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스포가...어디보자...프로피티아(팬)... 아틀란티스 넥소스(팬) 코르디아(공식)...정도인가?? 프로피티아빼고는 스포가 쎄진 않고 자잘하게 나오는 정도인데 아무튼 다 개짱재밌는 섬이랍니다

내용도 세션중에 있었던 일 띄엄띄엄에 날조에 적고 싶은 것만 적어서 이쯤대면 같탁피플정도만 이해가능하지 않을지요 아무튼 전 재밌었으니까 됐죠?????

++맞다 벨요소가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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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로피티아에서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혈육 폴리케와 재회했을 때 헬레네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녀가 사랑하는 동생이 오만의 제물이 되어 자기 자신을 좀먹고 제멋대로 섬을 주무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도 헬레네는 동생을 믿었다. 시티르는 이해할 수 없는 초조함을 갖고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폴리케의 방자함을 벌하기 위해 하늘에서 제우스가 내던진 벼락이 세상을 뒤흔드는 순간에도 헬레네는 사랑하는 동생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폴리케가 여전히 그녀가 사랑하는 작고 귀여운 아이라도 되는 양 그러안고 벼락을 맞았다. 그 순간 헬레네가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데메테르의 가지가 삽시간에 나무로 자라나며 그 둘을 떨어트려 놓았다. 하늘을 향해 소리치던 폴리케는 그녀의 눈앞에서 숯덩이가 되었다. 순식간에 새카맣게 익어버린 몸에서 모락모락 연기가 올라왔다.
 헬레네는 울부짖었다. 절규가 땅을 가득 채웠다. 시티르는 그 목소리를 듣는 일이 괴로웠다. 스스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로? 그는 헬레네와는 달리 그 오만한 사제를 처음부터 포기했고 그녀에게 이런 결말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망이 눈을 가려 신에게 감당 못 할 거래를 걸 만큼 오만한 자들은 결국 타르타로스의 명부에 그 이름이 걸리기 마련이었다.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요, 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런데 왜.
 왜 그렇게 슬퍼해야만 해요? 고통은 너무 쉽게 전해졌고 숨이 가쁠 정도로 거슬렸다. 폭풍 속에서 온 날개깃이 뻣뻣하게 섰고 흉곽 안쪽으로 마구잡이로 차가운 바람이 불어 정돈된 사고를 뒤흔들었다. 목 뒤가 뜨겁게 타올랐다.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날개를 펼쳤다. 자기가 무얼 하는지도 모른 채, 곧장 날아올랐다. 단 한 순간도 아래로 눈을 돌리지 않았던 까닭에 그는 깨닫지 못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일 만큼 까마득한 높이까지 날아오른 후에도 그 비명은 여전히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만.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길게 펼쳐진 날개가 바람을 거스르고 때때로 그 틈 사이를 비틀어 율동하면서 마구잡이로 공기를 갈랐다. 하늘과 땅 사이의 높이는 땅과 타르타로스 사이의 높이와 같았다. 시인들이 즐겨 말하기를 청동 모루가 아홉 날 아홉 밤 동안 떨어지는 간격이었다. 직접 날아 올라본 적이 없는 자들의 과장이 섞여 있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여도 잠깐 숨 돌릴 시간도 없이 이렇게 높은 곳까지 한달음에 올라와 본 적은 없었다. 세찬 비에 젖고 온갖 방식으로 학대당한 날개 근육에서 뜨거운 김과 서리가 동시에 피었다. 너무 가까이서 천둥 치는 소리를 들어서 귀가 먹먹하게 울렸다. 숨이 턱 끝까지 찼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무언가 씌인 사람처럼 벼락과 벼락 사이를 잽싸게 통과하며 몇 번의 날갯짓으로 구름 사이를 헤쳤다.
 그는 자신에게 허락된 신과 인간의 세계 사이를 벗어났다. 그 너머에 닿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서 당장이라도 입으로 뱉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막으려고 했어요, 그땐.”

 공허한 말이었다. 그는 자기가 본 찰나를 떠올렸다. 그 순간이 도자기 조각처럼 눈에 박혀 아무리 애를 써도 잊히지 않았다. 구름 위 젖빛 대리석으로 눈부시게 빛나던 세상. 시야를 채우던 거대한 손. 연회의 유희에 젖을 때 신들이 취하는 부드러운 외양이 아니었다. 자기 광휘를 최대한 끌어올려 무언가를 짓누르려 할 때의 모습. 제단에 나른하게 걸터앉아 기름과 뼈의 연기를 들이마실 때가 아닌, 죄지은 먹이를 낚아채기 직전의 찬란하고 영광으로 가득 찬 모습.
 진저리 날 정도로 잘 알았다. 나 자신의 한계 정도는. 막을 수 없다는 것쯤은. 하지만 아직도 귓가에서 그 비명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제발 멈춰줘. 더 듣고 싶지 않아. 뻗어오는 거대한 그림자를 보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생각은 그랬다.
시티르는 바다로 추락했다. 그가 바다에 뛰어들어 자신을 받았다고 했다.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또 이럴 생각이냐?”

