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호주편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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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황을 알아보기 위해 슬래터리 일가를 방문했다. 문을 두드리자 중년의 남자가 문틈 사이로 고개를 내밀었다. 숨결에서 찌든 술 냄새가 풍겼고, 외지인에게 호의적인 기색은 아니었다. 우리는 학술 목적으로 부근에 들른 일행이라고 적당히 둘러댔다. 하룻밤만 묵게 해준다면 섭섭지 않게 보상하겠다고 설득해서 침실 하나를 얻었다.
 슬래터리 일가의 집은 방이라고는 세 칸이 전부인 좁은 오두막이었다. 여러모로 관리가 안 되어 어수선했다. 집에는 아들이 둘 있었다. 첫째는 열다섯 살 프랭크, 둘째는 열 살 제코였다. 제코는 손님이 오건 말건 주변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유독 프리스비에게는 꼭 달라붙었다.
 문득 거실 테이블에 놓인 그림이 눈에 띄었다. 삐뚤빼뚤 크레용으로 색을 입힌, 도마뱀 괴물을 그린 그림이었다. 팔다리와 날개가 달린 올챙이 비슷한 형체가 두 발로 서 있었다. 종이의 흰 공백 사이사이 세 개로 갈라진 눈이 떠 있었다. 잊을 수 없는 눈이었다. 어린아이가 그린 그림이라고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어딘지 섬찟했다. 제코에게 묻자 꿈에서 본 형상을 그렸다고 했다. 어린 제코는 낡은 하모니카를 매우 소중히 여기고 있었는데, 그 물건에 과민하게 집착했다.
 슬래터리는 아주 늦은 시간까지 거실 테이블에 혼자 앉아 술을 마셨다. 합석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집안 사정까지 듣게 되었다. 그는 원래 근처에 있던 금맥을 캐어다 먹고 살았는데, 금맥이 마르고 지금은 돈 나올 구석이 전혀 없었다. 딩고 폭포에 출몰하는 빌 버클리의 유령에 관해서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슬래터리가 사리 분별을 하기 힘들 만큼 취하자 프리스비가 빌 버클리의 이름을 테이블 위로 던졌다. 그 순간 슬래터리의 표정이 일변하더니 불콰한 안색으로 더듬더듬 문장도 안 되는 말을 내뱉었다. 그놈이 숨겨진 금을 내놓으라고 제미마를 때렸다는 둥, 그렇게 죽어도 싸다는 둥. 그러다 종국에는 자기는 그럴 생각이 아니었다며 양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꼈다. 워낙 조각조각 파편화된 이야기들이어서 온전한 사정을 알기는 어려웠지만 슬래터리가 빌 버클리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졌다.
 아이들 방 쪽에서 목소리가 들려 가보니 자라고 방에 둔 자오가 술을 훔쳐 여기 들른 모양이었다. 잠시라도 얌전히 있으면 좀이 쑤시는 건지. 프랭크는 이미 술을 진탕 마시고 뻗었기에 제코와 대화를 나누었다. 제코가 가지고 있는 하모니카는 빌 버클리의 물건이 분명했다. 아이가 완강하게 하모니카를 내어주지 않으려고 들어서, 결국 내 손목시계를 주고 잠깐만 빌리기로 합의를 보았다. 물론 다시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
 다음날 날이 밝고 떠날 채비를 하는 우리에게 슬래터리가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사막에서 벗어나는 길에 자기 자식들을 도시로 데려달라는 부탁이었다. 이런 벽지에서 먹고살 길이 막막하니 아이들에게나마 살길을 만들어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거절하지 않았다. 대신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사정을 들려달라고 했다.
 슬래터리의 이야기는 이렇다. 빌 버클리와 번 슬래터리는 친구이자 동업자였고, 둘은 15년 전 함께 금맥을 발견했다. 제미마는 사이좋게 지내던 원주민 여인으로 이따금 그들의 숙소를 방문하여 두 사람을 도와주었다. 일이 계속되면서 슬래터리와 빌 사이에 의심이 싹텄다. 그들은 서로 상대가 몰래 금을 빼돌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중 빌의 의심은 합당했다. 실제로 슬래터리는 캐낸 금의 일부를 가로채고 있었다. 이후 슬래터리와 제미마 사이에 아이가 들어서며 둘은 결혼하게 되었고, 빌과 슬래터리는 갈라섰다. 그러다 3년 전에 불쑥 빌 버클리가 찾아와서 빼돌린 금을 내놓으라며 제미마를 협박했다. 슬래터리가 도둑이 든 줄 알고 빌을 쐈는데, 눈먼 총알에 제미마가 맞고 말았다. 제미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슬래터리는 그 순간 눈이 돌아 살려달라고 비는 빌을 끌고 가서 태워 죽였다.
 우리는 슬래터리 가에 있던 빌 버클리의 소지품을 전부 가져와 그의 시체와 함께 묻어준 뒤 떠났다.

