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호주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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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어째서 웨버 씨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일까요?
 저는 당장에 일행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머리를 모아 고민해보았습니다. 분명 까마득하게 오래된 고대 문명의 책이었습니다. 위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고, 그 필체도 앞에 쓰인 글자와 유사했습니다. 전혀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브레이디 씨는 일전에 웨버 씨가 저희에게 언질 없이 여기 들렀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눈치였고, 자오 군은 웨버 씨가 외계인이라고 주장했으며, 이외에도 동명이인일 수 있다는 둥 온갖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프리스비 씨는 말수가 적었고 내내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무슨 추측을 하건 의문만 더해갈 뿐 알아낼 수 있는 게 전혀 없었기에, 저희는 일단 가던 길을 마저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가다 보니 구덩이가 파인 평평한 공간이 나왔습니다. 전구가 바깥쪽에 달려서 그 아래 뭐가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다가갈수록 역겨운 냄새가 스멀거렸습니다. 주변은 저희 발소리 말고는 조용했는데, 그 정적을 뚫고 저 아래서부터 사람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어렴풋이 들렸습니다.
 프리스비 씨가 구덩이 안쪽으로 손전등을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밑에서 들리던 소리가 빛에 반응하듯 커졌습니다. 비명과 신음, 낮은 울부짖음이 울렸습니다. 프리스비 씨는 그 밑에서 뭘 본 건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손전등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손전등이 떨어지는 소리를 신호로, 불에 덴 듯 끔찍한 비명이 쏟아졌습니다. 우리는 혹여나 누가 그 소리를 듣고 뒤를 쫓기라도 할까 봐 황급히 움직였습니다. 흡사 지옥과 연결된 구멍을 본 기분이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대체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요?


 급하게 나아가다 보니 어둑한 대광장이 나왔습니다. 퀴퀴한 냄새에 기묘한 악취가 섞였고, 이성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내내 오싹하고 불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일 비슷한 감각을 빗대자면 동물원의 호랑이 앞에 서서 눈을 마주칠 때 뒷골에 오싹 스며드는 묘한 긴장감과 비슷했습니다. 어떤 장인의 솜씨인지 그 넓은 바닥이 타일 없이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고, 한가운데에 돌로 만든 거대한 고리 형태의 아치가 바닥을 뚫고 서 있었습니다.
 아치로 다가갈수록 불쾌한 느낌은 더 강해졌습니다. 고리의 이음새를 살펴보다 문득 온몸에 소름이 쭉 돋았습니다. 이 돌 고리는 사실 거대한 생물 위에 얹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닥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생물의 표면 위에 발을 대고 서 있었습니다!
 깨닫고 나니 피부 아래로 거대한 혈관이 펄떡거리는 게 보였습니다. 명백하게 살갗이었습니다. 원주민들이 말하던 지하의 거인 부나이 전설은 경악할만한 진실을 짚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괴물이 깨어나면 정말로 세상을 먹어치울까요?
 아연실색했던 것도 잠시, 뒤쪽에서부터 기묘한 휘파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본능적으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닥치며 사람을 끌어당겼습니다. 자오 군이 휩쓸려들 뻔한 것을 브레이디 씨가 자기 목숨을 바쳐 구했습니다. 우리는 겁에 질려 그곳에 다시 돌아가 보지도 못했습니다.
 발전기를 지나쳐 바닥에 붉은빛이 나는 광장에 다다라 겨우 쉴 수 있었습니다. 주변은 다시 고요에 잠겼습니다. 위험한 일에 끼어들게 만들어 미안하다며, 프리스비 씨는 이곳에 온 진정한 목적을 들려주었습니다. 세상을 위협하는 거대한 사교 집단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막아야 하는 사람에 대해서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프리스비 씨가 한 말을 이해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저희 셋이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방금 겪었듯 이 지하 도시는 위험으로 가득하니, 차라리 더 준비해서 돌아오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설득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데서 개죽음을 당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프리스비 씨도 제 말을 납득해 주었기에 이후로 저희는 침착하게 돌아갈 길을 찾았습니다.