 레온티오스의 불퉁한 목소리가 시티르를 다시 현실에 데려다 놓았다. 침대에 걸터앉은 시티르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걸렸다.
 지금 시티르가 머무르는 곳은 전에도 신세 진 바 있었던 좁은 침대 위였다. 일어난 일을 생각하면 목숨이 붙어 있는 게 기적이라고 봐도 좋았다. 그 순간 제우스는 관통하는 벼락의 주인이자 그 자체였고 그의 부드러운 인간의 살을 한 겹 덮고 있던 냉기의 바람은 갈가리 찢어져버렸다. 그의 날개는 불타서 사라졌다. 몸은 뜨거운 열기가 훑고 간 통증에 시달렸고 그는 며칠 내내 겪어본 적 없던 고통스러운 밤을 보냈다. 신체의 고통은 일부에 불과했다. 신의 선물은 그의 영혼에도 상흔을 남겼다.
 그래도 어쨌든 농담할 정신은 있었다. 이전에 겪은 바 있었던, 세상이 무너지는 절망은 아니었다. 신들이 자신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는 이미 잘 알고 있는 바. 

 “기회가 있겠어요?” 시티르는 그의 물음을 자조적인 방식으로 빠져나갔다. 정말로 또 그럴 계획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스스로 확신이 없어서였다.
 레온티오스가 앞에서 짧게 혀를 찼다. “다시는 그러지 마. 그런 일 없게 할 테니까.”
 “알아요. 나랑 어울리는 일은 아니었죠.”
 아직 한참은 일렀지만 이런 기억은 차라리 까마득히 지나간 일 취급하고 싶어서, 그는 현실의 풍경에 집중하며 눈앞에 있는 그의 표정을 살폈다. 왜 답지 않게 그런 짓을 하느냐고, 마저 덧붙이는 퉁명스러운 목소리. 찡그린 미간. 제 감정을 숨길 생각이 없는 눈매가 보였다.
 “그런데, 계속 서서 얘기할 거예요?” 대놓고 말을 돌리는 듯한 기색에 레온티오스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그럼 내가 환자 자리를 뺏겠냐.”
 그렇게 말하면서도, 레온티오스는 시티르가 걸터앉은 침대 앞의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팔짱을 낀 채였다. 올려다봐야만 했던 눈높이가 조금 아래로 옮겨갔다. 

 “그 위쪽은 어땠어?”

 레온티오스가 물었다.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말 몇 마디가 근처를 스치는 것만으로 각인된 그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도망가고 싶은 감각까지 뒤쫓아왔지만 더는 날개가 없었다.
 “별것 없던데요.” 시티르는 허세를 섞어가며 평소보다 가벼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새삼스러운 감상이 남을 만큼 오래 머물렀던 것도 아니었다. 멋지고 새하얀 곳이긴 했으나 그걸 떠올리고 부러워하면서 자신을 더 비참하게 만들기도 싫었다. 하지만 눈앞의 레온티오스는 여전히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재밌지 않아?”
 “내가 신이라도 됐다면 그랬겠죠. 난 보이는 대로 받아들이는 법은 잘 몰라요.”

 송진처럼 뭉근하고 끈적하게 몸에 달라붙어 있는 통증, 평소보다 날을 세운 자기방어가 평소였다면 쉽게 읽어낼 만한 것들을 방해했다. 시티르는 그가 무슨 의도로 그렇게 물어오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는 원래 신들의 세계 같은 것에 필요 이상의 관심을 두던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오히려 레온티오스 씨가 그쪽에 관심이 많은 줄 몰랐는데.”

 그는 순간 허를 찔린 표정을 했다. 이내 입술이 단단하게 다물렸다. 얼핏 무언가를 걱정하는 것 같기도, 막연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의아해진 시티르는 눈을 깜빡거리다가 느릿한 움직임으로 그의 뺨에 한 손을 얹었다. 자기가 모르는 게 뭐건 간에 펼쳐놓고 조금 더 만지작거리고 싶었다. 불건강한 호기심이 일었다. “관심 있어요? 궁금해요?”
 그는 한참을 침묵했다.
 “아냐.” 그러다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관심 없으면 됐어.”

