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주 기념 빵모음 ~~

 

 

 

GM. 

천재LY님

PL.

서공원탁 <잊혀진 새벽의 그림자> 에스더 메일 - 천재팡님

서공천애 <역운의 세공사> 모로스 모네타 - 천재잼잼님

외전문호 <옥충색 연구> → <갉아먹는 폐허> 키스 프린 - 와타시

분과회 :: 세공된 옥충색의 그림자

 

 

 

굉장한 캠페인이었습니다 룰에 영락없이 감기고 말았어요(정신차리니 원서까지 도합 룰북 네권이 손에 있었다..)

 

캐 하나를 진득하게 잡고 이어가면서 모두와 얽히고 세계와 얽히는 이 화학작용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느낌이에요 최고다!

시나리오 개변해주신 방향도 너무 찰떡이고 이마깨지는 연출이며 사랑할수밖에 없는 npc 친구들까지 오지는 마서터링과... 역시나 귀신같은 연출 귀신같은 대사 스불재 설정으로 매번 유잼 플레이 만들어주신 우리 친구들까지... 달리는 내내 너모 행복했습니다!

다른 세션들은 타래로 남기거나 해서

막세션이니만큼! 캠페인 후기 겸해서 이별시 후기는 한번 간단하게라도 쓰고 싶었어요 (허리 톡톡

후기라고는 하지만 그냥 맥락없이 하고싶은 얘기를 주절주절댑니다ㅋㅋㅋ

다 적고나니... 후기가 아니라 주접글이라고 제목 바꿔야함

 

아차 이별의 시간은 황혼선서 수록 시나리오입니다!

 

 

 