 일단 전진하니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전등이 켜져 있었고, 길이 교차하는 공간에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세 층짜리 목조건물이 서 있었습니다.
 제일 왼쪽은 최근에 파기 시작한듯한 인공적인 길로, 드문드문 사람이 지나다녔습니다. 다들 땅을 파는 장비를 들고선 멍한 눈을 하고 비틀거리며 걸어갔습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 길은 이어지다 끊겨있었고, 세 번째 길은 아치형의 넓은 공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곳도 전에 본 광장처럼 넓고 어두웠습니다. 중앙 바닥에서 빛의 반구가 강렬한 보랏빛으로 주변을 물들이며 느리게 깜빡거렸습니다. 천장은 까마득하게 높아서 끝이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반구 옆에는 8m 정도 크기의 박쥐 날개가 달린 검은 형체의 입상이 서 있었습니다. 나뭇가지와 인간의 뼈 등을 얽어서 뼈대를 쌓고, 천과 살가죽으로 형태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위에 물감과 피로 칠을 입혀 피 냄새와 부취가 진동했습니다. 근처에 크기는 좀 더 작지만 비슷한 동상들이 여럿 서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불 피운 흔적이 있었고, 제단으로 사용한듯한 돌덩이에는 검은 피 얼룩이 묻어 있었습니다. 프리스비 씨가 중국에서 비슷한 광경을 봤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지하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이 잔혹한 행태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봤던 길은 나름대로 메모하며 부지런히 쏘다니다 보니 어렴풋하게나마 길을 파악해둘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금살금 숨어가며 차까지 훔쳐 빠져나왔습니다. 브레이디 씨를 저 아래 남겨두고 온 것 때문에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1925.8.4


 밖으로 나와보니 주변은 어두컴컴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웨버 씨를 맡겼던 원주민 마을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웨버 씨가 기어이 혼자 마을을 빠져나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맡겨두었던 얼마 안 되는 짐도 전부 챙겨 간 상태였습니다.
 다행히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그가 사막에 남긴 발자국을 뒤쫓았습니다. 발자국은 타이어 자국과 합류하면서 끊겼습니다. 아마도 지나가던 차를 얻어 타고 간 듯했습니다. 어쩔까 망설이는데 프리스비 씨가 쫓아가자고 강권해서, 결국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만 구한 뒤에 다급히 뒤를 밟았습니다. 이후 나흘간 흔적을 따라갔습니다.
 칸캇지리에 도착해 인상착의를 수소문한 끝에, 포트헤들랜드 기차역에서 겨우 웨버 씨와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습니다. 보기에는 그 사람이었는데, 말하는 뉘앙스도 달랐고 그런 척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저희를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며칠 만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싶을 정도였지요. 표정은 위화감이 들 정도로 차분하고 평온했습니다. 지낸 시간이 짧아 그런지 저는 웨버 씨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보았습니다.
 저와 자오 군은 함께 있어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기에, 프리스비 씨와 웨버 씨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도록 자리를 비켜주었습니다. 돌아온 프리스비 씨가 전해주기를, 웨버 씨는 시드니에 먼저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프리스비 씨의 눈가가 빨갰습니다. 분명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으셨던 거겠죠.


 저는 호주의 사막을 적잖이 탐험했는데 이번만큼 기묘하고 또 강렬한 여행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세상이 가진 비밀을 또 한 꺼풀 벗겨낸 기분이었지요. 필요한 장비와 인원을 갖춰서 지하 도시를 제대로 답사하고 또 관찰하고 싶어졌습니다. 그곳을 점령하고 있는 사람들과… 존재의 위험성을 보건대 쉽지 않은 바람이겠지만요.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 일단 도와드리고 있는 일부터 마무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저희는 사람을 더 구하고, 차에 짐을 새로 싣고 다시 사막으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원래 웨버 씨가 담당하고 있던 일이 많아서 이래저래 시간이 걸렸습니다. 콜즈 교수님의 집을 돌보는 일과 관련해 제게도 몇 가지 처리할 일이 남아 있기도 했고요.

