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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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그림러.램님의.그림.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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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2. 23

 

 블루 피라미드 클럽 1층의 창고는 사용한 흔적이 있는 밧줄과 핏자국을 그늘에 숨기고 있었다. 우리는 낮은 목소리로 두런거리며 창고를 둘러보았다. 한순간, 천장의 전구가 파직! 소리를 내며 터지더니 주변이 삽시간에 어둠에 잠겼다. 머리카락을 태우는 불유쾌한 냄새가 훅 끼쳤다. 시야가 새까맣게 물든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악취는 불길한 신호였다. 아니나 다를까 일행에게 채 괜찮냐고 묻기도 전에, 옆에서 우당탕 소란이 일었다. 나는 다급하게 손전등을 꺼내 그쪽을 비췄다.

 아주 찰나였지만 나는 똑똑히 보았다.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제이덕의 얼굴에 달라붙어 입과 코로 밀고 들어가는 광경을. 손전등 빛이 닿자 그것은 빠르게 모습을 감췄고 그는 막혔던 숨을 토해내며 거칠게 몰아쉬었다. 사방에서 머리카락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옆으로 쓰러지는 노라를 겨우 부축하고서, 나는 사라진 괴물을 쫓아 전등으로 주변을 훑었다. 위협하듯 휘둘러지던 불빛이 뚝 멈추고 만 까닭은, 허여멀건 덩어리가 한쪽 벽에 우글우글 움튼 모습이 순간 나를 얼어붙게 했기 때문이다. 형체는 마치 전등 빛을 피하려는 것처럼 사라졌다가 나타났다 하며 꿈틀거렸다.

 기침을 잇던 제이덕이 비틀거리면서도 그 괴물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가려 했다. 나는 되는대로 손전등을 입에 물고 그의 팔을 붙잡았다. 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둘을 이끌어 창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지독한 냄새는 계속 뒤따라왔다. 한밤중이었다. 주변은 어두웠다. 어둠은 단 한 순간도 우리 편이 아니었다. 나는 입에 손전등을 물고, 기절한 노라를 부축한 채 한 손은 제이덕을 꽉 붙들고, 강을 따라 내달았.

 

 어떻게 다시 숙소로 돌아왔는지도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계속 악물고 있던 턱은 얼얼하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너무 긴장했던 나머지 사지가 뻣뻣하게 떨려온다. 무서울 만도 한데, 제이덕은 그 괴물을 한사코 다시 봐야 한다고 우겼다.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끔찍한 일을 겪으면서 서서히 생겨난 조광(躁狂) 증세다. 이럴 때의 그는 제정신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설득은 별로 의미가 없다.

 기절한 노라를 편히 눕혀두고, 제이덕과 나는 결국 다시 밖으로 나왔다. 내 이유는 조금 달랐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문도 잠그지 않고 빠져나온 터라 뒷정리를 해야 한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에는 절대 인정하지 못했겠지만 내 사고 또한 결코 멀쩡하다고는 봐줄 수 없는 방식으로 굴러가고 있었.

 

 그렇게 호텔에서 나와 밤거리로 막 빠져나왔을 때였다. 뒤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유령이라도 본 듯 창백한 얼굴의 노라가 서 있었다. 시선이 갈피를 못 잡고 떨렸다. 우리가 나가는 기척에 눈을 뜨고 보니 아무도 없는 호텔 방이어서 많이 놀랐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신발도 신지 못하고 뛰쳐나와야만 했을 정도로. 우리는 노라를 부축해서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똑바로 달랠 수 있었을까. 모두에게 불안한 밤이었다. 우리는 그날 밤 내내 불을 밝혀놓았다. 회색 나방 한 마리가 느릿느릿 맴을 돌더니 기어코 촛불로 뛰어들었다. 뒤이어 타탁! 튀는 소리와 함께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윌리엄은 그 전쟁얘기를 자주 꺼내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전선 조광증에 대한 이야기다. 어떤 군인은 참호 속에 웅크려 포탄이 사방으로 빗발치는 소리와 땅 울림을 들으면서도 기어코 밖에서 죽어가며 울부짖는 개의 머리를 쏘러 나가려고 한다. 자기 파괴와 진배없는 자비심이다. 사실 그는 그저 정신이 나가버린 것이다. 끔찍한 긴장 상태가 너무 오래 지속된 바람에 그저 뭐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각주:1]

 그럴 때는 말이야, 엘리. 그저 모두가 그를 꽉 붙들고, 손가락 하나 까딱 못 할 때까지 두들겨 패는 수밖에 없었어. 그렇게밖엔 말릴 수가 없더구나. 그러면서도 나는 마음 한편으로 그가 뛰쳐나가려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지. 그를 붙잡느라고 다른 건 다 잊어버렸거든. 밖에서 개가 두어 번만 더 길게 울었더라면 뛰쳐나가는 건 내가 되었을 거다. 아멘.

 그 누구도 그런 상황에서 제정신일 수는 없어.

 

 

 눈을 뜨자마자 제이덕이 불쑥 책을 들이밀었다. 그 책에서 자기가 어제 겪은 일과 비슷한 내용을 발견했다고 한다. 역시 어젯밤도 그냥 잠들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가 손가락으로 짚고 읽어준 내용은 간추리자면 이렇다;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없는, 다른 차원에서 온 존재. 실체가 없어서 보이지도 않고 물리적으로 영향을 줄 수 없다(이 부분에는 제이덕의 첨삭이 더해져 있었다. ‘물리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호흡기로 들어가 숨통을 조인다.’). 굉장히 강한 빛이나 태양 빛을 받으면 모습을 유지할 수 없어 쫓겨난다.

 

 아무래도 블루 피라미드 클럽에서 뭔가를 더 알아내기는 요원해 보였기에, 우리는 다른 곳으로 관심사를 돌리기로 했다.

 

 

 펜휴 제단에서 발견된 명함도 그렇고 배링턴 경위도 언급한 적이 있는 만큼, 엠파이어 향신료도 수상했다. 새벽에 조용히 들러보기로 하고 낮에 잠깐 사전 조사를 해두었다. 근처에만 가도 이국적인 향신료 향이 물씬 풍겨오는 2층짜리 건물이었다. 오후 5시만 되면 문을 닫는다.

 오후에는 숙소로 돌아와 가져온 물건들을 이것저것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노라는 짧게 외출을 다녀왔다.

 시간이 꽤 넉넉했기에 제이덕이 신중하게 물품 하나를 분류하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우리가 쉬플리의 집에서 가져온 약은 명계의 약이라고 불리는 물건이었다. 뱀 인간이 만드는데, 이 약을 사용하면 시간의 구석을 통해 정신이 과거로 여행했다가 돌아올 수 있다고 한다. 쉬플리의 설명 그대로였다.

노라는 이집트 살인사건에 대해 놓친 소식이 있는지 여기저기서 살펴보고 돌아왔다. 관련된 것은 찾지 못했지만 대신 우리가 어제 겪었던 일과 비슷한 경험담을 다룬 기사를 찾았다.

 

 

 의도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어도 미키 마호니 역시 교단과 많이 얽히는 듯하다.

 우리는 이 기사에 대해 더 상세히 묻기 위해 다시 더 스쿱 신문사로 향했다. 그런데 도착한 신문사 부근은 경찰들이 통제하고 있었다. 더 스쿱의 편집장 미키 마호니에게 변고가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소식으로 인해 우리는 충격에 휩싸였다. 범행 시간은 아마도 오늘 오전, 목격된 용의자는 없었다. 하지만 직접 눈으로 보지 않아도 그가 교단의 희생자가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에도 우리는 한 발짝 늦은 셈이다.

 경찰에 사정해서 미키 마호니의 마지막 모습을 확인하기로 했다. 신문사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갈수록 타는 냄새가 심해졌다. 어젯밤의 일이 떠오른 건지, 제이덕의 안색이 창백해서 결국 노라에게 그를 맡겨두고 혼자 다녀왔다. 냄새의 근원은 그을린 종이였다. 범인은 아마 더 스쿱이 보관하던 자료를 태운듯했다. 미키 마호니의 시체는 사무실에 있었다. 그는 마구 맞고 찔려 상처투성이에, 가슴에 말뚝을 박았다 뺀듯한 검은 구멍이 뚫려있었다. 사후경직은 그의 얼굴을 경악으로 일그러진 그대로 영원히 고정해 놓았다. 참혹한 시신의 모습은 뉴욕에서 봤던 엘리어스의 그것과 겹치며 뇌리에 깊은 잔상을 남겼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미키 마호니는 우리에게 서신을 보내려고 했다. 거기에는 자신이 감시를 당하고 있으니 우리에게도 조심하라는 우려와 경고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마음이 무겁다. 얼마나 더 많은 사람을 잃어야 이 일이 끝날지 모르겠다.

 

 

 

 

 

1925. 2. 24

 

 늦은 새벽. 엠파이어 향신료.

 우리는 건물 뒤편의 담을 넘었다. 잠긴 뒷문을 열기 어려워서 하는 수 없이 석탄 출입구에 몸을 구겨 들어갔다. 순식간에 모두 검댕 덩어리가 되었다. 떨어지고 보니 주변은 낡은 나무상자와 석탄 더미가 쌓인 깜깜한 지하실이었다.

지하실에는 숨겨진 문이 하나 있었다. 그냥 힘으로 밀면 꿈쩍도 하지 않고, 상자로 가려진 곳에 채워진 자물쇠를 풀어야 한다. 낡은 자물쇠인데 열기가 쉽지 않아 일단 가게를 마저 살펴보고 돌아오기로 했다.

지하실 계단을 올라가는데 위쪽에서 검은 그림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몽둥이를 든 남자였다. 옥신각신한 끝에 제압하긴 했으나 그 과정에서 노라가 많이 다쳤다. 머리의 상처를 겨우 지혈하고 나서야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날이 밝자마자 병원에 뛰어가 봐야 하는 상처다.

그 남자는 갈비뼈가 부러지고도 밖으로 도망치려 했다. 제이덕이 겨우 붙잡은 뒤에도 여왕님께서 너희를 용서하지 않으실 거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우리가 뭐라고 말하건 제대로 듣는 눈치가 아니었다. 결국 지하실에 묶어둘 수밖에 없었다.

 

 엠파이어 향신료의 1층에는 가게 공간과 사무실이 있었다. 제이덕이 이리저리 장부를 살펴보더니, 어디서 이만한 돈이 났을까요? 하고 지적했다. 잘 되는 사업이기는 하지만, 장부에 쓰인 것과 비교해 지나치게 인테리어가 화려하다는 것이다. 가게의 2층은 더 심했다. 장식과 가구에 아낌없이 자본을 쏟아부은 티가 났다. 공기는 훈훈해서 약간 더울 정도였다. 난로가 켜져 있다. 누군가 여기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잔뜩 긴장한 채 둘러봤으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도 자흐라 샤피크의 방이리라 짐작되는 가장 화려한 개인실에서 몇 가지 물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먼저 눈에 띈 것은 금박으로 된 장식 거울이었다. 틀에 기이한 도형이 새겨져 있고 묘하게 비대칭이었다. 책상의 비밀 공간에도 무언가 숨겨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 같은 오래된 파피루스 두루마리, 금속 사슬에 달린 뒤집힌 앙크, 검은 결정 가루가 든 병, 불그스름한 시럽 같은 액체가 든 병. 원래는 긴 막대나 홀 두 개가 놓여있었던 것 같은 공간은 움푹 파인 채 비어있다. 제이덕이 거기 있던 물건들을 조심스럽게 챙겼다.

 

 

 다시 지하로 돌아와 비밀 문의 낡은 자물쇠를 건드리자, 아까와는 달리 매우 쉽게 열렸다. 헐거워졌던 걸까? 문 너머에는 음침하고 불길한 공간이 도사리고 있었다. 정면에 사슬과 쇠갈고리가 붙어 있는 벽이 보이고, 방 한쪽 끝에 검은 양초로 둘린 검은 파라오의 흑단 입상이 서 있었다. 제단 앞에는 피로 물든 나무 블록이 놓여있었다. 블록 위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블록 근처에 1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우리는 모두 놀라서 그쪽으로 달려갔다. 다친 곳은 없는지 확인하고 흔들어 깨우자 곧 정신을 차렸다. 매우 겁에 질려 있는 것을 차근차근 진정시키고 대화를 나누었다. 이름은 니트라, 자기가 검은 파라오의 결사에게 잡혀 온 것 같으며, 자기 남동생이 살해당해서 조사하다가 이런 일을 당했다고 한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들키기 전에 니트라를 데리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우리는 니트라를 숙소까지 안내하고 따뜻한 차를 타주었다. 상황이 안정되자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펜휴 제단의 사람을 미행하다가 납치를 당했다. 니트라가 조사한 결과, 펜휴 제단을 관리하는 에드워드 개비건이 바로 이 끔찍한 사교의 수장이다. 우리는 엠파이어 향신료 가게 주인에 대해서도 물어봤지만, 그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바가 없었다.

이들은 한 달에 한 번씩 그믐밤에 교외에 모여서 끔찍한 의식을 치른다. 장소는 미스르 하우스라 이름 붙은, 에식스의 늪지 섬에 지어진 개비건의 전원 저택이다. 니트라의 생각으로는 검은 파라오의 결사를 와해시키는 방법은 수장 에드워드 개비건을 죽이는 수밖에 없는데, 이 일을 수행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바로 이 미스르 하우스다. 종교의식을 치룰 때라면 이들은 비교적 무방비해질 테고, 개비건에게 다른 호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노라는 누군가를 죽여야 한다고 말하는 소녀의 모습에 조금 놀란듯했다. 물론 개비건이 영국에서 명망 높은 귀족임을 생각하면 그가 감옥에 갇힌다고 간단히 해결이 될 것 같진 않지만, 그 직접적이고 적나라한 표현이 노라에게는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우리는 당장 뚜렷한 대답을 주는 대신 생각을 해보겠다고 약조하고는, 오늘은 많이 놀랐을 테니 이만 쉬라고 니트라를 다독였다.

 

 노라는 상태가 좋지 않다. 그 애는 상황이 일단락되자 기절하듯 잠들었다. 빨리 병원을 가봐야 한다. 제이덕은 오늘 밤도 깨어서 가져온 파피루스를 살피고 그 문자를 해독했다. 해독문을 간추려 옮겨둔다:

 갈의 거울 사용법. 갈의 거울은 강력한 점술 도구이자 무기다. 거울의 능력을 전부 사용하려면 오브라안과 가베슈갈이라는 물건이 필요하다. 거울로 특정한 대상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무기로 사용해서 대상을 해칠 수도 있다. 오브라안을 사용하여 거울에 뒤집힌 앙크 모양을 그린 뒤, 일정한 대가를 지불하고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면 그 모습이 보인다. 소리가 들리지는 않는다. 무기로 사용할 때는 일단 그렇게 대상을 불러낸 뒤, 가베슈갈을 사용해 거울을 다 덮는다. 그러면 대상의 숨이 막히게 된다. 이 행위에도 대가가 필요하며, 더 지불하면 숨을 끊을 수 있다.

 

 

 

1925. 2. 25

 

 

 새벽.

 바깥이 소란스러워 잠에서 깼다. 나가보니 제이덕과 니트라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니트라가 제이덕의 가방을 뒤져, 갈의 거울과 약병을 들고 몰래 나가려다 들킨 것이었다. 니트라는 이런 물건을 가지고 있다간 저주를 받으니 가져다 버려야 한다고 우겼고, 제이덕은 몹시 화가 나서 그가 자기 연구 자료를 훔치려 했다며 쏘아붙였다. 나는 두 사람을 어떻게든 말리려고 했다. 니트라의 태도는 아까와는 아주 달랐다.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무언가를 숨기고 있었다. 나는 도와줄 수 있는 거라면 기꺼이 도울 테니 솔직하게 말해달라고 부탁했지만, 그의 태도는 단호했다.

 “저는 도움 받을 게 없어요. 이만 가보겠어요.”

 니트라가 그렇게 말하고 떠나려 했을 때 제이덕의 인내심이 바닥났다.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좋은 말로 할 때 주지?” 옆에서 내가 말리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제이덕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니트라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주문을 외웠다.

 불타오르던 눈빛이 삽시간에 흐려졌다. 나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중에 알았는데, 니트라는 그때 제이덕의 머릿속에서 거울과 자신에 대한 기억을 완전히 지워버렸다. 당시의 나는 제이덕이 무슨 해코지를 당했는지 알 길이 없었고 그 때문에 마음이 조급해졌다. 제이덕은 순식간에 얌전해져서, 니트라의 손길에 이끌려 의자에 앉혀졌다.

 “지금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대답 대신 그는 곧장 나를 보며 무언가 속삭였다. 발음과 소리로 이루어져 있는데 사람의 목에서 나오는 말 같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안개가 밀려드는 느낌에 온 신경이 곤두섰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키웠다. “괜찮아요, 제이덕? 이 사람, 마법을 씁니다.”

 나는 머릿속의 안개를 밀어내려 애쓰며 다급하게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떻게든 그가 주문을 쓰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옆구리 쪽에서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숨을 끊어 내쉬며 아래를 내려다본다. 니트라의 손에 들린 작은 단도가 내 옆구리에 수납되어 있다.

 

 옆에서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면 막 잠에서 깨어난 노라가 보인다. 노라는 몹시 놀라서는 옆에 있던 꽃병을 들어 휘둘렀다. 나는 니트라가 칼을 쥔 손을 붙잡아 어떻게든 그가 피하지 못하도록 했다. 꽃병이 쨍그랑, 깨어지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런데 소녀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배의 고통 때문에 점점 손에서 힘이 빠졌다. 나는 더 몸싸움을 이어가지 못하고 니트라는 쓰러진 내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옆구리에 꽂혀있던 칼을 뽑아, 두 사람을 겨냥했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노라가 외쳤다.

 “조용히 가려고 했는데 잡은 건 너희 쪽이야.” 니트라는 피 묻은 칼끝으로 제이덕을 가리켰다. 제이덕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말로 해결할 수 있는 거잖아요! 어째서 이런 짓을.”

 “먼저 내 몸에 손댔다니까.” 니트라의 어투는 노라의 격양된 목소리와 대비되게 차갑다. 나는 그 밑에서 겨우겨우 목소리를 짜냈다. “이 사람 마법을, 써요. 조심해.”

 “우릴 속인 건가요?! 왜 거짓말을 한 거예요! 저희는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노라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다. 그 애의 다정한 믿음이 산산이 부서지는 게 보인다. 니트라는, 아니, 자흐라 샤피크는 몇 마디 주문을 외더니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어린아이의 모습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고, 화려한 인상의 여인이 나타났다.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움직이자 새까만 머리카락이 따라 흘러내렸다.

 “목표가 같은 게 아니야.”

 단호한 목소리가 방을 울렸다.

 “너희한테 더 볼 일은 없어. 개비건만 제대로 없애버린다면.”

 “당신도 개비건과 같은 검은 파라오의 신도 아닌가요? 어째서 그를 노리는 거죠?”

 “내가 꼭 대답을 해줘야 알겠어?”

 자흐라는 한 손으로 내 머리채를 휘어잡고 꾹 눌렀다. 나는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구겨진 채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이 사람보내면 안 돼.” 이 한마디를 뱉어내는 데도 숨이 턱까지 찼다.

 “그러면, 저희가 협조하면 좋게 끝낼 수 있는 거죠? 일단 칼 내려놓고 얘기해요!”

 초조한 목소리가 귀 양쪽에서 웅웅 울렸다서서히 혼미해지는 와중에 나는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애썼다. “안 돼, 보내면 안

 “조용히 해.” 자흐라가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 순간 왼손이 엄청난 고통과 함께 오그라지며 새까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관절을 모든 방향으로 꺾고 우그러트리는 것 같다. 나는 견디기 힘든 통증에 비명을 지르며 몸을 뒤트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안 그러겠다고 했잖아요!” 두 사람은 경악해서 외쳤다.

 “할 거야 말 거야?”

 “한다고요! 할게요! 말 들을 테니까 그만 해요!”

 그 말에 묻어난 절박함이 자흐라 샤피크를 만족시킨 듯하다. 그는 방금까지 내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으로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니까 조용히 하랬잖아.”

 그리고 물러나면서, 한 마디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내가 여기서 그냥 떠나는 게 어제 받은 찻값이라고 생각해.”

 자흐라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다. 멀리서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제이덕과 노라가 이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내 비명이 내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멀게 들린다.

 

 

 

1925. 2. 28

 

 제일 먼저 느낀 것은 독한 소독약 냄새와, 은은한 커피 냄새였다. 눈을 뜨니 흐릿한 시야 사이로 울고 있는 노라와, 그 뒤에 선 제이덕이 보였다.

 “일라이저 씨. 정신이 드세요?”

 대답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굉장히 오래 걸렸다. 목 뒤쪽이 깔깔하고 입안이 메말라 말하기가 힘들었다.

 “제가 얼마나 누워있었죠?”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 있으세요?”

 나는 멍한 정신으로 기억을 되짚었다. “그 여자는.”

 “나흘 지났습니다.” 제이덕은 자리에서 일어난다. “의사를 불러올게요.”

 노라가 너무 슬프게 펑펑 울고 있어서, 나는 그 애를 달랬다. 안 그래도 슬픈 일이 너무 많았는데. 익숙한 손을 들어 올리려다 몰려오는 뭉툭한 통증에 멈칫해서 왼손을 내려다봤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무언가 느껴야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약이 너무 독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시선이 머물러 있다가 떨어진다. 나는 오른손으로 노라의 등을 쓰다듬는다. 몸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아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언제 다시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힘들었다. 두 사람은 매일매일 찾아왔다. 어느 아침에는 제이덕이 옆에 와 앉아서 그간 조사한 내용을 알려주었다. 그에게 대답할 말을 찾아 돌아보니 어느새 침대는 주황색으로 물들었고, 그가 앉았던 자리는 텅 비어있었다. 스스로가 유령이나 다름없이 느껴졌다. 눈을 감으면 침대 시트와 살이 맞닿은 자리에서부터 엉킨 실 같은 뿌리들이 뻗어내리는 바스락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 날 그대로 돌이나 나무 같은 무정물이 되어버릴 것만 같았다. 어떤 날은 아주 컨디션이 좋았다가도 순식간에 열이 나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상한 꿈을 자주 꿨다. 나른하고, 멍하고, 일생을 날카롭게 세워둔 긴장의 첨단이 둔해졌다. 내가 내가 아니게 될 것만 같은 감각에 서서히 질려버렸다. 나는 진통제를 조금씩 덜 쓴다. 아픔 때문에 서서히 정신이 뚜렷해졌다.

기력이 조금씩 돌아오자 오른손으로 글 쓰는 연습을 했다. 스스로를 동정할 여유도 없었다. 잭슨 엘리어스의 무덤 위에는 이제 눈발이 내려앉고 미키 마호니의 관 위로 새로 흙이 덮일 것이다. 그러나 일라이저 웨버는 살아있다. 살아있다면 무언가 써야 한다. 애석하게도, 소위 문필가라는 작자들은, 도무지 조용히 할 줄을 모르기 때문이다.

 

 

 

 그믐까지 날짜 여유가 있었던 것이 다행이었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회복할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수술은 놀랄 만큼 경과가 좋아서, 상처는 덧나거나 하는 일 없을 뿐만 아니라 경이적인 속도로 아물고 있다. 나는 예상보다 훨씬 빨리 걸어 다닐 수 있었다. 그믐날에도 영락없이 쉬어야만 했다면 창문을 깨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내가 병실에 누워있는 동안 제이덕과 노라 두 사람은 쉬지 않고 조사에 착수했다. 주로 미스르 하우스와 헨슨 공업에 대해 알아보았다. 아래에 그들이 조사한 내용을 정리해둔다.

 

  •  미스르 하우스. 2400 헥타르가 넘는 넓은 부지. 원래 소유자는 이집트학자 네빌 로이드 프라이스였으며, 땅을 개비건에게 팔고 2년 전에 소식을 감췄다. 빚이 너무 많아서 파산하는 바람에 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현재 소유자는 에드워드 개비건. 저택은 원래 롱뷰라는 이름이었다가, 15년에 소유주가 넘어가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사람을 보내 알아본 결과 미스르 하우스는 작은 섬 위의 저택으로, 해자와 긴 담장으로 둘려 있었다. 들어갈 방법을 골몰하다가 미리 뱃사공과 배를 구하고, 차도 빌려두었다.

 

  •  헨슨 공업. 1921년에 아서 헨슨이 가지고 있던 회사를 에드워드 개비건에게 판매했다. 헨슨은 콘월로 은퇴했고, 그의 연락처는 찾을 수 없었다.

 

 37, 더비의 헨슨 공업을 직접 방문했다.

 헨슨 공업은 주변에는 그 용도를 뚜렷하게 알리지 않고 물건을 제작하는 공장이었다. 특기할만한 것은 공장 내부, 사무실의 기묘한 청사진들과 주 작업장의 주철금고였다.

 청사진들은 이때까지 봤던 어떤 청사진과도 달랐다. 척 보기에도 복잡한 데다 빽빽한 주석에 휘갈긴 글씨는 알아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구석에는 특이한 문양이 그려져 있고,하얀 뱀이라는 서명이 적혀 있었다. 오래된 청사진을 베껴서 새로 그린듯한 것들도 섞여 있었다. 확인한 뒤에 대부분 못쓰게 만들어버렸다.

 금고 안에는 다양한 소형 기계 장치들이 들어있었다. 부품이 낡고 오래된 것들도 많았다. 한쪽 구석에 랜돌프 주식회사 포트 다윈 노던 준주 호주 자치령이라고 쓰인 포장 라벨이 쌓여있었다.

 

 

 더비에서 런던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포스터를 한 장 보게 되었다. 반갑게도 우리 얼굴이 거기 그려져 있었다. ‘펜휴 제단에 들어가 물건을 훔치고 사람을 폭행한 혐의로 펜휴 제단으로부터 현상금이 붙었다는 내용이었다.

 

 

 다음날 우리는 배링턴 경위에게 연락했다. 이미 포스터를 본 모양인지 수화기 너머의 그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그는 조심스럽게 설명을 요구했다. 우리는 펜휴 제단과 이집트 살인의 혐의가 있는 특정 종교 집단의 관련성을 의심해서 이를 확인했으며, 사진을 남기기는 했지만 달리 누구를 때리거나 훔치지는 않았다고 덧붙였다. 물론 물건을 가지고 나온 게 있으니 뒷부분은 거짓말이었다. 나는 거기에 더해서 그들의 혐의를 강조하며 미스르 하우스에 잠입하는 일에 도움을 요청했다. 내가 찍어둔 사진을 보고 싶다고 해서 늦은 밤에 경위를 만났다.

 인화해둔 사진을 확인한 배링턴 경위는 사진을 증거물로써 윗선에 제출해볼 수는 있겠으나, 이 정도로는 개비건 정도 되는 귀족이라면 기소를 당하더라도 필시 어떻게 손을 쓸 것이라고 말했다.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던 사실이다. 우리 또한 확실한 사건 현장과 발뺌할 수 없는 증거를 손에 넣어 제대로 된 조처가 취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에, 그믐에 미스르 하우스를 직접 찾아갈 계획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경찰력을 움직이기 위해서 더 큰 카드가 필요한 것은 자명했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리는 끈질기게 배링턴을 설득했다.

 배링턴 경위는 한참을 심사숙고하다 대답을 내놓았다.

 “이 사건을 맡은 지 1년 정도 되었는데. 이번이 정말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경찰직을 내려놓을 각오로 움직여보겠습니다.”

 에식스는 그의 관할지도 아니었기에, 그는 직속의 경관 몇 명만 데리고 올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정도도 감지덕지한 일이었다. 그 각오에 자못 큰 감동을 받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도박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옳은 쪽에 거는 도박이었다. 부디 증거를 찾을 수 있길.

 

 

 

 

 

 

1925. 3. 21

 

 

 우리는 해안에서 배를 타고 강을 따라 흘러 저택의 해자 쪽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얼굴이 쭈글쭈글한 뱃사공이 기슭에서 몰래 배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다. 물가에서는 끈적끈적한 비린내가 진동했다.

