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호주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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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황을 알아보기 위해 슬래터리 일가를 방문했다. 문을 두드리자 중년의 남자가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숨결에서 찌든 술 냄새가 풍겼고, 외지인에게 호의적인 기색은 아니었다. 우리는 학술 목적으로 부근에 들른 일행이라고 적당히 둘러댔다. 하룻밤만 묵게 해준다면 섭섭지 않게 보상하겠다고 설득해서 침실 하나를 얻었다.
 슬래터리 일가의 집은 방이라고는 세 칸이 전부인 좁은 오두막이었다. 여러모로 관리가 안 되어 어수선했다. 집에는 아들이 둘 있었다. 첫째는 열다섯 살 프랭크, 둘째는 열 살 제코였다. 제코는 손님이 오건 말건 주변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유독 프리스비에게는 꼭 달라붙었다.
 문득 거실 테이블에 놓인 그림이 눈에 띄었다. 삐뚤빼뚤 크레용으로 색을 입힌, 도마뱀 괴물을 그린 그림이었다. 팔다리와 날개가 달린 올챙이 비슷한 형체가 두 발로 서 있었다. 종이의 흰 공백 사이사이 세 개로 갈라진 눈이 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눈이었다.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이라고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어딘지 섬찟했다. 제코에게 묻자 꿈에서 본 형상을 그렸다고 했다. 어린 제코는 낡은 하모니카를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었는데, 그 물건에 과민하게 집착했다.
 슬래터리는 아주 늦은 시간까지 거실 테이블에 혼자 앉아 술을 마셨다. 합석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집안 사정까지 듣게 되었다. 그는 원래 근처에 있던 금맥을 캐어다 먹고 살았는데, 금맥이 마르고 지금은 돈 나올 구석이 전혀 없었다. 딩고 폭포에 출몰하는 빌 버클리의 유령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슬래터리가 사리 분별을 하기 힘들 만큼 취하자 프리스비가 빌 버클리의 이름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그 순간 슬래터리의 표정이 일변하더니 불콰한 안색으로 더듬더듬 문장도 안 되는 말을 내뱉었다. 그놈이 숨겨진 금을 내놓으라고 제미마를 때렸다는 둥, 그렇게 죽어도 싸다는 둥. 그러다 종국에는 자기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며 양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워낙 조각조각 파편화된 이야기들이어서 온전한 사정을 알기는 어려웠지만 슬래터리가 빌 버클리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졌다.
 아이들 방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 가보니 자라고 방에 둔 자오가 술을 훔쳐 여기 들른 모양이었다. 잠시라도 얌전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건지. 프랭크는 이미 술을 진탕 마시고 뻗었기에 제코와 대화를 나누었다. 제코가 가지고 있는 하모니카는 빌 버클리의 물건이 분명했다. 아이가 완강하게 하모니카를 내어주지 않으려고 들어서, 결국 내 손목시계를 주고 잠깐만 빌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물론 다시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
 다음날 날이 밝고 떠날 채비를 하는 우리에게 슬래터리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사막에서 벗어나는 길에 자기 자식들을 도시로 데려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런 벽지에서 먹고살 길이 막막하니 아이들에게나마 살길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사정을 들려달라고 했다.
 슬래터리의 이야기는 이렇다. 빌 버클리와 번 슬래터리는 친구이자 동업자였고, 둘은 15년 전 함께 금맥을 발견했다. 제미마는 사이좋게 지내던 원주민 여인으로 이따금 그들의 숙소를 방문하여 두 사람을 도와주었다. 일이 계속되면서 슬래터리와 빌 사이에 의심이 싹텄다. 그들은 서로 상대가 몰래 금을 빼돌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중 빌의 의심은 합당했다. 실제로 슬래터리는 캐낸 금의 일부를 가로채고 있었다. 이후 슬래터리와 제미마 사이에 아이가 들어서며 둘은 결혼하게 되었고, 빌과 슬래터리는 갈라섰다. 그러다 3년 전에 불쑥 빌 버클리가 찾아와서 빼돌린 금을 내놓으라며 제미마를 협박했다. 슬래터리가 도둑이 든 줄 알고 빌을 쐈는데, 눈먼 총알에 제미마가 맞고 말았다. 제미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슬래터리는 그 순간 눈이 돌아 살려달라고 비는 빌을 끌고 가서 태워 죽였다.
 우리는 슬래터리 가에 있던 빌 버클리의 소지품을 전부 가져와 그의 시체와 함께 묻어준 뒤 떠났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딩고 폭포에서 벗어나 한참 사막을 달리고 있는데 자오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가진 돈을 몽땅 털렸다는 것이다. 얼마 갖고 있지도 않았을 텐데 호들갑이 심해 물어보니,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의 집에서 훔친 돈을 조용히 혼자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 손버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자오는 아직도 뒷좌석에서 군소리하고 있다. 그 프랭크라는 소년도 어디에 내놓든 굶어 죽지는 않을 듯해 다행이다.

 

 


1925.8.1

 여전히 붉은 사막을 항해하고 있다. 울퉁불퉁한 흙이 쌓이고 다져진 바닥은 매우 거칠어서 지프를 타고 오래 달리다 보면 온몸이 다 쑤셨다. 간혹 흙먼지 냄새가 나는 바람을 뚫고 시선을 사로잡는 경이로운 풍경이 드러나면 기지개도 켤 겸 차를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이곳 불모지의 풍경은 도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원색적이고 강렬했지만 동시에 모든 일을 모래 밑에 파묻어놓고 말이 없는 성자처럼 고요했다. 태풍의 눈에 들어선 듯 막연한 정적의 순간 속에서 해묵은 긴장감만이 등 뒤로 그림자처럼 늘어졌다.
 오후 즈음엔가 반나절 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사막의 길 위로 인영이 하나 나타났다. 지친 모습의 원주민 여인이었는데, 사막 한가운데에서 만난 사람치고 제대로 된 짐이나 이동 수단 하나 없이 빈손이었다. 우리가 차의 속력을 줄이고 다가가자, 잔뜩 겁에 질려서 도망을 쳤다. 그 여인은 백인 남자를 무서워했다. 나는 차와 함께 좀 멀찍한 곳까지 떨어져서, 다른 일행이 그를 달래고 얘기를 나누는 동안 기다렸다.
 그 여인은 지하에 갇혀 살면서 강제로 땅을 파는 노역을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잡혀 온 사람들이 많았고, 모두가 감시하에 혹독한 노역에 시달렸다. 금광을 찾는 것도 아니면서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막연히 땅을 파라고 시켰다. 그는 그 끔찍한 장소에서 겨우 도망쳤다. 그런 일을 겪은 와중에 자동차가 뒤쫓아 오니 겁에 질릴 만도 했다.
 그는 며칠간 사막을 헤맨 탓에 자신이 도망쳐온 곳의 정확히 위치는 알지 못했다. 우리 일행의 목적지가 그가 갓 벗어난 사막 안쪽을 향하고 있다 보니, 함께 가자는 제안은 단칼에 거절당했다. 여분의 음식이며 모포 등 내줄 수 있는 걸 다 내주고 행운을 빌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맥퍼슨 산맥 사이를 지나 한참 나아가다 보니 비스듬한 바위 언덕 사이로 해가 걸쳤다. 야영 자리를 펴고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마른 장작을 모아다 불을 붙이자, 모닥불의 빛이 닿는 반경의 바깥은 온통 침침한 어둠에 잠겼다.
 나는 잠결에 뱀이 내 침낭 안에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극도로 차분해진다더니 정말이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불침번을 서던 프리스비를 불렀다. 프리스비와 브레이디가 도와준 덕택에, 군용 단도에 머리가 뚫린 뱀 사체를 두고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불길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데 마냥 기분 탓은 아닌듯했다.


 

1925.8.2

 저 멀리 동쪽 지평선에 걸친 아침 해가 흡사 반지에 박힌 진주알처럼 눈부셨다. 밤새 타오르던 모닥불은 재만 남아 곧 끊어질 실낱같은 연기 한 줄을 흘렸다. 아침 일찍 브레이디가 뱀의 머리에 꽂혀있던 단도를 묵묵히 뽑았다. 죽은 뱀은 피도 얼마 흘리지 않고 축 늘어져 있었다.
 말로와와 니빌 우물 사이의 길목에는 자동차 바퀴 자국이 흉터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다수의 차가 이 부근을 오간 듯했다. 그 역력한 흔적이 북쪽의 모래언덕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다지의 인도를 따라 캐닝 목축 도로를 벗어나 바퀴 자국들 위로 올랐다.
 모래언덕을 넘어가는데, 모래 사이에 묻혀 있던 돌을 잘못 밟았는지 차가 크게 덜컹하고 뛰었다. 그 뒤로 주행 방향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불안정했다. 내려서 살펴보니 자동차 바퀴 축에 문제가 생겼다. 트렁크에 있던 공구로 적당히 손을 봐두었지만 임시방편이었다. 사막을 벗어나면 제대로 정비를 맡겨야 했다.
 고생 끝에 언덕을 넘었다. 저 멀리 높다랗게 솟은 바위 부근에 방치된 텐트 골조 십여 개가 눈에 띄었다. 본디 멀끔한 텐트를 이루었을 천들은 삭고 찢어졌는지 골조에 겨우 발끝만 걸치고 나부꼈다. 폭발물 창고 건물과 목조건물이 그 사이에 우뚝했다. 골조 주변에는 짐이며 상자가 난잡하게 쌓여있었다. 버려진 광부들의 야영지 같았다. 우리는 부근을 찬찬히 탐색했다.

  • 상자 안에는 부품 조각, 튜브 같은 잡동사니뿐이었다.
  • 개중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텐트 내부에는 사람이 지낸 자취가 보였다. 유통기한이 남은 통조림과 먹다 남은 캔에, 기껏해야 어젯밤 아니면 오늘 아침에 자리를 뜬 듯했다.
  • 야영지 언저리에 주차된 낡은 포드 트럭은 흡사 거인이 밟은 것처럼 납작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날아온 돌에 맞은 것도 아니고 폐차된 것도 아닌데 기이하고 부자연스러웠다.
  • 텐트 뒤편 붉은 바위들 틈으로 어두운 얼룩이 보였다. 다가가 살펴보니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 흘렀고 그 아래 물을 받는 용도로 보이는 에나멜 대야가 놓여있었다. 다지는 이런 자연적인 샘물이 가능한지 의문을 품었다. 물은 맑고 시원했다.
  • 모래랑 자갈들 사이 드문드문 인간의 뼈처럼 생긴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대부분 형태가 온전했으나 부서진 것도 여기저기 보였다. 뼈에는 뾰족한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짐승이 씹은 흔적인 듯했다.
  • 텐트 주변에 거대한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무언가가 날아와서 앉았다가 다시 날아간 듯한 흔적인데, 발자국 형태로 보아 새는 아니었다. 발가락이 총 다섯 개 달렸고 발자국 하나 길이가 성인 남자 키만 했다. 
  • 폭발물 저장고 표시가 있는 창고 건물은 자물쇠가 뜯겨 있었다. 안에는 상자 두 개가 쌓여있었는데, 그 안에 모래에 반쯤 덮인 다이너마이트들이 들어있었다. 대략 40여 개 정도 되었다.
  • 목조건물은 갱도 입구였다. 승강기는 작동에 무리가 없었으나 갱도는 저 안쪽에서부터 무너져 내린 듯 토사에 파묻혀 있었다.

 

 승강기를 타고 올라오는데 밖에서 개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름 없는 언덕 쪽에서 딩고 네댓 마리가 우리를 지켜보듯 어슬렁거리다 그 너머에서 나는 휘파람 소리를 듣고는 휙 가버렸다.
 우리는 겁도 없이 딩고 발자국을 따라갔다. 가다 보니 개들 발자국 사이에 사람 신발 자국이 섞였다. 저 멀리 적갈색 개 여덟 마리가 보였다. 딩고 한 마리 한 마리가 거의 사람 만큼 컸고 개중에는 더 큰 녀석도 있었다. 그 사이에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오로지 옥스퍼드화 한 켤레만 단출하게 신은 남자가 서 있었다. 눈은 백내장이 낀 것처럼 뿌옇고 수염도 덥수룩해서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는 돌로 좁은 원을 만들어놓고는 그 안에 자신을 가둬놓았다. 우리를 보자마자 외쳤다. “이 사탄의 자식들아! 오지 마라! 개들이 너흴 찢어놓을 거다!”
 누가 봐도 광인이었지만 이런 불모의 허허벌판에 옷도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천천히 그를 달래며 담요며 입고 있던 외투를 건네주었다. 호의적인 제스처가 통한 것인지, 남자는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경계하듯 으르렁거리던 딩고들은 남자가 휘파람을 불자 뒤로 물러나 얌전해졌다.
 그의 이름은 제레미 그로건으로, 최근에 이 야영지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돌로 만든 원이 자기를 지켜줄 것이라며 절대 원 밖으로 나오려 들지 않았다. 우리를 보고 그 ‘미친놈들’이 온 줄 알았다면서, 사탄의 자식들이 와서 사람들을 때려죽였다는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그들이 못 달린 몽둥이를 들었냐고 묻자 어떻게 알았냐고 질겁하고, 우리를 의심하는 것처럼 빤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또 허공에 대고 자기 할 말을 중얼중얼 내뱉기도 했다.