 

 


 

 



1925.8.30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방금까지만 해도 차가운 사막의 밤하늘 아래 있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낯선 호텔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나는 외출복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목이 마른 것처럼 입안이 깔깔했고, 가진 돈이 꽤 사라졌고, 호텔 방 침대 위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대부분 역사책이었다. 고장 난 필름이 감기듯 드문드문 이 책을 읽었던 장면이 떠오르는데 그 내용은 단편적이고 흐렸다.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낯선 장소에 들렀던 기억이 깨진 파편처럼 흩어졌다. 그 불투명한 이미지들은 내가 붙잡으려고 애쓸 때마다 손 틈새의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더 깊이 떠올리려 하면 곧장 두통이 찾아왔다.
 뒤늦게 일지에 쓰여있는 글을 찾아 읽어보았다. 아무래도 그 기계 때문에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누군가의 농간일까? 누구의, 어쩌면 관찰하는 정신의? 아니면 그냥 내가 미쳐가는 걸까? 정신적인 문제일까?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달이 사라졌다. 내가 나를 잊은 사이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 시간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마다 제동이 걸리듯 내 몸이 나를 방해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기에 일단 일행을 찾아 나서려고 웃옷을 걸쳤다. 문득 외투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쪽지가 잡혔다.


 [지금 시간, 현재 위치, 무사한지, 나 기억나는지 다 적어서 포트헤들랜드 기차역으로 전보 부치세요. 프리스비.]


 나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시기 프리스비는 하루에 두 번씩 역에 들러 전보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후 내가 머무는 호텔로 전화가 왔다. 나는 수화기를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프리스비 씨,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쪽은 다들 괜찮은 건가요?” 
 “……일라이저 씨 맞죠?”
 프리스비의 음성은 낮게 깔려 있었다. 뒤에서 자오가 떠드는 게 들렸다. “뭐래요? 외계인이래요? 드디어 정체를 밝힐 생각이 들었대요?”
 “나 누군지 알겠어요?” 프리스비가 천천히 말했다.
 “무슨 말씀을….”
 나는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수화기 너머가 잠시 고요하다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프리스비가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어쩔 줄 몰라 더듬더듬 사과했다. 물을 게 산더미 같았는데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됐고 빨리 이쪽으로 와요!”
 아무래도 만나야 제대로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리스비는 펑펑 울면서, 재클린이 죽었다고 얘기해주었다. 그 한 마디뿐이었지만 나는 재클린이 약속을 지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최대한 서둘러 가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칸캇지리로 가는 내내, 나는 뒤죽박죽인 기억을 어떻게든 정리해보려 애썼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나는 이름을 바꿔가면서 지냈고 눈이 아플 정도로 책을 읽었다. 프리스비가 언성을 높이던 장면이나, 학자 행세를 하며 사람들과 이야기하던 장면 같은 것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되는대로 진통제를 삼켰으나 그마저도 잘 듣지 않았고, 무지근한 두통이 계속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마치 안갯속에 빠져 헤엄치는 것 같았다.



 

 

