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윈. 내 어머니. 나는 실험을 하나 해보려고 해요.
이 편지가 닿았을 때 나는 당신이 기대하는 내 자리에 있지 않을 겁니다. 엠페도클레스는 신이 되기 위하여 에트나 화산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시인 횔덜린은 그 죽음을 가지고 긴 비극론을 적어 내렸습니다. 평소답지 않은 감상에 젖은 당신의 아들은 엠페도클레스의 숭고한 행위를 피의 의식에 참여하는 것에, 신성한 불을 이고 지고 태양에 뛰어드는 것에 빗대고자 합니다. 
압니다. 인간 아버지께서 구축하신 제 신실한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미스라스를 향한 제 신앙심이 저희 교단을 이루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축이 아니라는 걸 당신도 질릴 만큼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리하여 어쩌면 마땅한 의심을 하시겠지요. 
타고난 경멸과 회의로 가득 찬 제 가슴을 당신보다 더 잘 이해하는 혈족이 생전이고 생후고 있었을까요? 당신 앞에서 저는 늘 솔직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의식 자체가 가진 의미보다는 그것의 형태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의식을 통해 나는 나보다 더 나은 것, 무언가 느낄 심장이 있고 무언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내 사랑의 대상이 나를 태워죽일 태양이라고 하더라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시간은 인간보다는 우리에게 조금 덜 파괴적이지만 여전히 절대적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의 풍파에 깎이면서 변질되는 것이 존재의 필연적 비극이라면, 수많은 나이 든 혈족처럼 자발적으로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은 끝에 썩은 돌덩이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는 것도 불가피한 비극입니다. 굳이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저는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쪽이, 새로운 세상에 끊임없이 적응하는 쪽이 훨씬 즐거운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차츰, 저 같은 젊은 혈족조차 지치는 때가 왔습니다.
그래요. 나는 어느 순간 깨달아 버린 것입니다. 새로이 열릴 세상에도, 새로운 시대의 런던에도 결코 내 자리는 없으리라는 사실을.
다른 자들과 섞인다는 것은 내가 무언가 더 거대한 것의 일부가 된다는 뜻이겠지요. 술에 물을 부어 그것을 완전한 물로 뒤바꾸는데 과연 얼마큼의 물이 필요할까요? 어느 시점에서부터 우리는 그것을 포도주가 아닌 물이라고 부르게 될까요? 불임과 불생산이야말로 제가 혈족이 인간보다 생물계에서 더 낮은 존재라고 판단한 근거였습니다만―네, 이러한 제 견해가 여러 혈족에게 불쾌감을 드렸음은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피를 뒤섞어 만든 새로운 ‘정신’은 어떤 형태일까요? 
우리는 지금의 우리보다 더 나은 것을 낳을 수 있을까요?
예, 심오한 말장난이지요. 이것은 제가 평소에 골몰하던 실증적인 실험이 아닙니다. 제 궁금증과 호기심에 불을 붙인 것은 그들이 나의 영혼에 불러일으키고 말 형이상학적인 침투입니다. 자아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는 저 같은 직업의 사람보다 더 능한 자들이 있으니 저는 제가 공부해 온 시인과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 제 행위를 길게 변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게는 당신의 축복이 꼭 필요합니다. 제 결심이 약하고 쉬이 흔들려서가 아니라, 그것이 제게 언제나 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인사를 남기며.
런던에서.

1941년 2월 12일, 
당신의 아들 파록 하자리.


*
2012년.



‘실패했군.’

처음 그웬리언 패치 아윈의 말을 들었을 때 파록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랬다.
내 것이 아님에도 마치 내 것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던 과거의 회상들. 이미지들. 그것들의 의미가 명료해지면서 파록은 뒤죽박죽인 머릿속의 궁전을 나와 나 아닌 것으로 정리하는 작업에 차갑게 착수했다. 
그의 분류 기준은 단순했다. 강렬한 감정. 일상의 작은 파편에 가슴이 떨리고 뜨겁게 눈물을 흘리고 연인을 사랑하고 입 맞추는 것은 그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신경회로가 병적이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병적인 뇌 탓에 그는 그런 것들을 결코 느낄 수 없었으므로…… 파록은 너무나 쉽게 분리되어 버린 나와 나 아닌 것들을 조망하며, 차갑게 실패를 곱씹었다. 
이로써 분명해졌다. 이 ‘머리’에 갇힌 이상, 필연적으로 파록이 되고자 하는 자신은 될 수 없었다. 그는 반쯤 독이 서린 자조를 중얼거렸다. 피의 의식이여, 미스라스여, 당신의 불량한 그릇을 받으소서. 반품은 불가하나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이야말로 육신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죽고 나서도 끊임없이 자기 육신에 천착한 나와 나의 동족들은― 결코 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나는 다른 모든 것을 떠나 결국은 이 몸에 남은 미련일까? 그가 배운 지오반니―이제는 헤카타라 불러야겠지― 제의에서는 남의 영혼을 제 몸에 덧씌우는 영혼 숙주의 의식이 있어, 과거의 파록은 그 배움의 끝에 어쩌면 또 다른 자신이 태어나는 것도 가능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영혼은 결국 자신이 자란 그릇을 닮는구나. 나는 내 바깥에서 온 것들로 억지로 나를 만들 수는 없었던 거다…… 결국 오직 내 안에 있는 것들만이 나를 이룰 수 있었던 거다. 파록은 가장 끔찍한 생각을 한 소년처럼 비밀스럽고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여기 있는 자들은, 미스라스를 숭앙하고 또 흠모했을 수많은 영혼의 파편이었다.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인간과 의식을 너무나 탐하던 혈족과 사랑을 아는 고대인과 섬세한 중세인까지, 심지어는 나까지 수많은 부서진 것들의 종합으로서 내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니었다. 타인이었다. 그들은 파록 하자리와 너무 달랐다…… 그들, 내 몸에 선 자들 곁에서조차 파록 하자리가 있을 자리는 없었다.

‘아, 태양.’

너희 중 누구도 결코 태양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나를 살게 하던 것이 나를 죽이는, 새로운 시체살이의 법칙을 파록은 누구보다 빨리 받아들였다. 파록은 냉정하게 따지자면 고작해야 하늘에 떠 있는 불덩이에 그리 미련을 두지 않았다. 인간은 전기를 발견했고 금세 해를 잊어버렸는데 오직 미몽과 감상에 찬 혈족들만이 새삼스레 해를 그리워했다. 살아 있으면 관심도 두지 않았을 무정물 따위를 말이다.
그러나 기억 속의 그는 해를 올려다보며 뜨거운 감동을 느꼈다.

그렇다면 그건 내가 아니야.

그 모든 삶 속에서.
파록은 누구보다 차분하게 최악의 자신을 선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은 나 자신이었다.


*


“실험을 해보자.”

루이즈 퐁소가 제안한 것은 섹스를 통해서 새로이 결속, 피의 결속과 같으면서도 조금 다른 ‘연결’을 이룬다는 기묘한 의식이었다. 루이즈도 이번에 처음 익힌 것이었고,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실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파록 하자리는 차갑게 절망해 있었고, 절망한 사람이 그렇듯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내심, 하필이면 섹스라니 하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최소한 섹스를 할 줄은 알았다.
그는 부드럽게 손깍지를 끼며 물었다.

