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커미션글... 어둠칼탁 친구들이었어요 우리애들 사랑하네 / 욕설이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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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연기에 관하여

 




1.



 난 좆나 부자가 될 거야. 누가 봐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부자가 되어서 눈짓만으로 남 부려먹으면서 편하게 잘 먹고 잘살 거야. 아무한테도 안 지고 누구 눈치도 안 보고 떵떵거리면서 살 거라고. 멍청이들이나 비참하게 사는 거야.
 잿빛 포탄 연기와 살 타는 냄새와 타오르는 불꽃 사이를 비틀비틀 걸어 나가던 순간. 이 세계에서 목숨이 얼마나 천박하고 값어치가 없는지, 총알 한 발보다 못하게 쓰이는지 알았다. 매캐한 담배 연기로 가득 찬 좁은 방에서 촛불 하나에 의지해 눈이 침침할 때까지 카드 패를 들여다보고 단 한 순간도 내 것인 적 없었던 것들을 잃고 또 잃다 보면. 쓰레기나 다름없는 인간들 사이에서 쓰레기 같은 희열에 젖어 어슴푸레한 밤을 나고 또 나다 보면. 문득 숨이 막힐 정도로 밀려오는 무력감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눈앞에 들이 밀어진 패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차피 인생의 값어치란 많이 쳐봤자 싸구려에 불과해. 그러니까 전부 걸어. 앞면 아니면 뒷면에.
 선택을 해야 해. 다른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2.


 “하.”

 모스 하이에는 눈을 번쩍 떴다. 먹구름에 뒤덮여 별도 없는 밤하늘이 보였다. 옛날 꿈인가, 별 거지 같은……. 생각하며 상반신을 들어 올리는데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몸 이곳저곳이 다 쑤셨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모스는 먹먹한 귀를 후비며 주위를 살폈다. 마차 바퀴 자국이 난 진창길과 회칠이 된 벽. 그 가운데 단단히 닫힌 단골 도박장 문이 보였다. 기억은 잉크가 쏟아진 페이지처럼 가물가물했지만 그래도 상황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술을 마시고 도박장에 갔던가 도박장에서 술을 마셨던가, 아무튼 인사불성이 되어 행패를 부리다 쫓겨나듯 밖으로 내던져진 후 그대로 길바닥에 엎어져 잠들었을 것이다.
 물기 어린 흙바닥 때문에 등이 온통 축축했으나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모스는 황급히 제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마구잡이로 뒤적이다 안 되어 뒤집어 보기까지 했지만, 역시나 땡전 한 푼 없었다. 아, 설마 또! 그는 낭패감을 느끼며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헝클었다. 그러다 문득 벼락같이 찾아온 깨달음에 장화를 벗어 던졌다. 가죽 장화를 거꾸로 들고 탈탈 털자,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 숨겨둔 칩 두어 개가 떨어졌다. 이거면 됐어. 먼지 묻은 얼굴이 반색했다. 그는 아픈 것도 잊고 벌떡 몸을 일으켜서는 망설임 없이 도박장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아니, 가려고 했다.

 “이제 그만해요.”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췄다. 모스는 문 앞에 선 채 굳이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선생 납셨네. 그런 거 너한테 안 어울려.”
 “이쪽 봐요, 브롤.”
 “왜, 문 닫히기 전에 한 판이라도 더 뛰려면 빨리…….”

 한 자루 단도가 탁! 경쾌한 소리를 내며 말을 가르고 문에 꽂혔다. 비수가 날아오면서 일으킨 가벼운 바람이 그의 뺨을 간질였다. 농담할 기분도 대충 넘어갈 생각도 없다는 다소 과격하고도 명백한 표현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성가신데. 상대해주는 게 싸게 먹히겠다는 계산이 선 모스는 느릿느릿 몸을 돌렸다.
 칸드라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모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돌아본 그와 눈이 마주치자 숨기지도 않고 양미간을 좁혔다. 그의 꼴이 말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당신,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그렇게 쏘아붙이는 목소리는 걱정스러운 듯도, 화가 난 듯도 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당황스럽네.”

 모스는 굴하지 않고 짐짓 능청스럽기까지 한 태도로 양손을 들었다.
 그는 칸드라가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고집이 등을 떠미는 것에 가까웠지만, 모스는 그 둘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 구별할 필요를 모르고 살았다고나 할까.
 사시사철 어둠에 잠긴 더스크월에서 죽음은 그리 대단한 사건이 못 되었고 죽음 뒤에 일어나는 일이란 더 시시했다. 그냥 차갑고 무감각한 바보가 될 뿐, 그러니 죽는 걸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할 필요도 무서워할 필요도 없다고. 이건 누가 한 말이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아하니 아마 지금쯤 죽고 없는 장교거나 병사거나 했을 것이다. 삶의 무게는 각자에게 다 다르다지만 죽음은 대부분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가짜 어음보다도 못해서 그걸 대단한 일처럼 취급하는 게 되려 어색했다.
 사람들은 죽은 뒤 소각당해 재로 돌아가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직접 눈으로 보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재와 검댕의 도시답게 다들 재와 검댕이 되려고 살았다. 그것뿐이었다.
 고작 그것뿐인데 왜? 내가 뭐라도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 쬐그만 여자는. 왜 이런 표정으로 귀찮게 구는 걸까.

 “너야말로 왜 이렇게 꼬치꼬치 따지는 거야? 대장도 안 그러는데.”
 “지금 몰라서 하는 얘긴 아니겠죠! 그건 그 인간이 무신경한 거고요.”

 굳이 대장을 언급한 것도 기분 상하라고 일부러 꺼낸 얘기였는데, 칸드라는 눈썹 끝을 치켜올리면서도 그리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모스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짐짓 껄렁한 표정을 내비치며 양손을 주머니에 꽂았다.

 “모르겠는데. 내가 그 자식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서? 오해야.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난 원래 이렇게 살았거든.”
 “당신이 지금 당신 꼴을 보면 절대 그런 말 못 할걸요.”
 
 뭐 어때서. 속으로 투덜거리며 혀로 입안을 건드리자 피 맛이 느껴졌다. 왼쪽 어금니가 흔들렸다. 쫓겨날 때 얻어맞았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원래 판이 클 때는 쪽박도 차고 그러는 거야. 이런 거 무서워하면 이 짓거리 못 해. 괜한 동정 받는 거 기분 별로야.”
 “동정이랑 걱정은 달라요.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요? 난 그저…….” 속상한 구석 때문에 격양되었던 칸드라의 목소리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렇게 해야 할 것 같다고 느껴 행동하면서도 스스로 명확하게 짚지 못해 혼란스러웠던 심정이 말로 꺼내놓으면서 서서히 다듬어지는 듯했다.
 “당신이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구니까 두고 보기 힘든 것뿐이에요.”
 
 모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목숨을 걸고 함께 일하는 사이란 바라건 바라지 않건 한없이 내밀해지기 마련이어서, 모스가 그런 만큼 칸드라도 모스가 가진 나쁜 버릇을 알 만큼은 알았다. 심지 굳은 눈빛이 자신이 약한 순간에 파고드는 게 거슬렸다. 그런 눈빛이 자기 껍질을 벗겨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 자기도 반강제로 같이 직면해야만 하니까.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쉽게 느낄 수 있었기에 더 그랬다.
 지금은 누굴 너무 가까이하고 싶지도, 위로받고 싶지도 않았다. 간지럽고 나약한 짓이었다. 건전한 위안이고 나발이고 성실한 자기파괴로 도피하는 쪽이 편하고 익숙했다. 남의 얼굴 한복판에 주먹이라도 꽂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었다. 그 김에 내깃돈도 받으면 좋고…….

 “브롤.”

 나직한 부름이 이런저런 궁리에 빠져 입을 다물고 서 있는 모스를 끌어당겼다.

 “그만 놔줘야 해요.”

 차분하게 가라앉아 이제 슬프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는 말하는 이에게조차 명확한 의미가 되어 닿기보다는 그저 그 공간에 흘러나왔다. 사람이 몸 붙이고 사는 땅에서 누구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박는 말들이 있다면 이런 식일까. 유령들이 맨발로 거리를 거니는 이 땅에서조차 생과 사의 두 세계를 구별하고 갈라놓는 명확한 몇 마디들. 떠난 사람은 그저 떠난 사람이라고, 명징하게 나누어지는 몇 순간들.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모스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두통이 있는 와중에 머리에 훅 열이 끼쳐 시야가 일렁거렸다.

 “두어 번 말하게 하지 말라니까. 난 그냥…….”

 모스는 부자연스럽게 말을 멈추었다.
 옆을 돌아보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또 하나의 그림자가 회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느껴졌다. 보지 않고도 그냥 알 수 있었다. 새까만 코트 자락, 아무렇게나 걷어 올린 소매. 그 모든 것이 흘러넘치는 검은 물처럼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그려졌다. 모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포기하기 싫은 것뿐이겠지.”

 그가 말했다. 뱃사람 식 뚝뚝 끊는 억양, 굵고 탁한 목소리로 뇌까리는 말씨에는 자기가 한 말을 두 번 생각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 그 단호함은 눈물이 날 정도로 익숙했고 한숨이 나올 정도로 잔인하고,

 그리고 조악했다. 누덕누덕 기워 만든 환영이었다. 부러졌다가 붙은 뼈처럼 이음매가 선명했다. 그런데도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울컥 치솟았다.

 “짜증 나게. 말 걸지 마. 쳐다보지 마.”
 “뭐라고요?”
 “아니, 너 말고……. 젠장!”

 왜 지워지지 않는 거야? 왜 죽어도 죽지 않는 거야? 이 씨발 새끼, 듣고 있는 거야?
 이래서야 진짜 미치광이 같았다. 더는 이 모든 걸 견딜 수 없었다. 모스는 도망치듯 도박장 지붕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원래 술에 만취하고도 익숙하게 나다니던 길이었기에 조금 비틀거리기는 했어도 그럭저럭 가뿐한 곡예를 선보일 수 있었다.

 “잠깐만요, 브롤!”

 다급하게 부르는 칸드라의 목소리에도 그는 두 번 뒤돌아보지 않았다. 




 

3.



 포기하지 않았다, 라. 한 번 문 것을 놔주지 않는 버릇은 이미 몸에 밴 습관을 넘어서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다. 그가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발악하지 않았더라면 까마득한 옛날에 티케로스의 이름 모를 벌판에서 들짐승들의 밥이 되어 널브러졌을 것이었다. 한겨울의 포탄 밭에서 뜨거운 총신 하나만 붙잡고 벌벌 떨었던 때건, 사기를 치다 제대로 칼에 찔렸을 때건, 사랑해서 죽이겠다는 미친 여자에게 잡혔을 때건 매한가지였다. 순간순간이 절체절명의 고비였고 삐끗하면 져버릴 벼랑 끝 싸움과도 같았다. 그래도 그는 버텨냈다. 그 모든 일을 살아서 건너왔고 이를 가능하게 한 집념은 이제 본성에 가깝게 갈무리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야 했고 대박이건 쪽박이건 걸 수 있다면 걸어야 했다. 아무것도 없이 주저앉아 있는 건 질색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선택을 해야 했다.
 도망치듯 자리를 뜬 뒤로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 지긋지긋한 패배감, 실패한 도박이 가져다주는 경멸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 말대로 놓아주면 될 일인가? 놓아준다고 결심한들, 그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한 방법은 직면이었다.
 우나 스컬록과 우린 스컬록 쌍둥이는 언제나 말이 많은 반-유령들로, 식스타워즈의 무너져가는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그 음침한 언변과 최악의 다도 실력 때문에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은 인물들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가 못 됐다. 녹이 덕지덕지 붙은 펜스 문이 신경에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들은 모스가 드디어 세상이 두 동강 났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반겼다. 사람도 유령도 아닌 이들은 여전히 깔깔거리는 반존재적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변할 여지가 없는 자들이었다. 변화는 산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니까.

 “굉장한 일이었다고 들었어, 이쪽에도 소문이 쫙 퍼졌는걸.”
 “자세히 듣고 싶은데. 너희가 등대에서 뭘 봤는지 말해주지 않겠어?”

 그 재잘거림은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모스는 무심결에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가 그냥 내려놓았다. 또 괜히 독이라도 탔다면 곤란하니까. 전에 마신 차 맛이 아직도 입안에 깔깔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지금은 가타부타 떠들 시간 없어. 난 정보를 사려고 왔거든.”
 “그거야말로 우리가 잘하는 일이지.”
 “사교의 궁극이라고나 할까. 뭐가 궁금해?”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 넷이 이쪽을 보았다. 모스는 지끈거리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용건을 꺼냈다.

 “유령 하나를 찾아야 해.”
 “진부한걸!”
 “한편 고전적이네.”
 “뭐, 유령은 유령에게라는 말도 있잖아. 내가 방금 지어냈지만.”

 모스가 이죽거리듯 뱉어낸 말에 우나 스컬록은 뭐가 좋은지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
 “그래, 누굴 찾고 싶어? 위치를 알려주면 되는 걸까?”
 “어디 있는진 이미 알아.”

 모스가 사감을 뺀, 오로지 필요한 정보들을 늘어놓는 동안 반유령들은 그 가벼운 입을 다문 채 얌전히 들었다. 쓸데없는 질문으로 흐름을 끊지도, 이야기를 억지로 늘여놓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이건데,” 덕분에 모스는 단순한 결론으로 말을 맺을 수 있었다.

 “그 자식을 이쪽으로 불러올 수 있을까? 잠깐이라도.”

그가 말을 마치자 우나 스컬록은 갓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길고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고, 우린 스컬록은 티스푼으로 차를 저었다.

 “불가능해.”
 “그리고 무의미하지.”

 예상외로 단정적인 대답에 모스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방법이 없다고?”
 “방법 이전에 효용을 모르겠는걸. 그럴 필요, 그럴 쓸모를.”
 “영혼은 당사자가 아니야. 기껏해야 그가 흘린 일기 한 조각 정도나 될까. 분명 실망스럽고 소름 끼치는 만남이 될 거야.”
 “당연하지. 지성이 없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겠어? 내가 누군지 모르는 감각이라니.” 우린 스컬록이 과장되게 몸을 떨며 자기 팔뚝을 문질렀다.

 “뭐, 그 자식은 죽기 전이랑 별반 다를 것도 없겠네.”

 모스는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테이블 위에 양다리를 꼬아 올렸다. 이것도 일종의 거래 현장이니 괜히 초조한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분명하게 하자고. 아예 안 된다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쪽으로 불러오는 건 불가능해. 영혼이 그 등대 안에 있다면.”
 “등대는 등대니까. 누구도 등대를 옮길 수는 없어.”
 “하지만…….”

 두 스컬록은 말을 멈추고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더니, 한시에 고개를 돌려 모스를 보았다.
 
 “만나러 갈 수야 있겠지. 부르는 대신 찾아가는 거야.”

 모스는 괜한 기대감을 비추지 않으려 애쓰며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봐, 그 귀찮은 의식을 말하는 거라면…….”
 “아니. 그건 유령장 너머를 물질의 세계로 잠시 옮기는 방법이었지.”
 “그 반대의 방법은 시도해보지 않았잖아?”

 우린 스컬록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전등이 꺼지듯 주변이 어두워지며 낡은 저택의 모습으로 뒤바뀌었다. 거미줄이 뒤덮인 천장, 반쯤 부서지고 무너진 나무 기둥과 쥐 발자국이 다닥다닥 찍힌 먼지 가득한 바닥.
 모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우리 같은 존재가 되는 것 말이야.”

 우나 스컬록이 양 손바닥을 부딪쳤다. 그러자 다시금 화려한 저택의 모습이 돌아왔다. 눈부신 샹들리에, 벽을 장식한 금사 태피스트리, 색을 넣은 유리 램프, 사슴 머리 형상의 상아 조각품. 고색창연한 찻잔들.

 “두 세계가 얼마나 떨어져 있고 그 거리감은 견딜만한 것인가 아닌가? 그런 고민이야말로 불필요한 일이야. 둘 다 이 자리에 존재하니까.”
 “왼쪽 눈을 감으면 왼쪽 눈 밑의 세계와 오른눈이 보는 세계가 동시에 보이는 거랑 비슷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간 것뿐이야. 정말이야, 바뀌는 건 없을 거야.”

 이들은 그렇게 속삭였으나 모스는 알고 있었다. 이건 이미 실패한 실험이라는 것. 이 유령들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에 영원히 갇히고 말았다는 것. 두 세계 사이에 걸친다는 건 두 세계 모두 잃는 것과 진배없다는 것. 이건 도박일까? 도박이라면, 과연 걸 만한 도박일까?

 “어때? 만나러 가보겠어?”

 유령이 나긋하게 웃으며 물었다. 




 

4.



 생각해보겠다고 대꾸하고 스컬록 저택을 나선 뒤로, 온갖 상념이 그의 손님이 되려고 뒤따랐다. 뭘 생각해봐? 그냥 개죽음이면 어쩔 건데. 애초에 다 끝난 일인데 다시 봐서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딱 한 대만 제대로 갈겨준다던가. 두 대도 좋고. 근데 유령이 유령을 때릴 수 있던가? 그냥 왜 그랬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아니, 이유를 들어봤자 열 받기만 하겠지. 막상 다시 봐봤자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 허무할 테고. 그러면 그 나름 나도 편하게 잊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깔끔하게 단념이 될지도 모르고…….
 모스는 상념이 제멋대로 흐르도록 내버려 둔 채 손에 얹은 낡은 대검을 만지작거렸다. 흠집이 가득한 날에 문득문득 제 얼굴이 비쳤다. 먼지가 한 겹 쌓인 좁은 방, 제대로 균형이 맞지 않는 침대, 낡은 옷 몇 벌. 그가 남기고 간 건 정말 한 줌이었다. 그런 점조차 본인다웠다.
 이제 와 궁상맞게 되짚어본들 애당초 뭐 때문에 그를 그렇게까지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정말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다지만 그래도 이건 심했다. 카로는 무심하고 무뚝뚝하고, 제멋대로에 막무가내였다. 날이 갈수록 자기를 싫어해달라고 전심전력으로 시위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아예 얽히지 않는 게 나을 그런 놈.

 “너는 지겹지도 않냐?”

 모스는 돌아보지 않고 툭 내뱉었다.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그만 좀 따라다녀.”
 “소용없어. 이것도 결국 네가 바란 거니까.”
 “…….”

 모스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 말이 맞았다. 그는 그저 환각일 뿐이었으므로. 눈 감았다 뜨면 사라질 그림자였다. 쓸데없이 되새기지 않으면. 떠올리지 않으면.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하지만 외면하려 눈을 감을 때마다 어김없이, 부서진 파편들이 떠올랐다.
 틀어막는 손도 부질없이 흘러내린 붉은 피가 바닥을 적시고 짜 맞춘 돌 이음새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죽어가는 짐승처럼 얕게 그르렁거리다 서서히 멎어간 호흡. 그 뒤로 거짓말처럼 찾아온 정적. 카로 그라인은 그저 자는 듯이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는 얼굴은 지겨울 만큼 본 덕에 속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편안하게 잠든 적이 없었다. 불편하고 딱딱한 침대 위에서 습관처럼 한껏 찌푸리고는 매일매일 작은 전투와도 같은 밤을 넘겼다. 금방 일어나겠지, 그렇게 믿기에 이번의 잠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고요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게 질 나쁜 농담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조금의 불티도 남지 않은, 다 타버린 잿더미 같은 얼굴에 굵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붉은 액체가 촛농처럼 둥글게 뭉쳤다가 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모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실패한 내기. 처참한 패배.
 이 빌어먹을 자식은 단 한 번을 그냥 져주는 법이 없었지.

 “너도 후회라는 걸 해?”

 기억의 파편을 내던져버리려는 듯, 모스는 덜컥 말을 뱉었다. 

 “응? 너처럼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면 그딴 거 안 해도 되겠지?”
 “…….”
 “나한테 잘못했다고 생각한 적은 있냐? 미안한 적은 있고? 그딴 식으로 구는 게 나한테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네 멍청한 머리로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냐고.” 

 부질없이 허공에 부르짖는 일인 걸 알면서도, 그는 꾸역꾸역 노기를 쏟았다. 갈데없는 분노가 쌓이고 쌓여 목 끝까지 꽉 채워서 이제 더 담아둘 데가 없었다.
 환영은 그저 오래된 벽처럼 서 있었다. 얼마나 평소다운지. 사소한 행동이나 표정까지 이렇게 잘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진짜 거지 같네. 시발. 다 짜증 나.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한 거다.”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하. 그래서 속 편하시겠…….”
 “그래도 해.”

 후회한다고. 나직한 말이 무딘 칼처럼 찔렀다.

 “후회는 선택했다는 증거니까. 너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브롤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가, 이내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개새끼…… 넌 진짜 개새끼야. 절대로 용서 못 해.”
 
 차라리 끝까지 나쁜 새끼였어야지. 그렇게 굴 거였으면 뒈지질 말던가. 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됐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고.
 제 이름처럼 앞뒤 재어보지 않고 위험에 달려드는 성정. 부싯돌처럼 부딪히던 순간, 불꽃을 피우던 순간. 그 불꽃이 스스로 태우고 무너져 재로 흩어지던 순간.
 모스는 그 재를 붙잡으려 애썼고 그 연기를 들이마셨다. 알고 있었기에 더 용서할 수 없었다.
 카로 그라인은 선택을 했다.
 그 뒤에 덧붙여질 어떤 말도 이 사실을 바꾸지는 못했다.




 

5.



 모스는 느릿느릿 스컬록 저택을 나섰다. 펜스 너머로 쪼그려 앉은 인영이 보였다. 설마설마했지만 그 조그만 몸집을 못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낡은 문이 녹슨 쇳소리를 내자, 칸드라는 제 무릎에 푹 묻은 고개를 굳이 돌리지 않은 채 모스에게 힐끔 눈길을 보냈다.

 “이제 어쩔 거예요?”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여기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모스는 이걸 어떻게 놀릴까 궁리하다가, 이번 한 번은 특별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어쩌긴 뭘 어째. 놀다가 때 되면 일하러 가야지.”
 “…….”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따라 죽기라도 할 줄 알았어?”
 “……그런 거 아니면 됐어요.”

 칸드라는 짐짓 무신경을 가장해 대꾸하고는, 툭툭 옷을 털고 일어났다. 그 얼굴에 담긴 옅은 안도감은 쉽사리 읽혔다. 모스가 멀뚱멀뚱 쳐다보는 동안 칸드라는 새침한 동작으로 빙글 돌아 앞서 걸어갔다. 모스는 한 발짝 늦게 뒤따르며 깍지 낀 양손을 제 뒤통수에 대었다.

 “어디 가? 바빠?”
 “왜 물어요?”
 “할 일 없으면 내가 잔뜩 따게 해줄 테니까 같이 가자고.”
 “브롤, 당신 정말……!”

 칸드라가 눈썹을 치켜세운 채 휙 돌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스는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뺀질거렸다.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흐른 끝에, 칸드라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번만이에요.”

 알았어, 알았어. 대꾸하며 그가 히죽거렸다.
 삶이란 언제 던질지 모르는 마지막 주사위 같은 것이어서, 제대로 걸어볼 만한 순간이 올 때까지 그는 그저 손안에 움켜쥐고 굴리며 그 뭉툭한 모서리를 외울 셈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 그는 생각했다. 분명히 올 거야. 비록 이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6.



 파도 소리가 들렸다. 물안개가 일어난 검은 바다 위로 등댓불이 비쳤다. 일렁이는 빛은 파도 위에 물비늘을 그리며 천천히 주변을 쓸었다. 빛이 닿은 물마루는 잠시나마 새파랗게 물들었다. 바다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육지를 희구하며 떠돌다 그 빛에 의지하여 비틀거리면서도 자기가 있을 곳을 찾아갔다.
 등댓불을 지키는 유령은 자기 자신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눈앞에 망연히 펼쳐진 것은 별이 박힌 하늘과 바다. 그리고 그사이에 그어진 이름 모를 경계선. 새카맣게 점멸했다가 다시 번지며 이어지는 순간과 순간들. 의미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영원히 멈추어 있다. 그저 이따금 고장 난 기록기처럼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의 꿈을 꾸거나,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케냐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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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10.9



 케냐에서 확인할 일의 목록을 정리해둔다. 

  • 칼라일 탐사대 관련 기사: 애버데어 숲 근처 백인 학살. 칼라일 탐사대가 사파리 관광을 한다고 떠나, 나이로비 북서쪽 대지구대 탐험 예정.
  • 잭슨 엘리어스가 남긴 나이로비 메모: 존스턴 케냐타라는 이름. 검은 바람의 신에게 저주를 받은 곳, 피투성이 혀 사교 집단, 산의 본부.
  •  잭슨 엘리어스가 질문한 사람들의 목록: “샘 마리가, 기차역”, 네빌 저민, 스타렛 선생, 셀커크 중위, 엔디콧 대령.
  • 케냐 몸바사 칼린디니 항구 아자 싱 앞으로 가는 소포.


 이른 시각 몸바사에 도착했다. 태양이 선명한 채도로 내리쬐었고 그을린 공기에서는 짭조름한 냄새가 났다. 인도양의 파도가 밭은 숨을 내쉬며 흰 모래밭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드는 동안 먼저 도착한 배들이 항구에 매여 미적거렸다. 사람들은 온갖 말로 떠들며 적갈색으로 지어진 낮은 건물들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케냐는 사파리 목적의 관광객이 많아 비교적 총기에 관대했기에 큰 문제 없이 세관을 통과할 수 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배에서 내려 새로운 세상을 마주할 때는 묵은 후회와 잘못을 뒤로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오묘한 착각에 젖곤 하는데, 실비아는 큰 감흥이 없었다.
 실비아 펠튼은 중년의 딜레당트로 내가 호주에서 자리를 비운 동안 프리스비의 연락을 받고 합류했다. 과거에 우리와 비슷한 사건을 겪었다고만 들었는데, 사실이라면 얌전히 손을 씻고 물러나 쉬다가 다시 현장에 불려온 셈이었다. 나는 은퇴한 군인 중에 이런 부류를 몇 보았는데 제 안에 자기만의 성(城)이 있지만 매사에 무뚝뚝하고 퉁명스럽다.
 첫날은 몸바사의 캐슬 호텔에 묵었다. 실비아가 최고의 숙소를 고집해서 얼떨결에 그렇게 되었다. 불안정하고 축축한 배 위에서 한 달여를 보내다 깨끗한 시트 위에 누우니 그대로 침대에 영혼을 빼앗길까 봐 겁이 날 지경이었다.
 얼마간 기력을 회복한 뒤 아자 싱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는 영국령 케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도인 수출입업자로, 몸바사에 자기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현재 인도로 출장을 간 상태로 6주 뒤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한밤중에 그의 사무실에 몰래 잠입했으나 큰 수확은 없었다. 사무실 금고에는 돈과 함께 잡다한 송장, 흰 가루(설탕과 제습제), 힌두스탄어로 쓰인 장부가 있었다.

 

 

 

1925.10.10


 몸바사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할 수 없었기에 새벽같이 우간다 레일웨이를 타고 나이로비로 향했다. 이렇게 일찍 출발해도 밤이 늦어서야 도착할 예정이었다. 우간다 레일웨이는 몸바사에서 출발하여 북서쪽으로 진로를 펼치는 긴 철도다. 나는 프리스비와 함께 삼등칸으로 갔고 실비아는 일등칸에 타느라 일행이 잠시 갈라졌다.
 덜컹거리는 금속 소음, 긴 경적과 함께 기차가 출발하자 아침 햇살이 낀 창밖으로 아프리카가 펼쳐졌다. 떠날 때는 푸른 해안선 위로 부서지는 햇살을 볼 수 있었다. 자료를 정리하고 잡담을 나누고 담배를 피우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소금기 머금은 공기가 점점 멀어지면서 이내 잿빛 바오밥 나무와 가시 많은 아카시아, 누군가 손으로 가볍게 쥐었다 놓은 것 같은 모양의 이름 모를 관목이 드문드문 서 있는 넓은 초원이 나타났다. 선로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얼룩말 떼가 풀을 뜯었다. 고도가 올라가면서 주변이 어두워질 때쯤에는 저 멀리 서쪽으로 눈 덮인 킬리만자로 봉우리가 보였다.
 철도 여행은 순탄하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삼등칸 화장실 칸에 이 났다. 사람들이 놀라 웅성거렸고 새카만 연기가 금세 비좁은 기차 칸에 번졌다. 문득 섬뜩한 느낌이 들어 창밖을 보니 어둑한 아프리카의 풍경 위로 파란색 불꽃과 빨간색 불꽃이 나란히 떠올라 있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불꽃이라니, 묵시록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눈처럼 보이는 부분이 전혀 없는, 그저 불꽃 덩어리였는데도 그것들이 이쪽을 쳐다보는 듯이 느껴졌다. 불꽃은 잠시 춤추듯 부유하다가, 기관차 앞쪽으로 휙 사라졌다. 잠시 후 폭발음이 들렸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찬찬히 되짚어보니 예전에 책에서 본 불의 흡혈귀와 비슷했다. 지능이 있는 가스나 플라스마 형태로, 이들이 여기 있다는 건 이들을 소환한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굉음과 함께, 기차 앞쪽에도 불이 붙었다. 프리스비와 함께 식당칸으로 몸을 피하려 했으나, 직원이 문을 막고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흑인은 식당칸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큰 실랑이로 번지기 전에 식당칸에 있던 실비아가 직원을 밀치고 나와 주변을 훑어보았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탄수차와 식당칸에서 물을 끌어와 불을 껐다. 다행스럽게도 큰불로 번지기 전에 막을 수 있었으나 기차가 멈추고 말았다. 주변이 정리되는 것을 기다릴 시간이 없어, 근처에서 나귀를 빌려 타고 마저 나이로비로 향했다.

 

 

 

1925.10.11


 밤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반나절을 낭비해 다음 날 낮에야 나이로비 시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모두 녹초가 되어 노포크 호텔에 짐을 풀었다. 실비아가 합류한 뒤로 잠을 편히 자고 있다.


 호주에서 사교도들이 큰 의식을 치르는 날을 알아낸 것은 희소식이다.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적 여유가 촉박한 것도 알게 되었다. 호주에서 출발하기 전 메이벨에게 전보를 부처, 나이로비 조사를 부탁했다. 메이벨은 우리보다 먼저 나이로비에 도착한 뒤 작은 팀을 꾸려 할 일에 착수했다.
  오늘 메이벨 일행과 만났다. 메이벨은 여전했고, 그가 케냐에 도착해서 고용한 휴 레드우드와 맹수 사냥꾼 도리스 브렛츠와도 인사했다.
 여기부터는 메이벨 일행에게 받은 자료와 조사한 내용을 들은 대로 정리해둔다.

  • 나이로비의 신문사: 나이로비 스타, 이스트 아프리칸 스탠다드.
  • 나이로비 스타 - 나탈리 스마이드 부인.
     -칼라일 탐사대: 신문 기사는 대부분 기존에 알던 내용. 칼라일 탐사대는 이집트에서 얻은 정보를 확인하러 케냐로 왔는데, 그 정보란 이집트에서 케냐로 이주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주요 대원들이 햄프턴 하우스에서 묵었고 호러스 스타렛과 네빌 저민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당시 기사에 칼라일 탐사대의 사진이 동봉되어 있다. 펜휴는 전의 사진보다 뚜렷하게 젊어 보이는데, 반면에 하이파샤는 창백하고 아파 보였다.
     나탈리 부인도 당시 칼라일 탐사대의 방문을 직접 보았다고 한다. 기억하기로는, 초원에 엔디콧 대령이 사는데 그 집에도 며칠 묵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다들 어딘가 기묘한 분위기였고 건강이 안 좋아 보였다.
     하이파샤는 그중에서도 유달리 안색이 창백해 안쓰러울 정도였다. 특히 아침에 심했다.
     로저 칼라일은 위스키를 좋아하는 청년이었는데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허스턴이 몹시 쌀쌀맞았던데 반해 오브리 경은 활기도 있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격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렸다. 이를테면, 탄 카우르(작고 고약한 성격의 여자, 차 상인)가 햄프턴 하우스에 자주 들렀다.
     셀커크 중위: 아직 나이로비에 있을 텐데 소식을 들은 지 좀 되었다고 했다.
     존스턴 케냐타: 반체제 인사라며 악평했다. 키쿠유 중앙 협회 소속.


 그렇게 스마이드 부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술에 취한 중년 남성(사냥꾼 복장, 훈장 착용)이 쳐들어와서 화를 냈다. 엔디콧 대령이었다. 나이로비 스타의 기사 때문에 손님 다 떨어져 나가 먹고살 길이 없다며, 정정 보도를 낼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나탈리 부인은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기에 상황을 해결하고자 엔디콧 대령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는 나이로비 남서쪽에서 사냥꾼 쉼터를 운영했다. 나탈리 부인이 쓴 기사를 간추리자면, 숲속에 있는 쉼터에서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난다는 내용이었다. 일행이 미리 조사한 결과 6년 전부터 그 부근에서 12명이 사망했다. 그중 10명은 관광객으로, 6명은 미국인이고 4명은 영국인이었다. 남은 2명은 쉼터에서 고용한 하인들이었다. 모두 쉼터 부근으로 사파리를 나갔다가 죽었는데, 대체로 전망대 부근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들 일부는 원숭이 입 정도의 크기로 뜯어먹힌 채였다.
 나탈리 부인은 놀라긴 했으나 엔디콧 대령을 안쓰럽게 여기는 듯했다. 들어보니, 온 가족이 함께 이민 왔는데 얼마 안 되어 미지의 병으로 부인과 아들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았다. 그 뒤부터 사람이 조금 이상해졌다고 한다.