 씁쓸한 마음을 안고 딩고 폭포에서 벗어나 한참 사막을 달리고 있는데 자오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가진 돈을 몽땅 털렸다는 것이다. 얼마 갖고 있지도 않았을 텐데 호들갑이 심해 물어보니, 모티머 와이크로프트의 집에서 훔친 돈을 조용히 혼자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저 손버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자오는 아직도 뒷좌석에서 군소리하고 있다. 그 프랭크라는 소년도 어디에 내놓든 굶어 죽지는 않을 듯해 다행이다.

 

 


1925.8.1

 여전히 붉은 사막을 항해하고 있다. 울퉁불퉁한 흙이 쌓이고 다져진 바닥은 매우 거칠어서 지프를 타고 오래 달리다 보면 온몸이 다 쑤셨다. 간혹 흙먼지 냄새가 나는 바람을 뚫고 시선을 사로잡는 경이로운 풍경이 드러나면 기지개도 켤 겸 차를 멈추고 사진을 찍었다. 이곳 불모지의 풍경은 도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원색적이고 강렬했지만 동시에 모든 일을 모래 밑에 파묻어놓고 말이 없는 성자처럼 고요했다. 태풍의 눈에 들어선 듯 막연한 정적의 순간 속에서 해묵은 긴장감만이 등 뒤로 그림자처럼 늘어졌다.
 오후 즈음엔가 반나절 내내 아무것도 보이지 않던 사막의 길 위로 인영이 하나 나타났다. 지친 모습의 원주민 여인이었는데, 사막 한가운데에서 만난 사람치고 제대로 된 짐이나 이동 수단 하나 없이 빈손이었다. 우리가 차의 속력을 줄이고 다가가자, 잔뜩 겁에 질려서 도망을 쳤다. 그 여인은 백인 남자를 무서워했다. 나는 차와 함께 좀 멀찍한 곳까지 떨어져서, 다른 일행이 그를 달래고 얘기를 나누는 동안 기다렸다.
 그 여인은 지하에 갇혀 살면서 강제로 땅을 파는 노역을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잡혀 온 사람들이 많았고, 모두가 감시하에 혹독한 노역에 시달렸다. 금광을 찾는 것도 아니면서 이유도 알려주지 않고 막연히 땅을 파라고 시켰다. 그는 그 끔찍한 장소에서 겨우 도망쳤다. 그런 일을 겪은 와중에 자동차가 뒤쫓아 오니 겁에 질릴 만도 했다.
 그는 며칠간 사막을 헤맨 탓에 자신이 도망쳐온 곳의 정확히 위치는 알지 못했다. 우리 일행의 목적지가 그가 갓 벗어난 사막 안쪽을 향하고 있다 보니, 함께 가자는 제안은 단칼에 거절당했다. 여분의 음식이며 모포 등 내줄 수 있는 걸 다 내주고 행운을 빌어주는 수밖에 없었다.
 맥퍼슨 산맥 사이를 지나 한참 나아가다 보니 비스듬한 바위 언덕 사이로 해가 걸쳤다. 야영 자리를 펴고 돌아가며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마른 장작을 모아다 불을 붙이자, 모닥불의 빛이 닿는 반경의 바깥은 온통 침침한 어둠에 잠겼다.
 나는 잠결에 뱀이 내 침낭 안에 들어왔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이 위기에 처하면 극도로 차분해진다더니 정말이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불침번을 서던 프리스비를 불렀다. 프리스비와 브레이디가 도와준 덕택에, 군용 단도에 머리가 뚫린 뱀 사체를 두고 다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불길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데 마냥 기분 탓은 아닌듯했다.