“제가 이 의식의 어느 부분에 집중하면 될까요?”
“내게 집중해.”

파록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


그는 머릿속이 헤집어지고 재조립되는 감각에 토했다.
더는 분비되지 않는 위산 대신 붉은 액체가 침대 시트를 적셨다. 그는 부끄러움에 젖기도 전에 제 배 속을 뒤집어 놓는 이 감각의 정체를 알 수 없어서 공포에 젖어버렸다. 무서웠다. 너무 무서웠다. 더 이상 지속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한평생 귀가 멀었다가 갑작스레 세상의 소리에 직면하게 된 어린아이처럼 겁에 질려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모든 것이 너무 과했고 지나쳤고 혈관은 터질 것 같고 머릿속에서 새빨간 비상벨이 울렸다. 

“기분… 기분이 이상해요. 이제 그만…….”

그가 눈가를 적신 채 비척비척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의식은 계속되고 있었다. 심지어는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루이즈는 어린애를 달래듯 그의 입가를 닦아주고 토닥이고 그를 재차 눕혔다.
젤로 젖은 딜도가 배 속으로 파고들었을 때, 파록은 서늘한 이물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회의적이었다. 이미 뒤집힌 배 속을 물리적으로 재차 헤집는다고 무언가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듯 처음에는 의미를 모르겠는 교합이었으나, 말을 잘 듣는 소년처럼 그녀가 시키는 대로 상대에게 집중하자 서서히 새로운 의미와 감각이 피어났다. 눈을 감으면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진정이 되는 듯했으나, 동시에 배 속을 파헤쳐지는 감각이 너무 생생해졌다. 시각 정보를 차단하니 이제는 몸 전체가 합심하여 그녀를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는 아무리 그만두려고 해도 이 순간을 멈출 수가 없었다.
파록 하자리는 늘 침범하는 쪽이었다. 메스를 들고 배를 가르는 쪽이었고 타인의 집 문을 소리 없이 열고 들어가는 쪽이었다. 송곳니를 박아 넣고 주삿바늘을 찔러넣는 쪽이었다. 그래서 타인의 침입은 낯설고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혈족의 존재는 또 어떠한가? 이 세상에 그것만큼 부자연스러운 게 더 있을까?
그의 죽은 뇌를 어루만지며 말 그대로 곤죽으로 만들고 있는 새로운 침입의 감각에 비하면 섹스는 부차적이었다. 얼핏 덧없기까지 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맨 앞에 존재하는 것, 도망을 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었다. 이 현상은 명명백백하게 섹스를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것은 체험 지식이었다. 그의 몸이야말로 지금 쾌락과 쾌락으로 말미암은 현상의 증거였다.
구토감의 끄트머리에서, 파록은 애착을 느꼈다― 말도 안 돼― 그는 70년 만에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놀라며, 애착을 느꼈다. 그것은 잔뜩 물러서 썩어가는 과일처럼 너무나 징그럽고, 농후하고, 달착지근하고, 사랑스럽고, 역겨웠다.
그의 모든 혼란은 그녀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녀를 물고 싶었다. 배를 갈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었다. 한입에 살점을 삼켜서 꼭꼭 씹어 피를 맛보고 그 안에 담긴 모든 비밀을 보고 싶었다. 그런 충동이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자 그는 유독한 이빨을 그녀의 살갗 근처에서 달싹거렸다. 어린 짐승 같은 행동이었으나 헤카타의 저주가 깃든 송곳니는 귀엽게 봐줄 수 없을 만큼 위험했다. 
루이즈는 재빠른 판단하에 그에게 재갈을 물렸다. 가여운 천 쪼가리가 그녀의 살갗 대신 갉히며 그의 신음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무정물을 매개로 깊게 진입할 때마다 길고 창백한 유령 같은 몸이 흔들리고 목구멍 안쪽에서 파묻힌 웅얼거림, 낮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기분 좋아.’

그랬다, 기분이 좋다는 것,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다.
직통으로 뇌를 범하는 듯한 감각에 머릿속이 달콤하게 뭉그러졌다. 흐물흐물하게 곤죽이 되어 녹아내렸다…….
기분, 좋았다. 이제는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상관없다고 느껴질 만큼.
파록은 자신이 느끼는 감각이 무슨 의미인지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탐닉했다.


*


다음 날 밤. 눈을 뜨며, 파록은 제발 그 낯선 감각이 사라졌기를 바랐다. 
그러나 멀미를 닮은 울렁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죽어서 텅텅 빈 지 오래된 내장에 썩고 짓무른 과일들이 들어찬 상상을 하자 또 속이 쓰렸다. 거의 도피와도 같이, 파록은 침대에 누운 루이즈 퐁소의 죽은 살을 만져보았다. 
고세대인 그녀는 그보다 훨씬 늦게 깨어났다. 그는 잠들어 있는 남을 바라보고 있었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건 그저 먹이를 먹기 위해서였지 함께 침대에서 일어난 상대를 바라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그는 눈을 뜨자마자 침대를 떠나 제 몸에 진득하게 들러붙은 피, 아직도 멎지 않은 이마의 상처 때문에라도 살갗이 벗겨질 때까지 씻어야 했다. 그러나 새롭게 꽃핀 감각은 그의 가장 오래된 습관마저 멈춰 세웠다.
그는 이 감각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 가장 세척이 필요한 건 그의 머릿속이었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구토감이 일었다. 뱃속이 뒤집혔다. 어떻게든, 무슨 짓이든 하고 싶었다. 그는 제 배 속 깊은 곳의 충동을 따라 움직여 보았다. 썩은 과일들이 여기저기 제멋대로 굴러가게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그의 손은 차가운 허벅지를 따라 안으로, 안으로 움직였다. 어제 몇 번이고 제 성기를 찔러넣었던 음부까지 매끄럽게 손이 이어갔다. 그녀의 음핵 위를 지분거리던 근육 기억이 아직 남아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아무런 감정 없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지금은…… 자신에게 추잡한 의도가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았다. 그녀가 눈을 뜨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맞추었다. 무슨 연인이라도 되는 양 부드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은 밤이에요, 루이즈.”

루이즈 퐁소는 약하다. 세상에나, 약해빠졌다. 그렇지만 이제 그에게 그런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제는 그녀의 흉내가, 괴물이면서 여전히 괴물이지 못한 면이, 괴물이 아님에 집착하는 면이 사랑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정확히 똑같은 이유로 그는 어제까지 그녀를 점수 매기고 깎아내렸는데 지금은 그 똑같은 면까지 말도 안 되게 사랑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드러난 젖가슴과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존재하지도 않던 인내심은 어느새 바닥났다. 허락을 제대로 받지 않고, 그는 반쯤 구명줄이라도 잡는 기분으로 벌린 다리 사이에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조금 당황스러워하던 눈치를 빠르게 갈무리하고서, 그녀가 느릿하게 그의 목을 둘러 안았다. 안을 가득 채우자 충만감이 다시금 머릿속을 뒤엎었다.


루이즈가 말했다.

“가짜야.”