 

  • 이스트 아프리칸 스탠다드 신문사.
     1919년 난디족 다섯 명이 범인으로 체포당한 기사. 사람 다섯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진. 해당 기사에 칼라일 탐사대 사건 조사를 맡은 책임자는 정부청사 식민지 내무차관 로저 코리던이라고 나와 있다.
  • 호레스 스타렛:
     스와힐리 타운의 병원 및 미션스쿨에서 일하는 성공회 신부 겸 의사.
     칼라일 탐사대가 의약품을 구할 곳을 찾아 들렀다. 바셀린 등 기본적인 의료 도구를 받고 돈을 기부했다. 그리고 엔디콧 대령의 집으로 갔다. 스타렛은 이후 참사 소식을 받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칼라일 탐사대의 시체를 확인할 때 곁에 있었다고 증언했지만, 좀 더 추궁하자 사실대로 말했다. 실제로는 당국에서 스타렛의 입을 막은 것에 불과하며, 에리카 칼라일까지 케냐에 온 탓에 범인을 찾는 일이 급해지니 아무나 용의자로 몰아 상황을 대강 정리했다고 한다.
  • 네빌 저민:
     정부청사의 법정 변호사.
     오브리 경이 그에게 와서 특정 종교집단을 조사했다.
     네빌 저민의 증조할아버지뻘 되는 웨이드 저민 경이 18세기에 발견한 폐허 도시 이야기를 했다. 콩고 분지 깊은 곳에 폐허 도시가 있는데 과거 흰 고릴라를 숭배하는 종교집단이 살았다고 한다. 그곳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도 존재한다. 자신도 언젠가는 그곳에 가보는 것이 꿈인데, 오브리 펜휴도 그 도시를 찾으려 해서 도움을 줬다고 한다.
     저민이 말하길 칼라일 탐사대는 나이로비를 떠날 때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인원을 데리고 갔다. 듣기로는 오브리 경이 강력하게 주장한 탓이었다. 
  • 셀커크 중위:
     몇 주 전 본인 집에서 화재 사고로 사망했다. 짤막한 뉴스 기사만 남아 있었다.
  • 존스턴 케냐타:
     교단에 관해 묻자, 조용히 자기 방으로 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교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물어봐 가볍게 대답했다. 케냐타는 잭슨 엘리어스를 만났는데, 그가 불나방처럼 위태로웠고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보였다고 증언했다. 케냐타는 피투성이 혀 교단이 오래된 교단이라는 것만 알고 있고, 이들이 정확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고 했다.
     거짓말일 가능성이 있다. 일행이 충분히 아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 탄 카우르:
     아시아인 구역에서 제일 큰 차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조카로 추정되는 십 대 후반 정도의 젊은이가 가게를 보고 있었고, 본인을 만나지는 못했다.


 조사를 끝난 후 일행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엔디콧 대령의 쉼터로 향했다. 쉼터는 보요이 족 영토 부근에 있었는데 자칼 같은 고양잇과 맹수 서식지라, 원래부터도 관광객에게는 추천되지 않는 곳이었다. 동물들이 다니는 길 부근에 지어진 전형적인 수렵 사냥 숙소로, 바닥에는 사자 깔개 장식이 걸렸다. 쉼터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일꾼은 라는 이름의 흑인 한 사람으로, 50대 정도 되어 보였고 말을 못 했다. 쉼터에서 일한 지는 6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전망대 쪽에서 주로 사건이 일어났다는 건 앞선 조사로 알고 있었기에 일행은 곧장 전망대로 향했다. 주변을 꼼꼼히 살펴보니 전망대 아래쪽 모래에 찍힌 자국들이 있었다. 짐승의 손톱자국에 가까운데 사자는 확실히 아니었고, 사람이나 원숭이 정도 크기의 낯선 자국이었다. 부근에 얼룩말 같은 동물의 뼈가 굴러다녔다.
 같은 날 밤 전망대에서 밤을 보내다 습격을 받았다. 바닥 문 쪽에서 사람들이 기어 올라왔다. 모래 먼지가 바람에 날려 시야를 가렸다. 습격자는 백인 남자 둘에 중년 여자 하나, 어린애 하나였는데 등불 아래에서 보니 산 사람이 아니라 몸에서 모래를 뱉어내는 괴물이었다. 칼로 찌르자 모래 먼지로 흩어져 흔적도 남지 않았다.
 끔찍한 밤이었다. 그 소동에 전망대가 무너졌으며 도리스가 많이 다쳤다. 괴물들을 다 죽인 줄만 알고서 다음 날 엔디콧 대령과 함께 전망대 부근을 순찰했는데, 밤이 되자 또 모래바람이 불더니 괴물들이 나타났다. 어제보다 숫자가 더 늘어있었다. 엔디콧 대령은 아이와 여자를 보더니, 넋을 놓고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를 겨우 기절시킨 뒤 도망쳤다.
 정신을 차린 뒤로 대령은 술만 마셔댔다. 휴가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는 가족들이 병이 나서 죽고 말았다는, 스마이드 부인에게 들은 바 있는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6년 전 칼라일 탐사대가 왔을 때 그런 사연을 내보이자, 가족을 다시 만나게 해주겠다며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그 오두막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짓을 했다. 일이 끝나자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들이 일어났다. 엔디콧 대령은 까무러쳤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칼라일 탐사대는 떠나고 없었다.
 날이 밝은 후 전망대 부근을 철저하게 조사했으나 어떤 장치나 마법이 쓰였는지 알 수 없었다. 여유 시간이 적었기에 메이벨이 엔디콧 대령에게 전망대의 위치를 옮기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했다.
 여기까지가 우리와 만나기 전에 메이벨 일행에게 있었던 일이었다. 정보공유를 끝낸 뒤, 우리는 따로 조사를 계속하되 필요할 때 연락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1925.10.13


 메이벨에게 얻은 정보 중에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존스턴 케냐타를 찾아갔다. 메이벨 일행이 받았던 질문을 우리도 받았다. 이것저것 가늠할 여유는 없었기에 아는 바를 솔직히 대답했다. 잠깐 고민하던 케냐타는 입을 열었다.
 “저는 많은 걸 아는 건 아니고, 그들이 잔인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무로기(예언자)라서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이제야 그런 세계에서 벗어나 당신들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는데 당신들이 먼저 날 찾아오다니 묘하군요.”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라면 위대한 분다리를 만나보셔도 좋겠습니다.
 잭슨 엘리어스는 위태롭고 그의 운명은 이미 묶여 있었지만 우리는 아직 운명이 결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다.
 “밖에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데, 거리를 두고 그를 따라가세요. 그 친구가 멈추면 여러분도 멈추세요. 그가 노란 문으로 들어가면 재빨리 따라 들어가세요.”
 밖으로 나가보니 그 말대로 키가 크고 흰 셔츠를 입은 흑인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우리를 확인하고 싱긋 웃더니 몸을 돌려 스와힐리 타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맨발이었는데 팔다리를 사뿐하게 움직였다.
 그가 주변을 예의주시하는 눈치였기에 이쪽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미행이 있었다. 젊은 남자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도망을 쳤는데 인상이 낯이 익은 것이 몸바사에서도 언뜻 본 듯했다. 그곳에서부터 뒤따른 걸까.
 진흙으로 된 길을 지나 골목을 돌았다. 남자는 노란 문 앞에 멈춰서서 우리를 돌아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노란 문 안은 작은 헛간이었다.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노란 롤스로이스 로드스터가 세워져 있었다. 그걸 함께 타고 먼지가 자욱한 흙길을 달려서 또 한두 시간쯤 갔다. 주변으로 탁 트인 초원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나이로비를 벗어나 외딴 마을에 도착했다.


 차가 서고, 마을의 오두막에서 섬세한 인상의 남자가 나왔다. 우리를 데리고 온 남자가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어조를 봐서는 우리와 함께 온 사람이 그를 설득하는 듯했다. 기다리는 동안 동네 아이들이 근처로 모여들어 눈을 빛냈다.
 마을 남자의 이름은 오코무라고 했다. 오코무는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우리에게 왜 이곳에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피투성이 교단을 막으려고 하는데 케냐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되는대로 길을 찾고 있다고, 조언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코무는 우리를 살피는 것처럼 한번 쓱 보고는 따라오라고 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마사이 족 오두막이었다. 진흙으로 지어진 집이었는데 주변에 있는 다른 집들보다 더 컸고 형태가 조금 달랐다. 주변에 울타리가 쳐져 있고 문을 대신해 커튼이 달려 있었다. 오두막 내부는 긴 통로가 현관에서부터 한 바퀴 돌아서 방을 감싸는 형태였다. 통로 벽에 이것저것 가면이며 부적이 걸려 있었다. 창문도 조명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딘가로부터 빛이 들어와 주변이 잘 보였다. 가운데 방에는 다채로운 기호와 문양이 일정한 패턴을 두고 그려져 있었다. 일종의 보호진인 듯했다.
 입구 반대편에는 몸집이 작은 노인이 앉아있었는데, 어쩐지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오코무가 들어서서 노인의 발을 주물렀다. 이 노인이 바로 분다리였다. 오코무가 말하길, 분다리가 수련을 하다 보니 저편과 가까워졌고, 지금은 여기 있지 않아 그가 돌아오길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노인은 메마른 나무토막처럼 고요했고 우리는 반나절이 넘도록 기다렸다. 어느 순간 노인의 몸이 떨렸다. 이내 뻣뻣해지면서 부푸는 것처럼 생기가 돌았다. 그는 살아있는데도 미라처럼 주름이 많아 그 연배가 짐작되지 않았다. 노인이 방 안에 들어앉은 우리를 찬찬히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스와힐리어였고 옆에서 오코무가 통역해주었다.
 실비아를 보고서는 노란 옷의 왕이, 그 일이 완전히 다 끝난 게 아니라고 얘기했다. 실비아는 잔뜩 화가 나서는 뭐 씹은 표정으로 이마를 구겼다.
 내게는 집에 있는 가족에게, 형에게 연락하라고 조언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는데, 그쪽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연락하라고 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스비에게는, 그 친구(아마도 자오를 말하는 듯했다)한테 줘서 보낸 물건 말고, 새로 소포가 올 텐데 그건 잘 가지고 다니라고 했다. 누가 보내는지는 이미 본인이 잘 알 것이라며.


 그렇게 한 마디씩 말을 건네고 나서, 분다리는 너무 희미해서 거의 들리지도 않는 숨을 내쉬었다.
 “임무는 위험한데 시간이 급박하다. 좋은 말을 듣고 싶으냐, 진실을 듣고 싶으냐?”
 “진실이 필요합니다.”
 “입에 발린 말 하는 놈들은 지하철에만 가도 널렸구만. 그걸 들으려고 그 긴 시간을 기다렸겠어?” 실비아가 불평했다.
 “피투성이 혀가 오만해진다. 이 땅의 사람들이 닥쳐올 피의 제사 때문에 교단에 납치되어서 산으로 사라지는구나. 지도자들은 썩은 생각과 행동으로 타락하고 있다. 우리가 케레나가의 주인 은가이에게 이 사악한 것을 막아달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
 분다리의 말은 구슬을 던지듯 무심하고 또 신중했다.
 “이제, 알고 싶은 걸 물어보거라.”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호주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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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어째서 웨버 씨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일까요?
 저는 당장에 일행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머리를 모아 고민해보았습니다. 분명 까마득하게 오래된 고대 문명의 책이었습니다. 위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고, 그 필체도 앞에 쓰인 글자와 유사했습니다. 전혀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브레이디 씨는 일전에 웨버 씨가 저희에게 언질 없이 여기 들렀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눈치였고, 자오 군은 웨버 씨가 외계인이라고 주장했으며, 이외에도 동명이인일 수 있다는 둥 온갖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프리스비 씨는 말수가 적었고 내내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무슨 추측을 하건 의문만 더해갈 뿐 알아낼 수 있는 게 전혀 없었기에, 저희는 일단 가던 길을 마저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가다 보니 구덩이가 파인 평평한 공간이 나왔습니다. 전구가 바깥쪽에 달려서 그 아래 뭐가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다가갈수록 역겨운 냄새가 스멀거렸습니다. 주변은 저희 발소리 말고는 조용했는데, 그 정적을 뚫고 저 아래서부터 사람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어렴풋이 들렸습니다.
 프리스비 씨가 구덩이 안쪽으로 손전등을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밑에서 들리던 소리가 빛에 반응하듯 커졌습니다. 비명과 신음, 낮은 울부짖음이 울렸습니다. 프리스비 씨는 그 밑에서 뭘 본 건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손전등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손전등이 떨어지는 소리를 신호로, 불에 덴 듯 끔찍한 비명이 쏟아졌습니다. 우리는 혹여나 누가 그 소리를 듣고 뒤를 쫓기라도 할까 봐 황급히 움직였습니다. 흡사 지옥과 연결된 구멍을 본 기분이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대체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요?


 급하게 나아가다 보니 어둑한 대광장이 나왔습니다. 퀴퀴한 냄새에 기묘한 악취가 섞였고, 이성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내내 오싹하고 불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일 비슷한 감각을 빗대자면 동물원의 호랑이 앞에 서서 눈을 마주칠 때 뒷골에 오싹 스며드는 묘한 긴장감과 비슷했습니다. 어떤 장인의 솜씨인지 그 넓은 바닥이 타일 없이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고, 한가운데에 돌로 만든 거대한 고리 형태의 아치가 바닥을 뚫고 서 있었습니다.
 아치로 다가갈수록 불쾌한 느낌은 더 강해졌습니다. 고리의 이음새를 살펴보다 문득 온몸에 소름이 쭉 돋았습니다. 이 돌 고리는 사실 거대한 생물 위에 얹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닥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생물의 표면 위에 발을 대고 서 있었습니다!
 깨닫고 나니 피부 아래로 거대한 혈관이 펄떡거리는 게 보였습니다. 명백하게 살갗이었습니다. 원주민들이 말하던 지하의 거인 부나이 전설은 경악할만한 진실을 짚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괴물이 깨어나면 정말로 세상을 먹어치울까요?
 아연실색했던 것도 잠시, 뒤쪽에서부터 기묘한 휘파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본능적으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닥치며 사람을 끌어당겼습니다. 자오 군이 휩쓸려들 뻔한 것을 브레이디 씨가 자기 목숨을 바쳐 구했습니다. 우리는 겁에 질려 그곳에 다시 돌아가 보지도 못했습니다.
 발전기를 지나쳐 바닥에 붉은빛이 나는 광장에 다다라 겨우 쉴 수 있었습니다. 주변은 다시 고요에 잠겼습니다. 위험한 일에 끼어들게 만들어 미안하다며, 프리스비 씨는 이곳에 온 진정한 목적을 들려주었습니다. 세상을 위협하는 거대한 사교 집단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막아야 하는 사람에 대해서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프리스비 씨가 한 말을 이해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저희 셋이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방금 겪었듯 이 지하 도시는 위험으로 가득하니, 차라리 더 준비해서 돌아오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설득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데서 개죽음을 당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프리스비 씨도 제 말을 납득해 주었기에 이후로 저희는 침착하게 돌아갈 길을 찾았습니다.


 일단 전진하니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전등이 켜져 있었고, 길이 교차하는 공간에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세 층짜리 목조건물이 서 있었습니다.
 제일 왼쪽은 최근에 파기 시작한듯한 인공적인 길로, 드문드문 사람이 지나다녔습니다. 다들 땅을 파는 장비를 들고선 멍한 눈을 하고 비틀거리며 걸어갔습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 길은 이어지다 끊겨있었고, 세 번째 길은 아치형의 넓은 공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곳도 전에 본 광장처럼 넓고 어두웠습니다. 중앙 바닥에서 빛의 반구가 강렬한 보랏빛으로 주변을 물들이며 느리게 깜빡거렸습니다. 천장은 까마득하게 높아서 끝이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반구 옆에는 8m 정도 크기의 박쥐 날개가 달린 검은 형체의 입상이 서 있었습니다. 나뭇가지와 인간의 뼈 등을 얽어서 뼈대를 쌓고, 천과 살가죽으로 형태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위에 물감과 피로 칠을 입혀 피 냄새와 부취가 진동했습니다. 근처에 크기는 좀 더 작지만 비슷한 동상들이 여럿 서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불 피운 흔적이 있었고, 제단으로 사용한듯한 돌덩이에는 검은 피 얼룩이 묻어 있었습니다. 프리스비 씨가 중국에서 비슷한 광경을 봤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지하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이 잔혹한 행태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봤던 길은 나름대로 메모하며 부지런히 쏘다니다 보니 어렴풋하게나마 길을 파악해둘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금살금 숨어가며 차까지 훔쳐 빠져나왔습니다. 브레이디 씨를 저 아래 남겨두고 온 것 때문에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1925.8.4


 밖으로 나와보니 주변은 어두컴컴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웨버 씨를 맡겼던 원주민 마을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웨버 씨가 기어이 혼자 마을을 빠져나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맡겨두었던 얼마 안 되는 짐도 전부 챙겨 간 상태였습니다.
 다행히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그가 사막에 남긴 발자국을 뒤쫓았습니다. 발자국은 타이어 자국과 합류하면서 끊겼습니다. 아마도 지나가던 차를 얻어 타고 간 듯했습니다. 어쩔까 망설이는데 프리스비 씨가 쫓아가자고 강권해서, 결국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만 구한 뒤에 다급히 뒤를 밟았습니다. 이후 나흘간 흔적을 따라갔습니다.
 칸캇지리에 도착해 인상착의를 수소문한 끝에, 포트헤들랜드 기차역에서 겨우 웨버 씨와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습니다. 보기에는 그 사람이었는데, 말하는 뉘앙스도 달랐고 그런 척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저희를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며칠 만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싶을 정도였지요. 표정은 위화감이 들 정도로 차분하고 평온했습니다. 지낸 시간이 짧아 그런지 저는 웨버 씨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보았습니다.
 저와 자오 군은 함께 있어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기에, 프리스비 씨와 웨버 씨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도록 자리를 비켜주었습니다. 돌아온 프리스비 씨가 전해주기를, 웨버 씨는 시드니에 먼저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프리스비 씨의 눈가가 빨갰습니다. 분명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으셨던 거겠죠.


 저는 호주의 사막을 적잖이 탐험했는데 이번만큼 기묘하고 또 강렬한 여행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세상이 가진 비밀을 또 한 꺼풀 벗겨낸 기분이었지요. 필요한 장비와 인원을 갖춰서 지하 도시를 제대로 답사하고 또 관찰하고 싶어졌습니다. 그곳을 점령하고 있는 사람들과… 존재의 위험성을 보건대 쉽지 않은 바람이겠지만요.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 일단 도와드리고 있는 일부터 마무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저희는 사람을 더 구하고, 차에 짐을 새로 싣고 다시 사막으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원래 웨버 씨가 담당하고 있던 일이 많아서 이래저래 시간이 걸렸습니다. 콜즈 교수님의 집을 돌보는 일과 관련해 제게도 몇 가지 처리할 일이 남아 있기도 했고요.

 

 


 

 



1925.8.30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방금까지만 해도 차가운 사막의 밤하늘 아래 있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낯선 호텔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나는 외출복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목이 마른 것처럼 입안이 깔깔했고, 가진 돈이 꽤 사라졌고, 호텔 방 침대 위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대부분 역사책이었다. 고장 난 필름이 감기듯 드문드문 이 책을 읽었던 장면이 떠오르는데 그 내용은 단편적이고 흐렸다.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낯선 장소에 들렀던 기억이 깨진 파편처럼 흩어졌다. 그 불투명한 이미지들은 내가 붙잡으려고 애쓸 때마다 손 틈새의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더 깊이 떠올리려 하면 곧장 두통이 찾아왔다.
 뒤늦게 일지에 쓰여있는 글을 찾아 읽어보았다. 아무래도 그 기계 때문에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누군가의 농간일까? 누구의, 어쩌면 관찰하는 정신의? 아니면 그냥 내가 미쳐가는 걸까? 정신적인 문제일까?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달이 사라졌다. 내가 나를 잊은 사이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 시간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마다 제동이 걸리듯 내 몸이 나를 방해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기에 일단 일행을 찾아 나서려고 웃옷을 걸쳤다. 문득 외투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쪽지가 잡혔다.


 [지금 시간, 현재 위치, 무사한지, 나 기억나는지 다 적어서 포트헤들랜드 기차역으로 전보 부치세요. 프리스비.]


 나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시기 프리스비는 하루에 두 번씩 역에 들러 전보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후 내가 머무는 호텔로 전화가 왔다. 나는 수화기를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프리스비 씨,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쪽은 다들 괜찮은 건가요?” 
 “……일라이저 씨 맞죠?”
 프리스비의 음성은 낮게 깔려 있었다. 뒤에서 자오가 떠드는 게 들렸다. “뭐래요? 외계인이래요? 드디어 정체를 밝힐 생각이 들었대요?”
 “나 누군지 알겠어요?” 프리스비가 천천히 말했다.
 “무슨 말씀을….”
 나는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수화기 너머가 잠시 고요하다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프리스비가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어쩔 줄 몰라 더듬더듬 사과했다. 물을 게 산더미 같았는데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됐고 빨리 이쪽으로 와요!”
 아무래도 만나야 제대로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리스비는 펑펑 울면서, 재클린이 죽었다고 얘기해주었다. 그 한 마디뿐이었지만 나는 재클린이 약속을 지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최대한 서둘러 가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칸캇지리로 가는 내내, 나는 뒤죽박죽인 기억을 어떻게든 정리해보려 애썼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나는 이름을 바꿔가면서 지냈고 눈이 아플 정도로 책을 읽었다. 프리스비가 언성을 높이던 장면이나, 학자 행세를 하며 사람들과 이야기하던 장면 같은 것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되는대로 진통제를 삼켰으나 그마저도 잘 듣지 않았고, 무지근한 두통이 계속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마치 안갯속에 빠져 헤엄치는 것 같았다.



 

 

1925.9.1


 칸캇지리에 도착한 후, 내가 없었던 사이 있었던 일을 들었다. 일행이 내 이름이 쓰인 책을 보여주었는데, 나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어서 얼떨떨한 느낌 뿐이었다. 여전히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으나 한 달 동안 내가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브레이디의 마지막을 알고 나서, 나는 이제는 정말로 자오를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는 그를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자오,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내가 말을 꺼내자 자오는 단박에 표정을 구겼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주변이 고요해졌다.
 “형은 왜 자꾸 날 돌려보내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어려서 안 된다는 건 불합리하다고요!”
 “불합리하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아, 씨….”
 “자오, 그렇게 오기로 하는 거면…….” 지켜보던 프리스비가 한 마디 얹었다.
 “오기가 아니라니까요!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해요?”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자오가 벌컥 언성을 높였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걸 듣기는 했어요?!”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자오. 언성 높이지 마세요.”
 “X발, 장난하나… 형이 지금 높이게 만들잖아요! 어디서 한 달 동안 자빠져 있던 인간이 오자마자 한다는 얘기가…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진 알기나 해요? 형 없을 때 저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기나 하냐고요?!”
 자오는 내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그도 그 나름대로 눌러 참고 있던 것을 다 쏟아내려는 것처럼.
 “이참에 아예 솔직하게 말해보지 그래요. 지금 나를 돌려보내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옛날에 형이 돌려보내지 못했던 사람들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자오도 그런 내 기세를 알아챈 것처럼 말을 이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나보고 어리다고 하면서 형이야말로 뭐 얼마나, 얼마나 어른스럽게 굴고 있는데요?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그렇고, 왜 자꾸 자기가 마음먹으면 지킬 수 있는 것처럼 구는 거예요?”
 재클린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고 했잖아. 네가 여기 있는 모두의 보호자인 양 굴지 말라고.
 그저 습관이 되어서, 습관이 되어서였다.
 그 둘은, 정말로 어렸다. 돌아갈 곳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 애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했다. 이상하지. 이상하게도…… 그 습관과 멀어지면, 그 애들과도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얘기 다 했습니까?”
 내 목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는 것 같지 않고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오가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는 게 보였다. “…다 했는데요?”
 나는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선택지가 적었다.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 했으면… 저는 지금 자오 군한테 화내고 싶지 않으니까, 생각을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가는 거냐고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귓전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뭐라고 말하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잊고 있었던 한 달 동안 금연이라도 하며 지낸 건지, 담배를 좀 피웠기로서니 순간 확 오르면서 머리가 핑 돌았다. 이마를 붙잡고 난간에 기대어 있는데 프리스비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일라이저 씨. 괜찮아요?” 살피는 목소리였다.
 “자오도 지금 많이 심란해서 그래요. 방금 가족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예민해지는지 일라이저 씨도 알잖아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지금 이런 위로를 받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절로 입가에 쓴웃음이 머금어졌다. “죄송합니다. 프리스비 씨, 그간 신경 많이 쓰이셨겠죠.”
 프리스비가 내 쪽으로 다가와서 난간에 기대어 섰다.
 “솔직히, 화나 더 내려고 했는데. 돌아와서 이렇게 얻어맞고 있는 걸 보니까 저까지 그러면 안 될 것 같네요.” 프리스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짐짓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거기에 속지는 않았다. “당신이 잘못한 거 아니니까요. 여기서 그렇게 크게 잘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는 프리스비의 말을 들으며,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투명해지는 담배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칸캇지리의 밤은 채도가 낮고 푸르스름했다. 강렬한 사막의 낮과 대비되는, 무슨 죄라도 지어서 제 색깔을 잃어버린 것 같은 시간.
 “일라이저 씨가 없는 동안 제가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요.”
 프리스비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자오가 그동안 힘이 많이 되어줬거든요. 일라이저 씨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그 애 뜻을 존중해주는 건 어때요?”
 “…….”
 “좀 져주라는 거죠.”
 나는 그 밤에 기대서 다시금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잊을 수 없는 누군가를.
 “그래야 하는 것 압니다. 사실 내가 말릴 수 있는 일이 아닌 것도요.”
 알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말렸다고 한들 일어났을 일이었다. 그 애는 언제나 자기다웠고 내가 바꿀 수 있었던 건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알고 있는데도 역시 좀 더 말려보지 않은 게 후회가 되었다. 나는 하염없이 후회했다. 이번엔 얼마나 물고 늘어져야 내가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은 그 생각뿐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 되기를 이제는 포기했다. 미움받아도 상관없었다. 그게 나았다. 그냥 한 사람도 더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더 견디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담배를 느릿느릿 손가락 위에서 굴리다가 비벼 껐다. 불이 꺼진 자리에 남는 재와 연기. 나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내게 태울 것이라곤 이제 나 자신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내가 멈출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방으로 돌아간 나는 자오에게 더는 반대하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자오가 말하는 만큼 본인이 어른이라면 제 말을 스스로 감당할 것이라 믿는다고. 자오는 아까까지 씩씩거리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금세 화색이 되었다. 그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었다. 그는 어렸고,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이 자리에서 꺾이지 않은 승리자였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섰다. 이게 맞겠죠, 이게 맞는 일이겠죠, 나는 그저 누구든 붙잡고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브레이디든, 노라든, 누구든 대답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날 밤에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1925.9.5


 사막 아래에 잠든 지하 도시는 서늘하고 어둡고 드넓었다. 분명 처음 마주하는 장소였는데 그 기이한 아치와 복잡한 길들이 묘하게 낯익었다. 침입한 흔적을 들킨 것인지, 사교도들은 전보다 경비가 삼엄해진 상태였다.
 우리는 보라색 돔이 있는 광장에서 박쥐를 닮은 괴물 셋과 맞닥뜨렸다. 그 괴물들은 두꺼비와 박쥐를 섞어놓은 것 같은 형태에 눈코입이 없었고, 날개는 구겨진 종이처럼 주름이 잔뜩 져 있었다. 제코가 그린 그림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 박쥐 괴물이 레너드(우리가 고용한 사람 중 하나)를 붙잡고 날아가서 그를 기묘한 신상에 대고 짓눌렀다. 마구 소리를 지르던 레너드는 신상에 닿자 몸이 잠깐 축 늘어졌다가, 다시 깨어나 바둥거렸다. 우리는 그를 구하려고 애썼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를 두고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멈추지 않고 교차로가 있는 곳까지 향한 다음, 인원을 나누어 목조건물에 진입했다.
 허버트가 후에 알려주기를, 1층은 창고로 쓰는 듯한 공간이었다. 안에는 곡괭이나 밧줄 같은 채굴 장비가 든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광업용 장비나 커다란 수레도 보였고, 작은 사물함 옆에 발전기를 돌리는 데에 쓰는 석유통이 여덟 개였다. 바닥에 사람 십여 명 정도가 누워서 자고 있었다. 살금살금 진입하는 도중 감시하던 사람이 깨어났다. 그가 명령하자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벌떡 일어나서는 뒤를 쫓았다. 그 사람들은 마치 자기 의지가 없는 존재들 같았다. 이후로는 도망치느라 더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2층은 내가 직접 살펴볼 수 있었다. 자오와 지노가 함께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몹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안에 큰 우리가 일곱 개 있었는데 그 안에 전부 사람들이 들어차선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사교도들이 납치한 사람들을 가두어둔 곳이었다. 우리를 여는 데는 특별한 열쇠가 필요했다. 억지로 뜯어낼 궁리를 하고 있는데, 문득 한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몸을 비틀며 발작했다.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는 그의 가슴 부근이 울룩불룩하게 치솟다가 찢어졌다. 가죽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거기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사마귀와도 비슷하고, 파충류 같기도 한 괴물이었다.
 충격적인 광경 때문인지 자오의 상태가 나빠서 그를 다급히 바깥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는 갑자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 순간 위층에서 총성이 울렸고, 다급해진 나는 일단 지노에게 자오를 맡기고 뛰어 올라갔다.
 3층은 허스턴을 위한 공간으로, 이것저것 멀끔한 가구가 갖추어진 곳이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 앞서 올라갔던 프리스비와 다지 교수, 그리고 클로다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허스턴은 반대편 책상 쪽에 서 있었다. 갓 끓인듯한 차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총성이 들린 것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허스턴은 우리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전혀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그럴만했다. 허스턴은 내가 만난 자 중에 가장 말이 많은 사교도였다. 그가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얘기를 떠들어댔는지 모른다. 그는 내게도 자리를 권했다.

 자, 지금까지 알던 세상을 잘 되짚어 봐라. 뭐가 진실인지 잘 생각해라. 아무리 진실을 외면하려고 해도 평소에 꾸는 꿈을 통해서 진실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이 모든 일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인류의 도태형, 고대부터 유전적으로 축적되어 온 집단 무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신이야말로 궁극의 진실이자 최종적인 현실이다.
 세상의 멸망은 위대한 신 니알라토텝의 뜻이다. 나를 죽인다고 해서 신의 뜻을 멈출 수는 없다. 나는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신들의 곁에 나란히 설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내가 그를 미치광이라고 믿는 만큼 굳건히.

 “내가 직접 보여줄 수도 있어. 같이 가세.”

 더 들을 필요가 없다며, 프리스비가 그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총알은 책상 위를 때렸다.
 안타깝게 됐구먼, 중얼거린 허스턴이 클로다를 향해 카메라 형태의 기묘한 물건을 들이대고 세 번 정도 버튼을 눌렀다. 그 앞에서 눈부신 전기가 튀더니 클로다가 순식간에 숯덩이로 변해버렸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우리는 적당히 눈짓하고 장단을 맞추는 척했다. 허스턴은 우리가 당연히 그 일에 참여하고 그 신을 숭배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 유일하게 논리적인 결론이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떠들어댔고 나는 이참에 궁금했던 것 몇 가지를 알아냈다.
 원래는 세계 곳곳에서 문을 열 예정이었는데 여러 군데에서 차질이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없다는 것. 이집트랑 케냐에서 여전히 그날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하이파샤와 부나이는 함께 케냐로 간 뒤 소식이 없다는 것.
 허스턴이 주장하기로는 신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 건 자신이라는 것. 진짜 중요한 건 호주라는 것. 1926년 1월 14일, 시계가 울렸을 때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 이들은 그날을 대비해 신상 안에 차곡차곡 힘을 축적해두고 있었다.
 “그러면 여기까지 왔으니 위대한 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게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앞으로 거대한 신상이 보였다. 사람의 뼈와 살로 세워진. 
 “충성을 맹세하면 신께서 임하셔서 모든 걸 증명해주실 걸세.”
 한평생 그렇게 역겨운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

 


 분명히 머리를 쐈다.
 그랬는데도 허스턴은 죽지 않았다. 그는 턱이 날아간 채 피거품과 함께 알아듣기도 어려운 말을 쏟아냈다. 프리스비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넣었을 때, 마지막으로 끄르륵거리며 웃었다.
 동시에 돔의 보라색 빛이 훅 꺼졌다. 주변이 온통 암흑에 잠겼다.
 그러다 주변이 서서히 다시 보이기 시작했는데, 빛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그때 느꼈던 것은 박쥐가 초음파를 쏴서 주변의 물체를 인식하는 것처럼 기묘하게 뒤틀린 시야였다.
 돔이 있던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갈라진 틈으로부터 무언가 쏟아졌다. 거대하고 너덜너덜한 날개가 허공을 잡아먹으며 천천히 펼쳐졌다. 날개에 달린 무수한 촉수가 춤추는 듯, 갈구하듯 꿈틀거렸다. 부글거리는 연기가 솟아나는 사이로 불타는 눈이 떠올랐다. 그 눈이 하늘로 솟구치면서, 완전한 어둠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드러났다.
 이후로는 아비규환이었다. 그 존재는 붙잡힌 사람들에게 촉수를 뻗었다. 근처에서 또 폭발이 있었는데도 그 괴물은 전혀 상처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자오는 다지가 업었고, 나는 프리스비를 붙잡은 채 빠져나왔다. 달려가다 문득 아까 본 광경이 뇌리를 스쳤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목조건물로 향했다. 냅다 2층으로 들어가 무식하게 우리를 열었다. 혼란을 틈타 거기 갇혔던 사람들을 내보내고 함께 도망쳤다.
 그곳의 육각형 타일, 복잡하게 꼬인 길들이 익숙했다. 그때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았다.

 

 

 

1925.9.6


 우리는 함께 빠져나온 사람들을 맡길 겸 근처 원주민 마을에 들렀다가 다시 돌아갔다. 하루가 지나자 다시 불이 켜져 있었고, 발굴 작업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듯했다.
 일단 목조건물로 돌아가 허스턴이 쓰던 3층을 뒤졌다. 어제 봤던 대로 침대, 탁자와 책상 등 생활공간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서류장에 고대어로 쓰인 서류가 들었고, 한쪽 벽에 항해용 크로노미터가 걸려 있었다. 전에 제이덕이 알려준 적 있는 꿈 보내기 구리 그릇도 있었다. 책상 위에는 타자기와 편지, 문서들이 놓여 있었다. 또 원뿔 모자처럼 생긴, 전선이 달린 금속 헬멧이 한구석에 걸려 있었다.
 책상 위에서 타자기로 친 600장 묶음 원고를 발견했는데, 대강 훑어보니 허스턴이 쓴 것이었다.