 저물녘에 출발해 저택 부근에 도착할 즈음에는 소슬하게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다. 습지의 섬, 그 한가운데 오래된 저택이 보였다. 세월의 무게에 저택의 하부가 가라앉아 미묘하게 뒤틀린 정취를 자아냈다. 주변은 습기 때문에 과다하게 발육한 이끼와 덩굴이 카펫 대신 깔려있었다. 안개 낀 밤의 암울한 분위기에는 사람을 압도하는 무언가가 있다. 폐와 정신이 예민한 사람이라면 오래 견디기 힘들 것 같은 장소였다. 늪지에 사는 괴물에게 잡아먹힐 만큼 운이 좋지 않다면 어느날 직접 가라앉아 괴물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낡은 배는 끼익 소리를 내며 물가에 정박했다. 나는 땅에 발을 내디뎠다. 습윤한 땅은 제 형체를 유지하는 대신 발자국 모양으로 깊게 짓눌리며 탁한 강물을 꿀럭꿀럭 뱉어냈다. 주변이 어두워서 습지와 단단한 땅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공기는 축축하고 주변이 온통 물안개로 가득해 걷는다기보다 헤엄치는 기분이 들었다.

 정문 방향에서 사람 그림자 여럿이 다리를 가로질러 저택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불이 켜진 저택이 안개 속에서 음산하고 희뿌연 빛을 냈다.

 

 

 경찰들은 배 부근에서 대기하다가 필요한 때 진입하기로 합의했다. 우리는 곧장 저택 뒷문으로 숨어들었다. 저택은 넓고 안에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아 주의를 기울이면 숨어다닐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이내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개비건 정도 되는 인물의 저택이라고 보기에는 관리 상태가 썩 좋지 않고, 가구 수도 몹시 적은 편이었다. , 사람들은 저택에 모이는 게 아니었다. 모두 저택에 들어와서는 검은 로브로 갈아입더니, 오래 머무는 대신 몽둥이를 하나씩 든 채 삼삼오오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제이덕이 일전에 조사한 바에 의하면 미스르 하우스처럼 17세기에 지어진 영국의 오래된 저택에는 비밀 공간이 있기 마련이라고 한다. 16~17세기는 엘리자베스 1세가 박해하던 시대라, 가톨릭 사제들이 숨는 곳을 마련해 놓고는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유의하며 각각 흩어져서 건물을 살폈다.

 제이덕과 노라가 함께 2, 3층을 둘러봤다. 손님방 가방 안에서 어쩐지 익숙한 물건을 봤다며 가져왔는데, 확인해보니 갈의 거울과 함께 쓰는 그 약병들이었다. 아마 자흐라 샤피크도 여기 온 모양이었다. 옆에는 쪽지도 하나 놓여있었다.

 

 

 

 

 

 또, 파라오를 그린 거대한 벽화에다 왕관 비슷한 것을 거는 전시대도 보았노라고 전해주었다. 스위스제 크로노미터 시계가 벽에 달려있었고, 금은으로 만든 앙크 목걸이도 여러 개 걸려 있어서 제이덕이 하나씩 들고 왔다.

 

 나는 1층을 둘러보았다. 휴게실의 사교도들은 낮은 목소리로 오늘 밤의 큰 의식에 대해, 또 오늘 새로 가입한 신입에 대해 속삭이고 있었다. 말랐다가 젖었다가를 반복하면서 돌이킬 수 없이 휘어지고 뒤틀려버린 나무 바닥은 걸음걸음 죽어가는 사람처럼 신음했다. 가는 방마다 숨길 수 없는 곰팡내가 났고 낡은 문은 여닫힐 때마다 끼익 거리며 신경을 긁었다. 검은 로브를 쓴 사람들은 그림자처럼 조용히 지나다녔다.

나는 벌레 먹고 망가진 책들만 가득한 서재를 지나쳐 메인 홀로 들어갔다. 쌍여닫이문이 있는 탁 트인 공간에 망가진 샹들리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방 한쪽에는 벽난로가 있고, 그 양옆으로 먼지가 뽀얗게 앉은 갑옷 장식이 서 있었다. 갑옷 장식 밑의 판이 움직인 흔적이 선명했다. 어렵지 않게 벽난로 양쪽에 붙은 장치를 찾을 수 있었다. 사교들의 일관적이고 음침한 취향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그곳에서 조금 기다려 두 사람과 합류했다.

왼쪽의 장치를 누르자 갑옷 장식이 바닥에 난 자취를 따라 움직였다. 곧 아래로 내려가는 좁은 돌계단이 나타났다. 누가 메인홀로 들어오기 전에 재빨리 손전등을 켜고 내려갔다.

 

 지하는 더더욱 습하고 눅눅해서 조금 춥기까지 했다. 이 아래에는 고문 도구들이 즐비했다. 중세에나 쓰던 녹슨 아이언메이든과 부지깽이, 집게, 죔쇠와 함께 눈에 띄게 새 물건으로 보이는 신식 단도 몇 종류가 섞여 있었다. 방 가운데에는 함께 끔찍한 용도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화로가 있다. 물건 대부분이 사용감이 있다. 인간이 바닥을 치기로 마음먹으면 어디까지 곤두박질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다.

반대편에는 수납 선반과 책상, 탁자 셋이 나란하다. 선반에는 시든 것 같은 식물이 하나 놓여있었다. 책상 위에는 장부가 여러 권 쌓였고, 그 외에도 편지나 조각품, 책이나 두루마리들이 즐비했다. 우리는 먼저 열쇠 꾸러미를 챙기고, 거기 놓인 물건들을 빠르게 훑었다.

 조각품들은 종류가 다양했다. 흑단과 대리석으로 만든 파라오의 흉상, 머리가 악어이고 몸은 사람인 존재의 목각상, 상형문자 위를 뒤집힌 앙크 문양으로 덮은 석판 같은 것들이 있었다. 메모와 서신은 이렇게 두 장을 가지고 왔다.

 

 

  

 

 

 칼라일 탐사대의 일원이었던 잭 브레이디의 이름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칼라일 탐사대가 사교도들과 연관이 있는 것은 분명한데, 당최 어떤 정황인지를 알 수 없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나는 그들이 사교의 일원이 되었을 거라고 짐작했는데.

 두루마리며 책들이 잔뜩 쌓여있었는데, 제이덕이 그중에서 영어로 된 것 하나와 검은 염소 가죽 표지에 잠금쇠가 걸린 16절판 아랍어 서책 하나를 챙겼다. 자기가 아는 교수에게 번역을 부탁하겠노라는 심산인듯했다. <오그니아트 민 알 진>.

 

 잡동사니로 가득한 공간을 지나 안쪽으로 철창이 달린 감옥이 열 칸 정도 이어졌다. 아주 최근까지도 사람이 갇혔던 흔적이 남아있었다. 잠금장치만 신식인 걸 보니 꾸준히 사람을 납치하고 여기 가둬둔 거겠지. 내부를 쭉 훑는데, 물이 고인 웅덩이 안에 떨어져 있는 가죽 지갑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닳아 해진 지갑 안에서 그레고리 먼든 경위의 신분증이 발견되었다. 배링턴 경위의 전임자, 실종된 먼든 경위는 여기서 끝을 맞았던 것이다.

 

 

 우리는 배링턴 경위와 합류해서 그 지갑을 보여주었다. 그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것은 암울한 선고이자, 확실한 증거품이다. 그는 젊은 순경 하나에게 증거품과 사진들을 쥐여주고 지금이라도 서에 지원을 요청하게끔 했다.

 

 남은 우리는 사교들이 남긴 발자국을 좇았다. 한밤중의 숲은 어둡고 을씨년스럽다. 높게 자란 나무들이 빽빽이 하늘을 막고 땅에는 제대로 된 길도 없어서 매 걸음을 조심히 내디뎌야 했다. 늪지의 음산한 숲을 헤치고 나아가다 보니 저 멀리 한 편이 불빛과 음악으로 소란스러웠다. 그 빛을 따라가자 이내 너른 공간에 도달했다. 우리는 그 공간의 초입에 다다라 몸을 숨겼다.

 여기서부터는 내가 본 것을 되도록 정확하게 기록하려고 한다. 이후로 수없이 꿈에 찾아와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되었기에 복기는 어렵지 않았다. 인공적으로 다져서 만든 공터 한가운데에 거대한 이집트식 석비가 세워져 있었다. 2.5m 정도 되는 어두운 사각 돌기둥 석비에는 상형 문자들이 빽빽하게 쓰였고, 쇠고랑이 걸려 있는데 거기 산 사람이 여럿 매달려 있었다. 화톳불과 횃불이 주변에서 일렁였다.

 60여 명 정도의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비밀스러운 의식을 치르고 있었다. 전원이 새까만 로브를 입고, 석비를 중심으로 원을 이루었다. 한쪽에서는 북과 핑거 심벌즈, 기묘한 피리까지 더해서 국적이 불분명한 노래가 연주되었고, 그 리듬에 맞추어 로브 입은 사람들이 풀쩍풀쩍 뛰어다녔다. 저 멀리 사람들의 중심에 자흐라 샤피크에드워드 개비건이 보였다. 둘 다 몹시 화려한 로브를 입고 양손에 홀을 한 쌍씩 들고 있었다.

 우리가 숨을 죽이고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는 동안, 신입을 맞이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가운데에서 우두머리 두 사람이 그 사실을 알리면 신입들이 나와 사람들이 만든 원 바깥을 돌았다. 둥근 원 안의 사람들은 자기 앞을 지나가는 신입을 몽둥이로 한 대씩 때렸다. 대부분이 가볍게 치지만, 있는 힘껏 때리는 사람도 있었다. 앓는 소리와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중간에 못 견디고 쓰러지는 사람이 있는데도 아무도 개의치 않았고, 심지어는 밟고 지나가기까지 했다.

 한 바퀴를 그렇게 다 돌고 나면 중앙의 자흐라와 개비건이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신도들은 그 기도를 따라 읊었다. 목소리는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점점 줄어들어 속삭임이 되었다. 누군가는 너무 격양된 나머지 쓰러지기까지 했다. 그러는 사이에 사람이 몇 더 끌려와 석비에 묶였다. 사교도들이 묶인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돌아가며 한 대씩 때렸다.

 

 경찰 둘이 배링턴 경위를 향해 어쩔 줄 모르는 눈길을 보냈다. 물론 배링턴 경위에게도 뾰족한 수는 없었다. 막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당장 눈앞에 무기를 든 60여 명의 광신도가 있었다. 우리는 경찰과 따로 고용한 이들까지 다 합쳐도 여덟이었다. 이대로 나서는 것은 자살 행위에 불과했다. 우리는 개죽음을 당하려고 여기 온 게 아니었다.

 우리가 서로를 당혹감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는 사이, 고통에 찬 비명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 비명이 너무 적나라해서 온몸의 피가 다 식어버린다. 치밀어오르는 분노와 끔찍한 무력감에 저절로 이를 악물게 된다. 노라가 바로 곁에서 라이플을 들어 올린 채 손을 떨고 있다. 나는 오른손으로 총신을 내려주었다. 그 애는 고개를 수그리고 펑펑 눈물을 쏟았다. 제이덕이 나직한 말 몇 마디로 노라를 위로했다.

사교도들은 사람 하나를 중점적으로 때려서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곤죽을 만들어 놓았다. 그는 죽을 지경이지만 죽지는 않았다. 그를 가운데에 두고, 누군가 쐐기를 가져왔다. 그는 곧 가슴에 커다란 못이 박혀 죽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구할 순 없어. 텅 비어버린 말이다. 스스로가 사람이 아니라 슬픔과 분노에 얇은 막을 덧입혔을 뿐인 무언가로 느껴졌다.

 

 한 사람이 제물로 바쳐진 다음에는 나머지 사람들도 서서히 비슷한 꼴이 되어갔다. 개비건이 갑자기 하늘에 손을 치켜들더니 주문을 외웠다.

 그 순간 허공이 서서히 갈라졌다. 찢어진 차원의 틈새로 뭔가 거대한 것이 비집고 나왔다. 그 역겨운 몸체는 지나치게 길어서 아주 오래, 한참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날개를 펄럭이면서 내려온 괴물은 공터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쫙 펼친 날개는 공터를 다 덮을 정도의 크기였다. 공터 위를 밝히던 달빛마저 가려져 어둠은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화톳불의 불빛은 그 몸체보다 더 거대한 그림자를 자아내 춤추게 했다. 그것의 온몸에서 촉수가 뻗어 나와 어지럽게 일렁였다. 어떤 구조로 움직여지는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입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검은 우리 신의 말씀을 전하러 왔다.

 

 사교도 몇이 자발적으로 괴물에게 다가가 자신을 바쳤다. “저를 파라오께 바칩니다!” 뒤이어 고깃덩어리를 뼈째 으깨는 소리가 났다.

 괴물은 자기 앞에 당도한 신도들을 반쯤 삼켜버렸다. 그런 괴물이 눈앞에서 사람을 잡아먹는 모습을 보면서도, 사교도들은 그를 숭앙했다. 살아남는 자는 승급 의식을 통과한 것이었다. 개비건은 검은 파라오를 칭송하는 글을 읊으면서 화강암 그릇에 자기 피를 바쳤다.

 뒤이어, 사교도들은 하나둘씩 로브를 벗어던졌다. 이들은 로브 밑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그대로 제 몸을 여기저기 찧으며 자해를 하거나 광기에 빠져서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점차 흥분이 고조되자, 이들은 서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괴물은 그 모습을 한참 내려다보다가 자기가 나왔던 틈새로 돌아갔다.

 

 나는 제대로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자리에 붙박아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배링턴 경위의 손짓에 겨우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투입 준비가 되었다는 사인이었다. 목격한 장면이 자아낸 충격의 여파가 채 가지기도 전에 습격 작전이 시작되었다. 다수의 경찰이 난교 중인 사람들 사이로 들이닥쳐 하나둘씩 제압했다. 우리도 곧장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군중은 혼란에 휩싸여서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온 사방으로 흩어졌다.

 

 

 

 나와 노라, 그리고 고용인 하나가 자흐라 샤피크의 뒤를 쫓았다. 오밤중에 어딜 어떻게 긁히는지 깨닫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달렸다. 분명히 다리를 겨냥한 사격이었으나 무언가에 보호받는 것처럼 총의 궤도가 살짝 바뀌어 생채기로 그쳤다.

 자흐라는 도망치는 데에도 질렸다는 듯이, 마치 변덕을 부리듯 멈춰 섰다. 앞서 달려가던 노라가 그대로 자흐라에게 달려들었다. 자흐라는 곧장 품에서 날카로운 단도를 꺼냈다. 달빛이 반사된 날이 섬뜩하게 번쩍였다. 붕대로 동여맨 상처가 아려오는 기분이 들었다. ! 분명히 한 발을 제대로 쏘아 맞혔는데도 칼을 든 그 손은 잠깐 비틀거렸을 뿐 굳건한 궤도를 그렸다.

 “이 칼 기억나?”

 즐거운 추억이라도 되짚는 목소리로 물어오면서, 자흐라는 칼을 휘둘렀다. 단도가 노라의 옆구리를 깊게 파고들었다.

 노라가 자기 품으로 무너지자, 그는 다정한 손길로 머리칼을 정돈하더니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 애를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쪽으로 다가왔다. 총에 맞은 곳이 피로 물들고 있다. 그런데도 걸음걸이는 마치 산책이라도 하는 투다.

 “역시 오른손을 남겨두지 말 걸 그랬어.”

 그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아주 가까이에서 날카로운 단도가 쇄도했다. 나는 들고 있던 총을 던져버렸다. 그가 지근거리에 붙어 휘두른 칼에 내 오른팔이 길게 베이며 핏방울이 튀었다. 나는 베이는 것을 감수하고 칼을 쥐었다. 익숙하지 않은 손동작으로 휘두른 칼이 자흐라의 샤피크의 복부에 꽂혔다. 그는 우뚝 멈춰서서는, 당혹감이 어린 동작으로 내 오른손을 꽉 붙잡았다. 나는 마주 칼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코앞에서 그의 입술이 움직였다. 자흐라는 희미하게 꺼져가는 목소리로 주문을 중얼거렸다. 나는 이제 도망갈 곳이 없다. 눈구멍의 깊은 안쪽에서부터 개미 떼가 수백 마리 기어 다니는 듯한 근질거림이 인다. 서서히 시야가 흐릿해진다.

 그 순간 뒤에서 불쑥 튀어나온 칼날이 자흐라 샤피크의 목에 박혔다. 피가 울컥울컥 쏟아졌다. 자흐라의 눈이 흡뜨이고, 입술이 꿈틀거리는데 말 대신 꾸르륵거리는 소리만 몇 번 흘러나왔을 뿐이었다. 그는 곧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 있다가, 역시나 자기가 한 행동에 놀란 기색인 제이덕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온 힘을 다해 숲을 헤치고 뛰어온 듯 생채기투성이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노라에게 달려갔다.

 

 

 제이덕이 노라를 부축하는 것을 도우려는데, 곁에서 살펴보니 숨이 너무 가늘고 얕다. 맥박은 놀랄 만큼 느리고 그 얼굴은 창백했다. 이런 얼굴을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다. 덜컥 샘솟는 불길한 예감에 나는 손짓으로 제이덕을 제지하고 먼저 상처를 지혈하려 했다.

 깊게 찔린 상처에서부터 피가 끔찍하게 많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처를 틀어막는 손은 금세 피범벅이 된다. 몸이 너무 차갑다. 불안감을 가르고, 노라가 물어왔다.

 “어떻게 됐어요?”

 “다 끝났어요.”

 그렇구나. 목 안쪽에서부터 작게 가물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두 사람 다무사해서 다행이에요.”

 노라는 정말로 안심한 것 같다저는 괜찮아요. 고마워요. 미안하고, 그리고다행이에요. 나직한 말들이 이어진다. 나는 차마 뭐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 망연자실하게 그 애의 얼굴만 바라본다.

 사실 괜찮은 것은 하나도 없다. 흘러나오는 피는 멈출 줄 모른다. 나는 이미 상황이 누군가 손쓸 수 있는 영역을 아득히 넘어섰음을 인정해야만 한다. 나 자신을 어른 취급해온 죄로 그저 내 동요가 그에게까지 전해지지 않기를 빌며, 제이덕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해야 하는 얘기가 있으면, 지금 해요.”

 한 사람을 한 사람으로 이루던 것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와중에 우리에게는 몇 마디 짧은 말을 나눌 시간밖에 없다.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그 애는 시시껄렁한 농담에 핀잔을 주고 매일 늦게 잠드는 제이덕을 걱정하고, 많은 것을 두려워하고, 분해하고 또 슬퍼하면서 아닌 척하고 늘 그다음에 있을 좋은 일들을 씩씩하게 이야기했다. 정말로 괜찮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그 애는 이제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노라의 표정은 졸음에 취한 듯 흐릿하다. 정말로 편안한 표정인지, 자길 걱정하는 사람을 위한 다정함인지 나는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나 가족이 가족을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에, 제이덕은 울지 않았다.

 노라가 자기를 안심시키려고 하는 걸, 그 애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그 애들은 그런 것쯤은 서로 말하지 않아도 읽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저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내가 고마워. 노라.”

 “이제집에 가자. 집 가서 쉬자.”

 

 노라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이덕은 이후로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두 사람이 아무런 방해 없이 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준비를 도왔다. 그는 자기 짐과 연구 자료는 내버려 두고 노라의 짐만을 챙겼다. 남은 것은 내가 분류해서 추후에 부쳐줄 생각이다. 그가 배편을 기다리며 대합실에 앉아있을 때 잠깐 곁에 앉아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조심히 돌아가고, 그럴 수 있다면 있는 힘껏 잘 지내라고, 장례식에 못 가서 미안하다고, 그런 흔해 빠진 이야기를 몇 마디 했다. 닿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그가 내게 소중한 동료였고 친구였으므로, 아마 나 자신에게도 그런 인사를 할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제이덕은 그렇게 노라를 데리고 텍사스로 돌아갔다. 조금의 시간이 지난 뒤에, 우리는 램지를 통해서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추후 배링턴 경위의 지휘 아래 경찰이 현장을 수습했다. 개비건과 사교 집단의 혐의를 분명히 할 증거는 말 그대로 지천으로 널려있었다. 그가 개비건이 아니라 조지 5세 본인이었더라도 이만한 증거를 덮을 도리는 없을 것이었다. 개비건은 붙잡혀 경찰에 넘겨졌고, 자흐라 샤피크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대부분의 사교도가 당일 현장에서 붙잡혔다. 남은 잔당들은 미미한 수준이니 런던에서 활동을 존속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머지않아 재판이 열릴 예정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이집트 살인사건이 전부 사교 집단의 짓이라는 걸 밝혀낼 수 있었다. 나는 런던의 사교 집단의 내막과 그 배후에 대한 기사를 작성해서, 더 스쿱의 이름을 단 마지막 기사로 내보냈다. 조나 켄싱턴이 요청했기에 미국에도 한 부를 부쳤다.

다음에는 얄레샤 엣삼을 찾아갔다. 그가 무사한지 확인하고, 있었던 일들에 대해 짤막하게 얘기해주었다. 노라의 소식을 듣자, 얄레샤는 그 자리에서 한참을 펑펑 울었다. 어쩐지 두 사람이 조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얄레샤가 앞으로도 무탈하게만 지낸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정신없이 숙소로 돌아왔을 때, 나는 손에 가득했던 일감을 어느새 탕진해버렸음을 깨달았다. 숙소가 턱없이 넓게 느껴졌다. 공허한 집안은 냉기마저 흐르는 것 같다. 나는 반평생을 이렇게 살아왔는데, 분명 익숙한 일이었음에도 어쩐지 익숙한 척도 할 수가 없었다. 견딜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혀서, 책상 위를 닥치는 대로 뒤졌다. 그리고 텅 빈 바닥에 자료를 하나씩 펼쳐나간다. 바닥이 점점 빼곡하게 들어찬다. 억지로라도 돌려보내야 했던 걸까? 그랬더라면 최소한……. 아니, 소용없는 생각이다. 이미 알고 있었다. 내가 무슨 억지를 부리건 간에 그 애들은 돌아가지 않았을 거다. 노라는 아주 정이 많았다. 자기 손에 닿는 것들은 전부 도우려고 했다. 제이덕은, 굳이 자기 일이 아니어도 될 일에까지 호기심과 책임감을 함께 느꼈다. 그것뿐이다. 나는 그 애들에 대해 가족들이, 친구들이 아는 것만큼 많이 알지 못한다.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은 비일상에 가까웠다. 그래도 딱 하나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 애들과 함께 있을 때면 내가 사람의 어떤 점을 소중하게 여겼는지 선명하게 되새길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런던에서 진통제에 취해 바쁘게 돌아다니는 동안 노라는 이제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 땅속에 묻혔을 것이다. 그 애가 두 손을 모으고 누워있으면 그 애를 사랑하는 가족들이 둘러서서 인사를 나누고, 교구 목사는 그 애가 언제나 신실했고 사랑받아 마땅했기 때문에 일찍 하나님 곁으로 데려가셨다고 기도했을 것이다. 제이덕은 쭉 그 애의 곁에 있어 줬을 테고. 그리고 노라는, 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들도 다 위로해주고 싶어 할 것이다. 나는. 바스락, 바스락, 종이들이 흩어졌다. 세상에 신이 있고 응당 그렇게 되어야 하는 순리라는 게 정말 있다면 그저 그 애들이 다치지 않길 바랐다. 한 손이 바삐 움직여 글자들 위를 훑어내린다. 하지만. 늘 그렇듯 바람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손끝이 이름, 이름, 이름들 위를 스친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뭐든 스스로 해내야 한다. 손끝이 한달음에 바다와 산맥과 강을 건넌다. 나는 세상의 밝은 곳을 지키고 싶어 애쓰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들의 비극을 막지 못했다. 나는 다시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다.

 손가락이 우뚝 멈춰서서 지도 위의 한 점을 두드렸다.

 “상하이.”

 넓은 방에 낮게 울리는 목소리가 낯설다.

 

 

 

 방향을 결정하고 나서, 나는 그대로 쓰러지듯 드러눕는다. 천천히 심호흡하며 오른손을 쥐었다 편다. 그 빌어먹을 자식들은 런던에서 내 양팔을 다 자르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될 거다.

 

  1. 전선 조광증 이야기는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 오마주하였습니다. [본문으로]</서부전선>

완주 기념 빵모음 ~~

 

 

 

GM. 

천재LY님

PL.

서공원탁 <잊혀진 새벽의 그림자> 에스더 메일 - 천재팡님

서공천애 <역운의 세공사> 모로스 모네타 - 천재잼잼님

외전문호 <옥충색 연구> → <갉아먹는 폐허> 키스 프린 - 와타시

분과회 :: 세공된 옥충색의 그림자

 

 

 

굉장한 캠페인이었습니다 룰에 영락없이 감기고 말았어요(정신차리니 원서까지 도합 룰북 네권이 손에 있었다..)

 

캐 하나를 진득하게 잡고 이어가면서 모두와 얽히고 세계와 얽히는 이 화학작용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느낌이에요 최고다!

시나리오 개변해주신 방향도 너무 찰떡이고 이마깨지는 연출이며 사랑할수밖에 없는 npc 친구들까지 오지는 마서터링과... 역시나 귀신같은 연출 귀신같은 대사 스불재 설정으로 매번 유잼 플레이 만들어주신 우리 친구들까지... 달리는 내내 너모 행복했습니다!

다른 세션들은 타래로 남기거나 해서

막세션이니만큼! 캠페인 후기 겸해서 이별시 후기는 한번 간단하게라도 쓰고 싶었어요 (허리 톡톡

후기라고는 하지만 그냥 맥락없이 하고싶은 얘기를 주절주절댑니다ㅋㅋㅋ

다 적고나니... 후기가 아니라 주접글이라고 제목 바꿔야함

 

아차 이별의 시간은 황혼선서 수록 시나리오입니다!