 레온티오스는 그저 그렇게 말하고는 몸을 일으켰다. 만지작거리던 손안이 허전하게 비었다. 그 존재감은 좁은 방을 채우다가 몇 번의 발걸음으로 너무 쉽게 빠져나가려 했다.
 그 순간 텅 빈 손끝에서부터 묘한 한기가 일었다. 겪어본 적 없는 감각이었다. 견디기 힘들 만큼 생소한 느낌이었다. 고작 몇 걸음 움직인 것뿐인데 그가 닿을 수 없는 아득한 곳까지 멀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참지 못한 시티르는 자기도 모르게 툭 뱉었다. “가지 말아요.”
 “조금만 더 여기 있어요.”

 그리고 찰나의 정적. 살짝 벌어진 나무의 틈새로 미약한 빛이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공기 중에 가볍게 먼지가 떠도는 게 보였다. 반응을 생각하지 못하고 자기 마음을 먼저 내던지는 일은 늘 낯설어서 시티르는 말과 말 사이의 공백에 묘한 긴장감까지 느꼈다. 지금이라도 그냥 장난이었다고 둘러댈까? 그가 정말로 그 말까지 토해놓기 직전에 레온티오스가 묵묵히 뒤돌았다. 그는 천천히 걸어와서 시티르가 비워둔 옆자리에 걸터앉았다. 짚을 깐 리넨 천이 옆으로 조금 기울었다. 시티르는 자기도 모르게 시트를 구겨 쥐었던 손에서 서서히 힘을 풀었다.
 둘은 한참을 아무런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다. 나뭇결 너머로 파도가 뱃전을 건드리고 가는 소리만이 미약하게 울렸다. 시티르는 아주 느리게 깨달았다. 자신이 겁에 질렸다는 것. 이 비좁은 배 안에 갇혀 더는 도망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 적어도 지금 당장 혼자 있고 싶지는 않다는 것. 그런 나약함은 직접 이해한 뒤에도 그다지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꾸며도 매끄러운 말로 나오지 않았고 자기 약점을 투박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은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러니 이게 최선이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
 먼저 침묵을 깬 것은 레온티오스였다.
 
 “너 아직도 고향에 돌아갈 마음 없어?”
 “그다지요.”

 평소 같았더라면 뒤에 올 말을 기민하게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었다. 질문 자체보다는 질문 너머를 보면서. 그러나 이런 상태에서는 자신을 뒤따라올 재앙, 날아서 지나치던 곳을 두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미래, 그런 것들이 먼저 떠올랐다.
 레온티오스는 어울리지 않게 잠시 망설이는 듯했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럼, 너만 생각 있으면 나랑 같이 갈래? 내 고향에.”

 ……네? 시티르는 순간 눈이 동그래져서 돌아보았다.

 


 
  2
 헬레네는 화상에 바를 쓸만한 연고를 들고 왔다. 그녀는 늘 그랬듯 신중했다. 그의 등에 임시로 덮어둔 천을 떼어내고 그을린 상처를 확인했을 때도 그저 짧게 숨을 들이켰을 뿐 티를 내지 않았다. 지금 당장 그런 순간까지 감당할 여력이 되지 않았던 시티르는 그런 배려가 고마웠다.
 헬레네는 곧 소식이기도 했다. 그가 하늘에서 떨어진 직후 정신을 잃었기에 듣지 못했던 섬의 뒷이야기가 남아 있었다. 데메테르 여신의 도움으로, 그리고 그 뜻을 짐작하기 힘든 운명의 여신들의 안배로, 폴리케가 새카맣게 불타 죽었던 그 자리에서 붉은 꽃이 피어났고 그녀가 여신 휘브리스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그걸로 괜찮은 건가요?” 여동생에게 일어난 이 일이 헬레네에게 무슨 의미인지 단박에 이해하기 어려웠기에, 침대에 엎드려 있던 시티르는 고개를 돌려 찬찬히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살아 있으니까. 비록 내게 익숙한 형태가 아니더라도 말이야.” 헬레네는 어딘지 홀가분해 보였다.
 다행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시 제 팔들 사이로 고개를 묻었다. 더는 그런 슬픈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었다.

 “내게 눈에 보이는 증거보다 중요한 건 살아가다 보면 언제든 만날 수 있다는 감각이라네. 그 마음 하나만으로 괜찮다는 생각이 들어. 왜, 함께 별을 바라보고 있다면 멀리 있어도 닿아있는 기분이 들지 않나.”
 “흐음. 같은 걸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받는 건가요?” 알 듯 말 듯 했다. 그는 갑자기 주어진 문제를 고민하느라 두 다리를 번갈아 까딱거렸다.