 

<현실의 신들>


 후에 천천히 읽어보니 거기에는 지하터널에서 발견한 고대의 기록, 핵연료로 움직이는 거대한 비행선을 타고 여행하는 문명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또 관련된 글과 장치들을 잘 포장해서 개비건과 펜휴에게 보낸 기록, 회룡도와 검은바람섬에 대한 언급, 1926년 1월 14일이라는 날짜와 그때 해야 하는 일도 자세히 적혀 있었다. 허스턴은 신상의 기능에 대해서도 적었는데, 정확히는 마력을 흡수하고 저장하는 용도라고 한다. 정신조종기라는 기계에 대한 설명과 그 사용 방법, 또 번개총이 휘파람 소리를 내는 괴물을 쫓아내고 죽일 수 있다는 사실, 허스턴이 니알라토텝의 은총으로 시간 너머에서 위대한 이스족을 끌고 온 일에 대해서도 쓰여있었다. 지식을 뽑아내려는 용도로 그를 지하에 가둬뒀다고 한다.

 또 구겨진 편지 한 장이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다.

 

에드워드 개비건의 편지


 금속 헬멧에는 전설이 연결되어 있고, 전선 끝에 삼각 패드가 달려 있었다. 허스턴은 이 물건을 잡혀 온 사람의 기억을 지우고 저항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리는 데 사용한 듯했다.



 그곳의 지하에서 허스턴이 가둬두었다는 위대한 이스족을 만났다. 전기가 흐르는 센서를 문간에 설치해서 출입이 어려운 감옥을 만들었는데, 사람을 가둬둘 곳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아래쪽에 공간이 있어 어찌어찌 안으로 기어들어 갈 수 있었다.
 안에 들어서니 불이 켜졌다. 좁은 방 안에 그가 있었다. 3m 정도 크기의 원통형 형체가 마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는 공중에 떠 있던 금속 집게 블록을 잡고는,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입으로 보이는 곳도 찾을 수 없었고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으나 머릿속에서 곧장 목소리가 울렸다.
 그 이스족의 이름은 카카카탁으로, 그는 나를 오랜 친구라고 불렀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었지만 그는 1차원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라며,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마치 나를 어르듯이 이야기했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인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면 자신도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오래전에 친구였고 서로 부탁을 하나씩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약속을 지키러 온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가둔 퓨즈를 꺼달라고 했다.

 우리는 카카카탁의 자유를 되찾아주었다. 그는 보답의 의미로 질문 하나를 해도 좋다고 말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사교도들을 막을 방법이 있을까요?”
 “세상이 멸망하는 건 이미 순리적으로 정해져 있는 일이네.”
 “그러면 그걸 미룰 방법이라도.”
 “내가 아는 미래는 그렇지만, 미래가 한 가지로 고정되어있는 건 아니야.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 이 말은, 당장 멸망을 막는다고 해서 세상이 온전히 안전해지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네. 사실이 그렇다 한들 해야 한다면 몇 가지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는 있겠지.”
 그는 차분하게 사교도들이 자리 잡은 몇 가지 장소와 방법,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이름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그의 감정 표현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 없기는 하지만 내가 알아들은 바가 옳다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자네가 지금 어느 시점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성공하기를 바라.”

 나 역시 그걸 바랐다.

 

 

 


1925.9.21


 달이 뜨는 날에 맞추어 동굴 입구 부근에 을 새겼다. 완성된 눈은 은은하게 빛이 났다. 이런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제대로 된 게 맞을까. 어지럼증 속에서 느리게 가늠하며 그 미약한 빛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전보다 더 어지러웠다. 오래 쓴 물건의 모서리가 닳듯 영혼의 일부분이 마모되는 기분이었다.
 더없이 선명하던 확신이 서서히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주저함, 망설임, 슬픔. 무력감. 그런 것들이 그림자처럼 들러붙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끝이 있을까? 있다면 나는 왜 더는 상상할 수가 없을까. 어째서 끝을 그릴 수가 없을까.

 

 

 

1925.9.27


 우리는 시드니에 도착했고 이번 여정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던 다지 교수와 작별했다. 또, 내내 고민에 잠겨 있던 자오가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짧고도 길었던 그의 가출이 바야흐로 끝난 것이었다.
 나는 맥이 탁 풀려서, 이렇게 바로 돌아간다고 얘기할 줄 알았으면 말리지 말 걸 그랬다고 농담을 걸었다. 기껏 허락해주자마자 돌아가겠다고 하다니요,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하고.
 원래 붙잡고 말리면 더 하고 싶은 법이라고요. 그것도 몰라요? 그는 불평하듯, 짐짓 쑥스러워하며 미간을 찡그렸지만 나는 아주 마음이 놓여서 그냥 웃기만 했다.
 중국에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고 그의 손은 그곳에서 고귀하게 쓰일 것이었다. 그거면 되는 이야기였다.
 무얼 보상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보상이 되지도 않을 테지만 짧은 며칠 동안 우리는 제법 잘 지냈다.
 그가 떠나기 전에 나는 묵혀둔 말을 꺼냈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 얘기인데, 혹여나 그때 했던 얘기는 마음에 두지 말라고, 나는 다 잊어버렸다고. 잘 지내라고.
 자오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머뭇거리다 툭 뱉었다.

 있잖아요… 형도 좋은 사람이에요.

 나는 그 말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자오가 돌아간 날에 프리스비와 술을 마셨다. 사겠다고 해서 산 것은 사실 핑계고 내가 마시고 싶었다.
 “이럴 거면 왜 그랬어요, 진짜? 솔직하지 못한 인간이네….” 프리스비는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듯 나를 봤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나는 손을 얼굴에 짚고 중얼댔다. “좀 더 좋게 얘기해줄 수 있었는데.”
 “어차피 똑같이 말했을 거잖아요.”
 “그래도 예전 같았으면…… 좀 더 잘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데 말해 뭐하냐고요.”
 “프리스비 씨가 다 맞아요….”
 “아, 그런 생각 좀 하지 말아요! 옆에 있는 사람이 더 보기 힘드니까.”
 “제가 너무 제 얘기를 많이 했나요?” 아무래도 그랬다. 프리스비에게는 지나치게 얘기를 털어놓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왜, 이제 제 얘기도 듣고 싶으세요?”
 “예….”
 나는 코를 박고 있던 잔에서 겨우 고개를 건져 프리스비를 쳐다보았다.
 그는 술잔을 가볍게 빙글 돌려 그 안에 소용돌이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저는, 그냥 습관이 그렇게 되어서…… 원래가 그렇게까지 정을 안 붙이려고 해요. 제가 일라이저 씨보다 더 무책임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프리스비 씨는 중국에는 다시 안 돌아가실 건가요?”
 “아. 그게요. 제가 사실 일라이저 씨한테 말 안 한 게 있는데. 중국에 가면 메이벨을 만나야 하잖아요. 근데 제가 사실 마지막 날에 메이벨이랑…… 잤어요.”
 나는 순간 멈칫했다. “메…이벨 씨랑요?”
 “어쩌다가 분위기가 그렇게 돼서~ 그래서 다시 만나면 좀 어색하지 않을까나~.”
 “아니 그때 저도 같이 있었는데 어떻게… 아. 아니요. 말하지 마세요….”
 프리스비가 킥킥 웃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자오한테 팔찌를 주셨길래. 다시 안 돌아가실 건가 했는데.”
 그 허티옥 팔찌는 제비 부인, 그러니까 린옌위가 프리스비에게 준 일종의 애정의 징표이자 부적이었다. 
 “글쎄. 린옌위 씨랑은 더 깊게 얽힐 일이 없지 않을까요.” 프리스비가 가볍게 대꾸했다.
 “프리스비 씨는… 정리가 빠르시네요.”
 “살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너무 깊으면 피곤하거든요.”
 나는 불쑥 물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왜 달랐죠?”
 잭슨 엘리어스 얘기였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캐묻진 않았을 텐데 그날은 나도 많이 취해 있었다. 프리스비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가벼운 웃음이 일순 사라졌다.
 “사람이 살다 보면 내 의지랑은 상관없이 마음에 깊게 남는 사람이 있잖아요? 잭슨이 저한텐 그런 사람이었어요. 잭슨이랑은 오래 같이 있고 싶었거든요.”
 “하필이면. 괜한 친구 때문에 고생이네요.”
 “예에. 그래서 끝을 봐야겠네요. 돌아갈 수가 없네, 이제.”
 별수가 없었다. 여기에는 잭슨 엘리어스와 그가 말아먹은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일라이저 씨는 다 끝나면 뭐 할 거예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건가요?” 프리스비가 물었다.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나는 느릿느릿 대답했다.
 글쎄, 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1925.9.27

 나와 프리스비는 케냐로 향했다. 화물용 증기선을 타고 수에즈 운하를 통했다. 날씨는 나쁘지 않았고 배는 부드러운 항적을 그렸다. 수면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나쁜 꿈을 꾸었다.
 새카만 어둠이 나를 감싸 안고 손짓했다.
 꿈에서 나는 피투성이가 된 제이덕을 하염없이 붙잡고 있거나, 쓰러진 프리스비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막으려 하거나, 이제는 몇 조각인지도 모를 자오를 다시 하나로 모으려고 했다. 나는 또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을 계속해서 겪었다.
 자, 지금까지 알던 세상을 잘 되짚어 보게. 뭐가 진실인지 잘 생각해보라고. 턱이 없는 허스턴이 그륵거리며 웃었다.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사실은 꿈속에서, 진실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그륵, 그르륵.
 닥쳐, 닥치라고… 나는 짓눌린 목소리를 겨우 뱉어낼 뿐 그 무엇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을 아는 괴물이 가까이에 있었고 나도 그의 이름을 알았다. 나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호주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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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황을 알아보기 위해 슬래터리 일가를 방문했다. 문을 두드리자 중년의 남자가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숨결에서 찌든 술 냄새가 풍겼고, 외지인에게 호의적인 기색은 아니었다. 우리는 학술 목적으로 부근에 들른 일행이라고 적당히 둘러댔다. 하룻밤만 묵게 해준다면 섭섭지 않게 보상하겠다고 설득해서 침실 하나를 얻었다.
 슬래터리 일가의 집은 방이라고는 세 칸이 전부인 좁은 오두막이었다. 여러모로 관리가 안 되어 어수선했다. 집에는 아들이 둘 있었다. 첫째는 열다섯 살 프랭크, 둘째는 열 살 제코였다. 제코는 손님이 오건 말건 주변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유독 프리스비에게는 꼭 달라붙었다.
 문득 거실 테이블에 놓인 그림이 눈에 띄었다. 삐뚤빼뚤 크레용으로 색을 입힌, 도마뱀 괴물을 그린 그림이었다. 팔다리와 날개가 달린 올챙이 비슷한 형체가 두 발로 서 있었다. 종이의 흰 공백 사이사이 세 개로 갈라진 눈이 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눈이었다.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이라고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어딘지 섬찟했다. 제코에게 묻자 꿈에서 본 형상을 그렸다고 했다. 어린 제코는 낡은 하모니카를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었는데, 그 물건에 과민하게 집착했다.
 슬래터리는 아주 늦은 시간까지 거실 테이블에 혼자 앉아 술을 마셨다. 합석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집안 사정까지 듣게 되었다. 그는 원래 근처에 있던 금맥을 캐어다 먹고 살았는데, 금맥이 마르고 지금은 돈 나올 구석이 전혀 없었다. 딩고 폭포에 출몰하는 빌 버클리의 유령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슬래터리가 사리 분별을 하기 힘들 만큼 취하자 프리스비가 빌 버클리의 이름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그 순간 슬래터리의 표정이 일변하더니 불콰한 안색으로 더듬더듬 문장도 안 되는 말을 내뱉었다. 그놈이 숨겨진 금을 내놓으라고 제미마를 때렸다는 둥, 그렇게 죽어도 싸다는 둥. 그러다 종국에는 자기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며 양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워낙 조각조각 파편화된 이야기들이어서 온전한 사정을 알기는 어려웠지만 슬래터리가 빌 버클리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졌다.
 아이들 방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 가보니 자라고 방에 둔 자오가 술을 훔쳐 여기 들른 모양이었다. 잠시라도 얌전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건지. 프랭크는 이미 술을 진탕 마시고 뻗었기에 제코와 대화를 나누었다. 제코가 가지고 있는 하모니카는 빌 버클리의 물건이 분명했다. 아이가 완강하게 하모니카를 내어주지 않으려고 들어서, 결국 내 손목시계를 주고 잠깐만 빌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물론 다시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
 다음날 날이 밝고 떠날 채비를 하는 우리에게 슬래터리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사막에서 벗어나는 길에 자기 자식들을 도시로 데려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런 벽지에서 먹고살 길이 막막하니 아이들에게나마 살길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사정을 들려달라고 했다.
 슬래터리의 이야기는 이렇다. 빌 버클리와 번 슬래터리는 친구이자 동업자였고, 둘은 15년 전 함께 금맥을 발견했다. 제미마는 사이좋게 지내던 원주민 여인으로 이따금 그들의 숙소를 방문하여 두 사람을 도와주었다. 일이 계속되면서 슬래터리와 빌 사이에 의심이 싹텄다. 그들은 서로 상대가 몰래 금을 빼돌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중 빌의 의심은 합당했다. 실제로 슬래터리는 캐낸 금의 일부를 가로채고 있었다. 이후 슬래터리와 제미마 사이에 아이가 들어서며 둘은 결혼하게 되었고, 빌과 슬래터리는 갈라섰다. 그러다 3년 전에 불쑥 빌 버클리가 찾아와서 빼돌린 금을 내놓으라며 제미마를 협박했다. 슬래터리가 도둑이 든 줄 알고 빌을 쐈는데, 눈먼 총알에 제미마가 맞고 말았다. 제미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슬래터리는 그 순간 눈이 돌아 살려달라고 비는 빌을 끌고 가서 태워 죽였다.
 우리는 슬래터리 가에 있던 빌 버클리의 소지품을 전부 가져와 그의 시체와 함께 묻어준 뒤 떠났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딩고 폭포에서 벗어나 한참 사막을 달리고 있는데 자오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가진 돈을 몽땅 털렸다는 것이다. 얼마 갖고 있지도 않았을 텐데 호들갑이 심해 물어보니,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의 집에서 훔친 돈을 조용히 혼자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 손버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자오는 아직도 뒷좌석에서 군소리하고 있다. 그 프랭크라는 소년도 어디에 내놓든 굶어 죽지는 않을 듯해 다행이다.

 

 


1925.8.1

 여전히 붉은 사막을 항해하고 있다. 울퉁불퉁한 흙이 쌓이고 다져진 바닥은 매우 거칠어서 지프를 타고 오래 달리다 보면 온몸이 다 쑤셨다. 간혹 흙먼지 냄새가 나는 바람을 뚫고 시선을 사로잡는 경이로운 풍경이 드러나면 기지개도 켤 겸 차를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이곳 불모지의 풍경은 도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원색적이고 강렬했지만 동시에 모든 일을 모래 밑에 파묻어놓고 말이 없는 성자처럼 고요했다. 태풍의 눈에 들어선 듯 막연한 정적의 순간 속에서 해묵은 긴장감만이 등 뒤로 그림자처럼 늘어졌다.
 오후 즈음엔가 반나절 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사막의 길 위로 인영이 하나 나타났다. 지친 모습의 원주민 여인이었는데, 사막 한가운데에서 만난 사람치고 제대로 된 짐이나 이동 수단 하나 없이 빈손이었다. 우리가 차의 속력을 줄이고 다가가자, 잔뜩 겁에 질려서 도망을 쳤다. 그 여인은 백인 남자를 무서워했다. 나는 차와 함께 좀 멀찍한 곳까지 떨어져서, 다른 일행이 그를 달래고 얘기를 나누는 동안 기다렸다.
 그 여인은 지하에 갇혀 살면서 강제로 땅을 파는 노역을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잡혀 온 사람들이 많았고, 모두가 감시하에 혹독한 노역에 시달렸다. 금광을 찾는 것도 아니면서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막연히 땅을 파라고 시켰다. 그는 그 끔찍한 장소에서 겨우 도망쳤다. 그런 일을 겪은 와중에 자동차가 뒤쫓아 오니 겁에 질릴 만도 했다.
 그는 며칠간 사막을 헤맨 탓에 자신이 도망쳐온 곳의 정확히 위치는 알지 못했다. 우리 일행의 목적지가 그가 갓 벗어난 사막 안쪽을 향하고 있다 보니, 함께 가자는 제안은 단칼에 거절당했다. 여분의 음식이며 모포 등 내줄 수 있는 걸 다 내주고 행운을 빌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맥퍼슨 산맥 사이를 지나 한참 나아가다 보니 비스듬한 바위 언덕 사이로 해가 걸쳤다. 야영 자리를 펴고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마른 장작을 모아다 불을 붙이자, 모닥불의 빛이 닿는 반경의 바깥은 온통 침침한 어둠에 잠겼다.
 나는 잠결에 뱀이 내 침낭 안에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극도로 차분해진다더니 정말이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불침번을 서던 프리스비를 불렀다. 프리스비와 브레이디가 도와준 덕택에, 군용 단도에 머리가 뚫린 뱀 사체를 두고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불길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데 마냥 기분 탓은 아닌듯했다.


 

1925.8.2

 저 멀리 동쪽 지평선에 걸친 아침 해가 흡사 반지에 박힌 진주알처럼 눈부셨다. 밤새 타오르던 모닥불은 재만 남아 곧 끊어질 실낱같은 연기 한 줄을 흘렸다. 아침 일찍 브레이디가 뱀의 머리에 꽂혀있던 단도를 묵묵히 뽑았다. 죽은 뱀은 피도 얼마 흘리지 않고 축 늘어져 있었다.
 말로와와 니빌 우물 사이의 길목에는 자동차 바퀴 자국이 흉터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다수의 차가 이 부근을 오간 듯했다. 그 역력한 흔적이 북쪽의 모래언덕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다지의 인도를 따라 캐닝 목축 도로를 벗어나 바퀴 자국들 위로 올랐다.
 모래언덕을 넘어가는데, 모래 사이에 묻혀 있던 돌을 잘못 밟았는지 차가 크게 덜컹하고 뛰었다. 그 뒤로 주행 방향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불안정했다. 내려서 살펴보니 자동차 바퀴 축에 문제가 생겼다. 트렁크에 있던 공구로 적당히 손을 봐두었지만 임시방편이었다. 사막을 벗어나면 제대로 정비를 맡겨야 했다.
 고생 끝에 언덕을 넘었다. 저 멀리 높다랗게 솟은 바위 부근에 방치된 텐트 골조 십여 개가 눈에 띄었다. 본디 멀끔한 텐트를 이루었을 천들은 삭고 찢어졌는지 골조에 겨우 발끝만 걸치고 나부꼈다. 폭발물 창고 건물과 목조건물이 그 사이에 우뚝했다. 골조 주변에는 짐이며 상자가 난잡하게 쌓여있었다. 버려진 광부들의 야영지 같았다. 우리는 부근을 찬찬히 탐색했다.

  • 상자 안에는 부품 조각, 튜브 같은 잡동사니뿐이었다.
  • 개중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텐트 내부에는 사람이 지낸 자취가 보였다. 유통기한이 남은 통조림과 먹다 남은 캔에, 기껏해야 어젯밤 아니면 오늘 아침에 자리를 뜬 듯했다.
  • 야영지 언저리에 주차된 낡은 포드 트럭은 흡사 거인이 밟은 것처럼 납작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날아온 돌에 맞은 것도 아니고 폐차된 것도 아닌데 기이하고 부자연스러웠다.
  • 텐트 뒤편 붉은 바위들 틈으로 어두운 얼룩이 보였다. 다가가 살펴보니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 흘렀고 그 아래 물을 받는 용도로 보이는 에나멜 대야가 놓여있었다. 다지는 이런 자연적인 샘물이 가능한지 의문을 품었다. 물은 맑고 시원했다.
  • 모래랑 자갈들 사이 드문드문 인간의 뼈처럼 생긴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대부분 형태가 온전했으나 부서진 것도 여기저기 보였다. 뼈에는 뾰족한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짐승이 씹은 흔적인 듯했다.
  • 텐트 주변에 거대한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무언가가 날아와서 앉았다가 다시 날아간 듯한 흔적인데, 발자국 형태로 보아 새는 아니었다. 발가락이 총 다섯 개 달렸고 발자국 하나 길이가 성인 남자 키만 했다. 
  • 폭발물 저장고 표시가 있는 창고 건물은 자물쇠가 뜯겨 있었다. 안에는 상자 두 개가 쌓여있었는데, 그 안에 모래에 반쯤 덮인 다이너마이트들이 들어있었다. 대략 40여 개 정도 되었다.
  • 목조건물은 갱도 입구였다. 승강기는 작동에 무리가 없었으나 갱도는 저 안쪽에서부터 무너져 내린 듯 토사에 파묻혀 있었다.

 

 승강기를 타고 올라오는데 밖에서 개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름 없는 언덕 쪽에서 딩고 네댓 마리가 우리를 지켜보듯 어슬렁거리다 그 너머에서 나는 휘파람 소리를 듣고는 휙 가버렸다.
 우리는 겁도 없이 딩고 발자국을 따라갔다. 가다 보니 개들 발자국 사이에 사람 신발 자국이 섞였다. 저 멀리 적갈색 개 여덟 마리가 보였다. 딩고 한 마리 한 마리가 거의 사람 만큼 컸고 개중에는 더 큰 녀석도 있었다. 그 사이에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오로지 옥스퍼드화 한 켤레만 단출하게 신은 남자가 서 있었다. 눈은 백내장이 낀 것처럼 뿌옇고 수염도 덥수룩해서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는 돌로 좁은 원을 만들어놓고는 그 안에 자신을 가둬놓았다. 우리를 보자마자 외쳤다. “이 사탄의 자식들아! 오지 마라! 개들이 너흴 찢어놓을 거다!”
 누가 봐도 광인이었지만 이런 불모의 허허벌판에 옷도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천천히 그를 달래며 담요며 입고 있던 외투를 건네주었다. 호의적인 제스처가 통한 것인지, 남자는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경계하듯 으르렁거리던 딩고들은 남자가 휘파람을 불자 뒤로 물러나 얌전해졌다.
 그의 이름은 제레미 그로건으로, 최근에 이 야영지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돌로 만든 원이 자기를 지켜줄 것이라며 절대 원 밖으로 나오려 들지 않았다. 우리를 보고 그 ‘미친놈들’이 온 줄 알았다면서, 사탄의 자식들이 와서 사람들을 때려죽였다는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그들이 못 달린 몽둥이를 들었냐고 묻자 어떻게 알았냐고 질겁하고, 우리를 의심하는 것처럼 빤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또 허공에 대고 자기 할 말을 중얼중얼 내뱉기도 했다.

 

제레미 그로건의 이야기

 

 존 카버북동쪽으로 남은 광부들을 데려간 것이 3년 전의 일이었다.
 누군가 이런 척박한 땅에서 3년을 홀로물론 개들과 함께하기는 하지만 살아남았다니 상상하기 힘들었다. 생활은 어떻게 유지하자고 묻자, 자기는 꿈에서 쉬고 먹어서 괜찮다고 했다. 꿈속에서 길손 여관이라는 곳에 자주 들린다며, 그곳 여관의 주인이 돌로 원을 만들어 몸을 지키는 법도 알려주었단다. 하지만 그는 자기 꿈속에서 있었던 일이며 나눴던 대화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했다. 묘한 이야기였다. 그는 꿈이라는 창구를 통해서 다른 세계나 존재와 접촉하는 게 아닐까? 호기심이 부푼 데다 마침 시간도 늦었기에 오늘은 그와 딩고들 곁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적갈색 황무지를 덮던 햇볕이 이울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모닥불을 켜고 일지를 정리하고도 시간이 조금 남아, 전에 랜돌프 운송 회사에서 가져온 기계를 만져보기로 했다. 사막의 풍경이 영감을 주는 건지 모호하게나마 방법이 떠올랐다. 심어진 씨앗이 기다리고 기다리다 알맞은 환경을 만나면 싹을 틔우듯이.

 

 

 


 일라이저 씨. 제레미 그 미친 노인네는 기억하시죠? 그 인간하고 머무는 중에, 당신이 그 단기 탐사 장비에서 뭘 봤는지 갑자기 쓰러졌어요. 깨어난 이후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여기는 다지 교수가 아는 원주민 숙영지에요. 어쩔 수 없이 맡기고 갑니다. 쉬고 계세요. 다 끝내고 돌아올게요. 프리스비.
 p.s. 일어나면 한 대 맞을 준비 해요.

 형, 정신 차리면 훔쳐 간 건 돌려줄게요. 자오.

 

 길이 엇갈릴 수 있으니 웬만하면 여기 있어. 볼일이 끝나면 케냐로 갈 예정.

 

 

 


 

 

1925.8.3

 프리스비 씨와 브레이디 씨는 밤을 꼬박 새운 듯했습니다. 건강에 좋지 않은데 말이죠. 걱정이 산더미 같은 상황이니 이해는 갑니다. 어젯밤 일행 중 한 분인 웨버 씨가 갑자기 쓰러진 뒤로 기억 상실 증세를 보였습니다. 아예 입을 열지 않고, 이쪽에서 먼저 말을 건네면 인상을 쓰거나 기묘한 표정을 짓고는 합니다. 저는 비록 정신병리 학문에는 문외한입니다만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마치 행동을 처음 배우는 어린애 같기도 하고 언어적, 문화적 사인이 다른 부족 간에 일어나는 소통의 삐걱거림 같기도 합니다. 그에게 접시를 들려주고 앞에서 먹는 시늉을 하자 저를 한참 쳐다보다가 제 행동을 따라 하는 식이었거든요. 아마도 일반적인 기억 상실의 형태는 아닐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래도 식사는 하셔서 다행이지요.
 이러니 어제보다 상태가 나아졌다고 판단하는 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관점일 겁니다. 자오 군은 여기 와서 죽을 건 각오했지만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다며 불평하더군요. 저는 솔직히 어리둥절해졌답니다. 아직 죽고 싶진 않은데 말이죠…… 무슨 무서운 농담을 하시는 걸까요, 다들? 든든한 사막 전문가 데이빗 다지―물론, 접니다!를 믿지 않는 걸까요? 아무튼, 소년이 겁을 먹은 듯해 사막에 들어온 사람들이 열사병에 걸려 이성을 잃거나 다치거나 하는 일은 언제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주었습니다.
 일행은 상의 끝에 웨버 씨를 근처 원주민 마을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한 달 반 정도 근방에 머무를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아예 처음도 아니거니와, 모두 저와는 안면이 있는 사이라서 흔쾌히 받아주었습니다. 물론 선금도 제대로 치렀지요. 웨버 씨가 가지고 있던 짐을 정리하면서, 일지와 펜은 그의 곁에 남겨두었습니다. 세 분이 돌아가며 빈 페이지에다 한 마디씩 적었고요. 그는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서 있었습니다.


 좌표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주변 풍경이 점차 사진과 비슷해졌습니다. 태곳적의 정취를 풍기는, 기이하게 풍화된 바위들이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일행은 바위들 사이로 차를 몰고 들어갔습니다.
 그때 저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는데, 순간 눈앞으로 뭔가가 휙 지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영원 같던 찰나가 지나자 차 유리창에 구멍이 뚫리더니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습니다. 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습니다. 머리 위쪽에서 다시 한번 총알이 스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차 어딘가에도 명중했는지 덜컹거렸고요. 운전석의 프리스비 씨가 액셀을 밟는데도 제대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요. 결국, 모두 차를 버리고 빠져나왔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차 뒤에 숨었습니다. 너머에서 빛이 반짝인 걸 보니 분명 저격수의 스코프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세 분은 그쪽으로 가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필요한 물건을 차에서 꺼내 주섬주섬 챙기며 다른 사람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긴 사막행 동안 정들었던 차가 완전히 고장 난 걸 보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릅니다. 자오 군이 저를 데리러 와서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짐작대로 저격수들이었다고 하더군요. 게릴라 무장 집단이 대체 사막 깊은 곳에서 뭘 하는 것일까요? 왜 호주에 그런 사람들이 있는 걸까요? 소년은 자기도 잘은 모르는데 아무튼 그 사람들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저는 아마도 어른들이 그에게는 복잡한 얘기를 생략하고 그렇게만 말해주었으리라고 짐작했습니다. (세상에, 안젤라. 아빠는 대체 무슨 일에 말려든 걸까?)
 다시 만난 프리스비 씨도 그리 시원하게 말씀해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는데. 고대도시 보고 싶으시죠?” “그렇죠.” “연구하다 보면 이상한 일 많이 보시잖아요?” “그……렇긴 하죠.” “한번 보시고 인상 깊은 것만 취사선택하세요. 상상 너머의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프리스비 씨는 앞으로는 더 위험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며 단단히 경고했습니다. 그런 곳에 이런 소년을 데려가는 게 너무 위험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자오 군은 열여덟이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안젤라 또래인 줄 알았기 때문에 조금 놀랐지요. “저희는 진짜 세계 멸망을 막으러 왔다니까요!” 열여덟 살 소년이 외쳤습니다.
 “어떻게 할래요, 지금이라도 돌아가실래요?” 프리스비 씨가 물었습니다.
 “이… 이걸 여기까지 와서 여쭤보시면 어떡합니까?!”
 “아니, 애초에 따라오실 때부터 경고했잖아요!” 사실 그땐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돌아갈 차도 없거니와 사막의 사 자도 모르는 사람들만 여기 두고 갈 수도 없었지요. 이게 만약에 정말 세계 멸망에 관련된 일이면 더더욱 가야 했지요.

 당시 제가 현장에 없었으므로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세 사람은 저격수들에게서 정보를 알아낸 듯했습니다. 그 뒤로 일행은 곧장 그들의 본거지로 향했습니다. 뒤따라 조금 걷자 사막 한가운데 뜬금없이 허름한 헛간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옆에는 차가 두 대 정도 주차 중이었고, 헛간 입구는 무장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들키지 않을만한 거리에서 기웃거리면서 헛간 주변의 기이한 바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위 밑 모래들은 인공적으로 파낸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 선 바위들은 하나하나 최소 만 년 이상 된 유물이었습니다. 그 표면에는 비록 세월과 바람에 마모되기는 했지만오목새김 그림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이 석조물들은 분명 문명의 표시였고 건축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습니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깨닫지 못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몹시 흥분해서 그곳에 새겨진 그림을 관찰하고 따라 그리며 기록을 남겼습니다. 정말이지 세기의 대발견을 목전에 둔 기분이었습니다. 당장 급한 일이 있어 기록에 원하는 만큼 시간을 쓸 수 없는 점만이 아쉬웠습니다.

 헛간 바깥쪽에는 광업 장비와 생필품, 기계 부품, 잡다한 무기 등이 쌓여있었습니다. 안쪽에는 발전기가 있고 계단을 따라 아래쪽으로 연결되어 있었지요. 일행이 헛간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람과 엎치락뒤치락했는데 그 과정에서 총이 발사되었습니다. 그러자 계단 아래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저희는 후다닥 뛰쳐나와서 숨었습니다. 간발의 차였습니다. 대여섯 정도의 무장인원이 두리번거리면서 저희를 찾더군요. 무장한 사람들로부터 급하게 도망치느라 사막으로 움직였는데 아뿔싸, 놀라서 허둥지둥한 나머지 방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한 시간 정도를 헤맸습니다. 정말 막막하고 면목이 없더군요. 제가 길을 잘 인도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그러다 대충 깎은 수염처럼 듬성듬성한 덤불이 있는 언덕을 넘었을 때 동굴이 보였습니다. 동굴 앞에 아까 헛간 앞에서 봤던 돌기둥 비슷한 바위들이 서 있었습니다. 전의 그 바위들과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진 듯했습니다. 이만치 떨어진 곳에도 건물이 존재했다는 건 정말로 이곳에 도시가 번성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제 추측은 확신의 색깔을 띠어갔습니다.
 문득 동굴 앞에서부터 이어진 2m 길이의 쓸린 자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커다란 자루로 쓸어내린 듯한 형태였습니다. 사막에 있을 법한 동물의 흔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의 흔적 같지도 않았습니다. 아주 거대한 새가 움직였다거나, 아니면 거대한 뱀이 기어갔거나, 황당한 추측 몇 가지만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확신할 수 있는 점 하나는, 만약 이 흔적에 호주의 대자연이 아닌 다른 원인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건 아주 거대한 존재이리라는 것입니다. 
 널찍한 동굴 입구에 서자 안에서 밖으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퀴퀴하고 묵은 공기가 느껴졌습니다. 순간 털이 쭈뼛 설 정도로 긴장이 되었습니다. 사막이 벌린 아가리 속의 새카만 어둠은 분명 제가 닿아본 적 없는 미지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지요. 그래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동굴 안에서 넘어지거나 길을 잃을 염려가 있으니 근처의 바위에 밧줄을 묶어놓고 늘어뜨린 뒤 움직였습니다. 내려가는 길은 몹시 경사가 가팔랐습니다.