 

 

 

 

~~~더보기부터 시나리오 스포가 이어집니다~~

 

더보기

 

 

 

너무 울면서 세션했더니 무서워서 로그 복습도 못하다가 약2주만에 켰습니다...

다시보니까 역시 (제가) 제정신이 아니네여..

 

 

 

그리고 저는 이 세션에서 펌블을 두 번 띄우게 됩니다

 

 

도입부에.. 스승님과의 첫만남 짜오는게 숙제였는데 저는 무난하게 들고 갔는데요 무슨 배짱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이사람들이 다 연출 귀신인걸 잊은거죠

에스더의 잊혀진 서고 설정부터 너무 좋아서 무릎탁쳤어요 마법명을 받는 장면도 좋았구 손잡구 가는거랑... 둘이 누가봐도 쩌서깊관임 이사람...천재아냐?

모네타랑 센세랑 같이 허공 걷는 장면이나 다 너무 아름답고 좋았답니다....누가... 스승님이랑 구애인 설정으로 이런세션을 오냐고요 이사람..미친거아냐?(좋았음)

 

 

 

다섯세션을 이어온 캠페인의 피날레였고 

헤매이는 칠검은 첫세션부터 등장해서 임무를 맡기며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사라지는 게 특기였습니다...

그래도 같이 크리스마스에 시간도 보내고...... 모네타랑 애도 생기고.......... 저희안에 엄청난비중으로 자리잡고 계셨단 말이죠

세션중간에 대파괴가 터지고 같은 타이밍에 실종처리된것까지ㅁㄴㅇㄹ

 

 

 

 

아무튼 그래서...

모든 PC와 PL이 스승님에 대한 각자의 의문과 믿음과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에요

당신 대체 왜 이렇게 의뭉스럽게 구는건가요

당신 대체 왜이렇게 비밀이 많나요

당신 대체 모가 그렇게 바쁜 건가요 맨날 바람같이 왓다가 사라지구

센세 어디가셨어요

센세 왜부르셨어요

센세 사실 흑막이죠(??????????)

당신 대체 왜??

 

.

.

.,

,

 

 

 

 

 

 

 

......

 

 

 

모든 어른이 한때 아이였고 아이는 언젠가 어른이 되고 마는 걸 잊고 살다가 문득 깨닫고 말 때의 미칠 것 같은 감정일까요 이게

제가 드라마 힐하우스의 유령을 댑다 재밌게 봤는데요…(갑자기딴얘기죄송합니다)

스포는 아니고... 거기 등장인물 중 하나가 어릴때 정말 작고 포동하고 귀여운 남자앤데... 커서는 완전 퀭한 약쟁이가 되어있거든요...

카메라가 일부러 그 두 가지 모습을 번갈아 비춰주며 시청자를 온갖 회한에 감싸이게 하는데요.

그때 보면서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걸 겪었어요

물론 저히 스승님은 약쟁이가 아니지만.

그것보다 더….. 편하지 못한 무언가가 되어 있잖아요 이 사람...아니 이 마법사 대체 뭐냐고!!!!!!!

어릴때 너무 헐렁하고 어리숙해서 더.. 대체...

대체 얼마나 세상의 풍파가 사람을 깎았으면 이렇게 해탈한??????해탈한 마법사가 되는거지???????

 

 

 

스승님.... 너무하시네요저히 요한이 그럴수도 있는거아닙니까

 

 

대체뭐냐고 왜 이렇게까지 한거냐고ㅁㄴㅇㄹ 사실은 맬렁한 햄쮜녀석이면서 이런 광공같은 짓을…

요한 진짜 첫등장부터 너무 귀엽고 허술하게 튀어나와서 전혀??전혀 상상도 못했다가 

캠페인 내내 던져지던 떡밥이 착실하게 들어맞으면서 이렇게........이렇게 풀어지는거 진짜로 소름이 쫙 돋더라구요.....................

ㅋ아....총체적으로 너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그걸... 이렇게 달려왔다니!!

하는 뿌듯함이 가득해서 즐거웠습니다 최고최고...

진짜 로복하는데 리님... 세션 당시에는 눈치 못챘던 부분까지 꾸준하게 떡밥을 먹이고 계시더군여....(눈물좍좍)

 

 

이게... 그냥 먹어도 장난 아니라는 느낌인데

앞세션에서 쌓여왔던 서사랑 같이 터지면서 너무 파괴력 강한 세션이 되어버렸어요

다시 생각해도 제정신 아닌 시나리오…

제정신아닌 연출…

제정신아닌 대사…

제정신아님...

제정신아님...

노정신...

노정신

 

 

 

 

그땐 몰랐음

 

 

 

그렇게 고민에 고민을 했는데 결국은 하는 선택마다 센세 말 더럽게 안 듣고 끝까지 시키는대로 안한 제자즈가 되어서 웃기고..귀엽고 슬프고 그렇습니다ㅋㅋㅋㅋ

 

 

키스 얘기를 좀 해보자면.... 이번에 좀... 말이 많았는데요...

애들 이미 사랑하고. 하고 싶은 얘기는 많고 이게 캠펜 마지막 세션이라고 생각하니… 

저절로 떠들게 되더라고요... 좋았다 애들이랑 많이 얘기해서 !!

개인적으로 트윈 이후 시점에서 캐가 어느정도 완성점에 도달했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렇게 자기 주관을 어느정도 내세울 수 있는 상태로 이 세션을 겪을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응응

특히 이렇게 강력한 질문이 던져지는 세션이라 더더욱.........

키스가 마법사로서 자기 대답을 잘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할 수 있는 한에서 최선을 다했단 느낌이 들어서 후회없이 놀았네요

키스는 처음부터 요한을 꽤 공들여 신경 쓰게 되었는데... 센세의 부탁도 부탁이거니와 

요한이... 한참 반항기인 청소년이라 제 초기앵커를 떠오르게하는 지점이 많았기 때문에(저의 초.앵은 소매치기에서 조수로 개과천선한 세계최강굳보이였습니다) 그렇게 된 것이었어요.

또 친구들이랑 오래 함께하면서 같이 축적한 경험이 있다보니 상실이라던가, 여러가지 주제로 이야기 나눌 수 있어서 기뻤어요 여러모로...증맬루... 올만에 같이 탐정놀이도 하구...

 

중간에 모네타랑 갈등했던 장면도 즐거웠고 그걸 에스더가 분과회장답게 단호하게 정지시켜준 것도 넘 짜릿했어요헉헉

캐끼리 의견이 대립하는 장면을 좋아하는데 이것도 뒷사람끼리 싸인이 맞아야 할 수 있는 거죠

잘던지구 잘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히히 끊는 지점까지 예술이엇어요 아..안되겟어요 역시 이사람들이랑 절대 세션해야해(질척)

 

좋았던 거 얘기 더 해야함 헉헉

에스더... 클맥때 연출이랑 도입부때 연출이 겹치면서 만들어지는 장면이 정말 좋았어요 

우리애... 이렇게까지 힘들어한 적이 얼마 없었는데.... 은제나 단단했는데!!

하지만 누구에게나 정말로 잃고 싶지 않은 순간은 있는거죠 응응

에스더가... 과거의 자신이 스승님에게 받았던 구원을 잊게 될 것이 끔찍하게 두려운게 분명한데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수없이 많은 구원을 받고 이자리에 있음을 알기에 금서찢고 요한을 구하기로 맘먹는거요... 

증말 환장하겟더라고요........................................

 

글고 클맥의 모네타 회상 장면은 다시 봐도 눈물이 찔끔 나더라고요...

그래... 마법사는 후회되는 말도 고쳐할 수 있는거야!!

모든지 할 수 있는거야 할 수 없는 것들만 빼고!!

모네타가 앞서 거절해놓고도 결국은 지킬, 이미 지킨 약속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거 너무 좋았습니다

한사코 믿고 있었다고 말해주는 칠검도요 이... 이 바보들

인과 니가 몰알아? 우리애들이 그렇다면 그런거야

넘슬프고 넘좋아서 그이후로 정줄을 놨죠.. 정신을 차렸더니 엔딩 스크롤이 올라오고 있었어요

 

연출 던질때마다 너무 귀신같이 물어주시고... 잘 말아주시고... 잘 줏어먹게 떡밥두 착실히 깔아주시고 정말 장난없어요 리님... 당싄은...채고에 마서터입니다...

지금 애들이 갖고 있는 요소들이 칠검을 관통해서 요한한테 척 들어맞는게 젤 미치겠는 부분이었어요

모네타처럼 마법 재앙의 영향으로 고통받으며 자책하는 모습도 겹치고

에스더한테 손내밀어주는 모습도 겹치고

칠검이 키스한테 어떤 모습이든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던 것도 너무 ㅠㅠㅋㅋㅋ 지금 요한에게 고대로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해서

흑... 흑

이런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관계 반칙입니다

 

 

 

 

 

 

 

이제 묻고 싶은 것이 생겨도 물으러 갈 사람은 없지만

대신 묻고 싶은 게 생기면 물으러 올 사람이 생겼다는(기억에 의존해 적는거라 선명하지 않읍니다꾸벅꾸벅) 지문이 아주... 뇌리에 깊게 남았습니다

이렇게 단적으로 성장이라는 키워드를 보여주는 지문이 있을까요 이마팍팍

 

룰북을 읽으면서... 마법사들 사이에 스승-제자라는 관계가 차지하는 비중이 꽤 크다는 인상을 받았었는데 해보니 알 것 같더라고요 

소멸하면 잊혀지고 마는 존재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치열하게 누구에게 배우고 배운 것을 또 누군가에게 남기면서 살아가요ㅠ-ㅠ)

그런 관계라서 더더욱 그 지식과 지혜와 사랑의 유산을 남기는 행위가 중요한지도 모르겠어요

 

앞세션에서 아끼던 우자들의 죽음을 겪으면서 캐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봐왔고

그러면서 마법사는 늙어죽지 않으니 결국 죽음의 대항인 삶도 가지고 있지 않은 걸까 하는 생각을 좀 했는데

그것은 저의 착각이었던 것 같아요 소멸도 죽음의 한 모양이고 끝없이 이어지는 삶도 삶의 한 형태인거겠죠

그렇게 긴 생은 결코 혼자 채울 수도 없겠죠 후훗...

 

시작과 끝이 이렇게 한 자리에 있어서... 이별의 시간을 결국 새로운 만남의 시간으로 만들 수 있어서 슬프면서 행복했습니다

캐가 한 얘기처럼... 행복과 불행을 떼어놓을 수 없듯이 이 둘도 결국은 떼어놓을 수 없는 것 같네요ㅠㅠㅋㅋㅋ

구질거리지 않으려고 2주나 기다렸는데 적고있자니 또 엄청 촉촉해져버렸어요

아무튼 헤매이는 칠검이 더는 헤매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에스더랑 모네타가 개짱멋진 센세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아요 최고최고 (걔는..몰라 힘낼게!)

 

세션이후는...좀 생각해봤는데

키스는 변함없이 외전생을 살아갈듯해서 크게 달라지거나 재밌는 일은 없을 것 같으네요

앵커랑 결혼 비스무리한 동거 관계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지내고요

내키면 탐정사무소를 다시 한번 차려보기도 할 것 같아요ㅋㅋㅋㅋ글고 레비한테 등짝맞음

다같이 애도 돌보고... 최소한 세옥그 친구들이랑은 잘 지낼듯해요

물론 모두와 하나가 되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겟지만 약속한 것이 있으니만큼...

그런 쪽으로는 덤비지 않고 사소하게 까불기는 잘 까붑니다

진지한..무언가는... 찐으로 계제 올라가고 이럴 일 생기면 그때가서 생각해볼게요 회피함 ㅋ ㅋ ㅋ ㅋㅋㅋㅋ

뻘하게 마법명 얘기를 끌어오자면... 전에 책에서 읽은 내용인데

폐허가 으스스함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그 자리에 누군가 살아있었고 무언가 존재했음이 확실하기에 

자연스럽게 많은 추측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로 하여금 그 구조물의 사라진 의미에 대해 골몰하게 만들어서라고 해요

소멸하고 잊혀진 것들의 파편이지만 여전히 한 존재이기도 하기에

어찌보면 자기와 같은 신세라고도 할 수 있을만한 소년을 아끼게 된 건 재미있는 결과네요

캐서사적으로도 혼자서는 만들 수 없었을 다양하면서도 예상못한 방향의 이야기가 되어서 즐겁습니다!

 

 

 

 

휴...  진짜류 넘 재밌었어요 나 갓세션했어 엄마

정말 아름다운 얘기였다~~

 

..

..

 

 

 

 

 

 

좋은 세션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부!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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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2. 11

 

 영국행 여객선에 탑승했다.

 상태가 좋지 않았던 두 사람이 객실에서 쉬는 동안, 나는 갑판으로 나왔다. 배의 난간에 양팔을 기대고 뉴욕의 부두가 나를 배웅하게 두었다. 기름과 쇠와 젖은 나무와 소금 냄새. 어딘가로 떠나는 것은 다시 돌아오는 것만큼이나 즐거운 일이었으므로 그 사실에 바치는 작은 의식이자 습관.

 짧은 의식은 예상치 못한 방해를 받았다. 부두에 무심히 시선을 두고 있던 나는, 한순간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찰나임에도 분명한 적대감이 피부 위로 소금기처럼 달라붙었다. 그 눈길은 배도 바다도 아닌 나를 향했다. 내가 채 반응하기도 전에, 그는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그가 사라진 자리를 오래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시선의 의미는 섬뜩하리만치 분명했다.

 긴 기적 소리가 나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육중한 배는 바다 위로 금방 지워질 흔적을 그리며 나아갔다. 흰 포말이 흘수선을 적셨다. 부두가 시야 속 자그마한 점으로 오그라드는 동안,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그 눈길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다시 선실로 돌아왔을 때는 온몸이 꽁꽁 얼어있었다.

 

 우리는 일주일 정도 배에 머물렀다. 내내 날씨가 맑았다. 바다는 자신의 다정한 면만을 보여주었다. 극심한 뱃멀미에 시달리던 노라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제이덕의 상태를 살필 겸 그와 같은 선실을 썼다. 그는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을 한시도 놓지 않으면서 가끔 다른 물건들도 일삼아 들여다보고는 했다. 제이덕이 알아낸 것은 이 정도다:

 

 구리 그릇. 꿈 보내기 주문에 사용되는 그릇이다. 구리를 닮긴 했지만, 사실 구리가 아닌 정체 모를 금속 재질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사용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항해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즈음, 노라는 출렁이는 바닥에 적응했다. 하지만 제이덕은 여전히 책을 놓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혼잣말이나 비정상적인 연구욕은 점점 심해지기만 했다. 기운을 차린 노라가 겨우 그를 끌어내서, 간만에 셋이 바닷바람을 쐬러 나갈 수 있었다.

 우리는 멀고도 가까운 겨울 바다를 바라보면서, 몇 가지 짧은 얘기를 나누었다.

 어느 방향을 살펴봐도 육지는 없고 까마득한 수평선만이 시야에 가득했다. 막막하고 거대한 바다는 사람의 악의와 그것이 불러올 수 있는 비극 같은 것은 신경도 쓰지 않는듯했다. 그런 광막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스스로 정말 미욱하고 하찮은 존재처럼 느끼게 한다. 이 거대한 세상에 고작 내가 얼마만큼의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하는 자조부터, 작은 내가 사라진 뒤에도 아무렇지 않게 흐를 무신경한 세상에 대한 통찰까지 이어진다. 허무, 허탈감, 경외심,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해를 초월한 거대한 것에 의한 열병. 인류를 오래도록 사로잡았을 감정이다. 여러 가지 대처법이 있어왔고 있을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이렇게 스스로가 먼지처럼 작은 존재로 느껴질 때 오히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뒤틀린 용기를 얻는다.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은, 결국 무엇을 해도 상관없다는 뜻이다.

 

 

 

 

 

 

1925. 2. 18

 

 사우스햄프턴에 도착해서 곧장 런던 행 기차를 탔다. 입국 심사 중 제이덕에게 난처한 일이 생겨서, 런던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훌쩍 늦은 시간이었다. 역에 가까운 아무 방을 급하게 잡을 수밖에 없었다. 집주인은 따지는 게 많은 편이었는데, 노라가 능숙하게 대처했다. 씩씩한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된다. 노라가 많이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다. 

 

 

 

 

 

1925. 2. 19

 

 시내로 들어가 적당한 중저가 호텔을 새로 잡았다.

 숙소를 옮긴 뒤, 먼저 조사할만한 장소의 목록을 정리했다. 지도를 펴고, 서적과 안내서도 꺼냈다. 잭슨이 영국의 더 스쿱 신문사에 자주 들락거렸다는 얘기를 조나가 해준 적이 있다. 참고하여 작성했다. 비자는 한 달여를 생각해두었으므로 그렇게 빡빡한 일정은 아니다.

 

  •  더 스쿱 신문사
  •  센트럴 뉴스 에이전시
  •  언론 협회
  •  영국 박물관
  •  런던 도서관
  •  펜휴 재단

 

 일정은 여유로운데 마음이 급한 게 문제랄까. 제법 바쁜 하루였다.

 들른 장소와 얻은 정보를 정리해둔다.

 

 

 

 런던 도서관

 -펜휴 재단

 이집트 학자 오브리 펜휴 경이 1890년에 설립하였다. 

 주로 이집트 탐사를 지원하고 감독한다. 이집트 역사/유물 연구자에게 보조금을 지급한다. 이집트 당국의 허가를 받고 합법적으로 연구를 진행한다. 현재 재단 대표는 에드워드 개비건.

 

 영국 박물관

 펜휴 재단에서 지원한 사업이 20여 건 정도 되는데, 오브리 펜휴 생전에 직접 참여한 탐사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현재 재단의 지원을 받는 탐사대로는 기자 고원에서 발굴 작업 중인 헨리 크라이브 탐사대가 있다.

 

 펜휴 재단

 철제 울타리로 둘린 건물에 경비원이 서 있다. 정문은 열려 있고, 사람들이 여럿 나다녔다. 복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에는 서고와 사무실이 대부분이다.

 2층의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전시된 이집트 유물들은 고고학 박사 제이덕을 매우 흥분시켰다. 따로 허가를 받고, 3왕조 말기 시대의 자료를 온종일 찾아 헤맨 끝에 딱 하나를 건졌다.

 

하워드 카터는 투탕카멘의 발굴자로 알려진 사람이다.

 

 

 

 부두의 그 눈길을 잊기 어렵다. 사실 과민반응은 아니었다. 런던에서도 벌써 감시가 붙었기 때문이다. 잭슨 엘리어스는 이런 일을 혼자서 어떻게 감당했던 걸까.

 생각보다 자료 탐색이 길어져, 노라가 몹시 가고 싶어 했던 대영박물관의 제국 박람회 일정은 미뤄졌다. 노라는 매우 아쉬워했다. 제이덕과는 달리 노라는 책이 별 재미가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로 한 달 내리 책에만 파묻혀 지낼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아주 운이 좋은 상황일 것이다.

 

 

 

 

 

1925. 2. 20

 

 제이덕의 증상이 심각하다. 그러니까, 이상한 얘기를 한다. 무슨 일이 있건, 우리는 함께 있을 수 있어요! 우리는 함께할 수 있어요. 이런 식이다. 그렇게 뇌까리는 눈빛이 묘하다.

 제이덕이 씻는 동안 노라와 긴급회의를 가졌다. 역시 저 책이 문제다. 제이덕은 씻으러 들어가면서도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을 욕실 문 바로 앞에 뒀다. 설마 씻는 내내 문틈 사이로 저 책을 보고 있기라도…… 말이 끝난 순간 소름이 쭉 돋으며, 방 안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 지점에 집중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나와 노라는 정말 애를 썼다. 어떻게든 그 책을 빼돌리고, 끈적한 둘 사이를 갈라놓으려 했다.

 물론 실패했다. 광인의 감각은 날카롭고 예리한 법이다. 결국에는 연구가 끝날 때까지만 더 지켜보기로 타협했다. 그 이후로도 계속 저렇게 상태가 좋지 않을 시 미국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최선이다. 제이덕 본인을 위해서라도.

 

 

 

 더 스쿱 신문사.

 사장 미키 마호니와 만나 잭슨 엘리어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보를 전하는 마음은 편치 않았다. 마호니는 시가를 뻑뻑 피워댔다.

 그에게 들은 얘기를 요약하자면: 잭슨은 이 도시의 교단을 조사하면서 그의 도움을 받았다. 잭슨은 미키 마호니에게 교단에 대한 기사를 약속했으나,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도망치듯 황급히 영국을 떠나야만 했다.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될 줄은 몰랐다. 

 우리는 마호니의 도움을 받아 잭슨 엘리어스가 흥미를 보였던 기사 몇 개를 찾았다. 

 

 

 

 

 세 기사는 전부 기자 서명이 없었다. 통신사에서 기사를 받아 더 스쿱에서 고쳐 쓴 글이라 그런 모양이다. 엘리어스는 이 기사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발견한 것 같다. 그는 배링턴 경위를 직접 만나러 가기도 했고, 이집트 살인 사건과 더불어 펜휴 재단에도 관심이 많았다.

 쉬플리의 경우에는 살인 사건과 직접 연관이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자기 집에서 그림을 상시판매한다. 주소는 기사 아래쪽에.

 

 미키 마호니는 여전히 사교에 대한 기사를 살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나쁘지 않은 일감이다. 그의 도움을 받은 덕분에 조사에도 더 뚜렷한 방향성이 잡혔다. 들를 곳이 늘었다고 할까.

 

  •  마일스 쉬플리의 집.
  •  뉴 스코틀랜드 야드.

 

 더 스쿱에서 빠져나온 뒤, 먼저 배링턴 경위에게 연락해서 내일의 약속을 잡았다. 그리고 오늘의 남은 시간은 쉬플리의 집을 방문하는 데 쓰기로 했다.

 

 

 

 

 마일스 쉬플리의 집. 첼시.

 문을 두드리자 허리가 굽은 노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쉬플리의 어머니인듯했다. 우리는 그림을 보러 왔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안에 들어서고 나서 제일 처음 느낀 것은 집 전체에서 나는 기묘한 냄새였다. 농장 출신 노라 에버트는 그것이 파충류 냄새와 비슷하다고 짐작했다. 냄새는 집 전체를 떠다녔다.

 조금 기다리자 비쩍 마른 남자가 계단 위에서 내려왔다. 마일스 쉬플리는 말을 심하게 더듬고, 눈을 잘 마주치지 않는 불안정한 사내였다. 그는 다락방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작업실로 쓰이는 다락방은 휑했다. 천에 덮인 그림이 여럿. 가운데에는 이젤과 캔버스가 놓여 있었다. 쉬플리는 떨리는 손으로 자기 그림을 보여주었다. 대강 글로 요약해두자면:

 

-초록색 가스가 뿜어져 나오는 약병들 앞에, 파충류 인간이 덩어리지고 피투성이인 무언가를 해부하고 있는 그림.

-고대 이집트의 행렬 그림. 수많은 이들이 무릎을 꿇은 앞에 파라오가 탄 황금 전차가 지나간다. 파라오는 검은색, 금색으로 된 로브를 입은 뒷모습. 전차의 뒤에는 배가 갈라진 사람이 양쪽에 말뚝으로 꿰여 있다. 자칼 무리가 그 배에서 흘러나온 내장을 쫓는다.

-언덕 위 하얀 건물과 호수 그림. 거대한 용이 솟아올라 있고, 그 아래 수백 명의 사람이 묻혔다. 서로 물어뜯으면서 피와 내장을 쏟는다. 

-한밤중의 숲 그림. 모닥불 주위를 벌거벗은 남녀가 뛰어다닌다. 노란 달이 떴다. 불꽃 위에 염소 머리를 한 남자가 보이고, 그 앞에 세 명의 소녀가 선다. 그 환영이 긴 팔을 뻗어서 마술을 부린다.

-인신 공양 의식 그림. 검은 로브를 입은 사람이 제물의 배를 가른다. 제물의 가슴에는 문양이 새겨져 있다. —나중에 들었는데, 제이덕은 이 문양이 순간 꿈틀거리는 환상을 보았다.— 피가 바닥에 놓인 책으로 떨어진다. 그 책에는 벌레가 우글거린다.

-높은 산 위의 괴물 그림. 머리는 피에 젖은 거대한 촉수 한 줄기 같다. 그 산에는 사원이 있다. 사원 근처에서 사람 형상들이 손을 하늘로 뻗고 애원한다. 사람 형상들의 머리에도 촉수 비슷한 것이 돋아 있다. 자세히 보면 그것은 촉수가 붙은 의식용 가면이다.

 

 

 심약한 화가의 겉모습이 품고 있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잔학한 이미지였다. 비현실적인 입체감이 있었다. 나는 쉬플리의 그림이 싫었다. 거칠고 강렬한 붓 터치가 망막에 폭력적으로 인상을 새겨넣는 듯했다. 불쾌하고 끔찍하고 유독한 인상을. 그저 본다는 행위 하나를 선택한 결과로 감내하기에는 지나치고 부당한 폭력이다.

 나는 그림에 집중하지 않기 위해 쉬플리에게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 어디서 영감을 얻었냐는 질문에, 쉬플리는 자기가 과거의 편린을 보고 그린 것이라 대답했다. 그는 지나치게 긴장했고, 불안해했다. 그 밖의 다른 질문에 대한 답은 대부분 얼버무렸고…… 그의 옆에는 대조적으로 평온한 얼굴의 노인이 서 있었다. 나는 무심코 시선을 떨구었다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경험을 했다.

 그림자가 이상했다. 주변이 어두웠기에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왜소한 노인에게서 생길 크기의 그것이 아니었다. 의심을 가지고 살피자 상황이 더 분명하게 보였다. 두 사람은 가족인 척 대화를 했으나, 아들은 분명 엄마에게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집안에 가득 찬 역겨운 냄새와 끔찍한 그림 때문에 상태가 나빠진 노라는 결국 바닥에 토했다. 속을 게우기 위해 고개를 숙였던데다 이미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던 노라는, 자기가 본 것을 표현해버렸다. 그러니까, 그림자와 노인을 번갈아 손가락질했다.

 노인은 무표정했다. 뭐라고 말을 중얼거렸던가? 노라는 순식간에 마법에 걸린 것처럼 차분해졌다. 나는 경악한 눈으로 노인을 바라봤지만, 거기에 노인은 없었다. 인간의 형상이 찌그러지더니 몸집이 부풀었다. 허물 벗듯 드러난 모습은 비늘 달린 괴물이었다.

 나는 제이덕이 괴물에게 다가가려는 걸 말리며, 다급하게 총부리를 들이댔다. 당신 뭡니까?

 그것은 쉭쉭 거리는 소리로 말했다. 복종해라. 인간. 복종해.

 내가 바라던 대답은 아니다.

 

 "싫어."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쉬플리는 잔뜩 겁에 질려, 벽에 구겨져 들어가려고 했다. 탄환이 질긴 가죽을 뚫었다. 상처에서 끈적한 피가 흘렀다. 괴물의 표정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총알이 상처를 냈다는 것은, 죽일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긍정적으로 생각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무언가 내 머릿속으로 직접 말을 걸었다. 그 불쾌한 침입에 대한 감상을 말로 뱉기도 전에 극심한 통증이 온몸을 덮쳤다. 끔찍했다. 산 채로 천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지는 기분이었다. 목 안쪽으로 신맛이 났고, 전신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다. 눈에 피가 맺혀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온통 흐리고 붉었다. 이상하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텐데, 얼굴이 하나 있었다. 보고 싶지 않았는데, 고통 때문에 벌레처럼 나약해져서 보는 걸 멈출 수가 없다. …….

 아주 어렸을 적의 나는 너무 겁에 질렸을 때 그대로 가만히 있기만 하면, 그러니까 숨도 쉬지 않고 눈도 깜빡이지 않으면, 무서운 일이 그대로 지나가 줄 거라고 믿었다.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숨을 참으면서, 나는 이대로 돌이 될 테니까, 세상은 나를 모른 척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빌었다. 내가 정말로 굳어서가 아니라 긴장과 두려움 때문에 죽어버리기 전에, 윌리엄은 늘 먼저 나를 찾아냈다. 형에게는 그런 이상한 초능력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하지만, 하필이면. 지금. 왜? 

 

 

 한참 지나서야 다시 정신이 들었다. 환상도 없고, 고통은 견딜만한 정도로 줄어들었다. 주변은 지독한 파충류 냄새가 났고 몹시 어두컴컴했다. 노라는 있었던 일을 기억하지 못했다. 우리는 꽁꽁 묶인 채 벽 안쪽의 공간에 갇혀 있었다. 문 너머에서 쉬플리와 괴물의 대화가 들렸다. 괴물은 쉬플리에게 우리를 감시할 것을 명령하고 떠났다.

 몇 마디 속삭임 끝에 겨우 밧줄을 풀고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방의 선반 위에는 어두운 물질이 든 유리병이 몇 개. 벽에는 기묘한 기호가 가득하고 한쪽에는 금속판이 달린, 돌 욕조가 있었다. 욕조를 살짝 열어봤다가 잘린 머리와 인사하고 다시 덮어두었다. 호기심이 일라이저 웨버를 죽인다. 