 

1925.8.2

 저 멀리 동쪽 지평선에 걸친 아침 해가 흡사 반지에 박힌 진주알처럼 눈부셨다. 밤새 타오르던 모닥불은 재만 남아 곧 끊어질 실낱같은 연기 한 줄을 흘렸다. 아침 일찍 브레이디가 뱀의 머리에 꽂혀있던 단도를 묵묵히 뽑았다. 죽은 뱀은 피도 얼마 흘리지 않고 축 늘어져 있었다.
 말로와와 니빌 우물 사이의 길목에는 자동차 바퀴 자국이 흉터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다수의 차가 이 부근을 오간 듯했다. 그 역력한 흔적이 북쪽의 모래언덕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 우리는 다지의 인도를 따라 캐닝 목축 도로를 벗어나 바퀴 자국들 위로 올랐다.
 모래언덕을 넘어가는데, 모래 사이에 묻혀 있던 돌을 잘못 밟았는지 차가 크게 덜컹하고 뛰었다. 그 뒤로 주행 방향이 이리저리 흔들리고 불안정했다. 내려서 살펴보니 자동차 바퀴 축에 문제가 생겼다. 트렁크에 있던 공구로 적당히 손을 봐두었지만 임시방편이었다. 사막을 벗어나면 제대로 정비를 맡겨야 했다.
 고생 끝에 언덕을 넘었다. 저 멀리 높다랗게 솟은 바위 부근에 방치된 텐트 골조 십여 개가 눈에 띄었다. 본디 멀끔한 텐트를 이루었을 천들은 삭고 찢어졌는지 골조에 겨우 발끝만 걸치고 나부꼈다. 폭발물 창고 건물과 목조건물이 그 사이에 우뚝했다. 골조 주변에는 짐이며 상자가 난잡하게 쌓여있었다. 버려진 광부들의 야영지 같았다. 우리는 부근을 찬찬히 탐색했다.

  • 상자 안에는 부품 조각, 튜브 같은 잡동사니뿐이었다.
  • 개중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텐트 내부에는 사람이 지낸 자취가 보였다. 유통기한이 남은 통조림과 먹다 남은 캔에, 기껏해야 어젯밤 아니면 오늘 아침에 자리를 뜬 듯했다.
  • 야영지 언저리에 주차된 낡은 포드 트럭은 흡사 거인이 밟은 것처럼 납작하게 찌그러져 있었다. 날아온 돌에 맞은 것도 아니고 폐차된 것도 아닌데 기이하고 부자연스러웠다.
  • 텐트 뒤편 붉은 바위들 틈으로 어두운 얼룩이 보였다. 다가가 살펴보니 바위틈에서 물이 솟아 흘렀고 그 아래 물을 받는 용도로 보이는 에나멜 대야가 놓여있었다. 다지는 이런 자연적인 샘물이 가능한지 의문을 품었다. 물은 맑고 시원했다.
  • 모래랑 자갈들 사이 드문드문 인간의 뼈처럼 생긴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대부분 형태가 온전했으나 부서진 것도 여기저기 보였다. 뼈에는 뾰족한 자국이 남아 있었는데 짐승이 씹은 흔적인 듯했다.
  • 텐트 주변에 거대한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무언가가 날아와서 앉았다가 다시 날아간 듯한 흔적인데, 발자국 형태로 보아 새는 아니었다. 발가락이 총 다섯 개 달렸고 발자국 하나 길이가 성인 남자 키만 했다. 
  • 폭발물 저장고 표시가 있는 창고 건물은 자물쇠가 뜯겨 있었다. 안에는 상자 두 개가 쌓여있었는데, 그 안에 모래에 반쯤 덮인 다이너마이트들이 들어있었다. 대략 40여 개 정도 되었다.
  • 목조건물은 갱도 입구였다. 승강기는 작동에 무리가 없었으나 갱도는 저 안쪽에서부터 무너져 내린 듯 토사에 파묻혀 있었다.

 

 승강기를 타고 올라오는데 밖에서 개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름 없는 언덕 쪽에서 딩고 네댓 마리가 우리를 지켜보듯 어슬렁거리다 그 너머에서 나는 휘파람 소리를 듣고는 휙 가버렸다.
 우리는 겁도 없이 딩고 발자국을 따라갔다. 가다 보니 개들 발자국 사이에 사람 신발 자국이 섞였다. 저 멀리 적갈색 개 여덟 마리가 보였다. 딩고 한 마리 한 마리가 거의 사람 만큼 컸고 개중에는 더 큰 녀석도 있었다. 그 사이에 몸에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고 오로지 옥스퍼드화 한 켤레만 단출하게 신은 남자가 서 있었다. 눈은 백내장이 낀 것처럼 뿌옇고 수염도 덥수룩해서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었다. 그는 돌로 좁은 원을 만들어놓고는 그 안에 자신을 가둬놓았다. 우리를 보자마자 외쳤다. “이 사탄의 자식들아! 오지 마라! 개들이 너흴 찢어놓을 거다!”
 누가 봐도 광인이었지만 이런 불모의 허허벌판에 옷도 없이 돌아다니는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천천히 그를 달래며 담요며 입고 있던 외투를 건네주었다. 호의적인 제스처가 통한 것인지, 남자는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경계하듯 으르렁거리던 딩고들은 남자가 휘파람을 불자 뒤로 물러나 얌전해졌다.
 그의 이름은 제레미 그로건으로, 최근에 이 야영지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돌로 만든 원이 자기를 지켜줄 것이라며 절대 원 밖으로 나오려 들지 않았다. 우리를 보고 그 ‘미친놈들’이 온 줄 알았다면서, 사탄의 자식들이 와서 사람들을 때려죽였다는 이야기를 주절거렸다. 그들이 못 달린 몽둥이를 들었냐고 묻자 어떻게 알았냐고 질겁하고, 우리를 의심하는 것처럼 빤히 바라보기만 하다가 또 허공에 대고 자기 할 말을 중얼중얼 내뱉기도 했다.