 밑은 어둡고 서늘하고 고요했습니다. 헤드 랜턴을 켜고 둘러봤는데, 주변에 사람의 자취는 전혀 없었습니다. 먼지가 어찌나 두껍게 쌓였던지 그 위를 지나가면 발자국이 남으며 연기처럼 피어올랐습니다. 저희는 넓은 인공 건축물 내부로 들어온 듯했습니다. 돌을 자르고 짜 맞춰 만든 벽에 아치형 천장을 가진 건물이었습니다. 천장이 높고 주변이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드러난 모서리로 궁륭 형태를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벽을 이루는 돌에는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닥은 팔각형 블록이 깔린 평평한 길이었고, 복도는 일직선으로 쭉 이어졌습니다. 모든 광경이 경이로웠습니다.
 나아가다 보니 복도에 뚫린 정사각형의 거대한 구멍과 맞닥뜨려 더는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구멍의 너비는 4m 정도 되었습니다. 한때는 양옆에 지나갈 수 있는 다리가 있었던 듯한데 세월에 무너진 것인지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봐도 심연의 깊이를 알기 어려웠습니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저희가 있는 방향에 구멍과 비슷한 크기의 크고 얇은 판이 있었습니다. 경첩과 걸쇠가 매우 특이하게 생겼는데, 이 판이 구멍 덮개 겸 다리 역할을 하는듯했습니다. 다 함께 힘을 합쳐 판을 들어 올려 보려고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쩔까 궁리하다가 밧줄을 이용해서 한 명씩 차분하게 건너갔습니다.
 첫 번째 위기가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림길과 맞닥뜨렸습니다. 오른쪽 길은 어두컴컴하고 고요했습니다. 왼쪽 길은 저 멀리 희미한 빛이 보였고 어렴풋한 소리가 들렸는데, 공간이 워낙 넓어 소리의 정체를 분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저희는 왼쪽으로 나아갔습니다. 불빛의 정체는 인간의 발명품인 전구였습니다. 거기까지 걸어오니 자연스럽게 소리의 정체도 밝혀졌는데, 바로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음이었습니다. 이 길은 바닥에 쌓인 먼지도 적었고 사람이 다닌 자취가 남아 있었습니다. 복도 끝에서 또 갈림길이 나타나 망설이는데, 저 멀리서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희는 다급히 빛이 들지 않는 곳에 몸을 숨겼습니다.
 “입구 쪽에 누가 당했대. 그 녀석들 아냐?” “그럴지도.” “허스턴 님이 잡으라고 명령을 내리셨던걸.” “그 녀석들이 잡아주지 않을까?”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일행은 서로 무언의 눈짓을 나누더니 두 사람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기절시켰습니다. 무슨 특공 임무에라도 참여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순찰하던 친구 중 하나가 총을 발사하는 바람에 소리가 크게 울렸습니다. 또 누가 오는 건 아닌가 싶어 모두 바짝 긴장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멀리서, 정확히 방향은 알기 어려웠지만, 가냘픈 휘파람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희는 기절한 친구들을 잘 묶어서 숨겨둔 다음 도망치듯 갈림길 왼쪽으로 향했습니다.

 쭉 가다 보니 방의 입구가 보였습니다. 문은 없었고, 안쪽에서부터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웅장한 팔각형 공간이 드러났습니다. 너비도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천장은 까마득해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바닥의 육각형 타일은 정교하게 짜 맞춰져 있었고 어떤 원리인지 알 수 없지만 타일 아래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토록 드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빛은 대체 어떤 문명의 역작이며, 이들은 경이로움만을 남긴 채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요?
 어찌나 넓었던지 그 방을 가로지르는 데에만 십 분이 넘게 걸렸습니다. 반대쪽 입구로 나가자 다시 전구가 붙은 복도가 나왔습니다. 저희는 찾아오는 갈림길마다 꾸준히 왼쪽을 선택했습니다.
 그 너머에 사람 손길이 닿은 생활공간이 있었습니다. 방은 네 칸이었고 각각 사람이 만든 가림막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서 빈방을 둘러보니, 사감 없는 남자 기숙사 같은 풍경이 드러났습니다. 침낭이며 이불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벽에는 문란한 포스터가 붙어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곰팡이 핀 과일 껍질,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에 뼈까지 굴러다녔습니다. 엄연한 고대 유물의 일부에 이렇게 존중 없는 행패를 부리다니 충격이었습니다. 어지러운 바닥에서 구겨진 메모를 하나 발견해서 프리스비 씨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지하에서 찾은 쪽지

 

 이곳 복도의 발전기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계단 쪽에서 빛이 들어왔고 꾸준히 사람이 왕래했습니다. 더 다가갔다가는 들킬 위험이 커 보였기에, 저희는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가 반대쪽으로 향했습니다.

 이쪽은 길이 험준했습니다. 원래는 평범한 복도였다가 세월 때문에 무너져 없던 복도와 경사로가 생긴 듯했습니다. 길 한복판에 무너진 천장 때문에 생긴 돌무더기 언덕이 우뚝했습니다. 저희는 안전에 유의하며 천천히 언덕을 넘어갔습니다.
 언덕 너머로는 복도가 여러 갈래로 이어졌고, 보이는 방도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더러는 방 입구가 무너져 진입이 어려웠고 더러는 잘 보전되어 있었습니다. 시험 삼아 멀쩡한 곳에 들어가 살펴보았습니다. 이 방도 역시나 일종의 생활공간으로 보였는데 특이한 점은, 현생 인류에게 맞춘 공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공간 자체도 확연히 넓었고 가구는 하나같이 길쭉하고 기이하게 생겼습니다. 가구라는 명칭도 사실 추측입니다. 가구처럼 보이는 물건들이긴 했으나 우리가 쓰는 가구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데다 용도를 짐작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문고리, 손잡이로 추정되는 부분도 기묘한 생김을 하고 있어서 인간의 손으로 잡기에는 불편해 보였습니다. 전체적으로 키가 현생 인류보다 1.5~2배 정도는 큰, 대략 3m 정도 되는 생물에게 맞춰서 지어진 공간이었습니다.
 방 여기저기에 책장, 장식, 각종 미술품이 놓여있었습니다. 이런 유물들은 주민들의 생활 양식을 추측할만한 좋은 증거물이 되어주기에 문화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미술품에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는데 눈여겨볼 만한 특정한 형상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아마 주민들 자신, 혹은 그들이 모시는 신을 그린 것으로 보였습니다. 원통형 몸체에 위쪽에는 촉수처럼 신축하는 기관이 달린 존재였습니다. 머리처럼 달린 촉수에 입 대신 꽃을 닮은 섭식 기관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곳 어디를 가도 랜턴 빛이 공간의 끝까지 닿지를 않았습니다. 그만큼 이곳이 넓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공간 너머에 무엇이 있고 이 세계가 어디까지 확장될지 짐작도 가지 않았습니다. 경이로운 거대도시가 사막 밑바닥에 존재했습니다. 학계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물론 준비가 안 되어도 받아들여야겠지만! 발견이 언제 사람들을 기다려준답니까!


 이런저런 생각에 희희낙락하며 주변을 훑다 보니 문서로 추측되는 물건들도 찾았습니다. 한 장짜리도 있었고 여러 장을 엮어 제본한 물건도 있었는데, 비록 크기는 달랐지만 어딜 어떻게 보건 그 형태는 분명 이었습니다. 섬유질 종이는 긴 세월을 기적적으로 견디고 있었으나 조심스럽게 취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3m짜리 존재의 물건이라 일반적인 서적을 만질 때보다는 팔 힘이 더 필요했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고서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극도로 섬세하게 손끝의 움직임을 조율했습니다. 이런 순간마다 작은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마음이 경건해지곤 하지요.
 저는 이들 문명의 문자 체계를 살펴볼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안에 적힌 것은 역시 그 기원을 알기 힘든 문양 형태의 상형문자로, 자체적인 문자 체계가 존재하는 건 확실했으나 지금의 제가 가진 제반 지식으로는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쓰인 건지도 제대로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계속 들여다보고 싶더군요. 저는 꿈 꾸는 듯한 기분으로 그곳에 새겨진 기이한 문자들을 눈으로 훑었습니다. 랜턴 불빛이 비칠 때마다 말라붙은 글자가 기묘한 색으로 번들거렸고 종이가 한 장씩 팔랑팔랑 넘어갔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멈췄습니다. 더 넘길 낱장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맨 끝 페이지에서, 저는 이 책에서 제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단 한 줄, 서명, 같은 안료에 같은 필체로 이어져 쓰인 것은 로마자 알파벳이었습니다.

 

 일라이저 웨버.

 

 저는 순간 소중한 유물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섬스포가...어디보자...프로피티아(팬)... 아틀란티스 넥소스(팬) 코르디아(공식)...정도인가?? 프로피티아빼고는 스포가 쎄진 않고 자잘하게 나오는 정도인데 아무튼 다 개짱재밌는 섬이랍니다

내용도 세션중에 있었던 일 띄엄띄엄에 날조에 적고 싶은 것만 적어서 이쯤대면 같탁피플정도만 이해가능하지 않을지요 아무튼 전 재밌었으니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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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피티아에서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혈육 폴리케와 재회했을 때 헬레네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동생이 오만의 제물이 되어 자기 자신을 좀먹고 제멋대로 섬을 주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헬레네는 동생을 믿었다. 시티르는 이해할 수 없는 초조함을 갖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폴리케의 방자함을 벌하기 위해 하늘에서 제우스가 내던진 벼락이 세상을 뒤흔드는 순간에도 헬레네는 사랑하는 동생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폴리케가 여전히 그녀가 사랑하는 작고 귀여운 아이라도 되는 양 그러안고 벼락을 맞았다. 그 순간 헬레네가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데메테르의 가지가 삽시간에 나무로 자라나며 그 둘을 떨어트려 놓았다. 하늘을 향해 소리치던 폴리케는 그녀의 눈앞에서 숯덩이가 되었다. 순식간에 새카맣게 익어버린 몸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올라왔다.
 헬레네는 울부짖었다. 절규가 땅을 가득 채웠다. 시티르는 그 목소리를 듣는 일이 괴로웠다.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로? 그는 헬레네와는 달리 그 오만한 사제를 처음부터 포기했고 그녀에게 이런 결말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망이 눈을 가려 신에게 감당 못 할 거래를 걸 만큼 오만한 자들은 결국 타르타로스의 명부에 그 이름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요,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런데 왜.
 왜 그렇게 슬퍼해야만 해요? 고통은 너무 쉽게 전해졌고 숨이 가쁠 정도로 거슬렸다. 폭풍 속에서 온 날개깃이 뻣뻣하게 섰고 흉곽 안쪽으로 마구잡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정돈된 사고를 뒤흔들었다. 목 뒤가 뜨겁게 타올랐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날개를 펼쳤다. 자기가 무얼 하는지도 모른 채, 곧장 날아올랐다. 단 한 순간도 아래로 눈을 돌리지 않았던 까닭에 그는 깨닫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일 만큼 까마득한 높이까지 날아오른 후에도 그 비명은 여전히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만.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길게 펼쳐진 날개가 바람을 거스르고 때때로 그 틈 사이를 비틀어 율동하면서 마구잡이로 공기를 갈랐다. 하늘과 땅 사이의 높이는 땅과 타르타로스 사이의 높이와 같았다. 시인들이 즐겨 말하기를 청동 모루가 아홉 날 아홉 밤 동안 떨어지는 간격이었다. 직접 날아 올라본 적이 없는 자들의 과장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여도 잠깐 숨 돌릴 시간도 없이 이렇게 높은 곳까지 한달음에 올라와 본 적은 없었다. 세찬 비에 젖고 온갖 방식으로 학대당한 날개 근육에서 뜨거운 김과 서리가 동시에 피었다. 너무 가까이서 천둥 치는 소리를 들어서 귀가 먹먹하게 울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찼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무언가 씌인 사람처럼 벼락과 벼락 사이를 잽싸게 통과하며 몇 번의 날갯짓으로 구름 사이를 헤쳤다.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신과 인간의 세계 사이를 벗어났다. 그 너머에 닿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서 당장이라도 입으로 뱉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으려고 했어요, 그땐.”

 공허한 말이었다. 그는 자기가 본 찰나를 떠올렸다. 그 순간이 도자기 조각처럼 눈에 박혀 아무리 애를 써도 잊히지 않았다. 구름 위 젖빛 대리석으로 눈부시게 빛나던 세상. 시야를 채우던 거대한 손. 연회의 유희에 젖을 때 신들이 취하는 부드러운 외양이 아니었다. 자기 광휘를 최대한 끌어올려 무언가를 짓누르려 할 때의 모습. 제단에 나른하게 걸터앉아 기름과 뼈의 연기를 들이마실 때가 아닌, 죄지은 먹이를 낚아채기 직전의 찬란하고 영광으로 가득 찬 모습.
 진저리 날 정도로 잘 알았다. 나 자신의 한계 정도는. 막을 수 없다는 것쯤은. 하지만 아직도 귓가에서 그 비명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제발 멈춰줘. 더 듣고 싶지 않아. 뻗어오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은 그랬다.
시티르는 바다로 추락했다. 그가 바다에 뛰어들어 자신을 받았다고 했다.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또 이럴 생각이냐?”

 레온티오스의 불퉁한 목소리가 시티르를 다시 현실에 데려다 놓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시티르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지금 시티르가 머무르는 곳은 전에도 신세 진 바 있었던 좁은 침대 위였다.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목숨이 붙어 있는 게 기적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 순간 제우스는 관통하는 벼락의 주인이자 그 자체였고 그의 부드러운 인간의 살을 한 겹 덮고 있던 냉기의 바람은 갈가리 찢어져버렸다. 그의 날개는 불타서 사라졌다. 몸은 뜨거운 열기가 훑고 간 통증에 시달렸고 그는 며칠 내내 겪어본 적 없던 고통스러운 밤을 보냈다. 신체의 고통은 일부에 불과했다. 신의 선물은 그의 영혼에도 상흔을 남겼다.
 그래도 어쨌든 농담할 정신은 있었다. 이전에 겪은 바 있었던, 세상이 무너지는 절망은 아니었다. 신들이 자신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는 바. 

 “기회가 있겠어요?” 시티르는 그의 물음을 자조적인 방식으로 빠져나갔다. 정말로 또 그럴 계획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스스로 확신이 없어서였다.
 레온티오스가 앞에서 짧게 혀를 찼다. “다시는 그러지 마. 그런 일 없게 할 테니까.”
 “알아요. 나랑 어울리는 일은 아니었죠.”
 아직 한참은 일렀지만 이런 기억은 차라리 까마득히 지나간 일 취급하고 싶어서, 그는 현실의 풍경에 집중하며 눈앞에 있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왜 답지 않게 그런 짓을 하느냐고, 마저 덧붙이는 퉁명스러운 목소리. 찡그린 미간. 제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 눈매가 보였다.
 “그런데, 계속 서서 얘기할 거예요?” 대놓고 말을 돌리는 듯한 기색에 레온티오스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럼 내가 환자 자리를 뺏겠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온티오스는 시티르가 걸터앉은 침대 앞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팔짱을 낀 채였다. 올려다봐야만 했던 눈높이가 조금 아래로 옮겨갔다. 

 “그 위쪽은 어땠어?”

 레온티오스가 물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 몇 마디가 근처를 스치는 것만으로 각인된 그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도망가고 싶은 감각까지 뒤쫓아왔지만 더는 날개가 없었다.
 “별것 없던데요.” 시티르는 허세를 섞어가며 평소보다 가벼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새삼스러운 감상이 남을 만큼 오래 머물렀던 것도 아니었다. 멋지고 새하얀 곳이긴 했으나 그걸 떠올리고 부러워하면서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들기도 싫었다. 하지만 눈앞의 레온티오스는 여전히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재밌지 않아?”
 “내가 신이라도 됐다면 그랬겠죠. 난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는 법은 잘 몰라요.”

 송진처럼 뭉근하고 끈적하게 몸에 달라붙어 있는 통증, 평소보다 날을 세운 자기방어가 평소였다면 쉽게 읽어낼 만한 것들을 방해했다. 시티르는 그가 무슨 의도로 그렇게 물어오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는 원래 신들의 세계 같은 것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두던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레온티오스 씨가 그쪽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는데.”

 그는 순간 허를 찔린 표정을 했다. 이내 입술이 단단하게 다물렸다. 얼핏 무언가를 걱정하는 것 같기도, 막연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의아해진 시티르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느릿한 움직임으로 그의 뺨에 한 손을 얹었다. 자기가 모르는 게 뭐건 간에 펼쳐놓고 조금 더 만지작거리고 싶었다. 불건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관심 있어요? 궁금해요?”
 그는 한참을 침묵했다.
 “아냐.” 그러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관심 없으면 됐어.”

 레온티오스는 그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만지작거리던 손안이 허전하게 비었다. 그 존재감은 좁은 방을 채우다가 몇 번의 발걸음으로 너무 쉽게 빠져나가려 했다.
 그 순간 텅 빈 손끝에서부터 묘한 한기가 일었다. 겪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견디기 힘들 만큼 생소한 느낌이었다. 고작 몇 걸음 움직인 것뿐인데 그가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곳까지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한 시티르는 자기도 모르게 툭 뱉었다. “가지 말아요.”
 “조금만 더 여기 있어요.”

 그리고 찰나의 정적. 살짝 벌어진 나무의 틈새로 미약한 빛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공기 중에 가볍게 먼지가 떠도는 게 보였다. 반응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을 먼저 내던지는 일은 늘 낯설어서 시티르는 말과 말 사이의 공백에 묘한 긴장감까지 느꼈다. 지금이라도 그냥 장난이었다고 둘러댈까? 그가 정말로 그 말까지 토해놓기 직전에 레온티오스가 묵묵히 뒤돌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서 시티르가 비워둔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짚을 깐 리넨 천이 옆으로 조금 기울었다. 시티르는 자기도 모르게 시트를 구겨 쥐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을 풀었다.
 둘은 한참을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나뭇결 너머로 파도가 뱃전을 건드리고 가는 소리만이 미약하게 울렸다. 시티르는 아주 느리게 깨달았다. 자신이 겁에 질렸다는 것. 이 비좁은 배 안에 갇혀 더는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 적어도 지금 당장 혼자 있고 싶지는 않다는 것. 그런 나약함은 직접 이해한 뒤에도 그다지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꾸며도 매끄러운 말로 나오지 않았고 자기 약점을 투박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게 최선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레온티오스였다.
 
 “너 아직도 고향에 돌아갈 마음 없어?”
 “그다지요.”

 평소 같았더라면 뒤에 올 말을 기민하게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었다. 질문 자체보다는 질문 너머를 보면서.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는 자신을 뒤따라올 재앙, 날아서 지나치던 곳을 두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미래, 그런 것들이 먼저 떠올랐다.
 레온티오스는 어울리지 않게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럼, 너만 생각 있으면 나랑 같이 갈래? 내 고향에.”

 ……네? 시티르는 순간 눈이 동그래져서 돌아보았다.

 


 
  2
 헬레네는 화상에 바를 쓸만한 연고를 들고 왔다. 그녀는 늘 그랬듯 신중했다. 그의 등에 임시로 덮어둔 천을 떼어내고 그을린 상처를 확인했을 때도 그저 짧게 숨을 들이켰을 뿐 티를 내지 않았다. 지금 당장 그런 순간까지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았던 시티르는 그런 배려가 고마웠다.
 헬레네는 곧 소식이기도 했다. 그가 하늘에서 떨어진 직후 정신을 잃었기에 듣지 못했던 섬의 뒷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데메테르 여신의 도움으로, 그리고 그 뜻을 짐작하기 힘든 운명의 여신들의 안배로, 폴리케가 새카맣게 불타 죽었던 그 자리에서 붉은 꽃이 피어났고 그녀가 여신 휘브리스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걸로 괜찮은 건가요?” 여동생에게 일어난 이 일이 헬레네에게 무슨 의미인지 단박에 이해하기 어려웠기에, 침대에 엎드려 있던 시티르는 고개를 돌려 찬찬히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살아 있으니까. 비록 내게 익숙한 형태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헬레네는 어딘지 홀가분해 보였다.
 다행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제 팔들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더는 그런 슬픈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내게 눈에 보이는 증거보다 중요한 건 살아가다 보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감각이라네. 그 마음 하나만으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왜, 함께 별을 바라보고 있다면 멀리 있어도 닿아있는 기분이 들지 않나.”
 “흐음. 같은 걸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받는 건가요?” 알 듯 말 듯 했다. 그는 갑자기 주어진 문제를 고민하느라 두 다리를 번갈아 까딱거렸다.

 “그렇네. 그 애도 어딘가에서 나처럼 무사히 별들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당장 곁에 함께 있는 게 아니더라도요.”
 “자네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지 않나?”

 그런가, 그는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항상 그의 곁에서 자기 힘을 증명하는 아버지조차 헬레네가 자기 동생에게 하듯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북풍은 태어나기를 차갑고 날카로우며 폭력적인 바람이었고 그를 들어 올리는 힘이었다. 하지만 헬레네가 동생에게 보인 애정은, 글쎄, 한없이 따뜻하다가도 가끔은 너무 뜨거워서 자기 자신까지 파괴하는 힘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턱없이 위험했다. 사람을 순식간에 번개에 뛰어드는 바보로 만들질 않나, 척 봐도 자기를 죽이려는 수작에 걸려들 만큼 이성을 날려버렸다. 그런 열기를 탐냈다가는 그 불씨가 순식간에 자신을 태울 걸 알고 있었다. 이번만 하더라도 충분히 배운 참이었다. 그저 그 끄트머리에 스치듯 닿았을 뿐인데 자기 통제를 잃고 날뛰다 바다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그렇게까지 다 죽어가면서 생각하고 싶은 남이 있냐고?
 “아뇨.” 마음의 문제라는 게 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기만 했더라면, 분명 사양했을 것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진저리를 치고 도망갔을 것이었다.

 “정말 없나?”

 하지만 헬레네는 레온티오스가 아니었다. 눈치가 좋았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녀의 눈썹이 파도처럼 물결치는 게 느껴졌다. 시티르는 못 이기겠다는 듯 웃었다.

 “헬레네 씨……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왜 또 모르지 않나. 자네에게도 소중한 사람이 있을지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전적으로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시티르는 순순히 인정했다.

 “정말이지, 헬레네 씨 반만이라도 눈치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다. “어쩌겠나? 그렇게 눈치 없는 놈인 걸 알고 반한 거 아닌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또 할 말이 없긴 한데요.”

 하긴 이제 와 누굴 원망하는 것도 우습기만 했다. 시티르는 제 팔 위에 턱을 괸 채 한숨을 쉬었다. 네가 관심 없으면 됐어. 레온티오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을 때 그 빈 자리에 남았던 소슬한 한기가 떠올랐다. 어떤 뜨거운 것이 놓였다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는 휑한 느낌. 그런 감각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서 못내 거슬렸다. 자기 자신도 제대로 모르니 남에게 설명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추위를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스스로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여기면서 살았는데,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그렇지가 않네요. 전적으로 당신들이 원인인데, 나는 아무래도 탈 배를 단단히 잘못 고른 것 같아요. 이 배에 너무 오래 있어서 이상한 물이 들어 나까지 바보가 되는 기분이라고요. 샐쭉하게 불평을 할 수도 있었겠으나 헬레네에게 그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생각의 가닥을 옮겨 다른 얘깃거리를 더듬었다.

 “저, 헬레네 씨는 애초에 왜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던 건가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얘길 들으니 궁금해져서요.”

 그 물음에 헬레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가늠하는 것 같기도 했고, 눈을 감지 않고도 한참 먼 곳에 닿았다가 온 듯도 했다. 그는 날개가 있어도 못 하는 재주였다. 그녀는 편안한 동작으로 굳은살이 박인 한 손을 자기 무릎에 내려놓았다. 뿌리가 깊은 사람 특유의 선명한 눈동자가 있었다.

 “언젠간 자네도 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거야. 거기에 무언가 있다, 없다 하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일 뿐이라네.”
 “그만큼 중요한 곳이라서?”
 “아무것도 없어도 그게 내 고향이니까.”

 있을 자리가 있다는 감각이 꼭 그럴까?
 온 하늘이 내 것 같던 날들, 한없이 자유로웠던 날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는 어디든 갈 수 있었고 원한다면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빛날 수 있었다. 그런 것을 다 내버리고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레온티오스에게 함께 가자는 얘기를 들은 뒤로, 시티르가 막연하게 상상이나 해보던 그 감각을 헬레네는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듯했다.

 “그런 곳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나한테도 좋은 일일까요.”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지만. 시티르는 한쪽 팔에 고개를 기댄 채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매번 헬레네 씨를 보면 신기하다고 할지 배울 게 많다고 할지, 제가 전혀 모르는 걸 많이 아시네요.”
 “사람마다 사는 게 다르니 말이야. 나도 똑같이 자네에게 배운 점도 많고 새로 이해하는 것들도 많다네. 그러니 재밌는 것 아니겠나?”
 “그러면 나쁘지 않은 친구인 셈이죠?”

 둘은 어울리지 않게 작당 모의를 하는 어린애들이라도 된 양 마주 웃었다.


 
 
  3  
 “다시 날 수 있을 거야.” 그가 자기 세계에서 기다리는 결말을 향해 떠나며 남긴 말이었다. 내 몫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너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4
 애착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 외에 다른 무언가가 내 마음 위로 비집고 들어오는 걸 무력하게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아낀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왜 간단한 생각 하나조차 내 마음대로 멈출 수가 없게 되었을까. 그리 세게 붙잡은 것도 아닌 손길 하나도 뿌리치지 못하게 되었을까. 언제든 내가 원하는 대로,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었는데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어버린 걸까. 거슬려. 생각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한껏 입꼬리를 휘어도 보았다. 거슬렸다. 아무 효과도 없었다. 몸이 끔찍하게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한순간도 홀가분하지 않았다. 가슴을 감싼 뼈마디 사이사이로 실밥이 마구 엉켜 있는 기분.
 끈질기게 훼방 놓던 운명의 실이 결국 나를 지하로 끌어당긴 그 순간조차, 어떻게 보면 이미 예정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추락이란 그런 의미였다. 신들의 뜻은 인간의 이해 너머에 있고 한번 운명이 꺾인 존재는 기어이 바닥을 본다는 것이 극작가의 순리였다. 나는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은 것들이 나를 아래로만 잡아당길까? 하나같이. 내가 저 먼 데까지 날아오르도록 도와주질 않아.
 그렇게 불평해도 개운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원인을 알고 있었다. 몇 마디 볼멘소리를 더 해봤자 정해진 사실은 확고했다.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이 아래에 정을 붙이고 머뭇거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헤어나기 힘든 사랑에 빠진 것도, 자신과 운명이 묶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그 노인을 구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고향에 돌려보내길 선택한 것도, 남의 슬픔 때문에 이성을 잃고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은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러니 결과도 스스로 감당해야만 했다. 갈라진 땅의 살갗에서는 아레스의 발밑에서 나던 진한 흙냄새가 진동했다. 그 밑에 숨겨진 시체 구덩이의 악취, 수천수만 구의 냄새를 함께 맡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운명이 다하기 전까지 그가 행복하니 불행하니 쉽게 평가하지 말라고 했던가. 일이 모두 마무리된 다음에야 그 속뜻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있고 인간의 운명도 결국은 거기에 속했다. 그러니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바닥을 치는 게 어떤 기분인지. 
 


  

  5
 밤바다의 숨죽인 어둠을 가르는 대신 그 어둠에 기꺼이 잠기며, 헬레니우스 호가 나아가고 있었다. 뱃마루가 느릿하게 흔들렸다. 그는 갑판에 맨발을 디디고 선 채 둘러보았다. 바다는 역청처럼 검었고, 하늘에는 별 한 점 없었다. 새카만 해무에 싸인 듯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희미했다. 신들이 태어나기 전 태초의 공허가 이런 색이었을까? 까마득히 높은 곳에 뜬 은빛 달만이 반쯤 감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 단조롭고도 비현실적인 풍경을 보며 시티르는 생각했다. 꿈이구나.
 꿈은 아름답지만 언제나 미심쩍고 의뭉스러운 신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거쳐 나오는 문은 두 가지였다. 진실한 예지의 소식이 걸어 나오는 뿔의 문. 괴이하고 망령된 속삭임이 태어나는 상아로 된 문.
 이 누추한 곳까지 도착한 이야기는 어느 쪽일까? 그는 기지개를 켜듯 양팔을 죽 늘이고는 갑판에 팔꿈치를 댔다. 지금쯤 그의 잠든 몸은 카론의 배에 실려 아케론의 가장자리를 떠돌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깜빡 조는 중인가 보지. 아무렴 사자의 강변의 시시하고 소름 끼치는 풍경에 비하면 익숙한 이곳이 훨씬 나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랐을 때,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티르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얼굴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아래로 훅 내려앉았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얼굴이었는데 보자마자 눈을 뗄 수 없었다. 시티르는 제자리에 굳어버린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시티르가 그러건 말건, 레온티오스는 성큼성큼 다가와 곧장 그를 끌어안았다. 오래 머뭇거릴 새도 없이 익숙한 묵직함이 온몸을 감쌌고 순식간에 오감이 한 사람으로 가득 찼다. 익숙한 살갗의 냄새, 금방까지 따뜻한 불 가에 있다가 온 사람한테서 나는 옅은 그을음 향기가 났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게 신들의 자비일까. 아니면 더 큰 비극을 위한 조금의 유흥일까. 목구멍 안쪽이 따끔거렸다. 이건 그저 꿈이야. 알고 있는데도. 모든 일이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그가 곁에 있는듯한 현실감에 묶였다. 붙잡듯 자신을 끌어안은 손길은 뱃고물을 항구에 매는 밧줄처럼 단단했다. 한편으로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신기루를 안는 것처럼 조심스러우면서.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목소리는 닿은 몸의 울림을 통해 전해졌다. 가라앉은 숨결이 바로 귓가에 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도 확신도 없으면서, 시티르는 달래듯 속삭였다. 정말로 그렇게 믿는 사람처럼 다정한 말씨였다. 그 말은 허공에 잠시 떠 있다가 의미 없이 흩어졌다.
 그의 품은 따뜻하기보단 뜨거웠다. 정돈되지 않은, 거친 맥박이 느껴졌다. 억누르고 있었지만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울고 있다는 것쯤은. 시티르는 천천히 양손을 들어 그를 마주 안았다. 그가 자신을 완전히 품에 가둔 것에 비해 지금 자기가 덮어줄 수 있는 공간은 미약했다. 날개가 있었다면 전부 가려주었을 텐데.

 “네가 얘기하던 걸 들었어.” 문득 그가 말했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자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깨어진 하늘의 조각에서 튀어나온 다른 세계의 자신은 신들의 뜻을 전해주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있었다. 지겨워. 재미없고, 시시해. 그저 그렇게 불평을 늘어놓을 뿐 이유는 전혀 몰랐다. 그런 모습이 예전의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해주어야만 했다. 그의 옆에 앉아서 듬성듬성 꿰맨 이야기를 내려놓을 때만 해도 자신의 말을 누군가 듣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당황한 시티르가 뭐라 입을 뻐끔거리려는데 메마른 여름 땅처럼 갈라진 그의 목소리가 꽂혔다.

 “넌… 대체 왜 그래? 뭐가 그렇게 매번 지겹고, 재미가 없어?”

 원망하는 투는 아니었다. 그저 말소리도, 태도도, 평소 같지 않을 뿐이었다. 평소 같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시티르는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것도 잊은 채 놀랐다.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내가 나로 있는 것이 그를 상처 주기라도 한 걸까? 내가 뿌리내리지 못해서, 그 모든 순간이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언젠가는 질려서 떠나버릴까 봐? 좁은 방에서 망연히 한발 물러서던 그 모습에서, 읽지 못했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았다. 그 자리의 이면에 서 있었던 건 선명한 불안감이었다. 그 순간에는 읽을 수 없었을 법도 했다. 서로 재밌으면 됐지. 그렇게 말하며 자신만만하게 눈을 빛내던 그의 모습만 보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더 많이 알았다. 차마 뿌리치지 못했던 손길, 되묻던 목소리. 모든 것을 잃은 눈을 알았다.
 그가 이렇게 날것의 자신을 내보일 때마다 시티르는 헤아릴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맨몸에 드러난 흉터를 하나씩 짚고 이야기해주었을 때, 코르디아의 절벽 아래서 본, 자기가 갈구하던 그러나 가지지 못했던 과거를 화난 목소리로 하나하나 씹어서 뱉어냈을 때. 아버지, 그렇게 발음할 때의 표정. 그는 자기가 느끼는 거라곤 무엇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했다. 부서지든 부서트리든 부딪혔고, 좋든 싫든 분명히 떠오르는 것이라면 내보이고야 말았다. 그 모든 움직임이 못내 낯설었다. 적어도 그가 배운 왕의 화법은 그런 식이 아니었다.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내 흠집을 남에게 내보여서 득이 될 거라 여겨본 적도 없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온전히 눈부신 신의 자식, 흠집 없이 닦인 조각상이어야 했으니까. 내 상처는 내가 아니니까. 그런 것은 가져본 적도 없으니까. 그게 그의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이었다. 언어의 세계에서는 거짓과 기만이야말로 무기고 방패였다. 그런데 그는 매번 서슴없이 무장을 내던졌다. 이상하지 않나요. 약점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마음껏 드러내니 모르기가 더 어려운데. 내가 이걸로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남이 걸어온 여정의 단면을 훔쳐보는 기분으로, 인생의 지도처럼 펼쳐진 상처를 만지작거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더라. 손으로 쓸면 단면이 거칠고 가끔은 움푹 들어간 흉터들. 몸과 마음에 각각 기록된 한 인간의 역사. 바꾸지 않기를 선택했던 당신이 당신이라는 증거들을 더듬어 읽으면서. 천성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있기 때문일까. 정말로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아서일까. 어쩌면 아무래도 상관없기 때문일까. 짐작만 더해갈 뿐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쉽게 옮아버리고 마는 것은, 아직 그가 어린 탓이었다. 아니면 사랑 때문에 정말 바보가 되었거나. 스스로 원하던 만큼 충분히 세련되지 못해서인지도. 혹은, 내심 부러웠기 때문인지도. 긍정도 부정도 없이 그저 한없이 자기 자신인 태도가. 그걸 보면 조금쯤은 털어놔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도해보기로 했다. 설명하고 싶었다. 닿을 수 있다면 닿고 싶었다. 그간 들여다본 적 없던 자기 자신의 약한 면은 암시와 방어기제로 가득 차 모호하고, 꿈속의 해안선처럼 안개에 덮여 있으면서, 잘못 건드리면 덜 아문 상처처럼 따끔거렸다. 직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말을 자주 멈추고, 이따금 더듬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길을 헤매는 듯 조심스럽고 불분명한 태도였다.
 나는 허전해요. 가끔 아주 텅 빈 것 같은 기분을 느껴요. 금방이라도 공기 중에 흩어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될 때가 있어요. 내가 희미해지는 순간이 있어요. 무슨 짓을 해서든 정적을 메우지 않으면 그 순간은 아주 빨리, 긴박하게 다가와요. 단편적인 즐거움 때문에 그 감각이 멈추는 건 아주 찰나고 모든 것은 이내 끔찍하게 지루해지지만 어쩔 수 없어요. 내가 아는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그래서 천천히 습관이 되었을 거예요. 기억하기도 힘든 먼 옛날부터 이 모든 게 내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나는 내가 비어있는 줄도 몰랐어요. 계속 추위 속에 있는 사람이 추운 걸 모르는 것처럼요. 바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여겼는데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람은 부정형이니까. 내가 아무리 용을 쓴들 멈출 수 없는 움직임이고 힘이지 가슴을 채우는 것이 아니니까. 불어오고 떠나면 그만이니까.
 그래도 말이죠.