 

제레미 그로건의 이야기

 

 존 카버북동쪽으로 남은 광부들을 데려간 것이 3년 전의 일이었다.
 누군가 이런 척박한 땅에서 3년을 홀로물론 개들과 함께하기는 하지만 살아남았다니 상상하기 힘들었다. 생활은 어떻게 유지하자고 묻자, 자기는 꿈에서 쉬고 먹어서 괜찮다고 했다. 꿈속에서 길손 여관이라는 곳에 자주 들린다며, 그곳 여관의 주인이 돌로 원을 만들어 몸을 지키는 법도 알려주었단다. 하지만 그는 자기 꿈속에서 있었던 일이며 나눴던 대화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했다. 묘한 이야기였다. 그는 꿈이라는 창구를 통해서 다른 세계나 존재와 접촉하는 게 아닐까? 호기심이 부푼 데다 마침 시간도 늦었기에 오늘은 그와 딩고들 곁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적갈색 황무지를 덮던 햇볕이 이울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모닥불을 켜고 일지를 정리하고도 시간이 조금 남아, 전에 랜돌프 운송 회사에서 가져온 기계를 만져보기로 했다. 사막의 풍경이 영감을 주는 건지 모호하게나마 방법이 떠올랐다. 심어진 씨앗이 기다리고 기다리다 알맞은 환경을 만나면 싹을 틔우듯이.

 

 

 


 일라이저 씨. 제레미 그 미친 노인네는 기억하시죠? 그 인간하고 머무는 중에, 당신이 그 단기 탐사 장비에서 뭘 봤는지 갑자기 쓰러졌어요. 깨어난 이후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여기는 다지 교수가 아는 원주민 숙영지에요. 어쩔 수 없이 맡기고 갑니다. 쉬고 계세요. 다 끝내고 돌아올게요. 프리스비.
 p.s. 일어나면 한 대 맞을 준비 해요.

 형, 정신 차리면 훔쳐 간 건 돌려줄게요. 자오.

 

 길이 엇갈릴 수 있으니 웬만하면 여기 있어. 볼일이 끝나면 케냐로 갈 예정.

 

 

 


 

 

1925.8.3

 프리스비 씨와 브레이디 씨는 밤을 꼬박 새운 듯했습니다. 건강에 좋지 않은데 말이죠. 걱정이 산더미 같은 상황이니 이해는 갑니다. 어젯밤 일행 중 한 분인 웨버 씨가 갑자기 쓰러진 뒤로 기억 상실 증세를 보였습니다. 아예 입을 열지 않고, 이쪽에서 먼저 말을 건네면 인상을 쓰거나 기묘한 표정을 짓고는 합니다. 저는 비록 정신병리 학문에는 문외한입니다만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마치 행동을 처음 배우는 어린애 같기도 하고 언어적, 문화적 사인이 다른 부족 간에 일어나는 소통의 삐걱거림 같기도 합니다. 그에게 접시를 들려주고 앞에서 먹는 시늉을 하자 저를 한참 쳐다보다가 제 행동을 따라 하는 식이었거든요. 아마도 일반적인 기억 상실의 형태는 아닐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래도 식사는 하셔서 다행이지요.
 이러니 어제보다 상태가 나아졌다고 판단하는 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관점일 겁니다. 자오 군은 여기 와서 죽을 건 각오했지만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다며 불평하더군요. 저는 솔직히 어리둥절해졌답니다. 아직 죽고 싶진 않은데 말이죠…… 무슨 무서운 농담을 하시는 걸까요, 다들? 든든한 사막 전문가 데이빗 다지―물론, 접니다!를 믿지 않는 걸까요? 아무튼, 소년이 겁을 먹은 듯해 사막에 들어온 사람들이 열사병에 걸려 이성을 잃거나 다치거나 하는 일은 언제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주었습니다.
 일행은 상의 끝에 웨버 씨를 근처 원주민 마을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한 달 반 정도 근방에 머무를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아예 처음도 아니거니와, 모두 저와는 안면이 있는 사이라서 흔쾌히 받아주었습니다. 물론 선금도 제대로 치렀지요. 웨버 씨가 가지고 있던 짐을 정리하면서, 일지와 펜은 그의 곁에 남겨두었습니다. 세 분이 돌아가며 빈 페이지에다 한 마디씩 적었고요. 그는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서 있었습니다.


 좌표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주변 풍경이 점차 사진과 비슷해졌습니다. 태곳적의 정취를 풍기는, 기이하게 풍화된 바위들이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일행은 바위들 사이로 차를 몰고 들어갔습니다.
 그때 저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는데, 순간 눈앞으로 뭔가가 휙 지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영원 같던 찰나가 지나자 차 유리창에 구멍이 뚫리더니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습니다. 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습니다. 머리 위쪽에서 다시 한번 총알이 스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차 어딘가에도 명중했는지 덜컹거렸고요. 운전석의 프리스비 씨가 액셀을 밟는데도 제대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요. 결국, 모두 차를 버리고 빠져나왔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차 뒤에 숨었습니다. 너머에서 빛이 반짝인 걸 보니 분명 저격수의 스코프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세 분은 그쪽으로 가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필요한 물건을 차에서 꺼내 주섬주섬 챙기며 다른 사람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긴 사막행 동안 정들었던 차가 완전히 고장 난 걸 보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릅니다. 자오 군이 저를 데리러 와서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짐작대로 저격수들이었다고 하더군요. 게릴라 무장 집단이 대체 사막 깊은 곳에서 뭘 하는 것일까요? 왜 호주에 그런 사람들이 있는 걸까요? 소년은 자기도 잘은 모르는데 아무튼 그 사람들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저는 아마도 어른들이 그에게는 복잡한 얘기를 생략하고 그렇게만 말해주었으리라고 짐작했습니다. (세상에, 안젤라. 아빠는 대체 무슨 일에 말려든 걸까?)
 다시 만난 프리스비 씨도 그리 시원하게 말씀해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는데. 고대도시 보고 싶으시죠?” “그렇죠.” “연구하다 보면 이상한 일 많이 보시잖아요?” “그……렇긴 하죠.” “한번 보시고 인상 깊은 것만 취사선택하세요. 상상 너머의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프리스비 씨는 앞으로는 더 위험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며 단단히 경고했습니다. 그런 곳에 이런 소년을 데려가는 게 너무 위험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자오 군은 열여덟이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안젤라 또래인 줄 알았기 때문에 조금 놀랐지요. “저희는 진짜 세계 멸망을 막으러 왔다니까요!” 열여덟 살 소년이 외쳤습니다.
 “어떻게 할래요, 지금이라도 돌아가실래요?” 프리스비 씨가 물었습니다.
 “이… 이걸 여기까지 와서 여쭤보시면 어떡합니까?!”
 “아니, 애초에 따라오실 때부터 경고했잖아요!” 사실 그땐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돌아갈 차도 없거니와 사막의 사 자도 모르는 사람들만 여기 두고 갈 수도 없었지요. 이게 만약에 정말 세계 멸망에 관련된 일이면 더더욱 가야 했지요.

 당시 제가 현장에 없었으므로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세 사람은 저격수들에게서 정보를 알아낸 듯했습니다. 그 뒤로 일행은 곧장 그들의 본거지로 향했습니다. 뒤따라 조금 걷자 사막 한가운데 뜬금없이 허름한 헛간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옆에는 차가 두 대 정도 주차 중이었고, 헛간 입구는 무장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들키지 않을만한 거리에서 기웃거리면서 헛간 주변의 기이한 바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위 밑 모래들은 인공적으로 파낸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 선 바위들은 하나하나 최소 만 년 이상 된 유물이었습니다. 그 표면에는 비록 세월과 바람에 마모되기는 했지만오목새김 그림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이 석조물들은 분명 문명의 표시였고 건축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습니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깨닫지 못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몹시 흥분해서 그곳에 새겨진 그림을 관찰하고 따라 그리며 기록을 남겼습니다. 정말이지 세기의 대발견을 목전에 둔 기분이었습니다. 당장 급한 일이 있어 기록에 원하는 만큼 시간을 쓸 수 없는 점만이 아쉬웠습니다.

 헛간 바깥쪽에는 광업 장비와 생필품, 기계 부품, 잡다한 무기 등이 쌓여있었습니다. 안쪽에는 발전기가 있고 계단을 따라 아래쪽으로 연결되어 있었지요. 일행이 헛간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람과 엎치락뒤치락했는데 그 과정에서 총이 발사되었습니다. 그러자 계단 아래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저희는 후다닥 뛰쳐나와서 숨었습니다. 간발의 차였습니다. 대여섯 정도의 무장인원이 두리번거리면서 저희를 찾더군요. 무장한 사람들로부터 급하게 도망치느라 사막으로 움직였는데 아뿔싸, 놀라서 허둥지둥한 나머지 방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한 시간 정도를 헤맸습니다. 정말 막막하고 면목이 없더군요. 제가 길을 잘 인도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그러다 대충 깎은 수염처럼 듬성듬성한 덤불이 있는 언덕을 넘었을 때 동굴이 보였습니다. 동굴 앞에 아까 헛간 앞에서 봤던 돌기둥 비슷한 바위들이 서 있었습니다. 전의 그 바위들과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진 듯했습니다. 이만치 떨어진 곳에도 건물이 존재했다는 건 정말로 이곳에 도시가 번성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제 추측은 확신의 색깔을 띠어갔습니다.
 문득 동굴 앞에서부터 이어진 2m 길이의 쓸린 자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커다란 자루로 쓸어내린 듯한 형태였습니다. 사막에 있을 법한 동물의 흔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의 흔적 같지도 않았습니다. 아주 거대한 새가 움직였다거나, 아니면 거대한 뱀이 기어갔거나, 황당한 추측 몇 가지만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확신할 수 있는 점 하나는, 만약 이 흔적에 호주의 대자연이 아닌 다른 원인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건 아주 거대한 존재이리라는 것입니다. 
 널찍한 동굴 입구에 서자 안에서 밖으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퀴퀴하고 묵은 공기가 느껴졌습니다. 순간 털이 쭈뼛 설 정도로 긴장이 되었습니다. 사막이 벌린 아가리 속의 새카만 어둠은 분명 제가 닿아본 적 없는 미지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지요. 그래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동굴 안에서 넘어지거나 길을 잃을 염려가 있으니 근처의 바위에 밧줄을 묶어놓고 늘어뜨린 뒤 움직였습니다. 내려가는 길은 몹시 경사가 가팔랐습니다.