그것은 기다란 약관 밑에 촘촘하게 쓰인 작은 글씨의 경고문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진짜’를 느껴본 적 없는 파록 하자리에게 그 말은 너무 피상적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그의 뇌와 신경을 아무리 쥐어짠다 해도, 거기에는 가짜와 진짜를 구분해서 즐길 만큼의 기능이 없었다. 그는 그저 느껴진다는 사실만으로 그 순간 반쯤 미쳐버렸다…… 애호의 감각은 피의 맛으로나마 느끼던 간접적인 애착보다 더욱 선명하고 뚜렷하게 뱃속을 찔렀다. 그것은― 정말로― 말 그대로 관통당하는 기분이었다.

“오, 루이즈. 세상에 가짜 감정 같은 건 없어요…… 뇌의 수용체는 가짜 감정과 진짜 감정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렇게 정교하게 작동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뇌의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몸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잖습니까?”
“영혼을 부정하는 지오반니는 처음 보는데.”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영혼도 어디까지나 몸을 기반으로…….”

당신도 그렇게 믿고 있지 않은가요? 그렇게 해서 한심할 정도로 연약하고 물렁물렁한 자아를 붙잡고 있지 않나요?
그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녀는 전혀 넘어오지 않았다. 무언가 그가 모르는 대단한 것을 안에 품고 있는 듯한 아몬드 모양의 눈…… 파록은 그것이 늘 궁금하면서도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여자들은 언제나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저는 당신을 설득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물리적인 걸음은 바짝 가까워졌다.
그가 빙글 돌아 천천히 그녀의 등 뒤에 섰다. 손이 양어깨에 걸치더니, 뒤이어 절지동물의 사지처럼 길쭉한 손가락이 봉긋한 가슴 위로 느른하게 기어갔다.

“…….”
“그저 당신 안에 들어가고 싶어요. 당신이 내 안에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녀의 배를 가르고 두개골을 갈라서 그 안에 든 신비를 파헤칠 수만 있다면 파록은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의 무자비함은 피아를 가리지 않아서 단순히 자아를 찾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가능하기만 했더라면 부분 마취를 놓고 원격으로 메스를 움직이며 마지막 이성이 해체될 때까지 자신을 해체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답은 명료했다. 그렇게 해도 남는 것은 피와 고깃덩어리뿐이다…… ‘나’는 신경과 신경이 손을 잡고 만나 이루는 반짝임, 무수히 작은 전기자극 속에서 발산하는 파편 같은 생각에 있다…… 아니, 실은 그곳에조차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진짜 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는 눈이라는 창에 주목했다. 그녀의 눈이라는 작은 창에 비치는 자기의 형상을 노려보며 그 어딘가에서 자신을 잡아보려고 했다. 그것은 때로는 흐릿하고 때로는 뚜렷했다. 그는 지금 당장 그것을 볼 수 있으면 족했다. 
애호의 감각은 그의 다른 모든 생각을 마비시켰다. ECT처럼 그를 긴급히 구조하고 전부 멈춰주었다. 그는 그녀도 그렇게 느낄 것이리라, 그런 식으로 자신을 이용하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가설 수 있었다.
그는 허벅지에 손을 얹고 더듬고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뒤이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신음으로 귓가가 먹먹했다. 새로운 안식처에 지문을 찍듯, 무슨 발정한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그는 어디서든 가리지 않고 해댔다. 그 행위에는 더는 결속을 공고히 한다는 목적의식은 남아 있지 않았다. 
파록은 자기 안을 비집고 터져 나오려고 하는 이 이상한 애호의 기분을 참을 수 없었고, 참아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코테리의 혈족들이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있는 찰나에, 그들이 누덕누덕 기워진 정신을 언제 꿰맞춰 돌아올지도 모르는 이때, 할 일도 없이, 빌어먹을 미스라스도 없이, 하고 싶은 짓이라고는 진득하게 몸을 맞추는 것뿐이었다. 섹스는 타인과의 연결이었고 순식간에 나 자신을 잊는 일이면서 동시에 몸으로서의 나 자신을 뼈아프게 자각하는 일이기도 했다. 파록은 위생 관념을 포함하여 지금껏 자신을 이루던 모든 강박을 잊고 그것이 주는 기이한 매력에 몰두했다. 더욱 솔직하게 말하자면 꼭 섹스가 아니어도 됐다. 뱃속을 헝클다 못해 터져나올 것 같은 기이한 정열을 달래기 위해서라면, 그녀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라면 다른 무슨 행위라도 상관없었다, 매일 아침 제 배를 가르고 축축한 창자를 그 입에 쑤셔넣어야 한대도 그는 서슴없이 몸을 내주었을 것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반쯤 미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에 아무런 이질감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세상의 기준으로 바라보자면 그는 이미 죽기 전부터 망가진 비정상자였고 인간 흉내나 내는 가짜 인간이었으며 태어났을 때부터 뇌병신이었다. 파록은 비죽 웃으며 그녀의 척추뼈에 입을 맞추었다. 단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적어도 지금 그는 빌어먹게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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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량일취몽/시날스포有] 落葉歸根  (0) 2021.03.15

-컥, 흐윽.

빗장뼈 위로 목이 졸렸다. 창백한 손이 호흡기를 꽉 짓누르자 숨이 턱 막혔다. 희열에 찬, 저주로 지은 성 같은 여자의 얼굴.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물거품이 흘렀다. 아무리 붙잡은 손을 잡아 뜯으려 애써도 몸은 자꾸만 가라앉았다. 모든 것이 어두운 회색으로 침잠하는 가운데 조금만 눈 돌리면 희게 죽은 시마의 눈동자가 보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너머에 있는데. 아직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왜 멈춰 있나. 구해야 하는데. 구하러…….
점차 의식이 흐려지면서도, 눈꺼풀 위로 낙인찍힌 광경을 수백 번 되새겼다. 
나는 왜 그때 죽지 못했을까?
왜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을까?


*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이나흐는 헉, 숨을 들이켜며 깨어났다.
침대 넘어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그림자가 보였다. 작은 조각도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시마가 촛불도 켜지 않고 벽난로 불빛에 의지해 굳은살 박인 손으로 나무 조각을 다듬고 있었다. 시마의 유일한 취미는 그렇게 나뭇조각을 다듬어 자그마한 동물로 탈바꿈시키는 일이었다. 좁은 집의 선반에는 그렇게 만든 작은 조각품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잘 기억이 안 나요.”

하지만 이미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이나흐는 다시 눈을 꼭 감았지만, 찝찝한 기분에 곧장 다시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러자 어느새 시마가 조각을 내려놓고 다가온 모양이었다. 생생한 톱밥 냄새가 나는 손이 이마를 만졌다. 열 오른 이마에 비해 손길이 조금쯤 서늘했다.

“다시 자거라.”

그 낮고 고요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


시마 갈레온은 배를 타는 군인이었다. 솔트마쉬 출신은 아니고, 이 작은 해안가 마을이 앓고 있는 고질적인 해적 문제로 네버윈터 쪽에서부터 파병 온 부대의 일원이었다. 그렇게 눌러앉은 지도 꽤 오래되었고, 차가운 바닷바람이 어울리는 사람이어서 배타적인 해안가 마을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럭저럭 지냈다.
시마는 소년이 파도 너머에서 밀려왔다고 했다. 이나흐는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었으니 간단하게 그 말을 믿기만 하면 되었다. 처음에는 서먹하던 제 이름도 성씨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입에 붙었다. 이나흐 갈레온은 그렇게 이나흐 갈레온이 되었다.
시마는 원체 말이 별로 없었다. 제 출신에 관해서도 많이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소년은 필연적으로 많은 부분을 상상으로 채워나갔다. 군인이 되어 나무를 깎고 무기를 만지는 한 여자의 삶을 그려보았다. 당장에 눈앞에 드러나는 것 말고, 그 바깥 언저리와 가장자리를 더듬어 모양을 톺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여간해서 잘되지 않았다. 이나흐에게 시마는 언제나 보이는 그대로 시마였고, 그 이전도 이후도 존재하지 않는, 말하자면 돌이나 나무처럼 그 자리에서 이대로 영원할 사람 같았다.