 “당신이랑 있을 때는 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

 꿈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곁에 있는데도 말을 이어나갈수록 이상하게 그리운 기분이 목울대를 채웠고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다친 육식동물처럼 굴면서 고개를 더 깊이 파묻을 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시티르는 결국 상체를 조금 아래로 빼고는, 레온티오스가 덮어쓴 사자 가죽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 시선을 찾아갔다. 지금은 어떤 표정이어도 좋을 듯했다. 제대로 눈을 마주 보고 싶었는데 그럴 틈도 없이 입술이 겹쳤다.
 모든 것은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번만은 져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눈을 감고 천천히 받아들였다. 길지 않은 입맞춤이었다. 막 돋아난 깃털처럼 연약하면서 다시는 없을 것처럼 갈급했다. 마지막인 것처럼 힘겨웠다. 그 순간만은 그와 맞닿아 있는 부분만 온기를 알았다. 다른 부분은 그냥 꿈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난생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장 그럴 수 없는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각도 없이. 자기도 모르게 껴안은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영영 내려앉고 싶어. 이대로 질식하고 만대도 좋아. 딱 그만큼의 전율. 그만큼의 슬픔이었다.

 “데리러 갈게.”

 오래 참은 숨을 내쉬듯 쏟아져 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내가 어떻게든 할 거야. 다시 돌아오면… 너한테 빈 부분이 뭐든, 내가 채워줄게.”

 그 어떤 신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도 맹세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이런 마술은 그에게만 있는 재주였다. 시티르는 눈썹 끝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힘없이 웃었다. 내가 얘기하는 걸 다 들었다면서. 당신은 역시 전혀 모르네요.

 “이미 그러고 있는걸요.”

 그러니 데리러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려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차가운 안개에 덮이며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사라져갔다.
 시티르는 흐려지는 그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새길 듯 바라보았다. 노 젓는 소리가 오수에 스며들어 가까워졌다. 벌써 저만치 잠이 멀어지고 있었다.
 
 


 
  6
 “좋은 꿈 꿨어, 왕자?”

 시티르는 그렇게 하면 남은 꿈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오래도록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헤르메스의 매끄러운 입가에 파인 볼우물이 깊어졌다.

 “그건…… 관점에 따라 다른데. 부탁드릴 게 있어요, 아르고스의 살해자.”
 “말해 봐.”

 그편이 재미있어 보였기에, 헤르메스는 기꺼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황금 샌들의 전령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다. 그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헬레니우스 호는 정말로 저승의 입구에 걸쳐 있었다. 데리러 온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상아색 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잠깐이지만 정말로…… 그를 다시 만났던 걸까. 시티르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사실이라면 더더욱, 둘이 이쪽으로 넘어오게 둘 순 없었다. 여차하면 줄줄이 사이좋게 여기 갇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막무가내들만 두고 왔으니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최대한 빨리, 알아서 탈출해야만 했다. 거짓말이건 도둑질이건 할 수 있는 건 다 쥐어짜서라도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그 어떤 때보다 머리가 복잡했다.
 남의 타들어 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뱃사공은 꾸준히 노를 저어 나아가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이 강을 건너게 될 줄은, 아니, 설혹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짐작했어도 이 순간까지 이렇게 잔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시티르는 강에 어슴푸레하게 비친 자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조금의 웃음기도 남지 않은 얼굴. 노의 규칙적인 움직임에 간헐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드는.
 운명의 실이 어떤 식으로 꼬이고 얽혀버린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의 인생에 지독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무서워하던 모든 일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날지 못하게 되는 것,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되는 것, 운명의 불확실함만을 믿고…… 하여간 전부 지독한 농담 같았다. 한 철 폭풍처럼 몰아치고 쏟아져 내렸다. 이제는 남들은 모든 불행의 진정한 결말이라고 한숨 지을 하데스까지 와서.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게 인간이잖아. 아주 바닥까지 떨어지고서야 알았으니까,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 남아 있는 선물을, 나 역시 받았다는 걸.
 시티르는 자기 머리가 집안의 마지막 재산이라도 되는 양 하염없이 붙잡고 있다가, 무언가 즐거운 일을 관람하듯 턱을 괸 신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존경스러운 마이아의 아드님.”
 “으응. 듣고 있어.”
 “제가 하데스는 처음이라 그런데, 조언해줄 만한 건 없으신가요?”

 어디까지 알려줘야 재미있을까? 황금빛 시선 뒤로 저울이 돌아가는 게 보였다. 마음대로 재어보라지. 원하는 건 뭐든지 내어줄 수 있었다. 신의 광대 짓이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어디보자, 한 가지 정도는 괜찮겠지.”

 헤르메스는 얼굴에 드리운 미소를 감추지 않은 채로 가볍게 손짓했다. 시티르는 그에게 고개를 가까이했다. 신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중국편 요약 / 호주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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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요약.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면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게 기적에 가깝다. 내가 조금만 더 종교적인 인간이었다면 소명 의식마저 느꼈을 것이다. 몇 가지 주요한 사건들 위주로 간략하게 기록해둔다.
 먼저 다크 미스트리스 호에 몰래 잠입했다가, 배가 그대로 출발해버린 황당한 사건이 있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우리는 회룡도에 도착해 간단한 정찰을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하얀 뱀, A.P. 혹은 오브리 펜휴라고 불리는 칼라일 탐사대의 일원을 만났다. 그는 기묘하게 젊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불쾌한 주술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그를 물리쳤다. 아니, 물리쳤다고 생각했다.
 회룡도에서 탈출해 돌아오는 길에 배가 폭풍우에 뒤집혔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당시에 가지고 있던 대다수의 메모와 기록이 소실되었다. 카메라도 새로 구해야만 했다.
 그 뒤 간단한 정비의 시간을 가지던 중, 다가올 새 중국의 투사들(새중국)이라는 중국 내 게릴라 단체에 납치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들은 상하이의 부패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였다. 새중국은 사교도들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로 회룡도를 노리고 있었고, 우리는 마침 그곳에 다녀온 참이었다. 어렵지 않게 협력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곳에서 재클린 브레이디를 만났다. 그로부터 칼라일 탐사대에게 있었던 일과, 로저 칼라일의 행방을 들을 수 있었다.

 

012
브레이디의 진술

 

 호팡의 집에 브레이디의 연인인 췌이메이링이 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그를 도와 호팡의 집에 잠입했다. 새중국 소속의 어린애, 아니 젊은이 하나가(이름은 자오웨이라고 한다) 잭 브레이디를 지나치게 동경하는 데다 철이 없었는데, 이런 경향의 청년들이 흔히 저지르는 비행을 그도 저질렀다. 그러니까 몰래 숨어서 우리를 따라왔다. 중독되어 목숨을 잃을 뻔도 했고 누군가는 기묘한 주술이 걸린 끔찍한 방에 영영 갇힐 뻔하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해냈다. 췌이메이링은 고문으로 쇠약해진 상태긴 해도 구출에 성공했고, 다들 겨우 목숨은 붙인 채 살아 돌아왔다. 
 이후 호팡의 계획을 막기 위해 새중국 무리와 함께 회룡도에 잠입했다. 회룡도의 어두운 동굴은 심해에서 올라온 끔찍한 존재들과 그들이 부리는 질퍽한 액체 괴물들, 의식의 날을 맞은 사교도들로 붐볐다. 그들은 잡혀 있던 가엾은 사람들을 학대하면서 의식을 치렀다. 그곳에서 나는 직접 강림한 비대한 여인, 끔찍한 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이 촉수를 뻗어 펜휴의 머리를 쓰다듬자 죽은 몸이 움직였다. 되살아난 그의 동공은 저 너머의 숨겨진 비밀들을 담은 듯 어두웠다. 제사장이 돌아오자 사람들은 환호하면서 그들의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괴물은 자기 신도들을 게걸스럽게 잡아먹었다. 우리는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괴물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우리는 새중국 젊은이들과 함께 남은 사교도들을 상대했다. 적지 않은 희생이 뒤따랐다. 오브리 펜휴가 지옥에서 기어 나오는 일이 다시 없기를.

 

0123
사교도들의 기록

 

 우리가 호팡의 집에서 고생할 무렵 메이벨과 무셴의 현군칠장비경 연구가 진척을 보여, ‘눈’을 새기는 주문을 알아냈다.

 

눈을 새기는 법

 

 우리는 만월이 뜨는 날에 회룡도로 되돌아갔다. 우리가 겪었던 그 끔찍한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숨겨진 장소에 봉인의 문양을 새겼다. 이 세상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는데, 그날 이후로 무언가 중요한 것, 내 안의 작은 일부를 영원히 잃어버린 기분이다.
 메이벨은 중국에 남아 자료를 연구하면서 도움을 주기로 했다. 프리스비와 잭 브레이디는 함께 호주로 간다. 고작 몇 달을 함께했을 뿐인데 이제는 없었던 시절이 기억이 나지 않는, 슬픔이 맨 마지막으로 나를 뒤쫓아왔다. 꿈속의 불길한 목소리와 함께. 

 


 낭패다.
 뭐가 낭패냐고 하면…… 그러니까. 초대한 적 없는 진짜 마지막 손님. 새파란 어린애. 자기가 지금 뭘 하는 건지, 어디에 끼어든 건지도 모르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7월 4일에 상하이를 떠나 호주행 배에 올랐다. 그리고. 자오가 배에 탔다. 몰래. 이런 식의 사고를 예상했어야 하는데. 아니, 그런가? 이런 걸 어떻게 예상하지? 여권은 재클린이 구해준 모양이었다. 아무리 대책이 없는 막무가내라도 이런 일은 사전에 상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쏘아붙여도 전혀 듣는 눈치가 아니다. 자오 본인을 붙잡고 어른스럽게 설득해보려 했으나, 처음부터 듣는 시늉도 안 하더니 이젠 내 코빼기만 보여도 도망을 친다. 말이라도 한마디 걸려면 눈에 불을 켜고 온 배를 뒤져야 한다. 프리스비 씨마저 말리지 않는다.
 그래. 그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이런 걸 허락할 수는 없다. 그는 회룡도에서 있었던 끔찍한 일도 보지 못했다. 그런 건 영영 보지 않고 사는 게 좋다. 대체 이 배에 탄 사람들은 양식이라는 게 있는 건가? 어른이 되어서 하나같이— (쓰다 말고 줄이 죽죽 그어진 부분)
 ……이런 문제에 쓸 시간과 정신적 연료가 더는 없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내가 붙잡고 늘어져봤자 기름을 붓는 꼴이 될 것이다. 일단은 보류. 적당한 순간에 잘 설득해서 돌려보낼 것.

 

 

 

1925.7.22

 두통과 함께 시작해서였는지, 그게 무슨 징조라도 됐던 건지 이번의 항해는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 파도가 거칠었고 바람이 궂었다. 예상보다 시간을 더 써가며 호주에 도착했다. 적도를 지나온 이곳은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호주에서 확인할 일들의 목록을 몇 가지 정리해둔다.

  •  앤서니 콜즈 교수(시드니 캠퍼다운) 방문, 그에게 들은 ‘박쥐들의 아버지’ 기록.
  • 헨슨 공업 지하에서 발견한 운송장에 적힌 정보: 호주 랜돌프 운송회사 허스턴 앞 독사들의 아버지 황금상/고대 기계 부품/기술 도면과 청사진을 보낸 기록.
  • 펜휴 제단 지하에서 발견한 정보: ‘포트 다윈, 노던 준주, 호주’ 주소. 날개에 사슴 머리가 달린 스텐실에 ‘랜돌프 씨 직접 수령 요망’이라고 쓰여 있었던, 비만한 용의 조각상.
  • 미국: 프나코티카 필사본이 보여준 사막 위 고대도시의 환상. 관찰하는 정신들을 부르는 방법.
  • 중국: 호팡의 사무실에서 발견한, 호주 칸캇지리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에게 광업 장비를 보낸 기록.

 이렇게 정리를 마치고 나니, 새삼 내게도 정보가 하나의 무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이들 사교에 대해 아는 것이 이제는 적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 소유물, 장기 말들, 신의 이름까지. 동물들이 다른 무엇보다 자기 천적을 가장 잘 알듯이 그렇게 나는 매 순간 그들에게 골몰했다. 그들의 계획을 훼방 놓을 대책을 강구하고, 가진 지식을 되새김질하며 이따금 그 광기의 끄트머리라도 읽어보기 위해서 혹은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끔찍한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기도 한다.
 다행스럽게도 미움에는 이해가 필요 없다.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의 항구 도시 프리맨틀.
 입국 과정에서 프리스비가 세관에서 총을 압수당했다. 호주의 차별적인 정책 때문이었다. 남이 알아주길 바라서 하는 일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훼방이 놓일 때마다 지친다. 무기를 추가로 갖춰 둘 필요가 있다.
 배를 타고 퍼스로 곧장 이동했다. 도착한 직후 제이덕에게 받은 전화번호로 콜즈 교수에게 연락했다. 그의 대리인 데이빗 다지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콜즈 교수는 아직 미국에 있었다. 10월에나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으니, 다지에게 대신 연구 자료를 살펴볼 수 있겠느냐고 요청했다.
 이후 배편으로 시드니에 닿았다. 고층 건물들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기묘한 불균형의 그림을 그리는, 한창 개발 중인 도시의 모습이 만연했다. 콜즈 교수의 집은 시드니 대학 근처의 주거지 캠퍼다운에 있었다. 다소 헐렁한 인상의 다지는 스스로 콜즈 교수의 부교수라고 소개했다. 
 박쥐들의 아버지에 대한 자료는 전화로 들었던 내용과 일치했다. 눈여겨 볼만한 유리 건판 사진이 네 장 있었는데, 거대한 바위 옆에서 땀을 흘리는 남자들의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남자들 옆의 바위는 심하게 풍화된 상태였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광업 엔지니어 아서 맥워로, 콜즈 교수는 이것을 맥워의 재산 관리인 로버트 매킨지에게 받았다. 다음은 맥워가 직접 쓴 일기다.

 

01
 아서 맥워의 일기 (1921년)

 

 다지가 옆에서 끊임없이 호기심을 보여서 결국에는 콜즈 교수의 자료를 함께 보았다. 그는 보는 데서 끝낼 생각이 없었는지, 자신이 포트 헤들랜드에 사는 매킨지를 직접 소개해주겠다며 열성을 보였다. 우리는 그 도움을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한시가 급했다. 다음날로 출발 날짜를 잡고, 그에게 감사 인사를 표한 뒤 나왔다.
 더 이동하기 전에 프리스비의 총을 구해두기 위해 함께 외출했다. 호주로 오기 전 할 수 있는 만큼 현금화해둔 돈이 있어서, 사는 김에 모자라지 않을 만큼 무기를 채웠다.
 출발하기 전, 시드니에서 조사한 자료들을 정리해둔다.


 셰익스피어 플레이스 시드니 미술관.
 검게 부풀어 죽어가는 원주민 그림, 박쥐 숭배 종교의 인신 공양 의식을 형상화한 원주민 그림. 이들은 박쥐들의 아버지라는 존재를 숭배했다.

 시드니 대학 주립 도서관.
 1. 호주 원주민들과 관련된 책: 박쥐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박쥐를 닮은 날개에 세 개로 갈라진 붉은 눈을 가진 거대한 존재의 이야기가 쓰여 있다.
 2. 지하 도시의 전설과 노래를 서술한 옛 탐험가들의 일지: 고대 종족, 신들이 지하 도시를 지었다. 그 신이 바람과 싸웠다는 전설이 있다. 신들은 바람에 패배했고 그 때문에 멸망했다.
 익숙한 이야기였다. 그 도시가 아직도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박물관
 호주 원주민 관:
 박쥐들의 아버지 조각상. 붉은색과 갈색의 진흙을 섞어 강조했다. 안면 조각상 위에 부조로 새겼다.
 폴리네시아 관:
 특이한 부조로 덮인 현무암 덩어리 세 개. 부조들 속에 전에 본 적 있는 거대한 용의 형상이 있다. 이 물건은 신이 잠들어있는 가라앉은 도시에서 왔다고 한다.

 

 

 

 1925.7.29

 시드니에서 포트 해들랜드로 이동했다. 대략 나흘 정도 걸렸다.
 포트 헤들랜드는 금맥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있어 금을 찾으러 온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그중에서도 칸캇지리가 제일 유명했다. 이곳에는 1921년에 건설된 비행장이 있어서, 퍼스와 연결된 비행선이 다녔다. 근처 주점에서 듣기로, 랜돌프 운송회사 지점도 한 곳 있었다.

 먼저 다지와 함께 매킨지를 만나러 갔다.
 그로부터 몇 가지 얘기를 들었다. 맥워는 그 뒤로 건강이 안 좋아져서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가 멀쩡히 살아있을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매킨지는 원래 맥워의 자료를 더 갖고 있었다. 그러나 2~3년 전 한 미국인이 찾아와서는, 그 기록을 ‘빌려 가’ 돌려주지 않았다. 사진 원판과 더불어 맥워가 추가로 조사해둔 자료들이 전부 사라졌다. 도둑의 이름은 로버트 휴스턴이었다. 브레이디는 매킨지에게 칼라일 탐사대의 일원 로버트 허스턴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매킨지는 사진을 가져간 인물이 그가 맞다고 확언했다.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이 사진 속의 장소는 분명 사교도들과 관련이 있었다. 우리는 맥워 일행이 사진을 찍었다는 그 장소, 사막을 향해 가보기로 결정했다. 경험이 많은 매킨지가 사막행 준비를 도와주기로 했다. 다지도 꾸준히 거들었다. 이 사람, 계속 따라올 생각인 걸까?


 밤에는 랜돌프 운송회사의 지점에 잠입해 살폈다.
 서랍 속 장부는 랜돌프 운송회사가 전 세계 각지의 사교도 지점에 화물을 옮긴 기록이었다. 이 장부에 따르면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에게 보내는 물품들이 배편으로 포트 헤들랜드에 온 다음 기차로 운송되었다. 케냐의 아자 싱이 호팡에게 전보를 몇 번 보낸 내역도 존재했다. 그리고 영국의 펜휴에게 갈 화물이 두 개였다. 하나는 조각품이고 하나는 취급 주의 물품으로, 사슴뿔 모양 기호가 그려진 상자에 각각 담겨 있었다.
 상자 하나는 회사 건물 바깥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기하학적 흰색 선에 덮인 나무 조각상이 들었다. 조각상은 인간형 대머리에 둥글고 긴 수염이 촉수처럼 나 있고, 손발 끝에 갈퀴가 달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사진을 남겼다.
 또 다른 상자는 1m가 안 되는 크기였다. 안에는 기계장치와 함께, 로버트 허스턴이 개비건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편지에 따르면 이것은 ‘이스 족이 사용하던 단기 탐사 장치’였다. 60cm 정도의 크기로, 막대에 바퀴가 달리고 그 외 거울과 망원경 등이 부착되어 있었다. 별다른 동력이 필요해 보이진 않았고, 바퀴를 돌려서 작동시키고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식으로 쓰는 듯했다. 무엇을 탐사하는 장치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해당 지점에서 우리가 들고나온 물건은 이 상자뿐이다.

 

 그날은 숙소로 돌아와서 잠시 여유를 부렸다. 줄곧 혹독한 일정이었던 데다가 매번 뭔가를 하지 말라고만 한 것 같아서, 자오가 술자리에 끼겠다는 걸 굳이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한 일이라고는 프리스비에게 놀림 받다가 취해 잠드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자오가 깨어있을 때는 왁자지껄했는데 그가 잠들자마자 급작스럽게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그때는 다들 피곤할 일이 많았으니 조금만 마시고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 오랜 여행 때문에 지쳐서였을 것이다. 있었던 일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평소보다 술이 오른 탓이거나. 그래도 아직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됐는데. 제대로 해결된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잔 속의 미약하게 흔들리는 표면을 바라보자 걷잡을 수 없는 회의감이 밀려왔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지금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안 해도 될 불평, 투정, 남의 등 위에 짐을 지우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프리스비는 너무 익숙해지지 말라고 했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그가 하듯 그렇게 가벼운 목소리로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만큼의 잠들지 못하는 밤이 필요한지.
 지금도 눈을 질끈 감으면 암막 뒤로 피투성이의 이미지들이 터진 포탄 파편처럼 스친다. 런던의 습한 밤, 도살장의 돼지처럼 목에서 피를 흘리던 사람들의 얼굴은 곧 잭슨 엘리어스의 찢어진 이마와 움직이는 시체와 두들겨 맞아 죽어가는 산제물들 그리고, 그리고, 노라의, 다 괜찮다고 말하던 목소리로 뒤바뀐다.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실재가 되어 엉킨다. 폭력이 얼마나 끔찍하게 인간의 영혼을 찢어놓는지,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안 것은 그저 문장이었을 뿐이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벌려 안을 다 내보이고 나서 나는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도 꺼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눈가를 문질렀다. 우리에게 달리 무슨 수가 있을까요. 너무 오래 들여다본 폭력에 닳아 가는 것은 나뿐이 아니므로 당신에게 위로를 받아서는 안 되는데. 누군가 내 앞에서 자기는 날 때부터 상처가 아닌 흉터만 안고 태어났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구는 건 형 한 사람으로 충분한데.
 그러나 나는 너무나 약해지고 말았다.
 “그 애들이 보고 싶어요.” 찰랑이던 잔이 넘치듯 턱, 말이 넘쳤다. 그 애들이 보고 싶다. 노라가 웃는 것을 한 번만 더 보고 싶다. 언젠가 내게 다시 그런 기회가 올까. 오래 고여 있던 바람을 입 밖으로 꺼내자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내 몸을 빠져나와 어디로든 도망치려다가 사람의 발목을 묶는 세상의 힘에 이끌려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툭. 투둑. 나는 느리게 깨달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울고 싶었다.


 “돌아간 친구는 잘 있죠?” 프리스비가 물었다. 나는 항구에서 본 제이덕의 마지막 모습이 아닌, 지난겨울 남부에 있는 그의 집에 들렀을 때 자기 집의 벽난로 앞에서 쉬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
 “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에 있는 친구도 지금 잘 쉬고 있을 거예요. 다 끝나고 만나죠.”
 “지금은 그것밖에는 바라는 게 없어요.” 그해 겨울에는 노라도 거기 있었다. 나는 사진처럼 남은 기억 속 한 장면을 꼭꼭 씹어서 삼켰다.
 프리스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나 봐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
 “내가 안 미더울 순 있는데 그래도 많이 힘들면 얘기해요. 적어도 놀리진 않을 테니까.” 나는 머뭇거리다 감사 인사를 했다. 이 말 한마디에 담긴 것보다 더 표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걱정되면 그 친구한테 연락 한 번 해보는 건 어때요?”
 “제가 연락하면 자연스럽게 괴로운 일들이 다시 떠오를까 해서요. 모든 게 끝나면……. 다 잘 끝났다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잘 끝날 거에요.”
 “그래야죠. 그러려고 하는 거니까.”
 “다시 말하지만, 힘들면 너무 참지 말아요. 나도 같이 일하려고 온 거잖아요.”
 “괜한 부담을 주기 싫어서…….”
 “그래 보여요. 무슨 생각하는 건진 알겠는데. 너무 스스로 몰아붙이지 말라구요. 힘들잖아요, 당신도 그렇고 다들 사람인데. 우리가 그 자식들처럼 미쳐있는 것도 아니고. 자오 군한테는 말 못하더라도…… 아, 당연히 못 하겠지만.”
 “자오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어른들이 서슴없이 저지르는 어두운 일에 아주 익숙한 그 젊은이에게서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겹쳐본다. 그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는 내가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 돌려보내고 싶어요?”
 나는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까?
 브레이디는 우리 대화를 툭 무지르고 들어왔다. 
 “애한테는 무슨 일 없게 할 테니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그가 뭐든 쉬운 일처럼 말하는 사람인 걸 알고 있는데도 그 말을 들으니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들었죠? 여기 어른이 셋이나 있는데 애 하나 못 지키겠어요. 프리스비는 곁에서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왼손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본다. 이번엔 다르겠지. 그런 희망을 품는 건 어리석은 짓일까.
 “애는 돌려보내야죠.”
 “프리스비 씨도…….”
 “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너는,”
 브레이디가 말했다.
 “그게 문제야. 네가 여기 있는 모두의 보호자인 양 굴지 말라고.”
 내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었나? 그의 말에 잠깐 멍해졌다.
 그랬나. 그간 노라와 제이덕과 오래 함께하면서 그런 역할에 익숙해진 건지도 몰랐다. 그 둘은, 정말로 어렸다. 돌아갈 곳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애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했다. 내 실패와는 상관없이 몸에 익은 습관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새삼스레 깨닫고 나니 현실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였는데도, 나는.
 “자오는 걱정할 만한데요. 어휴, 이 사람 덩치를 보세요~.” 프리스비가 넉살을 피우면서 브레이디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도 딱히 떨쳐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도, 이렇게 해 먹고 산 세월이 얼만데.” 어조는 장난스러웠으나 그렇게 말하는 눈빛은 자기 방식대로 단단했다.
 “팔 하나 없는 사람한테 그런 염려 기껍게 받을 만큼 약한 사람 없어. 너는 네 걱정이나 해.”
 이어진 브레이디의 심드렁한 목소리와 그 날것의 내용에, 결국에는 나도 모르게 툭 웃음이 터졌다.
 “습관이 되어서 그런가 봅니다. 쉽지 않네요.”
 문득 이렇게 목에 걸리는 느낌 없이 웃어본 게 몹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25.7.30

 자오는 아침부터 숙취에 시달렸다. 매킨지와는 역에서 헤어졌고, 우리는 8시간 정도 걸려서 화물용 열차를 타고 칸캇지리로 갔다. 헤어지는 길에 매킨지는 사막 진입 전 마지막 물자를 충당할만한 곳으로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의 가게를 추천했다.
 화물용 열차는 하루에 한 번 칸캇지리와 오간다. 우리 말고도 몇 명의 승객들이 있었다. 나는 낯선 이들의 힐끔거리는 눈빛에 지나치게 예민해져서, 구석 자리에서 잠시 쉬었다. 그러는 동안 프리스비와 자오가 이것저것 알아 왔다.
 야말 족 사람 몇이 사막에 얽힌 얘기를 일러주었다고 한다. 정리해두자면:

  • 이 사막에는 고대도시가 있는데, 고대도시에 출입하는 입구는 모래에 묻혔다가 드러났다가 한다. 그 안에 사악한 것들이 살고 있다.
  • 부다이라는 늙은 거인이 그 아래서 머리에 팔을 묻고 코를 골면서 잔다. 언젠가 부다이가 깨어나서 세상을 먹어 치울 거라는 전설이 있다.
  • 사막에 가면 독사가 많으니 주의할 것.
  • 자기 마을의 낙타 상단 주인이 ‘박쥐 신’을 본 적 있는데, 자기가 본 것 중에 가장 끔찍한 괴물이었다

 그런 얘기를 전해 듣고 있자니 저 멀리 탁 트인 사막의 하늘 너머로 거대한 새 세 마리가 날아갔다. 자오가 부탁해서 몇 장을 사진으로 남겼다.

 

칸캇지리에 도착한 후, 매킨지가 알려준 대로 소형 트럭을 구하고 물자를 조달했다.
 수소문할 겸 술집에 들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새로 발견한 노천 금광 얘기를 떠들고 있었다.

  • 전에 존 카버라는 이름의 미국인 남자가 땅을 파야 한다며 사람들을 스무 명 정도 데려가서, 10m 정도 깊이를 파게 하고 보너스를 주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케닝 목축 도로에서 이뤄진 탐광작업으로, 모티머의 백화점에서 일하던 더비 데이브라는 사람이 소식을 듣고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 두 주 전에 몹시 큰 새를 본 사람이 있다. 날개를 쭉 펼쳤을 때 2m는 됐다. 총을 쐈으나 높이 떠 있었는지 닿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기차에서 본 새들이 떠올랐다.
  • 북쪽의 딩고 폭포에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다. 진저 몰든이라는 미치광이 노인이 한 말이라는데.
     자오가 노인에게 듣고 온 사건의 경위는 대강 이렇다: “내가 유령이랑 싸워서 이겼어. 내 패기에 눌린 거지! 4일 전에 딩고 폭포 근처에 야영했는데. 근데 거기 딩고도 없고! 폭포도 없어! 그냥 작은 샘만 있다니까. 그 근처에 슬래터리네 집이 있긴 한데 그 미친 주정뱅이랑 아들내미한테 몸을 맡기느니 그냥 길바닥에서 자는 게 나아서. 자려고 하는데 불이 비쳐서, 그놈들이 날 쫓아내려는 줄 알았는데. 유령이었다고! 비명을 지르는데 소리가 안 났어! 내가 막대기를 휘둘러서 쫓아내지 않았더라면……” 자기가 용감하게 싸웠다고 얘기하고 있으나 정황상 무서워서 도망쳤다가 돌아간 듯하다.
     슬래터리 일가에 대해 수소문해본 결과 좋은 얘기를 해주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다. 모두 사막에서 쉬어가기에 마땅한 집은 아니라며 입을 모았다. 빌 버클리가 일부러 그 집에 찾아가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20년 전 둘이 함께 동업하다가 슬래터리가 결혼을 하면서 갈라섰다. 하모니카도 잘 불고 술도 잘 사주는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요즘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의 가게. 가게 옆쪽에서 주인의 딸들로 보이는 10대 셋이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평범하게 말 상대를 해주었지만, 프리스비가 지하 도시 이야기를 하자마자 그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내부는 평범한 잡화점이었다. U자형 계산대에 턱을 팔에 괸 퀭한 남자가 주인 모티머였다. 간단한 물건 하나를 사며 분위기를 살폈는데 손님을 환영하는 눈치는 전혀 아니었다.

 새벽 세 시쯤 마을을 떠나기 전에 몰래 모티머의 가게에 잠입했다. 1층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자오가 이런 쪽에는 특기가 있다며 벽을 타고 몰래 2층으로 올라갔다. 나머지는 아래쪽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한참 동안 고요했다. 그러다 갑자기 창문이 열리고, 창밖을 향해 산탄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온 동네를 울렸다. 들킨 것이었다.
 프리스비는 망설임 없이 1층의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이후로는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든 와이크로프트 일가를 제압했으나 프리스비도 그렇고 브레이디도 심하게 다쳤다.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야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쓰러진 모티머 딸들의 팔목 안쪽에 사슴뿔 문신이 보였다. 사교의 징표였다.
 2층의 방 모티머의 침대 밑에서 오래 읽은 책 한 권을 발견해 챙겼다. 제임스 우드빌의 <경이로운 지성>.
 우리는 엉망이 된 잡화점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그레이트 샌드 사막으로 출발했다.

 

 

 

1925.7.31

 다지와 내가 돌아가면서 운전대를 잡으며 상당 시간 사막을 달렸다. 포장되지 않은 길을 나아가자니 사정이 편치 않아 뒷좌석에 누운 환자들이 이따금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지프 바퀴가 지나간 자리에 흙바람이 일었다. 한낮의 그레이트 샌드는 불타는 주홍빛으로 달궈졌다. 겨울인데도 덥고, 건조했다.
 문득 저 멀리서 피로에 젖은 사람이 낙타를 타고 가는 모습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물자를 조금 나누어주는 김에 그에게 이것저것 사정을 물었다. 그는 문명이 있는 메타카라로 향하고 있었다. 사막은 더 살만한 곳이 못 된다고 했다. 땅이 흔들리고, 박쥐들이 나오고, 원주민들이 사라졌다. 바람이 불지 않는 때에도 저 멀리서부터 회오리바람을 닮은, 휘파람 소리를 내는 이상한 형체가 보이기도 하고. 원래 그는 인부로 광산에서 일을 받고는 했는데, 예전에 존 카버라는 미국인에게 일감을 받은 이후로 사막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이름은 더비 데이브. 칸캇지리의 술집에서 들었던 이름이라 그곳 출신이냐고 물었지만, 자기는 잡화점에 일했던 적이 없고, 그 마을에서 산 적도 없다고 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기묘했다.

 주변은 온통 붉었다. 하늘만 역설적으로 푸르렀다. 간혹 주변을 굴러다니는 트리오디아가 민머리 위에 난 잔털처럼 붉고 단단한 땅 위를 가려 묘한 명암을 그려냈다. 삐죽삐죽 내키는 아무 곳으로나 팔을 뻗은 나무들은 모두 앙상하게 말랐다. 줄기가 흰 유칼립투스와 멀가나무, 백단향이 그 뻣뻣하고 날카로운 가지를 그물처럼 뻗어 하늘을 꽉 메울 듯 드리운 양털 구름을 야금야금 낚아채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더라. 사막은 묘하게 시간관념을 희박하게 만든다. 우리는 딩고 폭포에 다다랐다. 샘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울퉁불퉁한 산마루에 붉은 바위가 마치 파도가 굳은 것 같은 형태로 서 있었다. 아래 웅덩이에는 바위 그늘이 드리워졌다. 동쪽으로 3km 정도 거리에 오두막집이 한 채 보였다.
 진저 노인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여기서 야영을 했다. 물이 있는 장소라 야영하기 좋은 자리였다. 밤이 되자 일교차가 뚝 떨어져서 모두 모포를 둘렀다. 사막은 금세 차게 식어버렸고 눈을 얼얼하게 만들던 강렬한 붉은빛도 지금만은 놓아주겠다는 듯 떠났다. 온기라고는 앞에 놓인 모닥불이 전부였다. 귓가를 지글거리던 열기가 가라앉고, 지프의 덜컹거리는 소음과 엔진음이 사라지니 주변이 훨씬 고요하게 느껴졌다. 드문드문 모닥불에서 불티가 타오르는 소리만 들렸다. 탁 트인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별이 박혀 있었다. 만약 별들이 말을 한다면 그 속삭임까지 들릴 만큼 가까웠다. 그 가운데 창백함을 흠뻑 머금은 남십자성이 눈부시게 빛났다. 낯설고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나는 모닥불의 불빛에 의지해 모티머의 집에서 가져온 책을 마저 읽었다.