 

제레미 그로건의 이야기

 

 존 카버북동쪽으로 남은 광부들을 데려간 것이 3년 전의 일이었다.
 누군가 이런 척박한 땅에서 3년을 홀로물론 개들과 함께하기는 하지만 살아남았다니 상상하기 힘들었다. 생활은 어떻게 유지하자고 묻자, 자기는 꿈에서 쉬고 먹어서 괜찮다고 했다. 꿈속에서 길손 여관이라는 곳에 자주 들린다며, 그곳 여관의 주인이 돌로 원을 만들어 몸을 지키는 법도 알려주었단다. 하지만 그는 자기 꿈속에서 있었던 일이며 나눴던 대화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했다. 묘한 이야기였다. 그는 꿈이라는 창구를 통해서 다른 세계나 존재와 접촉하는 게 아닐까? 호기심이 부푼 데다 마침 시간도 늦었기에 오늘은 그와 딩고들 곁에서 하룻밤 묵어가기로 했다.
 적갈색 황무지를 덮던 햇볕이 이울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모닥불을 켜고 일지를 정리하고도 시간이 조금 남아, 전에 랜돌프 운송 회사에서 가져온 기계를 만져보기로 했다. 사막의 풍경이 영감을 주는 건지 모호하게나마 방법이 떠올랐다. 심어진 씨앗이 기다리고 기다리다 알맞은 환경을 만나면 싹을 틔우듯이.

 

 

 


 일라이저 씨. 제레미 그 미친 노인네는 기억하시죠? 그 인간하고 머무는 중에, 당신이 그 단기 탐사 장비에서 뭘 봤는지 갑자기 쓰러졌어요. 깨어난 이후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더군요. 여기는 다지 교수가 아는 원주민 숙영지에요. 어쩔 수 없이 맡기고 갑니다. 쉬고 계세요. 다 끝내고 돌아올게요. 프리스비.
 p.s. 일어나면 한 대 맞을 준비 해요.

 형, 정신 차리면 훔쳐 간 건 돌려줄게요. 자오.

 

 길이 엇갈릴 수 있으니 웬만하면 여기 있어. 볼일이 끝나면 케냐로 갈 예정.

 

 

 


 

 

1925.8.3

 프리스비 씨와 브레이디 씨는 밤을 꼬박 새운 듯했습니다. 건강에 좋지 않은데 말이죠. 걱정이 산더미 같은 상황이니 이해는 갑니다. 어젯밤 일행 중 한 분인 웨버 씨가 갑자기 쓰러진 뒤로 기억 상실 증세를 보였습니다. 아예 입을 열지 않고, 이쪽에서 먼저 말을 건네면 인상을 쓰거나 기묘한 표정을 짓고는 합니다. 저는 비록 정신병리 학문에는 문외한입니다만 인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마치 행동을 처음 배우는 어린애 같기도 하고 언어적, 문화적 사인이 다른 부족 간에 일어나는 소통의 삐걱거림 같기도 합니다. 그에게 접시를 들려주고 앞에서 먹는 시늉을 하자 저를 한참 쳐다보다가 제 행동을 따라 하는 식이었거든요. 아마도 일반적인 기억 상실의 형태는 아닐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래도 식사는 하셔서 다행이지요.
 이러니 어제보다 상태가 나아졌다고 판단하는 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관점일 겁니다. 자오 군은 여기 와서 죽을 건 각오했지만 이런 일은 예상하지 못했다며 불평하더군요. 저는 솔직히 어리둥절해졌답니다. 아직 죽고 싶진 않은데 말이죠…… 무슨 무서운 농담을 하시는 걸까요, 다들? 든든한 사막 전문가 데이빗 다지―물론, 접니다!를 믿지 않는 걸까요? 아무튼, 소년이 겁을 먹은 듯해 사막에 들어온 사람들이 열사병에 걸려 이성을 잃거나 다치거나 하는 일은 언제나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주었습니다.
 일행은 상의 끝에 웨버 씨를 근처 원주민 마을에 맡기기로 했습니다. 이곳 주민들은 한 달 반 정도 근방에 머무를 예정이라고 합니다. 이런 일이 아예 처음도 아니거니와, 모두 저와는 안면이 있는 사이라서 흔쾌히 받아주었습니다. 물론 선금도 제대로 치렀지요. 웨버 씨가 가지고 있던 짐을 정리하면서, 일지와 펜은 그의 곁에 남겨두었습니다. 세 분이 돌아가며 빈 페이지에다 한 마디씩 적었고요. 그는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에게 말을 거는 사람들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서 있었습니다.