 

~~~더보기부터 시나리오 스포가 이어집니다~~

 

더보기

 

 

 

너무 울면서 세션했더니 무서워서 로그 복습도 못하다가 약2주만에 켰습니다...

다시보니까 역시 (제가) 제정신이 아니네여..

 

 

 

그리고 저는 이 세션에서 펌블을 두 번 띄우게 됩니다

 

 

도입부에.. 스승님과의 첫만남 짜오는게 숙제였는데 저는 무난하게 들고 갔는데요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이사람들이 다 연출 귀신인걸 잊은거죠

에스더의 잊혀진 서고 설정부터 너무 좋아서 무릎탁쳤어요 마법명을 받는 장면도 좋았구 손잡구 가는거랑... 둘이 누가봐도 쩌서깊관임 이사람...천재아냐?

모네타랑 센세랑 같이 허공 걷는 장면이나 다 너무 아름답고 좋았답니다....누가... 스승님이랑 구애인 설정으로 이런세션을 오냐고요 이사람..미친거아냐?(좋았음)

 

 

 

다섯세션을 이어온 캠페인의 피날레였고 

헤매이는 칠검은 첫세션부터 등장해서 임무를 맡기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사라지는 게 특기였습니다...

그래도 같이 크리스마스에 시간도 보내고...... 모네타랑 애도 생기고.......... 저희안에 엄청난비중으로 자리잡고 계셨단 말이죠

세션중간에 대파괴가 터지고 같은 타이밍에 실종처리된것까지ㅁㄴㅇㄹ

 

 

 

 

아무튼 그래서...

모든 PC와 PL이 스승님에 대한 각자의 의문과 믿음과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에요

당신 대체 왜 이렇게 의뭉스럽게 구는건가요

당신 대체 왜이렇게 비밀이 많나요

당신 대체 모가 그렇게 바쁜 건가요 맨날 바람같이 왓다가 사라지구

센세 어디가셨어요

센세 왜부르셨어요

센세 사실 흑막이죠(??????????)

당신 대체 왜??

 

.

.

.,

,

 

 

 

 

 

 

 

......

 

 

 

모든 어른이 한때 아이였고 아이는 언젠가 어른이 되고 마는 걸 잊고 살다가 문득 깨닫고 말 때의 미칠 것 같은 감정일까요 이게

제가 드라마 힐하우스의 유령을 댑다 재밌게 봤는데요…(갑자기딴얘기죄송합니다)

스포는 아니고... 거기 등장인물 중 하나가 어릴때 정말 작고 포동하고 귀여운 남자앤데... 커서는 완전 퀭한 약쟁이가 되어있거든요...

카메라가 일부러 그 두 가지 모습을 번갈아 비춰주며 시청자를 온갖 회한에 감싸이게 하는데요.

그때 보면서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걸 겪었어요

물론 저히 스승님은 약쟁이가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편하지 못한 무언가가 되어 있잖아요 이 사람...아니 이 마법사 대체 뭐냐고!!!!!!!

어릴때 너무 헐렁하고 어리숙해서 더.. 대체...

대체 얼마나 세상의 풍파가 사람을 깎았으면 이렇게 해탈한??????해탈한 마법사가 되는거지???????

 

 

 

스승님.... 너무하시네요저히 요한이 그럴수도 있는거아닙니까

 

 

대체뭐냐고 왜 이렇게까지 한거냐고ㅁㄴㅇㄹ 사실은 맬렁한 햄쮜녀석이면서 이런 광공같은 짓을…

요한 진짜 첫등장부터 너무 귀엽고 허술하게 튀어나와서 전혀??전혀 상상도 못했다가 

캠페인 내내 던져지던 떡밥이 착실하게 들어맞으면서 이렇게........이렇게 풀어지는거 진짜로 소름이 쫙 돋더라구요.....................

ㅋ아....총체적으로 너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그걸... 이렇게 달려왔다니!!

하는 뿌듯함이 가득해서 즐거웠습니다 최고최고...

진짜 로복하는데 리님... 세션 당시에는 눈치 못챘던 부분까지 꾸준하게 떡밥을 먹이고 계시더군여....(눈물좍좍)

 

 

이게... 그냥 먹어도 장난 아니라는 느낌인데

앞세션에서 쌓여왔던 서사랑 같이 터지면서 너무 파괴력 강한 세션이 되어버렸어요

다시 생각해도 제정신 아닌 시나리오…

제정신아닌 연출…

제정신아닌 대사…

제정신아님...

제정신아님...

노정신...

노정신

 

 

 

 

그땐 몰랐음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했는데 결국은 하는 선택마다 센세 말 더럽게 안 듣고 끝까지 시키는대로 안한 제자즈가 되어서 웃기고..귀엽고 슬프고 그렇습니다ㅋㅋㅋㅋ

 

 

키스 얘기를 좀 해보자면.... 이번에 좀... 말이 많았는데요...

애들 이미 사랑하고. 하고 싶은 얘기는 많고 이게 캠펜 마지막 세션이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떠들게 되더라고요... 좋았다 애들이랑 많이 얘기해서 !!

개인적으로 트윈 이후 시점에서 캐가 어느정도 완성점에 도달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게 자기 주관을 어느정도 내세울 수 있는 상태로 이 세션을 겪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응응

특히 이렇게 강력한 질문이 던져지는 세션이라 더더욱.........

키스가 마법사로서 자기 대답을 잘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했단 느낌이 들어서 후회없이 놀았네요

키스는 처음부터 요한을 꽤 공들여 신경 쓰게 되었는데... 센세의 부탁도 부탁이거니와 

요한이... 한참 반항기인 청소년이라 제 초기앵커를 떠오르게하는 지점이 많았기 때문에(저의 초.앵은 소매치기에서 조수로 개과천선한 세계최강굳보이였습니다) 그렇게 된 것이었어요.

또 친구들이랑 오래 함께하면서 같이 축적한 경험이 있다보니 상실이라던가, 여러가지 주제로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기뻤어요 여러모로...증맬루... 올만에 같이 탐정놀이도 하구...

 

중간에 모네타랑 갈등했던 장면도 즐거웠고 그걸 에스더가 분과회장답게 단호하게 정지시켜준 것도 넘 짜릿했어요헉헉

캐끼리 의견이 대립하는 장면을 좋아하는데 이것도 뒷사람끼리 싸인이 맞아야 할 수 있는 거죠

잘던지구 잘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히히 끊는 지점까지 예술이엇어요 아..안되겟어요 역시 이사람들이랑 절대 세션해야해(질척)

 

좋았던 거 얘기 더 해야함 헉헉

에스더... 클맥때 연출이랑 도입부때 연출이 겹치면서 만들어지는 장면이 정말 좋았어요 

우리애... 이렇게까지 힘들어한 적이 얼마 없었는데.... 은제나 단단했는데!!

하지만 누구에게나 정말로 잃고 싶지 않은 순간은 있는거죠 응응

에스더가... 과거의 자신이 스승님에게 받았던 구원을 잊게 될 것이 끔찍하게 두려운게 분명한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수없이 많은 구원을 받고 이자리에 있음을 알기에 금서찢고 요한을 구하기로 맘먹는거요... 

증말 환장하겟더라고요........................................

 

글고 클맥의 모네타 회상 장면은 다시 봐도 눈물이 찔끔 나더라고요...

그래... 마법사는 후회되는 말도 고쳐할 수 있는거야!!

모든지 할 수 있는거야 할 수 없는 것들만 빼고!!

모네타가 앞서 거절해놓고도 결국은 지킬, 이미 지킨 약속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거 너무 좋았습니다

한사코 믿고 있었다고 말해주는 칠검도요 이... 이 바보들

인과 니가 몰알아? 우리애들이 그렇다면 그런거야

넘슬프고 넘좋아서 그이후로 정줄을 놨죠.. 정신을 차렸더니 엔딩 스크롤이 올라오고 있었어요

 

연출 던질때마다 너무 귀신같이 물어주시고... 잘 말아주시고... 잘 줏어먹게 떡밥두 착실히 깔아주시고 정말 장난없어요 리님... 당싄은...채고에 마서터입니다...

지금 애들이 갖고 있는 요소들이 칠검을 관통해서 요한한테 척 들어맞는게 젤 미치겠는 부분이었어요

모네타처럼 마법 재앙의 영향으로 고통받으며 자책하는 모습도 겹치고

에스더한테 손내밀어주는 모습도 겹치고

칠검이 키스한테 어떤 모습이든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던 것도 너무 ㅠㅠㅋㅋㅋ 지금 요한에게 고대로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해서

흑... 흑

이런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관계 반칙입니다

 

 

 

 

 

 

 

이제 묻고 싶은 것이 생겨도 물으러 갈 사람은 없지만

대신 묻고 싶은 게 생기면 물으러 올 사람이 생겼다는(기억에 의존해 적는거라 선명하지 않읍니다꾸벅꾸벅) 지문이 아주... 뇌리에 깊게 남았습니다

이렇게 단적으로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보여주는 지문이 있을까요 이마팍팍

 

룰북을 읽으면서... 마법사들 사이에 스승-제자라는 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크다는 인상을 받았었는데 해보니 알 것 같더라고요 

소멸하면 잊혀지고 마는 존재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치열하게 누구에게 배우고 배운 것을 또 누군가에게 남기면서 살아가요ㅠ-ㅠ)

그런 관계라서 더더욱 그 지식과 지혜와 사랑의 유산을 남기는 행위가 중요한지도 모르겠어요

 

앞세션에서 아끼던 우자들의 죽음을 겪으면서 캐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봐왔고

그러면서 마법사는 늙어죽지 않으니 결국 죽음의 대항인 삶도 가지고 있지 않은 걸까 하는 생각을 좀 했는데

그것은 저의 착각이었던 것 같아요 소멸도 죽음의 한 모양이고 끝없이 이어지는 삶도 삶의 한 형태인거겠죠

그렇게 긴 생은 결코 혼자 채울 수도 없겠죠 후훗...

 

시작과 끝이 이렇게 한 자리에 있어서... 이별의 시간을 결국 새로운 만남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어서 슬프면서 행복했습니다

캐가 한 얘기처럼... 행복과 불행을 떼어놓을 수 없듯이 이 둘도 결국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 같네요ㅠㅠㅋㅋㅋ

구질거리지 않으려고 2주나 기다렸는데 적고있자니 또 엄청 촉촉해져버렸어요

아무튼 헤매이는 칠검이 더는 헤매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에스더랑 모네타가 개짱멋진 센세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최고최고 (걔는..몰라 힘낼게!)

 

세션이후는...좀 생각해봤는데

키스는 변함없이 외전생을 살아갈듯해서 크게 달라지거나 재밌는 일은 없을 것 같으네요

앵커랑 결혼 비스무리한 동거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지내고요

내키면 탐정사무소를 다시 한번 차려보기도 할 것 같아요ㅋㅋㅋㅋ글고 레비한테 등짝맞음

다같이 애도 돌보고... 최소한 세옥그 친구들이랑은 잘 지낼듯해요

물론 모두와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겟지만 약속한 것이 있으니만큼...

그런 쪽으로는 덤비지 않고 사소하게 까불기는 잘 까붑니다

진지한..무언가는... 찐으로 계제 올라가고 이럴 일 생기면 그때가서 생각해볼게요 회피함 ㅋ ㅋ ㅋ ㅋㅋㅋㅋ

뻘하게 마법명 얘기를 끌어오자면... 전에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폐허가 으스스함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그 자리에 누군가 살아있었고 무언가 존재했음이 확실하기에 

자연스럽게 많은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로 하여금 그 구조물의 사라진 의미에 대해 골몰하게 만들어서라고 해요

소멸하고 잊혀진 것들의 파편이지만 여전히 한 존재이기도 하기에

어찌보면 자기와 같은 신세라고도 할 수 있을만한 소년을 아끼게 된 건 재미있는 결과네요

캐서사적으로도 혼자서는 만들 수 없었을 다양하면서도 예상못한 방향의 이야기가 되어서 즐겁습니다!

 

 

 

 

휴...  진짜류 넘 재밌었어요 나 갓세션했어 엄마

정말 아름다운 얘기였다~~

 

..

..

 

 

 

 

 

 

좋은 세션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부!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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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2. 11

 

 영국행 여객선에 탑승했다.

 상태가 좋지 않았던 두 사람이 객실에서 쉬는 동안, 나는 갑판으로 나왔다. 배의 난간에 양팔을 기대고 뉴욕의 부두가 나를 배웅하게 두었다. 기름과 쇠와 젖은 나무와 소금 냄새. 어딘가로 떠나는 것은 다시 돌아오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었으므로 그 사실에 바치는 작은 의식이자 습관.

 짧은 의식은 예상치 못한 방해를 받았다. 부두에 무심히 시선을 두고 있던 나는, 한순간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찰나임에도 분명한 적대감이 피부 위로 소금기처럼 달라붙었다. 그 눈길은 배도 바다도 아닌 나를 향했다. 내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오래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시선의 의미는 섬뜩하리만치 분명했다.

 긴 기적 소리가 나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육중한 배는 바다 위로 금방 지워질 흔적을 그리며 나아갔다. 흰 포말이 흘수선을 적셨다. 부두가 시야 속 자그마한 점으로 오그라드는 동안,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그 눈길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다시 선실로 돌아왔을 때는 온몸이 꽁꽁 얼어있었다.

 

 우리는 일주일 정도 배에 머물렀다. 내내 날씨가 맑았다. 바다는 자신의 다정한 면만을 보여주었다. 극심한 뱃멀미에 시달리던 노라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제이덕의 상태를 살필 겸 그와 같은 선실을 썼다. 그는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을 한시도 놓지 않으면서 가끔 다른 물건들도 일삼아 들여다보고는 했다. 제이덕이 알아낸 것은 이 정도다:

 

