오래 굳어 잘 움직여지지 않는 몸이 낯설었다. 그가 눈을 뜬 것을 발견한 하녀가 급하게 물수건을 갖고 왔다. 그녀는 젖은 천 조각으로 익숙한 듯이 그의 얼굴과 몸을 닦았다. 내가 대체 얼마나 이런 상태였지? 엔조가 아직 저 너머에라도 있는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괜찮으세요. 모든 것이 다 좋아질 거예요.

 엔조는 영락없이 휠체어 신세가 되었다. 아주 조금씩 움직이는 법을 다시 배워야했다. 의사는 모든 정황을 말해줄 테니 몇 년을 더 쉬라고 했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고는 그저 남 일 같았다. 부서졌다가 맞춰진 신체만이 엔조에게 남아있는 숙제였다. 펜을 쥐려고 하니 손이 덜덜 떨려 당최 글씨가 만들어지질 않았다. 음. 엔조는 차분하게 잉크를 적신 펜 끝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다시 나를 조립하는 동안, 무얼 해야 할까.


 엔조는 자신의 뿌리들을 찾아내는 데에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하나뿐인 혈육인 동생은 자신의 이름을 빌려 평론가 행세를 하다가 어느 날 홀연히 실종되었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엔조는 동생의 행방보다 동생이 자신의 이름을 빌려 끼적인 글들을 먼저 찾았다. 몇 장 넘겨보니 절로 실소가 나왔다. 치열하게 엔조를 흉내 낸 글이었다. 편협한 취향이지만, 대체로 보는 눈은 있었다. 가끔은 돈을 받고 치졸한 기사도 써냈다. 그 애는 가장의 공백 동안 다행이도 굶어죽지는 않을 만큼 썼다.

 

 엔조는 천천히, 시간을 들여 조사했다. 펠라당의 첫 전시회 직후까지 그 애는 증발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후 동생을 기차역에서 목격했다는 증언을 얻었다. 그 곳에 일했던 사람들을 캐자 그림 하나를 옮기는 일을 했던 다르크 가의 하인을 만날 수 있었다. 하인은 그때 당시의 일을 꽤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이후 집안의 주인은 실종되었으며 자택은 공화 정부의 관리 하로 들어갔다고 했다. 같은 날 동행했던 사람들 중 동생과 함께, 예술계를 주로 다루던 로맹지의 젊은 기자 하나도 실종되었다. 그의 글도 모조리 찾아서 읽어보았으나 그저 마음이 다른 데에 가 있는, 가십에 충실한 잡지라는 인상 뿐이었다. 정치범의 망명에 어떤 식으로든 엮이게 된 것이었을까? 그들의 행적을 쫓으면 쫓을수록, 괜한 상상력만 불거졌다.

 엔조는 되도록 피하려고 했던 수단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동생과 함께 열차에서 목격되었던 사람들 중 행방이 분명한 이들을 찾아가는 것이었다. 젊은 마드모아젤 클로에는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녀는 동생이 살아 돌아온 줄만 알고 조각칼을 떨어트렸다.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납득에는 시간이 필요해보였다. 조금 시간을 더 들인 후에야 엔조는 그녀에게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에는 클로에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찾아간 두 번째의 사람도 같은 말을 했다. 파리 근교에서 살고 있던 무슈 브란트였다. 정돈되지 않은 수염에 앞치마에는 덕지덕지 물감이 묻어 있었다. 그들의 작품은 삐뚤어진 시선으로 먹고 살았던 엔조조차도 흠을 잡기 어렵게 완벽했다. 두 사람이 만들어낸 모든 창조물 하나하나가 신이 불공평하다는 명제의 경험적 증명 같았다. 이데아의 옷자락 끝을 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받았던 기묘한 시련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던 악몽과 불타는 집에 대해, 거기서 불꽃과 함께 사라진 것들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 젊고 안타까운 것들 중에 자신의 동생이 안고 간 자신의 영광, 이름, 명예가 있었다. 동생은 그날 밤 손끝에 쥐가 나도록 자판을 두드리고 펜을 움직였다. 오른손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자 왼손으로 바꿔서 썼다. 그러나 그 그릇은 날 때부터 영감의 씨앗을 받아내기에는 너무 작았다. 관절이 녹도록 춤을 추고 색채의 산을 쌓아도 아폴론의 뮤즈들은 그저 그들에게 안 돼, 라고 속삭이고 웃었던 것이었다.

 재밌기 전에 약간은 괴로워지는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엔조는 살짝 질투가 났다. 나라면, 나라면 달랐을 텐데, 그런 귀중한 기회를 그런 범재가 얻게 되다니, 사랑을 앞질러 이런 생각들이 튀어나온 것은 아무래도 그 씨앗을 틔워낸 두 사람이 만들어낸 작품들을 미리 만나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이 너무 아름다운 것을 악마적이라고 하는 데는 늘 그렇듯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한참을 더 브란트의 그림 앞에 서 있은 후에야 휠체어를 돌릴 수 있었다. 천재들이 입을 맞추어 비밀 의식을 하고는 거짓말을 하는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으나 이런 숭고함 앞에서 그것이 거짓이든 아니든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 모든 일들을 듣고 정리한 엔조는 결국 책상 앞에 앉았다. 엔조는 자기도 모르게 펜촉을 씹어대며 생각했다. 그저 있었던 일을 쓰자. 동생은 감당하지 못한 영감을 받고 머리가 터져서 죽었다. 그 애는 천재가 아니었다. 그저 말을 조금 할 줄 알고 글 욕심이 있었지. 그 애는 허영덩어리였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혈육이었다. 엔조는 망설이다가 제목을 적어내려갔다.


1890년 프랑스 파리,

젊은 엔조 리슐리외의 실종에 대하여.

          -피에르 리슐리외 저(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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