 좌표에 가까이 다가가면서 주변 풍경이 점차 사진과 비슷해졌습니다. 태곳적의 정취를 풍기는, 기이하게 풍화된 바위들이 스멀스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일행은 바위들 사이로 차를 몰고 들어갔습니다.
 그때 저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는데, 순간 눈앞으로 뭔가가 휙 지나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영원 같던 찰나가 지나자 차 유리창에 구멍이 뚫리더니 와장창! 소리를 내며 깨졌습니다. 저는 비명을 지르며 몸을 웅크렸습니다. 머리 위쪽에서 다시 한번 총알이 스치는 소리가 났습니다. 차 어딘가에도 명중했는지 덜컹거렸고요. 운전석의 프리스비 씨가 액셀을 밟는데도 제대로 나가지 않았습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요. 결국, 모두 차를 버리고 빠져나왔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차 뒤에 숨었습니다. 너머에서 빛이 반짝인 걸 보니 분명 저격수의 스코프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세 분은 그쪽으로 가보기로 했습니다. 저는 필요한 물건을 차에서 꺼내 주섬주섬 챙기며 다른 사람들을 기다렸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긴 사막행 동안 정들었던 차가 완전히 고장 난 걸 보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릅니다. 자오 군이 저를 데리러 와서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습니다. 짐작대로 저격수들이었다고 하더군요. 게릴라 무장 집단이 대체 사막 깊은 곳에서 뭘 하는 것일까요? 왜 호주에 그런 사람들이 있는 걸까요? 소년은 자기도 잘은 모르는데 아무튼 그 사람들이 세계를 멸망시키려 한다고 설명해주었습니다. 저는 아마도 어른들이 그에게는 복잡한 얘기를 생략하고 그렇게만 말해주었으리라고 짐작했습니다. (세상에, 안젤라. 아빠는 대체 무슨 일에 말려든 걸까?)
 다시 만난 프리스비 씨도 그리 시원하게 말씀해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말하기 힘든 사정이 있는데. 고대도시 보고 싶으시죠?” “그렇죠.” “연구하다 보면 이상한 일 많이 보시잖아요?” “그……렇긴 하죠.” “한번 보시고 인상 깊은 것만 취사선택하세요. 상상 너머의 사건이 일어날 수도 있어요.”
 프리스비 씨는 앞으로는 더 위험하고,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며 단단히 경고했습니다. 그런 곳에 이런 소년을 데려가는 게 너무 위험하지 않냐고 물었더니 자오 군은 열여덟이라고 하더군요. 당연히 안젤라 또래인 줄 알았기 때문에 조금 놀랐지요. “저희는 진짜 세계 멸망을 막으러 왔다니까요!” 열여덟 살 소년이 외쳤습니다.
 “어떻게 할래요, 지금이라도 돌아가실래요?” 프리스비 씨가 물었습니다.
 “이… 이걸 여기까지 와서 여쭤보시면 어떡합니까?!”
 “아니, 애초에 따라오실 때부터 경고했잖아요!” 사실 그땐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돌아갈 차도 없거니와 사막의 사 자도 모르는 사람들만 여기 두고 갈 수도 없었지요. 이게 만약에 정말 세계 멸망에 관련된 일이면 더더욱 가야 했지요.