 한참 생각에 골몰하던 제이덕은, 우릴 가둔 괴물에 관한 내용을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아주 고대에 지구에 살았던 종족인 뱀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런 존재가 런던 한복판에서 화가와 함께 살고 있다니. 여러모로 나의 이해를 초월하는 사건이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벽 너머의 쉬플리를 설득했다. 괴물에게 협박당하고 있다면 도와주겠노라고,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냐고 얘기했다. 설득이 잘 먹혀들어서, 우리는 괴물이 뒤뜰로 나간 사이 부엌에 매복할 수 있었다.

 그 짧은 사이 괴물은 다시 노인의 거죽을 쓰고 있었다. 유약한 노인의 겉모습에 잠깐 마음이 흔들렸으나 결국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아까 같은 경험은 다시는, 절대로 사양이었다. 총에 맞자 인두겁이 벗겨졌다. 찢어지는 비명. 괴물은 온 집안을 기름때처럼 덮었던 그 지독한 악취를 풍기면서 무너져내렸다.

 

 

 이 뒤로는 마일스 쉬플리에게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다. 그가 반쯤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말했기에 정황이 다소 왜곡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이 괴물은 갑자기 쉬플리에게 찾아와서, 굉장한 소재를 보여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을 만들어주었다. 쉬플리는 괴물이 준 약을 사용해 과거에 다녀왔다. 과거의 충격적인 장면들은 그의 뇌에 큰 상흔을 남겼고, 화가는 이상한 그림을 잔뜩 그렸다. 괴물은 화가의 어머니를 잡아먹고 어머니의 모습으로 변했다.

 

 쉬플리는 지저분한 방에서 마지막으로 조금 남은 녹색의 약을 꺼내주었다. 그리고 잠겨 있던 다락의 벽장도 열었다. 벽장 안에는 천에 덮인 커다란 캔버스가 있었다. 뱀의 제단이라는 제목의 미완성품으로, 괴물의 명령을 듣고 그리고 있었다고 한다.

 뱀이 들끓는 고대의 늪지대를 그린 그림이었다. 늪지 중앙의 작은 섬에는 석제 제단이 있었다. 속이 매스껍다 싶더니, 문득 그림이 일렁였다. 벌레 울음, 물소리가 멀었다가 가까워졌다. 줄기가 바람결에 흔들리고, 꿈틀대는 뱀 비늘이 어지러이 빛을 산란했다. 제단은 그 빛을 머금었다…… 풍경이 서서히 현실을 잠식했다. 흡사 그림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재빨리 나를 붙잡아준 제이덕이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제이덕이 살펴본 결과 그림 속 식물들은 2억만 년 전 페름기 시대의 것이라고 한다. 뱀 인간이 정말 고대의 존재라면 설명이 되는 이야기다. 인간 화가를 시켜 그들에게 남은 어떤 유산을 그려내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괴물이 죽은 이상 목적은 영영 알 수 없지만, 그 어떤 낙관주의자도 그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이유이리라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 그림은 이제 산산이 조각나서 더는 찾을 수 없다.

 쉬플리는 죽음숭배교단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그림들은 분명 교단이 묘사하는 어두운 신과 연관되어 있다. 더 깊게 엮이지 않는 편이 이 화가에게도 좋을 것이다.

 밖으로 나왔을 즈음에는 새벽이었다. 어떻게 숙소로 돌아왔는지도 잘 모를 만큼 정신이 없었다.

 

 

 

 

 

 

1925. 2. 21

 

 아침 일찍 센트럴 뉴스 에이전시에 들렀다. 간단하게 몇 가지를 알아냈다:

 -1년 전 즈음에 일명 이집트 살인사건을 조사하던 그레고리 먼든 경위의 실종 사건과 관련된 기사. 경위는 목격자도 흔적도 없이 증발하였다.

 -이집트인들이 살해당한 사건에 대한 제보를 부탁하는 기사도 있다.

 

 

 점심을 먹고 뉴 스코틀랜드 야드로 배링턴 경위를 만나러 갔다.

 그는 50대 정도 되는, 격무에 치인 남자였다. 처음에는 우리를 신용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마도 정보를 캐내서 기사를 쓰려 한다고 의심하는 것 같았다. 죽음숭배교단에 대한 얘기는 허무맹랑한 희언으로 취급했다. 제이덕의 학위 검증과 장구한 설득이 있고 나서야 제대로 사건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이집트 살인사건: 피해자가 주로 이집트인(19명 중 17명)이고 비슷한 흉기에 찔려 죽은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

 -수법: 머리와 몸통 곳곳에 맞고 찔린 상처가 있다. 거대한 못이나 바늘이 달린 몽둥이가 흉기일 것으로 추정.

 피해자 중에서 소호에 있는 블루 피라미드 클럽(영국 내 이집트인들이 많이 모이는 클럽) 단골들이 많아 따로 감시해본 적이 있지만,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관계자들의 자문: 종교 살인일 수 있음을 염두에 두고 펜휴 재단의 에드워드 개비건과 대화했다. ‘검은 파라오의 결사’라는 단체의 수법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 단체는 이미 수백 년 전에 사라졌다.

 자흐라 샤피크라는 향신료 상인과도 이야기를 해보았는데(펜휴 재단에서 일한 적 있음, 이집트인), 역시나 옛날얘기에나 나오지 실제로 있는 종교이지는 않을 거라고 한다. 그가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아 미행해봤지만, 역시나 건진 건 없었다.

 -목격자의 증언: 소란스러워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봤더니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데 피해자가 ‘호텝’이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고대 이집트어로 휴식이나 평화를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먼든 경위가 1년 전에 그렇게 사라진 후 배링턴이 뒤이어 사건을 맡아 조사하게 되었다. 먼든 경위는 너무 깊은 곳까지 발을 들였던 것일까? 뉴욕에서 벌어졌던 사건과도 여러모로 겹치는 부분이 있다. 또 못이 박힌 몽둥이라면, 콜즈 교수가 얘기했던 오스트레일리아의 종교도 연상된다. 생각해볼 점이 많다.

 우리는 더 자세히 알아보고, 제보할 게 생기면 꼭 제보를 드리겠다고 약속하고 서를 빠져나왔다.

 

 

 

 저녁에는 드디어 노라가 궁금해하던 박람회에 들렀는데, 제이덕이 헛것을 보는 바람에 빨리 숙소에 돌아가 쉬게 되었다. 그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거대한 여인, 팔에 코브라를 감은 여인의 환상을 설명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앉아서는 아내에게 장문의 편지를 썼다.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말씨도 차분했다. 어쩌면 연구의 끝이 보이는 탓일까? 좋은 신호일까.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상태긴 한데, 노라는 내심 안도한 듯하다. 나는 어디까지 낙관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좋은 환각은 없다. 환각이 좋을 수는 없다. 그 내용이 어떻건 간에 현실에 혼란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이덕이니만큼, 더 나은 쪽을 희망하게 된다.

 

 

 우리는 늦은 시간에 블루 피라미드 클럽으로 향했다.

 1층에는 청과상이 있고, 계단이나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 2층에 클럽이 있다. 

 문 앞에는 문지기가 서서 회원 카드 확인을 했다. 회원제 클럽으로, 가입이 필요했다. 우리는 입장 데스크에서 따로 돈을 내고 명단에 적당한 가명을 썼다. 빠르게 훑어본 결과, 그 명단에서 자흐라 샤피크와 에드워드 개비건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들어가서 적당히 자리를 잡고 손님들을 살펴보았다. 화려한 밸리 댄스 공연이 끝나고, 댄서들이 무대에서 내려와 손님들 사이를 누볐다. 무용수에게 손을 대기라도 하면 경비원에게 끌려갔는데, 개중 어떤 손님들은 그 규칙에 좌우되지 않는 특별 대우를 받는 것 같았다.

 웨이터에게 그 손님들에 관해 슬쩍 물어보았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굴하지 않고 바텐더에게도 가서, 적당히 아무개 작가인 척 수작을 걸었다. 그러다 비싼 술을 사면 내밀한 공간으로 안내해준다는 제안을 들었다. 나는 반신반의했지만, 망설여봤자 얻을 수 있는 것도 없지 싶었다.

 안내를 받은 곳은 바 뒤쪽을 통해 들어가는, 아늑하고 불건전한 방이었다. 나는 얼마 기다리지도 않고 덩치 큰 남자 둘을 맞이할 수 있었다. 그들은 말 한마디 없이 바로 내게 덤벼들었다. 내가 총을 꺼냈는데도 주춤하는 기색이 없어, 결국 위협용으로 발포했다. 총성이 울리고, 스쳐서 피가 났는데도 둘은 포기할 줄 몰랐다.

 남자 하나가 옆에서 의자를 들고 내 머리를 후려쳤다. 눈앞에 불이 번쩍하고, 의자가 그대로 작살났다. 거의 동시에 문이 활짝 열렸다. 한쪽 눈앞이 축축해져서 잘 보이지 않았던 데다 역광이 져서,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일라이저 씨, 거기 있어요? 괜찮아요?”

 

 조금 어눌한 듯 용감한,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 안도감에 맥이 풀렸다.

 

 “아, 예. 괜찮아요.”

 

 달릴 수 있다는 의미다. 나는 앞의 남자를 밀치고 제이덕이 있는 곳까지 달렸다. 우리는 그대로 정신없이 도망쳤다. 어디로든 뛰어들어 숨었다. 아마 강변의 수풀이었던 것 같다. 이어서 뒤쫓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지나가고, 곧 조용해졌다.

 우리는 긴장 후의 늘어짐 상태로 조금 떠들었다. 그런 데는 어쩌려고 따라갔느냐고 혼나기도 했다. 처음부터 함정이었거나, 내가 티가 많이 났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아무튼, 블루 피라미드 클럽이 수상한 교단과 관련된 장소인 것은 확실해졌다. 노라가 손수건을 꺼내서 상처를 닦아줬다. 제이덕은 그 사이 무용수 한 사람에게 쪽지를 받았다고 한다. 얻은 게 아예 없지는 않았던 셈이다. 내용은 이랬다. ‘자정에 아래쪽 길가 근처 다리 밑에서 봐요.’

 

 

 

 자정.

 다리 밑의 무용수는 자신을 얄레샤 엣삼이라고 소개했다.

 얄레샤의 남자친구는 이집트 살인의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얄레샤에게 찝쩍거리던 손님 중 하나를 위협했다가 끔찍한 보복 살인을 당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은 것은 복수에의 의지 때문이다. 다만 어설프게 시도했다가 겪게 될 교단의 보복도 두렵거니와, 경찰 내에 조력자가 있을 수 있다는 위험 때문에 직접 고발하지 못하고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얄레샤가 알아차릴 만큼 우리는…… 그래. 티가 많이 났던 모양이다.

 얄레샤는 우리에게 가게에 대한 정보를 몇 가지 알려주었다.

 

 -한 달에 한 번 자정 전후에 트럭이 와서 손님들을 태우고 간다. 목적지는 런던 밖의 어딘가.

 -손님은 전부 검은 파라오의 결사 소속이며, 자흐라 샤피크가 그들을 이끌고 있다. 자흐라 샤피크는 엠파이어 향신료 가게 주인이다.

 -직원들도 대부분 검은 파라오의 결사 소속이다. 전부는 아니지만. 직원 중 교인이 아닌 사람들은 못 들어가는 공간은 1층의 창고.

 

 

 얄레샤를 돌려보내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변을 살폈다. 우리는 줄곧 감시당하곤 했으니. 누군가 얄레샤와 우리와 만난 장면을 보기라도 했다면 큰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리 건너편에서 사람 셋 정도가 그가 사라진 쪽으로 향하는 것이 보였다. 기우이길 바라면서도 황급히 뒤를 쫓았다.

 그들은 어두운 골목에서 얄레샤를 습격했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뒤따라갔기에 비교적 손쉽게 이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 얄레샤는 눈물범벅인 얼굴로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얄레샤를 진정시키면서, 우리는 쓰러진 습격자들의 처우에 대해 고민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했지만 결국 현실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방향은 경찰에 넘기는 것 정도였다.

 하지만 경찰이 제대로 대처할까? 고작해야 습격 미수라면. 이들은 언제든 풀려나거나 교단의 다른 사람들과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도와줄 사람 하나 없는 얄레샤 엣삼은 순식간에 처리당할 테고. 우리는 떠나면 그만이지만, 얄레샤는 계속 런던에 살아야 한다. 이 셋이 자기가 본 걸 말하게 둘 수는 없다.

 주주 하우스 지하에서 봤던 시체들이 떠올랐다. 죽은 뒤에도 자유롭지 못했던 사람들. 그 위로 잭슨 엘리어스의 마지막 모습도 겹쳤다.

 

 

 뉴욕의 부두에서 나를 노려보던 싸늘한 눈빛.

 런던 행 내내 나는 그 눈빛의 의미에 대해 골몰했다.

 그들이 믿는 신이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것, 안다. 그러나 도시의 그림자에 숨어 살면서 실제로 사람을 죽이고 배를 가르는 것은 인간이다. 우리는 자발적으로 인간성을 잃은 인간들과 싸우고 있다. 인간 거죽을 덮어쓴 뱀 인간과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들은 사람인 척하지만 사실은 사람이 아니다. 쉽게 뿌리뽑히지도 않는다. 반푼어치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믿으며 떠나는 마지막 순간에도 나를 노려보고 있다. 이제 편안한 밤은 다시 없을 것이다.

 

 얄레샤가 너무 겁에 질려 있어서, 우리 숙소에 하룻밤 머무르게 하기로 했다. 가는 동안 감시를 조심하라고 단단히 일러두고 세 사람을 먼저 돌려보냈다.

 물론 나는 경찰을 부르지 않았다.

 대신 습격자들의 소지품을 뒤졌다. 대형 단도와 몽둥이가 하나씩 나왔다. 이들이 빈손이었더라면 생각이 바뀌었을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들이 무기를 가졌다는 사실이 나 자신을 합리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기는 했다.

 마침 주변에 제법 큰 쓰레기통이 있었다. 나는 아주 세심한 동작으로 쓰러진 몸을 옮겼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커다란 단도를 썼다. 한 명씩 쓰레기통에 넣고 조심스럽게 목을 찔렀다. 손에 쥔 흉기를 타고, 피부 아래 연약한 살과 단단한 뼈 사이로 불청객을 욱여넣는 느낌이 선명하게 전해졌다.

 남자는 고통을 느꼈는지 눈을 부릅떴다. 그 얼굴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마치 뇌에 사진으로 찍어 남긴듯하다. 그렇게 어두운 밤중이었는데. 뭐라 비명을 지르려고 했던 것 같은데, 피거품 섞인 목소리는 말이 되지 못하고 울컥울컥 쏟아졌다. 눈에 들어왔던 빛은 금방 꺼졌다. 눈을 뜬 그대로 절명해서, 표정은 마치 왜? 하고 묻는 것 같았다. 어째서? 사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질문인데. 하지만 굳이 깨워서 물어보고 싶지는 않았다. 대화를 시도하는 바보 같은 짓을 해서 이들을 사람처럼 느끼고 싶지 않았다. 물론 이들은 내 미약하고 말도 안 되는 소망처럼, 죽었다고 껍질이 벗겨져 괴물의 본모습을 드러내거나 해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뿐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생각보다 금방 해낼 수 있었다. 바닥으로 피가 많이 흘렀기에 밟지 않도록 조심했다. 손발과 머리는 줄곧 찼다. 나는 꽤 다양한 살인자를 만났고 그들에 대한 기사를 썼다. 그들과 그들의 실수를 알았다. 되도록 생각을 두 번 세 번 하지 않고, 알고 있는 대로만 행동했다. 결과적으로 나는 도망치는 사람이 아니라 산책 나온 사람처럼 걸을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굴 수 있었고, 그런 자신에게 놀랐다.

 그늘 속에서 눈을 감으면 아직도 부두의 그 눈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내 이름은 일라이저 웨버.

 

 이것은 나의 기록이다.

 한때는 사람의, 사람을 위한 밝고 명징한 기호와 세상을 믿었다.

 살아온 세월이 그리 길지는 않아도 언제나 그런 것들을 위해 발을 내딛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어떤 것은 어둠 속에 영원히 묻어 두어야만 한다.

 

 

 

 

 

 제이덕이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온몸이 꽁꽁 얼었다. 걱정을 시켰구나 싶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방에서는 알코올 향과 섞인 달짝지근한 냄새가 조금 났다. 얄레샤는 일찍 곯아떨어져 있었다. 노라가 위로를 잘해준 모양이었다.

 

 "얄레샤가 열아홉 살이래요. 남자친구는 고작 스물하나였대요."

 

 그렇게 말할 때 노라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갈라진 것처럼 들렸다.

 씻으러 들어갔다가 조금 놀랐다. 온몸에 기묘한 상처 자국 같은 게 남아 있었다. 그 끔찍한 주문의 여파일까? 자각하지 못했는데, 상처는 서서히 희미해지는 중인 것 같았다. 별수 없이 긴소매를 골라 입었다. 노라가 붕대를 새로 감아주는 동안, 나는 생각해뒀던 변명을 읊조렸다. 경찰을 불렀고, 머리의 상처를 빌미로, 내가 이들에게 공격받았다고 신고했다는 식이다.

 그리고 바로 누우려 했는데, 제이덕이 연구 때문인지 많이 심란해해서 함께 술을 좀 마셨다. 새삼, 이 애들과도 기묘한 애착이 생겨버린 것이다. 비정상적인 상황에 너무 오래, 함께 노출되어서겠지. 도움을 받고 도움을 준다. 믿고 의지한다. 혼자 내키는 대로 나다닐 때는 그저 머리로만 알던 문장이다. 밝은 창가에 얼굴을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 든다.

 나는 사람을 지키고 싶다. 인간이 인간을 돕는 것은 본성이다. 그리고 나는 지옥에 떨어질 거다. 

 

 

 

 

 

 

1925. 2. 22

 

 제이덕이 연구를 마무리했다. 아침 일찍, 이룬 성과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에는 기묘한 주문이 하나 들어있다고 한다. 

 

 

 나이젤 블랙웰.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

쉼바 생성. 마력 12. 이성 1d6. 꼬박 하루의 시전 시간. 이 주문의 유래는 케냐. 케냐의 키쿠유족 주술사가 개발한 주문으로, 언데드 하인을 만든다. 쉼바가 될 사람은 의식에 따라 상처를 내서 죽여야 한다. 의식의 순서나 내용도 책 안에 쓰여있다. 시체의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18~20시간 동안 시체를 굽어보면서 주문을 외워야 한다. 되살아난 존재는 간단한 명령을 듣는다. 쉼바는 점점 썩어서 못쓰게 되기 때문에 하인이 필요하면 계속 사람을 죽여 만들어야 한다. 

 

 제이덕은 우리에게 일전에 읽었던 키쿠유족에 대한 기사를 주지시켰다. 주주하우스. 쉼바. 키쿠유족. 칼라일 탐사대. 어떤 미약한 연결고리가 보인다. 만약 키쿠유족 또한 이 사악한 교단의 일원이라면? 애초에 칼라일 탐사대의 사고 기사가 거짓말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마크 셀커크 중위와 키쿠유족. 두 사람의 증언이 모순된다면 둘 중 누구 하나의 말은 필연적으로 거짓일 터다.

 우리는 새벽에 블루 피라미드 1층의 창고를 가보기로 하고, 일과를 시작했다.

 

 

 

 

 노라의 강권으로 병원을 들렀다. 그리고 쇼핑을 조금 했다. 이젠 거의 강박적인 시선으로 감시를 찾는다. 아침 일찍부터 따라붙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노려보자, 곧장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숙소로 돌아온 뒤, 노라는 거절하는 얄레샤에게 이것저것 잔뜩 안겨서 보냈다.

 

 하오를 바쁘게 보내기 위해서, 우리는 수상한 펜휴 재단을 다시 찾아갔다. 오늘은 개비건 씨가 계시느냐고 안내 데스크에 슬그머니 물어보았다. 개비건에 대한 것은 개인 비서인 토머스 키너리가 전부 처리한다는 답을 들었다. 일단 그의 사무실 위치를 알아두고, 펜휴 재단을 돌아다보았다.

 두 사람이 뒷마당에서 묘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보통 건물과는 다르게 엉뚱한 위치에 환기 파이프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냥 스쳐 지나가기에는 찜찜해서, 그 부근의 벽을 따라 건물을 조금 돌았다. 결국은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물론 문이 잠겨 있었고, 여러모로 시도를 해봤지만 열 수는 없었다. 조금 고민하다가 승강기로 가서 지하층 표시가 있는지 살폈다. 표시는 있는데 버튼이 눌리지 않았다. 이리저리 건드리다 보니 제이덕이 뭘 잘못 만졌는지 지하층을 향해 엘리베이터가 움직였다.

 

 지하에는 소각로, 석탄 창고, 잡동사니가 쌓인 평범한 창고 정도가 있었다. 석탄 창고의 벽 안쪽으로 전기선, 배기 파이프, 냉온수 파이프가 들어간 것이 보였다. 잡동사니 창고는 말 그대로 잡동사니로 가득했다. 하지만 명징한 의혹을 가지고 선반에 있는 물건을 치우자 곧 틈새가 보였다. 문이 있었다. 양쪽으로 열리는 쌍여닫이문.

 조심스럽게 열었다. 안쪽은 캄캄했다. 손전등으로 비춰서 내부를 훑었다. 초 연기 냄새가 났다. 사방에 잘 관리된 가구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먼지도 적고, 한쪽에는 상자들, 벽에는 그림이 여럿 걸려 있었다. 스위치를 찾아 누르자 가운데에 있는 조명에 불이 들어왔다.

 

 우리는 이 숨겨진 방을 아주 샅샅이 뒤졌다. 책상과 가까운 쪽에 놓인 상자에는 꽤 많은 비상식량, 옷과 식수 등의 물품이 들어있었다. 책상 밑 금속 상자에는 잡다한 서류가 가득했다. 특히 영수증이 많이 나왔다. 특기할만한 것은 이 정도다.

 

 

 -헨슨 공업에 목재, 석탄, 철괴, 구리 선, 고가의 주철 금고를 설치한 영수증(사진).

 -트럭을 6개월 임대한 영수증.

 -라임하우스 로프메이커스 필즈의 푸닛 초다리가 아이보리 윈드 호로 보내는 편지. 상하이로 보내는 다양한 골동품의 보관과 배송에 관한 내용.

 -영수증 더미 밑의 명함(사진).

 

 

 

 책상 서랍에는 32구경 리볼버와 위조 여권 2개, 상당한 양의 사용된 수표가 들어있었다. 5, 10파운드 짜리인데 총액은 어림잡아 2000파운드 정도. 발행인은 펜휴 재단.

 

 반대쪽에는 뚜껑이 열리거나 비어 있는 상자 여럿 있었다. 개중 닫히고 스텐실이 붙은 큰 나무 상자를 살폈다. 호팡 수출입 상사 카오양 가 15번지, 상하이, 중국. 작은 글씨로 ‘호팡 대인께.’라고 쓰여있다. 안에 든 것은 중국식 삿갓을 쓴 둥그런 생물체를 조각한 청동상이다. 삿갓 아래에서 촉수 다발이 뻗어 나오는 모양새다. 청동상인데 굉장히 차갑고 미끌거리는 질감이다.

 그 옆에 있던 작은 상자는 이랬다. 랜돌프 운송회사. 포트 다윈, 노던 준주, 호주. 길쭉한 사슴 머리에 날개가 달린 존재를 도안화한 마크가 스텐실에 찍혀 있다. 스텐실 옆에 ‘랜돌프 씨 직접 수령 요망.’이라고 쓰여 있었다. 안에는 든 것은 40cm 정도 되는 뚱뚱한 용의 조각. 용의 머리에도 촉수가 잔뜩 달렸고, 재질은 불명이다. 그걸 집어 든 순간, 팔과 몸통에 이상하게 찌릿한 감각이 쫙 퍼졌다. 순간 깜짝 놀라서 조각상을 떨어트렸다. 어리둥절해서 손을 살폈지만, 어제 봤던 주문의 미미한 흔적이 남아있을 뿐 달라진 점은 없었다. 영 찜찜해서 이 조각상을 챙겼다.

 그리고 고급 호두나무로 만든 책장. 유리문이 달려 있고 그 안에 책이나 두루마리가 잔뜩 쌓여 있었다. 돌로 만든 작은 병이 하나 있었는데, 안에 회색 재 같은 것이 들었다. 책과 두루마리는 몹시 다양한 언어로 되어있었다. 아랍어, 라틴어, 중세 프랑스어, 고대 영어, 그리스어, 이집트 상형문자…….

 라틴어로 된 두루마리를 제이덕이 읽었는데, 신을 찬양하는 시라고 했다. 고대 영어로 된 두루마리 또한 검은 남자라는 신을 찬양하는 시였다. 우리가 읽을 수 있었던, 스페인어와 영어로 된 책들은 대부분 비슷한 내용이다.

 

 

 제이덕이 알려준 것들을 요약해 적어둔다.

 -리베르 이보니스. 가죽 장정에 잠금쇠. 가장자리가 검게 칠해져 있음. 퀴퀴한 냄새가 나고 페이지가 드문드문 비었다. 고대의 조형이나 존재의 원초적 물질, 자연철학에 대한 논의나 실험을 말한다. 사코체라는 존재가 언급된다. 사코체 본인이 직접 해설과 견해를 남겼는데, 몇몇 문구는 라틴어가 아닌 알 수 없는 언어로 쓰여 있다. 사코체는 스스로가 파즈 루자라고 알려져 있다고 적었다.

 -쟌의 서. 영어. 4절판. 유황 냄새가 난다. 저자, 번역자 미상. 샴발라에서 가장 고귀한 대스승들의 현명하고도 덕망 높은 말들을 적은 책이다. 벨라로스라는 행성에서 시작된 이후 여러 세대에 걸쳐서 지구에서 끝나는 어떤 의식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다양한 문명의 융성과 몰락을 예언한다. 푸르고 흰 물 위를 걷는 자, 유혹하는 혼돈의 힘, 피에 젖은 혀, 뜨거운 산에 걸터앉은 자라는 존재가 언급된다. 공허 현자의 조언이라는 주문도 적혀 있는 듯하다.

 제이덕이 알기로는, 푸르고 흰 물 위를 걷는 자란 검은 파라오를 의미한다. 뜨거운 산에 걸터앉은 자, 피에 젖은 혀, 유혹하는 혼돈의 힘은 전부 피투성이 혀를 뜻하는 말이다.

 

 

 원숭이랑 파충류를 섞어놓은 듯한 기묘한 생물을 조각한 상자 안에는 장식된 은 단도 두 개가 들어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들은 대부분 고대 회화였다. 진짜 전시장처럼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날개가 달린 검은 생물의 조각은 썩어 문드러진 것 같은 형상이었다. 역시나 날개가 있는 거대한 짐승을 그린 회화도 있었다. 짐승은 용과 흡사하고 입에는 송곳니가 빼곡했다. 또 뒤틀린 얼굴에 거대한 눈이 달린 괴물, 붉은빛의 군집이 검은 인간형 생물 주위에 모여 있는 그림도 있었다.

 제이덕에 따르면 이 작품들은 전부 엄청나게 오래된 것이다. 기원전 900~700년 사이(이집트 22왕조 부근)로 추정된다. 개중 파라오의 얼굴에 촉수 다발이 달린 벽화가 하나 있었는데, 이건 제3왕조 시대의 작품이라고 한다.

 

 사진을 찍고 있자니 저 바깥에서부터 인기척이 들렸다. 우리는 황급히 불을 끄고, 한쪽 벽의 계단으로 올라갔다. 나와 제이덕이 위쪽의 문을 힘으로 열어보려 용쓰는 동안 똑똑한 노라가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문이 저절로 열렸다. 빠져나와 둘러보니, 파라오의 형태로 된 석관이 문을 대신하고 있었다. 긴가민가하다 파라오의 눈을 누르자 석관이 다시 닫혔다.

 주변은 짐이 가득한 창고였다. 상자들 너머로 나가는 문이 보였다. 바닥에는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는데, 석관에서부터 이어진 먼지 없는 길이 한 줄 있었다. 그 길은 갑작스레 벽에서 끝났다. 나와 제이덕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 길을 따라가 보았다.

 벽 너머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숨을 죽이고 그들이 나누는 얘기를 들었다. 호칭으로 미루어보아 비서가 에드워드 개비건에게 무언가를 보고하는 듯했다. 사업 논의가 좀 이어지더니, 뒤이어 블루 피라미드 클럽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블루 피라미드에서 크게 난리가 났고, 귀찮은 쥐새끼들이 도망갔으며…… 잭슨 엘리어스의 이름도 언급되었다. 지독한 작가랑 얽혀서 운이 안 좋다는 불평이었는데, 하하. 공감이다.

 그러고 있자니 노라가 문 쪽에서 손짓했다. 우리는 문밖이 고요해진 틈을 타 잽싸게 빠져나왔다.

 

 

 숙소로 돌아와서 주워 온 물건 몇 개를 대강 펼쳐보았다. 뚱뚱한 용의 조각상, 쟌의 서, 은 단도 두 개, 돌로 된 병, 쉬플리의 집에서 가져온 녹색 병과 검은색 병. 영수증과 편지. 그리고 육중한 피로감. 예상치 못한 모험을 한 우리는 블루 피라미드 클럽에 가기 전에 잠깐 눈을 붙이기로 합의했다.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만약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라면

아직 엔딩을 안 보셨다면

미국편 후기부터는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조심합시다!