팔만 쓰지 말고 몸 전체를 써라. 발에 더 무게를 싣고.
거리를 내주면 불리해. 자, 이렇게.
너는 두 번 휘두르고 나면 오른쪽이 늘 비어.

그럴 때의 시마는 어찌나 단호한지,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일 때까지 무기를 휘두르다 보면 땀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대자로 드러눕기 일쑤였다. 
그렇게 한참을 훈련시켜놓고는 또 하는 말이,

“너는 커서 하고 싶은 걸 해. 책이라도 좀 보던가.”

이런 식이었다.
이나흐는 아무런 의심 없이 시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하지만 서가에 있는 책들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불평을 들은 시마가 엘리안더 씨의 도서관에서 다른 종류로 몇 권 빌려다 준 적도 있었지만, 이쪽에도 이나흐가 썩 흥미를 보이지 않자 곧 그만두었다.
너는 학자를 할 팔자는 아니구나. 내 자식이 맞나 보다.
그 말이 우습기도 하고 어딘가 기분 좋기도 해서 이나흐는 소리내어 하하 웃었다. 그래, 난 시마의 자식이 맞아요.
어지러운 바닷가 마을에는 다양한 삶이 있었다. 이나흐 갈레온은 그 어드메에 낀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어부들의 반질반질 땀에 젖은 어깨나 선원들의 힘찬 구령 소리, 호각 소리.  꼬맹이라고 놀렸다가 크게 혼쭐이 난 뒤로 늘 공손한 인사를 빼먹지 않은 마을의 작은 어부에게 물질에 대해 이것저것 배울 수도 있었다. 장사 쪽은 아무런 재주가 없으니 쳐다도 안 봤고. 그렇다고 마실러 씨는 무슨 일을 하는 거냐고 물으면, 시마는 늘 말끝을 애매하게 흐렸다.
이나흐는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도 곧 그만뒀다.

“하지만 나는 역시 시마처럼 되고 싶어요.”

그러면 그 무뚝뚝한 얼굴에 곤란해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이나흐가 대놓고 시마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군인은 위험해. 다른 일도 많아.”
“시마도 하잖아요.”

그렇게 말려도, 이나흐가 고집을 부리면 결국은 그 무뚝뚝한 눈썹이 한 꺼풀 누그러지며 물러났다.

“사람들을 지키는 게 내 일이야. 너도 포함해서.”
“그건 내가 시마의 가족이라서요?”
“아니야, 이나흐.”

단호한 대답에 그가 일순 시무룩한 얼굴이 되자, 시마가 한발 늦게 덧붙였다.

“내 말은, 네가 내 가족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시마는 말을 끌과 정으로 다듬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발음했다.

“나는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킬 의무가 있어.”
“왜요? 시마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그게 내 일이라서.”

이나흐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동어반복이잖아요.”

시마는 무뚝뚝한 사람이어서 원체 설명을 잘 못했다. 어쩌면 남과 사는 게 익숙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속 안에 든 것을 꺼내기 위해 시간이 많이 필요했고, 이나흐는 한 사람의 안에서 말이 단조 되는 과정을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는 시간을 좋아했다. 시마가 제 질문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 느낄 수 있었고, 시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특유의 그 진지한 태도가 좋았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모든 시간이 덧없고 소중했다.


*


창이 무참하게 몸을 뚫고, 눈앞에서 쓰러지는 죠바니오 마실러를 본 순간, 새하얗게 죽은 눈이 시야에 겹치고, 세상이 새빨간 덩어리로 뭉쳤고, 지진이 난 것처럼 눈앞이 흔들렸다. 이후로는 무슨 정신으로 싸웠는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제대로 된 판단이라고는 하나도 내릴 수가 없었다. 몽롱하게 지쳐서 한 걸음 걷기도 힘들고, 팔이 천근만근 무거운 순간에. 이대로 전부 꿈이었으면 했던 시간이, 몇 날 며칠이 지난 것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흘러 겨우 그의 숨이 돌아왔을 때, 맥이 탁 풀릴 만큼 안도감이 들은 것과 동시에, 
이나흐 갈레온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되살아난 게 죠바니오가 아니라 시마였다면 좋았을 텐데.
죽은 지 백 년은 지난 드레이크마저 언데드가 되어서라도 돌아오는데, 당신은 이 세상에 아쉬운 것 한 점 없으니, 내게 돌아올 생각도 안 하겠지…….
그리고 직후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너무 부끄러운 미망(迷妄)이어서 차마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무슨 자격으로 기회를 바란단 말인가? 그날 이후로 자신은 살아 있으면 안 되는 거였다. 매일이 비명이었고 하루하루가 빌려온 시간이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돼. 내가 막아야 해. 나는 그러기 위해서 살아남은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단 한 순간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죽지 않은 거다. 책임을 버리고 나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들지 않은 거다. 반쪽짜리 스네이크 아이 시그가 뇌수를 흘리며 뒤쫓을 때, 로제 플로렌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며 괴롭힐 때, 이나흐 갈레온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흡사 주문이라도 외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빌어먹을 것들.
나는 후회하지 않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단 말이다.
나는 후회하지…….

시마는 후회하지 않을까?

'나는 결국 당신 같은 사람은 못 되는 거였어요.'

뿌리부터 썩어빠진 것을 주워다가, 그만치 긴 시간을 들여 갖은 용을 써서, 고작해야 나로. 나로 길러낸 게 후회되지 않을까?


*


다시 만난 창백하고 흰 눈동자는 익사자와 같은 색이었다. 

[네 적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냐?]

귀 있는 신들이 들었다. (그래서 당신도 들었다는 건가? 빌어먹을 바다 같으니라고.)
이나흐 갈레온은 선택을 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무슨 선택을 했건 후회했을 것이다. 알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료를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소중한 동료니까. 비밀을 털어놓을 만큼 가까워졌으니까. 그만큼 소중해졌으니까. 
그것을 후회한다. 아무런 죄도 없는, 순박한 알스턴을 미워할 수는 없다. 그는 대단한 사람이다, 마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아니 이런 변명하지 않아도 이나흐 갈레온에게 중요한 사람이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수상한 티플링도, 먼 바닷속에서 온 엘프도 마찬가지다. 만약에라도 오늘은 두 번째의 죽음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약하기 때문에, 약해서. 그저 내 마음의 문제다. 내 마음이 기울었다. 내 마음이 증오와 애호를 한데 품지 못하고 약해진다. 이나흐 갈레온은 자신이 혐오스러워 더는 참고 견디지 못한다. 당신들이 나를 약하게 만들어.

“일단, 살고 보자고.”

내가 그럴 가치가 있는 인간인가? 그는 내내 자문한다.