 구리 그릇. 꿈 보내기 주문에 사용되는 그릇이다. 구리를 닮긴 했지만, 사실 구리가 아닌 정체 모를 금속 재질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사용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항해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노라는 출렁이는 바닥에 적응했다. 하지만 제이덕은 여전히 책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혼잣말이나 비정상적인 연구욕은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기운을 차린 노라가 겨우 그를 끌어내서, 간만에 셋이 바닷바람을 쐬러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멀고도 가까운 겨울 바다를 바라보면서, 몇 가지 짧은 얘기를 나누었다.

 어느 방향을 살펴봐도 육지는 없고 까마득한 수평선만이 시야에 가득했다. 막막하고 거대한 바다는 사람의 악의와 그것이 불러올 수 있는 비극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듯했다. 그런 광막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정말 미욱하고 하찮은 존재처럼 느끼게 한다. 이 거대한 세상에 고작 내가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하는 자조부터, 작은 내가 사라진 뒤에도 아무렇지 않게 흐를 무신경한 세상에 대한 통찰까지 이어진다. 허무, 허탈감, 경외심,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를 초월한 거대한 것에 의한 열병. 인류를 오래도록 사로잡았을 감정이다. 여러 가지 대처법이 있어왔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이렇게 스스로가 먼지처럼 작은 존재로 느껴질 때 오히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뒤틀린 용기를 얻는다.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1925. 2. 18

 

 사우스햄프턴에 도착해서 곧장 런던 행 기차를 탔다. 입국 심사 중 제이덕에게 난처한 일이 생겨서,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훌쩍 늦은 시간이었다. 역에 가까운 아무 방을 급하게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은 따지는 게 많은 편이었는데, 노라가 능숙하게 대처했다. 씩씩한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된다. 노라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다. 

 

 

 

 

 

1925. 2. 19

 

 시내로 들어가 적당한 중저가 호텔을 새로 잡았다.

 숙소를 옮긴 뒤, 먼저 조사할만한 장소의 목록을 정리했다. 지도를 펴고, 서적과 안내서도 꺼냈다. 잭슨이 영국의 더 스쿱 신문사에 자주 들락거렸다는 얘기를 조나가 해준 적이 있다. 참고하여 작성했다. 비자는 한 달여를 생각해두었으므로 그렇게 빡빡한 일정은 아니다.

 

  •  더 스쿱 신문사
  •  센트럴 뉴스 에이전시
  •  언론 협회
  •  영국 박물관
  •  런던 도서관
  •  펜휴 재단

 

 일정은 여유로운데 마음이 급한 게 문제랄까. 제법 바쁜 하루였다.

 들른 장소와 얻은 정보를 정리해둔다.

 

 

 

 런던 도서관

 -펜휴 재단

 이집트 학자 오브리 펜휴 경이 1890년에 설립하였다. 

 주로 이집트 탐사를 지원하고 감독한다. 이집트 역사/유물 연구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한다. 이집트 당국의 허가를 받고 합법적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현재 재단 대표는 에드워드 개비건.

 

 영국 박물관

 펜휴 재단에서 지원한 사업이 20여 건 정도 되는데, 오브리 펜휴 생전에 직접 참여한 탐사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현재 재단의 지원을 받는 탐사대로는 기자 고원에서 발굴 작업 중인 헨리 크라이브 탐사대가 있다.

 

 펜휴 재단

 철제 울타리로 둘린 건물에 경비원이 서 있다. 정문은 열려 있고, 사람들이 여럿 나다녔다. 복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에는 서고와 사무실이 대부분이다.

 2층의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전시된 이집트 유물들은 고고학 박사 제이덕을 매우 흥분시켰다. 따로 허가를 받고, 3왕조 말기 시대의 자료를 온종일 찾아 헤맨 끝에 딱 하나를 건졌다.

 

하워드 카터는 투탕카멘의 발굴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부두의 그 눈길을 잊기 어렵다. 사실 과민반응은 아니었다. 런던에서도 벌써 감시가 붙었기 때문이다. 잭슨 엘리어스는 이런 일을 혼자서 어떻게 감당했던 걸까.

 생각보다 자료 탐색이 길어져, 노라가 몹시 가고 싶어 했던 대영박물관의 제국 박람회 일정은 미뤄졌다. 노라는 매우 아쉬워했다. 제이덕과는 달리 노라는 책이 별 재미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한 달 내리 책에만 파묻혀 지낼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아주 운이 좋은 상황일 것이다.

 

 

 

 

 

1925. 2. 20

 

 제이덕의 증상이 심각하다. 그러니까, 이상한 얘기를 한다. 무슨 일이 있건, 우리는 함께 있을 수 있어요! 우리는 함께할 수 있어요. 이런 식이다. 그렇게 뇌까리는 눈빛이 묘하다.

 제이덕이 씻는 동안 노라와 긴급회의를 가졌다. 역시 저 책이 문제다. 제이덕은 씻으러 들어가면서도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을 욕실 문 바로 앞에 뒀다. 설마 씻는 내내 문틈 사이로 저 책을 보고 있기라도…… 말이 끝난 순간 소름이 쭉 돋으며, 방 안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 지점에 집중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나와 노라는 정말 애를 썼다. 어떻게든 그 책을 빼돌리고, 끈적한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다.

 물론 실패했다. 광인의 감각은 날카롭고 예리한 법이다. 결국에는 연구가 끝날 때까지만 더 지켜보기로 타협했다. 그 이후로도 계속 저렇게 상태가 좋지 않을 시 미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최선이다. 제이덕 본인을 위해서라도.

 

 

 

 더 스쿱 신문사.

 사장 미키 마호니와 만나 잭슨 엘리어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보를 전하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마호니는 시가를 뻑뻑 피워댔다.

 그에게 들은 얘기를 요약하자면: 잭슨은 이 도시의 교단을 조사하면서 그의 도움을 받았다. 잭슨은 미키 마호니에게 교단에 대한 기사를 약속했으나,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도망치듯 황급히 영국을 떠나야만 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몰랐다. 

 우리는 마호니의 도움을 받아 잭슨 엘리어스가 흥미를 보였던 기사 몇 개를 찾았다. 

 

 

 

 

 세 기사는 전부 기자 서명이 없었다. 통신사에서 기사를 받아 더 스쿱에서 고쳐 쓴 글이라 그런 모양이다. 엘리어스는 이 기사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한 것 같다. 그는 배링턴 경위를 직접 만나러 가기도 했고, 이집트 살인 사건과 더불어 펜휴 재단에도 관심이 많았다.

 쉬플리의 경우에는 살인 사건과 직접 연관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자기 집에서 그림을 상시판매한다. 주소는 기사 아래쪽에.

 

 미키 마호니는 여전히 사교에 대한 기사를 살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나쁘지 않은 일감이다. 그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조사에도 더 뚜렷한 방향성이 잡혔다. 들를 곳이 늘었다고 할까.

 

  •  마일스 쉬플리의 집.
  •  뉴 스코틀랜드 야드.

 

 더 스쿱에서 빠져나온 뒤, 먼저 배링턴 경위에게 연락해서 내일의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오늘의 남은 시간은 쉬플리의 집을 방문하는 데 쓰기로 했다.

 

 

 

 

 마일스 쉬플리의 집. 첼시.

 문을 두드리자 허리가 굽은 노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쉬플리의 어머니인듯했다. 우리는 그림을 보러 왔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안에 들어서고 나서 제일 처음 느낀 것은 집 전체에서 나는 기묘한 냄새였다. 농장 출신 노라 에버트는 그것이 파충류 냄새와 비슷하다고 짐작했다. 냄새는 집 전체를 떠다녔다.

 조금 기다리자 비쩍 마른 남자가 계단 위에서 내려왔다. 마일스 쉬플리는 말을 심하게 더듬고,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 불안정한 사내였다. 그는 다락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작업실로 쓰이는 다락방은 휑했다. 천에 덮인 그림이 여럿. 가운데에는 이젤과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쉬플리는 떨리는 손으로 자기 그림을 보여주었다. 대강 글로 요약해두자면:

 

-초록색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약병들 앞에, 파충류 인간이 덩어리지고 피투성이인 무언가를 해부하고 있는 그림.

-고대 이집트의 행렬 그림. 수많은 이들이 무릎을 꿇은 앞에 파라오가 탄 황금 전차가 지나간다. 파라오는 검은색, 금색으로 된 로브를 입은 뒷모습. 전차의 뒤에는 배가 갈라진 사람이 양쪽에 말뚝으로 꿰여 있다. 자칼 무리가 그 배에서 흘러나온 내장을 쫓는다.

-언덕 위 하얀 건물과 호수 그림. 거대한 용이 솟아올라 있고, 그 아래 수백 명의 사람이 묻혔다. 서로 물어뜯으면서 피와 내장을 쏟는다. 

-한밤중의 숲 그림. 모닥불 주위를 벌거벗은 남녀가 뛰어다닌다. 노란 달이 떴다. 불꽃 위에 염소 머리를 한 남자가 보이고, 그 앞에 세 명의 소녀가 선다. 그 환영이 긴 팔을 뻗어서 마술을 부린다.

-인신 공양 의식 그림.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이 제물의 배를 가른다. 제물의 가슴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나중에 들었는데, 제이덕은 이 문양이 순간 꿈틀거리는 환상을 보았다.— 피가 바닥에 놓인 책으로 떨어진다. 그 책에는 벌레가 우글거린다.

-높은 산 위의 괴물 그림. 머리는 피에 젖은 거대한 촉수 한 줄기 같다. 그 산에는 사원이 있다. 사원 근처에서 사람 형상들이 손을 하늘로 뻗고 애원한다. 사람 형상들의 머리에도 촉수 비슷한 것이 돋아 있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촉수가 붙은 의식용 가면이다.

 

 

 심약한 화가의 겉모습이 품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잔학한 이미지였다. 비현실적인 입체감이 있었다. 나는 쉬플리의 그림이 싫었다. 거칠고 강렬한 붓 터치가 망막에 폭력적으로 인상을 새겨넣는 듯했다. 불쾌하고 끔찍하고 유독한 인상을. 그저 본다는 행위 하나를 선택한 결과로 감내하기에는 지나치고 부당한 폭력이다.

 나는 그림에 집중하지 않기 위해 쉬플리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어디서 영감을 얻었냐는 질문에, 쉬플리는 자기가 과거의 편린을 보고 그린 것이라 대답했다. 그는 지나치게 긴장했고, 불안해했다. 그 밖의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은 대부분 얼버무렸고…… 그의 옆에는 대조적으로 평온한 얼굴의 노인이 서 있었다. 나는 무심코 시선을 떨구었다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경험을 했다.

 그림자가 이상했다. 주변이 어두웠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왜소한 노인에게서 생길 크기의 그것이 아니었다. 의심을 가지고 살피자 상황이 더 분명하게 보였다. 두 사람은 가족인 척 대화를 했으나, 아들은 분명 엄마에게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집안에 가득 찬 역겨운 냄새와 끔찍한 그림 때문에 상태가 나빠진 노라는 결국 바닥에 토했다. 속을 게우기 위해 고개를 숙였던데다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던 노라는, 자기가 본 것을 표현해버렸다. 그러니까, 그림자와 노인을 번갈아 손가락질했다.

 노인은 무표정했다. 뭐라고 말을 중얼거렸던가? 노라는 순식간에 마법에 걸린 것처럼 차분해졌다. 나는 경악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봤지만, 거기에 노인은 없었다. 인간의 형상이 찌그러지더니 몸집이 부풀었다. 허물 벗듯 드러난 모습은 비늘 달린 괴물이었다.

 나는 제이덕이 괴물에게 다가가려는 걸 말리며, 다급하게 총부리를 들이댔다. 당신 뭡니까?

 그것은 쉭쉭 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복종해라. 인간. 복종해.

 내가 바라던 대답은 아니다.

 