 밑은 어둡고 서늘하고 고요했습니다. 헤드 랜턴을 켜고 둘러봤는데, 주변에 사람의 자취는 전혀 없었습니다. 먼지가 어찌나 두껍게 쌓였던지 그 위를 지나가면 발자국이 남으며 연기처럼 피어올랐습니다. 저희는 넓은 인공 건축물 내부로 들어온 듯했습니다. 돌을 자르고 짜 맞춰 만든 벽에 아치형 천장을 가진 건물이었습니다. 천장이 높고 주변이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드러난 모서리로 궁륭 형태를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벽을 이루는 돌에는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닥은 팔각형 블록이 깔린 평평한 길이었고, 복도는 일직선으로 쭉 이어졌습니다. 모든 광경이 경이로웠습니다.
 나아가다 보니 복도에 뚫린 정사각형의 거대한 구멍과 맞닥뜨려 더는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구멍의 너비는 4m 정도 되었습니다. 한때는 양옆에 지나갈 수 있는 다리가 있었던 듯한데 세월에 무너진 것인지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봐도 심연의 깊이를 알기 어려웠습니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저희가 있는 방향에 구멍과 비슷한 크기의 크고 얇은 판이 있었습니다. 경첩과 걸쇠가 매우 특이하게 생겼는데, 이 판이 구멍 덮개 겸 다리 역할을 하는듯했습니다. 다 함께 힘을 합쳐 판을 들어 올려 보려고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쩔까 궁리하다가 밧줄을 이용해서 한 명씩 차분하게 건너갔습니다.
 첫 번째 위기가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림길과 맞닥뜨렸습니다. 오른쪽 길은 어두컴컴하고 고요했습니다. 왼쪽 길은 저 멀리 희미한 빛이 보였고 어렴풋한 소리가 들렸는데, 공간이 워낙 넓어 소리의 정체를 분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저희는 왼쪽으로 나아갔습니다. 불빛의 정체는 인간의 발명품인 전구였습니다. 거기까지 걸어오니 자연스럽게 소리의 정체도 밝혀졌는데, 바로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음이었습니다. 이 길은 바닥에 쌓인 먼지도 적었고 사람이 다닌 자취가 남아 있었습니다. 복도 끝에서 또 갈림길이 나타나 망설이는데, 저 멀리서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희는 다급히 빛이 들지 않는 곳에 몸을 숨겼습니다.
 “입구 쪽에 누가 당했대. 그 녀석들 아냐?” “그럴지도.” “허스턴 님이 잡으라고 명령을 내리셨던걸.” “그 녀석들이 잡아주지 않을까?”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일행은 서로 무언의 눈짓을 나누더니 두 사람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기절시켰습니다. 무슨 특공 임무에라도 참여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순찰하던 친구 중 하나가 총을 발사하는 바람에 소리가 크게 울렸습니다. 또 누가 오는 건 아닌가 싶어 모두 바짝 긴장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멀리서, 정확히 방향은 알기 어려웠지만, 가냘픈 휘파람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희는 기절한 친구들을 잘 묶어서 숨겨둔 다음 도망치듯 갈림길 왼쪽으로 향했습니다.

 쭉 가다 보니 방의 입구가 보였습니다. 문은 없었고, 안쪽에서부터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웅장한 팔각형 공간이 드러났습니다. 너비도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천장은 까마득해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바닥의 육각형 타일은 정교하게 짜 맞춰져 있었고 어떤 원리인지 알 수 없지만 타일 아래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토록 드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빛은 대체 어떤 문명의 역작이며, 이들은 경이로움만을 남긴 채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요?
 어찌나 넓었던지 그 방을 가로지르는 데에만 십 분이 넘게 걸렸습니다. 반대쪽 입구로 나가자 다시 전구가 붙은 복도가 나왔습니다. 저희는 찾아오는 갈림길마다 꾸준히 왼쪽을 선택했습니다.
 그 너머에 사람 손길이 닿은 생활공간이 있었습니다. 방은 네 칸이었고 각각 사람이 만든 가림막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서 빈방을 둘러보니, 사감 없는 남자 기숙사 같은 풍경이 드러났습니다. 침낭이며 이불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벽에는 문란한 포스터가 붙어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곰팡이 핀 과일 껍질,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에 뼈까지 굴러다녔습니다. 엄연한 고대 유물의 일부에 이렇게 존중 없는 행패를 부리다니 충격이었습니다. 어지러운 바닥에서 구겨진 메모를 하나 발견해서 프리스비 씨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지하에서 찾은 쪽지

 

 이곳 복도의 발전기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계단 쪽에서 빛이 들어왔고 꾸준히 사람이 왕래했습니다. 더 다가갔다가는 들킬 위험이 커 보였기에, 저희는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가 반대쪽으로 향했습니다.

 이쪽은 길이 험준했습니다. 원래는 평범한 복도였다가 세월 때문에 무너져 없던 복도와 경사로가 생긴 듯했습니다. 길 한복판에 무너진 천장 때문에 생긴 돌무더기 언덕이 우뚝했습니다. 저희는 안전에 유의하며 천천히 언덕을 넘어갔습니다.
 언덕 너머로는 복도가 여러 갈래로 이어졌고, 보이는 방도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더러는 방 입구가 무너져 진입이 어려웠고 더러는 잘 보전되어 있었습니다. 시험 삼아 멀쩡한 곳에 들어가 살펴보았습니다. 이 방도 역시나 일종의 생활공간으로 보였는데 특이한 점은, 현생 인류에게 맞춘 공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공간 자체도 확연히 넓었고 가구는 하나같이 길쭉하고 기이하게 생겼습니다. 가구라는 명칭도 사실 추측입니다. 가구처럼 보이는 물건들이긴 했으나 우리가 쓰는 가구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데다 용도를 짐작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문고리, 손잡이로 추정되는 부분도 기묘한 생김을 하고 있어서 인간의 손으로 잡기에는 불편해 보였습니다. 전체적으로 키가 현생 인류보다 1.5~2배 정도는 큰, 대략 3m 정도 되는 생물에게 맞춰서 지어진 공간이었습니다.
 방 여기저기에 책장, 장식, 각종 미술품이 놓여있었습니다. 이런 유물들은 주민들의 생활 양식을 추측할만한 좋은 증거물이 되어주기에 문화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미술품에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는데 눈여겨볼 만한 특정한 형상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아마 주민들 자신, 혹은 그들이 모시는 신을 그린 것으로 보였습니다. 원통형 몸체에 위쪽에는 촉수처럼 신축하는 기관이 달린 존재였습니다. 머리처럼 달린 촉수에 입 대신 꽃을 닮은 섭식 기관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곳 어디를 가도 랜턴 빛이 공간의 끝까지 닿지를 않았습니다. 그만큼 이곳이 넓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공간 너머에 무엇이 있고 이 세계가 어디까지 확장될지 짐작도 가지 않았습니다. 경이로운 거대도시가 사막 밑바닥에 존재했습니다. 학계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물론 준비가 안 되어도 받아들여야겠지만! 발견이 언제 사람들을 기다려준답니까!


 이런저런 생각에 희희낙락하며 주변을 훑다 보니 문서로 추측되는 물건들도 찾았습니다. 한 장짜리도 있었고 여러 장을 엮어 제본한 물건도 있었는데, 비록 크기는 달랐지만 어딜 어떻게 보건 그 형태는 분명 이었습니다. 섬유질 종이는 긴 세월을 기적적으로 견디고 있었으나 조심스럽게 취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3m짜리 존재의 물건이라 일반적인 서적을 만질 때보다는 팔 힘이 더 필요했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고서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극도로 섬세하게 손끝의 움직임을 조율했습니다. 이런 순간마다 작은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마음이 경건해지곤 하지요.
 저는 이들 문명의 문자 체계를 살펴볼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안에 적힌 것은 역시 그 기원을 알기 힘든 문양 형태의 상형문자로, 자체적인 문자 체계가 존재하는 건 확실했으나 지금의 제가 가진 제반 지식으로는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쓰인 건지도 제대로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계속 들여다보고 싶더군요. 저는 꿈 꾸는 듯한 기분으로 그곳에 새겨진 기이한 문자들을 눈으로 훑었습니다. 랜턴 불빛이 비칠 때마다 말라붙은 글자가 기묘한 색으로 번들거렸고 종이가 한 장씩 팔랑팔랑 넘어갔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멈췄습니다. 더 넘길 낱장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맨 끝 페이지에서, 저는 이 책에서 제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단 한 줄, 서명, 같은 안료에 같은 필체로 이어져 쓰인 것은 로마자 알파벳이었습니다.

 

 일라이저 웨버.

 

 저는 순간 소중한 유물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섬스포가...어디보자...프로피티아(팬)... 아틀란티스 넥소스(팬) 코르디아(공식)...정도인가?? 프로피티아빼고는 스포가 쎄진 않고 자잘하게 나오는 정도인데 아무튼 다 개짱재밌는 섬이랍니다

내용도 세션중에 있었던 일 띄엄띄엄에 날조에 적고 싶은 것만 적어서 이쯤대면 같탁피플정도만 이해가능하지 않을지요 아무튼 전 재밌었으니까 됐죠?????

++맞다 벨요소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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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프로피티아에서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혈육 폴리케와 재회했을 때 헬레네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동생이 오만의 제물이 되어 자기 자신을 좀먹고 제멋대로 섬을 주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헬레네는 동생을 믿었다. 시티르는 이해할 수 없는 초조함을 갖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폴리케의 방자함을 벌하기 위해 하늘에서 제우스가 내던진 벼락이 세상을 뒤흔드는 순간에도 헬레네는 사랑하는 동생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폴리케가 여전히 그녀가 사랑하는 작고 귀여운 아이라도 되는 양 그러안고 벼락을 맞았다. 그 순간 헬레네가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데메테르의 가지가 삽시간에 나무로 자라나며 그 둘을 떨어트려 놓았다. 하늘을 향해 소리치던 폴리케는 그녀의 눈앞에서 숯덩이가 되었다. 순식간에 새카맣게 익어버린 몸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올라왔다.
 헬레네는 울부짖었다. 절규가 땅을 가득 채웠다. 시티르는 그 목소리를 듣는 일이 괴로웠다.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로? 그는 헬레네와는 달리 그 오만한 사제를 처음부터 포기했고 그녀에게 이런 결말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망이 눈을 가려 신에게 감당 못 할 거래를 걸 만큼 오만한 자들은 결국 타르타로스의 명부에 그 이름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요,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런데 왜.
 왜 그렇게 슬퍼해야만 해요? 고통은 너무 쉽게 전해졌고 숨이 가쁠 정도로 거슬렸다. 폭풍 속에서 온 날개깃이 뻣뻣하게 섰고 흉곽 안쪽으로 마구잡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정돈된 사고를 뒤흔들었다. 목 뒤가 뜨겁게 타올랐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날개를 펼쳤다. 자기가 무얼 하는지도 모른 채, 곧장 날아올랐다. 단 한 순간도 아래로 눈을 돌리지 않았던 까닭에 그는 깨닫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일 만큼 까마득한 높이까지 날아오른 후에도 그 비명은 여전히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만.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길게 펼쳐진 날개가 바람을 거스르고 때때로 그 틈 사이를 비틀어 율동하면서 마구잡이로 공기를 갈랐다. 하늘과 땅 사이의 높이는 땅과 타르타로스 사이의 높이와 같았다. 시인들이 즐겨 말하기를 청동 모루가 아홉 날 아홉 밤 동안 떨어지는 간격이었다. 직접 날아 올라본 적이 없는 자들의 과장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여도 잠깐 숨 돌릴 시간도 없이 이렇게 높은 곳까지 한달음에 올라와 본 적은 없었다. 세찬 비에 젖고 온갖 방식으로 학대당한 날개 근육에서 뜨거운 김과 서리가 동시에 피었다. 너무 가까이서 천둥 치는 소리를 들어서 귀가 먹먹하게 울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찼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무언가 씌인 사람처럼 벼락과 벼락 사이를 잽싸게 통과하며 몇 번의 날갯짓으로 구름 사이를 헤쳤다.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신과 인간의 세계 사이를 벗어났다. 그 너머에 닿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서 당장이라도 입으로 뱉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으려고 했어요, 그땐.”

 공허한 말이었다. 그는 자기가 본 찰나를 떠올렸다. 그 순간이 도자기 조각처럼 눈에 박혀 아무리 애를 써도 잊히지 않았다. 구름 위 젖빛 대리석으로 눈부시게 빛나던 세상. 시야를 채우던 거대한 손. 연회의 유희에 젖을 때 신들이 취하는 부드러운 외양이 아니었다. 자기 광휘를 최대한 끌어올려 무언가를 짓누르려 할 때의 모습. 제단에 나른하게 걸터앉아 기름과 뼈의 연기를 들이마실 때가 아닌, 죄지은 먹이를 낚아채기 직전의 찬란하고 영광으로 가득 찬 모습.
 진저리 날 정도로 잘 알았다. 나 자신의 한계 정도는. 막을 수 없다는 것쯤은. 하지만 아직도 귓가에서 그 비명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제발 멈춰줘. 더 듣고 싶지 않아. 뻗어오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은 그랬다.
시티르는 바다로 추락했다. 그가 바다에 뛰어들어 자신을 받았다고 했다.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또 이럴 생각이냐?”