*


쏴아아아
시체조차 건지지 못했기 때문에, 시마 갈레온의 무덤은 완성되지 못한 나뭇조각 하나를 제외하면 아직도 텅 비어있었다. 까마득한 절벽 위,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익숙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어놓았다. 이나흐는 잠깐 눈을 감고 그 바람을 느꼈다. 어느 늦은 밤 차갑게 이마에 내려앉았던 손길을 떠올리며.
피로에 젖은 눈매가 돌무덤을 훑었다. 이나흐는 천천히, 아무 곳에도 기댈 곳 없는 사람처럼 무덤에 손을 얹었다. 붕대가 감긴 손이었다.

“나는 아주 중요한 걸 잊고 있었어요, 시마.”

나에겐 여유 부릴 짬 따윈 없다는걸요. 감히 멈추어 설 시간도 없다는걸요. 감히 뭘 아끼고 소중히 여길 권리도 없다는걸요.

“나한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 내가 약하다는 것, 약해 빠진 주제에 전부 가지려고 했다는 것. 대체 무슨 자격으로 잊고 있었을까. 무슨 자격으로.
절벽에 차가운 파도가 와 부딪혔다. 
시리게 놓인 무덤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것은 우두커니 말을 고르는 침묵과는 전혀 달랐다. 단호하게 마침표가 찍힌 그다음의 끝없는 고요함이었다. 제발 멈추지 마. 이나흐 갈레온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러나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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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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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록은 손안에서 고양이의 숨이 빠져나가던 순간을 더듬어 보았다. 작은 뼈가 으스러지는 감각과 함께 헐떡거리던 몸에서 힘이 쭉 풀렸다. 그렇게 다시는 움직이지 않게 되었다.
소년은 몸이 식기 전에 무딘 칼날로 재빨리 가죽을 열고 그 안에 든 것을 차근차근 펼쳤다. 직전까지 살아 숨 쉬던 핏덩이를 이루는 미세하고 치밀한 구조를 할 수 있는 한 가장 작은 단위로 조각조각 해체했다.
고양이가 그저 고양이었을 때는 소년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것은 좀더 진화하고 나아간 어떤 것, 서슬 퍼런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 복잡하고 광대하고 눈앞에서 번쩍번쩍 빛을 피워올리는, 죽은 퍼즐.
그 순간에는 세상의 다른 모든 부분은 암전되고 그것과 자신만 남았다. 
몸속에서 환하게 빛이 켜지는 것 같았다.

파록의 회상 속에서, 기쁨은 늘 짧게 끝났다. 그 환희의 썰물이 지나면, 아버지의 커다란 손이 뺨을 후려치던 순간이 뒤따라왔다. 폭력의 순간에는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고요해졌다. 소년은 반항하지 않았다. 자기 안에 든 것이 조금이라도 새어나갈까 두려워, 맞을 때 있는 힘껏 숨을 참는 버릇은 손쉽게 습관이 되었다.

“대답해라. 왜 고양이를 해쳤지?”

아버지는 용납이 없는 사람이었다. 신사답게, 더듬지 않고 제대로 자기 말을 해야만 상대해 주었다. 파록은 많은 소년이 그렇듯 그의 가르침을 경전처럼 여겼다.
소년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 안에 든 걸 보고 싶었어요.”

그만큼 어렸을 때, 파록은 언제나 진심을 말했다. 그것이 그가 배운 올바른 규칙이었건만,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그의 대답을 들으면 늘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그 고지식한 남자가 당황을 표출하는 방식이었다. 침실에서 부모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다. 아버지는 그를 경멸하면서 두려워했다. 자기 자식의 껍질 안에 어떤 불가해한 것, 사납지 않지만 해롭고 불길한 것이 새끼를 까고 아이를 지워 버린 것 같다고 했다. 그 애를 가지기도 전에 도둑맞은 것 같다고.
글쎄다. 소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어디로 떠난 적이 없는데. 왜 다들 잃어버린 것처럼 구는 걸까.
잃어버리는 건 무슨 기분일까.
무슨 기분일까?

“파록. 왜 아즈만을 계단에서 밀었지? 그 애는 하마터면 목이 부러질 뻔했어.”
“아즈만은 내가 죽으면 슬플 거라고 했어요. 그래서 나도… 그 애가 떠나가는 게 무슨 느낌일지 궁금했어요.”

그날 파록은 한쪽 귀가 먹먹해질 정도로 맞았다. 아즈만은 그날 이후 세 살 터울인 형에게 다시는 말을 걸지 않았다.
예상하던 방식은 아니어도 동생을 잃어버린 셈이었다. 파록은 상실의 슬픔을 기대했지만, 여전히 그게 무슨 느낌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이 아는 것을 나는 영원히 모르는 걸까? 아무리 애를 써도 불가능했다. 모든 것이 난해했다. 서로 다른 공기를 숨 쉬는 사람들처럼 닿지 않았다.
그때부터 파록은 차츰차츰 괴리를 학습했다. 진실을 말해야 한다는 규칙 자체가 약간은 반칙이라는 사실을, 수십 년의 폭력 끝에 기어코 배워냈다.
좋은 생각, 좋은 말, 좋은 행동.
그 규칙을 지키는 한, 아버지는 파록을 눈감아주었다. 늘 겁에 질렸던 어머니의 눈에도 안도감이 서렸다. 그는 할 수 있는 한 주변의 기대에 맞추어 나갔다. 그 지난한 과정에 비하면 공부는 쉬웠다. 가족들의 불안한 시선을 되짚으며 장님 코끼리 만지듯 의중을 더듬어 가는 것보다는, 훨씬 간단했다.
아버지는 사람을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네가 나고 자란 환경, 건전한 교육과 따스한 식사 그리고 부드러운 이부자리 같은, 모든 감사한 것들에 대한 의무라고.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런던 의과대학에 진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첫 번째 카데바를 만졌다. 용액 처리된 사람의 시신이 깨끗하게 닦여 누워 있었다. 갈비뼈와 갈비뼈 사이, 죽은 회색 피부에 칼을 대자 먼 옛날 번쩍 켜졌던 불이 희미하게 깜빡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안개 속 저 멀리서 찾은 등대처럼 멀지만, 놓칠 수 없는 빛.
사람의 물리적인 내면은 사람의 외면과 비교도 되지 않게 아름다웠다. 파록은 사람의 마음을 영원히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가슴을 갈랐다. 그러면 근육과 혈관으로 뒤덮인 정원, 주렁주렁 열린 지혜의 열매가 보였다. 그제야, 그렇게 산산이 작은 단위로 분해되고 나서야 기어코 사람은 파록이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다시금 깨달았다.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 사람을 내려놓는 그 행위에 지독한 매혹을 느꼈다.
파록 하자리는 솜씨 좋은 의사였다. 의도는 추했지만 기술과 재능이 있었고, 그는 언제나 아버지가 정한 규칙을 지켜왔다. 호르미즈드는 현명했다. 그 규칙은 세상이 그를 참아주도록 만드는 최후의 방파제 같은 것이었다.
규칙이 없었다면 이미 무분별하게 탐구한 끝에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고 말았으리라. 아, 인간. 인간은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모자랐다. 선천적으로 맛을 모르던 자가 깨달은 미식이었다. 그가 눈 뜨고도 읽지 못했던 수만 가지 이야기가 얇은 가죽과 근막을 너머에 두고 켜켜이 쌓여 있었다. 
세월이 지날수록 파록의 내면에서 얕은 호기심이 자라났다.
내 심장은 어떤 모습일까.
아즈만이 저주하던 것처럼 추하고 역겹고 지저분할까. 새까만 타르 덩어리일까? 헤어나올 수 없는 늪일까? 호르미즈드 하자리로부터 자식을 빼앗아 간 어둠이 심장 대신 웃고 있을까?