1925.9.1


 칸캇지리에 도착한 후, 내가 없었던 사이 있었던 일을 들었다. 일행이 내 이름이 쓰인 책을 보여주었는데, 나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어서 얼떨떨한 느낌 뿐이었다. 여전히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으나 한 달 동안 내가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브레이디의 마지막을 알고 나서, 나는 이제는 정말로 자오를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는 그를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자오,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내가 말을 꺼내자 자오는 단박에 표정을 구겼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주변이 고요해졌다.
 “형은 왜 자꾸 날 돌려보내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어려서 안 된다는 건 불합리하다고요!”
 “불합리하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아, 씨….”
 “자오, 그렇게 오기로 하는 거면…….” 지켜보던 프리스비가 한 마디 얹었다.
 “오기가 아니라니까요!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해요?”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자오가 벌컥 언성을 높였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걸 듣기는 했어요?!”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자오. 언성 높이지 마세요.”
 “X발, 장난하나… 형이 지금 높이게 만들잖아요! 어디서 한 달 동안 자빠져 있던 인간이 오자마자 한다는 얘기가…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진 알기나 해요? 형 없을 때 저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기나 하냐고요?!”
 자오는 내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그도 그 나름대로 눌러 참고 있던 것을 다 쏟아내려는 것처럼.
 “이참에 아예 솔직하게 말해보지 그래요. 지금 나를 돌려보내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옛날에 형이 돌려보내지 못했던 사람들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자오도 그런 내 기세를 알아챈 것처럼 말을 이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나보고 어리다고 하면서 형이야말로 뭐 얼마나, 얼마나 어른스럽게 굴고 있는데요?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그렇고, 왜 자꾸 자기가 마음먹으면 지킬 수 있는 것처럼 구는 거예요?”
 재클린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고 했잖아. 네가 여기 있는 모두의 보호자인 양 굴지 말라고.
 그저 습관이 되어서, 습관이 되어서였다.
 그 둘은, 정말로 어렸다. 돌아갈 곳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 애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했다. 이상하지. 이상하게도…… 그 습관과 멀어지면, 그 애들과도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얘기 다 했습니까?”
 내 목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는 것 같지 않고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오가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는 게 보였다. “…다 했는데요?”
 나는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선택지가 적었다.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 했으면… 저는 지금 자오 군한테 화내고 싶지 않으니까, 생각을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가는 거냐고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귓전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뭐라고 말하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잊고 있었던 한 달 동안 금연이라도 하며 지낸 건지, 담배를 좀 피웠기로서니 순간 확 오르면서 머리가 핑 돌았다. 이마를 붙잡고 난간에 기대어 있는데 프리스비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일라이저 씨. 괜찮아요?” 살피는 목소리였다.
 “자오도 지금 많이 심란해서 그래요. 방금 가족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예민해지는지 일라이저 씨도 알잖아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지금 이런 위로를 받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절로 입가에 쓴웃음이 머금어졌다. “죄송합니다. 프리스비 씨, 그간 신경 많이 쓰이셨겠죠.”
 프리스비가 내 쪽으로 다가와서 난간에 기대어 섰다.
 “솔직히, 화나 더 내려고 했는데. 돌아와서 이렇게 얻어맞고 있는 걸 보니까 저까지 그러면 안 될 것 같네요.” 프리스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짐짓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거기에 속지는 않았다. “당신이 잘못한 거 아니니까요. 여기서 그렇게 크게 잘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는 프리스비의 말을 들으며,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투명해지는 담배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칸캇지리의 밤은 채도가 낮고 푸르스름했다. 강렬한 사막의 낮과 대비되는, 무슨 죄라도 지어서 제 색깔을 잃어버린 것 같은 시간.
 “일라이저 씨가 없는 동안 제가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요.”
 프리스비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자오가 그동안 힘이 많이 되어줬거든요. 일라이저 씨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그 애 뜻을 존중해주는 건 어때요?”
 “…….”
 “좀 져주라는 거죠.”
 나는 그 밤에 기대서 다시금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잊을 수 없는 누군가를.
 “그래야 하는 것 압니다. 사실 내가 말릴 수 있는 일이 아닌 것도요.”
 알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말렸다고 한들 일어났을 일이었다. 그 애는 언제나 자기다웠고 내가 바꿀 수 있었던 건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알고 있는데도 역시 좀 더 말려보지 않은 게 후회가 되었다. 나는 하염없이 후회했다. 이번엔 얼마나 물고 늘어져야 내가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은 그 생각뿐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 되기를 이제는 포기했다. 미움받아도 상관없었다. 그게 나았다. 그냥 한 사람도 더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더 견디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담배를 느릿느릿 손가락 위에서 굴리다가 비벼 껐다. 불이 꺼진 자리에 남는 재와 연기. 나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내게 태울 것이라곤 이제 나 자신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내가 멈출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방으로 돌아간 나는 자오에게 더는 반대하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자오가 말하는 만큼 본인이 어른이라면 제 말을 스스로 감당할 것이라 믿는다고. 자오는 아까까지 씩씩거리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금세 화색이 되었다. 그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었다. 그는 어렸고,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이 자리에서 꺾이지 않은 승리자였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섰다. 이게 맞겠죠, 이게 맞는 일이겠죠, 나는 그저 누구든 붙잡고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브레이디든, 노라든, 누구든 대답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날 밤에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1925.9.5