<경이로운 지성>. 제임스 우드빌. 17세기 영어. 앞쪽의 지루한 자화자찬과 눈 뜨고 봐주기 힘든 성적 능력에 대한 자랑을 참고 넘기면 읽을만한 부분이 나온다. 위대한 이스족과 어두운 동굴 속의 휘파람 소리를 내고 창문 없는 현무암 탑에 사는 무서운 존재 사이의 전쟁을 그렸다. 끔찍한 전쟁의 묘사가 상세했다. 4억 년 전~5천만 년 전에 융성했던 위대한 종족 이스는 이 전쟁에 패배해 멸종했다.

 읽은 책의 내용을 일행에게 대강 설명해주고 담배를 피우러 잠깐 나왔다. 그 뒤에 사건이 일어났다.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은 들은 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자오의 휘파람 소리 사이를 가르고, 어디선가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바위 너머에서 희끄무레한 사람 형체가 보였다. 챙이 넓은 펠트 모자에 헐렁한 바지, 낡은 셔츠를 입고 턱에는 붉은 수염이 난 남자였다. 그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데, 갑자기 그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살과 기름이 타들어 가면서 연기를 뿜어내고 눈구멍 안에서 눈이 캐러멜처럼 녹았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그 발은 흙투성이가 된 채로, 그는 불타는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달려왔다. 고통에 찬 표정 그대로 멜리사에게 뛰어들어 몸을 차지했다. 멜리사는 소름이 쭈뼛 끼치는 비명을 지르면서, 눈앞에서 타고 있던 모닥불에 뛰어들려고 했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내가 다급하게 멜리사를 붙잡았다. 그러는 사이 브레이디가 불을 껐다. 멜리사는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정말로 유령이었다. 다들 충격에 제대로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할 즈음, 저 먼 곳에서부터 다시 하모니카 소리가 들렸다. 유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왔던 길을 걸어왔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어 바짝 긴장했지만, 그는 다시 한번 불타오르는 대신 우리를 향해 따라오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딩고 폭포 위쪽에는 동굴이 세 개 있었는데, 유령은 개중 세 번째 동굴로 우리를 인도했다. 내부는 깊이가 깊고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유령이 이끌고 간 저 안쪽에서, 우리는 타다 남은 옷과 그을린 뼈를 발견했다. 유령의 시체가 분명했다.
 빌 버클리의 유령은 자기 뼈 앞에 서서, 갈망하는 시선으로 이쪽을 보았다. 그는 복수를 원하고 있었다. 이 일이 슬래터리 일가와 관련되어 있냐는 물음에, 유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후기연성 브라코이 섬의 스포일러가 있음 후반에 남캐끼리 좀 그렇고 그런거 있음... 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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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벽에는 그 한마디가 쓰여있다. 그는 자부심에 차서, 한 번도 흔들려 본 적이 없는 자기 확신이 어린 눈으로 그 문장을 마주 보았다. 자신을 아는 것은 그가 겪어본 숙제 중에 가장 쉬웠다. 그는 그게 무슨 재미있는 일이라도 된다는 듯이 가볍게 벽을 짚으며, 나는 신의 아들이고, 비상하는 자라고 대답한다.

 북풍과 인간 여인 사이에서 난 쌍둥이 형제는 보레아다이라고 불렸다. 하늘만큼 푸른 눈을 가진 쪽이 칼리아스, 매의 날개가 달린 쪽이 시티르였다. 둘 다 반신반인이었지만 물려받은 것은 달랐다. 운명의 여신 클로토의 손길이 부드럽게 실을 꼬았다. 신성(神性)이란 본디 불공평하지. 그녀가 조소했다.
 형제가 나고 자란 곳은 지반이 높고 바다에 맞닿은 절벽 위의 도시였다. 시야를 어디로 던지건 언제나 넓고 푸른 하늘이 이마 위로 탁 트여있었다. 바람이 절벽과 절벽의 틈새를 휘돌아 달려갈 때면 언제나 깊고 음산한 음악이 울렸다. 어릴 적 시티르는 어머니의 무릎에 기대어, 달콤한 리라 연주라도 듣는 양 멀리서 들려오는 그 소리에 잠겨 들곤 했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저 멀리서 울리는 섬뜩한 바람 소리였지만 소년에게 그것은 자장가고 약속이었다. 맹세이고 속삭임이었다.
 그는 걷기보다 날갯짓을 먼저 배웠다. 부드러운 솜털투성이였던 날개는 몸보다 빨리 자라서, 금새 뻣뻣하고 풍성한 깃털로 뒤덮였다. 오레이티아는 불안과 기대가 뒤섞인 눈으로 아들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그는 다루기 어려울 만큼 자기 세계가 뚜렷한 아이였고, 그녀는 그를 결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가 그 아이에게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은 말과 사람 사이의 일, 태도와 방법 같은 것들뿐이었다. 시티르는 많은 것을 저 혼자 깨우친 양 굴었다. 제 동생과는 달리 단 한 순간도 아버지에 관해서 묻지 않았다. 한 편으로는 당연한 일이었다. 말을 배우기 전부터 그는 바람의 속삭임을 들었으니까.


 바람과 보내는 시간은 찬란했다. 소년은 아버지의 얼굴을 직접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아오르면 언제나 함께하는 그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신의 피로 데워진 몸은 가벼웠고 두 날개는 지치는 법을 몰랐다. 그는 그럴 수 있었던 순간부터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창공을 자신의 것으로 삼았다.
 얼핏 빈 듯 보이는 공간은 눈부신 에테르로 가득했고 바람은 그것을 순환하며 세상을 작동시키는 거대한 움직임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중에서도 가장 사나운 북풍의 사랑하는 자식이었다. 내가 제피로스의 아들이었다면 좀 더 나긋한 사람이었을 수도 있겠지. 서풍은 유려하고 따스하니까. 그러나 그의 신성은 북쪽에서 불어오는 냉기로 지어졌다. 겨울을 불러오고야 마는, 목 뒤의 솜털을 쭈뼛 곤두서게 만드는 서늘한 숨으로부터. 한낮의 햇볕에 어깨를 그을어도 북풍이 손수 벼린 그의 날개는 녹아내리지 않았다. 깃과 깃 사이에는 언제나 차가운 바람이 맴돌았다. 먼 트라키아 땅을 넘어온 북녘 휘페르보레아의 향기가 거기 묻어있었다.
 그러니 단 한 순간도, 그 무엇도 두려울 것이 없었다. 타고난 맹금의 눈은 바람의 결과 마디를 읽었고 날개는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그는 언제나 더 높이, 더 빠르게 상승했다. 인간의 공간과 신들의 공간, 그 어딘가 까마득한 곳까지 닿아 숨을 깊게 들이켜면 자유의 벅참과 공허감이 폐부에 가득 찼다. 그것을 오래 공들여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그가 지어온 생애의 전부였다. 
 자유로움. 길게 펼친 날개깃에는 저절로 그를 스쳐 간 바람의 무늬가 그려졌다. 그것이 그가 가진 신의 조각이 주는 영광이었다.

 반신반인의 생애가 으레 그렇듯 그는 양쪽 세계 모두에 발을 걸치고 있었다. 그가 가진 인간의 단면은 그가 이 땅에서 영원히 발을 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남들만큼은 아니어도 그 역시 잠을 자고 식사를 해야 했다. 금수가 될 수는 없으니 사람들 사이에서 섞여 문안과 작별의 규칙을 배웠다.
 하지만 사람들은 늘 시시했다. 가지고 태어난 축복은 그의 등 뒤에서 언제나 빛났고 이는 단 한 순간이라도 숨겨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신기한 물건을 구경하듯 그의 주변에 모여들었다. 쏟아지는 관심은 언제나 당연했고 그에게는 늘 엇비슷했다. 아주 어릴 적에는 어머니의 말대로 친구를 만들려고 애써도 보았지만, 그는 그들이 가진 번민과 고통에 결코 온전히 공감할 수 없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무리 설명한들 누구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이방인의 감각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었다.
 운이 좋았던 지점은 그가 왕자이고 잔인한 재치를 타고났다는 것이었다. 그는 원하는 순간에 남의 기분을 띄우고 망치며 매끄럽게 이야기하는 법을 쉽게 깨우쳤다. 이후로는 모든 것이 훨씬 편해졌다. 대화란 그저 허공을 맴도는 장식품이었다. 그는 순식간에 그 행위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그래도 별반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런 종류의 외로움이란 홀로 찬란한 자가 짊어지는 멍에 같은 것이었고, 그에게는 언제나 다른 선택지가 있었으니까.
 비상하는 것. 위대해지기를 꿈꿀 무렵부터 바람이 그의 귓가에 지나간 영웅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는 들은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수납하며 수많은 밤을 지새웠다. 그러다 별에 닿을 만큼 가까이 오르면 그 별자리에 얽힌 이야기가 쏟아졌다. 그는 전갈자리의 꼬리로부터 도망쳤고 사수자리의 화살촉 끝을 피했다. 아. 별이 되고 싶다. 그는 생각했다. 그러면 다시는 땅에 발을 디디지 않아도 될 텐데.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결국은 고개를 젓고 만다. 한 자리에 영영 붙박이는 것도 싫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다른 영웅들은 어땠는지 몰라도, 그가 브라코이에서 두 나라 간의 전쟁을 막고 남의 사랑을 이루어주려고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무게 없는 마음의 발로였다. 세상은 언제나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자들로 가득했고 영웅의 수요는 늘 부족했다. 그래서 그는 여유가 되는 만큼 오지랖을 부렸다. 거기에는 특별한 의무감도, 신실함도 없었다.
 그러나 섬의 주인이 누구인가? 무쇠를 닮은 살육과 전쟁의 신이 산꼭대기에 강림하자 자그마한 세상은 곧장 그의 위압에 짓눌렸다. 공기가 창날처럼 날카롭게 벼려져 피부가 시큰할 정도였다. 공기의 흐름을 예민하게 느끼는 날개는 어느 때보다 무겁게 가라앉았다.
 아레스는 진노했다. 그는 이들 영웅의 방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피와 살육이 없으니 훼방이고 반칙이라는 것이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산꼭대기로부터 바위들이 쏟아져서 인간의 몸을 짓누르며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제대로 된 무덤도 묘비도 얻지 못할 가여운 시신들이 바닥에서 으스러지고 바다 위에 둥둥 떠 올랐다. 전쟁신의 새 떼들이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내며 그 붉은 피를 들이켰다. 신들이 이렇게 잔인했다. 헬레네는 바닥에 이마를 짓눌렸고, 그녀의 웅변은 먼지처럼 흩어졌다.

 “너희가 내 발밑으로 와서 직접 얘기해보아라. 어디 들어보겠다.”

 선심을 쓰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 말을 들으니 가슴 깊은 곳에서 차가운 바람이 꿈틀거리는 게 느껴졌다. 티탄 신족의 피가 가진 고질적인 오만 때문이었을까? 그럴 수밖에 없는 신의 앞이라 한들, 그는 머리를 조아리며 경건함 대신 비틀린 마음만을 느낀다.
 “아레스시여. 당신에게 아프로디테가 있고, 저희의 행동이 그녀의 뜻을 따르는 일인데 어찌 이렇게 가혹하게 구십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서풍을 흉내 내듯 부드럽다. 신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어 음절을 내뱉을 때마다 목구멍이 따끔거린다.

 “두 사람에게 자비를 보여주심으로서 당신의 그녀에 대한 애정을 증명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는 언제나 신의 앞에서 대담했지만, 그걸 받아주냐 마느냐는 신들의 마음이었다. 헤르메스는 광대를 좋아했고 아레스는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일이 그렇게 단순했다. 검과 검이 맞부딪히는 듯한 신의 음성이 그의 말을 동강 냈다.

 “감히 네가 신들 사이의 사랑에 대해 논하느냐. 네가 그토록 오만한 것이 그 날개 때문이냐.”

 이어진 손짓 한 번으로 그는 바닥에 처박혔다. 어쩔 겨를도 없이 거대한 바위가 몸을 짓눌렀다. 자랑스러운 날개가 기이한 방향으로 꺾이며 부러진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다. 권능이 또 다른 권능에 의해 갈기갈기 찢어진다. 갈색의 날갯죽지에 붉은 피가 번졌고 살을 뚫고 부러진 뼈가 드러났다. 짓이겨지는 고통 때문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낮은 곳에 닿는 바람에서는 흙먼지와 피와 쇠의 냄새가 났다. 그는 절실하게 깨닫는다. 진짜 권능 앞에서 반신반인이란, 반쪽짜리 인간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반쪽짜리 신은 될 수 없다. 서늘하게 뺨에 닿아온 대지는 네가 죽어 돌아갈 곳은 결국 여기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벗어날 수 없어. 네가 아무리 아닌 척하더라도 말이야. 입안에 쓰고 비린 맛이 가득했다.
 하지만 그를 진짜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은 신의 태도였다. 타르타로스에 집어던지며 영혼까지 불태우는 격노가 아닌, 하루살이를 눌러 죽이듯 무신경한 분노. 그의 존재 이유를 꺾고도 아레스는 아무런 마음의 거리낌이 없을 것이었다. 그는 신의 청동 조각 같은 위엄에 아무런 타격도 주지 못하고 그 마음에 한 점 티끌로도 남지 않을 것이었다.
 몸의 고통보다 더 치욕적인, 겪어본 적 없는 굴욕의 냄새. 그 안에서 숨쉬기조차 힘겨웠다. 아버지. 저를 이런 곳에 내버려 두지 마세요. 제가 당신의 영광에 누를 끼친 적이 있습니까. 어째서 제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십니까. 제발…….
 그렇게 빌고 싶어도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그의 몸을 짓누르던 바위가 폭발하듯 산산조각 났다.
 시간이 장난을 치는 듯 찰나의 모든 일이 느리게 흘러갔다.
 누가 감히 신의 벌을 거스르는가? 감히. 고통을 앞지르는 놀라움에 그는 힘겹게 고개를 움직였다. 부서진 돌의 파편들이 일으킨 먼지와 흙 보라 너머를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초점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그러다 흐리던 시야가 서서히 또렷해지면서,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팔뚝에 핏줄이 일어날 정도로 세게 몽둥이를 쥐고, 그의 앞을 막아선 채로, 아레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군가를 그런 식으로 올려다보는 것. 인간에게 외경하는 마음이 인 것. 신에게 반항하는 자를 목도하는 것. 누군가를…….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상하게 눈이 뜨겁고 시려서 그는 속절없이 인상을 썼다. 그러나 시선을 뗄 수는 없었다. 어딘지 아득히 먼 곳에서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심장에 박히는 아픔. 이 순간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그는 너무나 쉽게 이해해버린다. 레온티오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입속말로 중얼거린다.
 신들이 이렇게 잔인했다.

 

 


 

 

 일행은 다시금 항해 길에 올랐다. 그는 그 상황에서 받을 수 있는 최대한의 보살핌을 받았다. 날개에는 부목을 대고 붕대를 감았다. 상처를 돌봐준 선원은 한동안 날개를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새를 치료해본 사람은 있어도 날개 달린 반신을 치료해본 사람은 없으니 그가 나을지 말지는 미지수였다. 운명의 여신께서 결정할 일이죠. 선원은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 그런 말을 들었더라면 분명 코웃음을 쳤을 텐데. 지금은 씁쓸하게 끄덕이는 게 고작이었다.
 배에서 시티르가 즐겨 쉬던 자리는 높은 망루나 돛대 위쪽이었는데, 지금의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갑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이 절실했으나 한편으로는 그럴 정성을 들일 기운도 모자랐다.
 자신을 감당하는 일이 처음으로 벅찼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이 색을 잃은 잿빛으로 보였다. 오이지스가 다정하게 그를 끌어안았다. 불안의 여신이 그 자신의 목소리가 되어 속삭였다.

 ‘만약 다시 날아오를 수 없다면 나는 뭐지?’ 

 너 자신을 알라.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벽에는 그 한마디가 쓰여있었다. 나는…… 그는 비참한 탄원자가 되어 손톱으로 벽을 긁었다. 자기 확신은 신기루처럼 무너졌다. 고뇌가 그를 한입에 집어삼켰다. 그는 손쉬운 먹이였다. 그를 평소처럼 움직이고 말하게 하는 것은 하늘의 천장에 닿았던 자존심 하나뿐이었다.

 대부분의 선원은 그를 어려워했고 특히 이런 상황에서는 더했다. 그에게도 달가운 일이었다. 관심 없는 이들의 시선까지 신경 쓰는 것은 그의 성미에 맞지 않았다. 그러나 헬레네가 다가온 기척을 느끼자, 그는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내주었다. 그녀는 시티르가 배 안에서 존중하는 몇 안 되는 인간이었다.
 동정일까? 그는 생각한다. 누군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긴다니, 감히, 그런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의 약하고 어린 면이 그런 관심을 갈구했다.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었다. 그가 좋아하는 자유의 선택지는 부러져서 그의 등에 짐짝처럼 매달려 있었다. 시티르는 평소 같은 불투명한 웃음을 머금고 헬레네를 보았다. 마주 돌아오는 것은 정중한 전사의 시선이다.

 “괜찮나?” 
 “저야 멀쩡해요. 헬레네는 좀 어떤가요?”

 그렇게 물으며 시티르는 그녀의 이마에 붙은 아마포 붕대에 시선을 둔다. 신에게 해코지를 당한 것은 그 하나만이 아니다. 그녀에게도 흉터가 남을까? 또 한 번 부아가 치밀기 전에 그녀가 그의 주의를 환기한다.

 “나야 익숙하지만. 자넨 좀 다르지 않나.”
 “뭐가 얼마나 다르겠어요?” 그는 가볍게 대꾸했다.

 하지만 달랐다. 두 사람 다 그걸 알았다. 카산드라의 후예는 신이 준 굴욕의 맛을 입에 물고 태어나 씹고 되새김질하고 짓이기며 살아왔다. 그녀는 단단하게 디뎌진 땅 같다. 아하, 아는 맛이라는 건가요? 그의 속내에서 불쑥 어린애가 튀어나와 이죽거린다. 말씀 좀 해보세요,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양 살 수 있는 거죠? 어떻게 그걸 다 감당하나요?
 한 손이 배의 난간을 천천히 쓰다듬는다. 꺼내 물을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 조잡하고 유치한 분노는 애초부터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니까. 헬레네에게 화를 내는 것은 부당하다. 자신은 지금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짜증스러울 뿐이다. 고약한 상태를 기분으로 착각하기에는 그는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았다. 시선이 먼 수평선을 향했다가 돌아온다.

 “헬레네. 걱정해주는 건가요?”
 “당연히 걱정되지. 힘든 일을 함께 겪지 않았나.”

 이쪽을 똑바로 응시하는 곧은 눈동자가 보인다. 거기 비친 자신은 굴절된 상(狀)이다. 호의, 그 이면에 담긴 뜻을 알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약점이 드러난 상태인 그는 제 상처를 핥는 짐승처럼 자기도 모르게 벽을 세운다. 비집고 나온 목소리는 상상한 것보다 딱딱하다.

 “그럴 것 없어요.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예요. 앞으로도.”

 순간, 헬레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마디가 단단하고 심지가 있으며 언제나 옳은 방향만을 가리키는 손이다. 남을 지키는 사람의 것. 그의 당황하는 기색에도 아랑곳없이, 헬레네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그를 본다.

 “나는 단 한 번도 자네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네.”
 “…….”
 “자네가 있어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 그런 생각 말아. 다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예상하지 못한 위로에 그는 눈이 휘둥그레진다. 파도가 간헐적으로 뱃전을 때리는 소리만이 정적을 메운다.
 이상한 기분이다. 그 잔물결이 가슴 안쪽까지 번지는 것 같다. 파도는 따뜻한 색깔이다. 그는 이런 식으로 세련되지 못하게, 솔직하게 터놓고 말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다. 왕들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옥좌는 솔직함으로 닦이지 않는다. 전쟁터에서 전사들과 보낸 몇 년의 세월도 무관심한 그의 태도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는 결국 아무런 말도 내보일 수가 없다.
 그녀는 어렵지 않게 그를 읽는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내린다. 평화로운 침묵이 감돈다. 그는 울적한 표정을 더는 숨기지 않고 얌전해진다. 소용이 없다는 걸 안다.

 “어쩌다 이렇게 멀리까지 나왔나?”

 문득 파도 소리와 어울리는 물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아무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는 갈라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되면 어떡하죠? 불안의 목소리가 끈질기게 그를 쫓아와 귓가에다 속삭인다. 난간에 기댄 어깨가 힘없이 늘어졌다.

 “당신은요?”
 그의 물음에 그녀는 먼 곳에 시선을 둔 채 대답했다. 세상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사람도 있다고. 실은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산다고. 어떤 옳은 일에 대해 선택의 여지가 주어지지 않았을 때 자신은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전쟁은 천 명의 사람에게 천 가지 모양이고 그것은 그녀에게 당연했다. 이유가 없어도, 애써 영광을 좇지 않더라도,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갈고 닦는 사람은 다시 밑바닥에서 출발하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스스로 빛을 낸다.
 그게 그녀가 가진 답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는 마른 침과 함께 몇 마디 투정을 삼켰다. 당신처럼은 못 해요. 날지 못하는 삶은 살 수 없어요. 그럴 자신이 없어요.
 다행스럽게도 그런 말들은 그의 안에서 혼자 멈추었다. 헬레네가 품위를 지키는 사람이기에 그 또한 가까스로 자신의 것을 보전한다.

 

 


 

 

 레온티오스를 다시 쳐다보는 일은 힘겨웠다. 그는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시티르의 머릿속에서 그날의 일은 지워지지 않았고 신전 벽에 새겨진 손톱자국처럼 남았다. 해묵은 상처의 껍질이 벗겨지듯 그 기억도 금방 빛이 바랠 줄 알았는데. 전부 그의 순진한 기대일 뿐이었다. 어쩌면 평생 지워지지 않을지도 몰라. 그가 가장 크게 느낀 감정은 낭패감이었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레온티오스는 가끔 들러서 그의 상태를 살폈다. 병실 대신 쓰는 자그마한 선실에 레온티오스가 들어서면 주변이 가득 찼다. 서슬 퍼런 존재감이 의도 없이도 공기를 가볍게 눌렀다.
 “그렇게까지 신경 써주지 않아도 돼요.” 시티르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구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티르의 말에 대놓고 늘어진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큰 손을 남의 머리 위에 올려 마구잡이로 머리칼을 흩어놓았다. 표현 방식이 투박해서 그렇지 거기 위로가 담겨 있다는 것쯤은 알았다. 이 사람들은 하나같이. 마음 한쪽이 참을 수 없이 울렁거리고 간지럽다. 
 시티르는 잠깐 그의 손이 닿았다 떨어진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꺼내 보여야만 하는데 어려운 말이 가시처럼 목에 걸려 있었다. 그는 한참을 더듬어 찾아낸다.

 “저, 감사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힘겹게 꺼낸 것이 다 허탈할 정도로, 돌아온 대답은 호쾌하고 퉁명스러웠다.

 “전쟁에서 무슨 감사 인사야. 살아남았으면 됐지.”

 그는 늘 이런 식이다. 뭐 하나 어려울 것 있냐는 듯이. 그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시티르는 예전 같은 차분함을 유지하려면 애간장을 쥐어짜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래도 마음에 짐으로 남는 게 싫어서요.”
 “야. 그게 왜 짐이야?” 마치 그런 갑갑한 말은 난생처음 들어본다는 듯한 투였다.

 “같이 싸우는 사람인데. 너도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도왔을 거잖아.”

 자신이 무슨 말을 들으리라 예상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런 말은 아니었다.  레온티오스 씨도 정말 특이한 사람이에요. 시티르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과 함께, 정돈되지 않은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런 말을 잘도… 참 쉽게 하시네요.”

 신에게 반항할 거라고? 어떻게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지? 그는 이해가 안 됐다. 사람이 사람에게 당연한 듯이 하는 기대치고는 숨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아직도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몸이 떨리고 당장에라도 가라앉아 죽어버릴 것 같은데, 그는 무엇 하나 무거울 것 없다는 듯이 말을 했다. 시선을 떨구자 그의 손에 감긴 붕대가 보였다. 신의 불꽃이 할퀴고 간 상처였다. 신에게 해코지를 당한 것은 그 하나뿐이 아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굴 수 있는 거지, 당신들은?
 마음 안쪽에서 무언가 울컥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일말의 망설임 없이, 그가 한 것처럼 당연한 듯이?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확신이 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지금은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내가 뭐라고. 너희가 대체 뭐길래. 시티르는 겁에 질려 있었고 그 기억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고통스럽고 불안하고 짜증스러웠다. 내가 정말로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거라면, 사람 잘못 봤어. 꼬인 속내에서 어린애가 빈정거린다. 그는 참지 못하고 내뱉는다.

 “절 그렇게 믿어요?”
 “동료를 안 믿으면 대체 누굴 믿어?”

 가져본 적 없는 어둡고 저열한 질투심이 타오른다. 한 편으로 너무 찬란하고 눈부시다. 시티르에게는 이 모든 감정이 낯설고 괴롭다. 무슨 짓을 해야 이 사람을 동요시킬 수 있을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건 너무 쉬운 일이었는데, 갑자기 전혀 할 줄 모르게 된다. 망설임 하나 없이 돌아오는 일직선의 대답에 그는 거의 바보가 된 기분이다.

 “누가… 그렇게 솔직하게 얘기를 해요.” 시티르는 머뭇거렸다. 이 사람이랑 더 얘기하면 안 돼. 부러진 신의 일부로부터 엄중한 경고가 번졌다. 너 지금 엉망이야. 분명 후회할걸. 그러나 그의 다른 부분은 자기가 지금 뭐에 말려드는 줄도 모르고, 여기서 쭉, 계속, 그를 보고 듣고  싶어 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면 그렇게 안 했겠지. 하지만 너는… 우리는 좀 다르잖아.”

 …….
 이건 또… 무슨 말인데? 이 사람은 대체 왜 이렇게, 그는 생각했다. 머리가 어지럽다 못해 아찔해서 쥐어뜯고 싶었다. 마음 안쪽에서 멍청한 희망이 부풀었다가 꺼졌다. 남이 던져주는 무심한 호의를 붙잡고 구성맞게 구는 건 그의 방식이 전혀 아니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짜증 나. 그런데 난 지금 이게 필요해. 절실하게.

 “그렇게 생각해도 되는 거예요?”
 “안될 건 뭐가 있어.” 레온티오스는 덤덤하게 대답한다. 
 시티르는 당황스럽고 화가 난다. 그의 거리낌 없음에, 그 말에 담긴 사심 없는 호의에. 자기가 자기답지 않게 굴고 있다는 사실에. 자기가 힘주어 그어둔 선이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에. 자기가 한낱 인간 때문에 속수무책으로 흔들린다는 점에. 누가 제 안을 끔찍하게 어지럽히고 제멋대로 거기서 뛰어놀게 두기는 싫었다. 그것도 이런 무신경한- 사람 때문에 혼자만 조급해지고 속이 타는 건 절대로 사양이었다.
 이미 그러고 있다는 게 제일 미칠 지경이지만. 그는 입술을 깨문다. 

 “레온티오스 씨는 가끔 자기가 하는 말이 어떻게 들릴지 전혀 생각을 안 하고 말씀하세요.”
 “어떻게 들리는데?”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시티르는 오래도록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을 굴린다. 그야 그렇고 그렇게 들리는데요. 이렇게 말할 수는…… 하지만 그는 그가 오래 골몰하고 품위 있는 말을 고르게 내버려 두지 않는다.

 “말하기 싫으면 됐어.”

 뚝, 머릿속에서 무언가 끊어진다. 이거 전부 멍청한 짓이야. 자기 자신을 진짜 바보로 만들 셈이야. 그래도 참을 수가 없다. 평소라면 몸을 조금 위로 띄우면 될 일이지만 지금은 그게 불가능하다. 그래서 시티르는 어색하게 발꿈치를 들고, 그의 몸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긴다. 입술과 입술이 닿는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뛴다. 맨 처음으로 고속 비행을 하고, 곤두박질치듯 활강했을 때 같다. 그 감촉은 어릴 적 상상한 넥타르의 맛처럼 오묘하고 복잡하고 달큰했다. 신들의 용광로처럼 뜨거웠다. 끝이 있는 모든 순간처럼 슬펐다.
 영원 같은 찰나가 지났다. 이대로 돌이라도 되었으면. 그러면 많은 일이 훨씬 편해질 텐데. 그는 잡아당겼던 손을 놓고 뒤로 조금 물러났다. 레온티오스는 조금 놀란 듯 한쪽 눈썹을 꿈틀해 보일 뿐이었다. 이어진 감상은 단순했다. 그렇게 들렸어?
 반면 시티르는, 방금 그 한 번의 행동만으로 온몸에 힘이 쭉 빠진다. 그는 겨우겨우 피로 섞인 웃음을 지어 보이며 핀잔을 준다. 몇 번을 대답해야 만족하는 거예요?
 만족이라. 애당초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남의 말과 행동에 담긴 의미에 대해서 깊이 궁리하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다. 생각 못 한 재미있는 일이라는 듯, 그는 호탕한 웃음을 짓는다. 

 “뭐, 나쁘지 않지. 이렇게 하고 싶으면 진작 말하지 그랬어.” 
 “…안 놀라네요.”

 평소 그의 반응을 생각하면 의외였다. 자신이 알던 사람이 맞는지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는 데 움켜쥔 손마디가 축축하다. 시티르가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그가 뒤로 물러난 만큼 성큼 다가와서 이쪽을 본다.

 “서로 재밌으면 됐지.”

 시티르의 입가에 곤란한 미소가 떠오른다. 아, 그거참…… 재미있겠네요.




 시티르는 제 영광에 몰두하는 것을 좋아했고 자신이 다른 인간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전쟁터에 내던져져도 전사보다는 때와 장소를 잘못 찾은 어린 신처럼 보인다는 것. 그것은 장점이자 약점이었다. 그는 새매들이 흔히 그러하듯 눈가가 짙었고 팔다리가 길었다. 살결은 햇볕 아래 오래 두어 살짝 녹은 밀랍처럼 말랑했고 코를 대면 바람 냄새가 났다. 그러니 누가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 말을 그렇게 자조적으로 떠올린 적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사랑받는 데는 익숙했고 사랑하는 데는 영 젬병, 젬병이었다.
 정신은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았고 온몸이 천근만근처럼 무거웠다. 자세 때문에 무리가 가서 뼈마디 여기저기가 끊어질 것 같았다. 그러나 힘든 내색을 하기에 그는 자존심이 너무 강했다. 아무 생각도 못 하게 되는 도피란 착각이고 기만이며, 그저 머릿속이 한 사람으로 가득 찰 뿐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잠시도 멈추기 싫었다. 소금기 어린 냄새. 겹쳐 닿는 맨살은 단단하고 거칠었으며 흉터 위를 손으로 쓸면 우둘투둘했다. 그가 자기 쪽으로 몸을 숙이자 짙은 사향이 물씬 넘쳤고 뜨거운 심장이 피부와 근육 너머에서 멈춤 없이 뛰며 피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면 탄탄한 몸에서 흥분의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충분히 능숙했지만 사실 그리 대단한 기교도 필요 없었다. 단순한 몸짓 하나로 충분했다. 시티르는 이미 사로잡혀서 꼼짝도 할 수 없는 신세였다. 이름처럼 사자를 닮은 야성 어린 그 눈이 이쪽을 바라보기만 해도 저 깊은 곳에서 전류가 튀었다. 자기 것이 아닌, 잠깐 머물 뿐인 열락을 놓치기 싫어 숨이 차도록 들이마셨다. 누군가를 바란다는 건 이다지도 낯선 감각이었다. 그가 가진 인간의 물성(物性)이 몇 번이고 그를 배신했다. 목이 잠길 정도의 희열에 젖어 있으면서도 나약한 부분이 상처를 입고 피를 흘렸다. 제 살을 뜯어 먹는 에리식톤이라도 된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내가 내가 아니었더라면 하고 바란 적이 없었다.
 재미있을 수 있을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힘겨운 실험이었고 그저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만을 확인했을 뿐이었다.



 상처가 있는 손이 그의 머리카락 사이를 가볍게 흩었다. 밤물결을 닮은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에서 굽이쳤다. 방안은 아직 가시지 않은 잔열 때문에 후끈했고 습했다. 레온티오스는 천장을 보며 드러누운 채였고, 시티르는 그 옆에서 오래 참았던 사람처럼 긴 숨을 내쉬었다.
 줄곧 그에게 묻고 싶은 게 하나 있었다.

 “레온티오스 씨는…… 살면서 무서웠던 적이 있어요?”

 이 물음 하나를 꺼내기가 몹시 어렵고 벅찼다.

 “생각해본 적 없어.” 

 그 목소리에 가라앉아 가던 상념이 다시 요동친다. 시티르는 참지 못하고 상체를 일으켜 그를 내려다보았다. 대답하는 얼굴을, 표정을 읽고 싶었다. 자신이 거기서 무얼 찾고 싶어 하는 지는 몰랐다. 고뇌? 망설임? 미약한 달빛을 머금은 맹금의 눈이 감출 수 없는 당혹과 혼란으로 흔들렸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다고요? 그냥 인간인데도요?” 
 “그런 걸 생각하기엔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 지금은 생각 안 해.”

 명쾌한 말이었다. 그는 그가 원하던 먹이를 던져주지 않는다. 그저 한없이 자기 자신이다. 끔찍하게 얄밉고 안달이 날 정도로 사랑스럽다. 제 꼴이 이루 말할 수 없이 한심하다. 평범한 인간처럼 바닥에 처박히는 것이 두려워 번민하면서 인간을 부러워하고 있다. 왜 내게 없는 것이 그에게는 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하면서 사랑한다.
 레온티오스는 정자세로 누워있던 몸을 돌려, 시선을 그에게로 향했다. 호박금 색의 눈동자가 마주 보았다. 밤을 보는 짐승의 것. 삼키고 탐색하는, 힘의 우위를 쉽게 점지하는 시선. 날개가 부러진 매와 배부른 사자. 시티르는 그의 눈에 담긴 우월감을 한참 전부터 읽고 있었다.

 “넌 무서운 거 있어?” 그는 빙그레 웃고 있다. 서로 재밌으면 됐지. 그 목소리가 지워지지 않아서 시티르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다시 표정을 갈무리하기까지 시간이 걸렸다. 스쳐 가는 답은 많았다. 다시 날지 못하게 되는 것. 아무 쓸모도 없는 인간이 되는 것. 미래를 모이라이의 손에 맡기고 그 불확실함만을 믿는 것. 지금 당장은, 당신 같은 사람한테 빠지는 거요. 