 “그렇네. 그 애도 어딘가에서 나처럼 무사히 별들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아니까.”
 “당장 곁에 함께 있는 게 아니더라도요.”
 “자네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지 않나?”

 그런가, 그는 찬찬히 되짚어보았다. 항상 그의 곁에서 자기 힘을 증명하는 아버지조차 헬레네가 자기 동생에게 하듯 그를 사랑하지는 않았다. 북풍은 태어나기를 차갑고 날카로우며 폭력적인 바람이었고 그를 들어 올리는 힘이었다. 하지만 헬레네가 동생에게 보인 애정은, 글쎄, 한없이 따뜻하다가도 가끔은 너무 뜨거워서 자기 자신까지 파괴하는 힘이었다. 그가 보기에는 턱없이 위험했다. 사람을 순식간에 번개에 뛰어드는 바보로 만들질 않나, 척 봐도 자기를 죽이려는 수작에 걸려들 만큼 이성을 날려버렸다. 그런 열기를 탐냈다가는 그 불씨가 순식간에 자신을 태울 걸 알고 있었다. 이번만 하더라도 충분히 배운 참이었다. 그저 그 끄트머리에 스치듯 닿았을 뿐인데 자기 통제를 잃고 날뛰다 바다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그렇게까지 다 죽어가면서 생각하고 싶은 남이 있냐고?
 “아뇨.” 마음의 문제라는 게 그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안이기만 했더라면, 분명 사양했을 것이었다. 이미 한참 전에 진저리를 치고 도망갔을 것이었다.

 “정말 없나?”

 하지만 헬레네는 레온티오스가 아니었다. 눈치가 좋았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그녀의 눈썹이 파도처럼 물결치는 게 느껴졌다. 시티르는 못 이기겠다는 듯 웃었다.

 “헬레네 씨……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죠?”
 “왜 또 모르지 않나. 자네에게도 소중한 사람이 있을지도?”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갔다. 전적으로 틀린 생각도 아니었다. 시티르는 순순히 인정했다.

 “정말이지, 헬레네 씨 반만이라도 눈치가 있으면 좋겠네요.”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다. “어쩌겠나? 그렇게 눈치 없는 놈인 걸 알고 반한 거 아닌가?”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또 할 말이 없긴 한데요.”

 하긴 이제 와 누굴 원망하는 것도 우습기만 했다. 시티르는 제 팔 위에 턱을 괸 채 한숨을 쉬었다. 네가 관심 없으면 됐어. 레온티오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을 때 그 빈 자리에 남았던 소슬한 한기가 떠올랐다. 어떤 뜨거운 것이 놓였다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는 휑한 느낌. 그런 감각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남아서 못내 거슬렸다. 자기 자신도 제대로 모르니 남에게 설명할 수도 없었다.
 나는 이제껏 단 한 번도 추위를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스스로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여기면서 살았는데,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그렇지가 않네요. 전적으로 당신들이 원인인데, 나는 아무래도 탈 배를 단단히 잘못 고른 것 같아요. 이 배에 너무 오래 있어서 이상한 물이 들어 나까지 바보가 되는 기분이라고요. 샐쭉하게 불평을 할 수도 있었겠으나 헬레네에게 그렇게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생각의 가닥을 옮겨 다른 얘깃거리를 더듬었다.

 “저, 헬레네 씨는 애초에 왜 고향에 돌아가고 싶었던 건가요? 아무것도 남은 게 없다는 얘길 들으니 궁금해져서요.”

 그 물음에 헬레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가늠하는 것 같기도 했고, 눈을 감지 않고도 한참 먼 곳에 닿았다가 온 듯도 했다. 그는 날개가 있어도 못 하는 재주였다. 그녀는 편안한 동작으로 굳은살이 박인 한 손을 자기 무릎에 내려놓았다. 뿌리가 깊은 사람 특유의 선명한 눈동자가 있었다.

 “언젠간 자네도 나의 마음을 이해하게 될 날이 올 거야. 거기에 무언가 있다, 없다 하는 문제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일 뿐이라네.”
 “그만큼 중요한 곳이라서?”
 “아무것도 없어도 그게 내 고향이니까.”

 있을 자리가 있다는 감각이 꼭 그럴까?
 온 하늘이 내 것 같던 날들, 한없이 자유로웠던 날들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는 어디든 갈 수 있었고 원한다면 까마득히 높은 곳에서 빛날 수 있었다. 그런 것을 다 내버리고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레온티오스에게 함께 가자는 얘기를 들은 뒤로, 시티르가 막연하게 상상이나 해보던 그 감각을 헬레네는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는듯했다.