 "싫어."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쉬플리는 잔뜩 겁에 질려, 벽에 구겨져 들어가려고 했다. 탄환이 질긴 가죽을 뚫었다. 상처에서 끈적한 피가 흘렀다. 괴물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총알이 상처를 냈다는 것은, 죽일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무언가 내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걸었다. 그 불쾌한 침입에 대한 감상을 말로 뱉기도 전에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 끔찍했다. 산 채로 천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목 안쪽으로 신맛이 났고,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눈에 피가 맺혀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온통 흐리고 붉었다. 이상하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얼굴이 하나 있었다. 보고 싶지 않았는데, 고통 때문에 벌레처럼 나약해져서 보는 걸 멈출 수가 없다. …….

 아주 어렸을 적의 나는 너무 겁에 질렸을 때 그대로 가만히 있기만 하면, 그러니까 숨도 쉬지 않고 눈도 깜빡이지 않으면, 무서운 일이 그대로 지나가 줄 거라고 믿었다.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숨을 참으면서, 나는 이대로 돌이 될 테니까, 세상은 나를 모른 척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내가 정말로 굳어서가 아니라 긴장과 두려움 때문에 죽어버리기 전에, 윌리엄은 늘 먼저 나를 찾아냈다. 형에게는 그런 이상한 초능력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하지만, 하필이면. 지금. 왜? 

 

 

 한참 지나서야 다시 정신이 들었다. 환상도 없고, 고통은 견딜만한 정도로 줄어들었다. 주변은 지독한 파충류 냄새가 났고 몹시 어두컴컴했다. 노라는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는 꽁꽁 묶인 채 벽 안쪽의 공간에 갇혀 있었다. 문 너머에서 쉬플리와 괴물의 대화가 들렸다. 괴물은 쉬플리에게 우리를 감시할 것을 명령하고 떠났다.

 몇 마디 속삭임 끝에 겨우 밧줄을 풀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방의 선반 위에는 어두운 물질이 든 유리병이 몇 개. 벽에는 기묘한 기호가 가득하고 한쪽에는 금속판이 달린, 돌 욕조가 있었다. 욕조를 살짝 열어봤다가 잘린 머리와 인사하고 다시 덮어두었다. 호기심이 일라이저 웨버를 죽인다. 

 한참 생각에 골몰하던 제이덕은, 우릴 가둔 괴물에 관한 내용을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아주 고대에 지구에 살았던 종족인 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 존재가 런던 한복판에서 화가와 함께 살고 있다니. 여러모로 나의 이해를 초월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벽 너머의 쉬플리를 설득했다. 괴물에게 협박당하고 있다면 도와주겠노라고,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고 얘기했다. 설득이 잘 먹혀들어서, 우리는 괴물이 뒤뜰로 나간 사이 부엌에 매복할 수 있었다.

 그 짧은 사이 괴물은 다시 노인의 거죽을 쓰고 있었다. 유약한 노인의 겉모습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으나 결국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아까 같은 경험은 다시는, 절대로 사양이었다. 총에 맞자 인두겁이 벗겨졌다. 찢어지는 비명. 괴물은 온 집안을 기름때처럼 덮었던 그 지독한 악취를 풍기면서 무너져내렸다.

 

 

 이 뒤로는 마일스 쉬플리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다. 그가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말했기에 정황이 다소 왜곡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이 괴물은 갑자기 쉬플리에게 찾아와서, 굉장한 소재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을 만들어주었다. 쉬플리는 괴물이 준 약을 사용해 과거에 다녀왔다. 과거의 충격적인 장면들은 그의 뇌에 큰 상흔을 남겼고, 화가는 이상한 그림을 잔뜩 그렸다. 괴물은 화가의 어머니를 잡아먹고 어머니의 모습으로 변했다.

 

 쉬플리는 지저분한 방에서 마지막으로 조금 남은 녹색의 약을 꺼내주었다. 그리고 잠겨 있던 다락의 벽장도 열었다. 벽장 안에는 천에 덮인 커다란 캔버스가 있었다. 뱀의 제단이라는 제목의 미완성품으로, 괴물의 명령을 듣고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뱀이 들끓는 고대의 늪지대를 그린 그림이었다. 늪지 중앙의 작은 섬에는 석제 제단이 있었다. 속이 매스껍다 싶더니, 문득 그림이 일렁였다. 벌레 울음, 물소리가 멀었다가 가까워졌다. 줄기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꿈틀대는 뱀 비늘이 어지러이 빛을 산란했다. 제단은 그 빛을 머금었다…… 풍경이 서서히 현실을 잠식했다. 흡사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재빨리 나를 붙잡아준 제이덕이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이덕이 살펴본 결과 그림 속 식물들은 2억만 년 전 페름기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뱀 인간이 정말 고대의 존재라면 설명이 되는 이야기다. 인간 화가를 시켜 그들에게 남은 어떤 유산을 그려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괴물이 죽은 이상 목적은 영영 알 수 없지만, 그 어떤 낙관주의자도 그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이유이리라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그림은 이제 산산이 조각나서 더는 찾을 수 없다.

 쉬플리는 죽음숭배교단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림들은 분명 교단이 묘사하는 어두운 신과 연관되어 있다. 더 깊게 엮이지 않는 편이 이 화가에게도 좋을 것이다.

 밖으로 나왔을 즈음에는 새벽이었다. 어떻게 숙소로 돌아왔는지도 잘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1925. 2. 21

 

 아침 일찍 센트럴 뉴스 에이전시에 들렀다. 간단하게 몇 가지를 알아냈다:

 -1년 전 즈음에 일명 이집트 살인사건을 조사하던 그레고리 먼든 경위의 실종 사건과 관련된 기사. 경위는 목격자도 흔적도 없이 증발하였다.

 -이집트인들이 살해당한 사건에 대한 제보를 부탁하는 기사도 있다.

 

 

 점심을 먹고 뉴 스코틀랜드 야드로 배링턴 경위를 만나러 갔다.

 그는 50대 정도 되는, 격무에 치인 남자였다. 처음에는 우리를 신용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마도 정보를 캐내서 기사를 쓰려 한다고 의심하는 것 같았다. 죽음숭배교단에 대한 얘기는 허무맹랑한 희언으로 취급했다. 제이덕의 학위 검증과 장구한 설득이 있고 나서야 제대로 사건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집트 살인사건: 피해자가 주로 이집트인(19명 중 17명)이고 비슷한 흉기에 찔려 죽은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

 -수법: 머리와 몸통 곳곳에 맞고 찔린 상처가 있다. 거대한 못이나 바늘이 달린 몽둥이가 흉기일 것으로 추정.

 피해자 중에서 소호에 있는 블루 피라미드 클럽(영국 내 이집트인들이 많이 모이는 클럽) 단골들이 많아 따로 감시해본 적이 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관계자들의 자문: 종교 살인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펜휴 재단의 에드워드 개비건과 대화했다. ‘검은 파라오의 결사’라는 단체의 수법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 단체는 이미 수백 년 전에 사라졌다.

 자흐라 샤피크라는 향신료 상인과도 이야기를 해보았는데(펜휴 재단에서 일한 적 있음, 이집트인), 역시나 옛날얘기에나 나오지 실제로 있는 종교이지는 않을 거라고 한다. 그가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아 미행해봤지만, 역시나 건진 건 없었다.

 -목격자의 증언: 소란스러워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봤더니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피해자가 ‘호텝’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고대 이집트어로 휴식이나 평화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먼든 경위가 1년 전에 그렇게 사라진 후 배링턴이 뒤이어 사건을 맡아 조사하게 되었다. 먼든 경위는 너무 깊은 곳까지 발을 들였던 것일까? 뉴욕에서 벌어졌던 사건과도 여러모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 또 못이 박힌 몽둥이라면, 콜즈 교수가 얘기했던 오스트레일리아의 종교도 연상된다. 생각해볼 점이 많다.

 우리는 더 자세히 알아보고, 제보할 게 생기면 꼭 제보를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서를 빠져나왔다.

 

 

 

 저녁에는 드디어 노라가 궁금해하던 박람회에 들렀는데, 제이덕이 헛것을 보는 바람에 빨리 숙소에 돌아가 쉬게 되었다. 그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거대한 여인, 팔에 코브라를 감은 여인의 환상을 설명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앉아서는 아내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말씨도 차분했다. 어쩌면 연구의 끝이 보이는 탓일까? 좋은 신호일까.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긴 한데, 노라는 내심 안도한 듯하다. 나는 어디까지 낙관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좋은 환각은 없다. 환각이 좋을 수는 없다. 그 내용이 어떻건 간에 현실에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이덕이니만큼, 더 나은 쪽을 희망하게 된다.

 

 

 우리는 늦은 시간에 블루 피라미드 클럽으로 향했다.

 1층에는 청과상이 있고, 계단이나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2층에 클럽이 있다. 

 문 앞에는 문지기가 서서 회원 카드 확인을 했다. 회원제 클럽으로, 가입이 필요했다. 우리는 입장 데스크에서 따로 돈을 내고 명단에 적당한 가명을 썼다. 빠르게 훑어본 결과, 그 명단에서 자흐라 샤피크와 에드워드 개비건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들어가서 적당히 자리를 잡고 손님들을 살펴보았다. 화려한 밸리 댄스 공연이 끝나고, 댄서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손님들 사이를 누볐다. 무용수에게 손을 대기라도 하면 경비원에게 끌려갔는데, 개중 어떤 손님들은 그 규칙에 좌우되지 않는 특별 대우를 받는 것 같았다.

 웨이터에게 그 손님들에 관해 슬쩍 물어보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굴하지 않고 바텐더에게도 가서, 적당히 아무개 작가인 척 수작을 걸었다. 그러다 비싼 술을 사면 내밀한 공간으로 안내해준다는 제안을 들었다. 나는 반신반의했지만, 망설여봤자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지 싶었다.

 안내를 받은 곳은 바 뒤쪽을 통해 들어가는, 아늑하고 불건전한 방이었다. 나는 얼마 기다리지도 않고 덩치 큰 남자 둘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말 한마디 없이 바로 내게 덤벼들었다. 내가 총을 꺼냈는데도 주춤하는 기색이 없어, 결국 위협용으로 발포했다. 총성이 울리고, 스쳐서 피가 났는데도 둘은 포기할 줄 몰랐다.

 남자 하나가 옆에서 의자를 들고 내 머리를 후려쳤다. 눈앞에 불이 번쩍하고, 의자가 그대로 작살났다. 거의 동시에 문이 활짝 열렸다. 한쪽 눈앞이 축축해져서 잘 보이지 않았던 데다 역광이 져서,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일라이저 씨, 거기 있어요? 괜찮아요?”

 

 조금 어눌한 듯 용감한,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안도감에 맥이 풀렸다.

 

 “아, 예. 괜찮아요.”

 

 달릴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앞의 남자를 밀치고 제이덕이 있는 곳까지 달렸다. 우리는 그대로 정신없이 도망쳤다. 어디로든 뛰어들어 숨었다. 아마 강변의 수풀이었던 것 같다. 이어서 뒤쫓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지나가고, 곧 조용해졌다.

 우리는 긴장 후의 늘어짐 상태로 조금 떠들었다. 그런 데는 어쩌려고 따라갔느냐고 혼나기도 했다. 처음부터 함정이었거나, 내가 티가 많이 났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튼, 블루 피라미드 클럽이 수상한 교단과 관련된 장소인 것은 확실해졌다. 노라가 손수건을 꺼내서 상처를 닦아줬다. 제이덕은 그 사이 무용수 한 사람에게 쪽지를 받았다고 한다. 얻은 게 아예 없지는 않았던 셈이다. 내용은 이랬다. ‘자정에 아래쪽 길가 근처 다리 밑에서 봐요.’

 

 

 

 자정.

 다리 밑의 무용수는 자신을 얄레샤 엣삼이라고 소개했다.

 얄레샤의 남자친구는 이집트 살인의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얄레샤에게 찝쩍거리던 손님 중 하나를 위협했다가 끔찍한 보복 살인을 당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은 것은 복수에의 의지 때문이다. 다만 어설프게 시도했다가 겪게 될 교단의 보복도 두렵거니와, 경찰 내에 조력자가 있을 수 있다는 위험 때문에 직접 고발하지 못하고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얄레샤가 알아차릴 만큼 우리는…… 그래. 티가 많이 났던 모양이다.

 얄레샤는 우리에게 가게에 대한 정보를 몇 가지 알려주었다.

 