*


그는 지금껏 루이즈 퐁소에 관해 깊은 생각을 쏟아본 적 없었다. 그녀에 관해 아는 것이라곤 가끔 곤란할 정도로 사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아무리 소독약을 부어 닦아내도 사라지지 않는 오래된 것들의 냄새가 난다는 것뿐. 고대의 묘지와 인동 덩굴. 오늘도 그랬다. 마녀는 실 한 올 걸치지 않고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시대와 불화했다. 파록이 세상에 안착하려고 버둥거리는 내내 헬륨 풍선처럼 붕 뜬다면, 그녀는 제멋대로 어긋났다.
옛날이었다면 이렇게 담담하게 평가하지만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일이 부러워하기에는 그도 이제 제법 나이가 든 혈족이었다.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빚 청산이었다. 파록이 제멋대로 그녀를 들여다봤으므로 이 트레미어도 같은 것을 원했다.

“절대 물지 마.”

명령과 달리 창백한 손이 가까워졌다. 생살이 갈리는 동안 루이즈는 제 손을 그의 입에 물렸다. 살갗에 이빨을 박고 힘껏 흠향하면 환한 기쁨이 죽은 신경을 태우겠지만, 인내는 금과 같았다. 그는 정말로 잘 참았다. 아플 때 숨을 참는 것처럼 비명을 내리눌렀다. 고통에 약해지면 무언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소년일 적부터 하던 불길한 상상은 죽은 뒤에도 여전했다.

“착하지.”

나는요, 전혀 착하지 않아요. 그저 참고 참아서 참는 것이 내가 되었을 뿐.
고통이 전신의 모든 감각을 짓누르고 둔하게 했다. 파록은 몸 그 자체가 되는 것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이어 할 수 없었다. 칙칙하게 죽은 내장 사이로 손이 파고들고 헤집었다. 대장. 비장. 위. 짚어주면서도 머릿속에 배 속이 그려지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모험을 즐기던 루이즈의 손이 기어코 그의 심장을 움켜잡았다.

“이건 뭐야?”

파록이 신음했다.

“심…장이요.”

루이즈는 장난치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의 심장을 제멋대로 천천히 쥐었다가 놓으며 생명 활동을 흉내 냈다. 뱀파이어의 비테가 죽은 심장을 타고 흐르는 건 살아있는 것들을 향한 우스꽝스러운 풍자극 같았다. 늘 우습다고 생각했다. 파록은 자신이 이미 죽은 사람이라는 것을 단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는 의학적으로 자신에게 수십 번 수백 번 넘게 단순 명징한 사망 선고를 내릴 수 있었다. 그럴 권위가 있었고 그것을 기꺼이 행사했다. 그런데. 
식은 나무토막 같던 그녀의 손가락에 서서히 피가 돌며 열이 올랐다. 조롱하듯 움직이는 손이 잔인할 정도로 따뜻했다.

“박동이 느껴져?”

파록은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심장을 상상만 하다가 죽는다. 하지만 루이즈의 따뜻한 손이 배 속을 헤집고 더듬어 그 윤곽을 만지자 비로소 심장과 그 바깥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평범한, 죽은, 심장.
그녀의 목소리, 마주친 눈빛에는 잔인한 희열이 감돌았다.

“네가 이걸 왜 좋아했는지 알겠다.”
“저흰 너무… 달라요. 전 전혀 그런 의미로 좋아한 게 아니에요.”

그렇게 어린애 장난처럼. 나쁜 짓을 하듯이. 그랬을 리가 없다. 나는 그저 이해하려고. 이해하려고. 아픔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아닌가? 맞았나? 그저 장난이었나? 모래탑을 쌓고 다시 무너뜨리듯이. 유아적인 쾌감을 충족하려고 그랬던 걸까? 그건 결코 좋은 생각이 아니야. 좋은 행동도…….

“난 좋은데. 따뜻하지 않아?”

기분이 이상했다. 헤집어진 배 속이 울렁거렸다. 의지와 다르게 느리게 박동하는 심장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뜨거웠다. 이건 아픔이라기보다…… 스스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감각에 목이 메었다. 그는 날뛰지 않기 위해 애꿎은 욕조의 틀만 쥐어짰다.

“생각보다 얌전하네.”
“빚이라고… 하셨으니까요.”

이해할 수 없어도 규칙은 늘 규칙이었다. 한숨 같은 대꾸에 그녀가 실망한 듯한 눈길을 보냈다.

“그것뿐이야?”

그녀는 무슨 대답을 바라는 걸까? 파록은 정답을 맞히는 게임은 싫었다. 늘 지는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제게 바라는 게 있으면 그냥… 말씀하세요. 그게 쉬우니까.”

그 덕에 다소 김빠지는 대답이 흘러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바라는 것이 따로 있었다. 루이즈가 그의 갈라진 가슴에서 손을 빼냈다.

“그럼, 괜찮지?”

그녀는 그를 마실 것이다. 
혈관에 입술이 닿았다. 파록은 순종적으로 눈을 감았다.

“예.”

건조한 입술이 기다란 목을 누르고 뒤이어 날카로운 송곳니가 파고들었다.
그의 정신은 견디기 힘든 아픔으로 인해 몸에 바짝 가까이 붙어 있었기에, 직격타였다. 아릿한 쾌감이 죽은 신경을 태우고 내달렸다. 없는 숨이 목에 턱 걸리는 기분이었다. 파헤쳐지는 신비. 점멸하는 개인의 역사. 죽은 남자가 나긋나긋한 침묵 속에서 비명을 질렀다.
어쩌면 조금쯤은 알겠다. 어쩌면. 내가 영원히 해체하고 탐구할 수 없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은 나 자신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남의 손을 빌려야만 한다. 모두가 그렇다. 그래서 존재에게는 바깥이, 타인이 필요한 것이다. 아즈만도 그랬을 거야. 호르미즈드도, 젬마도 그렇겠지. 사람들은 다들 그래. 그럼 내게도 남이 필요한 걸까? 그럼 나도 사람이었던 걸까? 그럴 수 있었을까? 내 심장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묻고 싶다.
두서없는 생각이 벼락같이 내리꽂히다가 타들어 가서 사라졌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달콤한 환희가 전신을 휘감았다.
파록은 자신이 환하게 켜지는 순간을 기다리며 살아왔다. 그는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헐떡거렸다. 의미 없는 몸짓인 줄 알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을 가누기 힘들었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된 것 같으면서도 너무나 나인 감각. 경계가 흐물흐물하게 흩어지는 감각. 몸속 깊은 곳이 단순하고 동물적인 갈구로 가득 찼다.
나를, 전부, 마셔줘. 나의 기쁨을. 공허감을. 전부.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다. 금세 식어버린 손이 갈라진 상처 위를 기고, 커튼처럼 흘러내렸던 새까만 머리카락이 물러났을 때, 그는 조금쯤 빈 그릇이 된 기분이었다.
이상하게 웃음이 나왔다.
세상에, 루이즈.