 “그런 곳이 있다면… 이해할 수 있게 되면. 나한테도 좋은 일일까요.”

 지금으로선 알 길이 없지만. 시티르는 한쪽 팔에 고개를 기댄 채 싱거운 미소를 지었다.

 “매번 헬레네 씨를 보면 신기하다고 할지 배울 게 많다고 할지, 제가 전혀 모르는 걸 많이 아시네요.”
 “사람마다 사는 게 다르니 말이야. 나도 똑같이 자네에게 배운 점도 많고 새로 이해하는 것들도 많다네. 그러니 재밌는 것 아니겠나?”
 “그러면 나쁘지 않은 친구인 셈이죠?”

 둘은 어울리지 않게 작당 모의를 하는 어린애들이라도 된 양 마주 웃었다.


 
 
  3  
 “다시 날 수 있을 거야.” 그가 자기 세계에서 기다리는 결말을 향해 떠나며 남긴 말이었다. 내 몫의 이야기는 끝났지만 너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4
 애착을 갖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나 외에 다른 무언가가 내 마음 위로 비집고 들어오는 걸 무력하게 지켜만 봐야 한다는 것은. 무언가를 아낀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나는 왜 간단한 생각 하나조차 내 마음대로 멈출 수가 없게 되었을까. 그리 세게 붙잡은 것도 아닌 손길 하나도 뿌리치지 못하게 되었을까. 언제든 내가 원하는 대로, 내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었는데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되어버린 걸까. 거슬려. 생각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한껏 입꼬리를 휘어도 보았다. 거슬렸다. 아무 효과도 없었다. 몸이 끔찍하게 무거워진 기분이었다. 한순간도 홀가분하지 않았다. 가슴을 감싼 뼈마디 사이사이로 실밥이 마구 엉켜 있는 기분.
 끈질기게 훼방 놓던 운명의 실이 결국 나를 지하로 끌어당긴 그 순간조차, 어떻게 보면 이미 예정된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추락이란 그런 의미였다. 신들의 뜻은 인간의 이해 너머에 있고 한번 운명이 꺾인 존재는 기어이 바닥을 본다는 것이 극작가의 순리였다. 나는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왜 이렇게 많은 것들이 나를 아래로만 잡아당길까? 하나같이. 내가 저 먼 데까지 날아오르도록 도와주질 않아.
 그렇게 불평해도 개운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원인을 알고 있었다. 몇 마디 볼멘소리를 더 해봤자 정해진 사실은 확고했다. 다른 누구의 탓도 아니었다. 이 아래에 정을 붙이고 머뭇거린 건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었다. 헤어나기 힘든 사랑에 빠진 것도, 자신과 운명이 묶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 그 노인을 구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고향에 돌려보내길 선택한 것도, 남의 슬픔 때문에 이성을 잃고 넘지 말아야 하는 선을 넘은 것도.
 알고 있었다. 내가 내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러니 결과도 스스로 감당해야만 했다. 갈라진 땅의 살갗에서는 아레스의 발밑에서 나던 진한 흙냄새가 진동했다. 그 밑에 숨겨진 시체 구덩이의 악취, 수천수만 구의 냄새를 함께 맡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운명이 다하기 전까지 그가 행복하니 불행하니 쉽게 평가하지 말라고 했던가. 일이 모두 마무리된 다음에야 그 속뜻을 알게 되는 이야기가 있고 인간의 운명도 결국은 거기에 속했다. 그러니 알아보는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바닥을 치는 게 어떤 기분인지. 
 


  