 -한 달에 한 번 자정 전후에 트럭이 와서 손님들을 태우고 간다. 목적지는 런던 밖의 어딘가.

 -손님은 전부 검은 파라오의 결사 소속이며, 자흐라 샤피크가 그들을 이끌고 있다. 자흐라 샤피크는 엠파이어 향신료 가게 주인이다.

 -직원들도 대부분 검은 파라오의 결사 소속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직원 중 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못 들어가는 공간은 1층의 창고.

 

 

 얄레샤를 돌려보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살폈다. 우리는 줄곧 감시당하곤 했으니. 누군가 얄레샤와 우리와 만난 장면을 보기라도 했다면 큰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 건너편에서 사람 셋 정도가 그가 사라진 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기우이길 바라면서도 황급히 뒤를 쫓았다.

 그들은 어두운 골목에서 얄레샤를 습격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뒤따라갔기에 비교적 손쉽게 이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얄레샤는 눈물범벅인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얄레샤를 진정시키면서, 우리는 쓰러진 습격자들의 처우에 대해 고민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결국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경찰에 넘기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경찰이 제대로 대처할까? 고작해야 습격 미수라면. 이들은 언제든 풀려나거나 교단의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얄레샤 엣삼은 순식간에 처리당할 테고. 우리는 떠나면 그만이지만, 얄레샤는 계속 런던에 살아야 한다. 이 셋이 자기가 본 걸 말하게 둘 수는 없다.

 주주 하우스 지하에서 봤던 시체들이 떠올랐다. 죽은 뒤에도 자유롭지 못했던 사람들. 그 위로 잭슨 엘리어스의 마지막 모습도 겹쳤다.

 

 

 뉴욕의 부두에서 나를 노려보던 싸늘한 눈빛.

 런던 행 내내 나는 그 눈빛의 의미에 대해 골몰했다.

 그들이 믿는 신이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안다. 그러나 도시의 그림자에 숨어 살면서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배를 가르는 것은 인간이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인간성을 잃은 인간들과 싸우고 있다. 인간 거죽을 덮어쓴 뱀 인간과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사람인 척하지만 사실은 사람이 아니다. 쉽게 뿌리뽑히지도 않는다. 반푼어치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믿으며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나를 노려보고 있다. 이제 편안한 밤은 다시 없을 것이다.

 

 얄레샤가 너무 겁에 질려 있어서, 우리 숙소에 하룻밤 머무르게 하기로 했다. 가는 동안 감시를 조심하라고 단단히 일러두고 세 사람을 먼저 돌려보냈다.

 물론 나는 경찰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습격자들의 소지품을 뒤졌다. 대형 단도와 몽둥이가 하나씩 나왔다. 이들이 빈손이었더라면 생각이 바뀌었을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들이 무기를 가졌다는 사실이 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 했다.

 마침 주변에 제법 큰 쓰레기통이 있었다. 나는 아주 세심한 동작으로 쓰러진 몸을 옮겼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커다란 단도를 썼다. 한 명씩 쓰레기통에 넣고 조심스럽게 목을 찔렀다. 손에 쥔 흉기를 타고, 피부 아래 연약한 살과 단단한 뼈 사이로 불청객을 욱여넣는 느낌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남자는 고통을 느꼈는지 눈을 부릅떴다. 그 얼굴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마치 뇌에 사진으로 찍어 남긴듯하다. 그렇게 어두운 밤중이었는데. 뭐라 비명을 지르려고 했던 것 같은데, 피거품 섞인 목소리는 말이 되지 못하고 울컥울컥 쏟아졌다. 눈에 들어왔던 빛은 금방 꺼졌다. 눈을 뜬 그대로 절명해서, 표정은 마치 왜?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어째서? 사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인데. 하지만 굳이 깨워서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대화를 시도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이들을 사람처럼 느끼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들은 내 미약하고 말도 안 되는 소망처럼, 죽었다고 껍질이 벗겨져 괴물의 본모습을 드러내거나 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생각보다 금방 해낼 수 있었다. 바닥으로 피가 많이 흘렀기에 밟지 않도록 조심했다. 손발과 머리는 줄곧 찼다. 나는 꽤 다양한 살인자를 만났고 그들에 대한 기사를 썼다. 그들과 그들의 실수를 알았다. 되도록 생각을 두 번 세 번 하지 않고, 알고 있는 대로만 행동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산책 나온 사람처럼 걸을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 수 있었고,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그늘 속에서 눈을 감으면 아직도 부두의 그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내 이름은 일라이저 웨버.

 

 이것은 나의 기록이다.

 한때는 사람의, 사람을 위한 밝고 명징한 기호와 세상을 믿었다.

 살아온 세월이 그리 길지는 않아도 언제나 그런 것들을 위해 발을 내딛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어떤 것은 어둠 속에 영원히 묻어 두어야만 한다.

 

 

 

 

 

 제이덕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온몸이 꽁꽁 얼었다. 걱정을 시켰구나 싶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방에서는 알코올 향과 섞인 달짝지근한 냄새가 조금 났다. 얄레샤는 일찍 곯아떨어져 있었다. 노라가 위로를 잘해준 모양이었다.

 

 "얄레샤가 열아홉 살이래요. 남자친구는 고작 스물하나였대요."

 

 그렇게 말할 때 노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갈라진 것처럼 들렸다.

 씻으러 들어갔다가 조금 놀랐다. 온몸에 기묘한 상처 자국 같은 게 남아 있었다. 그 끔찍한 주문의 여파일까? 자각하지 못했는데, 상처는 서서히 희미해지는 중인 것 같았다. 별수 없이 긴소매를 골라 입었다. 노라가 붕대를 새로 감아주는 동안, 나는 생각해뒀던 변명을 읊조렸다. 경찰을 불렀고, 머리의 상처를 빌미로, 내가 이들에게 공격받았다고 신고했다는 식이다.

 그리고 바로 누우려 했는데, 제이덕이 연구 때문인지 많이 심란해해서 함께 술을 좀 마셨다. 새삼, 이 애들과도 기묘한 애착이 생겨버린 것이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너무 오래, 함께 노출되어서겠지. 도움을 받고 도움을 준다. 믿고 의지한다. 혼자 내키는 대로 나다닐 때는 그저 머리로만 알던 문장이다. 밝은 창가에 얼굴을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다. 인간이 인간을 돕는 것은 본성이다. 그리고 나는 지옥에 떨어질 거다. 

 

 

 

 

 

 

1925. 2. 22

 

 제이덕이 연구를 마무리했다. 아침 일찍, 이룬 성과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에는 기묘한 주문이 하나 들어있다고 한다. 

 

 

 나이젤 블랙웰.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

쉼바 생성. 마력 12. 이성 1d6. 꼬박 하루의 시전 시간. 이 주문의 유래는 케냐. 케냐의 키쿠유족 주술사가 개발한 주문으로, 언데드 하인을 만든다. 쉼바가 될 사람은 의식에 따라 상처를 내서 죽여야 한다. 의식의 순서나 내용도 책 안에 쓰여있다. 시체의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18~20시간 동안 시체를 굽어보면서 주문을 외워야 한다. 되살아난 존재는 간단한 명령을 듣는다. 쉼바는 점점 썩어서 못쓰게 되기 때문에 하인이 필요하면 계속 사람을 죽여 만들어야 한다. 

 

 제이덕은 우리에게 일전에 읽었던 키쿠유족에 대한 기사를 주지시켰다. 주주하우스. 쉼바. 키쿠유족. 칼라일 탐사대. 어떤 미약한 연결고리가 보인다. 만약 키쿠유족 또한 이 사악한 교단의 일원이라면? 애초에 칼라일 탐사대의 사고 기사가 거짓말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마크 셀커크 중위와 키쿠유족. 두 사람의 증언이 모순된다면 둘 중 누구 하나의 말은 필연적으로 거짓일 터다.

 우리는 새벽에 블루 피라미드 1층의 창고를 가보기로 하고, 일과를 시작했다.

 

 

 

 

 노라의 강권으로 병원을 들렀다. 그리고 쇼핑을 조금 했다. 이젠 거의 강박적인 시선으로 감시를 찾는다. 아침 일찍부터 따라붙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노려보자, 곧장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숙소로 돌아온 뒤, 노라는 거절하는 얄레샤에게 이것저것 잔뜩 안겨서 보냈다.

 

 하오를 바쁘게 보내기 위해서, 우리는 수상한 펜휴 재단을 다시 찾아갔다. 오늘은 개비건 씨가 계시느냐고 안내 데스크에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개비건에 대한 것은 개인 비서인 토머스 키너리가 전부 처리한다는 답을 들었다. 일단 그의 사무실 위치를 알아두고, 펜휴 재단을 돌아다보았다.

 두 사람이 뒷마당에서 묘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보통 건물과는 다르게 엉뚱한 위치에 환기 파이프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기에는 찜찜해서, 그 부근의 벽을 따라 건물을 조금 돌았다. 결국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물론 문이 잠겨 있었고, 여러모로 시도를 해봤지만 열 수는 없었다. 조금 고민하다가 승강기로 가서 지하층 표시가 있는지 살폈다. 표시는 있는데 버튼이 눌리지 않았다. 이리저리 건드리다 보니 제이덕이 뭘 잘못 만졌는지 지하층을 향해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지하에는 소각로, 석탄 창고, 잡동사니가 쌓인 평범한 창고 정도가 있었다. 석탄 창고의 벽 안쪽으로 전기선, 배기 파이프, 냉온수 파이프가 들어간 것이 보였다. 잡동사니 창고는 말 그대로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하지만 명징한 의혹을 가지고 선반에 있는 물건을 치우자 곧 틈새가 보였다. 문이 있었다. 양쪽으로 열리는 쌍여닫이문.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쪽은 캄캄했다. 손전등으로 비춰서 내부를 훑었다. 초 연기 냄새가 났다. 사방에 잘 관리된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먼지도 적고, 한쪽에는 상자들, 벽에는 그림이 여럿 걸려 있었다. 스위치를 찾아 누르자 가운데에 있는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우리는 이 숨겨진 방을 아주 샅샅이 뒤졌다. 책상과 가까운 쪽에 놓인 상자에는 꽤 많은 비상식량, 옷과 식수 등의 물품이 들어있었다. 책상 밑 금속 상자에는 잡다한 서류가 가득했다. 특히 영수증이 많이 나왔다. 특기할만한 것은 이 정도다.

 

 

 -헨슨 공업에 목재, 석탄, 철괴, 구리 선, 고가의 주철 금고를 설치한 영수증(사진).

 -트럭을 6개월 임대한 영수증.

 -라임하우스 로프메이커스 필즈의 푸닛 초다리가 아이보리 윈드 호로 보내는 편지. 상하이로 보내는 다양한 골동품의 보관과 배송에 관한 내용.

 -영수증 더미 밑의 명함(사진).

 

 

 

 책상 서랍에는 32구경 리볼버와 위조 여권 2개, 상당한 양의 사용된 수표가 들어있었다. 5, 10파운드 짜리인데 총액은 어림잡아 2000파운드 정도. 발행인은 펜휴 재단.

 

 반대쪽에는 뚜껑이 열리거나 비어 있는 상자 여럿 있었다. 개중 닫히고 스텐실이 붙은 큰 나무 상자를 살폈다. 호팡 수출입 상사 카오양 가 15번지, 상하이, 중국. 작은 글씨로 ‘호팡 대인께.’라고 쓰여있다. 안에 든 것은 중국식 삿갓을 쓴 둥그런 생물체를 조각한 청동상이다. 삿갓 아래에서 촉수 다발이 뻗어 나오는 모양새다. 청동상인데 굉장히 차갑고 미끌거리는 질감이다.

 그 옆에 있던 작은 상자는 이랬다. 랜돌프 운송회사. 포트 다윈, 노던 준주, 호주. 길쭉한 사슴 머리에 날개가 달린 존재를 도안화한 마크가 스텐실에 찍혀 있다. 스텐실 옆에 ‘랜돌프 씨 직접 수령 요망.’이라고 쓰여 있었다. 안에는 든 것은 40cm 정도 되는 뚱뚱한 용의 조각. 용의 머리에도 촉수가 잔뜩 달렸고, 재질은 불명이다. 그걸 집어 든 순간, 팔과 몸통에 이상하게 찌릿한 감각이 쫙 퍼졌다. 순간 깜짝 놀라서 조각상을 떨어트렸다. 어리둥절해서 손을 살폈지만, 어제 봤던 주문의 미미한 흔적이 남아있을 뿐 달라진 점은 없었다. 영 찜찜해서 이 조각상을 챙겼다.

 그리고 고급 호두나무로 만든 책장. 유리문이 달려 있고 그 안에 책이나 두루마리가 잔뜩 쌓여 있었다. 돌로 만든 작은 병이 하나 있었는데, 안에 회색 재 같은 것이 들었다. 책과 두루마리는 몹시 다양한 언어로 되어있었다. 아랍어, 라틴어, 중세 프랑스어, 고대 영어, 그리스어, 이집트 상형문자…….