 사막 아래에 잠든 지하 도시는 서늘하고 어둡고 드넓었다. 분명 처음 마주하는 장소였는데 그 기이한 아치와 복잡한 길들이 묘하게 낯익었다. 침입한 흔적을 들킨 것인지, 사교도들은 전보다 경비가 삼엄해진 상태였다.
 우리는 보라색 돔이 있는 광장에서 박쥐를 닮은 괴물 셋과 맞닥뜨렸다. 그 괴물들은 두꺼비와 박쥐를 섞어놓은 것 같은 형태에 눈코입이 없었고, 날개는 구겨진 종이처럼 주름이 잔뜩 져 있었다. 제코가 그린 그림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 박쥐 괴물이 레너드(우리가 고용한 사람 중 하나)를 붙잡고 날아가서 그를 기묘한 신상에 대고 짓눌렀다. 마구 소리를 지르던 레너드는 신상에 닿자 몸이 잠깐 축 늘어졌다가, 다시 깨어나 바둥거렸다. 우리는 그를 구하려고 애썼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를 두고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멈추지 않고 교차로가 있는 곳까지 향한 다음, 인원을 나누어 목조건물에 진입했다.
 허버트가 후에 알려주기를, 1층은 창고로 쓰는 듯한 공간이었다. 안에는 곡괭이나 밧줄 같은 채굴 장비가 든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광업용 장비나 커다란 수레도 보였고, 작은 사물함 옆에 발전기를 돌리는 데에 쓰는 석유통이 여덟 개였다. 바닥에 사람 십여 명 정도가 누워서 자고 있었다. 살금살금 진입하는 도중 감시하던 사람이 깨어났다. 그가 명령하자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벌떡 일어나서는 뒤를 쫓았다. 그 사람들은 마치 자기 의지가 없는 존재들 같았다. 이후로는 도망치느라 더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2층은 내가 직접 살펴볼 수 있었다. 자오와 지노가 함께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몹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안에 큰 우리가 일곱 개 있었는데 그 안에 전부 사람들이 들어차선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사교도들이 납치한 사람들을 가두어둔 곳이었다. 우리를 여는 데는 특별한 열쇠가 필요했다. 억지로 뜯어낼 궁리를 하고 있는데, 문득 한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몸을 비틀며 발작했다.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는 그의 가슴 부근이 울룩불룩하게 치솟다가 찢어졌다. 가죽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거기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사마귀와도 비슷하고, 파충류 같기도 한 괴물이었다.
 충격적인 광경 때문인지 자오의 상태가 나빠서 그를 다급히 바깥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는 갑자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 순간 위층에서 총성이 울렸고, 다급해진 나는 일단 지노에게 자오를 맡기고 뛰어 올라갔다.
 3층은 허스턴을 위한 공간으로, 이것저것 멀끔한 가구가 갖추어진 곳이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 앞서 올라갔던 프리스비와 다지 교수, 그리고 클로다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허스턴은 반대편 책상 쪽에 서 있었다. 갓 끓인듯한 차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총성이 들린 것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허스턴은 우리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전혀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그럴만했다. 허스턴은 내가 만난 자 중에 가장 말이 많은 사교도였다. 그가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얘기를 떠들어댔는지 모른다. 그는 내게도 자리를 권했다.

 자, 지금까지 알던 세상을 잘 되짚어 봐라. 뭐가 진실인지 잘 생각해라. 아무리 진실을 외면하려고 해도 평소에 꾸는 꿈을 통해서 진실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이 모든 일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인류의 도태형, 고대부터 유전적으로 축적되어 온 집단 무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신이야말로 궁극의 진실이자 최종적인 현실이다.
 세상의 멸망은 위대한 신 니알라토텝의 뜻이다. 나를 죽인다고 해서 신의 뜻을 멈출 수는 없다. 나는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신들의 곁에 나란히 설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내가 그를 미치광이라고 믿는 만큼 굳건히.

 “내가 직접 보여줄 수도 있어. 같이 가세.”

 더 들을 필요가 없다며, 프리스비가 그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총알은 책상 위를 때렸다.
 안타깝게 됐구먼, 중얼거린 허스턴이 클로다를 향해 카메라 형태의 기묘한 물건을 들이대고 세 번 정도 버튼을 눌렀다. 그 앞에서 눈부신 전기가 튀더니 클로다가 순식간에 숯덩이로 변해버렸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우리는 적당히 눈짓하고 장단을 맞추는 척했다. 허스턴은 우리가 당연히 그 일에 참여하고 그 신을 숭배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 유일하게 논리적인 결론이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떠들어댔고 나는 이참에 궁금했던 것 몇 가지를 알아냈다.
 원래는 세계 곳곳에서 문을 열 예정이었는데 여러 군데에서 차질이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없다는 것. 이집트랑 케냐에서 여전히 그날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하이파샤와 부나이는 함께 케냐로 간 뒤 소식이 없다는 것.
 허스턴이 주장하기로는 신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 건 자신이라는 것. 진짜 중요한 건 호주라는 것. 1926년 1월 14일, 시계가 울렸을 때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 이들은 그날을 대비해 신상 안에 차곡차곡 힘을 축적해두고 있었다.
 “그러면 여기까지 왔으니 위대한 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게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앞으로 거대한 신상이 보였다. 사람의 뼈와 살로 세워진. 
 “충성을 맹세하면 신께서 임하셔서 모든 걸 증명해주실 걸세.”
 한평생 그렇게 역겨운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