 당시 제가 현장에 없었으므로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세 사람은 저격수들에게서 정보를 알아낸 듯했습니다. 그 뒤로 일행은 곧장 그들의 본거지로 향했습니다. 뒤따라 조금 걷자 사막 한가운데 뜬금없이 허름한 헛간이 서 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 옆에는 차가 두 대 정도 주차 중이었고, 헛간 입구는 무장한 사람이 지키고 있었습니다.
 저는 들키지 않을만한 거리에서 기웃거리면서 헛간 주변의 기이한 바위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위 밑 모래들은 인공적으로 파낸 것 같았습니다. 그곳에 선 바위들은 하나하나 최소 만 년 이상 된 유물이었습니다. 그 표면에는 비록 세월과 바람에 마모되기는 했지만오목새김 그림이 뚜렷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이 석조물들은 분명 문명의 표시였고 건축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분명했습니다. 사진으로 봤을 때는 깨닫지 못한 사실이었습니다. 저는 몹시 흥분해서 그곳에 새겨진 그림을 관찰하고 따라 그리며 기록을 남겼습니다. 정말이지 세기의 대발견을 목전에 둔 기분이었습니다. 당장 급한 일이 있어 기록에 원하는 만큼 시간을 쓸 수 없는 점만이 아쉬웠습니다.

 헛간 바깥쪽에는 광업 장비와 생필품, 기계 부품, 잡다한 무기 등이 쌓여있었습니다. 안쪽에는 발전기가 있고 계단을 따라 아래쪽으로 연결되어 있었지요. 일행이 헛간 입구를 지키고 있던 사람과 엎치락뒤치락했는데 그 과정에서 총이 발사되었습니다. 그러자 계단 아래에서 여러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습니다.
 저희는 후다닥 뛰쳐나와서 숨었습니다. 간발의 차였습니다. 대여섯 정도의 무장인원이 두리번거리면서 저희를 찾더군요. 무장한 사람들로부터 급하게 도망치느라 사막으로 움직였는데 아뿔싸, 놀라서 허둥지둥한 나머지 방향을 잃고 말았습니다. 그대로 한 시간 정도를 헤맸습니다. 정말 막막하고 면목이 없더군요. 제가 길을 잘 인도했어야 했는데 말이죠!
 그러다 대충 깎은 수염처럼 듬성듬성한 덤불이 있는 언덕을 넘었을 때 동굴이 보였습니다. 동굴 앞에 아까 헛간 앞에서 봤던 돌기둥 비슷한 바위들이 서 있었습니다. 전의 그 바위들과 같은 목적으로 만들어진 듯했습니다. 이만치 떨어진 곳에도 건물이 존재했다는 건 정말로 이곳에 도시가 번성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제 추측은 확신의 색깔을 띠어갔습니다.
 문득 동굴 앞에서부터 이어진 2m 길이의 쓸린 자국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커다란 자루로 쓸어내린 듯한 형태였습니다. 사막에 있을 법한 동물의 흔적도 아니고 그렇다고 사람의 흔적 같지도 않았습니다. 아주 거대한 새가 움직였다거나, 아니면 거대한 뱀이 기어갔거나, 황당한 추측 몇 가지만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확신할 수 있는 점 하나는, 만약 이 흔적에 호주의 대자연이 아닌 다른 원인이 있다면 그게 무엇이건 아주 거대한 존재이리라는 것입니다. 
 널찍한 동굴 입구에 서자 안에서 밖으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퀴퀴하고 묵은 공기가 느껴졌습니다. 순간 털이 쭈뼛 설 정도로 긴장이 되었습니다. 사막이 벌린 아가리 속의 새카만 어둠은 분명 제가 닿아본 적 없는 미지의 장소를 가리키고 있었지요. 그래도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동굴 안에서 넘어지거나 길을 잃을 염려가 있으니 근처의 바위에 밧줄을 묶어놓고 늘어뜨린 뒤 움직였습니다. 내려가는 길은 몹시 경사가 가팔랐습니다.