 라틴어로 된 두루마리를 제이덕이 읽었는데, 신을 찬양하는 시라고 했다. 고대 영어로 된 두루마리 또한 검은 남자라는 신을 찬양하는 시였다. 우리가 읽을 수 있었던, 스페인어와 영어로 된 책들은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다.

 

 

 제이덕이 알려준 것들을 요약해 적어둔다.

 -리베르 이보니스. 가죽 장정에 잠금쇠. 가장자리가 검게 칠해져 있음. 퀴퀴한 냄새가 나고 페이지가 드문드문 비었다. 고대의 조형이나 존재의 원초적 물질, 자연철학에 대한 논의나 실험을 말한다. 사코체라는 존재가 언급된다. 사코체 본인이 직접 해설과 견해를 남겼는데, 몇몇 문구는 라틴어가 아닌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여 있다. 사코체는 스스로가 파즈 루자라고 알려져 있다고 적었다.

 -쟌의 서. 영어. 4절판. 유황 냄새가 난다. 저자, 번역자 미상. 샴발라에서 가장 고귀한 대스승들의 현명하고도 덕망 높은 말들을 적은 책이다. 벨라로스라는 행성에서 시작된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서 지구에서 끝나는 어떤 의식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다양한 문명의 융성과 몰락을 예언한다. 푸르고 흰 물 위를 걷는 자, 유혹하는 혼돈의 힘, 피에 젖은 혀, 뜨거운 산에 걸터앉은 자라는 존재가 언급된다. 공허 현자의 조언이라는 주문도 적혀 있는 듯하다.

 제이덕이 알기로는, 푸르고 흰 물 위를 걷는 자란 검은 파라오를 의미한다. 뜨거운 산에 걸터앉은 자, 피에 젖은 혀, 유혹하는 혼돈의 힘은 전부 피투성이 혀를 뜻하는 말이다.

 

 

 원숭이랑 파충류를 섞어놓은 듯한 기묘한 생물을 조각한 상자 안에는 장식된 은 단도 두 개가 들어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은 대부분 고대 회화였다. 진짜 전시장처럼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날개가 달린 검은 생물의 조각은 썩어 문드러진 것 같은 형상이었다. 역시나 날개가 있는 거대한 짐승을 그린 회화도 있었다. 짐승은 용과 흡사하고 입에는 송곳니가 빼곡했다. 또 뒤틀린 얼굴에 거대한 눈이 달린 괴물, 붉은빛의 군집이 검은 인간형 생물 주위에 모여 있는 그림도 있었다.

 제이덕에 따르면 이 작품들은 전부 엄청나게 오래된 것이다. 기원전 900~700년 사이(이집트 22왕조 부근)로 추정된다. 개중 파라오의 얼굴에 촉수 다발이 달린 벽화가 하나 있었는데, 이건 제3왕조 시대의 작품이라고 한다.

 

 사진을 찍고 있자니 저 바깥에서부터 인기척이 들렸다. 우리는 황급히 불을 끄고, 한쪽 벽의 계단으로 올라갔다. 나와 제이덕이 위쪽의 문을 힘으로 열어보려 용쓰는 동안 똑똑한 노라가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빠져나와 둘러보니, 파라오의 형태로 된 석관이 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긴가민가하다 파라오의 눈을 누르자 석관이 다시 닫혔다.

 주변은 짐이 가득한 창고였다. 상자들 너머로 나가는 문이 보였다. 바닥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는데, 석관에서부터 이어진 먼지 없는 길이 한 줄 있었다. 그 길은 갑작스레 벽에서 끝났다. 나와 제이덕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 길을 따라가 보았다.

 벽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그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었다. 호칭으로 미루어보아 비서가 에드워드 개비건에게 무언가를 보고하는 듯했다. 사업 논의가 좀 이어지더니, 뒤이어 블루 피라미드 클럽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블루 피라미드에서 크게 난리가 났고, 귀찮은 쥐새끼들이 도망갔으며…… 잭슨 엘리어스의 이름도 언급되었다. 지독한 작가랑 얽혀서 운이 안 좋다는 불평이었는데, 하하. 공감이다.

 그러고 있자니 노라가 문 쪽에서 손짓했다. 우리는 문밖이 고요해진 틈을 타 잽싸게 빠져나왔다.

 

 

 숙소로 돌아와서 주워 온 물건 몇 개를 대강 펼쳐보았다. 뚱뚱한 용의 조각상, 쟌의 서, 은 단도 두 개, 돌로 된 병, 쉬플리의 집에서 가져온 녹색 병과 검은색 병. 영수증과 편지. 그리고 육중한 피로감. 예상치 못한 모험을 한 우리는 블루 피라미드 클럽에 가기 전에 잠깐 눈을 붙이기로 합의했다.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만약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라면

아직 엔딩을 안 보셨다면

미국편 후기부터는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조심합시다!

미국편 1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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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잭슨 엘리어스의 유언에 따라 구체적인 기금을 받는 탐사대로 재조직되었다. 붙는 이름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어느 한구석 특별히 빼어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 이름이 새삼스럽게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그래도 거기에는 다른 무게감이 있었다. 무게감. 어떤 사건들은 한번 겪고 나면 결코 예전과 같은 삶으로는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은 알게 되었다는 간략한 요약. 우리는 그 앎의 굴레, 같은 슬픔을 공유했다.

 

 

 수집한 자료를 정리한 보드를 펼쳤다. 몇 가지 의문들, 수상한 증거들이 어지러이 놓여있었다. 이번에는 그중에서도 제정신으로 쓰인 것 같지 않던 잭슨의 메모에 있는 ‘칼라일 가문의 금고’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칼라일 가문의 금고라면 분명 저택에 있을 터였다. 도둑질할 재주는 없으니 당당히 부딪혀야만 했다. 칼라일 저택은 삼엄한 경비 속에 요새 마냥 보호받고 있었다.

 우리는 칼라일 탐사대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칼라일 저택 사람들은 허풍선이들에게 자주 시달리는 모양인지, 우리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쫓겨나지 않기 위해 제이덕의 영민함과 ‘학위’를 팔아야 했다. 텍사스 대학 만세.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에리카 칼라일은, 이 집에서 만난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루빨리 귀찮은 불청객들을 쫓아내려던 그를 자리에 앉힌 것은 로저 칼라일이 살아있을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잭슨이 남긴 자료들을 십분 활용하여 에리카를 설득했다. 셀커크 중위와의 인터뷰(개중 정확히 “시체 중 백인은 없었다”는 부분), 살아있는 잭 브레이디가 목격되었다는 증언이 특히 유용했다. 에리카 칼라일은 칼라일 탐사대와 죽음숭배교단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얘기를 하는 목적이 뭐지요? 돈을 바라는 건가요?” 이런 말이 에리카의 입에서 나왔을 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희는 칼라일 탐사대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특정한 교단에 대해 조사하고 있습니다. 칼라일의 금고 안에 있는 책을 보고 싶습니다.” 해서, 대충 이렇게 대답하게 된 것이다.

 

 에리카 칼라일은 금고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한 적 없다며 놀랐다.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잭슨 엘리어스는 어떻게 알았을까. 금고에 대해 말할 때 잭슨의 메모는 제정신인 사람 같지 않았다. 환시일까? 열띤 백일몽 속에서, 꿈속에서, 어쩌면 광기 속에서 숨겨져 있던 칼라일의 비밀에 접촉하고야 만 것일까?

 에리카는 망설였지만, 최대한 솔직하게 자기가 아는 것을 설명하려 애쓰는, 어떻게 보든 남을 속일 깜냥은 되어 보이지 않는 시골 아가씨 노라 에버트의 모습에서 어떤 확신을 얻은 듯했다. 에리카는 우리를 서재로 안내했다.

 

 서재로 가는 길에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탐사대를 꾸려 떠나겠다고 했을 때, 로저 칼라일은 평소와 달랐다. 분명 부나이라는 흑인 여자에게 홀려서 저지른 짓이다. 부나이는 어느날 홀연히 나타났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는 자신도 전혀 모른다. 로저는 부나이를 자신의 여왕이라고 불렀고, 그가 자신이 원하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부나이는 칼라일 탐사대와 함께 떠났다.

 -떠나기 전에도 로저 칼라일은 악몽을 자주 꾸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고는 했다. 그래서 유명 정신분석가 허스턴 박사에게 진료를 받으라 추천했다. 하지만 허스턴 선생은 그의 병증을 치료하는 대신 오히려 부나이와 합세하여 그에게 바람을 넣은 것 같다.

 -로저는 이들 탐사대가 정확히 뭘 찾으러 떠나는 건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에리카는 그가 나가서 고생하면 자기 꿈이 허황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리라 생각하며 탐사를 보내주었다.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칼라일 탐사대에 숨겨진 인물이 더 있었다고? 갑자기 나타났다는 이 여인의 이야기는 불안한 쪽의 흥미를 돋웠다.

 

 

 

 칼라일 가문의 서재는 많은 양의 서적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비밀 금고 안에 있었던 책은 고작 네 권이었다. 간추리자면:

 

 프나코티카 필사본. 은색 가죽 양장 제본. 하이퍼보리아, 목성, 아틀란티스에 대한 이야기.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지구에 생명을 뿌린 백합 모양 생명체에 대한 설명. 누군지 모를 인물이 주석을 달았다. 거기에는 호주 서부의 사막 지하 어딘가에 세워진, 위대한 종족의 도시에 대해 적혀 있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기묘한 경험을 했다. 눈앞에 굉장한 풍경이 펼쳐졌다. 넓게 펼쳐진 모래의 바다, 죽음도 죽고 의미도 의미로 존재하지 못하는 메마른 대지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기괴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환상이었다. 분명 난생처음 보는 장소인데도 너무나 그리웠다. 이 도시야말로, 내가 두 다리 두 팔이 없을 적부터 기어서 나온 곳 같았다. 눈물이 차올랐다. 적어두기 부끄럽지만, 나는 이 이후로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만나보지 못한 도시에 관한 미칠 것만 같은 향수만을 느꼈다. 위대한 자들, 내려다보는 자들, 관찰하는 존재들, 그들이 나를 멀리서 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을 부르고 있는 것은 나였다. 아! 나는 그들을 부르는 법을 알고 있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거기 닿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의 기분은 어떤 말로도 생생히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나의 글은, 아니 영어는, 인간의 언어로는 부족하다.

 

 신으로서의 삶. 몽고메리 크롬튼. 손글씨. 거무죽죽한 가죽은 인간의 살을 만지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 영국 미술가 크롬튼이 광기에 사로잡혀 쓴 일기. 이집트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검은 파라오, 어둠의 파라오, 살인과 인신 공양에 대한 상세한 묘사. 공양 의식에 쓰는 못이 박힌 짧은 몽둥이에 대한 언급.

 

 

 

신으로서의 삶

 

 

 셀렉시옹 드 리브르 디봉. 그리스어 원전을 라틴어로 옮김, 프랑스어 주석. 가죽 표지가 파랗게 썩어있다. 라틴어 부분을 제이덕이 읽어내었다. 13권짜리 서적의 일부분. 주문이나 마법의 실용에 관한 연구가 들어있다. 차토구아라는 신에 대한 숭배. 테두리에 뒤집히고 깨진 앙크를 닮은 문양이 있음. 파즈 로자와 노덴스라는 신들의 적대 관계에 대해 쓰여 있다.

 

돌들 틈에서. 저스틴 조프리. 최근에 쓰인 수기 원고. 살면서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기묘한 검정 가죽 재질 표지. 시가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여왕의 소품들이라는 시는 왕관, 허리띠, 목걸이 등 여왕이 사용하는 화려한 소품에 대해 자세한 묘사를 하고 있다.

 

 

 뭔가에 취한 듯 당시의 기억이 모호한데 읽은 책들의 모양이나 감촉, 내용은 보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이상하다. 그때는 내 행동이 내 것 같지 않았다. 책을 읽다 노라가 기절했는데, 평소와는 달리 인간적인 걱정이라곤 하나 없이 그저 혼자가 아니라는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어쩌면 그도 위대한 도시에 다녀온 것일까? 그 아름다운 광경을 봤던 걸까? 봤어? 본 거지? 나는 소름이 돋은 팔을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복도에 서 있었다.

 기억이 서서히 돌아오자 환상은 그저 꿈결처럼 느껴졌다. 잊히지 않는 꿈 말이다. 꿈은 묻어둘 수 있지만, 행동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에리카 칼라일에게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던 상태에서 벌였던 실례에 대해 사과하고, 이후 알아낸 내용이 있다면 연락을 주노라고 약조했다.

 

 

 

 