미국편 1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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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잭슨 엘리어스의 유언에 따라 구체적인 기금을 받는 탐사대로 재조직되었다. 붙는 이름이 바뀌었을 뿐 여전히, 어느 한구석 특별히 빼어날 것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 이름이 새삼스럽게 감동을 주지는 않는다. 그래도 거기에는 다른 무게감이 있었다. 무게감. 어떤 사건들은 한번 겪고 나면 결코 예전과 같은 삶으로는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 그것 하나만은 알게 되었다는 간략한 요약. 우리는 그 앎의 굴레, 같은 슬픔을 공유했다.

 

 

 수집한 자료를 정리한 보드를 펼쳤다. 몇 가지 의문들, 수상한 증거들이 어지러이 놓여있었다. 이번에는 그중에서도 제정신으로 쓰인 것 같지 않던 잭슨의 메모에 있는 ‘칼라일 가문의 금고’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칼라일 가문의 금고라면 분명 저택에 있을 터였다. 도둑질할 재주는 없으니 당당히 부딪혀야만 했다. 칼라일 저택은 삼엄한 경비 속에 요새 마냥 보호받고 있었다.

 우리는 칼라일 탐사대에 대해 알려지지 않은 정보를 가지고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칼라일 저택 사람들은 허풍선이들에게 자주 시달리는 모양인지, 우리의 방문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쫓겨나지 않기 위해 제이덕의 영민함과 ‘학위’를 팔아야 했다. 텍사스 대학 만세.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에리카 칼라일은, 이 집에서 만난 다른 모든 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루빨리 귀찮은 불청객들을 쫓아내려던 그를 자리에 앉힌 것은 로저 칼라일이 살아있을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잭슨이 남긴 자료들을 십분 활용하여 에리카를 설득했다. 셀커크 중위와의 인터뷰(개중 정확히 “시체 중 백인은 없었다”는 부분), 살아있는 잭 브레이디가 목격되었다는 증언이 특히 유용했다. 에리카 칼라일은 칼라일 탐사대와 죽음숭배교단의 접촉 가능성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얘기를 하는 목적이 뭐지요? 돈을 바라는 건가요?” 이런 말이 에리카의 입에서 나왔을 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저희는 칼라일 탐사대와 접촉했을 가능성이 있는 특정한 교단에 대해 조사하고 있습니다. 칼라일의 금고 안에 있는 책을 보고 싶습니다.” 해서, 대충 이렇게 대답하게 된 것이다.

 

 에리카 칼라일은 금고에 대한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한 적 없다며 놀랐다. 아무에게도 한 적이 없다고? 그렇다면 잭슨 엘리어스는 어떻게 알았을까. 금고에 대해 말할 때 잭슨의 메모는 제정신인 사람 같지 않았다. 환시일까? 열띤 백일몽 속에서, 꿈속에서, 어쩌면 광기 속에서 숨겨져 있던 칼라일의 비밀에 접촉하고야 만 것일까?

 에리카는 망설였지만, 최대한 솔직하게 자기가 아는 것을 설명하려 애쓰는, 어떻게 보든 남을 속일 깜냥은 되어 보이지 않는 시골 아가씨 노라 에버트의 모습에서 어떤 확신을 얻은 듯했다. 에리카는 우리를 서재로 안내했다.

 

 서재로 가는 길에 뜻밖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탐사대를 꾸려 떠나겠다고 했을 때, 로저 칼라일은 평소와 달랐다. 분명 부나이라는 흑인 여자에게 홀려서 저지른 짓이다. 부나이는 어느날 홀연히 나타났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인지는 자신도 전혀 모른다. 로저는 부나이를 자신의 여왕이라고 불렀고, 그가 자신이 원하는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부나이는 칼라일 탐사대와 함께 떠났다.

 -떠나기 전에도 로저 칼라일은 악몽을 자주 꾸었다. 그는 비명을 지르며 잠에서 깨고는 했다. 그래서 유명 정신분석가 허스턴 박사에게 진료를 받으라 추천했다. 하지만 허스턴 선생은 그의 병증을 치료하는 대신 오히려 부나이와 합세하여 그에게 바람을 넣은 것 같다.

 -로저는 이들 탐사대가 정확히 뭘 찾으러 떠나는 건지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에리카는 그가 나가서 고생하면 자기 꿈이 허황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돌아오리라 생각하며 탐사를 보내주었다.

 

 

 처음 듣는 내용이었다. 칼라일 탐사대에 숨겨진 인물이 더 있었다고? 갑자기 나타났다는 이 여인의 이야기는 불안한 쪽의 흥미를 돋웠다.

 

 

 

 칼라일 가문의 서재는 많은 양의 서적들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비밀 금고 안에 있었던 책은 고작 네 권이었다. 간추리자면:

 

 프나코티카 필사본. 은색 가죽 양장 제본. 하이퍼보리아, 목성, 아틀란티스에 대한 이야기. 인류가 나타나기 전에 지구에 생명을 뿌린 백합 모양 생명체에 대한 설명. 누군지 모를 인물이 주석을 달았다. 거기에는 호주 서부의 사막 지하 어딘가에 세워진, 위대한 종족의 도시에 대해 적혀 있다.

 

 이 책을 읽고 있을 때 기묘한 경험을 했다. 눈앞에 굉장한 풍경이 펼쳐졌다. 넓게 펼쳐진 모래의 바다, 죽음도 죽고 의미도 의미로 존재하지 못하는 메마른 대지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기괴하고 아름다운 도시의 환상이었다. 분명 난생처음 보는 장소인데도 너무나 그리웠다. 이 도시야말로, 내가 두 다리 두 팔이 없을 적부터 기어서 나온 곳 같았다. 눈물이 차올랐다. 적어두기 부끄럽지만, 나는 이 이후로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만나보지 못한 도시에 관한 미칠 것만 같은 향수만을 느꼈다. 위대한 자들, 내려다보는 자들, 관찰하는 존재들, 그들이 나를 멀리서 부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사실 그들을 부르고 있는 것은 나였다. 아! 나는 그들을 부르는 법을 알고 있었다. 태어나기 전부터 거기 닿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때의 기분은 어떤 말로도 생생히 설명할 수 없을 것 같다. 나의 글은, 아니 영어는, 인간의 언어로는 부족하다.

 

 신으로서의 삶. 몽고메리 크롬튼. 손글씨. 거무죽죽한 가죽은 인간의 살을 만지는 것 같은 기묘한 느낌. 영국 미술가 크롬튼이 광기에 사로잡혀 쓴 일기. 이집트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다. 검은 파라오, 어둠의 파라오, 살인과 인신 공양에 대한 상세한 묘사. 공양 의식에 쓰는 못이 박힌 짧은 몽둥이에 대한 언급.

 

 

 

신으로서의 삶

 

 

 셀렉시옹 드 리브르 디봉. 그리스어 원전을 라틴어로 옮김, 프랑스어 주석. 가죽 표지가 파랗게 썩어있다. 라틴어 부분을 제이덕이 읽어내었다. 13권짜리 서적의 일부분. 주문이나 마법의 실용에 관한 연구가 들어있다. 차토구아라는 신에 대한 숭배. 테두리에 뒤집히고 깨진 앙크를 닮은 문양이 있음. 파즈 로자와 노덴스라는 신들의 적대 관계에 대해 쓰여 있다.

 

돌들 틈에서. 저스틴 조프리. 최근에 쓰인 수기 원고. 살면서 한 번도 만져본 적 없는 기묘한 검정 가죽 재질 표지. 시가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 여왕의 소품들이라는 시는 왕관, 허리띠, 목걸이 등 여왕이 사용하는 화려한 소품에 대해 자세한 묘사를 하고 있다.

 

 

 뭔가에 취한 듯 당시의 기억이 모호한데 읽은 책들의 모양이나 감촉, 내용은 보다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 이상하다. 그때는 내 행동이 내 것 같지 않았다. 책을 읽다 노라가 기절했는데, 평소와는 달리 인간적인 걱정이라곤 하나 없이 그저 혼자가 아니라는 편안한 마음이 되었다. 어쩌면 그도 위대한 도시에 다녀온 것일까? 그 아름다운 광경을 봤던 걸까? 봤어? 본 거지? 나는 소름이 돋은 팔을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복도에 서 있었다.

 기억이 서서히 돌아오자 환상은 그저 꿈결처럼 느껴졌다. 잊히지 않는 꿈 말이다. 꿈은 묻어둘 수 있지만, 행동은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에리카 칼라일에게 잠시 제정신이 아니었던 상태에서 벌였던 실례에 대해 사과하고, 이후 알아낸 내용이 있다면 연락을 주노라고 약조했다.

 

 

 

 

 우리는 칼라일 가문의 차를 얻어 타고 뉴욕주 의료관리 위원회로 향했다. 내려서 잠시 의논했다. 칼라일 탐사대가 이집트로 향했으니 어쩌면 이 책 중에서는 ‘신으로서의 삶’이 특히 로저 칼라일에게 영향을 준 것이 아닐까? 검은 파라오, 검은 파라오… 분명 어디선가 읽었던 기억이 있었다. 당시에는 떠오르는 내용을 모호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는데 제대로 찾아서 여기 붙여둔다.

 

 (자료가 보강되어 있다) 이집트 3왕조 시대 말기에 아라비아 사막의 고대도시에서 왔다는 네프렌 카라는 강력한 마법사가 검은 파라오라는 악신을 숭배했다. 사람들은 악신과 마법사를 구분하지 않고 그를 검은 파라오라고 불렀다. 네프렌 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제3왕조와 지배권을 다투었다. 그가 한동안 나일강 일대를 다스리다가, 결국 알려진 대로 스네프루가 제4왕조를 세우고 이시스의 도움으로 네프렌카를 죽였다.

 

 이 얘기를 들은 제이덕은 어거스터스 라킨의 몸에서 흘렀던 검은 피를 우리에게 주지시켰다. 어쩌면 그것과 이 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요? 그의 말에서부터 출발한 불길한 파장으로 인해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우리는 불안의 가지를 더 뻗어 나가는 대신, 의료관리위원회 건물로 들어갔다. 거기에 보관되어 있다는 허스턴 박사의 진료 기록에 접근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열람하고 싶다고 정중하게 요청하여 위원회 비서관 아드리안 페리스를 만났다. 그의 허락을 받고, 제이덕이 연구 목적으로만 사용하겠다는 서약서를 쓰고서야 필요한 내용을 읽어볼 수 있었다.

 

 

 

허스턴의 의료 기록

 

 

 

 베인, 베인이라. 꿈속의 목소리는 로저를 혼내고 싶었나? 아니, 칼라인 가문의 시조는 분명 에브너 베인 칼라일이지.

 허스턴 박사는 최근의 날짜로 내려갈수록 칼라일에 대한 기록을 적게 남기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에리카는 허스턴 박사를 부나이의 공조자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허스턴 박사의 기록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대체 이들 탐사대 사이에는 무슨 모종의 관계가 있었던 걸까. 이들에 대해 조금씩 알아낼 수록 사실이 명확히 밝혀지기보다는 더 깊은 미궁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다.

 

 -에리카 칼라일: 에리카 칼라일은 오빠와의 관계 때문에 괴로워했다. 상담 한 번에 90달러씩 청구하곤 했던 명세가 남아있다. 상담 비용치고는 지나친 가격이다.

 -이멜다 보쉬: 로버트 허스턴의 연인. 자살했다. 허스턴 박사와 사귀다 탐사대에 들어가기 직전에 헤어졌다.

 

 

 

 아파트에 돌아와 레베카 쇼젠버그의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힐튼 씨와 면회 일정이 잡혔다. 내일 아침 오전 9시. 역에서 만나 전철을 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노라는 처음 타보는 지하철에 기대가 컸다. 반면 제이덕은 알게 모르게 겁을 먹은 것 같았다. 말라비틀어진 시체가 득실대는 피라미드에도 들어갔다 나온 사람이? 나는 속절없이 웃고 말았다.

 그런 즐거운 시간도 잠깐이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밖에는 정복 경관들이 여럿 서 있었다. 그들은 우리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만 들쑤시고 다니라는 협박을 나름대로 고운 말로 포장해서 지껄여댔다. 내 어깨를 당장 뽑아가기라도 할 기세로 꽉 쥐면서 얘기했으니, 자기 의사를 분명히 밝힌 편이었다.

 지방의 유지나 돈과 결탁한 구리배지들이 사람들을 해코지하고 협박하는 이야기야 LA에서든 뉴욕에서든 흔하다. 잘릴 직장이 있는 기자들이라면야 그런 말에 겁을 먹겠지.

 하지만 내 어린 동료들은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런 일을 누군가 함께 해본 적이 없으니 그들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알기 어려웠다. 내 한 몸만 걱정 없이 내던져서 되는 일이 아니니. 어렵다.

 머뭇거리다, 결국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안전하다고 일렀다. 그래도 노라는 그럴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럴 수는 없구나. 그렇다면 이런 일에 익숙해져야 할 겁니다. 익숙해져야죠. 세상이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기분에요. 그게 사실이니까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들이 정말로 그렇게 되면 조금쯤 슬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력감에서 오는 오기로 부나방처럼 사는 것은 불행하다. 우리는 내일 거처를 옮기기로 하고 잠이 들었다.

 

 

 

 

 

1925. 1. 20

 

 복잡한 뉴욕 거리에서 누군가 우리를 감시하고 있었다. 짐작하기로는 교단의 끄나풀인 듯했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황급히 아무 건물에 들어가 버거를 한 개씩 물고 가게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여차하면 사람들 사이에 섞일 수 있기를 기대하며 뉴 그랜드 호텔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짐을 내려놓고 나서 바로 레베카 쇼젠버그와 합류해 싱싱 교도소로 향했다. 안내를 받아 힐튼 애덤스를 만날 수 있었다.

 힐튼 애덤스는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 놓여있으면서도 정중한 태도를 잃지 않는 선한 사내였다. 30분의 짧은 면회 시간 동안 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는 이렇다:

 

 -‘피투성이 혀 교단’은 뉴욕에서 활개를 치며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힐튼은 시립도서관에서 모데카이 레밍 박사가 아프리카 죽음숭배교단에 대해 한 이야기를 듣고 도서관에 찾아갔다. 지금은 경찰들이 압수해간 자료는 오래전에 사라진 동아프리카 교단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들 교단은 케냐와 긴밀한 관련이 있는데, 할렘 근방에서 아프리카와 관련된 물건을 취급하는 것은 주주하우스 뿐이다. 주주하우스는 아프리카에서 정기적으로 물건을 받고 있기도 하다. 여러모로 소름 끼치는 구석이 있는 가게다.

 -힐튼은 웨스트 137번가를 따라서 레녹스 가와 할렘 강 사이의 두 블록 반경에서는 절대로 납치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구역에 주주하우스가 포함되어 있다. 납치가 일어난 지역은 그 구역을 중심으로 할렘강 서쪽에서 약 1.6km 반경 내에 분포되어 있다. 실종 자체는 이미 여러 해 전부터 발생한 것 같다. 매 그믐밤, 한 달에 한 번.

 -힐튼은 주주하우스에서 나온 30~40대 정도의 남자를 미행한 적이 있었다. 남자는 팻 메이벨스 카페로 들어갔다. 카페 사람들은 그 남자를 두려워했다. 남자의 이름은 무쿵가 음다리였다. 힐튼은 살인의 배후지가 자신을 위협으로 인식한 것이 카페에서 그 남자에 관해 묻고 다녔을 때라고 확신한다. 

 

 힐튼의 사형 날짜는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 멀지 않았다는 사실은 누구든 알 수 있다. 최대한 빨리 사건을 해결해야만 이 무고한 사람을 구할 수 있다.

 

 

 

 

 면회를 끝내고 호텔로 돌아와서, 나는 뉴욕의 연예 사건을 주로 취급하는 동료 기자에게 연락해 이멜다 보쉬에 대해 더 알아보기로 했다. 잘못된 선택이었다. 그냥 쉬었어야 했는데. 발 빠르고 말 많은 인간들 사이에 벌써 불유쾌한 낭설이 돌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라이저,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너는 기자가 그런 걸 믿냐.

 믿을 게 있고 안 믿을 게 있는 건 아는데 이런 건 진실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전화를 한 번 더 돌린 뒤에야 로버트 허스턴이 자기 애인을 죽였다는 소문을 주워들었다. 얻은 건 쥐꼬리만 한데 열심히 달린 뒤처럼 입안이 달았다. 어쩌다, 일라이저 웨버. 이 꼬락서니냐. 그야 친구를 잘못 사귀어서. 잭슨 엘리어스. 이 빌어먹을.

 

 내가 혼자 화를 삭이는 와중에 제이덕은 잭슨이 남긴 팜플렛에 적혀 있던 이름, 앤서니 콜즈 교수에게 연락했다. 이 뒤로는 그가 정리해준 내용을 옮긴다.

 앤서니 콜즈 교수는 호주 출신으로 뉴욕에 잠시 강연을 하러 들렀었고, 지금은 미스캐토닉 대학에 머무는 중이다. 그는 폴리네시아와 뉴질랜드를 중심으로 사교 집단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다.

 

 

콜즈 교수의 말

 

 

 

 콜즈 교수는 전화 통화로 사진 자료를 보여주지 못하는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7개월 이후에는 호주에서 있을 예정이니 그때 직접 사진 자료나, 일지를 보여줄 수 있다고 한다. 거대한 벽, 거대한 동굴이라……

 

 


 

 

 

 잭슨 엘리어스를 살해한 범인은 주주하우스를 중심으로 하는 피투성이 혀 교단이다. 이들은 그믐달마다 사람을 납치한다. 입막음을 위해 살인을 벌인다. 경찰도 한패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뭘까.

 누명을 쓰고 잡혀 있는 힐튼 애덤스를 구하려면, 진범의 증거를 잡아야 한다.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얻고, 그것을 믿을만한 사람에게 넘기고, 누군가 조작을 시도하기 전에 신문사 등을 이용해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터트린다. 그러려면 현장을 사진으로 남기던가 아니면 보다 확실한 증거품, 직접적인 자료를 찾아야 한다.

 믿을만한 사람이라. 경찰 중에서 믿을만한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고민 끝에, 잭슨의 사건 때 잠깐이나마 대화를 나누었던 마틴 풀 경위에게 연락했다. 경찰에게 협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 뒤로는 직접 얼굴을 보고 말할 수 있었다. 경찰 내부에 잭슨을 죽인 진범으로 추정되는 단체와 결탁한 세력이 있는 것 같다는 얘기에, 그는 아마도 롭슨 경감이 한 패일 것이라고 의견을 개진했다. 힐튼 애덤스에게 혐의를 씌워 잡아넣은 게 롭슨이고, 우리를 협박하러 왔던 젊은 경관도 그 밑에서 일하고 있다고 한다. 그가 부패했다는 소문은 이미 공공연하다.

 풀 경위로부터 롭슨 경감을 통하지 않고 바로 위로 증거를 올릴 수 있게 힘써보겠노라는 약속을 받았다. 협조를 얻으니 그래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는 주주하우스에 직접 진입해서 증거를 알아내는 일만 남았다. 그날 밤은 제법 애먹었다. 이런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시선을 끌기도 했고, 잠시 물러났다 돌아와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숨어있으려는데, 제이덕이 술에 취한 불량배들에게 시비가 붙어 지갑을 잃어버렸다.

 

 고생 끝에 주주하우스를 감시하고 얻은 정보:

 -백인 남자 둘이 두툼한 봉투를 품에 집어넣고 돌아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들 중 한 명은 분명 우리를 찾아왔던 경찰이었다.

 -사일러스 은콰네가 저녁에 식사라도 하러 나가는 건지 1시간 정도 가게를 비우는 것을 확인했다.

 

 

 잠긴 가게 문을 열어보려고 시도해보았으나 한계가 있었다. 전문적인 사람을 고용하기로 합의한 뒤에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내일 사일러스 은콰네가 같은 시간에 자리를 비운다면 그동안 내부를 뒤져볼 계획이다.

 

 

 

 

 

1925. 1. 21

 

 우리는 조심스럽게 주주하우스 안으로 들어가서 가게와 생활공간을 살펴보았다.

 침대 밑에 커다란 칼이 하나 놓여있었다. 볼로나이프와 비슷해 보이는 큼직한 날붙이. 시트 한쪽 구석에는 말라붙은 인간의 혀를 머금은 가면이 놓여있었다. 살인자들이 쓰고 있었던 가면과 닮았다. 당시에는 몰랐으나 이 말라붙은 혀가, 가게에서 볼 수 있었던 끔찍한 것들의 서막이었다. (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가게 카운터 안쪽에서 장부를 챙겼다. 지출 항목에 일주일에 한 번 주기적으로 ‘경 14’라고 적힌 명세가 있다.

 카운터 바닥에 깔린 깔개를 들자, 자물쇠가 잠긴 문이 드러났다. 들고 다니던 작은 공구로 열어보려다 자물쇠 안에 공구 끄트머리가 끼인 채 부숴 먹었다. 쯧. 결국은 자물쇠를 뜯어낼 수밖에 없었다.

 

 열린 문 너머로 폭이 좁은 계단이 이어졌다. 계단 아래로 보이는 것은 역청처럼 어둡고 끈적한 암흑 그 자체였다.

 손전등을 켜고 긴 계단을 한참 내려가자 복도가 나왔다. 절대 일반적인 지하실이 아니었다. 돌로 된 낡은 벽에는 기호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었다. (흔들린 사진, 노트에 옮겨 그린 기호들) 우리는 곧 쇠로 된 모서리를 두른 나무문에 다달았다.

 자물쇠를 열고 들어간 방은 횃불이 걸려 있어 복도보다는 조금 밝은 편이었다. 그래도 어슴푸레하고 퀴퀴한 분위기는 마찬가지였다. 문에도 방에도 무언가 글자가 새겨져 있었지만 제대로 읽을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방 한쪽에는 부자연스럽게 커다랗고 둥그런 석판이 누워있고, 대형 윈치가 석판에 달려 있었다. 윈치는 석판을 조절하는 장치인 것 같았다. 셋이서 힘을 합쳐 매달리자 겨우겨우 석판의 틈이 벌어졌다.

 

 벌어진 틈 사이로부터 끔찍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저 먼 안쪽에서부터 무언가 움직이는 실루엣. 그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손전등을 아래로 비추자, 그 미약한 빛에 원통형의 거대한 벌레 비스름한 존재의 모습이 드러났다. 몸통에는 듬성듬성 사람의 얼굴이 붙어서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찢어지게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것은 구덩이 안에서 용솟음치려는 듯 그 육중한 몸을 비틀고 스스로 짓이기고 꿈틀거렸다. 우리는 아연실색해서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순간 나도 모르게 피라미드 꼭대기의 틈새에서 봤던 것이 떠올랐다.

 노라는 그 자리에서 다시 기절했다. 제이덕이 쓰러지는 그를 받았다.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아래턱이 덜덜 떨려왔다. 어떤 악의, 어떤 욕망이 이런 괴물을 만들어낸 걸까? 대체 뭘 하는 놈들이길래. 이런 끔찍한 걸 뉴욕 한복판에 숨겨두고 있냔 말이다.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 가다가 이내 메마른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래서야. 무서워서 어디 땅을 디디고 살 수나 있겠나. 여기는 분명 저 먼 나라의 봉인된 피라미드가 아니라, 내 이웃의 지하실일 텐데. 세상에 도망칠 수 있는 곳, 안전한 곳이라고는, 없구나.

 (정신이 나갔던 건지 그것의 사진을 몇 장 찍어두었는데 인화하는 내내 암실이 조금 더 추워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착각한 게 아니라면, 그것이 내지르는 비명이 점점 커지는 것처럼 들렸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는 온갖 용을 써서 석판을 다시 닫았다.

 방에는 석판 외에도 피가 묻은 화물 상자, 의식용으로 보이는 아프리카 북 같은 것이 놓여있었다. 또 한쪽 벽면에 커튼으로 가려진 공간이 보였다. 나는 홀린 듯 커튼을 걷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직사각형 공간의 네 구석에 사람이 서 있었다. 모두 배가 열려서는, 이마에는 문양이 새겨진 채다. 마치 되돌아온 잭슨 엘리어스의 악몽 같았다. 아. 커튼이 열리자마자, 이들은 동시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리고…

 

 

 

 

 나는 피가 흐르는 귓가를 대충 압박하며 다시 커튼 안쪽을 살폈다. 늘어선 선반에는 잡다한 물건들이 쌓여 있었다.

 먼저 가면. 은콰네의 방에 있던 것보다 훨씬 관리 상태가 좋은, 말라붙은 인간의 혀가 붙은 가면이었다. 화려한 로브, 사자 발톱 장갑, 책 한 권(<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 잭슨이 미스캐토닉 대학에서 찾던 그것이다). 희한하게 생긴 나무 조각 가면(사람 얼굴 네 개 정도가 붙어 있는 모양). 광택이 나는 구리 그릇. 긴 의식용 홀. 회색 금속으로 된 머리띠. 항해용 크로노미터. 잠겨있는 소형 금고.

 금고를 공구로 비틀어서 억지로 열었다. 내가 찾던 ‘정확한 증거’들이 여기 있었다. 살인자들은 무슨 끔찍한 악취미인지 피해자들의 물건을 수집했다. 그 물건 중에는 램지 씨에게 받았던 엘리어스의 단서 ‘원본’들도 있었다. 그리고 배들이 찍힌 묘한 사진 한 장도.

 

 

발견된 사진

 

 

 금고에 들어있었던 것은 전부, 밖의 물건 중에서는 몇 가지 들고 다닐 만큼만 챙겨서 가방에 넣고 빠져나왔다. 바닥에는 아까까지 살아 움직이던 시체들이 널브러져 있고, 내 어린 동료들은 벽에 기대, 비슷하게 피투성이인 모습으로 겨우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렇게 가엾은 꼴은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세상일이 결코 내 마음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우리는 곧장 램지의 변호사 사무실로 갔다. 거기에다 두 환자를 맡겨놓고, 나는 정신없는 밤을 보냈다. 찍어둔 사진 인화를 끝내자마자 풀 경위를 만났다. 사진과 장부, 금고 속 증거품을 모조리 보여주며 그에게 지하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물론 절대 믿어주지 않을 부분들은 제외하고.

 우리가 싸웠던 사진 속 시체들도 모두 실종자들로 확인되었다. 풀 경위는 증거품과 사진들을 받아서 돌아갔다. 그는 오늘 밤 내에 급습 작전을 실행할 것이라고 했다.

 풀 경위와 대화가 끝나자마자 레베카 쇼젠버그에게 연락했다. 나는 그와 협의하여 밤새 기사를 작성했다.

 

 내가 기사를 쓰는 사이, 주주하우스에서 들고나온 책을 제이덕이 읽었다. 그에게 이 책을 보여주지 말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거기 파묻혀서는 나오려고 들질 않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그 책에는 손도 대지 못했다. 이후 따로 부탁해서 요약본을 받을 수는 있었다.

 

 아프리카의 음험한 종파들. 나이젤 블랙웰. 저자의 신원은 모호하고 출판사도 따로 적혀 있지 않다. 푸른색 합지 표지. 탐험가 나이젤 블랙웰이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작성하였다. 각종 아프리카 종교 제의에 대한 설명. 끔찍하고 적나라한 묘사. 죽은 사람을 부리는 주문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뉴욕의 일들이 어떻게 마무리 되었는지 적어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풀 경위는 사일러스 은콰네를 체포하고, 그가 가지고 있던 물건들을 압수했다. 사교 집단의 잔악무도한 범죄와 경찰과의 유착 관계에 대한 폭로 기사가 1면에 실렸다. 힐튼 애덤스의 누명이 벗겨졌다는 것이 가장 다행스럽다.

 

 여기까지가 공적인 소식이고, 풀 경위에게 따로 들은 바로는 이렇다:

 당일의 출동에서 사일러스 은콰네는 체포가 되었고, 실종자들의 시체를 확인했다. 그러나 별다른 물건은 남아있지 않았다. 거대한 석판 안쪽도 비어있었다(어째서?). 은콰네는 그간의 연쇄살인과 실종사건의 범인으로서 응당한 처분을 받게 될 것이다. 사건에 대해서는 전혀 입을 열지 않는다고 하지만.

 애덤스 부부는 감동의 재회를 했다. 레베카 쇼젠버그를 통해 그들의 감사 인사를 받았다. 뉴욕을 떠나기 전에 한 번은 찾아가려고 한다. 인간이 인간을 돕는 것은 본성이다. 그들의 모습은 나의 오랜 믿음에 확신을 준다. 

 

 

 