 


 분명히 머리를 쐈다.
 그랬는데도 허스턴은 죽지 않았다. 그는 턱이 날아간 채 피거품과 함께 알아듣기도 어려운 말을 쏟아냈다. 프리스비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넣었을 때, 마지막으로 끄르륵거리며 웃었다.
 동시에 돔의 보라색 빛이 훅 꺼졌다. 주변이 온통 암흑에 잠겼다.
 그러다 주변이 서서히 다시 보이기 시작했는데, 빛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그때 느꼈던 것은 박쥐가 초음파를 쏴서 주변의 물체를 인식하는 것처럼 기묘하게 뒤틀린 시야였다.
 돔이 있던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갈라진 틈으로부터 무언가 쏟아졌다. 거대하고 너덜너덜한 날개가 허공을 잡아먹으며 천천히 펼쳐졌다. 날개에 달린 무수한 촉수가 춤추는 듯, 갈구하듯 꿈틀거렸다. 부글거리는 연기가 솟아나는 사이로 불타는 눈이 떠올랐다. 그 눈이 하늘로 솟구치면서, 완전한 어둠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드러났다.
 이후로는 아비규환이었다. 그 존재는 붙잡힌 사람들에게 촉수를 뻗었다. 근처에서 또 폭발이 있었는데도 그 괴물은 전혀 상처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자오는 다지가 업었고, 나는 프리스비를 붙잡은 채 빠져나왔다. 달려가다 문득 아까 본 광경이 뇌리를 스쳤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목조건물로 향했다. 냅다 2층으로 들어가 무식하게 우리를 열었다. 혼란을 틈타 거기 갇혔던 사람들을 내보내고 함께 도망쳤다.
 그곳의 육각형 타일, 복잡하게 꼬인 길들이 익숙했다. 그때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았다.

 

 

 

1925.9.6


 우리는 함께 빠져나온 사람들을 맡길 겸 근처 원주민 마을에 들렀다가 다시 돌아갔다. 하루가 지나자 다시 불이 켜져 있었고, 발굴 작업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듯했다.
 일단 목조건물로 돌아가 허스턴이 쓰던 3층을 뒤졌다. 어제 봤던 대로 침대, 탁자와 책상 등 생활공간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서류장에 고대어로 쓰인 서류가 들었고, 한쪽 벽에 항해용 크로노미터가 걸려 있었다. 전에 제이덕이 알려준 적 있는 꿈 보내기 구리 그릇도 있었다. 책상 위에는 타자기와 편지, 문서들이 놓여 있었다. 또 원뿔 모자처럼 생긴, 전선이 달린 금속 헬멧이 한구석에 걸려 있었다.
 책상 위에서 타자기로 친 600장 묶음 원고를 발견했는데, 대강 훑어보니 허스턴이 쓴 것이었다.

 

<현실의 신들>


 후에 천천히 읽어보니 거기에는 지하터널에서 발견한 고대의 기록, 핵연료로 움직이는 거대한 비행선을 타고 여행하는 문명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또 관련된 글과 장치들을 잘 포장해서 개비건과 펜휴에게 보낸 기록, 회룡도와 검은바람섬에 대한 언급, 1926년 1월 14일이라는 날짜와 그때 해야 하는 일도 자세히 적혀 있었다. 허스턴은 신상의 기능에 대해서도 적었는데, 정확히는 마력을 흡수하고 저장하는 용도라고 한다. 정신조종기라는 기계에 대한 설명과 그 사용 방법, 또 번개총이 휘파람 소리를 내는 괴물을 쫓아내고 죽일 수 있다는 사실, 허스턴이 니알라토텝의 은총으로 시간 너머에서 위대한 이스족을 끌고 온 일에 대해서도 쓰여있었다. 지식을 뽑아내려는 용도로 그를 지하에 가둬뒀다고 한다.

 또 구겨진 편지 한 장이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다.

 

에드워드 개비건의 편지


 금속 헬멧에는 전설이 연결되어 있고, 전선 끝에 삼각 패드가 달려 있었다. 허스턴은 이 물건을 잡혀 온 사람의 기억을 지우고 저항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리는 데 사용한 듯했다.