 밑은 어둡고 서늘하고 고요했습니다. 헤드 랜턴을 켜고 둘러봤는데, 주변에 사람의 자취는 전혀 없었습니다. 먼지가 어찌나 두껍게 쌓였던지 그 위를 지나가면 발자국이 남으며 연기처럼 피어올랐습니다. 저희는 넓은 인공 건축물 내부로 들어온 듯했습니다. 돌을 자르고 짜 맞춰 만든 벽에 아치형 천장을 가진 건물이었습니다. 천장이 높고 주변이 어두워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드러난 모서리로 궁륭 형태를 추측할 수 있었습니다. 벽을 이루는 돌에는 다양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닥은 팔각형 블록이 깔린 평평한 길이었고, 복도는 일직선으로 쭉 이어졌습니다. 모든 광경이 경이로웠습니다.
 나아가다 보니 복도에 뚫린 정사각형의 거대한 구멍과 맞닥뜨려 더는 지나갈 수 없었습니다. 구멍의 너비는 4m 정도 되었습니다. 한때는 양옆에 지나갈 수 있는 다리가 있었던 듯한데 세월에 무너진 것인지 흔적만 남아 있었습니다. 아래를 내려다봐도 심연의 깊이를 알기 어려웠습니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저희가 있는 방향에 구멍과 비슷한 크기의 크고 얇은 판이 있었습니다. 경첩과 걸쇠가 매우 특이하게 생겼는데, 이 판이 구멍 덮개 겸 다리 역할을 하는듯했습니다. 다 함께 힘을 합쳐 판을 들어 올려 보려고 했으나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쩔까 궁리하다가 밧줄을 이용해서 한 명씩 차분하게 건너갔습니다.
 첫 번째 위기가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림길과 맞닥뜨렸습니다. 오른쪽 길은 어두컴컴하고 고요했습니다. 왼쪽 길은 저 멀리 희미한 빛이 보였고 어렴풋한 소리가 들렸는데, 공간이 워낙 넓어 소리의 정체를 분간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저희는 왼쪽으로 나아갔습니다. 불빛의 정체는 인간의 발명품인 전구였습니다. 거기까지 걸어오니 자연스럽게 소리의 정체도 밝혀졌는데, 바로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음이었습니다. 이 길은 바닥에 쌓인 먼지도 적었고 사람이 다닌 자취가 남아 있었습니다. 복도 끝에서 또 갈림길이 나타나 망설이는데, 저 멀리서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며 이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희는 다급히 빛이 들지 않는 곳에 몸을 숨겼습니다.
 “입구 쪽에 누가 당했대. 그 녀석들 아냐?” “그럴지도.” “허스턴 님이 잡으라고 명령을 내리셨던걸.” “그 녀석들이 잡아주지 않을까?” 이런 대화를 나누면서 순찰하고 있었습니다. 일행은 서로 무언의 눈짓을 나누더니 두 사람의 뒤로 살금살금 다가가 기절시켰습니다. 무슨 특공 임무에라도 참여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순찰하던 친구 중 하나가 총을 발사하는 바람에 소리가 크게 울렸습니다. 또 누가 오는 건 아닌가 싶어 모두 바짝 긴장했습니다. 그런데 아주 멀리서, 정확히 방향은 알기 어려웠지만, 가냘픈 휘파람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희는 기절한 친구들을 잘 묶어서 숨겨둔 다음 도망치듯 갈림길 왼쪽으로 향했습니다.

 쭉 가다 보니 방의 입구가 보였습니다. 문은 없었고, 안쪽에서부터 은은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안으로 들어서자 웅장한 팔각형 공간이 드러났습니다. 너비도 어마어마하게 넓었고 천장은 까마득해서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바닥의 육각형 타일은 정교하게 짜 맞춰져 있었고 어떤 원리인지 알 수 없지만 타일 아래에서 푸르스름한 빛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토록 드넓은 공간을 가득 채우는 빛은 대체 어떤 문명의 역작이며, 이들은 경이로움만을 남긴 채 모두 어디로 사라져버렸을까요?
 어찌나 넓었던지 그 방을 가로지르는 데에만 십 분이 넘게 걸렸습니다. 반대쪽 입구로 나가자 다시 전구가 붙은 복도가 나왔습니다. 저희는 찾아오는 갈림길마다 꾸준히 왼쪽을 선택했습니다.
 그 너머에 사람 손길이 닿은 생활공간이 있었습니다. 방은 네 칸이었고 각각 사람이 만든 가림막이 내려와 있었습니다.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서 빈방을 둘러보니, 사감 없는 남자 기숙사 같은 풍경이 드러났습니다. 침낭이며 이불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벽에는 문란한 포스터가 붙어 있었습니다. 바닥에는 곰팡이 핀 과일 껍질, 악취를 풍기는 쓰레기에 뼈까지 굴러다녔습니다. 엄연한 고대 유물의 일부에 이렇게 존중 없는 행패를 부리다니 충격이었습니다. 어지러운 바닥에서 구겨진 메모를 하나 발견해서 프리스비 씨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지하에서 찾은 쪽지

 

 이곳 복도의 발전기는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계단 쪽에서 빛이 들어왔고 꾸준히 사람이 왕래했습니다. 더 다가갔다가는 들킬 위험이 커 보였기에, 저희는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가 반대쪽으로 향했습니다.