  5
 밤바다의 숨죽인 어둠을 가르는 대신 그 어둠에 기꺼이 잠기며, 헬레니우스 호가 나아가고 있었다. 뱃마루가 느릿하게 흔들렸다. 그는 갑판에 맨발을 디디고 선 채 둘러보았다. 바다는 역청처럼 검었고, 하늘에는 별 한 점 없었다. 새카만 해무에 싸인 듯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희미했다. 신들이 태어나기 전 태초의 공허가 이런 색이었을까? 까마득히 높은 곳에 뜬 은빛 달만이 반쯤 감긴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 단조롭고도 비현실적인 풍경을 보며 시티르는 생각했다. 꿈이구나.
 꿈은 아름답지만 언제나 미심쩍고 의뭉스러운 신이었다. 그의 목소리가 거쳐 나오는 문은 두 가지였다. 진실한 예지의 소식이 걸어 나오는 뿔의 문. 괴이하고 망령된 속삭임이 태어나는 상아로 된 문.
 이 누추한 곳까지 도착한 이야기는 어느 쪽일까? 그는 기지개를 켜듯 양팔을 죽 늘이고는 갑판에 팔꿈치를 댔다. 지금쯤 그의 잠든 몸은 카론의 배에 실려 아케론의 가장자리를 떠돌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깜빡 조는 중인가 보지. 아무렴 사자의 강변의 시시하고 소름 끼치는 풍경에 비하면 익숙한 이곳이 훨씬 나았다.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랐을 때, 문득 인기척이 느껴졌다.
 시티르는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끝에 누군가 서 있었다. 얼굴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아래로 훅 내려앉았다. 일부러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얼굴이었는데 보자마자 눈을 뗄 수 없었다. 시티르는 제자리에 굳어버린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시티르가 그러건 말건, 레온티오스는 성큼성큼 다가와 곧장 그를 끌어안았다. 오래 머뭇거릴 새도 없이 익숙한 묵직함이 온몸을 감쌌고 순식간에 오감이 한 사람으로 가득 찼다. 익숙한 살갗의 냄새, 금방까지 따뜻한 불 가에 있다가 온 사람한테서 나는 옅은 그을음 향기가 났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런 게 신들의 자비일까. 아니면 더 큰 비극을 위한 조금의 유흥일까. 목구멍 안쪽이 따끔거렸다. 이건 그저 꿈이야. 알고 있는데도. 모든 일이 비현실적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정말로 그가 곁에 있는듯한 현실감에 묶였다. 붙잡듯 자신을 끌어안은 손길은 뱃고물을 항구에 매는 밧줄처럼 단단했다. 한편으로는 금방이라도 사라질 신기루를 안는 것처럼 조심스러우면서.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목소리는 닿은 몸의 울림을 통해 전해졌다. 가라앉은 숨결이 바로 귓가에 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도 확신도 없으면서, 시티르는 달래듯 속삭였다. 정말로 그렇게 믿는 사람처럼 다정한 말씨였다. 그 말은 허공에 잠시 떠 있다가 의미 없이 흩어졌다.
 그의 품은 따뜻하기보단 뜨거웠다. 정돈되지 않은, 거친 맥박이 느껴졌다. 억누르고 있었지만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울고 있다는 것쯤은. 시티르는 천천히 양손을 들어 그를 마주 안았다. 그가 자신을 완전히 품에 가둔 것에 비해 지금 자기가 덮어줄 수 있는 공간은 미약했다. 날개가 있었다면 전부 가려주었을 텐데.

 “네가 얘기하던 걸 들었어.” 문득 그가 말했다.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닫자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깨어진 하늘의 조각에서 튀어나온 다른 세계의 자신은 신들의 뜻을 전해주는 한 마리의 새가 되어있었다. 지겨워. 재미없고, 시시해. 그저 그렇게 불평을 늘어놓을 뿐 이유는 전혀 몰랐다. 그런 모습이 예전의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무슨 말이라도 해주어야만 했다. 그의 옆에 앉아서 듬성듬성 꿰맨 이야기를 내려놓을 때만 해도 자신의 말을 누군가 듣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당황한 시티르가 뭐라 입을 뻐끔거리려는데 메마른 여름 땅처럼 갈라진 그의 목소리가 꽂혔다.

 “넌… 대체 왜 그래? 뭐가 그렇게 매번 지겹고, 재미가 없어?”