 레온티오스의 불퉁한 목소리가 시티르를 다시 현실에 데려다 놓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시티르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지금 시티르가 머무르는 곳은 전에도 신세 진 바 있었던 좁은 침대 위였다.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목숨이 붙어 있는 게 기적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 순간 제우스는 관통하는 벼락의 주인이자 그 자체였고 그의 부드러운 인간의 살을 한 겹 덮고 있던 냉기의 바람은 갈가리 찢어져버렸다. 그의 날개는 불타서 사라졌다. 몸은 뜨거운 열기가 훑고 간 통증에 시달렸고 그는 며칠 내내 겪어본 적 없던 고통스러운 밤을 보냈다. 신체의 고통은 일부에 불과했다. 신의 선물은 그의 영혼에도 상흔을 남겼다.
 그래도 어쨌든 농담할 정신은 있었다. 이전에 겪은 바 있었던, 세상이 무너지는 절망은 아니었다. 신들이 자신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는 바. 

 “기회가 있겠어요?” 시티르는 그의 물음을 자조적인 방식으로 빠져나갔다. 정말로 또 그럴 계획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스스로 확신이 없어서였다.
 레온티오스가 앞에서 짧게 혀를 찼다. “다시는 그러지 마. 그런 일 없게 할 테니까.”
 “알아요. 나랑 어울리는 일은 아니었죠.”
 아직 한참은 일렀지만 이런 기억은 차라리 까마득히 지나간 일 취급하고 싶어서, 그는 현실의 풍경에 집중하며 눈앞에 있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왜 답지 않게 그런 짓을 하느냐고, 마저 덧붙이는 퉁명스러운 목소리. 찡그린 미간. 제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 눈매가 보였다.
 “그런데, 계속 서서 얘기할 거예요?” 대놓고 말을 돌리는 듯한 기색에 레온티오스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럼 내가 환자 자리를 뺏겠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온티오스는 시티르가 걸터앉은 침대 앞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팔짱을 낀 채였다. 올려다봐야만 했던 눈높이가 조금 아래로 옮겨갔다. 

 “그 위쪽은 어땠어?”

 레온티오스가 물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 몇 마디가 근처를 스치는 것만으로 각인된 그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도망가고 싶은 감각까지 뒤쫓아왔지만 더는 날개가 없었다.
 “별것 없던데요.” 시티르는 허세를 섞어가며 평소보다 가벼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새삼스러운 감상이 남을 만큼 오래 머물렀던 것도 아니었다. 멋지고 새하얀 곳이긴 했으나 그걸 떠올리고 부러워하면서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들기도 싫었다. 하지만 눈앞의 레온티오스는 여전히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재밌지 않아?”
 “내가 신이라도 됐다면 그랬겠죠. 난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는 법은 잘 몰라요.”

 송진처럼 뭉근하고 끈적하게 몸에 달라붙어 있는 통증, 평소보다 날을 세운 자기방어가 평소였다면 쉽게 읽어낼 만한 것들을 방해했다. 시티르는 그가 무슨 의도로 그렇게 물어오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는 원래 신들의 세계 같은 것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두던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레온티오스 씨가 그쪽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는데.”

 그는 순간 허를 찔린 표정을 했다. 이내 입술이 단단하게 다물렸다. 얼핏 무언가를 걱정하는 것 같기도, 막연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의아해진 시티르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느릿한 움직임으로 그의 뺨에 한 손을 얹었다. 자기가 모르는 게 뭐건 간에 펼쳐놓고 조금 더 만지작거리고 싶었다. 불건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관심 있어요? 궁금해요?”
 그는 한참을 침묵했다.
 “아냐.” 그러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관심 없으면 됐어.”

 레온티오스는 그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만지작거리던 손안이 허전하게 비었다. 그 존재감은 좁은 방을 채우다가 몇 번의 발걸음으로 너무 쉽게 빠져나가려 했다.
 그 순간 텅 빈 손끝에서부터 묘한 한기가 일었다. 겪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견디기 힘들 만큼 생소한 느낌이었다. 고작 몇 걸음 움직인 것뿐인데 그가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곳까지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한 시티르는 자기도 모르게 툭 뱉었다. “가지 말아요.”
 “조금만 더 여기 있어요.”

 그리고 찰나의 정적. 살짝 벌어진 나무의 틈새로 미약한 빛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공기 중에 가볍게 먼지가 떠도는 게 보였다. 반응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을 먼저 내던지는 일은 늘 낯설어서 시티르는 말과 말 사이의 공백에 묘한 긴장감까지 느꼈다. 지금이라도 그냥 장난이었다고 둘러댈까? 그가 정말로 그 말까지 토해놓기 직전에 레온티오스가 묵묵히 뒤돌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서 시티르가 비워둔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짚을 깐 리넨 천이 옆으로 조금 기울었다. 시티르는 자기도 모르게 시트를 구겨 쥐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을 풀었다.
 둘은 한참을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나뭇결 너머로 파도가 뱃전을 건드리고 가는 소리만이 미약하게 울렸다. 시티르는 아주 느리게 깨달았다. 자신이 겁에 질렸다는 것. 이 비좁은 배 안에 갇혀 더는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 적어도 지금 당장 혼자 있고 싶지는 않다는 것. 그런 나약함은 직접 이해한 뒤에도 그다지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꾸며도 매끄러운 말로 나오지 않았고 자기 약점을 투박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게 최선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레온티오스였다.
 
 “너 아직도 고향에 돌아갈 마음 없어?”
 “그다지요.”

 평소 같았더라면 뒤에 올 말을 기민하게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었다. 질문 자체보다는 질문 너머를 보면서.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는 자신을 뒤따라올 재앙, 날아서 지나치던 곳을 두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미래, 그런 것들이 먼저 떠올랐다.
 레온티오스는 어울리지 않게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럼, 너만 생각 있으면 나랑 같이 갈래? 내 고향에.”

 ……네? 시티르는 순간 눈이 동그래져서 돌아보았다.

 


 
  2
 헬레네는 화상에 바를 쓸만한 연고를 들고 왔다. 그녀는 늘 그랬듯 신중했다. 그의 등에 임시로 덮어둔 천을 떼어내고 그을린 상처를 확인했을 때도 그저 짧게 숨을 들이켰을 뿐 티를 내지 않았다. 지금 당장 그런 순간까지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았던 시티르는 그런 배려가 고마웠다.
 헬레네는 곧 소식이기도 했다. 그가 하늘에서 떨어진 직후 정신을 잃었기에 듣지 못했던 섬의 뒷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데메테르 여신의 도움으로, 그리고 그 뜻을 짐작하기 힘든 운명의 여신들의 안배로, 폴리케가 새카맣게 불타 죽었던 그 자리에서 붉은 꽃이 피어났고 그녀가 여신 휘브리스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걸로 괜찮은 건가요?” 여동생에게 일어난 이 일이 헬레네에게 무슨 의미인지 단박에 이해하기 어려웠기에, 침대에 엎드려 있던 시티르는 고개를 돌려 찬찬히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살아 있으니까. 비록 내게 익숙한 형태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헬레네는 어딘지 홀가분해 보였다.
 다행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제 팔들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더는 그런 슬픈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내게 눈에 보이는 증거보다 중요한 건 살아가다 보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감각이라네. 그 마음 하나만으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왜, 함께 별을 바라보고 있다면 멀리 있어도 닿아있는 기분이 들지 않나.”
 “흐음. 같은 걸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받는 건가요?” 알 듯 말 듯 했다. 그는 갑자기 주어진 문제를 고민하느라 두 다리를 번갈아 까딱거렸다.

 “그렇네. 그 애도 어딘가에서 나처럼 무사히 별들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당장 곁에 함께 있는 게 아니더라도요.”
 “자네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지 않나?”

 그런가, 그는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항상 그의 곁에서 자기 힘을 증명하는 아버지조차 헬레네가 자기 동생에게 하듯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북풍은 태어나기를 차갑고 날카로우며 폭력적인 바람이었고 그를 들어 올리는 힘이었다. 하지만 헬레네가 동생에게 보인 애정은, 글쎄, 한없이 따뜻하다가도 가끔은 너무 뜨거워서 자기 자신까지 파괴하는 힘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턱없이 위험했다. 사람을 순식간에 번개에 뛰어드는 바보로 만들질 않나, 척 봐도 자기를 죽이려는 수작에 걸려들 만큼 이성을 날려버렸다. 그런 열기를 탐냈다가는 그 불씨가 순식간에 자신을 태울 걸 알고 있었다. 이번만 하더라도 충분히 배운 참이었다. 그저 그 끄트머리에 스치듯 닿았을 뿐인데 자기 통제를 잃고 날뛰다 바다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그렇게까지 다 죽어가면서 생각하고 싶은 남이 있냐고?
 “아뇨.” 마음의 문제라는 게 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기만 했더라면, 분명 사양했을 것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진저리를 치고 도망갔을 것이었다.

 “정말 없나?”

 하지만 헬레네는 레온티오스가 아니었다. 눈치가 좋았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녀의 눈썹이 파도처럼 물결치는 게 느껴졌다. 시티르는 못 이기겠다는 듯 웃었다.

 “헬레네 씨……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왜 또 모르지 않나. 자네에게도 소중한 사람이 있을지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전적으로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시티르는 순순히 인정했다.

 “정말이지, 헬레네 씨 반만이라도 눈치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다. “어쩌겠나? 그렇게 눈치 없는 놈인 걸 알고 반한 거 아닌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또 할 말이 없긴 한데요.”

 하긴 이제 와 누굴 원망하는 것도 우습기만 했다. 시티르는 제 팔 위에 턱을 괸 채 한숨을 쉬었다. 네가 관심 없으면 됐어. 레온티오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을 때 그 빈 자리에 남았던 소슬한 한기가 떠올랐다. 어떤 뜨거운 것이 놓였다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는 휑한 느낌. 그런 감각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서 못내 거슬렸다. 자기 자신도 제대로 모르니 남에게 설명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추위를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스스로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여기면서 살았는데,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그렇지가 않네요. 전적으로 당신들이 원인인데, 나는 아무래도 탈 배를 단단히 잘못 고른 것 같아요. 이 배에 너무 오래 있어서 이상한 물이 들어 나까지 바보가 되는 기분이라고요. 샐쭉하게 불평을 할 수도 있었겠으나 헬레네에게 그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생각의 가닥을 옮겨 다른 얘깃거리를 더듬었다.

 “저, 헬레네 씨는 애초에 왜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던 건가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얘길 들으니 궁금해져서요.”

 그 물음에 헬레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가늠하는 것 같기도 했고, 눈을 감지 않고도 한참 먼 곳에 닿았다가 온 듯도 했다. 그는 날개가 있어도 못 하는 재주였다. 그녀는 편안한 동작으로 굳은살이 박인 한 손을 자기 무릎에 내려놓았다. 뿌리가 깊은 사람 특유의 선명한 눈동자가 있었다.

 “언젠간 자네도 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거야. 거기에 무언가 있다, 없다 하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일 뿐이라네.”
 “그만큼 중요한 곳이라서?”
 “아무것도 없어도 그게 내 고향이니까.”

 있을 자리가 있다는 감각이 꼭 그럴까?
 온 하늘이 내 것 같던 날들, 한없이 자유로웠던 날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는 어디든 갈 수 있었고 원한다면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빛날 수 있었다. 그런 것을 다 내버리고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레온티오스에게 함께 가자는 얘기를 들은 뒤로, 시티르가 막연하게 상상이나 해보던 그 감각을 헬레네는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듯했다.

 “그런 곳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나한테도 좋은 일일까요.”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지만. 시티르는 한쪽 팔에 고개를 기댄 채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매번 헬레네 씨를 보면 신기하다고 할지 배울 게 많다고 할지, 제가 전혀 모르는 걸 많이 아시네요.”
 “사람마다 사는 게 다르니 말이야. 나도 똑같이 자네에게 배운 점도 많고 새로 이해하는 것들도 많다네. 그러니 재밌는 것 아니겠나?”
 “그러면 나쁘지 않은 친구인 셈이죠?”

 둘은 어울리지 않게 작당 모의를 하는 어린애들이라도 된 양 마주 웃었다.