 우리는 칼라일 가문의 차를 얻어 타고 뉴욕주 의료관리 위원회로 향했다. 내려서 잠시 의논했다. 칼라일 탐사대가 이집트로 향했으니 어쩌면 이 책 중에서는 ‘신으로서의 삶’이 특히 로저 칼라일에게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검은 파라오, 검은 파라오… 분명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당시에는 떠오르는 내용을 모호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는데 제대로 찾아서 여기 붙여둔다.

 

 (자료가 보강되어 있다) 이집트 3왕조 시대 말기에 아라비아 사막의 고대도시에서 왔다는 네프렌 카라는 강력한 마법사가 검은 파라오라는 악신을 숭배했다. 사람들은 악신과 마법사를 구분하지 않고 그를 검은 파라오라고 불렀다. 네프렌 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제3왕조와 지배권을 다투었다. 그가 한동안 나일강 일대를 다스리다가, 결국 알려진 대로 스네프루가 제4왕조를 세우고 이시스의 도움으로 네프렌카를 죽였다.

 

 이 얘기를 들은 제이덕은 어거스터스 라킨의 몸에서 흘렀던 검은 피를 우리에게 주지시켰다. 어쩌면 그것과 이 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서부터 출발한 불길한 파장으로 인해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우리는 불안의 가지를 더 뻗어 나가는 대신, 의료관리위원회 건물로 들어갔다. 거기에 보관되어 있다는 허스턴 박사의 진료 기록에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열람하고 싶다고 정중하게 요청하여 위원회 비서관 아드리안 페리스를 만났다. 그의 허락을 받고, 제이덕이 연구 목적으로만 사용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서야 필요한 내용을 읽어볼 수 있었다.

 

 

 

허스턴의 의료 기록

 

 

 

 베인, 베인이라. 꿈속의 목소리는 로저를 혼내고 싶었나? 아니, 칼라인 가문의 시조는 분명 에브너 베인 칼라일이지.

 허스턴 박사는 최근의 날짜로 내려갈수록 칼라일에 대한 기록을 적게 남기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에리카는 허스턴 박사를 부나이의 공조자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허스턴 박사의 기록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대체 이들 탐사대 사이에는 무슨 모종의 관계가 있었던 걸까. 이들에 대해 조금씩 알아낼 수록 사실이 명확히 밝혀지기보다는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다.

 

 -에리카 칼라일: 에리카 칼라일은 오빠와의 관계 때문에 괴로워했다. 상담 한 번에 90달러씩 청구하곤 했던 명세가 남아있다. 상담 비용치고는 지나친 가격이다.

 -이멜다 보쉬: 로버트 허스턴의 연인. 자살했다. 허스턴 박사와 사귀다 탐사대에 들어가기 직전에 헤어졌다.

 

 

 

 아파트에 돌아와 레베카 쇼젠버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힐튼 씨와 면회 일정이 잡혔다. 내일 아침 오전 9시. 역에서 만나 전철을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노라는 처음 타보는 지하철에 기대가 컸다. 반면 제이덕은 알게 모르게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득실대는 피라미드에도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 나는 속절없이 웃고 말았다.

 그런 즐거운 시간도 잠깐이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밖에는 정복 경관들이 여럿 서 있었다. 그들은 우리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만 들쑤시고 다니라는 협박을 나름대로 고운 말로 포장해서 지껄여댔다. 내 어깨를 당장 뽑아가기라도 할 기세로 꽉 쥐면서 얘기했으니,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힌 편이었다.

 지방의 유지나 돈과 결탁한 구리배지들이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협박하는 이야기야 LA에서든 뉴욕에서든 흔하다. 잘릴 직장이 있는 기자들이라면야 그런 말에 겁을 먹겠지.

 하지만 내 어린 동료들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런 일을 누군가 함께 해본 적이 없으니 그들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기 어려웠다. 내 한 몸만 걱정 없이 내던져서 되는 일이 아니니. 어렵다.

 머뭇거리다, 결국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일렀다. 그래도 노라는 그럴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럴 수는 없구나. 그렇다면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익숙해져야죠. 세상이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에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들이 정말로 그렇게 되면 조금쯤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력감에서 오는 오기로 부나방처럼 사는 것은 불행하다. 우리는 내일 거처를 옮기기로 하고 잠이 들었다.

 

 

 

 

 

1925. 1. 20

 

 복잡한 뉴욕 거리에서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짐작하기로는 교단의 끄나풀인 듯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황급히 아무 건물에 들어가 버거를 한 개씩 물고 가게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여차하면 사람들 사이에 섞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뉴 그랜드 호텔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짐을 내려놓고 나서 바로 레베카 쇼젠버그와 합류해 싱싱 교도소로 향했다. 안내를 받아 힐튼 애덤스를 만날 수 있었다.

 힐튼 애덤스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으면서도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는 선한 사내였다. 30분의 짧은 면회 시간 동안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이렇다:

 

 -‘피투성이 혀 교단’은 뉴욕에서 활개를 치며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힐튼은 시립도서관에서 모데카이 레밍 박사가 아프리카 죽음숭배교단에 대해 한 이야기를 듣고 도서관에 찾아갔다. 지금은 경찰들이 압수해간 자료는 오래전에 사라진 동아프리카 교단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들 교단은 케냐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데, 할렘 근방에서 아프리카와 관련된 물건을 취급하는 것은 주주하우스 뿐이다. 주주하우스는 아프리카에서 정기적으로 물건을 받고 있기도 하다. 여러모로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는 가게다.

 -힐튼은 웨스트 137번가를 따라서 레녹스 가와 할렘 강 사이의 두 블록 반경에서는 절대로 납치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구역에 주주하우스가 포함되어 있다. 납치가 일어난 지역은 그 구역을 중심으로 할렘강 서쪽에서 약 1.6km 반경 내에 분포되어 있다. 실종 자체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발생한 것 같다. 매 그믐밤, 한 달에 한 번.

 -힐튼은 주주하우스에서 나온 30~40대 정도의 남자를 미행한 적이 있었다. 남자는 팻 메이벨스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 사람들은 그 남자를 두려워했다. 남자의 이름은 무쿵가 음다리였다. 힐튼은 살인의 배후지가 자신을 위협으로 인식한 것이 카페에서 그 남자에 관해 묻고 다녔을 때라고 확신한다. 

 

 힐튼의 사형 날짜는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 멀지 않았다는 사실은 누구든 알 수 있다. 최대한 빨리 사건을 해결해야만 이 무고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

 

 

 

 

 면회를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서, 나는 뉴욕의 연예 사건을 주로 취급하는 동료 기자에게 연락해 이멜다 보쉬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했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냥 쉬었어야 했는데. 발 빠르고 말 많은 인간들 사이에 벌써 불유쾌한 낭설이 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라이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너는 기자가 그런 걸 믿냐.

 믿을 게 있고 안 믿을 게 있는 건 아는데 이런 건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전화를 한 번 더 돌린 뒤에야 로버트 허스턴이 자기 애인을 죽였다는 소문을 주워들었다. 얻은 건 쥐꼬리만 한데 열심히 달린 뒤처럼 입안이 달았다. 어쩌다, 일라이저 웨버. 이 꼬락서니냐. 그야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잭슨 엘리어스. 이 빌어먹을.

 

 내가 혼자 화를 삭이는 와중에 제이덕은 잭슨이 남긴 팜플렛에 적혀 있던 이름, 앤서니 콜즈 교수에게 연락했다. 이 뒤로는 그가 정리해준 내용을 옮긴다.

 앤서니 콜즈 교수는 호주 출신으로 뉴욕에 잠시 강연을 하러 들렀었고, 지금은 미스캐토닉 대학에 머무는 중이다. 그는 폴리네시아와 뉴질랜드를 중심으로 사교 집단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

 

 

콜즈 교수의 말

 

 

 

 콜즈 교수는 전화 통화로 사진 자료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7개월 이후에는 호주에서 있을 예정이니 그때 직접 사진 자료나, 일지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한다. 거대한 벽, 거대한 동굴이라……

 

 


 

 

 

 잭슨 엘리어스를 살해한 범인은 주주하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피투성이 혀 교단이다. 이들은 그믐달마다 사람을 납치한다. 입막음을 위해 살인을 벌인다. 경찰도 한패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누명을 쓰고 잡혀 있는 힐튼 애덤스를 구하려면, 진범의 증거를 잡아야 한다.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얻고, 그것을 믿을만한 사람에게 넘기고, 누군가 조작을 시도하기 전에 신문사 등을 이용해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터트린다. 그러려면 현장을 사진으로 남기던가 아니면 보다 확실한 증거품, 직접적인 자료를 찾아야 한다.

 믿을만한 사람이라. 경찰 중에서 믿을만한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고민 끝에, 잭슨의 사건 때 잠깐이나마 대화를 나누었던 마틴 풀 경위에게 연락했다. 경찰에게 협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뒤로는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할 수 있었다. 경찰 내부에 잭슨을 죽인 진범으로 추정되는 단체와 결탁한 세력이 있는 것 같다는 얘기에, 그는 아마도 롭슨 경감이 한 패일 것이라고 의견을 개진했다. 힐튼 애덤스에게 혐의를 씌워 잡아넣은 게 롭슨이고, 우리를 협박하러 왔던 젊은 경관도 그 밑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부패했다는 소문은 이미 공공연하다.

 풀 경위로부터 롭슨 경감을 통하지 않고 바로 위로 증거를 올릴 수 있게 힘써보겠노라는 약속을 받았다. 협조를 얻으니 그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는 주주하우스에 직접 진입해서 증거를 알아내는 일만 남았다. 그날 밤은 제법 애먹었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시선을 끌기도 했고, 잠시 물러났다 돌아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숨어있으려는데, 제이덕이 술에 취한 불량배들에게 시비가 붙어 지갑을 잃어버렸다.

 

 고생 끝에 주주하우스를 감시하고 얻은 정보:

 -백인 남자 둘이 두툼한 봉투를 품에 집어넣고 돌아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들 중 한 명은 분명 우리를 찾아왔던 경찰이었다.

 -사일러스 은콰네가 저녁에 식사라도 하러 나가는 건지 1시간 정도 가게를 비우는 것을 확인했다.

 

 

 잠긴 가게 문을 열어보려고 시도해보았으나 한계가 있었다. 전문적인 사람을 고용하기로 합의한 뒤에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내일 사일러스 은콰네가 같은 시간에 자리를 비운다면 그동안 내부를 뒤져볼 계획이다.

 

 

 

 

 

1925. 1. 21

 

 우리는 조심스럽게 주주하우스 안으로 들어가서 가게와 생활공간을 살펴보았다.

 침대 밑에 커다란 칼이 하나 놓여있었다. 볼로나이프와 비슷해 보이는 큼직한 날붙이. 시트 한쪽 구석에는 말라붙은 인간의 혀를 머금은 가면이 놓여있었다. 살인자들이 쓰고 있었던 가면과 닮았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이 말라붙은 혀가, 가게에서 볼 수 있었던 끔찍한 것들의 서막이었다.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가게 카운터 안쪽에서 장부를 챙겼다. 지출 항목에 일주일에 한 번 주기적으로 ‘경 14’라고 적힌 명세가 있다.