 원망하는 투는 아니었다. 그저 말소리도, 태도도, 평소 같지 않을 뿐이었다. 평소 같은 일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시티르는 부끄럽다고 생각했던 것도 잊은 채 놀랐다.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내가 나로 있는 것이 그를 상처 주기라도 한 걸까? 내가 뿌리내리지 못해서, 그 모든 순간이 정말로 아무 일도 아니었다는 듯이, 언젠가는 질려서 떠나버릴까 봐? 좁은 방에서 망연히 한발 물러서던 그 모습에서, 읽지 못했던 의미를 이제 알 것 같았다. 그 자리의 이면에 서 있었던 건 선명한 불안감이었다. 그 순간에는 읽을 수 없었을 법도 했다. 서로 재밌으면 됐지. 그렇게 말하며 자신만만하게 눈을 빛내던 그의 모습만 보았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더 많이 알았다. 차마 뿌리치지 못했던 손길, 되묻던 목소리. 모든 것을 잃은 눈을 알았다.
 그가 이렇게 날것의 자신을 내보일 때마다 시티르는 헤아릴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맨몸에 드러난 흉터를 하나씩 짚고 이야기해주었을 때, 코르디아의 절벽 아래서 본, 자기가 갈구하던 그러나 가지지 못했던 과거를 화난 목소리로 하나하나 씹어서 뱉어냈을 때. 아버지, 그렇게 발음할 때의 표정. 그는 자기가 느끼는 거라곤 무엇 하나 제대로 숨기지 못했다. 부서지든 부서트리든 부딪혔고, 좋든 싫든 분명히 떠오르는 것이라면 내보이고야 말았다. 그 모든 움직임이 못내 낯설었다. 적어도 그가 배운 왕의 화법은 그런 식이 아니었다.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이었다. 내 흠집을 남에게 내보여서 득이 될 거라 여겨본 적도 없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온전히 눈부신 신의 자식, 흠집 없이 닦인 조각상이어야 했으니까. 내 상처는 내가 아니니까. 그런 것은 가져본 적도 없으니까. 그게 그의 세상이 굴러가는 방식이었다. 언어의 세계에서는 거짓과 기만이야말로 무기고 방패였다. 그런데 그는 매번 서슴없이 무장을 내던졌다. 이상하지 않나요. 약점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마음껏 드러내니 모르기가 더 어려운데. 내가 이걸로 당신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남이 걸어온 여정의 단면을 훔쳐보는 기분으로, 인생의 지도처럼 펼쳐진 상처를 만지작거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더라. 손으로 쓸면 단면이 거칠고 가끔은 움푹 들어간 흉터들. 몸과 마음에 각각 기록된 한 인간의 역사. 바꾸지 않기를 선택했던 당신이 당신이라는 증거들을 더듬어 읽으면서. 천성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이 있기 때문일까. 정말로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아서일까. 어쩌면 아무래도 상관없기 때문일까. 짐작만 더해갈 뿐 여전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로 쉽게 옮아버리고 마는 것은, 아직 그가 어린 탓이었다. 아니면 사랑 때문에 정말 바보가 되었거나. 스스로 원하던 만큼 충분히 세련되지 못해서인지도. 혹은, 내심 부러웠기 때문인지도. 긍정도 부정도 없이 그저 한없이 자기 자신인 태도가. 그걸 보면 조금쯤은 털어놔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시도해보기로 했다. 설명하고 싶었다. 닿을 수 있다면 닿고 싶었다. 그간 들여다본 적 없던 자기 자신의 약한 면은 암시와 방어기제로 가득 차 모호하고, 꿈속의 해안선처럼 안개에 덮여 있으면서, 잘못 건드리면 덜 아문 상처처럼 따끔거렸다. 직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말을 자주 멈추고, 이따금 더듬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길을 헤매는 듯 조심스럽고 불분명한 태도였다.
 나는 허전해요. 가끔 아주 텅 빈 것 같은 기분을 느껴요. 금방이라도 공기 중에 흩어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 될 때가 있어요. 내가 희미해지는 순간이 있어요. 무슨 짓을 해서든 정적을 메우지 않으면 그 순간은 아주 빨리, 긴박하게 다가와요. 단편적인 즐거움 때문에 그 감각이 멈추는 건 아주 찰나고 모든 것은 이내 끔찍하게 지루해지지만 어쩔 수 없어요. 내가 아는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그래서 천천히 습관이 되었을 거예요. 기억하기도 힘든 먼 옛날부터 이 모든 게 내게는 너무 당연한 일이어서, 나는 내가 비어있는 줄도 몰랐어요. 계속 추위 속에 있는 사람이 추운 걸 모르는 것처럼요. 바람으로 가득 차 있다고 여겼는데 어떻게 보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람은 부정형이니까. 내가 아무리 용을 쓴들 멈출 수 없는 움직임이고 힘이지 가슴을 채우는 것이 아니니까. 불어오고 떠나면 그만이니까.
 그래도 말이죠.

 “당신이랑 있을 때는 그런 생각한 적 없어요.”

 꿈속에 머물러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곁에 있는데도 말을 이어나갈수록 이상하게 그리운 기분이 목울대를 채웠고 그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다친 육식동물처럼 굴면서 고개를 더 깊이 파묻을 뿐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시티르는 결국 상체를 조금 아래로 빼고는, 레온티오스가 덮어쓴 사자 가죽 아래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고, 시선을 찾아갔다. 지금은 어떤 표정이어도 좋을 듯했다. 제대로 눈을 마주 보고 싶었는데 그럴 틈도 없이 입술이 겹쳤다.
 모든 것은 꿈속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이번만은 져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는 눈을 감고 천천히 받아들였다. 길지 않은 입맞춤이었다. 막 돋아난 깃털처럼 연약하면서 다시는 없을 것처럼 갈급했다. 마지막인 것처럼 힘겨웠다. 그 순간만은 그와 맞닿아 있는 부분만 온기를 알았다. 다른 부분은 그냥 꿈 밖으로 사라져버렸다. 떨어지고 싶지 않아. 난생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장 그럴 수 없는 순간에.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각도 없이. 자기도 모르게 껴안은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영영 내려앉고 싶어. 이대로 질식하고 만대도 좋아. 딱 그만큼의 전율. 그만큼의 슬픔이었다.