“제가… 무슨 기분인지 아시겠어요?”

익사할 것 같은 어둠 너머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런던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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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년은 모든 소년이 그러하듯 아버지를 사랑한다.
단 한 번도 그를 미워해 본 적 없다. 그것은 어쩐지 불경하고 위험한 짓처럼 느껴졌다. 소년은 자신이 가진 모든 욕구보다도 앞서서 그에게 제 존재를 용납받고 싶었다. 그때는 그래야 삶이라는 게 비로소 의미를 지닐 수 있을 것 같았다.
호르미즈드의 장례식은 조장(鳥葬)이었다. 그가 떠나고 나서도, 파록은 영원히 아버지의 그림자 아래 살았다. 그의 규칙 안에서만 자신의 존재가 용인받을 수 있다고 느꼈다. 영혼이 죽은 자의 세상으로 떠나지 못하고 그들을 이 땅에 묶어놓는 게 족쇄shatter라면, 아버지를 파록의 안에 묶어놓는 것은 일생을 통해 일궈온 규칙 그 자체였다.
규칙이야말로 또 다른 족쇄였다. 영혼은 이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지만, 파록은 언제나 호르미즈드를 느낀다. 자신을 물리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만들어 낸 한 인간을.
그 이후 지난한 삶과 삶 아닌 시간을 보내며 많은 것을 배웠지만, 소년은 언제나 같은 시절에 머물러 있었다.
 
 
2
 
‘태양을 숭상하는 것과 이런 원시적인 의식 사이에 대체 무슨 관계가 있지?’
 
물론 아무런 관계도 없을 것이다. 의식이라는 것은 원래 내부 결속을 다지기 위한 행위니까. 그러니까 단순하고 고무적일수록 효과가 좋다. 자신의 차례가 되어 눈앞에 잔이 들이밀어졌을 때 약간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파록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보신에 대한 욕구보다도 더 강한, 어디에든 속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다.
하지만 그다음에 벌어진 일은 예상 밖이었다. 이리저리 어색하게 피하던 것도 잠시, 결국에는 입술이 겹치고, 몸이 뻣뻣하게 경직했다. 가면 밑, 마르게 버석거리는 입술 너머로 피가 흘러들어왔다.
파록은 역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루이즈가 사랑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없다. 이런 행위에는 몸속이 환히 켜지는 느낌도, 일말의 고양감도 없다. 느껴지는 건 물성으로 추락하는 감각뿐이다. 살과 땀과 가죽이 누구랄 것 없이 뒤엉켰다. 육신이 너울거리는 파도처럼 꿈틀거리고, 입안에서 뒤섞인 피의 맛에서부터 온갖 감정의 편린들이 밀려 들어와 어지럽다.
파록은 감각이 지나치게 곤두서 있다고 느낀다. 압도적인 감각 속에서 인간 개개인은 보이지 않게 된다. 그저 덩어리째 그린 유화 물감 그림처럼, 되는대로 뭉친 살덩이들처럼 느껴진다. 국소마취제가 섞인 차갑게 잠든 사람들의 피가 아니라, 생생하게 깨어 흥분하고 날뛰는 갖은 인간의 피가 혈관에 들어와 날뛰었다. 그는 그 감각이 괴롭다. 적막 속에서만 존재하다가 갑자기 거리 한복판에 내던져진 것 같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것 같다.
파록은 자신의 곁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육체로 전락하는 자신에게 소스라친다. 몸에서 영혼이 분리되어 빠져나오는 것 같은 해리 반응이다. 파록은 이 자리에 있고 싶지 않다. 몸이 기어코 오롯한 몸의 주인이 되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다.
하지만 벗어날 길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보이지 않는 족쇄에 꽉 묶여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한다. 약간의 움직임만으로 사람들이 찢어지고 망가지고 피가 든 고기 주머니처럼 터져버리는 환상을 본다. 이미 멎고 없는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은 공포다.
그가 얼어붙은 동안에도 살점의 파도는 계속 그를 정념의 해안으로 밀어간다. 출처 모를 손길과 입맞춤이 아무렇게나 내던져지고 뒤섞인다. 닿고 싶지 않다. 젖은 인간의 육체가 맨살에 겹치는 느낌은 끔찍하다는 말로도 형용하기 힘들다. 몸 위로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다. 위생 감각과 강박이 그 자신의 적이 되어 고문한다. 그럼에도 그는 어설픈 저항조차 그만둔다. 그저 온순하게 견딘다. 참는 것이 내가 되었기 때문에, 그는 거절을 모르기 때문이다. 양 떼 사이에서 입을 꽉 다물고 송곳니를 감추면 아무도 자신이 괴물이라 알아채지 않으리라고, 그렇게 믿는 어린 짐승.
그렇게까지, 그렇게까지 해야만 사람들은 그를 견뎌줄 마음을 먹는다.
전부 소중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3
 
저주받은 이빨이 목을 뚫고 들어갔을 때도 청년의 비뚤어진 목에서는 그륵거리는 소리만 나왔다. 목이 부러진 고통이 헤카타의 송곳니가 불러일으키는 끔찍한 고통마저 잊게 만든 것이었다. 단 한 번도 안타까워한 적이 없건만, 지금은 자신이 죽어가는 젊은이에게 흡혈의 얕은 쾌감조차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약간은 슬펐다. 청년의 피에서는 공포심이 느껴졌다.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의 생생한 두려움, 그 감정이 텅 빈 남자에게로 훅 옮아갔다.
쭈욱, 쉼 없이 피를 빨아들이고 목울대가 움직거릴 때마다 몸속이 따뜻한 피로 가득 찼다. 죽어가는 열기가 몸 전체를 데우고 흘렀다. 파록은 이 선을 넘어본 적이 없었다. 늘 어딘가 적당한 곳에서 그만뒀다. 하지만 오늘은 소년을 완전히 텅 비웠다.
몸에 닿은 손이 멎은 맥을 재고, 눈은 힐끔 손목시계를 보았다. ‘n월 n일 nn시 nn분, 사망했습니다.’ 그는 질릴 만치 익숙한 선고를 마음속으로 내린다.
그리고 자기 팔에 상처를 내, 피를 청년의 입술로 흘려보냈다.
 
“파록 씨, 지금 뭘 하는 거예요?”
 
그제야 그녀가 휙 돌아보았다.
바이올렛이, 아니, 정확히는 그 너머의 짐승이 물었다. 입 안이 썼다. 파록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모든 사인이 명징했건만, 파록은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병원으로 그녀를 태워다준 것이었는데. 그리하여 바이올렛은 결국 자기의 복수를 이뤘다. 병실에서 퇴원하려던 청년의 목을 간단히 부러뜨림으로써.
입이 열 개라도 제 잘못을 덮을 수는 없었다.
파록은 그 집안이 병원에 진 빚을 알고 있다. 그 청년을 그가 소중히 여긴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어니스트 피셔로부터 부탁을 받은 뒤 의례상 간단한 조사를 했기 때문이었다. 그 가족에게 더는 기댈 곳이 없다는 것도 알았고, 그는 결국 젊은이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었다.
 
그 가엾은 젊은이는 자기 목이 부러질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되살아날 것이다.
괴물로서.
 
‘나도 이제 아버지가 될 거야.’
 