 잭슨 엘리어스가 온 세상을 돌아다녔던 것은 죽음 숭배 교단이 전 세계에 퍼져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는 뉴욕 바깥으로 나가야 했다. 고민 끝에, 칼라일 탐사대의 족적을 밟아 영국으로 향하기로 했다.

 

 영국행 배에 오르기 전, 노라의 입원 기간을 더해 총 3주의 준비 기간을 가졌다.

 제이덕은 여전히 미친 사람처럼 그 책에 푹 빠져있다. 집에 돌아가기로 약속해놓고 연락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부인에게 전화가 와서 그를 바꿔주었는데 제대로 대화를 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서 뭐라 몇 마디 하려다가 삼켰다. 그는 자기가 직접 이룬 가족이 있는 사람이고 그것은 내가 전혀 경험해본 적이 없는 바다. 무슨 기분일지, 제대로 알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러니 내가 무슨 권리로. 내가 뭐라고.

 노라는 제일 크게 다쳐서 2주간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상처가 안심할 수 있을 만큼 아물자, 나는 출발 전에 집에 다녀오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이참에 노라가 편안한 집으로 돌아가서 좀 쉬다가, 마음이 바뀌었으니 아예 돌아오지 않겠노라고 전보를 부쳐줘도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나중에 혹시 후회하거나… 생각이 날까 봐 그래.

 생각은 항상 나는걸요.

 

  

  나는 그래도 몸이 성하니 그날 얻은 물건들에 대해 조사하며 돌아다녔다.

 

 -금고에서 발견한 사진은 상하이의 황푸강에서 찍힌 것으로 보인다.

 -크로노미터는 뉴욕보다 네 시간 빠른 영국 그리니치 표준시에 맞춰져 있다.

 -머리띠는 금속 재질인데 만지면 조금 따뜻하다. 긁어서 새긴 상형문자가 있다. 내가 알아낼 수 있었던 것이 많지 않아 제이덕에게 연구를 부탁했다. 

 -나무 가면은 갈대와 깃털 천을 바구니처럼 엮어서 짠 목 부분 위로 끔찍한 얼굴 넷이 조각되어있다. 콩고 유물. 뉴욕대 식물학 교수를 찾아가서 재질을 알아보았는데, 이 수목은 지구상에서 발견된 적이 없다고 한다. 

 -구리 그릇에 새겨진 기호의 의미는 불명이다. 역시나 제이덕에게 맡겼다.

 

 

 그러면서도 남는 시간은 지금까지 얻은 정보들을 정리하고, 경제적인 문제들을 처리하고, 비자를 확인하고 출발 계획을 짜는 데에 썼다. 아, 변호사도 바꾸고. 내 유언장도 조금 수정해서 램지 씨에게 맡겨뒀다.

 

 

 문득 병원에 있는 노라가 회계에 욕심을 부리던 것이 기억이 나, 어렵지 않은 몇 가지 일을 남겨놨다. 잔소리라도 하게 만들까 하면서 고를 수 있는 가장 못생긴 옷가지를 골라두는데, 그러는 스스로가 몹시 바보처럼 느껴졌다. 젠장, 제대로 위로하는 법 같은 건 모른다. 윌리엄이라면 이럴 때…

 

 윌리엄.

 우습다. 이제 와 가족 생각이 난다는 게. 나는 멈춰 있는 게 싫었다. 단단한 새 구두 밑창을 내버려두고 눌러앉는 것도, 쫓아야 할 세상이 저 바깥에 있는데 그게 보이지 않는 양 커튼을 치는 것도, 파도가 되지 않고 호수가 되려는 것도. 멈춘 세상은 분명 죽은 세상이다. 어떤 사람은 그냥 나서부터 이런 삶을 산다. 나의 길은 방향과 목적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림자는 한 방향으로만 지지 않으니까. 그래서 길이 나를 불렀다. 늘, 그랬다.

 이 애들은 이제서야 이런 삶에 뛰어들었는지 몰라도 나는 쭉 이렇게 살아왔다. 그러니까 제발 그러지 마, 그러지 말았으면 하는 말이 자꾸만 혀끝에서 맴도는 것이다. 그 지독함을 이미 알기 때문에. 한때 소중했던 것들이 이젠 내가 말하지 못하는 것들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고, 별것 아닌 듯 보이다가, 어느 순간부터 오히려 내 발목을 잡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 기분. 끝에는 객사밖에 기다리지 않는 삶에, 사랑할 도리 외엔 없는 사람들이 가지는 나약하고도 가없는 의미. 오늘이 후회될 때 후회해. 인사할걸. 만나러 갈걸. 딱 한 번만 더 얼굴을 볼걸. 후회조차 남지 않을 정도로 희미해지고, 바스러지고 굳어져서 이상하게 발을 걸친 바보만큼은 되지 마. 객지에 생길 무덤은 이름조차 남지 않는 편이 좋은 거다. 다 알고 있으면서.

 족쇄다. 걸음을 늦추는. 뒤돌아보게 하는. 나는 벌써 이만치 나왔는데. 이렇게나 멀리.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데.

 

 

 형.

 엘리. 뭐 하고 지내?

….

 왜 전화했어. 엘리. 너 무슨 일 있구나.

 ….

뛰었니? 숨소리가.

 나 또 배 타려고. 이번엔 오래 걸릴 거야. 

네 여정을 위해 기도하마. 너는 이런 말을 싫어했지만.

그래도 할 거잖아.

그래.

 

형. 

다음에… 봐. 내가, 돌아가면. 다음에.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냐루가면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라면?!?! 

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미국편 후기부터는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조심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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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 1. 6

 

 


 무슨 이유일까? 갑작스러운 폭설과 함께 전보가 실려 왔을 때, 진작 압살한 줄로만 알았던 내 안의 해묵은 감정들이 고개를 들었다. 버석거리는 전보 종이에 닿는 손끝에 페루 고원의 바람이 스치는 듯했다. 반가움. 걱정. 두려움. 불안감, 약간의 흥분감. 한꺼번에 몰려와 가벼운 멀미를 일으켰다.

 나는 약속 날짜보다 훨씬 앞서 제이덕의 집으로 출발했다. 혹시나 해서 미리 정리한 자료들과 함께였다. 며칠 밤을 새우고 그대로 기차에 올라 덕분에 추위에도 불구하고 내내 잘 수 있었다.

 

 

 칼라일 탐사대의 기록 정리


 제이덕의 결혼식에서 본 뒤 처음이었던가. 노라는 여전히 씩씩했고 걷는 폼이 컸다. 쩌렁쩌렁한 웃음소리도 여상했다. 그리고 에디 부부. 볼이 포동포동한 여자아이의 이름은 소피아라고 한다. 학자가 제 딸에게 붙일 만한 이름이다. 그 안온한 가정의 온기, 피어오르는 식사의 김, 신중하게 고른듯한 길이의 사라사 커튼. 돌보는 손을 타 빳빳하게 다듬어진 소매와 악수하고 따뜻한 모닥불 앞에 앉자, 기묘한 흥분이 차차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모두가 저 바깥의 차가운 세계를 구르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이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내 아끼는 친구들에게, 이 모든 것을 남겨두고 떠날 거냐고 물었다. 죽으러 가는 것은 아니지만. 저번의 여행이 우리에게 던져줬던 날것의 위험을 생각하면 물어야만 하는 질문이었다. 그런 책임감 같은 것을 느꼈다. 잭슨 엘리어스가 우리를 안전한 여행에 초대했을 리는 없다.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망설였다. 알고 있지만, 자기 눈으로 봐야만 하는 것이 생겼다고. 봐야만 하고, 알아야만 하고, 그래서 떠나야만 한다고. 그런 대답을 들었다.

 남은 날들 내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웠다. 기분이 이상했다. 그들이 금방에라도 닳아 없어질 것만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그렇게 풋내기 같았는데. 고작해야 4년이었는데. 우리에게 이 4년이 얼마나 길었는지! 또 짧은지. 갑작스러운 손님이 에디 부인에게는 실례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 죄책감은 짊어질 수 있다.

 

 

 

 

 


1925. 1. 14

 

 뉴욕행 열차를 탔다. 유독 잔인한 겨울이었다. 벼린 칼날처럼 날카로운 추위와 무거운 폭설. 눈발이 온 세상을 덮어버렸다. 거대한 침묵이 세상을 감쌌다. 뒷좌석의 노인이 내내 기침을 해댔다. 석간신문을 주워다 읽는데 빳빳하게 얼어 잘 넘겨지지 않았다.


 오랜만에 들리는 뉴욕은 여전히 숨 막히도록 붐비는 도시였다. 나는 동료 기자인 스티븐스의 아파트로 갔다. (그도 아컴에 있는 내 아파트의 위치를 알고 있다. 자주 자리를 비우곤 하는 기자들이 흔히 하는 아파트 셰어였다.) 1월이면 그는 아마 파리쯤 가있을 것이다. 두 사람 정도는 더 묵을 수 있을 것 같아 제이덕과 노라도 불렀지만, 제이덕이 적응하기에는 너무 좁은 방이었던 모양이다. 결국 두 사람은 따로 호텔로 보내고 첫날 밤을 지냈다.

 꿈도 없이 긴 밤이었다. 아파트에서는 묵은 먼지 냄새가 났다. 생활감이라고는 없는 집이었다. 아무리 담뱃재를 털고 시트를 구겨도 내가 여기 있다는 흔적을 남기기가 어려웠다. 뉴욕에 왔다. 모든 것이 지독하게 희미했다.







1925. 1. 15

 

 제이덕이 잭슨의 전화를 받았다. 오늘 오후 8시에 첼시 호텔 410호에서. 잭슨은 묘하게 다급했고 전화를 빨리 끊었다. 우리는 약속 시각보다 조금 일찍 만나, 후추를 많이 뿌린 저녁 식사를 했다.

 제시간에 호텔에 도착했는데 아무리 노크를 하고 불러도 410호의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귀를 기울여보니 안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불길했다. 긴장 때문에 입안이 말라 까끌까끌해졌다. 우리는 결국 힘으로 호텔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그리고. 뭘 봤더라.



 

 아니. 그래. 난장판이 된 호텔 객실. 그 가운데 잭슨 엘리어스의 시체가 배가 갈린 채 누워있었다. 인영 셋이 비상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그들이 덮어쓴 가면으로부터 붉은 플란넬 천이 삐져나와 흔들렸다. 뒤를 쫓아가려 했는데 다리에 힘이 풀렸다. 제이덕이 겨우 난간을 붙잡고 선 나를 넘어서 뛰어 내려갔다.

 나는 겨우 숨을 고르고 다시 나의 소중한 친구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리고. 지금. 이 짧은 순간. 목격자의 극단적인 행동이 용서되는 아주 찰나 패닉과 방황의 순간에. 뭘 해야 할지를 생각했다. 침착해. 침착해. 침착해. 심장이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릴 때마다 되뇌었다. 머리가 아주 뜨겁다가도 차갑게 식었다. 결코 일반적인 죽음이 아니었다. 자연사도 병사도 사고사도 아닌. 살인 사건. 나의 친구는 살해당했다. 아주 불쾌하고, 아주 개성적인 방식으로. 난잡한 의식의 제물이라도 되는 양, 조악한 예술가의 퍼포먼스라도 되는 양. 그 모든 풍경이 지독한 농담 같았다. 바로 곁에서 노라 애버트가 오열하는 목소리가 아니었더라면, 그 울음소리가 그렇게 선명하게 실감을 때려 박지 않았더라면 나는 정말로 그렇게 믿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이렇게 악몽에 한 장면을 더하는구나. 우리는 친구였는데. 아아. 친구일 것이다.

 나는 침착하게 잭슨의 품을 뒤졌다. 손에 피가 묻지 않도록 조심했다. 거기서 명함 한 장과 성냥갑 하나를 찾았다. 나는 그런 짓을 하면서 손 한 번 떨지 않았다. 그리고서는 그 얼굴, 공포에 질린 얼굴, 이마에 남은 문양을 몇 장 사진으로 남겼다. 그의 뜨인 눈과 함께. 그 정도는 용서하겠지.

 어리석게도 그의 눈을 감겨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동시에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에 자신이 보고 싶어 하던 것을 봤을까? 한 미치광이 의사의 기고문에서 망막광상이라는 개념에 대한 기묘한 주장을 읽은 적이 있었다. 개요는, 우리가 죽기 전에 본 마지막 풍경이 신경의 마술 같은 작용으로 망막에 사진처럼 뚜렷하게 새겨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연구하면 우리는 수많은 미제사건의 범인을 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이럴 때는 그런 황당무계한 소리도 사실이었더라면 싶다. 암실에서 그 눈을 인화하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멍청하기는. 안다. 멍청한 짓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어둠 속이 아니면 맘 편히 울 수도 없다.


 제이덕은 최선을 다했으나 범인들을 놓쳤다. 곧 경찰이 와서 현장을 조사하고 우리의 증언을 받아 갔다.

 마틴 풀 경위는 이런 살인사건이 벌써 9명째이고, 전부 이마에 이런 끔찍하고도 기묘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노라고 했다. 작년 할렘에서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 이야기였다. 그런데, 해당 사건에서는, 힐튼 애덤스가 벌써 범인으로 잡혀 교도소에서 사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범인이 이미 잡혀 있다면, 나의 살인자는 누구란 말인가?






1925. 1. 16

 

 

 

 결국은 한숨도 자지 못했다. 꿈이 두려웠다. 나는 내가 잭슨의 품에서 발견한 것들을 보여줬다. 우리는 밤이 지도록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무엇을 할 것인지, 어떻게 할 것인지. 그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이었을지. 칼라일 탐사대와 이 사건이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아, 죽음이 얼마나 부당한지.

 내일 사이프러스 힐스 묘지에서 비종파 장례식이 열릴 예정이다. 내리 주저앉아 있다가는 슬픔이 너무 많은 것을 좀먹을 것만 같았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고 세 명의 사람을 만났다.


 성냥갑에는 상하이의 주소가, 명함에는 뉴욕의 회사가 적혀있었다. 당장 상하이로 날아가 볼 수도 없는 일이니, 일단은 명함의 단서를 쫓았다.


 -애머슨 무역: 사장인 아서 애머슨은 그는 고작해야 1~2주 전에 잭슨을 만난 듯하다. 애머슨 무역은 주주하우스에 아프리카로부터 가져온 물품을 납품하고 있었다. 그는 주주 하우스의 기분 나쁜 노인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주주하우스: 우리는 곧장 할렘으로 향해 주주하우스의 사일러스 은콰네를 만났다. 노라는 눈에 띄게 그를 의심했다. 분명 무언가 숨기고 있고, 눈빛이 음험하고,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는 그저 송장에 가까운 노인이었지만 역시 감이 좋지는 않다. 목에는 뭔가의 열쇠가 걸려 있었다. 그는 유의미한 정보라고는 하나도 주지 않았다. 모든 질문에 모르쇠로 일관할 뿐이었다. 잭슨은 왜 이런 명함을 가지고 있었던 걸까.


 뒤이어 프로스페로 하우스 출판사의 조나 켄싱턴을 만나러 갔다. 만날 때마다 둥글어지는 남자다. 우리는 애도의 말을 몇 마디 나누었다. 그는 잭슨이 남긴 편지와 자료들을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그중에는 잭슨을 걱정해야 할 만큼 정신이 불안정해 보이는 편지도 한 장 있었다(물론 쉽게 내놓지는 않았다). 이 편지 한 장을 읽기 위해, 그리고 이 자료들을 가지고 가기 위해, 나는 간만에 각서를 썼다.

 조나, 내가 왜 내 친구의 명예를 팔아 싸구려 기사를 쓸 거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기자로 산다는 건 이런 모욕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일라이저 웨버. 하하. 불평하기 어려울 만치 값싼 서명이었다.

 

 

 

 

잭슨 엘리어스의 메모 







1925. 1. 17


 장례식 당일. 우리 셋과 조나 외에는 고작 두 사람이 더 있을 뿐이었다. 엘리어스의 변호사인 칼튼 램지와 그 조카 윌라 슬라이. 흐린 하늘에서 눈발이 조금씩 날렸다. 숨을 내쉴 때마다 입김 때문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상실은 억지로 찾아왔으니 대비할 수 없는 일이지만. 작별은 자발적으로 고하는 인사였다. 그래서 더 쉽지 않다.

 하고 싶은 말은 전부 했다. 인사하며 보낼 수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위험을 미들네임으로 삼고 전 세계를 누비고 다니던 떠돌이가 그래도 돌아와, 결국 미국 땅에서 죽어 묻히는 것이. 이런 게 섭리라면 섭리고 자비라면 자비일 것이다.

 손수건을 넉넉히 챙겨왔는데 노라가 다 썼다. 다정한 엘레노라. 제이덕은 사내다운 척 누구보다 소년 같은 고집을 피웠다. 칼튼 램지 씨가 월요일에 엘리어스의 유언장을 발표할 예정이니 그 자리에 참석해달라고 전했다.


 돌아가는 길에 기자 몇 명이 모여있는 것이 보였다. 몇은 아는 얼굴들이었다. 개중 뉴욕 타임즈의 기자 레베카 쇼젠버그가 인터뷰를 요청했다. 쇼젠버그는 잭슨의 죽음과 힐튼 애덤스 사건 사이에 연관성을 의심하고 있었다. 합리적인 판단이었다. 우리는 그 요청을 받아들이고 짧게 대화를 나누었다. 

 레베카 쇼젠버그로부터 힐튼 사건에 대해 몇 가지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었는데, 요약하자면:

-모데카이 레밍 박사가 이 사건과 죽음숭배교단과의 연관성을 밝혔다. 

-할렘 사건은 제법 오래 연관성을 부정당하다가 14분서의 롭슨 경관에게 넘어갔다. 

-힐튼은 8번째 살인사건에서 현행범으로 잡혔다.


 쇼젠버그 기자가 힐튼 애덤스의 아내 밀리 애덤스 씨와의 만남을 주선해주기로 했다. 이후 우리는 도서관으로 향했다. 쉼 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는 것이 슬픈 생각을 멈추는 데 도움이 되었다.

 



 뉴욕 시립 도서관에서 얻은 자료 정리.

  1. 칼라일 탐사대에 대하여

 -칼라일 가문: 시조 에브너 베인 카렐이 “불건전하고 흉악한 행동”으로 영국에서 버지니아로 이송되었다. 그의 아들 애프라임이 뉴잉글랜드로 가서 성을 바꾸었다. 이후 남북전쟁 시기에 사업에 성공하여 부호 가문이 되었다. 현재는 에리카 칼라일이 운영하고 있다.

 로저 베인 워딩턴 칼라일은 17세 때 친자 확인 소송을 면했다. 18, 20세 때 각각 알코올 중독 치료를 받았다. 고등학교는 명문 사립을 나왔는데 이후에는 온갖 명문대에서 신사적 자퇴를 했다. 부모는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마스터스 가문: 군수 기업 경영. 안전한 투자.

 -존 브레이디: 폭행, 도박에서부터 무죄 선고된 살인 혐의 등 전과가 다양하다. 그는 사건을 목격한 8명의 증언을 누르고 명백한 사건에서 무죄를 받았다. 칼라일이 뒷배를 봐줬나 본데.

 -로버트 허스턴: 존스홉킨스대학을 우등으로 졸업하였다. 오스트리아 빈에서 프로이트, 융에게 배웠다. 염문이 있는 사람이었고 부자들을 주로 진료했다. 그의 환자 중에 로저 칼라일도 있었다. 사망 선고 이후 진료기록이 전부 뉴욕주 의료관리위원회로 넘어갔다. 


  1. 잭슨의 죽음에 대하여

 기호학: 피해자들의 이마에 있는 문양. 왕조 시대 이집트에서 쫓겨난 한 종파로부터 이어진 사교조직의 문양이라고 한다. 피투성이 혀 교단과 연관이 되어 있고 뿌리는 케냐. 지금도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

 

 

결국 노라와 제이덕 두 사람 모두 호텔을 떠나 아파트로 짐을 옮겼다. 이제야 슬슬 이 낡은 공간에 누군가가 머문 흔적이 보인다.

 






1925. 1. 18

 

 다들 웬일로 아침부터 부산스럽더라니 일요일이다. 신실한 신자들이로군. 나는 신성한 문턱을 넘는 대신 아침 시간을 달콤한 잠과 불경한 사건들에 대한 문서 정리로 때우기로 했다. 노라는 내가 교회에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믿기지는 않겠지만 나는 가톨릭 신자고 내 이름은 세례명이고 내 형은 신부라고 대답해주었다(반쯤은 사실이다). 노라는 그러면 성당이라도 가던지, 아니 교회에 가야 한다고 대꾸했다(이럴 수가). 나는 슬프고 위험한 시기에 기도하면 손해를 보는 묘한 징크스가 있다고 덧붙여 설명했지만, 노라는 대략 '헛소리 하지 마세요'하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이런. 하지만 어린 동료에게 내 인생을 그 이상 구구절절 설명하고 싶진 않다. 신과 나의 복잡스럽고 서로 불편하고 그렇다고 사랑이 없지도 않은 지난한 관계가 대체 이 사건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서, 하나님의 예언자 엘리야는 동료들이 자리를 비운 동안 슬픈 타성에 젖어 벽에 지도를 붙이고 칼라일 탐사대의 행적을 정리했다. 꽤 품이 드는 일이어서 반나절이 종일 걸렸다. 붙이고, 쓰고, 붉은 실을 잇고, 바쁘게 손과 머리를 움직이니 두 사람의 공백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노라가 돌아오는 길에 샌드위치를 사다 줬다. 소스의 맛이 기름지고 부도덕했다. 냉담자에게 차려진 즐거운 식사였다.



 오후. 레베카 쇼젠버그와의 약속. 힐튼 애덤스의 아내인 밀리 애덤스와의 만남. 장소는 할렘 가에 위치한 라파예트 극장. 그곳이 밀리 애덤스의 일터인 듯 했다. 밀리 애덤스 씨는 인상이 강렬하게 남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꽤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렘 헬파이터 출신의 힐튼 애덤스는 경찰이 사건에 관심을 두기도 전에 친구들과 함께 자율 방범대 비슷한 활동을 해온 듯하다. 이미 2년 전부터, 할렘에서는 끔찍한 살인 사건이 연달아 벌어지고 있었다. 피해자들의 신분은 다양했고 이마에 새겨진 문양, 그리고 모두 할렘에 다녀왔다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었다. 경찰은 범죄 조직의 항쟁과 강도 사건으로 추정했지만, 애덤스 부부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힐튼은 뉴욕시립도서관에서 이 사건과 특정한 교단이 연관되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또 다양한 일지와 기록을 남겼는데, 이 자료는 이후 경찰이 전부 압수해 갔다. 힐튼은 붉은 색의 긴 천 조각 같은 걸 이 자료의 책갈피로 쓰고 있었다. 붉은 천이라.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힐튼은 체포되기 얼마 전에 친구들과 함께 주주하우스에 대해 얘기를 했다. 그래서, 밀리는 할렘의 주주하우스를 수상하게 여기고 있다. 남편이 체포된 이후 직접 감시를 하기도 했다. 밀리가 본 것은:

 -한 달에 한 번씩 대략 2~30명 정도가 새벽에 한꺼번에 가게로 들어가는 모습. 

 -한번은 사람들이 오기 1시간 전에 비밀스러운 짐 상자가 가게로 들어갔다. 

 -낮에 형사들이 들어가는 것도. 뇌물을 받은 듯. 경찰도 한 패군.


 힐튼 애덤스는 작년 9월 뉴욕시립도서관 할렘 분관 근처, 으슥한 골목 중년 백인 남성의 시체 옆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목격자는 비명 소리를 듣고 달려간 경찰 한 사람. 힐튼은 피 묻은 단도를 버리고 있었다고. 흉기는 힐튼이 군대에서 받았던 볼로 나이프라고 한다. 하지만 밀리에 의하면 그는 그 칼을 순찰 나가면서 한 번도 가져간 적이 없고, 집에 있었던 것을 경찰이 압수해갔다고 한다.


 고작해야 두 사람, 평범한 일상을 살던 부부가 겪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밀리 애덤스는 초연하고 담담해 보였다. 종합해보았을 때, 힐튼 애덤스에게 누명이 씌워진 정황은 분명했다. 경찰까지 이런 방식으로 사건에 연관이 되어 있다면, 믿을 사람이 대체 얼마나 있을까. 그 말인즉슨 내가 직접 찾아 나서지 않는 이상 잭슨을 해친 살인자가 경찰에 의해 명명백백히 밝혀질 일은 없을 것이란 뜻이기도 했다. 우리는 그의 누명을 밝히겠노라 다짐하고, 힐튼 애덤스와의 면회 약속을 잡았다.


 할렘을 벗어난 이후로는 내리 허탕이었다. 기록의 전당을 뒤졌지만 사일러스 은콰네는 시민으로 등록 되지 않았다. 에리카 칼라일의 법무법인이 던스턴 휘틀비 앤드 그레이라는 것 정도만 알아낼 수 있었고. 이후로 모데카이 레밍을 만났다. 정식 학위도 없는 박사에게 뭔가 많은 것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렇게까지 시간 낭비가 될 줄은 몰랐다. 이런 시간 많은 호구 새끼가 주주 하우스의 돈줄 중 하나라니.

 

 

 

 

 


1925. 1. 19

 

 아침 일찍 램지 사무소로 왔다. 자그마한 공간이었지만 모든 물건과 사람이 제자리에 들어차 있어 제법 바쁘게 돌아가는 곳이었다. 우리는 잭슨 엘리어스의 유언장 집행에 참석했다.

 램지 씨는 먼저, 잭슨이 죽기 대략 3일쯤 전에 와서 맡기고 간 것들을 우리에게 건네주었다.

 

 

잭슨 엘리어스가 램지에게 남기고 간 것

 

 

 또, 잭슨은 죽기 전날 밤에 와서 자신의 유언장을 고치고 갔다고 했다.

그렇게 예감될만한 죽음이었다면, 아예 작정하고 우리를 목격자로 선별한 건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잭슨 엘리어스의 유언장

 

 

 잭슨 엘리어스. 이 빌어먹을 자식. 살아있었더라면 거하게 한 대 갈겼을 거다. 살아있었더라면.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핸드아웃은 혹시나 해서... 김칠이 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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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 3. 18

 

 내 이름은 일라이저 웨버.



이것은 저의 기록입니다.

 

 

 

 

 


 

 

 

 

 

 

 

 

 

 

페루로 간다.

형에게 편지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의 답신 끄트머리마다 으레 적히곤 하는, 나를 위해 기도하겠다는 그 말이 내게 주는 묘한 죄책감 때문이다.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탐사기자의 삶이 주는 자유로움이란 이런 것이다.

언제든 지금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훌쩍 떠나버릴 수 있는, 식물을 몇이고 말려 죽이다 결국 반려를 포기하는 삶.

내게 있어 저널리즘이란, 진실을 밝혀내는 행위 전반에 붙여진 이름이다. 인류가 만들어낸 이성의 불빛이 세상을 한번 밝힌 이후로, 그걸 들고 불 붙은 회전초처럼 쏘다니며 어두운 단면을 비춰보는 것이 나의 천직이 되었다.

진실과 그것이 가져다주는 명예야말로 내가 추구하는 전부다.

 

 

 


 

 

 

 



 리마에 도착했다. 탐험가 오거스터스 라킨 씨와 그의 조수 루이스 데 멘도사, 그리고 다른 탐사대 멤버들을 만났다.

우리는 마우리 호텔에, 라킨과 멘도사는 에스파냐 호텔에 묵기로 했다. 굳이 숙소를 다른 곳에 잡은 점이 의아했지만, 아쉽게도 에스파냐 호텔에 더는 빈 방이 없었다고 한다.

고고학자인 제이덕 에디 박사는 지나치게 젊고, 그의 하녀인 노라 애버트 양 또한 젊다. 처음에는 그가 탐사 캠프에 참여한 대학생인 줄로만 알았다. 어린 천재들이 갖곤 하는 그 치기어린 분위기 때문에, 그가 처음 입을 연 뒤로도 한참이나 편견을 갖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노라 양은 자기가 만난 억척스러운 어른들을 따라 하려 하지만, 그 흉내가 오히려 그를 더 소녀처럼 보이게 한다. 반면에 인류학자인 제시 휴즈 박사는 점잖은 사람이다. 분위기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이 하나 이상 있으면 자리에 활기가 돌기 마련이다.

 학자들은 자기 분야를 이야기할 때 들뜨는 경향이 있어 대화하기가 어렵지 않았다.

 우리는 21일에 피라미드가 위치한 쿠노로 출발하는 여정에 대해 안내를 받고,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석연치 않은 점:

*루이스 데 멘도사는 지나치게 말이 없고, 불쾌할 정도로 사람을 노려본다. 시선이 거칠고 날카로워서 라킨 씨의 자질구레한 변명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해 의심하게 만든다.

* 유물을 얻는 과정에 대한 라킨 씨의 설명은 부자연스럽다. 사전 연구 자료를 몽땅 폐기했다는 점도 수상하다. 아무리 경쟁자를 걱정한다지만 너무 과한 대처가 아니었는지?

 

* 라킨은 아프다. 말라리아 후유증?

* 동료들이 지나치게 풋내기처럼 보인다.

 

 

라킨 씨가 보여준, 알파카 농부 에르네스토 몰로로부터 얻은 유물(사진이 붙어있다. 하나는 금잔, 하나는 펜던트).

몰로의 할아버지가 피라미드 내부에서 나왔다고 한다. 각자 다른 시기의 유물로 보인다.

 동료 학자들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조금은 들뜬 태도로, 이 유물이 발견된 피라미드와 티와나쿠 문명 사이의 연관성을 짐작했다. 티와나쿠 문명에 대한 연구는 학계에서도 갓 시작된 상황이고, 지금으로서는 밝혀진 자료나 정보가 거의 없다. 유물들의 출처가 정말 알파카 농부의 말대로라면 이 피라미드에 대한 조사는 굉장한 학술적 업적으로 발전될 가능성이 있다.

 