 
 
  3  
 “다시 날 수 있을 거야.” 그가 자기 세계에서 기다리는 결말을 향해 떠나며 남긴 말이었다. 내 몫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너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4
 애착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 외에 다른 무언가가 내 마음 위로 비집고 들어오는 걸 무력하게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아낀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왜 간단한 생각 하나조차 내 마음대로 멈출 수가 없게 되었을까. 그리 세게 붙잡은 것도 아닌 손길 하나도 뿌리치지 못하게 되었을까. 언제든 내가 원하는 대로,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었는데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어버린 걸까. 거슬려. 생각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한껏 입꼬리를 휘어도 보았다. 거슬렸다. 아무 효과도 없었다. 몸이 끔찍하게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한순간도 홀가분하지 않았다. 가슴을 감싼 뼈마디 사이사이로 실밥이 마구 엉켜 있는 기분.
 끈질기게 훼방 놓던 운명의 실이 결국 나를 지하로 끌어당긴 그 순간조차, 어떻게 보면 이미 예정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추락이란 그런 의미였다. 신들의 뜻은 인간의 이해 너머에 있고 한번 운명이 꺾인 존재는 기어이 바닥을 본다는 것이 극작가의 순리였다. 나는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은 것들이 나를 아래로만 잡아당길까? 하나같이. 내가 저 먼 데까지 날아오르도록 도와주질 않아.
 그렇게 불평해도 개운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원인을 알고 있었다. 몇 마디 볼멘소리를 더 해봤자 정해진 사실은 확고했다.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이 아래에 정을 붙이고 머뭇거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헤어나기 힘든 사랑에 빠진 것도, 자신과 운명이 묶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그 노인을 구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고향에 돌려보내길 선택한 것도, 남의 슬픔 때문에 이성을 잃고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은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러니 결과도 스스로 감당해야만 했다. 갈라진 땅의 살갗에서는 아레스의 발밑에서 나던 진한 흙냄새가 진동했다. 그 밑에 숨겨진 시체 구덩이의 악취, 수천수만 구의 냄새를 함께 맡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운명이 다하기 전까지 그가 행복하니 불행하니 쉽게 평가하지 말라고 했던가. 일이 모두 마무리된 다음에야 그 속뜻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있고 인간의 운명도 결국은 거기에 속했다. 그러니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바닥을 치는 게 어떤 기분인지. 
 


  

  5
 밤바다의 숨죽인 어둠을 가르는 대신 그 어둠에 기꺼이 잠기며, 헬레니우스 호가 나아가고 있었다. 뱃마루가 느릿하게 흔들렸다. 그는 갑판에 맨발을 디디고 선 채 둘러보았다. 바다는 역청처럼 검었고, 하늘에는 별 한 점 없었다. 새카만 해무에 싸인 듯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희미했다. 신들이 태어나기 전 태초의 공허가 이런 색이었을까? 까마득히 높은 곳에 뜬 은빛 달만이 반쯤 감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 단조롭고도 비현실적인 풍경을 보며 시티르는 생각했다. 꿈이구나.
 꿈은 아름답지만 언제나 미심쩍고 의뭉스러운 신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거쳐 나오는 문은 두 가지였다. 진실한 예지의 소식이 걸어 나오는 뿔의 문. 괴이하고 망령된 속삭임이 태어나는 상아로 된 문.
 이 누추한 곳까지 도착한 이야기는 어느 쪽일까? 그는 기지개를 켜듯 양팔을 죽 늘이고는 갑판에 팔꿈치를 댔다. 지금쯤 그의 잠든 몸은 카론의 배에 실려 아케론의 가장자리를 떠돌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깜빡 조는 중인가 보지. 아무렴 사자의 강변의 시시하고 소름 끼치는 풍경에 비하면 익숙한 이곳이 훨씬 나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랐을 때,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티르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얼굴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아래로 훅 내려앉았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얼굴이었는데 보자마자 눈을 뗄 수 없었다. 시티르는 제자리에 굳어버린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시티르가 그러건 말건, 레온티오스는 성큼성큼 다가와 곧장 그를 끌어안았다. 오래 머뭇거릴 새도 없이 익숙한 묵직함이 온몸을 감쌌고 순식간에 오감이 한 사람으로 가득 찼다. 익숙한 살갗의 냄새, 금방까지 따뜻한 불 가에 있다가 온 사람한테서 나는 옅은 그을음 향기가 났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게 신들의 자비일까. 아니면 더 큰 비극을 위한 조금의 유흥일까. 목구멍 안쪽이 따끔거렸다. 이건 그저 꿈이야. 알고 있는데도. 모든 일이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그가 곁에 있는듯한 현실감에 묶였다. 붙잡듯 자신을 끌어안은 손길은 뱃고물을 항구에 매는 밧줄처럼 단단했다. 한편으로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신기루를 안는 것처럼 조심스러우면서.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목소리는 닿은 몸의 울림을 통해 전해졌다. 가라앉은 숨결이 바로 귓가에 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도 확신도 없으면서, 시티르는 달래듯 속삭였다. 정말로 그렇게 믿는 사람처럼 다정한 말씨였다. 그 말은 허공에 잠시 떠 있다가 의미 없이 흩어졌다.
 그의 품은 따뜻하기보단 뜨거웠다. 정돈되지 않은, 거친 맥박이 느껴졌다. 억누르고 있었지만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울고 있다는 것쯤은. 시티르는 천천히 양손을 들어 그를 마주 안았다. 그가 자신을 완전히 품에 가둔 것에 비해 지금 자기가 덮어줄 수 있는 공간은 미약했다. 날개가 있었다면 전부 가려주었을 텐데.

 “네가 얘기하던 걸 들었어.” 문득 그가 말했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자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깨어진 하늘의 조각에서 튀어나온 다른 세계의 자신은 신들의 뜻을 전해주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있었다. 지겨워. 재미없고, 시시해. 그저 그렇게 불평을 늘어놓을 뿐 이유는 전혀 몰랐다. 그런 모습이 예전의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해주어야만 했다. 그의 옆에 앉아서 듬성듬성 꿰맨 이야기를 내려놓을 때만 해도 자신의 말을 누군가 듣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당황한 시티르가 뭐라 입을 뻐끔거리려는데 메마른 여름 땅처럼 갈라진 그의 목소리가 꽂혔다.

 “넌… 대체 왜 그래? 뭐가 그렇게 매번 지겹고, 재미가 없어?”

 원망하는 투는 아니었다. 그저 말소리도, 태도도, 평소 같지 않을 뿐이었다. 평소 같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시티르는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것도 잊은 채 놀랐다.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내가 나로 있는 것이 그를 상처 주기라도 한 걸까? 내가 뿌리내리지 못해서, 그 모든 순간이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언젠가는 질려서 떠나버릴까 봐? 좁은 방에서 망연히 한발 물러서던 그 모습에서, 읽지 못했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았다. 그 자리의 이면에 서 있었던 건 선명한 불안감이었다. 그 순간에는 읽을 수 없었을 법도 했다. 서로 재밌으면 됐지. 그렇게 말하며 자신만만하게 눈을 빛내던 그의 모습만 보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더 많이 알았다. 차마 뿌리치지 못했던 손길, 되묻던 목소리. 모든 것을 잃은 눈을 알았다.
 그가 이렇게 날것의 자신을 내보일 때마다 시티르는 헤아릴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맨몸에 드러난 흉터를 하나씩 짚고 이야기해주었을 때, 코르디아의 절벽 아래서 본, 자기가 갈구하던 그러나 가지지 못했던 과거를 화난 목소리로 하나하나 씹어서 뱉어냈을 때. 아버지, 그렇게 발음할 때의 표정. 그는 자기가 느끼는 거라곤 무엇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했다. 부서지든 부서트리든 부딪혔고, 좋든 싫든 분명히 떠오르는 것이라면 내보이고야 말았다. 그 모든 움직임이 못내 낯설었다. 적어도 그가 배운 왕의 화법은 그런 식이 아니었다.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내 흠집을 남에게 내보여서 득이 될 거라 여겨본 적도 없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온전히 눈부신 신의 자식, 흠집 없이 닦인 조각상이어야 했으니까. 내 상처는 내가 아니니까. 그런 것은 가져본 적도 없으니까. 그게 그의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이었다. 언어의 세계에서는 거짓과 기만이야말로 무기고 방패였다. 그런데 그는 매번 서슴없이 무장을 내던졌다. 이상하지 않나요. 약점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마음껏 드러내니 모르기가 더 어려운데. 내가 이걸로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남이 걸어온 여정의 단면을 훔쳐보는 기분으로, 인생의 지도처럼 펼쳐진 상처를 만지작거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더라. 손으로 쓸면 단면이 거칠고 가끔은 움푹 들어간 흉터들. 몸과 마음에 각각 기록된 한 인간의 역사. 바꾸지 않기를 선택했던 당신이 당신이라는 증거들을 더듬어 읽으면서. 천성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있기 때문일까. 정말로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아서일까. 어쩌면 아무래도 상관없기 때문일까. 짐작만 더해갈 뿐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쉽게 옮아버리고 마는 것은, 아직 그가 어린 탓이었다. 아니면 사랑 때문에 정말 바보가 되었거나. 스스로 원하던 만큼 충분히 세련되지 못해서인지도. 혹은, 내심 부러웠기 때문인지도. 긍정도 부정도 없이 그저 한없이 자기 자신인 태도가. 그걸 보면 조금쯤은 털어놔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도해보기로 했다. 설명하고 싶었다. 닿을 수 있다면 닿고 싶었다. 그간 들여다본 적 없던 자기 자신의 약한 면은 암시와 방어기제로 가득 차 모호하고, 꿈속의 해안선처럼 안개에 덮여 있으면서, 잘못 건드리면 덜 아문 상처처럼 따끔거렸다. 직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말을 자주 멈추고, 이따금 더듬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길을 헤매는 듯 조심스럽고 불분명한 태도였다.
 나는 허전해요. 가끔 아주 텅 빈 것 같은 기분을 느껴요. 금방이라도 공기 중에 흩어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될 때가 있어요. 내가 희미해지는 순간이 있어요. 무슨 짓을 해서든 정적을 메우지 않으면 그 순간은 아주 빨리, 긴박하게 다가와요. 단편적인 즐거움 때문에 그 감각이 멈추는 건 아주 찰나고 모든 것은 이내 끔찍하게 지루해지지만 어쩔 수 없어요. 내가 아는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그래서 천천히 습관이 되었을 거예요. 기억하기도 힘든 먼 옛날부터 이 모든 게 내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나는 내가 비어있는 줄도 몰랐어요. 계속 추위 속에 있는 사람이 추운 걸 모르는 것처럼요. 바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여겼는데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람은 부정형이니까. 내가 아무리 용을 쓴들 멈출 수 없는 움직임이고 힘이지 가슴을 채우는 것이 아니니까. 불어오고 떠나면 그만이니까.
 그래도 말이죠.

 “당신이랑 있을 때는 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

 꿈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곁에 있는데도 말을 이어나갈수록 이상하게 그리운 기분이 목울대를 채웠고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다친 육식동물처럼 굴면서 고개를 더 깊이 파묻을 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시티르는 결국 상체를 조금 아래로 빼고는, 레온티오스가 덮어쓴 사자 가죽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 시선을 찾아갔다. 지금은 어떤 표정이어도 좋을 듯했다. 제대로 눈을 마주 보고 싶었는데 그럴 틈도 없이 입술이 겹쳤다.
 모든 것은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번만은 져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눈을 감고 천천히 받아들였다. 길지 않은 입맞춤이었다. 막 돋아난 깃털처럼 연약하면서 다시는 없을 것처럼 갈급했다. 마지막인 것처럼 힘겨웠다. 그 순간만은 그와 맞닿아 있는 부분만 온기를 알았다. 다른 부분은 그냥 꿈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난생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장 그럴 수 없는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각도 없이. 자기도 모르게 껴안은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영영 내려앉고 싶어. 이대로 질식하고 만대도 좋아. 딱 그만큼의 전율. 그만큼의 슬픔이었다.

 “데리러 갈게.”

 오래 참은 숨을 내쉬듯 쏟아져 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내가 어떻게든 할 거야. 다시 돌아오면… 너한테 빈 부분이 뭐든, 내가 채워줄게.”

 그 어떤 신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도 맹세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이런 마술은 그에게만 있는 재주였다. 시티르는 눈썹 끝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힘없이 웃었다. 내가 얘기하는 걸 다 들었다면서. 당신은 역시 전혀 모르네요.

 “이미 그러고 있는걸요.”