 “저는 레온티오스 씨처럼 솔직하게 얘기 못 해요.”
 “그래, 관둬. 말하기 싫으면.”

 묵직한 손이 그의 손목 위로 얹어진다. 시티르는 그 손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구명줄 같기도 올가미 같기도 하다. 하지만, 레온티오스 씨. 그거 아나요?

 “할 말 없으면 한 번 더하자.” 

 나는 혼자 빠져 죽지는 않을 거예요. 그는 생각한다.

후기연성...이라고하나 시나리오 스포있음~~ 군왕 시점으로 세션전까지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썼습니다 후반에 조금 그렇고그런거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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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옷자락을 지그시 당기면 돌아다보던 형님의 앳된 얼굴을 생각한다. 그 작은 목과 둥근 이마. 그런데도 어딘지 넓고 어른스러워 보였던 한 소년을 생각한다. 그가 처음 제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얼마나 정답고 기뻤던가. 무겁게 짓눌린 어깨가 자신을 외면할 때 자신이 느낀 건 상실감이었던가. 한 소년이 청년으로 자라기까지 얼마나 많은 목숨이 필요했던가. 그 많은 피가 그 손을 어떤 빛깔로 적시었던가.
 형님은 어째서 변해버렸을까? 그는 먼저 답을 아는 질문을 했다. 드넓고 화려한 대현의 황실, 그 몸을 감싼 비단옷과 그가 보고 듣고 입는 모든 것이 형님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나는 변한 그를 원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답을 모르는 질문이었다.

 황궁에서의 생활은 외줄 타기 묘기와도 같았다. 조금만 발을 헛디뎌도 가차 없는 천 길 낭떠러지가 기다렸다. 귀에 닿은 속삭임, 멀거니 흘기는 눈빛 한 번만으로도 사람의 생사와 영욕이 오갔다. 유하의 어머니, 선황의 총애를 받는 리빈은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는 한눈에 제 자식의 재질을 알아보았다. 이를테면 또박또박 되물어온 순간. “그러나 옳지 않습니다.” 받은 두구꽃 한 송이도 버리지 못할 때. 한 점 티끌의 의심도 없는 눈이 남에게 감당 못 할 도움의 손길을 뻗을 때.
 약점이 되는. 황궁에서는 개나 가지면 좋을. 제 목숨을 위협하는 자질들.

 “어마마마는 제가 지켜드리겠나이다.”

 아이가 책상에 기댄 리빈에게 다가와 그렇게 속삭였을 때, 그는 한 손을 들어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런 말은 누구에게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사랑(四郞). 특히 네게 그럴 만한 힘이 없을 때는.”
 “소자, 그러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네 뜻은 기특하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리빈은 언제부터 책상 위에 놓여있었는지 모를, 작은 손이 정원에서 꺾어왔을 부드러운 자귀꽃을 어루만졌다. 

 “명(命)을 아는 자는 위험한 담 아래에 서지 않는다 하였다. 네가 살아남는 법을 먼저 배워야 한다. 그런 다음 남에게 마음을 써도 늦지 않아.”

 리빈은 생사를 다투는 각축장으로 자신과 아이를 내모는 대신, 그저 그가 그 무른 성정의 일부만이라도 지키며 연명하기만을 바랐다. 유하는 어머니를 사랑했고 그 뜻에 따랐다. 그는 맞지 않는 갑옷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듯 남의 비위를 맞추며 재능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법을 배웠다. 제대로 된 추위를 알지 못하던 어린애도 그렇게 궁에서 커갔다. 당시에는 반도 이해하지 못했던 어머니의 말뜻을, 그는 곧 실감할 수 있게 되었다. 황궁 안에는 언제나 크고 작은 파도가 쳐서 그가 사랑하는 것들이 다치고 죽어 나갔다. 절로 거짓말이 늘었다. 
 그 가르침 덕분에 해유하는 보이는 것 이상을 보지 못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한량에 겨우 못 미치는 넷째 황자로서 있는 듯 없는 듯 자라날 수 있었다. 수많은 피보라가 그저 가벼이 옷깃에 튀는 핏방울처럼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의 손위 두 형제가 유건에게 목숨을 잃었을 때도, 그는 살아남았다.



 그날 목에 겨눠진 칼끝을 생각한다. 핏줄을 따라 서리가 에일 만큼 추운 겨울날이었다. 달마저 냉기에 질려 버석거렸고, 사람의 마음이 얼어붙어 형제간의 온정과 미덕도 빛을 잃었다. 숨을 길게 내쉴 때마다 가까운 검날에 맺히는 제 입김이 보였다. 그 검날은 그 숨결마저 도려낼 것처럼 형형하고 날카로웠다.

 시간은 결코 배신하는 법이 없으니 만년을 정정할 듯했던 부황도 시들었다. 회광반조의 부황이 찾은 자식이 그의 적장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처마 밑에서 작게 피어나다 꺼졌다. 그래서였을까. 불안이 그 남자를 좀먹었을까. 어디까지가 오롯이 제 것인 광기이고 어디까지가 불안이 낳은 퇴폐인지 저 자신조차 알 길이 없었던 것일까.
 아니, 실은 아주 멀쩡히 제정신인지도 몰랐다. 유하가 타고 나지 못한 귀한 재질이 그의 형에게는 있었던 것인지도. 유건의 행동은 단순한 광기라기에는 늘 일목요연하게 영리했고 선처럼 계획적인 데가 있었다. 적어도 친왕 시절까지는 그랬다. 이러한 절차는 짐짓 피에 미친 자의 행동처럼 보여도 철저히 계산된 결과일 수 있었다. 다 이겨놓은 장기의 마지막 수를 두듯 유건의 행동은 거침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하가 언제 남에게 위협이 된 적이 있던가? 어려운 차례는 앞서 다 넘긴 터였다.
 이미 유리와 유소의 피를 먹은 검은 만족스러울 정도로 곧게 뻗어 그의 목까지 가닿았다. 

 “어떠냐, 유하야. 내게 할 말이 있느냐?”
  
 그리 물으며 내려다보는 얼굴에 달빛이 가려 그림자가 드리웠다. 마주 그를 올려다보는 찰나 원망도 두려움도 아닌 슬픔이 유하를 짓눌렀다. 문득 두 눈을 감고 그 검날에 뛰어들고 싶은 기묘한 충동이 일었다. 같은 순간, 그는 자문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질문이었다. 소년은 몸을 낮추어 엎드렸다. 무릎이 접히고 이마가 바닥에 닿았다.

 “형님.”
 “오냐, 말해 보아라.”
 “저는 단 한 순간도 그 자리를 넘본 적이 없습니다.”
 사실이었다. 
 “대현 황실의 황제 자리는 저 같은 아둔한 어린애가 탐내기에는 너무 과분하지 않습니까.”
 그는 그렇게 믿는다.
 “천하의 주인이 될 몸은 형님뿐이니 저는 그저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거짓말이어야 했는데. 왜 하필이면 지금일까. 옷자락을 지그시 당기면 돌아다보던, 형의 앳된 얼굴이 스친다. 그 순간의 의미를 그는 아직은 모른다.

 유건은 침묵에 잠겼다. 차분하고 비굴한 굴종의 선언 끝에, 유하는 일견 마지막 호흡이 될지도 모르는 몇 마디 숨을 흘렸다.
 돌연 유건이 폭소를 터트리며 정적을 깨뜨렸다. 그는 무엇이 그리도 즐거운지 무릎까지 쳐가며 웃었다. 유하는 감히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기다렸다. 정자가 떠나가라 한바탕 웃음이 쏟아진 뒤에야, 유건이 유하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일어나거라, 소하야. 내 그저 농을 친 것이야.”
 거짓말.
 “내 어찌 소중한 아우를 그리 심하게 대하겠느냐?”
 거짓말.
 “내 너의 마음은 익히 알고 있으니 현을 위해 요긴히 쓸 것이다.”
 반쯤은 거짓말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군장을 질 만큼 장성하자 해유하는 곧장 군사와 함께 북방의 영토로 떠나야 했다. 살려둔 목숨을 귀하게 써서 싸우다 죽으라는 안배였다.
 해유하는 자라면서는, 어머니를 위해 오직 살아남는 것만을 생각해야 했다. 자기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자진이나 다름없었다. 그리 마음을 먹자 궁에서 마주치는 모든 미진하고 하찮은 죽음이, 이다음에는 필경 그의 차례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것이 그의 고질병이었다. 그는 마음 한편으로는 언젠가 이 지긋지긋한 불안에서 벗어나 자유로울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적어도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래서였을까. 싸움터에 온몸을 내던지는 하루가 궁에서의 십여 년 세월보다 나았다. 그것은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처럼 보였다.
 북방의 칼바람이 보드랍고 연약했던 뺨을 찢고 흉터를 아로새겼다. 어떤 날에는 피투성이가 되어 며칠을 꼬박 말을 달려야 했고 또 어떤 날에는 버석거리는 모래가 씹히는 식사를 했다. 이 머디 먼 북쪽 땅에서는 한여름부터 눈이 왔다. 하지만 그곳에서 보내는 어떤 겨울밤도 제 목에 칼이 드리웠던 그 날만큼 춥지는 않았다. 몸에 박혀온 활촉이 마음에 에인 칼날보다 아프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사랑하는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지도 못하고, 이렇게 멀고 삭막한 땅에 다다라서야, 그는 잠시나마 자유로웠다. 상상만 했던 자유의 언저리를 만지고 더듬어 그 모양을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비록 스스로 죽을 자리를 고르지는 못했으나 이제는 그 방식이라도 직접 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운명이 야속한 탓인지.
 아니, 어쩌면 하늘도 알아서일까. 죄 있는 자에게는 명예로울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다. 해유하는 죄인이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바람은 죄였으니.


 


 유하는 처음 자운명음을 눈에 담았을 때를 떠올렸다. 유건의 혼례식 이후 왕부에 따로 예를 올리러 갔던 날이었다. 그때의 명음은 왕부에 갓 시집온 새신부였다.
 아직도 그날의 모든 것이 잡힐 듯 눈에 선했다. 하늘에는 구름이 두어 조각 떠서 흘러갔다. 저만치 멀리, 그녀가 정원의 꽃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한 손에는 자그마한 서책이 들려 있었고, 국화가 수 놓인 상앗빛 웃옷에 단아한 감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수묵화로 그린 듯한 사람이었다. 섬세하고 짙은 속눈썹 아래 그늘진 눈가가 붉게 물든 채였다. 그 시선은 어딘지 먼 곳을 향했다. 닿을 수 없는 어떤 피안을 바라보는, 그 눈에 담긴 영원한 슬픔. 소년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그 자리에 덜컥 발이 묶였다. 다만 넋을 잃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찰나 매화 꽃잎 하나가 날려 그녀의 귀밑머리로 떨어졌다. 백옥으로 깎은 흰 손이 가만 제 살결을 더듬더니, 그 위로 내려앉은 꽃잎을 찾았다. 엄지와 검지손가락 끝이 모여 그 작고 가냘픈 꽃잎을 짓이겼다. 의식하지 않은 듯한 그 모든 행동이 우아하고 자연스러웠다. 그녀의 주변을 얇은 막처럼 감싼 유장한 슬픔에, 그 작은 몸짓에, 주변의 모든 소란스러운 것들은 색을 잃고 순식간에 배경으로 스러졌다. 그 세계에는 오로지 그녀만이 존재했다. 동시에 그녀는 이 현실에서 아득히 떨어져 있었다. 그 순간부터 소년에게 온 세상의 꽃은 더 이상 꽃이 아니었고, 모든 의미는 의미를 잃었다.
 어린 황자는 붉어진 얼굴을 숨길 생각도 못 한 채 속절없이 뒤돌아 도망쳤다.
 그날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 기억을 자신이 가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드높고 별이 짙은 야만의 밤하늘 아래서,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보석인 양 나유타의 시간 동안 아끼며 돌려보고 되짚고 들여다볼 적마다, 그는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만나지 않았더라면.
 적어도 그렇게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 우연한 몸짓을 눈에 담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나는 그녀에게 마음을 품지 않을 수 있었을까? 다른 길을 갈 수 있었을까? 그녀를 평범히 또 무심히 형수로 대하고, 후에 다정한 말씨에 아담하고 사랑스러운 여인을 만나, 백년해로를 약속하며 함께 매듭을 묶고 그리고, 그 여인을 군왕부의 안주인으로 삼아, 두 사람을 똑 닮은 아이를 가지고…
 생각이 여기까지 흐르면 그는 결국 힘겹게 고개를 털어냈다.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것 같아서.
 그만큼 그녀는 그의 영혼을 사로잡았다. 자신에게 영원한 족쇄가 채워지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그녀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처음 그녀를 바라본 순간부터 유하는 명음을 연모하게 되었다. 그래서는 안 되는 관계였는데도 그리는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여인의 이름을 입속말로 되뇔 때는 뱃속에 나비가 흩어졌다. 입에 들어오는 가장 신 탱자도 다디달았다. 줄곧 바보 같다고 생각했던 곽휘원의 텅 빈 편지를 이해했다. 정인에게 쓰는 편지에 실수로 백지를 한 장 담아 보내었다는 실없는 남자의 이야기였으나, 나 역시도 직접 배를 갈라 내보이는 것이 아닌 이상, 일평생 작고 미천한 몇 마디 줄글을 배운 것만으로는 이 마음을 감히 어디에도 꺼내다 놓을 수 없을 것 같아. 그렇게 생각했다.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그렇게 고요히 그의 중심에 자리를 잡았다. 시간이 지나자 어리지 않은 유하는 더는 그녀 앞에서 도망가지 않았다. 그 앞에서 감히 얼굴을 붉히지도 않았다. 온갖 시고 쓰고 달콤한 색으로 팔랑거리던 나비들을 쇠로 된 함에 넣고 조용히 그 문을 걸어 잠갔다. 그 안에 든 것이 짓눌린 채 저 혼자 얼마큼 부풀고 커지건, 그는 외면했다. 천진했으나 바보는 아니었기에, 감히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미몽은 품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놓지 못한 바람이 있다면 그저 지켜보는 것. 적어도 먼 발치에서라도, 그녀가 사랑하지는 않을지언정 그녀의 삶을 평안케 하는 모래로 쌓은 황실을, 그 명예를 지키는 것…….


 


 지키고자 했던 것들을 자기 손으로 무너뜨린 날은 머지않아 찾아왔다.
 그날 유하는 수행원 두엇만을 데리고 잠시 황궁에 들렀다. 부름을 받고 이 주 정도를 머무를 예정이었는데 일정이 엇갈려 황제는 지방 순시에 나가고 없었다. 기다리는 일은 익숙했으니 유하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해 봄 청명원에는 한참 배꽃이 만발하여 온 사방에 부서진 옥가루처럼 날렸다. 유하는 술병 하나만을 든 채 배를 탔다. 황제의 동생이라는 이름이 주는 몇 안 되는 재미가 바로 이 실없는 풍류였다. 그는 신선놀음인 척하는 장난을 이 나이까지도 좋아했다. 황후가 그날 옥음루에 머무른다는 사실을 그가 알았던가? 배에 탈 때부터 이미 술이 올라 있었기에 기억은 가물거린다. 그러나 알았더라도 감히 직접 얼굴을 볼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그저 먼 발치에서, 같은 공간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안했을 것이다. 그랬을 것이다.
 그는 호수 한가운데서 울리는 칠현금 연주를 들었다. 그녀였다.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밤바람이 화답하듯 고요하게 물살을 밀었다. 유하는 몇 번인가 노를 젓다가 마음이 뜨자 이내 그만두고 배 위에 드러누웠다. 그는 입술을 병에 대고 연거푸 들이켰다. 마음이 차고 또 뜨겁게 젖어 들었다. 술보다 그 음색에 더 취했다. 이 곡이 끝나면 돌아가야지, 이다음 곡이 지나면 뒤돌아야지. 그러다 보니 어느새 조각배에 물이 찼다. 몸을 일으켰을 때는 이미 호수의 반절을 넘게 건너온 뒤였다. 청명호는 수면 아래로 연꽃 뿌리가 엉켰으며 꽤 깊은 못이었다. 만취한 그는 당황해서 휘청거렸고 그 순간 조각배가 넘어졌다. 첨벙! 물소리가 호수를 크게 울렸다. 연주가 뚝 멈췄다.
 해유하가 구사일생으로 옥음루에 다다랐을 때 눈앞에는 놀란 송하의 둥그런 눈이 보였다. 제 주인을 참으로 곤란하게 할 테니 저 애가 나를 미워해도 할 말이 없겠다, 아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명음은 놀라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날 그가 한 어떤 행동도 그녀를 놀래게 만들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차분하게 송하를 시켜 난로에 탄을 태우게 하고 마른 옷가지를 준비시켰다. 아득히 멀리서 탁, 문을 닫는 기척이 났던가. 한참을 떨다 정신을 차리니 시녀들은 보이지 않았고 그녀만 남아 그의 앞에 다과와 과일 몇 개가 담긴 접시를 내려놓았다.
 방안에는 훈훈한 공기가 돌았다. 잔뜩 젖었던 그의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고였다. 창밖 너머에서 이따금 바람 소리와 함께 미약한 풀벌레 소리가 울렸다. 옥음루 한구석에는 아직도 그녀가 타던 칠현금이 놓여 있었고, 탁자 위에는 다과 접시와 함께 술잔이 보였다. 의아한 눈빛을 마주하자 그녀가 덤덤하게 말했다.

 “좋은 날을 그냥 흘려보내기 아쉬워 독작하던 참이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보니 그녀의 두 뺨에 진 불그스름한 그림자가 촛불 때문이 아니라 취기 때문인 것도 같았다. 그런데도 그 자세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곧고 발라서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어찌 이리 늦은 밤까지… 주무시지 않고요.”

 그가 더듬더듬 여쭈었다.
 
 “그럴 일이 있었습니다. 아직도 몸이 떨리는 듯하니 군왕도 한잔하시겠습니까.”

 한참 전부터 혼이 날 것을 각오했는데도, 명음은 그런 말은 일언반구도 없이 나긋한 얼굴로 물어왔다. 평소의 그녀와 달랐다. 이런 일이 가능할 리 없었다. 그러니 이건 아마도 꿈인 거겠지, 호수 바닥에서 마지막으로 꾸는.
 그런 생각이 들자 유하는 조금 대담해져서, 접시에 놓인 복숭아를 하나 집었다. 한입 가득 과육을 머금자 즙액이 터져 나왔다. 과즙은 손등을 타고 내려와 팔뚝의 핏줄을 따라 흘렀다. 과실의 투명한 피를 마시는 듯한 섬뜩한 단맛에 몽롱한 정신이 조금 맑아지는 듯했다. 유하는 그제야 문득 제 처지가 우스워져 저도 모르게 나른한 웃음을 흘렸다. 그토록 연모하던 가을 국화 같은 여인과 잔을 나눌 꿈 같은 일이 생겼는데 볼품없이 물에 젖은 생쥐 꼴이라니.
 대답은 뒤늦게 한숨처럼 세어나왔다.
 
 “소왕은 괜찮습니다. 더 큰 결례를 범하지 않으려면 이제 깨야 할 것 같습니다만.”

 꿈이라 여기면서도 그는 그렇게밖에 말할 줄 몰랐다. 대답을 듣는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쉽게 읽히지 않았다. 그 고요한 미소에 담긴 의미가 무엇인지 골몰하려던 차에,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유하, 내가 내리는 잔을 거절할 셈입니까?”

 그것은 그가 저항할 수 없는 한마디였다. 그녀는 그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되짚어보면, 그날의 모든 일이 그랬다. 이상하고 흐리고 아름다웠다. 그는 몇 잔을 연거푸 더 마셨다. 방안은 따뜻하게 데워졌고, 부드러운 향으로 가득 찼다. 그런데도 묘한 추위가 가시지 않아서, 그는 한참을 떨었다.
 그 섬섬하고 미약한 한기는 제 욕망을 눌러 담고 있는 보루였다. 그녀는 지나치게 가까이에 있었다. 너무나 다정한 말씨로 다정한 말을 건넸다. 무엇 하나 익숙하게 여길 일이 없었는데도 무심하고 자연스럽게 아름다웠다. 그녀가 던져주는 이 덧없는 한 줄기 희망을 어찌 다뤄야 할지 모른 그가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연정을 내리누르기 위하여 쌓아 올린 벽이 안에서부터 무너지며 파편이 가슴을 찔러왔다. 한평생 짓눌려왔던 것들이 희미하게 비추는 빛을 찾아 하염없이 부풀어 올랐다. 그는 눈앞의 칼로 뛰어들고 싶었던 그때의 그 나직한 충동이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자유를 향한 열망과 한 여인에 대한 목마름이 같은 이름으로 그의 안에 눌러 담겨 있었다.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사는 일은 자진이나 다름없는데도.
 그녀의 물기 어린 눈동자는 처음 본 그때와 똑같았다. 그는 갈망과 체념을 동시에 담고 그녀를 마주 보았다. 자기가 지금 무얼 바라고 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애원하는 눈을 했다. 손을 뻗어 가볍게 흩자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명주실처럼 흘러내렸다.
 그날 알았다. 그녀는 붓으로 그려진 사람이 아니라 살과 피가 도는 사람이었다. 만지고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그 사실이 그렇게 미칠 것 같았다. 움켜쥐자 부드러운 살결이 손 모양에 맞게 눌렸고 체취가 느껴질 만큼 몸과 몸이 가까이 닿았다. 타는 불에 손을 집어넣은 듯한 아찔함에 찰나 정신이 들었을 때 그는 이미 그녀를 제품에 세게 가두어 안고 있었다.
 이 순간을 놓치면 더는, 탐하는 마음을 붙잡아 놓을 수 없을 것이었다.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녀를 만지고 안고 파고들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됐다.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닿을 수 없는 것에 닿은 채로 그는 생각했다. 명음.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을 테지요. 이번 생의 내게 그런 행운은 없을 것을 압니다. 어째서 나를 허락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마마. 저는….”

 탁해진 목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상처에서 고인 피가 흘러나오듯이.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한다고 제가 감히 그리 여겨도 되겠습니까? 묻고 싶은 것은 그 어떤 것도 묻지 못한 채.

 “유하.”

 그녀는 나직한 한 마디로 모든 말을 막았다. 그리고 무언가 더 덧붙이는 대신 그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그걸로 끝이었다.
  팽팽하게 당긴 줄 같던 긴장감이 깨어지고, 그는 바로 입가에 와 닿는 목덜미에 입 맞추며 파멸을 향해 나아갔다. 입술이 닿은 그녀의 얇고 가는 목선 아래로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졌다. 가벼운 손짓 몇 번으로 옷가지가 바스락거리며 흘러내려 둥글고 고운 어깨선이 드러났다. 탄성을 담은 눈길이 그 위에 잠시 머물렀다. 그의 심장은 당장이라도 제 껍질을 벗어던지고 튀어나오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빠르게 뛰고 있었다. 살결이 마주 닿고 스치는 곳마다 불꽃이 피어나 아까의 추위는 간데도 없이, 당장이라도 그 자리에서 전소해 사라질 것만 같은 열기가 그를 태웠다. 목 뒤까지 뻣뻣할 정도로 몸이 달아올랐다. 그는 다분히 갈급한 몸짓으로 그 턱선에, 고운 어깨에, 나긋한 빗장뼈에 입을 맞추었다. 달뜬 숨결이 가슴께에 닿자, 그녀의 몸이 조금 떨리며 뒤로 살며시 젖혀졌다.
 그는 자신이 감히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던 그녀의 표정들을 눈에 담았다. 흉터 진 손이 나긋하게 접히는 팔꿈치, 가는 허리,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결과 복숭아뼈를 어루만졌다. 그의 손길은 부서지기 쉬운 보물을 다루는 아이의 그것처럼 신중하면서도 간혹 서툴렀다. 그녀는 그가 간지러운 곳에 닿을 때면 작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것이 달콤한 탄식과 속삭임에 서서히 녹아내릴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길고도 짧게 이어지는 입맞춤은 몇 번을 해도 모자란 것처럼 느껴졌다. 입술이 포개어지고 남의 숨을 훔치고 들이마실 때마다 입안에 남은 과실의 잔향이 짓눌리며 번졌다. 늦봄이어서 모든 것이 그렇게 무르익는듯했다. 매끈매끈하게 땀에 젖은 몸이 겹쳐오면 그녀는 어딘가 힘에 겨운 듯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럴 때마다 그는 그녀의 이름을 여러 번 입술 속에서 굴려보았고 나직이 마주 부르기도 했다. 더는 바싹 붙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 닿아 여린 살결을 파고들면서도 그는 더, 더 원했다. 숨이 차고 넘칠 때까지 놓아줄 수가 없었다. 


 흰 손끝이 잠시 그의 어깨에 난 흉터를 따라 몸 위로 나긋한 선을 그었다. 손가락 사이에 들어온 꽃잎을 짓이기는 것과 같이 무의식적인 행동. 그 한순간이 그의 영혼을 어떻게 묶어놓았던가. 그는 그녀의 옆자리에 늘어져 눈을 감고 있었고, 아주 가까이에서 그녀의 숨결을 느꼈다. 그 영원과 같은 찰나가 지나자 모든 것이 끝났다.
 그녀가 옷을 입는 기척이 들렸다. 그는 자는 척을 했지만, 그녀는 이미 알았다.

 “전부 잊으세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그가 그럴 수 없을 것을 알면서도.
 “호수의 신기루이고 봄밤의 꿈이려니 잊고 당신의 자리로 돌아가세요.”
 그 목소리의 높낮이, 발음에 숨이 섞이던 순간까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것만이 살길입니다.”

 


 해유하는 그날 곧장 도망치듯 궁을 떠났다. 그러나 자기 자신으로부터는 도망칠 수 없었다. 어디로 가서 무슨 짓을 하건, 어느 때건, 몸에 걸린 족쇄가 뻐근할 정도로 무거웠다. 온갖 잡다한 감정이 시도때도 없이 쏟아져나와 그를 괴롭혔다. 할 수만 있다면 떼어다 버리고픈, 추악한 욕심. 영글어 터져서 더는 어떻게 다듬을 수도 없는 날것의 연정. 그리고 숨길 수 없는 희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그럴 수는 없었다. 금수가 아니라 인간 된 자로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몇 번을 되짚어도 스스로 저지른 일, 스스로 끌어다 맨 죄였다. 그 순간 그녀는 칼날이었고 그는 숨도 참지 않고 뛰어들었다. 원치 않아도 그는 그녀를 다치게 할 수 있으니 양날의 검이었고 조금의 구원도 없을 관계였다. 그러나 자신이 여전히 그녀 말고는 그 무엇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이, 가장 무겁게 그를 짓눌렀다. 아직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명예도 일말의 품위도 없이. 그는 그녀를 원했다. 그렇게 해가 지고 날이 가고, 그저 도망치기 위해 베어 넘기는 살의 산이 눈앞에 쌓여갔지만. 무용도 군공도 지은 죄를 덮을 수는 없었다.
 죄책감.
 죄책감이 그를 짓눌렀다.

 바야흐로 황태후의 탄신연이 다가오고 있었다.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중국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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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6.2


정신없이 숙소를 옮기느라 밤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가방을 잃어버린 것은 끔찍한 손실이었다. 그러나 가만히 넋을 놓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1925.6.3


 펜휴 제단 지하에서 발견된 문서에 따르면, 케냐의 푸니 초다리는 아이보리 윈드 호를 통해 상하이의 호팡에게 골동품을 보내고 있다. 우리는 부두 술집에서 아침 일찍부터 술에 취한 아이보리 윈드 호의 선장 토르박을 찾을 수 있었다. 술을 사주며 자세한 사정을 캐내자 그는 불법적으로 미등록 골동품을 운송하고 있노라고 고백했다. 우리는 세관에 신고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그 물건들을 살펴볼 수 있었다.
 방수천으로 덮인 상자 안에는 밸브나 복잡한 전선이 달린 기계들—생소한 형태의 부품이 여럿 들어있었다. 또 다른 상자에는 다양한 석상이나 조각품이 가득했다.

 

  • 60cm 정도 되는 사암 조각에 박쥐 날개가 달린 생물이 역동적인 자세로 내려앉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얼굴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는 얼굴 대신 3개로 갈라진 둥글넓적한 눈이 달려있다.
  • 대형 검은 파라오 석상. 얼굴이 정교하게 세공된 수많은 벌레로 뒤덮여 있다.
  • 15cm 정도의 인간과 염소를 섞은 얼굴의 나무 조각품. 17세기 뉴잉글랜드 시대의 물건이다. 
  • 날의 면을 따라 오래된 기호가 새겨진 부식되고 마모된 단도. 
  • 내부가 자개 빛으로 반짝이는 커다란 고둥 껍데기.
  • 사람 발 가죽이 마치 신발 마냥 그 형태를 유지한 채 청동 고리에 걸려 있다. 최소 100여 년은 되어 보이는, 20~30대 남자의 발이다.
  • 잉글랜드 교외 묘지를 그린 그림. 짐승을 닮은 형체가 땅을 짚고 나오고 있다. M.S. 1924. 서명으로 봐서는 마일스 쉬플리의 그림인듯하다.

 

 이제 나는 이런 물건들을 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바라볼 수 없었다. 깊은 안쪽에서부터 너무나 많은 사건과 상념들이 동시에 끓어올랐다 사그라들었다. 나는 전과 달라져 버린 것이다. 그것도 내가 가장 원하지 않던 방식으로. 그러니 새 동료들의 도움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우리는 선장에게 다크 미스트리스 호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질문을 했다. 그 배의 선원들은 개구리를 닮은 묘한 생김새에 다른 선원들과 어울리려고 하지 않는다고 한다.

 



 점심때가 되어 맥첨을 만났다. 맥첨은 어제보다 솔직한 태도로 답했다. 조심해야 하는 때와 아닌 때를 구분하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그로부터 잭 브레이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잭 브레이디는 자기 얘기를 많이 하지 않는 사람이었기에 맥첨도 시시콜콜하게 캐묻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그와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잭 브레이디의 랑군 행은 묻는 사람들에게 둘러대기 위한 낭설이다. 그는 아직 상하이에 있다. 사정은 몰라도 그가 위험한 일에 뛰어든 것만은 분명하다. 잭슨이 비틀거리는 주점에 들렀을 때, 둘은 대화를 나누었다.
 잭 브레이디를 뒤쫓는 사교 집단은 비대한 여인의 종단이라는 이름으로, 아마도 온 중국 또는 상하이 전체에 그 그림자를 펼치고 있다. 종단의 우두머리 호팡 대인은 관리들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위치의 인물이다. 호팡 대인의 저택은 프랑스 조계지에 있었다. 맥첨은 정확한 주소를 알려주었다.
 우리는 다크 미스트리스 호에 대해서도 물었는데, 가끔 상하이에 들러 짐을 싣는 배이며, 사람들이 선원들의 수상한 외모에 대해 뒤에 수군거린다고 한다. 하지만 영국 국기를 달고 있어 함부로 건드리지는 못한다.


 상하이 쿠리어.
 작은 신문사. 대표는 2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앤서니 창이라는 남자다. 영문과 한문을 병기하기에 상하이에서 기사를 발간한 일이 있다면 이쪽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료실에서 특별히 건질 건 없었고, 고대 종교와 관련된 자료는 박물관에 소속된 번역가나 학자들을 통해 알아보라는 추천을 받았다.


 상하이 박물관.
 공공 조계지와 프랑스 조계지 사이에 있는, 영국식 시계탑이 달린 건물이었다. 내부에 전시된 건 전부 중국 유물로, 도자기나 병풍 등이 죽 늘어섰다. 제이덕이 있었더라면 유물의 가치에 대해 신이 나서 떠들거나 능숙하게 대처하기라도 했을 텐데, 그의 공백이 느껴졌다.
 우리는 박물관 큐레이터에게 물어 전문가를 여럿 소개받을 수 있었다. 34명이 목록에 있었다. 개중 여건과 위치를 고려해 추려서 세 사람을 만나보기로 했다. 역사학자 창닝, 예술 애호가 린옌위, 전임 보조 큐레이터 무셴.



 제일 먼저 창닝 박사를 찾아갔다. 그는 나이가 좀 있는 학자로, 책으로 벽을 세운 작은 성 같은 집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는 학술적인 자문을 부탁하러 왔다고 하고 그의 시간을 빌렸다. 그는 우리의 질문에 상세하게 대답해주었고, 여러 자료를 꺼내 보여주기도 했다.
 비대한 여인의 종단은 한때 중국에서 가장 두려움을 샀던 비밀 종교 집단이다.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공포의 대상이었는데, 근대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그랬고, 현재로서는 대가 끊겼다. 푸젠 지역의 해안에서 해적이 창궐하던 시절 그 해적들이 이 단체의 지시를 받는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종단의 신도들이 적에게 강력한 마법을 쓴다는 전설도 내려왔다. 이들은 농기구를 주 무기로 사용하면서 특유의 잔인함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들이 섬기는 어둠의 신은 거대한 인간 여성을 닮은 형태에, 바닷가의 영향인지 촉수가 잔뜩 달려있었다. 원래는 해안가를 중심으로 활동하다 내륙까지 퍼졌다. 전설에 따르면 바다 밑까지 위세를 떨쳤다고 한다. 물론 이런 기록이 흔히 그렇듯 그 위용을 드높이기 위해 가공된 이야기일 확률이 높지요, 하고 창닝이 덧붙였다.
 창닝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지식은 도움이 되었다. 결론에 경험적 사료를 더하기만 하면 된다. 검은 파라오의 교단에 대해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을 고려하면, 또 내가 직접 겪고 배운 바에 의하면, 이들은 절대 사멸하지 않았다. 대신 시대의 흐름이 이끌어감에 따라 더 깊고 어두운 곳으로 숨어들었을 뿐이다. 학문 밖의 영역으로, 음모의 영역으로. 