 형이 이걸 본다면 또, 내 명예욕이 내 목을 조른다고 생각하겠지. 이렇게 찜찜한데도 당장 미국행 배표를 끊지 않은 건 바보짓이라고 말이야. 윌리엄. 나도 동감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것도 알아. 이게 내 천성이거든.



 

아니나 다를까. 라킨과 멘도사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팀의 인류학자가, 자신이 실은 제시 휴즈가 아니라 잭슨 엘리어스이며 작가라고 밝힌 것이다(이런 반전을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이후에 이어진 이야기들은 더 믿기 어려웠다. 술 취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농인지, 진심인지를 분간하느라 제법 시간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죽음숭배 교단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지방을 빨아먹는 흰 얼굴의 남자에 대한 이야기, 카리시리 전설에 대해서도 들려주었다. 카리시리 전설이 이들 교단의 제물 의식과 관련될 것이 아닐까 하는 짐작이었다. 전설이나 민담이 인간이 괴악한 현실을 설명하려고 떠들어댄 소리라 본다면, 얼핏 그럴듯하게도 들린다. 하지만 애초에 가짜 신분을 들이대고 참여한 사람을 얼마나 믿을 수 있을지.

 멘도사가 카리시리다? 설마.

 

 어차피 21일까지 일정이 여유로웠기 때문에, 내일은 모두 그와 함께 고고학 교수 네메시오 산체스를 만나 본격적인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날 밤은 정신없이 지나갔다. 나는 묘한 풀 냄새가 나는 호텔 방에 누워 잠을 청했다.

 

 

 

 



1912. 3. 19

 

 산 마르코스 국립 대학 고고학 및 인류학 박물관.

 대화를 길게 나누지는 못했지만 산체스 교수는 양식 있는 인물로 보인다. 그의 영어는 능숙하고, 연구에 대한 태도는 진중하다. 나는 탐험대의 일원인 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최소한 지금 나와 동행한 애송이 고고학 박사의 모습보다는 자연스럽다(그의 천재성을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현장에서는 경험 있는 사람을 더 믿는다).

 하지만 어거스터스 라킨은 산체스 교수의 탐사대 지원을 일방적으로 무시해왔다고 한다. 어째서? 산체스 교수는 팀을 외지인으로만 꾸린 라킨을 수상쩍다고 여기며, 도굴꾼으로 의심하고 있다. 벌써부터 책임자를 흰눈 뜨고 보고 싶지는 않지만, 합리적인 주장이다.



 

(이 뒤는 온통 휘갈겨 쓴 글씨로 적혀 있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부정하고 싶어도 믿을 수밖에 없다.

나와 노라 양, 제이덕 박사 셋이 자료를 가지러 가서 돌아오지 않는 조교 리소를 찾아 아래층으로 내려갔다가, 미라가 된 그의 시체를 발견했다.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지방을 빼앗긴 시체(사진이 첨부되어 있다). 그의 옆에 있던 거대한 황금 판에는 타버린 살점이 붙어있다(사진).

 처음 시체를 발견했을 때, 나는 숨이 막히고 방이 조여오는 듯한 감각에 거의 도망치듯 현장을 빠져나와야만 했다. 현장의 사진은 평정을 찾은 뒤 돌아가서 찍은 것이다. 카리시리. 카리시리가 있어! 그런 생각만이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고작해야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지방이 말라붙은 시체를 보고서.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사람을 부르러 올라간 복도에는 칼을 맞은 이가 쓰러져 있었다. 소리를 듣고 사무실에서 나온 잭슨이 환자를 돌보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어째서인지 뱀의 혀가 목 뒤를 핥는 것 같은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이게 아닌데. 이건 아냐. 불길한 직감에 다급히 사무실 문을 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산체스 교수는 고통에 젖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교수는 거의 숨을 쉬지 못하고 헐떡이면서도, 자신이 누군가의 키스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비틀린 농담이냐고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그의 입 주위에는 정말로 허여멀건 뭔가가 말라붙어 있었다. 다급히 조처한 끝에, 그는 입에서 하얀 액체 덩어리 같은 것을 뱉고 쓰러졌다. 그 액체 덩어리가 마치 살아있는 존재인 양 내 쪽으로 달려오던 모습은, 제기랄, 맹세컨대 착각이 아니었다. 동행한 잭슨이 아니었더라면 나도 위험했을 것이다.

 산체스 교수는 그대로 병원으로 실려갔다. 상황이 안정되자 모두가 머리를 맡대었다. 대체 누가,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일까? 우리는 그 존재가 무슨 이유 때문이건간에, 시체 옆의 뜯어진 황금 판을 노렸으리라고 결론을 내렸다.

제이덕 박사는 이 판에 쓰인 글자를 살면서 한 번도 본 일이 없다고 했다. 그것은 지금껏 발견된 어떤 고고학적 기록과도 일치하지 않고 유사하지도 않다고 한다. 인간 문명사와는 동떨어진 문맥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 같은, 어떤 멸실의 문명.

 

현실을 유지하고자 하는 감각이 부닥친 모든 사실을 정면으로 부정해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명백히 보이는 진실을 외면하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애초에 기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머리가 너무 좋은 사람이다. 나는, 이제와서는 시간 낭비에 불과한 신랄한 태도를 빠르게 내다버렸다.

 

 

 

 

연구자 트리니다드 리소가 평안 속에 잠들길.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번역물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쓰여있었다. 

 



 1541년. 스페인 정복자들. 사원. 죽은 사람. 저주. 황금 판. 역겨운 구토. 에리식톤과 같은 영원한 굶주림. 그런 저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내 안의 무언가를 파괴한다. 곱씹을수록 모래 위에 쌓인 성에 금이 가고야 마는 기분이다. 그러나 거기에 유난 떨며 애도하기에는 현실이 지나치게 끔찍하고, 나도 지쳤다. 지금은 내가 지킬 수 있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기로 한다. 

 루이스 데 멘도사가 진짜 카리시리라면, 다른 무엇보다 멘도사의 학대 아래에 있을 라킨 씨가 걱정되었다. 그의 핏물 빠진 시체마냥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얼마나 알고 또 얼마나 이용당하고 있는 것일까? 본인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물음이었다. 우리는 그를 구하기 위하여, 에스파냐 호텔에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역시 에스파냐 호텔에 남은 방이 없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걱정이 컸지만, 힘을 합쳐 무사히 라킨 씨를 구해왔다. 그가 헤로인에 찌들어 있어 황급히 산체스 교수가 입원한 같은 병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의사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살아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이다.

 

 검은 피가 흐르는 정맥, 곱아드는 나선의 기이한 문신과 먼듯 가까운 곳에서 풍기는 썩은 내.

 그것들의 의미를 곱씹기 전에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에 집중하고자 한다.

어차피. 살아있는 사람은 무슨 이유가 있든 살아야 하니까. 그렇게 내버려 둘 수도 없었던 것이다. 모두가 찬찬히 설득하자 라킨 씨도 경계를 풀고, 결국에는 눈물을 보였다. 의뭉스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를 동정한다. 아무래도 그의 기억은 부분적이거나 흐려지는 일이 잦은 듯하다. 아마도 멘도사의 영향이겠지.

 

 제이덕 박사는 피라미드에 이 황금 판을 되돌려놓을 생각이다. 우리는 멘도사를 따돌리고자, 내일 아침 곧장 푸노를 향해 출발하기로 했다.



 

 

 

 

 1921. 3. 23

 

 푸노에 도착했다. 그간 특별히 일기를 적을 만한 사건은 없었다. 고원 지대로 향하면서 날이 추워져 모두가 판초를 둘렀다는 것 정도.

 동료 탐사대와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제이덕 박사와 노라 양은 좋은 사람이고, 잭슨 씨에게는 이제 어느 정도 마음이 놓인다. 각자에게 귀찮은 면이 있지만. 이 정도 척박한 환경에서 남과 지냈는데 그리 지치지 않았다는 것만 해도 선방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라킨 씨는 계속 아프다. 서둘러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여기서부터는 트럭이 가지 못하는 길이라 노새와 짐승들을 빌렸다.

 알파카의 형태가 어린 사람들에게 어필하는가? (왜 이렇게들 좋아하는 건지.)






새벽.

잠들지 못하니 뭐라도 적는다.

 

우리는 간밤에 산속에서 야영했다. 불침번을 서던 나는, 멘도사가 노새 한 마리를 뜯어먹고 노라 양을 공격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입이 마치 악몽에 나오는 괴물처럼 비틀리고 촘촘한 이빨로 빼곡한 것도 보았다. 그는 인간이 아니다. 카리시리다. 대체 카리시리가 뭔데? 이 세상이 신의 창조물이 아니고, 그렇다고 어떤 물리적 균형과 과학적 법칙의 결과물 또한 아니라면? 우리가 죽여서 불태워버린 것이 사람 형태의 괴물인지 세상에 대한 얄팍한 믿음인지? 혹은 둘 다인지. 우리는 그 재를 땅에 묻었다.

 

 멘도사는 거울을 하나 가지고 있었다. 뒷편에는 가면의 형태가 새겨져 있는 황금 거울 유물이었다. 나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이 내게 기묘한 환상을 보여주었다. 나는 수천 갈래 터널 속을 나아갔다. 뜨거운 바위, 체온이 느껴지는 바위를 보았다. 그 옆으로는 구덩이가 파여있었다. 짐승의 울음소리, 울음소리, 울음소리를 들었다. 울음소리를 들었다. 울부짖음, 을 들었다. 울음소리를 들었다.

 

 블레즈 파스칼은 “삶은 덜 불안정한 꿈일 뿐이다.”라고 적었다. “우리가 매일 밤 똑같은 꿈을 꾸게 된다면 우리는 그 꿈을 일상의 모든 것처럼 똑같이 여기게 될 것”이고 다만 그렇지 않은 이유는 “현실에서는 삶의 연속성이 끊어지지 않지만 꿈속에서는 그렇게 지속적이고 한결같지 않기 때문”일 뿐이라고.

 그 말을 빌어 적는다. 내가 지속되는 환상 속에서 바위의 뜨거움을 느끼고 인간의 형상을 한 그러나 인간과는 수억광년 멀어진 그 무엇이 인간의 기름을 빨아먹는 것을 보고 수천갈래로 끔찍하게 찢어지는 비명이 고막을 쟁쟁하게 울리는 것을 듣는데 그것이 내게 어떤 연속성을 가진다면 이것은 별반 나의 현실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환상은 그저 환상일 뿐이라고, 꿈은 그저 꿈일 뿐이라고, 결코 온전히 믿지 못한다. 며칠 전까지 한낱 유물론자였던 사람으로서 이 명제가 어느 정도는 참일 수도 있다는 점이 나를 절망케 한다.

 숨이 찼다. 절망에서 기어 나오기 위해 나는 걷기로 했다.





 

 1921. 3. 24

 

 우리는 거의 잠들지 못한 채, 멀리서 해가 밝아오는 대로 출발했다. 현지인 농부의 아들이 칼리시리들에게 습격당해 다친 것을 도와주었다. 농부는 몹시 예민해져 있어서 우리를 거의 쏠 뻔했다. 예상대로, 칼리시리 몇이 더 있는 모양이었다. 가엾은 소년은 무참하게 피를 흘리고 있었다. 괴로운 마음이 들었다. 상처를 동여매고 지혈하자 호흡이 조금은 편해졌다.

인간이 인간을 돕는 것은 본성이다. 십여 년의 관찰이 있었지만 이 믿음은 변함없다.

 우리는 피라미드 근처로 다가가지 말라는 농부의 만류를 뒤로하고 그곳을 향해 나아갔다.

단지 옳은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 이후 본 것에 대해서는 자세히 적고 싶지 않다.

  -푸노의 계곡

  -풀을 눕히며 기어가는 두 사람. 아냐. 사람이 아닐 것이다. 스페인 정복자 남성과 현지 여인의 차림이었다.

  -피라미드 꼭대기에서 번갈아 구토하는 칼리시리들의 기묘한 행위.

  -파리들. 빌어먹을 파리들.

 

 사진을 몇 장 찍었다. 고산지대의 풍광은 춥고 무심하다. 제 안에 무슨 독을 품고 있는 지 모르고 관심도 없는 듯하다. 우리는 계곡에 난 위험한 길을 갔다. 돌담이 피라미드 주변에 둘려 있고, 입구에는 고인돌 형태의 석문이 서 있었다. 지나간 시간에 닳았으나 여전히 끔찍한 모습의 부조가 돌담 사이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피라미드의 상당 부분은 쌓인 흙이 만든 세월의 바다에 잠기고, 다만 5층 정도만이 드러나있었다. 앞서간 칼리시리들의 모습을 보았기에 모두 끔찍하게 지치고 긴장한 상태였다.

 조심스럽게 피라미드의 주변을 뒤진 우리는 시체가 잔뜩 쌓여있는 구멍을 발견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어보였다. 폐소공포증이 있다는 라킨 씨와 죄 없는 동물들을 밖에 두기로 하고, 모두 그 무저갱 같은 어둠 아래로 내려갔다. 닷새 굶은 사람도 식욕을 잃을 만한 부취가 진동했고, 들러붙는 살찐 파리떼 때문에 눈을 뜨기 힘들 정도였다. 노라 양이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제이덕 박사를 과보호하려 들었다. 물론 그럴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구덩이 한가운데서 한시도 멈춰있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파리와 바싹 마른 나무토막 같은 시체들 사이를 지나쳐, 좁은 틈을 비집고 토기를 참으며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윌리엄. 나는 이날 지옥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게 되었어. 내 오만이 나를 거기로 이끌었어.

나는 내가 본 것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을 거야. 그런 걸 사람으로 태어난 예의라고 불러도 되겠지.



 유적에는 파리가 많았다. 지나치게 많았다. 게다가 평범하게 서서 지나가기에는 너무 좁았다. 목과 허리가 뻐근했지만 긴장 때문에 당시에는 제대로 깨닫지도 못했다. 갈림길의 한쪽에는 방이 있었다. 제이덕 박사가 해석하기로는, '충신의 방'이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잠든 칼리시리들을 보았다. 그들은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고 그 모습은 마치…… 사람 같았다. 한쪽 벽에는 그들이 모은 것으로 보이는 재물이 쌓여있었다. 이런 와중에도 사람의 형상을 한 그들을 해코지 하는 데에 기묘한 죄책감이 들었다. 파리들도 우스운지 주변에서 윙윙 비웃어댔다. 그 잠이 깊어서 우리를 알아채지 못했기에, 결국은 조용히 문을 닫고 지나쳤다.

 중간에 시체 속에 깃든 흰 벌레에 습격당하는 사건이 있기는 했어도, 우리는 결국 황금 판이 뜯어진 곳을 찾아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뜯어진 구멍에서부터 하얀 액체가 새어 나와 그 밑으로 웅덩이를 만든 것이다. 웅덩이가 3m 정도의 넓이였기 때문에 당장 판을 제자리에 돌려놓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우리 중 누구도 그 웅덩이로 직접 걸어 들어갈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그곳을 건너갈 간이 다리를 만들기 위해 노새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어거스터스 라킨이 아니었다.

 

 

 

 

 

 라킨의 몸에 깃든 그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그 목소리와 (이 뒤의 묘사는 검게 칠해져 있다)

 나는 알아. 악마는 이렇게 생기지 않았다. 악마는 단지 사람의 창조물일 뿐이니까.

 그러나 사람이 악마, 마귀, 악귀, 이런 단어를 써서 어떻게든 설명하고자 했던, 설명하고 이름 붙임으로써 약하게 만들고 또 잊으려고 했던 어떤 존재, 그런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나를 편안한 밤으로부터 영원히 추방한다. 내가 쏜 총알은 고작해야 어거스터스 라킨의 죽은 머리를 부쉈을 뿐이다. 그 안에 있었던 것은 일말의 생채기도 입지 않았다. 그냥 떠났다. 나는 안다.

 

 

 어거스터스 라킨, 그가 제 몸을 괴롭히던 지옥에서 벗어났기를 바란다. 나는 그의 시체를 묻어주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갔다.

 거기에는 최대 4센치 정도 직경의 틈이 벌어져 있었다. 안에서는 지독한 썩은내가 났고 파리들이 피어올랐다. 나는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 ■■ ■■■ ■■ ■■■■■ ■■■ ■■■. ■■■■ ■■■■. ■, ■ ■■■■ ■■■■. ■■ ■■■■■ ■■■ ■■■ ■■.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경치는 거짓말처럼 평화로웠다.

 

 우리는 황금 판을 제자리에 돌려두었다.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두 칼리시리는 비명을 지르며 재가 되었고, 제이덕 박사와 잭슨 박사가 그들의 재물을 조금씩 챙겼다.

이후로는 제대로 대화도 나누지 못하고, 거지꼴을 하고선 리마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제대로 된 기억조차 없다.

 

 



 

 

1921. 4. 4

 

 나는 진실 그 자체를 바꾸지 못하는 한 개인일 뿐이다.

 그러나 진실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또 취할 것인가? 이것만은 내가 결정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생각이 동시에 떠다니며 현기증처럼 나를 쫓아온다. 나를 한없이 무력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더없이 강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 기록에서조차 거짓말을 했다.

 한때는 사람의, 사람을 위한 밝고 명징한 기호와 세상을 믿었다. 살아온 세월이 그리 길지는 않아도 언제나 그런 것들을 위해 발을 내딛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어떤 것은 어둠 속에 영원히 묻어 두어야만 한다. 결정은 횃불을 들고 멀리 나온 사람의 몫이다. 내가 온 길을 다시 되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단지 내가 본 것을 당신이 참아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제는 피라미드에서 빈손으로 나오다 못해, 그 깊은 곳에 어느 정도 나를 묻고 온 기분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전에 없이 인간적인 기분이기도 하다.

 내 명예욕이 아닌 인간성이 나를 죽이리라고 생각한다.

 혹시 그렇게 된다면, 부탁드리건대 이 기록은 불태워주시기 바랍니다.





 

 일라이저 웨버.












1925. 1. 3

 

 

잭슨으로부터 전보가 도착했다.

4년간 묻어두었던 기록을 다시 꺼내게 되었다.

 

 

 

 

 

to be continued

 

9999님의 coc 타이만 시나리오 불사의 마법사와 사랑하는 인형의 짧은 후기로그?글?소설? 매번 쓸 때마다 뭐라 적어야할지 모르겠는 그것입니다. 세션 내에서 털지 못한 얘기라던가 더 할 이야기만을 조금 채워서 빈 곳이 많습니다. 1대1시날의 후기글은 처음인데 커플덕질로그가 되는군요...

개변이 다방면으로 들어가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스포일러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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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복

 

마태복음 5장 3­12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오.

-윤동주

 

 

 1.

 

 목 끝까지 검은 물이 가득 찼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물 밖에 둔 금붕어처럼 뻐끔대다 보면 마른 입술이 찢어져 틈새로 피가 고였다. 검은 물은 점막을 타고 눈앞을 흐리고 시끄럽게 귓바퀴를 흘러 사람을 미치게 하고 끝없이 끝없이 갉작거렸다. 녹아버린 정신이 곤죽이 되어서 바닥을 기었다. 내가 너무 작아. 너무 작아서. 그걸 내려다보고 있으면 욱, 구토감이 올라왔다. 어떤 날은 귀가 멀기라도 한 것처럼 비명만 겨우 지를 수 있었고 어떤 날은, 검은 물을 뱉어내고 싶어서 억지로 목젖을 후벼댔다. 맑은 위액을 실컷 토해내고 나면 타들어가는 목구멍을 잡고 겨우겨우 잠들었다. 

 

 나 갈라졌어. 찢어졌어. 산산이 조각났어. 살점 덩어리가 칠칠맞게 덜렁거리고 머리카락이 한 뭉텅이씩 뽑혀나갔어. 이빨이 다 부서져서 입술 사이로 후드득 흘러내렸어. 죽음이 앉았다가 버리고 간 몸을 꿰맨 후에도 나는 다시 비틀거리며 죽음을 찾아헤맸다. 어두운 동굴을 벗어나기 전 잠깐 우두커니 앉았던 것이 휴식의 전부였다. 그것이 인생에 단 한 번 찾아오는 축복임을 모르고 그것에게 버려졌다. 너무 쉽게 천국도 지옥도 날려버렸다. 이걸 사는 거라고 부를 수 있다면.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고 찬란하지도 아름답지도 않고 그저 지겹고 끊임없이 이어지기만 하는 멈춰있는 것조차 못하는 지저분한, 추잡한, 역겨운, 더러운

 검은 물. 조각난다는 게 무슨 의미인 줄 알아? 네 몸을 조각내는 순간순간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부서지는 것 같아. 해버리고도 끔찍해, 끔찍한데도 해버려. 하지만, 왜, 왜 네가 그런 얼굴인 건데? 내가 지금 얼마나 괴로운지 

 알기는 해? 안다면 돌아왔겠지. 예전처럼 그렇게 불러줬겠지. 그러니까 넌 아무것도 모르는 거야. 바보. 멍청이. 쓰레기. 네가 불쌍해. 네가 가엾어. 아니, 아니. 네게 그러고 싶지 않은데, 이럴 땐 내가 내가 아닌 것만 같아…. 어두워진 시야 가운데 숨 쉴 구멍이 떠오르면 배가 아프게 웃으며 뒤쫓았다. 세상이 여전하고 시간이 여전하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나면 두 배 무겁게 절망이 내려앉았다. 가끔은 분노에 사로잡혔고 어떤 때는 우울에 잡아먹혔다. 정신을 차리면 방은 엉망이었다. 부서졌다 고치고 부서트렸다 고치고 무너트리고 망치고 그리고 다시 세웠다 다시 무너지는 것들의 탑. 아수라장이 된 방 한 가운데에 서있는데 절박하게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서걱서걱 모래가 갈라지는 시야 사이로 네가 보였다. 그 눈을 들여다 본 게 얼마만인지 너무 낯설고 두렵고 역겹고 사랑스럽고 이상해서 깜빡이지도 못하고 쳐다봤다. 울 것 같은 목소리로 네가 말했다. 다시 시작해요. 다 지워버리는 겁니다. 당신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기만이래도 좋습니다. 제발 부탁입니다…….

 

 

 2.

 

 부서진 세상에도 봄이 왔다. 숲은 하나밖에 남지 않아서 이름도 없이 그냥 숲이었다. 살 자리를 찾아 날아온 꽃씨들 덕에 숲에는 온갖 꽃이 다 피었다. 흐드러지고 겹이 많은 분홍색 꽃, 가지 끝에서부터 둥글게 뭉쳐 떨어지는 두껍고 흰 꽃, 흙과 가까이 자라는 보랏빛의 손톱만한 꽃이며 노란색의 자잘하고 술 많은 송이까지 온갖 것들을 다 보고 지나가는 계절이었지만, 그는 그것들의 이름을 몰랐다. 책을 온통 뒤져봐도 없었다. 마법사는 가르쳐주지 않았다. 물어오는 목소리에 그늘진 눈길이라도 던져주는 날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겨울에는 알이 굵은 흰 눈이 펑펑 내려 바싹 메마른 이파리마저 전부 덮어버렸다. 그럴 때의 숲은 야속하리만큼 고요해졌다. 그런 계절에는 미쳐서 내지르던 비명도 다 묻혀버리기 마련이었다. 그런 고요함이 차라리 좋았다. 첫눈이 뿌듯이 쌓인 날이면 마법사는 뭘 하고 있었건 곧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창문 너머로 내려다보면 저 멀리서 혼자 눈을 뭉치고 있는 게 보였다. 고장난 마음에 평화를 주는 얼마 안 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무얼 만드는지는 잘 알기 어려웠지만 돌아보고 환하게 웃어주는 상상 같은 것을 했다. 짧은 하루가 지나면, 또 평소 같은 날들이 찾아왔다.

 마법사는 지겹게 변덕을 부렸다. 어떤 날은 눈밭이 너무 눈부시다고, 어떤 날은 꽃밭에 색이 너무 많다고 화를 냈다. 하늘에 별이 존나 많아서 그래서 너무 싫어서 죽여버리고 싶다고 했다. 그런 변덕에 맞춰 커튼을 치거나 하나 남은 눈을 가만 가려주는 게 그의 일과였다. 허락하면 뒤에서 마른 몸을 품에 댔다. 너무 괴로운 날엔 정말 심장이 멎은 사람 같이 움직이지도 않아서 그를 불안하게 했다. 일부러 불편하게 자세를 바꾸고 뒤척여도 미동 하나 없었다. 고통이 스민 일상이 단조롭게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갔다.

 

 

 3.

 

 아담이 그렇게 만들어진 것 어디에 무슨 죄가 있어서 인간은 그리도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까?

 

 

 4.

 

 고리 걸듯 가볍게 걸쳐 잡은 손이 간질했다. 그가 묻지도 않았는데 디터는 하고 싶은 얘기를 늘어놨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이제 그렇게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작고 보라색으로 우글우글한 것은 꽃잔디. 말하는 입이 즐거워 보였다. 아, 데이지. 교회 옆에 살던 노인이 이걸 앞마당 가득 키웠는데 한 송이라도 꺾어가면 화를 냈어. 잔뜩 쥐어박히고 울면서 돌아왔을 때는 그 사람이 너무 미웠지. 커서 알고 보니까 말이야, 전부 죽은 딸 거여서 그랬대. 죽기 전에 제일 좋아하는 꽃이었다는 거야. 내가 잘못한 거지. 이제는 꺾어가도 화낼 사람은 없지만. 그래도 데이지가 계속 데이지여서 다행이야.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지났는데…… 감상은 더 이어지지 않고 입술이 다물어졌다. 뭐라 물어보기도 전에 변명 같은 말이 덧붙여졌다. 말을 너무 많이 해서 목이 아파.

 물론 거짓말인 걸 알고 있었다. 상상하지 못하는 시절, 공유하지 못하는 추억이 어느새 물씬 다가와 눈앞에서 또 일렁이는 모양이었다. 이제는 그런 때에 초조해하며 서있지 않았다. 다정한 몸짓으로 몸을 겹치면, 그는 멀어졌던 것이 거짓말 같이 쫓아와 포갠 손 위에 손을 얹고는 했다.

 

 예뻐서요.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예뻤다. 느리게 붉고 다정한 색으로 물들었다. 리온. 그렇게 마주 불렀다. 그 이름을 말할 때 혀가 움직이고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새가 퍽 마음에 들었다. 왜 너를 그와 같은 이름으로 불렀을까? 다른 사람이라는 걸 인정할 수가 없어서? 그게 네 영혼에 붙은 이름이어서? 잘 몰랐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잊히고 만 이유였다. 가끔 그 이름 때문에, 자기가 그 이름 너머의 다른 사람을 찾는지 정말로 너를 찾는지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다. 그러나 묵혀둬 좋을 것이 없는 혼란이기에. 이내 고개를 털어냈다. 귓가에 곱게 고인 꽃 한 송이 때문에 하루종일 걸음걸음마다 향기가 났다. 그것 때문에, 어차피 오래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없었다. 얼굴을 돌려 마주 봤다. 그리고 아주 미약한 움직임으로 속삭였다. 네가 사랑스러워.

 

 햇살이 좋아. 조금 더 걷자. 걷다 보면 꽃향기도 바스러지고, 너도 조금쯤은 졸음에 고개를 기울일 테지만, 그래도 봄이 오면 어김없이 숲을 거닐러 가겠지. 그러니 저희가 영원히 슬플 것이요.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슬픔 다음에 오기로 약속한 것에 다른 이름을 붙일 수도 있을 거다.

 

 