 그러니 데리러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려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차가운 안개에 덮이며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사라져갔다.
 시티르는 흐려지는 그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새길 듯 바라보았다. 노 젓는 소리가 오수에 스며들어 가까워졌다. 벌써 저만치 잠이 멀어지고 있었다.
 
 


 
  6
 “좋은 꿈 꿨어, 왕자?”

 시티르는 그렇게 하면 남은 꿈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오래도록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헤르메스의 매끄러운 입가에 파인 볼우물이 깊어졌다.

 “그건…… 관점에 따라 다른데. 부탁드릴 게 있어요, 아르고스의 살해자.”
 “말해 봐.”

 그편이 재미있어 보였기에, 헤르메스는 기꺼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황금 샌들의 전령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다. 그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헬레니우스 호는 정말로 저승의 입구에 걸쳐 있었다. 데리러 온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상아색 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잠깐이지만 정말로…… 그를 다시 만났던 걸까. 시티르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사실이라면 더더욱, 둘이 이쪽으로 넘어오게 둘 순 없었다. 여차하면 줄줄이 사이좋게 여기 갇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막무가내들만 두고 왔으니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최대한 빨리, 알아서 탈출해야만 했다. 거짓말이건 도둑질이건 할 수 있는 건 다 쥐어짜서라도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그 어떤 때보다 머리가 복잡했다.
 남의 타들어 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뱃사공은 꾸준히 노를 저어 나아가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이 강을 건너게 될 줄은, 아니, 설혹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짐작했어도 이 순간까지 이렇게 잔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시티르는 강에 어슴푸레하게 비친 자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조금의 웃음기도 남지 않은 얼굴. 노의 규칙적인 움직임에 간헐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드는.
 운명의 실이 어떤 식으로 꼬이고 얽혀버린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의 인생에 지독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무서워하던 모든 일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날지 못하게 되는 것,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되는 것, 운명의 불확실함만을 믿고…… 하여간 전부 지독한 농담 같았다. 한 철 폭풍처럼 몰아치고 쏟아져 내렸다. 이제는 남들은 모든 불행의 진정한 결말이라고 한숨 지을 하데스까지 와서.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게 인간이잖아. 아주 바닥까지 떨어지고서야 알았으니까,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 남아 있는 선물을, 나 역시 받았다는 걸.
 시티르는 자기 머리가 집안의 마지막 재산이라도 되는 양 하염없이 붙잡고 있다가, 무언가 즐거운 일을 관람하듯 턱을 괸 신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존경스러운 마이아의 아드님.”
 “으응. 듣고 있어.”
 “제가 하데스는 처음이라 그런데, 조언해줄 만한 건 없으신가요?”

 어디까지 알려줘야 재미있을까? 황금빛 시선 뒤로 저울이 돌아가는 게 보였다. 마음대로 재어보라지. 원하는 건 뭐든지 내어줄 수 있었다. 신의 광대 짓이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어디보자, 한 가지 정도는 괜찮겠지.”

 헤르메스는 얼굴에 드리운 미소를 감추지 않은 채로 가볍게 손짓했다. 시티르는 그에게 고개를 가까이했다. 신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중국편 요약 / 호주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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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요약.

 중국에서 있었던 일을 되짚어보면 그곳에서 살아 돌아온 게 기적에 가깝다. 내가 조금만 더 종교적인 인간이었다면 소명 의식마저 느꼈을 것이다. 몇 가지 주요한 사건들 위주로 간략하게 기록해둔다.
 먼저 다크 미스트리스 호에 몰래 잠입했다가, 배가 그대로 출발해버린 황당한 사건이 있었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우리는 회룡도에 도착해 간단한 정찰을 할 수 있었다. 그곳에서 하얀 뱀, A.P. 혹은 오브리 펜휴라고 불리는 칼라일 탐사대의 일원을 만났다. 그는 기묘하게 젊은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불쾌한 주술을 거리낌 없이 사용했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그를 물리쳤다. 아니, 물리쳤다고 생각했다.
 회룡도에서 탈출해 돌아오는 길에 배가 폭풍우에 뒤집혔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당시에 가지고 있던 대다수의 메모와 기록이 소실되었다. 카메라도 새로 구해야만 했다.
 그 뒤 간단한 정비의 시간을 가지던 중, 다가올 새 중국의 투사들(새중국)이라는 중국 내 게릴라 단체에 납치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이들은 상하이의 부패에 대항하는 레지스탕스였다. 새중국은 사교도들의 실체를 어느 정도 파악한 상태로 회룡도를 노리고 있었고, 우리는 마침 그곳에 다녀온 참이었다. 어렵지 않게 협력 관계가 형성되었다. 그곳에서 재클린 브레이디를 만났다. 그로부터 칼라일 탐사대에게 있었던 일과, 로저 칼라일의 행방을 들을 수 있었다.

 

012
브레이디의 진술

 

 호팡의 집에 브레이디의 연인인 췌이메이링이 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우리는 그를 도와 호팡의 집에 잠입했다. 새중국 소속의 어린애, 아니 젊은이 하나가(이름은 자오웨이라고 한다) 잭 브레이디를 지나치게 동경하는 데다 철이 없었는데, 이런 경향의 청년들이 흔히 저지르는 비행을 그도 저질렀다. 그러니까 몰래 숨어서 우리를 따라왔다. 중독되어 목숨을 잃을 뻔도 했고 누군가는 기묘한 주술이 걸린 끔찍한 방에 영영 갇힐 뻔하기도 했지만 어떻게든 해냈다. 췌이메이링은 고문으로 쇠약해진 상태긴 해도 구출에 성공했고, 다들 겨우 목숨은 붙인 채 살아 돌아왔다. 
 이후 호팡의 계획을 막기 위해 새중국 무리와 함께 회룡도에 잠입했다. 회룡도의 어두운 동굴은 심해에서 올라온 끔찍한 존재들과 그들이 부리는 질퍽한 액체 괴물들, 의식의 날을 맞은 사교도들로 붐볐다. 그들은 잡혀 있던 가엾은 사람들을 학대하면서 의식을 치렀다. 그곳에서 나는 직접 강림한 비대한 여인, 끔찍한 신의 모습을 보았다. 그것이 촉수를 뻗어 펜휴의 머리를 쓰다듬자 죽은 몸이 움직였다. 되살아난 그의 동공은 저 너머의 숨겨진 비밀들을 담은 듯 어두웠다. 제사장이 돌아오자 사람들은 환호하면서 그들의 신에게 제물을 바쳤다. 괴물은 자기 신도들을 게걸스럽게 잡아먹었다. 우리는 넋을 놓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괴물이 자리를 떠나고 나서야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우리는 새중국 젊은이들과 함께 남은 사교도들을 상대했다. 적지 않은 희생이 뒤따랐다. 오브리 펜휴가 지옥에서 기어 나오는 일이 다시 없기를.

 

0123
사교도들의 기록

 

 우리가 호팡의 집에서 고생할 무렵 메이벨과 무셴의 현군칠장비경 연구가 진척을 보여, ‘눈’을 새기는 주문을 알아냈다.

 

눈을 새기는 법

 

 우리는 만월이 뜨는 날에 회룡도로 되돌아갔다. 우리가 겪었던 그 끔찍한 일들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숨겨진 장소에 봉인의 문양을 새겼다. 이 세상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었는데, 그날 이후로 무언가 중요한 것, 내 안의 작은 일부를 영원히 잃어버린 기분이다.
 메이벨은 중국에 남아 자료를 연구하면서 도움을 주기로 했다. 프리스비와 잭 브레이디는 함께 호주로 간다. 고작 몇 달을 함께했을 뿐인데 이제는 없었던 시절이 기억이 나지 않는, 슬픔이 맨 마지막으로 나를 뒤쫓아왔다. 꿈속의 불길한 목소리와 함께. 

 


 낭패다.
 뭐가 낭패냐고 하면…… 그러니까. 초대한 적 없는 진짜 마지막 손님. 새파란 어린애. 자기가 지금 뭘 하는 건지, 어디에 끼어든 건지도 모르는.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7월 4일에 상하이를 떠나 호주행 배에 올랐다. 그리고. 자오가 배에 탔다. 몰래. 이런 식의 사고를 예상했어야 하는데. 아니, 그런가? 이런 걸 어떻게 예상하지? 여권은 재클린이 구해준 모양이었다. 아무리 대책이 없는 막무가내라도 이런 일은 사전에 상의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쏘아붙여도 전혀 듣는 눈치가 아니다. 자오 본인을 붙잡고 어른스럽게 설득해보려 했으나, 처음부터 듣는 시늉도 안 하더니 이젠 내 코빼기만 보여도 도망을 친다. 말이라도 한마디 걸려면 눈에 불을 켜고 온 배를 뒤져야 한다. 프리스비 씨마저 말리지 않는다.
 그래. 그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해한다고 해서, 이런 걸 허락할 수는 없다. 그는 회룡도에서 있었던 끔찍한 일도 보지 못했다. 그런 건 영영 보지 않고 사는 게 좋다. 대체 이 배에 탄 사람들은 양식이라는 게 있는 건가? 어른이 되어서 하나같이— (쓰다 말고 줄이 죽죽 그어진 부분)
 ……이런 문제에 쓸 시간과 정신적 연료가 더는 없다.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내가 붙잡고 늘어져봤자 기름을 붓는 꼴이 될 것이다. 일단은 보류. 적당한 순간에 잘 설득해서 돌려보낼 것.

 

 

 

1925.7.22

 두통과 함께 시작해서였는지, 그게 무슨 징조라도 됐던 건지 이번의 항해는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 파도가 거칠었고 바람이 궂었다. 예상보다 시간을 더 써가며 호주에 도착했다. 적도를 지나온 이곳은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
 호주에서 확인할 일들의 목록을 몇 가지 정리해둔다.

  •  앤서니 콜즈 교수(시드니 캠퍼다운) 방문, 그에게 들은 ‘박쥐들의 아버지’ 기록.
  • 헨슨 공업 지하에서 발견한 운송장에 적힌 정보: 호주 랜돌프 운송회사 허스턴 앞 독사들의 아버지 황금상/고대 기계 부품/기술 도면과 청사진을 보낸 기록.
  • 펜휴 제단 지하에서 발견한 정보: ‘포트 다윈, 노던 준주, 호주’ 주소. 날개에 사슴 머리가 달린 스텐실에 ‘랜돌프 씨 직접 수령 요망’이라고 쓰여 있었던, 비만한 용의 조각상.
  • 미국: 프나코티카 필사본이 보여준 사막 위 고대도시의 환상. 관찰하는 정신들을 부르는 방법.
  • 중국: 호팡의 사무실에서 발견한, 호주 칸캇지리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에게 광업 장비를 보낸 기록.

 이렇게 정리를 마치고 나니, 새삼 내게도 정보가 하나의 무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이들 사교에 대해 아는 것이 이제는 적지 않았다. 그들의 목적, 소유물, 장기 말들, 신의 이름까지. 동물들이 다른 무엇보다 자기 천적을 가장 잘 알듯이 그렇게 나는 매 순간 그들에게 골몰했다. 그들의 계획을 훼방 놓을 대책을 강구하고, 가진 지식을 되새김질하며 이따금 그 광기의 끄트머리라도 읽어보기 위해서 혹은 정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끔찍한 이름을 입안에서 굴려보기도 한다.
 다행스럽게도 미움에는 이해가 필요 없다.

 

 웨스턴 오스트레일리아의 항구 도시 프리맨틀.
 입국 과정에서 프리스비가 세관에서 총을 압수당했다. 호주의 차별적인 정책 때문이었다. 남이 알아주길 바라서 하는 일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훼방이 놓일 때마다 지친다. 무기를 추가로 갖춰 둘 필요가 있다.
 배를 타고 퍼스로 곧장 이동했다. 도착한 직후 제이덕에게 받은 전화번호로 콜즈 교수에게 연락했다. 그의 대리인 데이빗 다지가 대신 전화를 받았다. 콜즈 교수는 아직 미국에 있었다. 10월에나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때까지 기다릴 수는 없으니, 다지에게 대신 연구 자료를 살펴볼 수 있겠느냐고 요청했다.
 이후 배편으로 시드니에 닿았다. 고층 건물들이 우후죽순 생기면서 기묘한 불균형의 그림을 그리는, 한창 개발 중인 도시의 모습이 만연했다. 콜즈 교수의 집은 시드니 대학 근처의 주거지 캠퍼다운에 있었다. 다소 헐렁한 인상의 다지는 스스로 콜즈 교수의 부교수라고 소개했다. 
 박쥐들의 아버지에 대한 자료는 전화로 들었던 내용과 일치했다. 눈여겨 볼만한 유리 건판 사진이 네 장 있었는데, 거대한 바위 옆에서 땀을 흘리는 남자들의 모습을 찍은 것이었다. 남자들 옆의 바위는 심하게 풍화된 상태였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광업 엔지니어 아서 맥워로, 콜즈 교수는 이것을 맥워의 재산 관리인 로버트 매킨지에게 받았다. 다음은 맥워가 직접 쓴 일기다.