 “데리러 갈게.”

 오래 참은 숨을 내쉬듯 쏟아져 나오는 그의 목소리가 다급했다.

 “내가 어떻게든 할 거야. 다시 돌아오면… 너한테 빈 부분이 뭐든, 내가 채워줄게.”

 그 어떤 신의 이름을 빌리지 않고도 맹세처럼 느껴지는 말이었다. 이런 마술은 그에게만 있는 재주였다. 시티르는 눈썹 끝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힘없이 웃었다. 내가 얘기하는 걸 다 들었다면서. 당신은 역시 전혀 모르네요.

 “이미 그러고 있는걸요.”

 그러니 데리러 오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려 했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차가운 안개에 덮이며 순식간에 모든 것이 사라져갔다.
 시티르는 흐려지는 그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새길 듯 바라보았다. 노 젓는 소리가 오수에 스며들어 가까워졌다. 벌써 저만치 잠이 멀어지고 있었다.
 
 


 
  6
 “좋은 꿈 꿨어, 왕자?”

 시티르는 그렇게 하면 남은 꿈을 붙잡을 수 있을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오래도록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헤르메스의 매끄러운 입가에 파인 볼우물이 깊어졌다.

 “그건…… 관점에 따라 다른데. 부탁드릴 게 있어요, 아르고스의 살해자.”
 “말해 봐.”

 그편이 재미있어 보였기에, 헤르메스는 기꺼이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황금 샌들의 전령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다. 그가 전해준 바에 따르면, 헬레니우스 호는 정말로 저승의 입구에 걸쳐 있었다. 데리러 온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상아색 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잠깐이지만 정말로…… 그를 다시 만났던 걸까. 시티르는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냈다. 감상에 젖을 때가 아니었다. 사실이라면 더더욱, 둘이 이쪽으로 넘어오게 둘 순 없었다. 여차하면 줄줄이 사이좋게 여기 갇힐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막무가내들만 두고 왔으니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최대한 빨리, 알아서 탈출해야만 했다. 거짓말이건 도둑질이건 할 수 있는 건 다 쥐어짜서라도 괜찮은 방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그 어떤 때보다 머리가 복잡했다.
 남의 타들어 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뱃사공은 꾸준히 노를 저어 나아가고 있었다. 내가 정말로 이 강을 건너게 될 줄은, 아니, 설혹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짐작했어도 이 순간까지 이렇게 잔머리를 쥐어짜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시티르는 강에 어슴푸레하게 비친 자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조금의 웃음기도 남지 않은 얼굴. 노의 규칙적인 움직임에 간헐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드는.
 운명의 실이 어떤 식으로 꼬이고 얽혀버린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의 인생에 지독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무서워하던 모든 일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날지 못하게 되는 것, 아무 쓸모 없는 인간이 되는 것, 운명의 불확실함만을 믿고…… 하여간 전부 지독한 농담 같았다. 한 철 폭풍처럼 몰아치고 쏟아져 내렸다. 이제는 남들은 모든 불행의 진정한 결말이라고 한숨 지을 하데스까지 와서.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게 인간이잖아. 아주 바닥까지 떨어지고서야 알았으니까, 판도라의 상자 밑바닥에 남아 있는 선물을, 나 역시 받았다는 걸.
 시티르는 자기 머리가 집안의 마지막 재산이라도 되는 양 하염없이 붙잡고 있다가, 무언가 즐거운 일을 관람하듯 턱을 괸 신을 향해 휙 고개를 돌렸다.

 “존경스러운 마이아의 아드님.”
 “으응. 듣고 있어.”
 “제가 하데스는 처음이라 그런데, 조언해줄 만한 건 없으신가요?”

 어디까지 알려줘야 재미있을까? 황금빛 시선 뒤로 저울이 돌아가는 게 보였다. 마음대로 재어보라지. 원하는 건 뭐든지 내어줄 수 있었다. 신의 광대 짓이라면 일가견이 있었다.

 “어디보자, 한 가지 정도는 괜찮겠지.”

 헤르메스는 얼굴에 드리운 미소를 감추지 않은 채로 가볍게 손짓했다. 시티르는 그에게 고개를 가까이했다. 신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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