 호팡의 창고.
 늦은 시각, 야음을 틈타 호팡 대인의 창고에 잠입하기로 했다. 창고는 부두에 근접한 곳으로, 강기슭에 걸쳐 건물 일부가 물 위에 선 구조였다. 화물칸과 업무공간이 나뉘어 화물이 이동하는 커다란 문이 한 면에 달렸고, 사무실용 문도 따로 있었다.
 우리는 창고 한구석의 문을 따고 최대한 조심해서 들어갔다. 하지만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건물 안쪽에서 여러 명의 발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다급히 위층으로 도망쳤다. 올라가는 계단이 헐거워 빠질 뻔했으나, 운 좋게 들키지 않았다.
 그 김에 2층을 먼저 살펴보았다. 한쪽 방에는 캐비닛과 서류, 장부가 놓인 사업가의 책상이 있었다. 책상 위에 거래 명세 서류, 둘둘 말린 항해도 같은 것들이 놓여 있다. 영국 런던, 케냐, 이집트 카이로, 호주, 회룡도의 지도다. 책상 바닥에는 열쇠가 달린 금고가 있었다.
 서류를 뒤져서 펜휴 제단으로 미술품을 수송한 명세나, 이집트의 오마르 알 샤크티에게 미술품을 보낸 기록, 케냐의 아자 싱에게 화물을 보낸 기록 등을 찾았다. 화물 대부분은 미술품이지만 가끔 책을 수송한 기록도 있었다. 또 호주의 랜돌프 운송회사를 통해 칸캇지리의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에게 광업 장비를 보낸 기록도 존재했다.
 아래로 내려가던 프리스비가 빠진 계단 밑으로 공간이 보인다며 모두를 불렀다. 아마 물건을 쌓아두는 별개의 창고인 듯했다. 창고 안에는 철문이 있고, 철문에 달린 창밖으로 사람이 오가는 그림자가 보였다.
 우리는 1층 사무실을 지나 화물 더미로 향했다. 프리스비는 순찰하던 남자 하나를 기절시키고 그 손전등을 빼앗았다. 창고에는 순찰하는 사람을 포함해 다섯 정도가 있었다. 최대한 조심하려 했으나 결국 난투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프리스비와 메이벨은 둘 다 몸놀림이 굉장했다(해결사인 프리스비는 그렇다 쳐도 메이벨은 의외였는데, 나중에 듣기로 선원들과의 생활은 꽤 거칠었다고 한다). 경비원들은 역시 일반인답지 않았다. 이들은 상황이 험악해지자 낫을 꺼내서 덤벼들었다.
 내 목이 거의 베일 뻔했던 흔적은 가느다란 생채기로 남았다. 메이벨은 낫에 허리를 찔렸고, 프리스비 씨는 다친 머리를 또 다쳤다. 비록 엉망진창이 되기는 했지만, 우리는 어떻게든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우리는 간단한 응급 처치만을 끝낸 뒤, 경비원에게 빼앗은 열쇠로 계단 밑으로 보이던 예의 창고에 들어갔다. 그 안에는 교단의 물건이라 짐작되는 화물이 쌓여있었다.

 

  • 용의 뼈라고 쓰여 있는 거대한 짐승의 뼈 무더기, 상아색 가면, 청동으로 만든 궤. 궤의 손잡이에는 날개 달린 생물의 형상이 새겨져 있었다. 다름 아닌 영국의 그 날 밤하늘을 뒤덮었던 괴물의 모습이었다.
  • 다양한 크기와 재질로 만들어진 풍만한 여인의 조각상. 중국 전통 복식을 입고 부채로 얼굴을 가렸는데, 아래로는 발 대신 촉수가 달렸다. 촉수는 기묘하게 꿈틀거리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 A.P라는 머리글자가 적힌 상자 6개에는 각각 기계 부품들이 들어있었다.
  • 또 다른 상자에는 검은색과 노란색으로 된 풍성한 제사용 로브가 들었다. 로브의 등 부분에는 위로는 부채, 그 아래로 촉수인지 갈고리가 나온 원형의 마크가 그려져 있다.
  • 다양한 화물들에 주소가 붙어 있다. 잡히는 대로 메모하자면: 호주 칸캇지리, 미국 로드아일랜드주 프로비던스 토머스 가 7번지, 매사추세츠주 던위치, 아컴 미스카토닉 대학 의학부 허버트 웨스트 등. 

 

 창고 바닥에도 문이 달려있다. 열어보니 아래쪽으로 뻥 뚫려 바닷물이 지나가고 있었다. 바다로 연결된 것이다. 어떤 용도로 쓰이는 문일까?

 

 

 창고를 속속들이 뒤진 후, 나는 상태가 안 좋은 두 사람을 앞서 보냈다. 마지막으로 나가려는데, 문득 창고 구석에 누군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뒷모습이었지만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노라였다. 노라? 나지막이 부르자 이쪽을 돌아보았다. 눈동자는 물먹은 도화지 같았다. 가만 마주치는 것만으로 익숙한 색이 번졌다. 나는 이 상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기 전에 자신을 멈춰버렸다. 이해가 그 얼굴을 흩어 버릴까 봐 이해를 버렸다. 그러면서 내 말에 익사해버리기 직전의 사람처럼 말을 토해냈다. 여기서- 뭐 해요? 비틀어 쥐어짠 목소리는 거의 남의 것처럼 들렸다. 노라는 돌아온 것일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세상에 내가 모르던 끔찍한 비밀이 있다면 내가 모르던 상냥한 비밀도 있을 법하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나 자신을 설득하는 데 거의, 거의 성공한다.
 그러나 노라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저는, 여기 없어요. 나는 그 애의 눈동자에 비친 나 자신을 본다. 내가 그 애를 다정하게 여기기 때문에, 내가 만들어낸 환각 속에서조차 노라는 내가 이해를 거부하게 두지 않는다. 나는 환영의 세계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아직 숨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익사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슬픔은 칼을 들고 있다. 그런데 내 목에는 한 줄 빗금이 갔을 뿐이다.
 추방령의 마지막 선고처럼 창고의 문이 닫혔다.

 

 

 위층의 금고에서 돈을 조금 챙겨 빠져나온 뒤, 곧장 프리스비와 메이벨을 입원시켰다.
 긴장이 풀리자 섬뜩함이 몰려왔다. 두 사람은 있었던 일을 소화해내려고 한다. 비록 무단 침입이기는 했지만, 이 정도의 일이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낫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들을 직접 보는 것은 수십 번의 말보다 값진 경고가 된다. 나는 앞으로 더한 일들이 기다리리라는 사실을 미리 알려준다. 그것을 의무처럼 느꼈다.
 두 사람이 안정을 취하는 동안에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기 때문에, 메이벨이 지출을 감내하고 사람을 고용했다. 호팡의 저택에 직접 잠입하기는 위험하니 전문가들을 쓰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간만의 휴식을 취했다.

 

 


1925.6.5


 투자의 결과는 금방 밝혀졌다. 메이벨이 고용한 사람은 셋인데, 그중 단 한 사람 보퍼드 존스만이 돌아올 수 있었다. 그도 온전한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횡설수설 들은 얘기를 간략하게 재구성하자면 이러하다.

 호팡 저택은 그 부근의 저택들이 으레 그렇듯 높은 담장에 위쪽으로는 사금파리와 철조망이 감겨 있었다. 정문을 24시간 경비하는 데다, 안쪽이 바로 경비실이며 내부에도 늘 사람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 연유로 이들은 담을 넘어 들어갔다. 담을 넘자 곧장 거대한 연못이 보였다. 그 안에는 커다란 커튼을 닮은, 난생처음 보는 생물이 헤엄을 치고 있었고 주변에는 시종들이 종종걸음으로 돌아다녔다.
 꽤 넓은 저택이었다. 이들은 들어온 방향에서 곧장 보이는 북동쪽 건물 먼저 뒤졌다. 불상이 있는 방은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불상의 목을 왼쪽으로 두 번 돌리자 숨겨진 문이 열린 것이다. 숨겨진 문 너머에는 무기 창고, 약과 비커들이 줄지은 방이 있었다. 더 안쪽으로는 철창이 달린 문이 있었는데 거기까지 들어가지는 못했다.
 그 옆 방에는 호팡의 딸로 짐작되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민달팽이나 지렁이 같은 것을 맛있게 먹고 있었다. 비위가 상하는 광경이었다. 바로 옆에 붙은 화려한 방에는 다양한 귀중품들과 조각상들이 즐비했다. 풍만한 여인이 입은 중국식 복장 아래로 다리 대신 촉수가 빠져나오는 듯한 모습의 조각상이라든지. 보퍼드는 그곳에서 물건을 훔쳤다고 하는데, 사교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는 귀중품이었다.
 이후 인공 연못을 두른 손님 방을 하나씩 둘러보았다. 그중 한 곳에 안경을 쓴 백인 남자가 묵고 있었다. 시종으로 분하고 그 남자에게 말을 건 동료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바닥에 쓰러지고, 뒤따라간 동료도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등 순식간에 무력화되었다. 보퍼드는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고 목숨을 구걸했다. ‘살려 보내는 것도 괜찮겠지.’라고 말하던 목소리가 뇌리에 뚜렷하게 새겨졌다. 주변이 온통 새카맣게 변하고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동시에 수천 수백 개의 눈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눈을 깜빡이는 찰나의 일이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총을 발사했으나,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맨발로 황푸강 기슭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주머니에는 본인이 챙긴 금반지들과 함께 기억에 없는 접힌 종이가 한 장 들어있었다. 거기 찍힌 것은 사교도들의 마크였다.
 잠입한 일행이 겪은 일을 대강은 짐작할 수 있었다. 자흐라 샤피크 같은 사교도들은 기묘한 마법을 쓰고는 했다. 그들이 만난 남자도 그런 사술을 부리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온몸을 갈가리 찢어발기는 고통, 갑작스럽게 정신을 나가게 만들고 수족이 썩어들어가게 만드는 끔찍한 속삭임들. 갑자기 머릿속에 밀려드는 불유쾌한 감각. 나는 진저리를 치며 생각을 털어버렸다.
 너무 위험하다고 판단되었기에, 직접 호팡 대인의 집에 잠입하는 계획은 잠시 미뤄졌다.



 두 사람을 무리시키지 않는 선에서, 우리는 조금씩 움직임을 재개했다. 먼저 린옌위를 찾아갔다. 메이벨이 말하길 그는 사업가, 예술 애호가이자 큰손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현재 상하이의 별장에 머무르고 있었다. 언제나 머리에 제비 브로치를 달고 있다고 해서 제비 부인이라고 불린다.
 미리 약속을 잡지 않아서, 우리는 희귀한 골동품들이 전시된 응접실로 안내받은 뒤 꽤 오랜 시간 기다려야 했다. 응접실에는 뱀과 거북이가 섞인 생물의 조각이나 황금으로 된 앙크, 티베트 종교화 탕카, 용 장식이 새겨진 청동 종(여러 마리가 얽혀 있는데 그중 영국에서 본 그 끔찍한 괴물도 섞여 있다, 이 괴물은 언제까지 나를 쫓아오는 걸까?) 등이 있었다. 제비 부인은 아름다운 시종들을 거느리고 나타났다. 마치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듯한, 고대에서나 존재했을 법한 비현실적인 화려함이 중국에서는 아직 가능한 일인듯했다.
 첫 번째 질문을 들은 제비 부인은 고상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데에 관심을 가지면 큰 화를 입을 수 있어요.”
 “하지만 부인 정도면 누군가에게 쉽게 화를 입을 만한 인물은 아니시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넘어야 하는 산이 너무 크면 얘기가 달라지는 법이죠.”
 호팡을 거스르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여러 가지 형태를 가진 신의 모습 중 하나를 섬기는 위험한 종교 집단이 존재하고, 호팡은 이들의 대사제 역할을 맡고 있다. 제비 부인은 그를 직접 거스를 만큼 어리석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를 도울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덕분에 우리는 호팡에 대해 캐낼 기회를 얻었다.
 우리는 들었던 파편적인 정보들을 꺼내놓았다. 부인은 호팡 대인의 집에 칼 스탠포드라는 이름의 위험한 마법사가 묵고 있다고 일러주었다. 아무래도 호팡을 돕기 위해서인듯한데, 그 마법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호팡 대인에게 딸이 있는 것도 사실이며, 호팡은 그 아이를 꼭꼭 숨겨 밖에 내보내지 않는다. 또, 그가 회룡도에서 강력한 기계를 만든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자세한 정보는 불명이지만 아마 거짓 소문은 아닐 것이다. 제비 부인은 직접 정보원들을 섬으로 보냈지만, 돌아온 정보원들이 이상할 정도로 말을 아꼈다. 마치 부인보다 더 두려운 무언가가 그 섬에 있기라도 한 것처럼.
 다크 미스트리스 호의 선장은 쥘 사부아야르라는 이름인데, 싸구려 매음굴을 즐겨 다니는 인물로 행동거지에 문제가 있어 부인의 가게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잭 브레이디의 이름을 꺼내자, 제비 부인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 ‘좀도둑놈’이 자신의 책 현군칠장비경을 훔쳐 갔기 때문이었다. 제비 부인은 그를 백방으로 수소문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그를 찾게 되면 사례하겠다며 우리에게도 부탁했다. 이런 말을 하는 내내 제비 부인의 시선은 계속 프리스비에게 머물러 있었다.
 이야기가 마무리될 무렵, 부인이 서랍을 열어 산가지가 든 통을 꺼냈다. 그리고 점괘를 보듯 흔들어 수납장 위에 펼치더니, 거치대에서 종이를 하나 꺼내 읽었다. 이전과 달리 중국어로 이야기했기에, 메이벨이 통역해주었다.

 


 제비 부인은 손목에 있던 옥 팔찌를 빼서 프리스비에게 건네주었다. 선물이라면서, 곤륜산 아래 고대도시 허티엔에서 나온 허티옥으로 만든 팔찌인데, 이것이 당신을 지켜줄 거라고 속삭였다. 옆에서 메이벨이 들릴 듯 말 듯 작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들렸다. 후에 메이벨이 설명하기를 중국에서 옥 팔찌란 어릴 적부터 손에 꼭 맞게 만들어 평생 끼는 것으로, 아주 소중한 사람한테 주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프리스비는 어쩌다 본인도 모르는 새 제비 부인의 마음을 훔친 것일까? 어리둥절하던 찰나, 밖에서 시종이 가방을 하나 들고 들어왔다. 어디서 많이 본 가방이다 싶었는데- 내 것이었다! 나는 침착을 유지하려 애썼다. 노력을 들이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곧장 펄쩍 뛰어올랐을 것이다.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비록 제 부하의 팔에 상처를 남기셨지만, 호의의 표시로 돌려드리니 사양 없이 받으셔도 돼요.”
 천연덕스러운 말씨에 곧장 허탈한 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도둑은 사교도들이 아니라 제비 부인의 부하였다. 맥첨이 잭 브레이디와 친한 사이였으니, 잭 브레이디를 쫓는 제비 부인이 그의 술집을 감시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인제 보니 프리스비에게 이런 열렬한 관심이 쏟아지는 것도 이해가 갔다. 프리스비가 부인의 부하에게 제대로 한 방 먹였으니까. 나는 가방을 돌려받았다는 사실에 그저 안도하고 또 맥이 탁 풀려서, 물건을 받은 이상 없던 일로 하겠노라고 말했다.
 저택을 나서면서 프리스비는 자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된 것 같다며 내게 사과했다. 사실 누구도 이런 식으로 흘러가게 될지 예상하지 못했을 사건이니 그의 탓을 할 수는 없다. 또 제비 부인과의 만남에서 귀중한 정보를 많이 얻었다. 불운이 행운으로 이끌어준 셈이다. 중국에서는 이런 상황을 빗대어 전화위복이라고 한다.

 




1925.6.6


 다음날, 이른 시각 제비의 봉인이 찍힌 저녁 식사 초대장이 도착했다. 수신자는 프리스비였다. 나와 메이벨은 부인의 열렬한 러브콜을 받는 프리스비를 놀리면서 다음 일정을 준비했다. 오늘은 목록의 세 번째 인물인 무셴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무셴은 청나라풍의 외투를 입은, 왜소한 노인이었다. 그의 집은 허름했다. 노인의 눈가를 뒤덮은 주름에서 특유의 완고함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노인을 앞에 두고 이전에 다른 이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비대한 여인의 종단에 대해 질문했다. 그러자 노인이 되물었다.
 “그들을 알고자 하는 이유가 뭔가?” 차분하고 한 편으로는 감정을 읽기 어려운 목소리였다.
 “저희는 죽음 숭배 교단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중 한 갈래로…”
 노인은 핵심을 비껴간 답변을 무질렀다.
 “애초에 그걸 조사하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닌가.”

 없을 리 없다. 프리스비의 이유는 잭슨 엘리어스다. 프리스비는 맡은 임무를 수행하러 미국에서 이 먼 땅까지 왔다. 그는 사교 집단을 조사하다 죽은 친구의 유지를 이어받았다. 메이벨 역시 이 일에 자신을 바쳤던 사람을 알고 있다. 그래서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은, 차마 답하지 못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 찾아내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호기심. 그렇다면 일라이저 웨버는? 막기 위해 있다.
 노인은 고개를 메이벨 쪽으로 향했다.
 “정말로 호기심 때문인가? 알아내고 들은 바가 있다면서. 자네는 그 위험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맞나?”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어떤 일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알아야겠어요.”

 노인은 메이벨의 대답을 듣고 한참 동안 가만 생각에 잠겼다. 침묵을 깨고 나온 말소리는 무거웠다.

 “지금까지 이들로 인해 조각나고 깨지고 부서져 인생이 엉망이 되어버린 사람들 가운데 그 이야기가 남에게 발견되는 행운을 누린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네. 자네들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것 또한 빙산의 일각이고, 분명히 그 아래 더 깊고 까마득한 시체의 산이 쌓여있을 걸세. 그 산은 지금도 쉼 없이 그 부피를 늘리고 있으며 하늘에 닿으려는 그 욕심은 멈춤을 모르네.
 그런데 지금의 중국은, 그러한 무고한 사람의 죽음조차도 사소한 일이 되어버린 곳일세. 그렇게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여겨질 수 있는데도, 정말 괜찮은 건가?”

 나는 목숨을 잃을 뻔한 사람과 잃은 사람,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잃은 사람을 보아왔다. 이유도 당위도 없이 가라앉은 사람들.
 이 괴물을 잡아 반으로 가르면 그 검은 바다에 잠겼던 시체들이 떠오를까? 그렇게 하면 그들도 이제 편히 쉴 수 있을까? 아, 그들의 얼굴은 마침내 편안할까? 내가 본 환상 속에서 노라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더라. 어쩌면, 이미 떠난 사람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실 미치기 직전인 것은 나여서, 그들의 위안을 핑계 삼아, 내가 편해지고 싶어서, 그래서 나는 멈추지 못하는 걸까?
 가끔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들 대신에 내가 거기 누워있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슬퍼할 사람도 없고, 집이라 부를 곳도 없는 내가. 잭슨 엘리어스가 살아남았다면 우리는 그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용을 쓸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많은 일이 훨씬 쉬워졌겠지. 노라 에버트가, 살아있었다면, 그냥, 그것만으로 세상은 조금 더 그럴 가치가 있는 곳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생각이 부질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무엇이건 가끔은 그저 멈출 수가 없는 때가 있다.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런 끔찍한 짓거리를 차마 내버려 둘 수 없기에. 더는 누군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기에. 페루에서 돌아섰더라면, 어쩌면. 아니면 적어도 미국에서. 이제는 늦었다. 너무 많이 알아버렸다.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내가 평생을 들여 보고자 했던 세상의 진실은 사람을 삼키는 모래 늪과 같았다. 브레이크가 고장 난 열차와 같았다. 나는 그만두는 방법을 잊었다. 용기와 어리석음과 관성을 겨우 그러쥐고 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어도 나아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나는 잠겨 죽거나 폭사할 것이다. 혹은 상상을 웃도는 더 끔찍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 혼자만 끝장날 생각은 없다.
 프리스비가 눈썹을 세웠다. 저는 항상 위험 속에서 살아왔어요, 그렇게 말했다.

 “당신이 겁준다고 해서 달라질 것 없다고요, 노인네. 원래 하던 일이 덩치가 조금 커진 것뿐이지.” 그 목소리에는 날것의 반항심이 묻어있다. 이를 느꼈는지 무셴은 한 발짝 물러났다.

 “질문이 무례할 수 있었을 텐데, 대답해주어서 고맙네.”
 그래서, 답을 들은 노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얘기를 해주었다.


 “이 사교들은 사람들의 을 잘라간다네. 사람이 피를 흘리면서 서서히 죽어가는 걸 좋아하지.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추측에 가까우니 완전히 믿지는 말게.” 그는 여기서 잠시 멈추고 거친 목을 다듬었다.


 “교단의 신도들은 그들이 믿는 신을 이 땅 위로 불러오려 하네. 날짜는 머지않았네. 아마 기계 같은 걸 만들어서, 하늘에 독을 푸는 방법을 쓸 거야. 그렇게 하늘이 바뀌고 1년만 지나도 이제 세계는 사악한 존재들로 가득 차게 될 테지. 그렇게 하늘이 오염되고 세상에 사악한 것으로 가득 차면, 별들이 자리를 바꾸고 툴루 같은 고대의 존재들이 몸을 일으킬 걸세.”
 무셴은 뒤이어 몇 가지 낯선 이름을 댔다. “니오그타, 아자 토스, 요그 소 토스 같은 신들이 숭배될 때가 올 거야.”
 “그 사교도들이 모시는 신의 이름은 뭡니까?” 내가 물었다.
 “그 신은 너무나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어. 그중 하나가 비대한 여인이지.

 그는 니알라토텝이라고 불리는 존재네.”

 “검은 파라오나 박쥐들의 아버지, 비대한 여인… 그 모든 신이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모두 같은 존재이면서 각자 다른 존재이기도 하네. 이들은 결국 한 신의 여러 가지 모습이야.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어.”
 “이런 지식을 어떻게 알게 되신 거죠?”
 “공부를 하다 보니 알지 말아야 하는 것까지 알아버렸지.”

 얘기를 마친 노인은 몇 번의 잔기침을 뱉었다. 그는 느린 동작으로 우리 각자의 얼굴을 살펴보고, 단호하게 맺었다.
 “자네들은 여기 너무 오래 있었네. 위험하니 다신 오지 말게.”
 그러면서 노인은, 만약 연락할 창구가 필요하다면 상하이 유치우편에 펑우페이라는 이름 앞으로 편지를 남기라고 덧붙였다.

 그는 우리를 문 앞까지 배웅해주었다. 밖으로 걸어 나오는 내내 오로지 한 이름이 입속에 맴돌았다. 니알라토텝. 괴물의 실체는 보다 선명해졌다. 그를 뚜렷하게 느낄수록, 더 가까워지는 느낌이다. 손을 뻗어 만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광대하고 고독하고 으스스한 공간에 툭 내던져진 기분이 들었다. 나는 태평양을 가로지르던 배의 항적을 기억한다. 거기서 느꼈던 아득함과, 뒤틀린 용기를 생각한다.  “절대 그들이 바라는 만큼 쉽게 되진 않을 겁니다.”

 “자네들이 해준 말은 잊지 않겠네.”
 노인이 말했다.
 “자네들 본인도 그걸 잊지 말길 바라네.”

맨덜리 저택의 강도 님의 인세인 시나리오 업야담의 pc마무리 글로그... 같은 것입니다... PC3입니다. 시나리오 스포가 있습니다. 123부 다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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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보기

 

 그는 세상을 사랑했다. 
 거기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었다. 그런 마음을 불가피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눈이 오기 직전에 들여다본 하늘은 잿빛이었다. 손으로 지은 엉성한 오두막은 시간이 지나면서 제법 살만한 보금자리 꼴을 갖추어 갔다. 그는 정성을 들여 주변을 돌보았다. 손길은 투박했지만 게으름을 부리는 법이 없었다. 
 한때 그는 이 설원의 눈 속에 유배되어 있었다. 신의 욕심과 그것이 자아낸 지독한 굴레가 그에게 선사한 형벌로써. 얼고 부서지고 서리가 낀 영혼은 결국 육체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하고, 그는 마땅히 예법에 따라 묻혀야 했을 동사한 몸을 보았다. 그가 자기 자신을 보며 느끼는 감각은 부조리했다. 자신을 달래주고 싶다가도 목을 조르고 싶었다. 타는듯한 갈증을 느끼다가도 순식간에 익사할 것만 같았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섬세한 동작으로 가만 눈을 감겨주고 싶었다. 
 육신이 없는 눈물은 영혼 안에 고여서 강처럼 흘렀다. 그는 한순간도 스스로 울 수 없었기에, 그저 눈물을 제자리로 돌려주려 애쓸 뿐이었다. 결국 죽은 몸은 또 다른 가엾은 영혼과 함께 제 무덤에 바쳐진 한 송이 꽃이 되었다.
 그 모든 일이 끝난 후, 서리는 다시 설원으로 돌아왔다. 그 위에 작은 집을 짓고, 좁다란 지붕의 눈을 걷고, 산가지를 꺾고, 죽은 꿩의 깃털을 뽑고, 이따금씩 눈밭 위에서 장작을 패다 손을 멈추고 세상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면 그곳은 언제나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얼어 죽는 줄 알았어.” 

 눈밭 사이에서 반가운 얼굴이 불쑥 들이밀어졌다. 머리 위로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었다. 가끔은 이렇게 먼 곳에서 손님이 찾아왔다. “아.” 그는 잠시 넋을 놓은 채 나타난 인영을 바라보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을 골라냈다. 혼자 오래 산 사람의 습관대로. 

 “오랜만이군. 안 그래도 버찌 술을 딸 때가 되었다.” 

 남쪽에서 온 손님이 추위를 탔기 때문에 그는 평소보다 뜨겁게 군불을 때고, 불쏘시개로 아궁이 속 장작을 두어 번 들췄다. 그리고 부엌 한구석에 놓인 술동이와 잔 두 개를 들고 문지방을 넘었다. 

 “이렇게 내내 구석에 박혀서 살 필요는 없잖아. 오가기 힘들어서 원.” 
 “매번 같은 불평이군. 다음에는 내가 찾아가겠다.” 

 그해 첫술을 뜯어 맛을 보는 것은 오랜 친구와 하는 작은 의식으로 굳어졌다. 술맛은 늘 작년보다 조금 나았다. 처음에는 결코 누군가와 나눠 마실 물건이 아니었는데, 꾸준히 만들다 보니 시간이 지날수록 솜씨도 붙었다. 이 세상에서 해내는, 해내야 하는 모든 일이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손님은 몇 가지 흥미로운 소식을 전해준다. 눈에 파묻혀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살던 그와는 달리, 손님은 이야깃거리를 이것저것 가지고 있다. 반면 그가 기껏 전할만한 소식이라고는 자신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뿐이다. 

 “요즘은 시력이 예전 같지 않다. 눈밭을 오래 들여다보는 일이 그렇다더군.” 
 “다음에 근방에 오면 의원에 먼저 들러 보는 게 좋겠어. 염려해서 하는 말인데, 더 안 좋아지면 여차하면 도움받을 만한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나을 거다.” 

 그는 한참 대답이 없다. 긍정도 부정도 하기 어려운 말에 으레 흘리는 고집스러운 침묵이었다. 손님은 익숙한 듯 술잔을 비웠다. 얼마 안 가 생뚱맞게 불쑥 튀어나온 물음이 적막을 깼다. 

 “염. 사람들 곁에서 지내는 게 행복한가? 이런 방식으로 말이다.” 
 “너는 가끔 정말 말도 안 되게 당연한 걸 물어보는군그래.” 
 “인간을 아끼고 비호하는 것과 인간이 되어보는 것은 다르지 않나. 어떤가.” 
 “다르지. 하지만 완전히 다르지만도 않아.” 

 서리는 이어지는 손님의 대답을 잠자코 듣는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순간에는 그 안에 깃든 불잉걸이 비쳐 보이는 듯하다. 대답을 아는 질문을 자꾸 묻게 되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어쩌면 그가 내려놓은 신성은 이런 식으로 유지되는 것 같다. 서리는 신기해한다. 그리고 자신의 것과는 다른 그의 심성을 귀하게 여긴다. 그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자신도 차일피일 답변을 미루는 행동을 그만두기로 한다. 

 “어차피 나는 세상 모든 곳에 살아볼 작정이다. 그리고 내가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을 전부 들을 생각이다. 그러니 조급할 것 없다.” 
  
 이번에는 이곳에 머물겠다는 뜻이었다. 온통 희기만 한 세상에 한 점 얼룩으로. 그것도 나쁘지 않나, 찰랑거리는 술잔을 내려다보며 손님이 툭 뱉었다.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정말로, 시간은 많았다. 그는 그것을 부지런하게 사용했다. 쇠를 덥혀 다림질을 하고, 늦은 밤에는 먹을 갈고 초롱불 아래에서 서신을 쓰고, 기르던 개가 새끼를 치는 것을 보았다. 가끔은 함박눈이 세상을 뿌듯하게 채우는 것을 보고, 갓 내린 눈에 자기가 만들어낸 발자국을 되짚고, 어떤 때는 어두운 하늘에서 길잃은 별 몇 개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빙그레 웃기도 했다. 
 묵묵한 경탄으로 생을 노래하고 세상을 음미하다 마지막으로 더는 보이지 않는 눈을 감았을 때 한 인간으로서 그의 삶은 끝났다. 죽음이 한 겹의 흰 눈을 그 몸 위에 덮고 난 다음에 이어진 이야기는 이미 다른 존재의 것이라 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서는 거시적인 독법을 유지하고자 한다. 그 자신은 자신을 잊었을지언정 그가 믿는 세계가 그를 기억했기 때문에. 
 그는 갓난것으로 태어나 아주 처음부터 세상을 다시 배웠다. 모든 순간이 경이로웠다. 그는 껍질을 뛰쳐나간 봉숭아 씨앗처럼 햇볕에 그을렸고, 발장구를 쳤고, 숨이 차도록 날뛰었고, 그림처럼 그려졌다. 어떤 때는 깊고 아프게, 어떤 때는 흐리고 조심스럽게 발자취를 남겼다.  
 그러면 세상은 돛을 편 배처럼 그를 태우고 나아갔다. 여정. 그 자체가 목적인 길고도 짧은 여정. 
 인간과 요괴와 그가 사랑하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생육하고 번성했다. 그는 기꺼이 그 흐름의 일부가 되었다. 하지만 아주 먼 훗날 시간이 흘러 다른 누군가가 아닌 그들 자신의 선택으로 인간과 요괴 모두가 스러지게 되는 날이 오더라도, 세상은 여전히 아름다울 것이다. 그는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수호신이 지상에 내려와 다스리던 시절이 있었대.” 

 어린 요괴는 턱을 괴고 재잘거렸다. 음절마다 한껏 묻어난 웃음기가 구슬발에 부딪혀 깨어지는 햇살을 닮았다. 

 “그렇군. 재미있는 이야기구나.” 

 그러나 그런 세상은 잘 상상이 가지 않았다. 




 어떤 때에 살아간다는 것은 달려 나가는 것이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매서운 발톱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는 원하는 만큼, 숨이 턱에 차도록 네 다리로 땅을 박찼다. 미풍이 뺨을 스치면서 그에게 세상의 온갖 비밀을 속삭였다. 길을 잃은 농부의 아들이 눈밭에 쓰러진 것을 물어다 마을로 돌려보내 줬을 때도, 겁에 질린 농부의 갈퀴질에 눈을 찍혔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세상을 사랑했다.  

 어떤 때에 살아간다는 것은 무언가를 지키는 일이었다. 그는 전장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산 것의 살을 갈랐다. 피보라가 일어 눈앞을 흐렸다. 그것이 죄를 짓는 일임을 알면서도, 그는 목숨과 목숨 사이의 무게를 재었다. 종국에는 시체 더미 속에 쓰러져 자신의 무게를 더했다. 고통, 두려움, 슬픔, 죄악감, 회한, 그런 감정들이 뒤엉켜 가슴께에 고이다 피처럼 흘러갔다. 그럼에도 그는 세상을 사랑했다. 

 어떤 때에는 태어나자마자 죽어갔다. 세상은 그저 그 무게에 짓눌려 죽어가는 곳이었다. 어떤 때에는 슬픔이 스스로를 살해하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았다. 그는 생의 많은 시간 행복했고, 지난 세상의 자기 자신을 알지 못했고, 모르면서도 늘 조금쯤은 자신을 닮게 살았다. 존재의 사슬이 끝을 모르고 이어져 있었으나 그는 그것에 묶여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쥐고 있었다. 놓치지 않도록 단단히. 그것은 그의 선택이었다. 


 먼 곳의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귓가에 다가와 속삭였다. 세상은 너를 굴종하는 존재로 만들지 않았다. 네가 서 있는 곳이 네 세상의 중심이 될 테고 거기서 너는 네 두 눈과 두 귀를 써서 직접 보고 들어야 한다. 너는 네가 원하는 그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네 본성이 어떻다고 정의하고 네 삶의 방향을 가르치고 인도하고 알리는 존재가 없으니 이제는 모든 것을 네 스스로 정해야 한다. 너는 원한다면 금수가 되어 그르치고 원한다면 한없이 고귀하고 높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그것이 세상이 네게 주는 선물이다. 시리고 벅차도 그것이 너의 생애다. 
 속삭임이 이어질수록 바람의 목소리는 점차 자신의 것을 닮아갔다. 그때의 그는 가진 목소리라고는 낮은 으르렁거림 뿐인 존재였지만 그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는 마지막 마디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시리고 벅차도, 
 그는 달려 나갔다. 어딘가에 도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땅을 밟고 다음 걸음을 디디기 위해서. 종착점도 목적지도 없이. 그러다 내키면 멈춰서서 계절의 갈피에 녹아드는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강가의 흰 자갈에 스며드는 맑은 빛을 살피거나, 너른 들판에 드러누워 이마 위로 드는 봄볕을 견디기도 하였다. 자유롭고, 자기 자신일 수 있는 세계에서. 그것이 주는 슬픔의 선물과 기쁨의 선물을 모두 맛보며. 나는 모든 시간과 모든 생애의 약동을 들여 그것을 긍정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에서 너를 본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르면서, 그는 이따금씩 조심스럽게 중얼거렸다. 그러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는 끝나지 않은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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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코 델라 미란돌라의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 일부 참조-변형하였습니다... 습관처럼 같탁친구 마음대로 훔쳐썼는데 캐붕이면 꼭말씀해주세요 꾸벅꾸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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