 

01
 아서 맥워의 일기 (1921년)

 

 다지가 옆에서 끊임없이 호기심을 보여서 결국에는 콜즈 교수의 자료를 함께 보았다. 그는 보는 데서 끝낼 생각이 없었는지, 자신이 포트 헤들랜드에 사는 매킨지를 직접 소개해주겠다며 열성을 보였다. 우리는 그 도움을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한시가 급했다. 다음날로 출발 날짜를 잡고, 그에게 감사 인사를 표한 뒤 나왔다.
 더 이동하기 전에 프리스비의 총을 구해두기 위해 함께 외출했다. 호주로 오기 전 할 수 있는 만큼 현금화해둔 돈이 있어서, 사는 김에 모자라지 않을 만큼 무기를 채웠다.
 출발하기 전, 시드니에서 조사한 자료들을 정리해둔다.


 셰익스피어 플레이스 시드니 미술관.
 검게 부풀어 죽어가는 원주민 그림, 박쥐 숭배 종교의 인신 공양 의식을 형상화한 원주민 그림. 이들은 박쥐들의 아버지라는 존재를 숭배했다.

 시드니 대학 주립 도서관.
 1. 호주 원주민들과 관련된 책: 박쥐들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박쥐를 닮은 날개에 세 개로 갈라진 붉은 눈을 가진 거대한 존재의 이야기가 쓰여 있다.
 2. 지하 도시의 전설과 노래를 서술한 옛 탐험가들의 일지: 고대 종족, 신들이 지하 도시를 지었다. 그 신이 바람과 싸웠다는 전설이 있다. 신들은 바람에 패배했고 그 때문에 멸망했다.
 익숙한 이야기였다. 그 도시가 아직도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일까?

 박물관
 호주 원주민 관:
 박쥐들의 아버지 조각상. 붉은색과 갈색의 진흙을 섞어 강조했다. 안면 조각상 위에 부조로 새겼다.
 폴리네시아 관:
 특이한 부조로 덮인 현무암 덩어리 세 개. 부조들 속에 전에 본 적 있는 거대한 용의 형상이 있다. 이 물건은 신이 잠들어있는 가라앉은 도시에서 왔다고 한다.

 

 

 

 1925.7.29

 시드니에서 포트 해들랜드로 이동했다. 대략 나흘 정도 걸렸다.
 포트 헤들랜드는 금맥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있어 금을 찾으러 온 사람들로 늘 북적였다. 그중에서도 칸캇지리가 제일 유명했다. 이곳에는 1921년에 건설된 비행장이 있어서, 퍼스와 연결된 비행선이 다녔다. 근처 주점에서 듣기로, 랜돌프 운송회사 지점도 한 곳 있었다.

 먼저 다지와 함께 매킨지를 만나러 갔다.
 그로부터 몇 가지 얘기를 들었다. 맥워는 그 뒤로 건강이 안 좋아져서 앓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가 멀쩡히 살아있을 거란 기대는 애초에 하지 않았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또, 매킨지는 원래 맥워의 자료를 더 갖고 있었다. 그러나 2~3년 전 한 미국인이 찾아와서는, 그 기록을 ‘빌려 가’ 돌려주지 않았다. 사진 원판과 더불어 맥워가 추가로 조사해둔 자료들이 전부 사라졌다. 도둑의 이름은 로버트 휴스턴이었다. 브레이디는 매킨지에게 칼라일 탐사대의 일원 로버트 허스턴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매킨지는 사진을 가져간 인물이 그가 맞다고 확언했다. 확실하게 밝혀진 바는 없지만, 이 사진 속의 장소는 분명 사교도들과 관련이 있었다. 우리는 맥워 일행이 사진을 찍었다는 그 장소, 사막을 향해 가보기로 결정했다. 경험이 많은 매킨지가 사막행 준비를 도와주기로 했다. 다지도 꾸준히 거들었다. 이 사람, 계속 따라올 생각인 걸까?


 밤에는 랜돌프 운송회사의 지점에 잠입해 살폈다.
 서랍 속 장부는 랜돌프 운송회사가 전 세계 각지의 사교도 지점에 화물을 옮긴 기록이었다. 이 장부에 따르면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에게 보내는 물품들이 배편으로 포트 헤들랜드에 온 다음 기차로 운송되었다. 케냐의 아자 싱이 호팡에게 전보를 몇 번 보낸 내역도 존재했다. 그리고 영국의 펜휴에게 갈 화물이 두 개였다. 하나는 조각품이고 하나는 취급 주의 물품으로, 사슴뿔 모양 기호가 그려진 상자에 각각 담겨 있었다.
 상자 하나는 회사 건물 바깥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그 안에는 기하학적 흰색 선에 덮인 나무 조각상이 들었다. 조각상은 인간형 대머리에 둥글고 긴 수염이 촉수처럼 나 있고, 손발 끝에 갈퀴가 달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사진을 남겼다.
 또 다른 상자는 1m가 안 되는 크기였다. 안에는 기계장치와 함께, 로버트 허스턴이 개비건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편지에 따르면 이것은 ‘이스 족이 사용하던 단기 탐사 장치’였다. 60cm 정도의 크기로, 막대에 바퀴가 달리고 그 외 거울과 망원경 등이 부착되어 있었다. 별다른 동력이 필요해 보이진 않았고, 바퀴를 돌려서 작동시키고 망원경을 들여다보는 식으로 쓰는 듯했다. 무엇을 탐사하는 장치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해당 지점에서 우리가 들고나온 물건은 이 상자뿐이다.

 

 그날은 숙소로 돌아와서 잠시 여유를 부렸다. 줄곧 혹독한 일정이었던 데다가 매번 뭔가를 하지 말라고만 한 것 같아서, 자오가 술자리에 끼겠다는 걸 굳이 말리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한 일이라고는 프리스비에게 놀림 받다가 취해 잠드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자오가 깨어있을 때는 왁자지껄했는데 그가 잠들자마자 급작스럽게 분위기가 내려앉았다. 그때는 다들 피곤할 일이 많았으니 조금만 마시고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마 오랜 여행 때문에 지쳐서였을 것이다. 있었던 일들 때문인지도 모른다. 평소보다 술이 오른 탓이거나. 그래도 아직 긴장을 풀어서는 안 됐는데. 제대로 해결된 일은 하나도 없으니까. 잔 속의 미약하게 흔들리는 표면을 바라보자 걷잡을 수 없는 회의감이 밀려왔다.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지금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안 해도 될 불평, 투정, 남의 등 위에 짐을 지우는 말을 너무 많이 했다.
 프리스비는 너무 익숙해지지 말라고 했다. 그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그가 하듯 그렇게 가벼운 목소리로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얼만큼의 잠들지 못하는 밤이 필요한지.
 지금도 눈을 질끈 감으면 암막 뒤로 피투성이의 이미지들이 터진 포탄 파편처럼 스친다. 런던의 습한 밤, 도살장의 돼지처럼 목에서 피를 흘리던 사람들의 얼굴은 곧 잭슨 엘리어스의 찢어진 이마와 움직이는 시체와 두들겨 맞아 죽어가는 산제물들 그리고, 그리고, 노라의, 다 괜찮다고 말하던 목소리로 뒤바뀐다.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실재가 되어 엉킨다. 폭력이 얼마나 끔찍하게 인간의 영혼을 찢어놓는지,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안 것은 그저 문장이었을 뿐이다. 아물지 않은 상처를 벌려 안을 다 내보이고 나서 나는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도 꺼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눈가를 문질렀다. 우리에게 달리 무슨 수가 있을까요. 너무 오래 들여다본 폭력에 닳아 가는 것은 나뿐이 아니므로 당신에게 위로를 받아서는 안 되는데. 누군가 내 앞에서 자기는 날 때부터 상처가 아닌 흉터만 안고 태어났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구는 건 형 한 사람으로 충분한데.
 그러나 나는 너무나 약해지고 말았다.
 “그 애들이 보고 싶어요.” 찰랑이던 잔이 넘치듯 턱, 말이 넘쳤다. 그 애들이 보고 싶다. 노라가 웃는 것을 한 번만 더 보고 싶다. 언젠가 내게 다시 그런 기회가 올까. 오래 고여 있던 바람을 입 밖으로 꺼내자 몸이 조금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내 몸을 빠져나와 어디로든 도망치려다가 사람의 발목을 묶는 세상의 힘에 이끌려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툭. 투둑. 나는 느리게 깨달았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울고 싶었다.


 “돌아간 친구는 잘 있죠?” 프리스비가 물었다. 나는 항구에서 본 제이덕의 마지막 모습이 아닌, 지난겨울 남부에 있는 그의 집에 들렀을 때 자기 집의 벽난로 앞에서 쉬던 그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
 “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늘에 있는 친구도 지금 잘 쉬고 있을 거예요. 다 끝나고 만나죠.”
 “지금은 그것밖에는 바라는 게 없어요.” 그해 겨울에는 노라도 거기 있었다. 나는 사진처럼 남은 기억 속 한 장면을 꼭꼭 씹어서 삼켰다.
 프리스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꼭 그런 건 아니었나 봐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
 “내가 안 미더울 순 있는데 그래도 많이 힘들면 얘기해요. 적어도 놀리진 않을 테니까.” 나는 머뭇거리다 감사 인사를 했다. 이 말 한마디에 담긴 것보다 더 표현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걱정되면 그 친구한테 연락 한 번 해보는 건 어때요?”
 “제가 연락하면 자연스럽게 괴로운 일들이 다시 떠오를까 해서요. 모든 게 끝나면……. 다 잘 끝났다고 얘기해주고 싶어요.”
 짧은 침묵이 흘렀다.
 “잘 끝날 거에요.”
 “그래야죠. 그러려고 하는 거니까.”
 “다시 말하지만, 힘들면 너무 참지 말아요. 나도 같이 일하려고 온 거잖아요.”
 “괜한 부담을 주기 싫어서…….”
 “그래 보여요. 무슨 생각하는 건진 알겠는데. 너무 스스로 몰아붙이지 말라구요. 힘들잖아요, 당신도 그렇고 다들 사람인데. 우리가 그 자식들처럼 미쳐있는 것도 아니고. 자오 군한테는 말 못하더라도…… 아, 당연히 못 하겠지만.”
 “자오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어른들이 서슴없이 저지르는 어두운 일에 아주 익숙한 그 젊은이에게서 나는 너무 많은 것들을 겹쳐본다. 그것이 그의 잘못은 아니지만.
 그는 내가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면 돌려보내고 싶어요?”
 나는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될까?
 브레이디는 우리 대화를 툭 무지르고 들어왔다. 
 “애한테는 무슨 일 없게 할 테니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그가 뭐든 쉬운 일처럼 말하는 사람인 걸 알고 있는데도 그 말을 들으니 묘하게 안심이 되었다. 들었죠? 여기 어른이 셋이나 있는데 애 하나 못 지키겠어요. 프리스비는 곁에서 그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왼손이 있었던 자리를 바라본다. 이번엔 다르겠지. 그런 희망을 품는 건 어리석은 짓일까.
 “애는 돌려보내야죠.”
 “프리스비 씨도…….”
 “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너는,”
 브레이디가 말했다.
 “그게 문제야. 네가 여기 있는 모두의 보호자인 양 굴지 말라고.”
 내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고 있었나? 그의 말에 잠깐 멍해졌다.
 그랬나. 그간 노라와 제이덕과 오래 함께하면서 그런 역할에 익숙해진 건지도 몰랐다. 그 둘은, 정말로 어렸다. 돌아갈 곳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그애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했다. 내 실패와는 상관없이 몸에 익은 습관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새삼스레 깨닫고 나니 현실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그렇게 오랫동안 혼자였는데도, 나는.
 “자오는 걱정할 만한데요. 어휴, 이 사람 덩치를 보세요~.” 프리스비가 넉살을 피우면서 브레이디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그도 딱히 떨쳐내거나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저도, 이렇게 해 먹고 산 세월이 얼만데.” 어조는 장난스러웠으나 그렇게 말하는 눈빛은 자기 방식대로 단단했다.
 “팔 하나 없는 사람한테 그런 염려 기껍게 받을 만큼 약한 사람 없어. 너는 네 걱정이나 해.”
 이어진 브레이디의 심드렁한 목소리와 그 날것의 내용에, 결국에는 나도 모르게 툭 웃음이 터졌다.
 “습관이 되어서 그런가 봅니다. 쉽지 않네요.”
 문득 이렇게 목에 걸리는 느낌 없이 웃어본 게 몹시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25.7.30