 카운터 바닥에 깔린 깔개를 들자, 자물쇠가 잠긴 문이 드러났다. 들고 다니던 작은 공구로 열어보려다 자물쇠 안에 공구 끄트머리가 끼인 채 부숴 먹었다. 쯧. 결국은 자물쇠를 뜯어낼 수밖에 없었다.

 

 열린 문 너머로 폭이 좁은 계단이 이어졌다. 계단 아래로 보이는 것은 역청처럼 어둡고 끈적한 암흑 그 자체였다.

 손전등을 켜고 긴 계단을 한참 내려가자 복도가 나왔다. 절대 일반적인 지하실이 아니었다. 돌로 된 낡은 벽에는 기호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흔들린 사진, 노트에 옮겨 그린 기호들) 우리는 곧 쇠로 된 모서리를 두른 나무문에 다달았다.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 방은 횃불이 걸려 있어 복도보다는 조금 밝은 편이었다. 그래도 어슴푸레하고 퀴퀴한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문에도 방에도 무언가 글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방 한쪽에는 부자연스럽게 커다랗고 둥그런 석판이 누워있고, 대형 윈치가 석판에 달려 있었다. 윈치는 석판을 조절하는 장치인 것 같았다. 셋이서 힘을 합쳐 매달리자 겨우겨우 석판의 틈이 벌어졌다.

 

 벌어진 틈 사이로부터 끔찍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저 먼 안쪽에서부터 무언가 움직이는 실루엣.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손전등을 아래로 비추자, 그 미약한 빛에 원통형의 거대한 벌레 비스름한 존재의 모습이 드러났다. 몸통에는 듬성듬성 사람의 얼굴이 붙어서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찢어지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구덩이 안에서 용솟음치려는 듯 그 육중한 몸을 비틀고 스스로 짓이기고 꿈틀거렸다. 우리는 아연실색해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피라미드 꼭대기의 틈새에서 봤던 것이 떠올랐다.

 노라는 그 자리에서 다시 기절했다. 제이덕이 쓰러지는 그를 받았다.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아래턱이 덜덜 떨려왔다. 어떤 악의, 어떤 욕망이 이런 괴물을 만들어낸 걸까? 대체 뭘 하는 놈들이길래. 이런 끔찍한 걸 뉴욕 한복판에 숨겨두고 있냔 말이다.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다가 이내 메마른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래서야. 무서워서 어디 땅을 디디고 살 수나 있겠나. 여기는 분명 저 먼 나라의 봉인된 피라미드가 아니라, 내 이웃의 지하실일 텐데. 세상에 도망칠 수 있는 곳, 안전한 곳이라고는, 없구나.

 (정신이 나갔던 건지 그것의 사진을 몇 장 찍어두었는데 인화하는 내내 암실이 조금 더 추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착각한 게 아니라면, 그것이 내지르는 비명이 점점 커지는 것처럼 들렸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는 온갖 용을 써서 석판을 다시 닫았다.

 방에는 석판 외에도 피가 묻은 화물 상자, 의식용으로 보이는 아프리카 북 같은 것이 놓여있었다. 또 한쪽 벽면에 커튼으로 가려진 공간이 보였다. 나는 홀린 듯 커튼을 걷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직사각형 공간의 네 구석에 사람이 서 있었다. 모두 배가 열려서는, 이마에는 문양이 새겨진 채다. 마치 되돌아온 잭슨 엘리어스의 악몽 같았다. 아. 커튼이 열리자마자, 이들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피가 흐르는 귓가를 대충 압박하며 다시 커튼 안쪽을 살폈다. 늘어선 선반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먼저 가면. 은콰네의 방에 있던 것보다 훨씬 관리 상태가 좋은, 말라붙은 인간의 혀가 붙은 가면이었다. 화려한 로브, 사자 발톱 장갑, 책 한 권(<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 잭슨이 미스캐토닉 대학에서 찾던 그것이다). 희한하게 생긴 나무 조각 가면(사람 얼굴 네 개 정도가 붙어 있는 모양). 광택이 나는 구리 그릇. 긴 의식용 홀. 회색 금속으로 된 머리띠. 항해용 크로노미터. 잠겨있는 소형 금고.

 금고를 공구로 비틀어서 억지로 열었다. 내가 찾던 ‘정확한 증거’들이 여기 있었다. 살인자들은 무슨 끔찍한 악취미인지 피해자들의 물건을 수집했다. 그 물건 중에는 램지 씨에게 받았던 엘리어스의 단서 ‘원본’들도 있었다. 그리고 배들이 찍힌 묘한 사진 한 장도.

 

 

발견된 사진

 

 

 금고에 들어있었던 것은 전부, 밖의 물건 중에서는 몇 가지 들고 다닐 만큼만 챙겨서 가방에 넣고 빠져나왔다. 바닥에는 아까까지 살아 움직이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고, 내 어린 동료들은 벽에 기대, 비슷하게 피투성이인 모습으로 겨우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렇게 가엾은 꼴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세상일이 결코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곧장 램지의 변호사 사무실로 갔다. 거기에다 두 환자를 맡겨놓고, 나는 정신없는 밤을 보냈다. 찍어둔 사진 인화를 끝내자마자 풀 경위를 만났다. 사진과 장부, 금고 속 증거품을 모조리 보여주며 그에게 지하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물론 절대 믿어주지 않을 부분들은 제외하고.

 우리가 싸웠던 사진 속 시체들도 모두 실종자들로 확인되었다. 풀 경위는 증거품과 사진들을 받아서 돌아갔다. 그는 오늘 밤 내에 급습 작전을 실행할 것이라고 했다.

 풀 경위와 대화가 끝나자마자 레베카 쇼젠버그에게 연락했다. 나는 그와 협의하여 밤새 기사를 작성했다.

 

 내가 기사를 쓰는 사이, 주주하우스에서 들고나온 책을 제이덕이 읽었다. 그에게 이 책을 보여주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거기 파묻혀서는 나오려고 들질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그 책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이후 따로 부탁해서 요약본을 받을 수는 있었다.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 나이젤 블랙웰. 저자의 신원은 모호하고 출판사도 따로 적혀 있지 않다. 푸른색 합지 표지. 탐험가 나이젤 블랙웰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작성하였다. 각종 아프리카 종교 제의에 대한 설명. 끔찍하고 적나라한 묘사. 죽은 사람을 부리는 주문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뉴욕의 일들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 적어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풀 경위는 사일러스 은콰네를 체포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압수했다. 사교 집단의 잔악무도한 범죄와 경찰과의 유착 관계에 대한 폭로 기사가 1면에 실렸다. 힐튼 애덤스의 누명이 벗겨졌다는 것이 가장 다행스럽다.

 

 여기까지가 공적인 소식이고, 풀 경위에게 따로 들은 바로는 이렇다:

 당일의 출동에서 사일러스 은콰네는 체포가 되었고, 실종자들의 시체를 확인했다. 그러나 별다른 물건은 남아있지 않았다. 거대한 석판 안쪽도 비어있었다(어째서?). 은콰네는 그간의 연쇄살인과 실종사건의 범인으로서 응당한 처분을 받게 될 것이다.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입을 열지 않는다고 하지만.

 애덤스 부부는 감동의 재회를 했다. 레베카 쇼젠버그를 통해 그들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뉴욕을 떠나기 전에 한 번은 찾아가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을 돕는 것은 본성이다. 그들의 모습은 나의 오랜 믿음에 확신을 준다. 

 

 

 

 잭슨 엘리어스가 온 세상을 돌아다녔던 것은 죽음 숭배 교단이 전 세계에 퍼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뉴욕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고민 끝에, 칼라일 탐사대의 족적을 밟아 영국으로 향하기로 했다.

 

 영국행 배에 오르기 전, 노라의 입원 기간을 더해 총 3주의 준비 기간을 가졌다.

 제이덕은 여전히 미친 사람처럼 그 책에 푹 빠져있다. 집에 돌아가기로 약속해놓고 연락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인에게 전화가 와서 그를 바꿔주었는데 제대로 대화를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뭐라 몇 마디 하려다가 삼켰다. 그는 자기가 직접 이룬 가족이 있는 사람이고 그것은 내가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는 바다. 무슨 기분일지, 제대로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내가 무슨 권리로. 내가 뭐라고.

 노라는 제일 크게 다쳐서 2주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상처가 안심할 수 있을 만큼 아물자, 나는 출발 전에 집에 다녀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참에 노라가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서 좀 쉬다가, 마음이 바뀌었으니 아예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전보를 부쳐줘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혹시 후회하거나… 생각이 날까 봐 그래.

 생각은 항상 나는걸요.

 

  

  나는 그래도 몸이 성하니 그날 얻은 물건들에 대해 조사하며 돌아다녔다.

 

 -금고에서 발견한 사진은 상하이의 황푸강에서 찍힌 것으로 보인다.

 -크로노미터는 뉴욕보다 네 시간 빠른 영국 그리니치 표준시에 맞춰져 있다.

 -머리띠는 금속 재질인데 만지면 조금 따뜻하다. 긁어서 새긴 상형문자가 있다. 내가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 많지 않아 제이덕에게 연구를 부탁했다. 

 -나무 가면은 갈대와 깃털 천을 바구니처럼 엮어서 짠 목 부분 위로 끔찍한 얼굴 넷이 조각되어있다. 콩고 유물. 뉴욕대 식물학 교수를 찾아가서 재질을 알아보았는데, 이 수목은 지구상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고 한다. 

 -구리 그릇에 새겨진 기호의 의미는 불명이다. 역시나 제이덕에게 맡겼다.

 

 

 그러면서도 남는 시간은 지금까지 얻은 정보들을 정리하고, 경제적인 문제들을 처리하고, 비자를 확인하고 출발 계획을 짜는 데에 썼다. 아, 변호사도 바꾸고. 내 유언장도 조금 수정해서 램지 씨에게 맡겨뒀다.

 

 

 문득 병원에 있는 노라가 회계에 욕심을 부리던 것이 기억이 나, 어렵지 않은 몇 가지 일을 남겨놨다. 잔소리라도 하게 만들까 하면서 고를 수 있는 가장 못생긴 옷가지를 골라두는데, 그러는 스스로가 몹시 바보처럼 느껴졌다. 젠장, 제대로 위로하는 법 같은 건 모른다. 윌리엄이라면 이럴 때…

 

 윌리엄.

 우습다. 이제 와 가족 생각이 난다는 게. 나는 멈춰 있는 게 싫었다. 단단한 새 구두 밑창을 내버려두고 눌러앉는 것도, 쫓아야 할 세상이 저 바깥에 있는데 그게 보이지 않는 양 커튼을 치는 것도, 파도가 되지 않고 호수가 되려는 것도. 멈춘 세상은 분명 죽은 세상이다. 어떤 사람은 그냥 나서부터 이런 삶을 산다. 나의 길은 방향과 목적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림자는 한 방향으로만 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길이 나를 불렀다. 늘, 그랬다.

 이 애들은 이제서야 이런 삶에 뛰어들었는지 몰라도 나는 쭉 이렇게 살아왔다. 그러니까 제발 그러지 마,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말이 자꾸만 혀끝에서 맴도는 것이다. 그 지독함을 이미 알기 때문에. 한때 소중했던 것들이 이젠 내가 말하지 못하는 것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별것 아닌 듯 보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내 발목을 잡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기분. 끝에는 객사밖에 기다리지 않는 삶에, 사랑할 도리 외엔 없는 사람들이 가지는 나약하고도 가없는 의미. 오늘이 후회될 때 후회해. 인사할걸. 만나러 갈걸. 딱 한 번만 더 얼굴을 볼걸. 후회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지고, 바스러지고 굳어져서 이상하게 발을 걸친 바보만큼은 되지 마. 객지에 생길 무덤은 이름조차 남지 않는 편이 좋은 거다. 다 알고 있으면서.

 족쇄다. 걸음을 늦추는. 뒤돌아보게 하는. 나는 벌써 이만치 나왔는데. 이렇게나 멀리.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데.

 

 

 형.

 엘리. 뭐 하고 지내?

….

 왜 전화했어. 엘리. 너 무슨 일 있구나.

 ….

뛰었니? 숨소리가.

 나 또 배 타려고. 이번엔 오래 걸릴 거야. 

네 여정을 위해 기도하마. 너는 이런 말을 싫어했지만.

그래도 할 거잖아.

그래.

 

형. 

다음에… 봐. 내가, 돌아가면.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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