 이쪽은 길이 험준했습니다. 원래는 평범한 복도였다가 세월 때문에 무너져 없던 복도와 경사로가 생긴 듯했습니다. 길 한복판에 무너진 천장 때문에 생긴 돌무더기 언덕이 우뚝했습니다. 저희는 안전에 유의하며 천천히 언덕을 넘어갔습니다.
 언덕 너머로는 복도가 여러 갈래로 이어졌고, 보이는 방도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 편하게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더러는 방 입구가 무너져 진입이 어려웠고 더러는 잘 보전되어 있었습니다. 시험 삼아 멀쩡한 곳에 들어가 살펴보았습니다. 이 방도 역시나 일종의 생활공간으로 보였는데 특이한 점은, 현생 인류에게 맞춘 공간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공간 자체도 확연히 넓었고 가구는 하나같이 길쭉하고 기이하게 생겼습니다. 가구라는 명칭도 사실 추측입니다. 가구처럼 보이는 물건들이긴 했으나 우리가 쓰는 가구와는 전혀 다르게 생긴 데다 용도를 짐작하기도 어려웠습니다. 문고리, 손잡이로 추정되는 부분도 기묘한 생김을 하고 있어서 인간의 손으로 잡기에는 불편해 보였습니다. 전체적으로 키가 현생 인류보다 1.5~2배 정도는 큰, 대략 3m 정도 되는 생물에게 맞춰서 지어진 공간이었습니다.
 방 여기저기에 책장, 장식, 각종 미술품이 놓여있었습니다. 이런 유물들은 주민들의 생활 양식을 추측할만한 좋은 증거물이 되어주기에 문화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습니다. 미술품에는 그림이 새겨져 있었는데 눈여겨볼 만한 특정한 형상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아마 주민들 자신, 혹은 그들이 모시는 신을 그린 것으로 보였습니다. 원통형 몸체에 위쪽에는 촉수처럼 신축하는 기관이 달린 존재였습니다. 머리처럼 달린 촉수에 입 대신 꽃을 닮은 섭식 기관이 붙어 있었습니다.
 이곳 어디를 가도 랜턴 빛이 공간의 끝까지 닿지를 않았습니다. 그만큼 이곳이 넓다는 뜻이었습니다. 이 공간 너머에 무엇이 있고 이 세계가 어디까지 확장될지 짐작도 가지 않았습니다. 경이로운 거대도시가 사막 밑바닥에 존재했습니다. 학계는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까요? 물론 준비가 안 되어도 받아들여야겠지만! 발견이 언제 사람들을 기다려준답니까!


 이런저런 생각에 희희낙락하며 주변을 훑다 보니 문서로 추측되는 물건들도 찾았습니다. 한 장짜리도 있었고 여러 장을 엮어 제본한 물건도 있었는데, 비록 크기는 달랐지만 어딜 어떻게 보건 그 형태는 분명 이었습니다. 섬유질 종이는 긴 세월을 기적적으로 견디고 있었으나 조심스럽게 취급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3m짜리 존재의 물건이라 일반적인 서적을 만질 때보다는 팔 힘이 더 필요했는데 그러면서 동시에 고서를 훼손하는 일이 없도록 극도로 섬세하게 손끝의 움직임을 조율했습니다. 이런 순간마다 작은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마음이 경건해지곤 하지요.
 저는 이들 문명의 문자 체계를 살펴볼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안에 적힌 것은 역시 그 기원을 알기 힘든 문양 형태의 상형문자로, 자체적인 문자 체계가 존재하는 건 확실했으나 지금의 제가 가진 제반 지식으로는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쓰인 건지도 제대로 알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계속 들여다보고 싶더군요. 저는 꿈 꾸는 듯한 기분으로 그곳에 새겨진 기이한 문자들을 눈으로 훑었습니다. 랜턴 불빛이 비칠 때마다 말라붙은 글자가 기묘한 색으로 번들거렸고 종이가 한 장씩 팔랑팔랑 넘어갔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멈췄습니다. 더 넘길 낱장이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만 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맨 끝 페이지에서, 저는 이 책에서 제가 읽을 수 있는 유일한 언어를 발견했던 것입니다. 마지막 단 한 줄, 서명, 같은 안료에 같은 필체로 이어져 쓰인 것은 로마자 알파벳이었습니다.

 

 일라이저 웨버.

 

 저는 순간 소중한 유물을 바닥에 떨어뜨릴 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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