 자오는 아침부터 숙취에 시달렸다. 매킨지와는 역에서 헤어졌고, 우리는 8시간 정도 걸려서 화물용 열차를 타고 칸캇지리로 갔다. 헤어지는 길에 매킨지는 사막 진입 전 마지막 물자를 충당할만한 곳으로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의 가게를 추천했다.
 화물용 열차는 하루에 한 번 칸캇지리와 오간다. 우리 말고도 몇 명의 승객들이 있었다. 나는 낯선 이들의 힐끔거리는 눈빛에 지나치게 예민해져서, 구석 자리에서 잠시 쉬었다. 그러는 동안 프리스비와 자오가 이것저것 알아 왔다.
 야말 족 사람 몇이 사막에 얽힌 얘기를 일러주었다고 한다. 정리해두자면:

  • 이 사막에는 고대도시가 있는데, 고대도시에 출입하는 입구는 모래에 묻혔다가 드러났다가 한다. 그 안에 사악한 것들이 살고 있다.
  • 부다이라는 늙은 거인이 그 아래서 머리에 팔을 묻고 코를 골면서 잔다. 언젠가 부다이가 깨어나서 세상을 먹어 치울 거라는 전설이 있다.
  • 사막에 가면 독사가 많으니 주의할 것.
  • 자기 마을의 낙타 상단 주인이 ‘박쥐 신’을 본 적 있는데, 자기가 본 것 중에 가장 끔찍한 괴물이었다

 그런 얘기를 전해 듣고 있자니 저 멀리 탁 트인 사막의 하늘 너머로 거대한 새 세 마리가 날아갔다. 자오가 부탁해서 몇 장을 사진으로 남겼다.

 

칸캇지리에 도착한 후, 매킨지가 알려준 대로 소형 트럭을 구하고 물자를 조달했다.
 수소문할 겸 술집에 들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새로 발견한 노천 금광 얘기를 떠들고 있었다.

  • 전에 존 카버라는 이름의 미국인 남자가 땅을 파야 한다며 사람들을 스무 명 정도 데려가서, 10m 정도 깊이를 파게 하고 보너스를 주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케닝 목축 도로에서 이뤄진 탐광작업으로, 모티머의 백화점에서 일하던 더비 데이브라는 사람이 소식을 듣고 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 두 주 전에 몹시 큰 새를 본 사람이 있다. 날개를 쭉 펼쳤을 때 2m는 됐다. 총을 쐈으나 높이 떠 있었는지 닿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기차에서 본 새들이 떠올랐다.
  • 북쪽의 딩고 폭포에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다. 진저 몰든이라는 미치광이 노인이 한 말이라는데.
     자오가 노인에게 듣고 온 사건의 경위는 대강 이렇다: “내가 유령이랑 싸워서 이겼어. 내 패기에 눌린 거지! 4일 전에 딩고 폭포 근처에 야영했는데. 근데 거기 딩고도 없고! 폭포도 없어! 그냥 작은 샘만 있다니까. 그 근처에 슬래터리네 집이 있긴 한데 그 미친 주정뱅이랑 아들내미한테 몸을 맡기느니 그냥 길바닥에서 자는 게 나아서. 자려고 하는데 불이 비쳐서, 그놈들이 날 쫓아내려는 줄 알았는데. 유령이었다고! 비명을 지르는데 소리가 안 났어! 내가 막대기를 휘둘러서 쫓아내지 않았더라면……” 자기가 용감하게 싸웠다고 얘기하고 있으나 정황상 무서워서 도망쳤다가 돌아간 듯하다.
     슬래터리 일가에 대해 수소문해본 결과 좋은 얘기를 해주는 사람들이 전혀 없었다. 모두 사막에서 쉬어가기에 마땅한 집은 아니라며 입을 모았다. 빌 버클리가 일부러 그 집에 찾아가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20년 전 둘이 함께 동업하다가 슬래터리가 결혼을 하면서 갈라섰다. 하모니카도 잘 불고 술도 잘 사주는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요즘엔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의 가게. 가게 옆쪽에서 주인의 딸들로 보이는 10대 셋이 일광욕을 하고 있었다. 평범하게 말 상대를 해주었지만, 프리스비가 지하 도시 이야기를 하자마자 그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내부는 평범한 잡화점이었다. U자형 계산대에 턱을 팔에 괸 퀭한 남자가 주인 모티머였다. 간단한 물건 하나를 사며 분위기를 살폈는데 손님을 환영하는 눈치는 전혀 아니었다.

 새벽 세 시쯤 마을을 떠나기 전에 몰래 모티머의 가게에 잠입했다. 1층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자오가 이런 쪽에는 특기가 있다며 벽을 타고 몰래 2층으로 올라갔다. 나머지는 아래쪽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한참 동안 고요했다. 그러다 갑자기 창문이 열리고, 창밖을 향해 산탄총이 발사되는 소리가 온 동네를 울렸다. 들킨 것이었다.
 프리스비는 망설임 없이 1층의 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이후로는 정신이 없었다. 어떻게든 와이크로프트 일가를 제압했으나 프리스비도 그렇고 브레이디도 심하게 다쳤다.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야 주변을 돌아볼 수 있었다. 쓰러진 모티머 딸들의 팔목 안쪽에 사슴뿔 문신이 보였다. 사교의 징표였다.
 2층의 방 모티머의 침대 밑에서 오래 읽은 책 한 권을 발견해 챙겼다. 제임스 우드빌의 <경이로운 지성>.
 우리는 엉망이 된 잡화점을 뒤로하고 도망치듯 그레이트 샌드 사막으로 출발했다.

 

 

 

1925.7.31

 다지와 내가 돌아가면서 운전대를 잡으며 상당 시간 사막을 달렸다. 포장되지 않은 길을 나아가자니 사정이 편치 않아 뒷좌석에 누운 환자들이 이따금 작게 앓는 소리를 냈다. 지프 바퀴가 지나간 자리에 흙바람이 일었다. 한낮의 그레이트 샌드는 불타는 주홍빛으로 달궈졌다. 겨울인데도 덥고, 건조했다.
 문득 저 멀리서 피로에 젖은 사람이 낙타를 타고 가는 모습이 창문 너머로 보였다. 물자를 조금 나누어주는 김에 그에게 이것저것 사정을 물었다. 그는 문명이 있는 메타카라로 향하고 있었다. 사막은 더 살만한 곳이 못 된다고 했다. 땅이 흔들리고, 박쥐들이 나오고, 원주민들이 사라졌다. 바람이 불지 않는 때에도 저 멀리서부터 회오리바람을 닮은, 휘파람 소리를 내는 이상한 형체가 보이기도 하고. 원래 그는 인부로 광산에서 일을 받고는 했는데, 예전에 존 카버라는 미국인에게 일감을 받은 이후로 사막에서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고 했다. 이름은 더비 데이브. 칸캇지리의 술집에서 들었던 이름이라 그곳 출신이냐고 물었지만, 자기는 잡화점에 일했던 적이 없고, 그 마을에서 산 적도 없다고 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기묘했다.

 주변은 온통 붉었다. 하늘만 역설적으로 푸르렀다. 간혹 주변을 굴러다니는 트리오디아가 민머리 위에 난 잔털처럼 붉고 단단한 땅 위를 가려 묘한 명암을 그려냈다. 삐죽삐죽 내키는 아무 곳으로나 팔을 뻗은 나무들은 모두 앙상하게 말랐다. 줄기가 흰 유칼립투스와 멀가나무, 백단향이 그 뻣뻣하고 날카로운 가지를 그물처럼 뻗어 하늘을 꽉 메울 듯 드리운 양털 구름을 야금야금 낚아채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더라. 사막은 묘하게 시간관념을 희박하게 만든다. 우리는 딩고 폭포에 다다랐다. 샘이라더니 정말 그랬다. 울퉁불퉁한 산마루에 붉은 바위가 마치 파도가 굳은 것 같은 형태로 서 있었다. 아래 웅덩이에는 바위 그늘이 드리워졌다. 동쪽으로 3km 정도 거리에 오두막집이 한 채 보였다.
 진저 노인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리며 여기서 야영을 했다. 물이 있는 장소라 야영하기 좋은 자리였다. 밤이 되자 일교차가 뚝 떨어져서 모두 모포를 둘렀다. 사막은 금세 차게 식어버렸고 눈을 얼얼하게 만들던 강렬한 붉은빛도 지금만은 놓아주겠다는 듯 떠났다. 온기라고는 앞에 놓인 모닥불이 전부였다. 귓가를 지글거리던 열기가 가라앉고, 지프의 덜컹거리는 소음과 엔진음이 사라지니 주변이 훨씬 고요하게 느껴졌다. 드문드문 모닥불에서 불티가 타오르는 소리만 들렸다. 탁 트인 하늘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별이 박혀 있었다. 만약 별들이 말을 한다면 그 속삭임까지 들릴 만큼 가까웠다. 그 가운데 창백함을 흠뻑 머금은 남십자성이 눈부시게 빛났다. 낯설고 아름다운 밤하늘이었다.
 나는 모닥불의 불빛에 의지해 모티머의 집에서 가져온 책을 마저 읽었다.

<경이로운 지성>. 제임스 우드빌. 17세기 영어. 앞쪽의 지루한 자화자찬과 눈 뜨고 봐주기 힘든 성적 능력에 대한 자랑을 참고 넘기면 읽을만한 부분이 나온다. 위대한 이스족과 어두운 동굴 속의 휘파람 소리를 내고 창문 없는 현무암 탑에 사는 무서운 존재 사이의 전쟁을 그렸다. 끔찍한 전쟁의 묘사가 상세했다. 4억 년 전~5천만 년 전에 융성했던 위대한 종족 이스는 이 전쟁에 패배해 멸종했다.

 읽은 책의 내용을 일행에게 대강 설명해주고 담배를 피우러 잠깐 나왔다. 그 뒤에 사건이 일어났다.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은 들은 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자오의 휘파람 소리 사이를 가르고, 어디선가 하모니카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바위 너머에서 희끄무레한 사람 형체가 보였다. 챙이 넓은 펠트 모자에 헐렁한 바지, 낡은 셔츠를 입고 턱에는 붉은 수염이 난 남자였다. 그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데, 갑자기 그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살과 기름이 타들어 가면서 연기를 뿜어내고 눈구멍 안에서 눈이 캐러멜처럼 녹았다. 아무것도 신지 않은 그 발은 흙투성이가 된 채로, 그는 불타는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달려왔다. 고통에 찬 표정 그대로 멜리사에게 뛰어들어 몸을 차지했다. 멜리사는 소름이 쭈뼛 끼치는 비명을 지르면서, 눈앞에서 타고 있던 모닥불에 뛰어들려고 했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내가 다급하게 멜리사를 붙잡았다. 그러는 사이 브레이디가 불을 껐다. 멜리사는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정말로 유령이었다. 다들 충격에 제대로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할 즈음, 저 먼 곳에서부터 다시 하모니카 소리가 들렸다. 유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왔던 길을 걸어왔다.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어 바짝 긴장했지만, 그는 다시 한번 불타오르는 대신 우리를 향해 따라오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딩고 폭포 위쪽에는 동굴이 세 개 있었는데, 유령은 개중 세 번째 동굴로 우리를 인도했다. 내부는 깊이가 깊고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유령이 이끌고 간 저 안쪽에서, 우리는 타다 남은 옷과 그을린 뼈를 발견했다. 유령의 시체가 분명했다.
 빌 버클리의 유령은 자기 뼈 앞에 서서, 갈망하는 시선으로 이쪽을 보았다. 그는 복수를 원하고 있었다. 이 일이 슬래터리 일가와 관련되어 있냐는 물음에, 유령은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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