 그곳의 지하에서 허스턴이 가둬두었다는 위대한 이스족을 만났다. 전기가 흐르는 센서를 문간에 설치해서 출입이 어려운 감옥을 만들었는데, 사람을 가둬둘 곳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아래쪽에 공간이 있어 어찌어찌 안으로 기어들어 갈 수 있었다.
 안에 들어서니 불이 켜졌다. 좁은 방 안에 그가 있었다. 3m 정도 크기의 원통형 형체가 마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는 공중에 떠 있던 금속 집게 블록을 잡고는,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입으로 보이는 곳도 찾을 수 없었고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으나 머릿속에서 곧장 목소리가 울렸다.
 그 이스족의 이름은 카카카탁으로, 그는 나를 오랜 친구라고 불렀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었지만 그는 1차원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라며,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마치 나를 어르듯이 이야기했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인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면 자신도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오래전에 친구였고 서로 부탁을 하나씩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약속을 지키러 온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가둔 퓨즈를 꺼달라고 했다.

 우리는 카카카탁의 자유를 되찾아주었다. 그는 보답의 의미로 질문 하나를 해도 좋다고 말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사교도들을 막을 방법이 있을까요?”
 “세상이 멸망하는 건 이미 순리적으로 정해져 있는 일이네.”
 “그러면 그걸 미룰 방법이라도.”
 “내가 아는 미래는 그렇지만, 미래가 한 가지로 고정되어있는 건 아니야.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 이 말은, 당장 멸망을 막는다고 해서 세상이 온전히 안전해지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네. 사실이 그렇다 한들 해야 한다면 몇 가지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는 있겠지.”
 그는 차분하게 사교도들이 자리 잡은 몇 가지 장소와 방법,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이름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그의 감정 표현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 없기는 하지만 내가 알아들은 바가 옳다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자네가 지금 어느 시점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성공하기를 바라.”

 나 역시 그걸 바랐다.

 

 

 


1925.9.21


 달이 뜨는 날에 맞추어 동굴 입구 부근에 을 새겼다. 완성된 눈은 은은하게 빛이 났다. 이런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제대로 된 게 맞을까. 어지럼증 속에서 느리게 가늠하며 그 미약한 빛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전보다 더 어지러웠다. 오래 쓴 물건의 모서리가 닳듯 영혼의 일부분이 마모되는 기분이었다.
 더없이 선명하던 확신이 서서히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주저함, 망설임, 슬픔. 무력감. 그런 것들이 그림자처럼 들러붙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끝이 있을까? 있다면 나는 왜 더는 상상할 수가 없을까. 어째서 끝을 그릴 수가 없을까.

 

 

 

1925.9.27


 우리는 시드니에 도착했고 이번 여정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던 다지 교수와 작별했다. 또, 내내 고민에 잠겨 있던 자오가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짧고도 길었던 그의 가출이 바야흐로 끝난 것이었다.
 나는 맥이 탁 풀려서, 이렇게 바로 돌아간다고 얘기할 줄 알았으면 말리지 말 걸 그랬다고 농담을 걸었다. 기껏 허락해주자마자 돌아가겠다고 하다니요,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하고.
 원래 붙잡고 말리면 더 하고 싶은 법이라고요. 그것도 몰라요? 그는 불평하듯, 짐짓 쑥스러워하며 미간을 찡그렸지만 나는 아주 마음이 놓여서 그냥 웃기만 했다.
 중국에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고 그의 손은 그곳에서 고귀하게 쓰일 것이었다. 그거면 되는 이야기였다.
 무얼 보상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보상이 되지도 않을 테지만 짧은 며칠 동안 우리는 제법 잘 지냈다.
 그가 떠나기 전에 나는 묵혀둔 말을 꺼냈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 얘기인데, 혹여나 그때 했던 얘기는 마음에 두지 말라고, 나는 다 잊어버렸다고. 잘 지내라고.
 자오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머뭇거리다 툭 뱉었다.

 있잖아요… 형도 좋은 사람이에요.