불쑥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렇게까지 한다고 해서, 어니스트 피셔가 자신이 약속을 지켰다고 기뻐할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파록은 그저 남의 실수를 덮어 더 큰 실수로 만들고 있을 뿐이었다. 그 사실을 어렴풋이 자각하고 있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다만 바이올렛 다크우드의 슬픔에 일말의 책임감을 느꼈듯 이번에는 청년에게 책임감을 느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면 할 뿐이다. 성의껏, 사람들을, 돕는다. 그것이 그가 존재를 용인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간만에 머리가 또렷한 덕분일까. 아니면 직전 삼킨 청년의 생생한 피가 입을 움직이게 만든 것일까. 시체에게 제 피를 먹이면서, 잘하지도 못하는 거짓말이 입 밖으로 술술 흘러나왔다.
 
“생각해 보세요. 그가 살아남는 게 어니스트 씨에게는 더 큰 고통일 겁니다.”
 
아니야. 파록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파록은 피를 삼키는 괴물의 삶이 이전의 삶과 아주 다르다고 느끼지 않았다. 인생은 영원히 스스로 영원히 감독하는 일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어떤 생존 본능과도 같은 감각이 그를 움직였다.
그리고 그녀는 거짓말을 너무 잘 읽었다.
 
“당신이,”
 
사회적 신호와 우아한 태도가 감추고 있던 나직한 경멸이 한 꺼풀 벗겨져 드러났다.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이 유독하고 아름다웠다.
 
“당신이 남의 감정에 관해 뭘 안다고. 고작해야 흉내만 내는 주제에.”
 
바이올렛이 휙 돌아섰다. 그리고 직전과는 달리 너무나 차분하게 멀어지는 발소리.
그 매서운 말이 파록에게 칼이 되어 박혔다. 한순간 영혼에 금이 가는 느낌이 들었다. 금이 벌어진 곳에서 벌레가 기어나와 스멀스멀 몸 위를 쏘다녔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다 알면서 그저 참아주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에 왜 새삼스럽게 베이는 걸까? 그저 알고 있었던 것을 새삼스럽게 확인했을 뿐인데.
그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를 참아준다.
감사한 일이다. 그렇지 아니한가?
 
 
 
4
 
“개새끼.”
 
몸이 부서지는 것 같은 둔탁한 통각이 덮쳤다. 파록은 바닥에 힘없이 널브러졌다. 미움받는 일에는 익숙했다. 자신이 덜 되어 먹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사람 닮은 것을 싫어한다. 그의 흉내는 완벽하지 못해서 언제나 불쾌한 골짜기를 건드린다.
파록 하자리는 슬픔이 무슨 느낌인지는 안다. 몇 번이고 피에 섞인 그 맛을 음미한 적이 있다. 그러니 익숙해야만 하는데. 오늘따라 감각이 지나치게 생생해서 어지럽다. 어쩌면 아직도 몸속을 돌고 있는 청년의 피 때문이다. 번쩍번쩍 땀에 젖은 살갗을 빛내던 육신들의 향연 때문이다. 얻어맞은 자리에 울혈이 고이고 인간처럼 신경이 탄다. 다시 한번 주먹이 꽂히자 눈앞이 번쩍거린다.
전에는 비슷한 일이 일어나도 거대한 껍질을 두른 것처럼 담담할 수 있었는데. 모든 일이 몸 바깥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멀어 보였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힘겹고 불쾌한 기분이 드는 걸까. 참으면 그만이다.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참아주듯 그저 이 일도 참으면 그만인데.
 
“이 새끼야. 무슨 소리라도 내봐. 어?”
 
아무리 그런 말을 들은들, 파록은 주박에 걸린 사람처럼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소리 내지 마라.’
 
그에게는 언제나 엄격한 호르미즈드의 족쇄가 먼저다.
어니스트는 몇 번이고 그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굳은살 박인 손이 거침없이 제 앞에 선 것을 파괴하려고 했다. 파록은 조금도 반항하지 않았다. 그런 짓을 해 봤자 화풀이하는 시간이 길어질 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니스트 피셔의 손에는 하수구의 물비린내가 배어 있다. 아무리 문질러 닦아도 그랬다. 소독약이 그의 손마디에 스몄듯 그 남자의 시체 몸에도 살아온 세상의 흔적이 남았다.
파록은 그 손이 싫었다. 그 손이 자신에게 닿는 게 싫었다. 어쩌면 노스페라투의 저주 때문일까? 파록은 병원에서 일하며 신체 파편이 날아가고 전신이 불에 타고 몸의 구멍에서 끈적한 진액과 고름을 쏟으며 사는 자들을 수없이 보았다. 그들이 더럽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고통받는 몸은 그저 기관일 뿐이었고 파록은 그들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 남자는…… 이따금 참기 힘들 정도로 불결한 기분을 선사했다.
지금까지는 이유를 잘 몰랐다. 그러나 이 순간 시퍼렇게 증오를 태우는 눈을 보고 있자니, 나직한 깨달음이 몰려왔다.
 
 
그가 괴물을 숨기지 않기 때문이다.
 
괴물이 불러일으키는 끔찍한 공격성을 밖으로 드러내면서 아무것도 개의치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감정이, 날것으로 날뛰는 분풀이가 무엇을 불러올지 무엇을 파괴할지, 그 어떤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저 감정에 오롯이 매몰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이 견딜 수 없이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공들여 조각조각 망가진 괴물. 너도 저렇게 망가진 괴물이 될 수 있었다. 호르미즈드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괴물임을 숨기지 않는 괴물 말이다. 날뛰는 것 외에는 자신을 증명하는 길조차 모르는 짐승 말이다. 내가 그것을 막았다.
아, 또다. 재차 살가죽 위로 벌레가 기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역겨움, 측은지심, 혐오감, 그리고 깊은 곳에 자리한 조금쯤은 부럽다는 생각들. 모든 게 텅 빈 자리에서 뒤엉켜 타르 곤죽처럼 변해버린다. 파록은 이유 모를 수치심을 느낀다. 그대로 이빨이 살가죽을 뚫고 짓누른다. 쾌감이 몸을 타고 올라왔다. 다시 몸이 몸이 된다. 읽지 마. 허락한 적 없어. 날 보지 마. 애원해도 끝나지 않았다. 그 순간의 감각이 너무 끔찍해서 비명을 지를 수조차 없었다.
 
 
 
5
 
아버지의 장례식은 조장이었다. 어두운 밤 까마득히 높은 곳에 얌전히 팔을 모으고 누워 있을 호르미즈드를 상상하며, 하루하루 조금씩 뜯어먹힐 그의 시체를 상상하며. 파록은 나는 결코 아버지와 같은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어떤 얼룩진 새가 나를 장사 지내줄까. 어떤 괴물이 기어코 부리를 휘둘러 내 흉금에 상처를 내고 뼈를 갉을까.
파록은 피투성이가 된 몸을 일으켰다. 두들겨 맞아 욱신거리는 육신을 고치려 피를 돌리고 있자니 다 터진 입술 사이로 자꾸만 힘겨운 웃음이, 웃음이 삐져나왔다.
어느 순간 피처럼 입 안에 고인 말이 공허한 뱃속을 맴돌았다.
 
‘아무리 그래도 이제 그 애의 아버지는 나야, 당신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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