핢님의 인세인 시나리오 마법소녀 마성시 마기카..의 후기 로그?소설?입니다. PC3 시점으로 쓰여졌습니다. 시나리오를 와장창 스포하고 시나리오 내용 고대로 따라갑니다 주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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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람에게 유배되면 쉽게 병든다 그리고 참 아프게 죽는다는 것을 안다 나는 여기서 참으로 아프게 죽을 것이다 (…)

-김경주, 비정성시 中



#. 1 꿈


햇살은 잿빛이었다. 그러다가 저물어가는 내색도 없이 밤이 되었다. 그림은. 자기가 언제 죽는지 궁금했다. 언제까지 살게 되는지도 궁금했다. 공기는 건조하고 언제나 아픈 냄새가 났다. 깨끗하게 소독한 병실은 거의 빈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림은 늘 약에 취해 떠있었다. 모르핀. 진통제. 차가운 알콜솜. 구멍난 핏줄에 링거 바늘이 들락거렸다. 자주 찔린 피부는 푸르게 죽어갔다. 제정신이 돌아오면 아팠다. 호흡기가 얼굴을 짓눌렀다. 엄마는, 네 영혼이 예민해서라고 했다. 영혼이 예민해서 남들한테 아프지 않을 것이 다 아프다고 했다. 처음에는 갈라진 기침. 그 다음에는 목소리가 안 나왔다. 이제는 혼자 숨을 못 쉬었다. 전에는 쉽고 단순했던 길이 엉켰다. 누구 탓을 할 수도 없었다. 선생님이 대신 병원에 데리고 갔다. 엄마는 새벽기도 나가던 것을 그만뒀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그림은 더 이상 그애가 웃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같이 있으면 옛날이 떠올랐다. 샴푸 냄새. 단팥크림빵. 유치한 이모티콘. 학종이. 연체된 만화책. 하교길에 따라오던 달. 잃어버린 딱풀. 빠진 이빨. 싫어하는 연예인. 딸기 요플레 뚜껑. 빌려준 교복 타이.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같이 밴드부를 하자고 했다. 예나랑 있으면. 재니스 조플린이 될 수 있었다. 그애는 마치 조플린을 보는 것처럼 그림을 봐줬다. 그러면 솜털이 쭈뼛 섰다.

예나는. 속눈썹이 길었다. 하릴없이 샐 수도 있었다. 늘 같은 눈동자였다. 변함없었다. 맑은 망막에 사람이 비쳤다. 전에는 그 너머에 있는 여자애를 알았던 것 같은데. 이젠 바닥에 떨어진 자기 모습만 보였다.


난 있잖아.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렇게 내뱉고 싶은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한테 다 잘 될 거라고 말하지 마. 책임지지도 못하면서. 괜찮아질 거라고 하지 마. 넌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픈 게 뭔지도 모르면서. 나한테

그애가 떠났으면 좋겠다.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림이 상처받을까봐 말을 고르는 잠깐이 싫었다. 상냥한 인사가 싫었다. 멋대로 커튼을 걷어서. 새 친구 얘길해서. 창가에 화분을 둬서. 가습기를 켜서. 화를 내면 눈이 동그래졌다. 넌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동정하는 게 싫었다. 그 동정에 기대는 자신이 지겨웠다.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지겨워. 네가 날 진짜 아낀다면. 이 씨발 좆같은 호흡기나 떼줘. 죽고 싶어. 더는 싫어. 꼴도 보기 싫어.

아냐, 아냐!

와줘서 고마워. 응 그렇구나. 재밌었겠다. 나도. 너랑 같은 학교에 가고 싶었어. 괜찮아. 맨날 방학이라서 좋은데. CD는 이제 더 안 가져다 줘도 돼. 응. 머리가 아파서. 미안. 엄마가 버렸어. 안 들어. 토할 것 같아. 내가 심한 말을 했어? 미안해. 다 약 때문이야. 가지 마. 네가 싫어서 한 말이 아니야.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정말 네가 안 오면 어떡해.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 더는 없어. 혼자야. 엄마는 울기만 한단 말이야. 아프기 싫어. 죽기 싫어. 외롭고 비참해.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데? 왜 나한테만? 어째서?




그날은 길거리에 캐럴이 울리고 있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진부했지만 의미있었다. 그림은 씻은 듯이 나았다. 곧 퇴원했다. 의사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의사가 말을 골랐는데도, 엄마는 교회에서 나올 생각을 안했다. 그림은 만약 신이 진짜로 있다면 일단 존나 패고, 그다음 존나 껴안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누워보는 집 침대가 낯설었다. 낯설고 떨려서, 꿈이라면 깨고 싶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하나님. 이거 꿈이라면. 꿈이면. 내일 일어나기 전에 꼭 죽게 해주세요. 그림은 죽지 않고 깨어났다. 숨 쉴 때 목에 뭐가 걸리지도 않았다. 천장에 붙은 야광별이 보였다. 창문을 열었다. 늦은 아침 공기가 찼다. 뺨이 얼어붙었다. 그 앞에 오래오래 서있었다. 그림은 이불도 개지 않고 이빨을 닦았다. 입안이 화하고 따끔거렸다. 혼자서 이상한 웃음을 웃었다. 다섯 번을 더 했다. 너무 재미있었다. 얼굴에 열이 올랐다가 다시 차가워졌다. 책상을 붙잡고 웃으면서 울었다. 한껏 유치한 척을 했다. 예나가 대신 받아다 준 새 교과서에 이름을 썼다. 임그림. 똑바로 썼다. 매직 냄새가 좋았다. 모든 게 다 좋았다.






#. 2 은화 서른 닢


“나 마법소녀가 됐어.”


그런 말을 들었다. 아마 학기 초였던 것 같다. 아직 찬 바람이 불었다. 머리카락이 날렸다. 그림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떴다. 예나한테서는 늘 좋은 냄새가 났다. 라일락 비누. 상냥한 사람한테서 나는 향기. 솜사탕 색깔의 뺨. 크고 둥그런 눈망울. 거짓말 같은 건 모르는 거울 같은 눈. 거기에 흘러가는 구름이 비쳤다. “아, 털어놓으니까 개운하다!” 예나가 웃었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예나니까. 이건 고작해야 여자애들 얘기니까. 하예나는 언제나 주인공이고. 그게 잘 어울렸다. 대단하신. 하예나. 누구나 다 널 좋아하지. 그림은 고개를 휙휙 저었다. 그렇게 하면 나쁜 생각이 털어지기라도 하는 마냥. “너한테 처음으로 말하는 거야. 아직 언니한테도 얘기 못했어. 걱정할까봐…….” 예나는 그림이 나았을 때.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줬다. 하나도 짜증나지 않았다. 아냐. 가증스럽지 않아. 안 미워. 예나는 착한 애야. 하나뿐인 내 친구야. 그러니까. 이건. 하나도. 다 괜찮아야 하는데

기분이 이상했다. 속이 울렁거렸다. 쓰라렸다. 근질거렸다. 화가 났다. 몸 위로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 같았다. 그림은 더덕더덕 붙인 밴드 위를 신경질적으로 긁어댔다. 눈을 굴렸다. 말은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럼. 그럼 이제 바쁘겠네. 그럼 우리 이제. 같이, 같이 못 놀아? 우리 영화도 보러가기로 했고. 또. 또…….

“아냐, 아냐!”


세상이 느리게 보였다. 연분홍색 입술이 움직였다. 예나가 말했다.


“우린 변하지 않을 거야. 친구잖아.”


그런 대답이었다. 하예나가 할만한. 단어 단어가 내리꽂혔다. 신경을 괴롭혔다. 우린. 변하지. 않을 거야. 친구잖아.

으응. 그림은 억지로 입끝을 올려 웃었다. 거짓말. 거짓말하지 마. 넌 나 같은 건 금방 잊어버리겠지. 아. 다행이다. 다행이네. 더 이상 날 불쌍하게 쳐다보지도 않겠네. 드디어. 다 보여. 난 다 알아. 잘 어울리네. 귀여운 리본. 그런 귀여운 거 너나 해. 유치해. 보기 좋네. 선물 포장지 같다. 존나 존나 예쁘네.


“마성시를 잘 부탁해.”


그러고 뭘 했더라. 옥상에서 밀어버렸나. 목을 졸랐나. 그런 상상을 하긴 했지. 다시 되짚으며 수천 번도 더 했다. 아니. 둘이서 슬러시를 먹으러 갔다. 중간에 예나는 마성시를 구하러 급히 가야했다. 자그마한 뒷모습이 보였다. 지독하게 허전했다. 그림은 집에 와서 전부 게워냈다. 화가 났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왜 화가 나는 지를 몰랐다. 입에서 위액 맛이 났다. 입을 헹구고 또 헹궜다. 수건을 걸었다. 비틀거리며 방으로 갔다. 왠 못생긴 인형 같은 게 침대 위에 앉아있었다.


“안녕. 난 QB라고 해. 나랑 계약해서 마법소녀가 되지 않을래?”


그림은 인형을 냅다 밀치고 자기 침대에 누웠다. 그대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싫어. 기분 나빠. 다들 나 좀 그만 괴롭혀. 꺼져.


“나랑 계약하면 대가로 소원을 하나 이루어줄게. 뭐든.”


꺼지라고 했잖아. 남들한테 관심 없어. 귀찮기만 하고. 다 망해버리라지. 알 게 뭐야. 난 바라는 거 없어. 예전이라면 또 몰랐겠지. 하지만 난 이미 다 나았다고. 아프지 않아. 기침도 안 해. 의사 선생님도 다시 병원 올 필요 없댔어. 노래도 잘해. 오히려 전보다 더 잘해. 내일 밴드부 오디션도 있어. 난, 난 그러니까…….


“하예나가 죽었으면 좋겠어.”


그림은 덜컥 뱉어냈다. 자기 입에서 나오는 발음이 섬뜩했다. 낯설었다. 수십 번 수백 번 생각했는데. 직접 말해보는 건 처음이었다. 차갑고 단호했다. 다른 사람 목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쓰레기. 쓰레기. 인간 쓰레기. 뒤돌아보기 무서웠다. 솜인형 새끼. 너도 내가 쓰레기 같다고 생각하지? 그렇게 말할 거지. 그러니까, 이런 게 될 리가……


“그래! 계약은 완료되었어. 네 소울젬은 여기 둘게.”

……?


인기척이 사라졌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다. 그림은 한참동안 이불을 덮어쓰고 있었다. 느리게 뒤를 돌아봤다. 아무도 없었다. 순간, 심장이 바닥까지 떨어졌다.


“야, 장난치지 마.”


적막했다.


“아니 잠깐, 잠깐! 야! 어디갔어, 어디, 아니. 씨발, 취소할래, 취소!”


그림은 벌떡 일어났다. 급하게 침대에서 내려오다 바닥에 고꾸라졌다. 온 방을 다 뒤졌지만 큐비는 없었다. 그래서 휴대폰을 찾았다. 손이 덜덜 떨렸다. 예나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어떡해. 어떡해 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찾을 정신이 없어서 오랜만에 번호를 쳤다. 아직 외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예나가 받지 않았다. 전에는 자기가 걸으면, 한 번도 받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야 내가 불쌍하니까. 그랬겠지만. 아니. 예나야. 내가 잘못했어. 네가 없으면 난. 난, 이제 친구도 없고. 난…….

직접 찾아가볼 용기는 없었다. 임그림은 비겁했다. 확인해야 하는 사실이 무서웠다. 무거웠다. 욱신거렸다.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림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시끄러웠다. 시끄러워. 입으로 그냥 꺼내서, 뱉어버리고 싶어. 거짓말. 거짓말이지. 이거 전부 다 꿈일 거야.

세상은 하루만에 무너지지도 달라지지도 않았다. 왜 무너지질 않는 거야. 나 때문에. 하예나가 죽었을 지도 모르는데. 비정한 새끼들. 무신경한 새끼들. 니들이 그애에 대해 뭘 알아. 대체 뭘 알아. 그림은 침대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다. 엄마는 그러도록 두지 않았다. 학교에 갔다. 그애 자리가. 뒷 자리가 비어있었다.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었다. 심장 씨발. 그냥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림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자기 자리에 엎드렸다. 어떻게 하지. 하예나가 없으면 예나가 기준이라곤 없는 큐비 새끼 어쩔 줄 몰라 고민하다 들고 나온 소울젬이 가슴을 딱딱하게 눌렸다. 엎드려 있기 불편했다. 하지만 고개를 들기도 싫었다.

그 때 누군가 등을 톡톡 두드렸다. 그림은 화들짝 놀랐다. 고개를 들자 거기에는.

하예나가 있었다.

아무 일도 없던 날들처럼. 그저 한참 뛰어왔는지 얼굴이 붉었다.


“어. 미안, 놀랐어? 어쩐지 늦잠을 자서.


입이 쩍 벌어졌다. 말라붙은 입술이 찢어졌다. 그림은 급히 예나를 잡았다. 팔다리를 만져봤다. 머리에도 손을 댔다. 따뜻했다. 그러니까. 살아있었다. 명백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씨발, 씨발! 너는 내가 얼마나, 얼마나…… 안심이 되자. 곧 울컥 짜증이 솟았다.


“왜 그래? 그림아?”


예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림자 하나 없는 얼굴이 이쪽을 봤다. 눈을 깜빡였다.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었다. 자그마한 계집애. 네가 대체 뭘 지키겠다고. 뭘 지킬 수 있다고. 네가 뭔데…….


“하예나.”

“어, 어?”

“나도 그 마법 머시기인가 하기로 했어.”


예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림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너랑 같이 있으려고. 넌 내…… 친구니까.”





#. 3 유다


그럴 수만 있다면 예전처럼,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내고 싶었다. 자신이 얼마나 추하게 굴었는지. 죄없는 이를 얼마나 미워했는지.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릴 줄 알았는데. 조금도 변한 게 없었다.

둘은 같은 학교 같은 부에 가자던 약속을 지켰다. 안 지켜진 것만 못한 약속이었다. 전엔 예나랑 함께 있으면 즐거웠는데 더는, 더는 그렇지 않았다. 예나를 온전히 예나로 볼 수 없었다. 자기가 비쳐보였다. 물론 그게 그애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만 여전히 화가 났다. 죄책감이 그림을 좀먹었다. 내리눌렀다. 압박했다. 질식했다. 숨이 막혔다. 이건 전혀 다른 병이었다. 면역이 없었다. 죽어갔다.

하예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면서 쳐다볼 때. 기분이 나빴다. 그애는 가끔씩 쓸쓸한 것처럼 웃었다. 그러면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넌 친구들이 있잖아. 사람들은 다 널 좋아한다고. 너한텐. 하예림도 있잖아. 넌 예쁘고. 행복한 애잖아. 대체 왜 그딴 표정을 하는 거야. 몸서리가 쳐졌다. 큐비를 붙잡고 화를 내도 소원은 이루어졌다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그럼 내가 대화하고 있는 건 송장인가? 난 송장한테 화를 내고 있는 건가?  헛웃음이 나왔다. 그럼 하예나가.

죽었다가 살아나기라도 했단 말이야?



그림은 미친 듯이 먹어댔다. 그래도 살이 붙지 않았다. 반쯤은 다시 토했다. 오히려 몸은 점점 가벼워졌다. 가끔은 머리카락이 뭉터기로 빠졌다. 됐어. 아직 많으니까 뭐.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무도 방해할 수 없었다. 그림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다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별로 상관없어. 아무도 몰라. 난 여기 있어야 돼. 난, 난. 있어야만 해.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그림은 부장이 좋았다. 배수아는 고작 한 살이 더 많았다. 1년은 긴 것 같으면서도 짧은데 어째서인지 수아는, 훨씬 더 어른 같았다. 뭐랄까. 태양 같았다. 그런 게 좋았다.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쩐지 이 사람을 생각하면. 그래도 조금은. 끔찍한 일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렇게 되고 싶었다. 인정받고 싶었다. 나는 이제 아픈 애도 아니고. 그런 애였던 적도 없다고 거짓말이 하고 싶었다. 당신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잘할 수 있다고. 증명하고 싶었다.





#. 4 나쁜 생각


하예나의 소울젬에서 마녀의 흔적이 끊어졌다. 그림은 놀라지 않았다. 놀랄 수 없었다. 모든 일이 단순하게 그려졌다. 하예림이 그랬겠지. 죽어도 못 놓으시니까. 그랬겠지. 솔직히 하예림에게는 아주 약간, 안쓰러운 마음 뿐이다. 부장이랑 친한 것도, 사사건건 가르치려 드는 것도. 남의 소울젬을 멋대로 오염시킨 것도 다 싫었지만. 임그림이 하예림에게 한 짓에 비하면 전부 깃털 같이 가볍다. 그림도 그걸 알았다.

하예나는 지금 무슨 기분일까? 궁금했다. 어떻게 이걸 다 알면서, 알면서. 그러면서 꿋꿋하게 마녀를 찾고 다 같이 무찌르자고 말할 수 있지? 그 마녀가 뭘로 만들어졌는지 알면서? 그런 모습을 볼수록 괴로웠다. 그냥 아무도 싸우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가 있구나 너는. 정말 대단해. 성스러워. 내가 졌어. 이제 그만할래. 탓하기도 지쳤다. 그냥 다 솔직하게 뱉어내고 싶었다. 될 수 있다면 사과하고 싶었다. 무릎이라도 꿇고 싶었다. 그러면 조금이라도 편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다 나 때문이야. 전부, 전부 다. 미안해. 미안해.

예나는 뛰쳐나온 그림을 쫓아왔다. 단 둘이 얘기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림은. 지금이 사과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 알면서도, 매섭게 예나를 추궁했다. 너 제대로 설명해봐. 대체 왜 너한테서 흔적이 끝나는 건데? 왜 말하지 않았어? 사람을 상처입히는 것은 너무 쉬웠다. 하예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예상한 것과는 달랐다.

그러니까. 그림이 나은 건 기적이 아니었다. 기도가 통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하예나의 희생이었을 뿐이었다. 착하고. 오지랖 넓은. 친구. 고작 그런 소원이었다고. 하예나는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내가 널 좋아하는 데 어떻게 그걸 얘기할 수가 있겠냐고. 좋아? 좋아한다고? …… 누가? 누구를?


귀가 울렸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턱까지 찼다. 손발에 감각이 없었다. 그림은 다시, 다시 도망쳐나왔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예나는 쫓아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쫓기는 기분이었다. 그림은 벽을 붙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하예나가 날 위해 그랬을 리 없어. 걔가, 그애가, 나는……

아니, 그랬겠지. 그러셨겠지. 어련하셨겠어. 하예나는 존나, 존나 착하니까. 그래. 세상에 기적이 어딨냐. 좋아한다고? 웃기지 마. 내가 불쌍해서 그렇게 얘기해주는 것 뿐이겠지.

씨발. 씨발, 나는, 나는 그래서 네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죽여버렸다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착한 척하래, 그러면 나한테 말이라도, 말이라도 해줬어야지 말이라도…… 내가 네 병신같은 목숨 살렸다고. 가엾고 불쌍해서 살려줬다고 자랑이라도 하지 그랬냐고.

난 이젠 돌이킬 수도 없는데.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그랬어. 그러면 이럴 일도 없었잖아. 너도 그냥 행복하게 잘 살 수 있었잖아. 대체  왜……

왜 끝까지 이렇게.

나를.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 5 非情聖市 비정성시


기쁨의 마법소녀 하예나가 마녀가 된 건 임그림 때문이다. 그러니까. 마녀가 세상에 남은 인간을 전부 죽여도 임그림은 할 말이 없다. 세상을 무너트려도 그러려니 한다. 사실 세상 같은 건 구하지 않아도 괜찮아. 괜찮아. 하예나가. 아님 하예림이 화가 나서 자길 죽인대도 기껍다. 어차피 이건 전부 임그림 때문이니까. 온세상 사람들이 모두 임그림이 추한 인간인 걸 안대도 아무 상관 없다. 하지만, 하지만

부장은 몰랐으면 좋겠다. 부장이 괴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언니가……


마녀가 나긋하게 날갯짓을 했다. 꿈이 조금씩 부서져내렸다.


수아는 단호했다. 낫 끝이 예나를 향했다. 예나는 그 선택을 받아들였다. 단 한 사람, 거기에 반발할 수 있었던 건 하예림이었다.

그래서, 임그림은 수아를 밀치고 앞으로 뛰어들었다. 생각할 여유도 없었다.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부드러운 허밍이 들렸다. 꿈이 부서져내렸다.


눈앞이 흐릿했다. 조금 멀리서, 당황한 기색의 하예림이 보였다. 필사적이었다. 어떻게든 자기 동생을 지키려고 버둥대고 있었다. 뭐야. 뭐야 하나같이. 마법이고 뭐고 다 세상은 안중에도 없구만…… 어쩌면 이렇게 되었어야 하는 일이었다. 언니는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데. 하예림은 처음부터 조준을 잘못하고 있었던 거다. 하나같이 멍청해서. 아. 지겨운. 소독약 냄새.


꿈이 무너져내렸다.


멀리서 부장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아파. 아팠다. 아니 이 정돈 아픈 것도 아냐. 나는, 나는……. 차츰 의식이 흐려졌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언니. 저 잘했죠. 다치진 않았나요? 나 괜찮았죠? 나는, 나는 존나 나쁜년이에요. 모든 걸 다 망쳐버렸어요. 저. 있잖아요 언니. 그래도 나. 열심히 했어요. 언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요. 언니가 좋았어요. 언니랑 있으면 좀 숨쉬는 것 같았어요. 그러니까. 나 잘했다고 한 번만 해주세요. 응? 언니. 언니는. 나 미워하지 않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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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 빈 내용을 더 채우고 싶은데 힘이 모자랍니다. 저희 파티는 전멸엔딩을 보았습니다. 제 PC3은 PC2의 빔을 맞고 탈락했습니다. 욕이..많이 들어가있고 워딩이 센데요, 캐적인 요소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 마성시! 비정하고 성스러운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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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리 씨가 떠났다. 우리는 23 제곱미터의 좁은 공간을 급히 벗어나고도 갈 곳이 없어 계단에 앉아 술을 마셨다. 그녀가 있던 공간의 빈 자리를 견디기 어려웠다. 

 그녀와, 그녀를 비우고 있던 것과 우리는 어쩔 도리 없이 이 세상에서 잠시간 공존했다. 정확히 공존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공존은 함께 존재한다는 뜻인데, 비움을 존재로 치부하는 건 틀림없이 모순이 될 테니까. 하지만 다른 대체어를 찾기 어렵다. 

 우리는 그것에 대한 깊은 대화를 피했다. 나는 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마침 상황도 도왔다. 그녀에게는 남은 시간이 얼마 없었고, 우리는 쫓기고 있었다. 나는 차라리 모래를 밟는 감촉과 좋아하는 노래에 대해 묻기로 했다. 

 아첨으로 길들였던 혀를 남의 진실한 안부를 묻는 데에 쓰는 게 낯설어서 나는 자주 말을 더듬었다. 그런 말들은 진심 뒤에서 맴도는 것이어서 서투르고 낮았다. 나는 그녀의 입술 속에 사는 검은 공간을 쉽게 마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사과하는 것을 잊었다. 그 때 두고 도망쳐서 미안하다고, 미처 화면을 쳐다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고, 그런 일은 이 세상의 누구도 겪어서는 안되는 거였다고 제대로 말했어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의 안녕을 위해서 그렇게 했어야 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죄책감을 목졸랐어야 했다. 그녀가 이렇게 빨리 떠날 줄은. 알고 있었는데. 다만 하기 어려운 말이었으므로 피했을 뿐. 

 차라리 버클리의 말을 믿고 싶다. 이 좁고 더러운 계단에서 눈 감는 것만으로 위안할 수 있도록. 속눈썹과 가죽과 붉은 실핏줄로 덮어서. 눈꺼풀 안과 바깥에 존재하는 것들을 싸그리 지워버릴 수 있다면. 시발 잠깐. 그런게 공허가 하는 일이지. 끔찍하다.  

 하긴 이제는 무언가를 새로이 믿는 일이 힘들다. 


 기껏 유리잔을 두 개 갖고 나왔는데 그는 병째로 마신다. 나는 최근 알게 모르게 그를 조금씩 따라한다. 잔을 얌전히 구석에 내려놓고 병을 들었다. 

 한 씨는 늘 짐이 적다. 

 의도인지 아닌지는 알기 어렵다. 언제든 떠날 수 있도록 그렇게 꾸려둔 것 같다. 어딘가를 목적하기보다는 그저 도망치기 위해서. 모든 행동에 그런 습관이 든 사람이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그와 말할 때 전보다 자주 초조해졌다. 그가 변해서가 아니라 내가 needy해져서다. 혼자를 감당하기 싫으니까. 나는 농담조로, 분명 그가 베리보다 먼저 총에 맞거나 시멘트에 묻혀 바다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내기를 걸고는 했다. 그는 도박을 잘 하기에는 지나치게 -내가 그에 대해 이런 말을 한다는 게 믿기지 않지만- 착하다. 이번엔 내가 졌다. 아쉽냐면, 아쉽지 않다. 슬프냐면? 슬프다. 

 우리는 공통점이 별로 없다. 

 그때는 선한 의도와 좋은 인간, 더 나은 인간을 믿었었다. 그런 것들의 존재를 믿었다. 인간은 위대하니까. 어쩌면 무궁무진하니까. 더 나은 위치. 경지. 고도! 높낮이에 눈이 멀어 뒤돌아볼줄 모르는 이상주의자였다. 누가 뜯어말려도 귀막은 채 내가 맞다고 생각한 길을 걸었다. 좋은 향수와 가벼운 권력은 덤이었고. 우드워드는 돈이 있었고 후광도 있었다. 명성 있는 사람의 숨에서는 달콤한 맛이 났다. 너무 달아서 이가 다 썩었지만. 나는 그를 사랑했으므로 어떤 날은 슬퍼서 한숨짓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를 클라리사에 대입했다. 그걸 위해 가족과 의절하고 많은 친구를 버렸다. 아직도 동생은 번호를 바꿔가며 욕설을 보낸다. 지금은, 적어도 그 모든 일이 있고서야 내가 즐겼던 것들이 얼마나 한심한 신기루였는지 안다. 

 다만 배움의 대가가 너무 크다. 그녀는 좀더 나은 대접을 받았어야 했다. 


 대체 그때 우리가 갖고 있던 건 뭐였을까요? 가졌다고 생각했던 건? 

 어째서 인간은 기댈만한 관념을 만들어내야만 했던 걸까? 

 믿음이란 뭘까? 

 전에는 나를 살게 해줬던 것들이 이제는 나를 죽이려고 하는데 손발에 감각이 없을 때는 어디로 도망쳐야 하지?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아니 

 이런 유치한 가정은 그만둔다. 나는 아직, 아직 후회하지 않는다. 깔끔한 화장실과 좋은 스킨을 쓰는 건 즐거웠지만. 누구도 나에게 그런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 그 누구도 어떤 존재도 그런 것으로 사람을 유혹해선 안된다. 나는 우리가 적어도 인생을 걸만한 일에 사용되었다고 믿는다. 그래야만 이 밤을 견딜 수 있다. 알아주는 사람이 옆자리에 앉은 도박 중독 불명예 퇴직자 뿐이더래도. 비록 서로 뿐이라 하더라도. 


 그녀는 공허에 잡아먹혀 완전히 비어버리기 전에 집을 떠났다. 나는 이 순간을 예비하며 최근 몇 년간 그녀의 일부분을 외우려 애썼다. 그 정도가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이 작은 유산이 오래도록 남기를 시간이 허락했으면 한다.

 이 집 또한 곧 빈다. 

 어떤 생은 쉽게 멈추지 않아서 눈이 시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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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조한 글이라 다시 보니 민망하군요... 공간에 관하여 탐사자 데미안 드부아는 우드워드의 비서이자 연인으로 젊고 허영심 많은 광신도였습니다. 동료 탐사자 베리가 속성 비움을 당하자 나중에는 자기 손으로 이 끔찍한 영화 필름을 불태우는 선택을 했습니다.



coc 시나리오집 이름없는 공포들에 수록된 공간에 관하여 후기? 짧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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