 나는 그 말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자오가 돌아간 날에 프리스비와 술을 마셨다. 사겠다고 해서 산 것은 사실 핑계고 내가 마시고 싶었다.
 “이럴 거면 왜 그랬어요, 진짜? 솔직하지 못한 인간이네….” 프리스비는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듯 나를 봤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나는 손을 얼굴에 짚고 중얼댔다. “좀 더 좋게 얘기해줄 수 있었는데.”
 “어차피 똑같이 말했을 거잖아요.”
 “그래도 예전 같았으면…… 좀 더 잘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데 말해 뭐하냐고요.”
 “프리스비 씨가 다 맞아요….”
 “아, 그런 생각 좀 하지 말아요! 옆에 있는 사람이 더 보기 힘드니까.”
 “제가 너무 제 얘기를 많이 했나요?” 아무래도 그랬다. 프리스비에게는 지나치게 얘기를 털어놓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왜, 이제 제 얘기도 듣고 싶으세요?”
 “예….”
 나는 코를 박고 있던 잔에서 겨우 고개를 건져 프리스비를 쳐다보았다.
 그는 술잔을 가볍게 빙글 돌려 그 안에 소용돌이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저는, 그냥 습관이 그렇게 되어서…… 원래가 그렇게까지 정을 안 붙이려고 해요. 제가 일라이저 씨보다 더 무책임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프리스비 씨는 중국에는 다시 안 돌아가실 건가요?”
 “아. 그게요. 제가 사실 일라이저 씨한테 말 안 한 게 있는데. 중국에 가면 메이벨을 만나야 하잖아요. 근데 제가 사실 마지막 날에 메이벨이랑…… 잤어요.”
 나는 순간 멈칫했다. “메…이벨 씨랑요?”
 “어쩌다가 분위기가 그렇게 돼서~ 그래서 다시 만나면 좀 어색하지 않을까나~.”
 “아니 그때 저도 같이 있었는데 어떻게… 아. 아니요. 말하지 마세요….”
 프리스비가 킥킥 웃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자오한테 팔찌를 주셨길래. 다시 안 돌아가실 건가 했는데.”
 그 허티옥 팔찌는 제비 부인, 그러니까 린옌위가 프리스비에게 준 일종의 애정의 징표이자 부적이었다. 
 “글쎄. 린옌위 씨랑은 더 깊게 얽힐 일이 없지 않을까요.” 프리스비가 가볍게 대꾸했다.
 “프리스비 씨는… 정리가 빠르시네요.”
 “살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너무 깊으면 피곤하거든요.”
 나는 불쑥 물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왜 달랐죠?”
 잭슨 엘리어스 얘기였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캐묻진 않았을 텐데 그날은 나도 많이 취해 있었다. 프리스비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가벼운 웃음이 일순 사라졌다.
 “사람이 살다 보면 내 의지랑은 상관없이 마음에 깊게 남는 사람이 있잖아요? 잭슨이 저한텐 그런 사람이었어요. 잭슨이랑은 오래 같이 있고 싶었거든요.”
 “하필이면. 괜한 친구 때문에 고생이네요.”
 “예에. 그래서 끝을 봐야겠네요. 돌아갈 수가 없네, 이제.”
 별수가 없었다. 여기에는 잭슨 엘리어스와 그가 말아먹은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일라이저 씨는 다 끝나면 뭐 할 거예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건가요?” 프리스비가 물었다.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나는 느릿느릿 대답했다.
 글쎄, 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1925.9.27

 나와 프리스비는 케냐로 향했다. 화물용 증기선을 타고 수에즈 운하를 통했다. 날씨는 나쁘지 않았고 배는 부드러운 항적을 그렸다. 수면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나쁜 꿈을 꾸었다.
 새카만 어둠이 나를 감싸 안고 손짓했다.
 꿈에서 나는 피투성이가 된 제이덕을 하염없이 붙잡고 있거나, 쓰러진 프리스비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막으려 하거나, 이제는 몇 조각인지도 모를 자오를 다시 하나로 모으려고 했다. 나는 또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을 계속해서 겪었다.
 자, 지금까지 알던 세상을 잘 되짚어 보게. 뭐가 진실인지 잘 생각해보라고. 턱이 없는 허스턴이 그륵거리며 웃었다.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사실은 꿈속에서, 진실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그륵, 그르륵.
 닥쳐, 닥치라고… 나는 짓눌린 목소리를 겨우 뱉어낼 뿐 그 무엇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을 아는 괴물이 가까이에 있었고 나도 그의 이름을 알았다. 나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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