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윈. 내 어머니. 나는 실험을 하나 해보려고 해요.
이 편지가 닿았을 때 나는 당신이 기대하는 내 자리에 있지 않을 겁니다. 엠페도클레스는 신이 되기 위하여 에트나 화산에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시인 횔덜린은 그 죽음을 가지고 긴 비극론을 적어 내렸습니다. 평소답지 않은 감상에 젖은 당신의 아들은 엠페도클레스의 숭고한 행위를 피의 의식에 참여하는 것에, 신성한 불을 이고 지고 태양에 뛰어드는 것에 빗대고자 합니다.
압니다. 인간 아버지께서 구축하신 제 신실한 세계관에도 불구하고, 미스라스를 향한 제 신앙심이 저희 교단을 이루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그리 대단한 축이 아니라는 걸 당신도 질릴 만큼 잘 알고 계시겠지요, 그리하여 어쩌면 마땅한 의심을 하시겠지요.
타고난 경멸과 회의로 가득 찬 제 가슴을 당신보다 더 잘 이해하는 혈족이 생전이고 생후고 있었을까요? 당신 앞에서 저는 늘 솔직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의식 자체가 가진 의미보다는 그것의 형태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의식을 통해 나는 나보다 더 나은 것, 무언가 느낄 심장이 있고 무언가 사랑할 수 있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내 사랑의 대상이 나를 태워죽일 태양이라고 하더라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시간은 인간보다는 우리에게 조금 덜 파괴적이지만 여전히 절대적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세상의 풍파에 깎이면서 변질되는 것이 존재의 필연적 비극이라면, 수많은 나이 든 혈족처럼 자발적으로 그 변화를 받아들이지 않은 끝에 썩은 돌덩이보다도 못한 존재가 되는 것도 불가피한 비극입니다. 굳이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저는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받아들이는 쪽이, 새로운 세상에 끊임없이 적응하는 쪽이 훨씬 즐거운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차츰, 저 같은 젊은 혈족조차 지치는 때가 왔습니다.
그래요. 나는 어느 순간 깨달아 버린 것입니다. 새로이 열릴 세상에도, 새로운 시대의 런던에도 결코 내 자리는 없으리라는 사실을.
다른 자들과 섞인다는 것은 내가 무언가 더 거대한 것의 일부가 된다는 뜻이겠지요. 술에 물을 부어 그것을 완전한 물로 뒤바꾸는데 과연 얼마큼의 물이 필요할까요? 어느 시점에서부터 우리는 그것을 포도주가 아닌 물이라고 부르게 될까요? 불임과 불생산이야말로 제가 혈족이 인간보다 생물계에서 더 낮은 존재라고 판단한 근거였습니다만―네, 이러한 제 견해가 여러 혈족에게 불쾌감을 드렸음은 압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의 피를 뒤섞어 만든 새로운 ‘정신’은 어떤 형태일까요?
우리는 지금의 우리보다 더 나은 것을 낳을 수 있을까요?
예, 심오한 말장난이지요. 이것은 제가 평소에 골몰하던 실증적인 실험이 아닙니다. 제 궁금증과 호기심에 불을 붙인 것은 그들이 나의 영혼에 불러일으키고 말 형이상학적인 침투입니다. 자아를 논하는 데에 있어서는 저 같은 직업의 사람보다 더 능한 자들이 있으니 저는 제가 공부해 온 시인과 철학자들의 말을 빌려 제 행위를 길게 변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럼에도 제게는 당신의 축복이 꼭 필요합니다. 제 결심이 약하고 쉬이 흔들려서가 아니라, 그것이 제게 언제나 큰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인사를 남기며.
런던에서.
1941년 2월 12일,
당신의 아들 파록 하자리.
*
2012년.
‘실패했군.’
처음 그웬리언 패치 아윈의 말을 들었을 때 파록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그랬다.
내 것이 아님에도 마치 내 것처럼 끊임없이 이어지던 과거의 회상들. 이미지들. 그것들의 의미가 명료해지면서 파록은 뒤죽박죽인 머릿속의 궁전을 나와 나 아닌 것으로 정리하는 작업에 차갑게 착수했다.
그의 분류 기준은 단순했다. 강렬한 감정. 일상의 작은 파편에 가슴이 떨리고 뜨겁게 눈물을 흘리고 연인을 사랑하고 입 맞추는 것은 그가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신경회로가 병적이었기 때문이다. 타고난 병적인 뇌 탓에 그는 그런 것들을 결코 느낄 수 없었으므로…… 파록은 너무나 쉽게 분리되어 버린 나와 나 아닌 것들을 조망하며, 차갑게 실패를 곱씹었다.
이로써 분명해졌다. 이 ‘머리’에 갇힌 이상, 필연적으로 파록이 되고자 하는 자신은 될 수 없었다. 그는 반쯤 독이 서린 자조를 중얼거렸다. 피의 의식이여, 미스라스여, 당신의 불량한 그릇을 받으소서. 반품은 불가하나이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이야말로 육신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했는데 그러면 죽고 나서도 끊임없이 자기 육신에 천착한 나와 나의 동족들은― 결코 몸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나는 다른 모든 것을 떠나 결국은 이 몸에 남은 미련일까? 그가 배운 지오반니―이제는 헤카타라 불러야겠지― 제의에서는 남의 영혼을 제 몸에 덧씌우는 영혼 숙주의 의식이 있어, 과거의 파록은 그 배움의 끝에 어쩌면 또 다른 자신이 태어나는 것도 가능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영혼은 결국 자신이 자란 그릇을 닮는구나. 나는 내 바깥에서 온 것들로 억지로 나를 만들 수는 없었던 거다…… 결국 오직 내 안에 있는 것들만이 나를 이룰 수 있었던 거다. 파록은 가장 끔찍한 생각을 한 소년처럼 비밀스럽고 겸연쩍은 웃음을 지었다.
나는, 여기 있는 자들은, 미스라스를 숭앙하고 또 흠모했을 수많은 영혼의 파편이었다. 왜 죽었는지도 모르는 인간과 의식을 너무나 탐하던 혈족과 사랑을 아는 고대인과 섬세한 중세인까지, 심지어는 나까지 수많은 부서진 것들의 종합으로서 내가 존재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나인 동시에 내가 아니었다. 타인이었다. 그들은 파록 하자리와 너무 달랐다…… 그들, 내 몸에 선 자들 곁에서조차 파록 하자리가 있을 자리는 없었다.
‘아, 태양.’
너희 중 누구도 결코 태양을 다시 볼 일은 없을 것이다. 나를 살게 하던 것이 나를 죽이는, 새로운 시체살이의 법칙을 파록은 누구보다 빨리 받아들였다. 파록은 냉정하게 따지자면 고작해야 하늘에 떠 있는 불덩이에 그리 미련을 두지 않았다. 인간은 전기를 발견했고 금세 해를 잊어버렸는데 오직 미몽과 감상에 찬 혈족들만이 새삼스레 해를 그리워했다. 살아 있으면 관심도 두지 않았을 무정물 따위를 말이다.
그러나 기억 속의 그는 해를 올려다보며 뜨거운 감동을 느꼈다.
그렇다면 그건 내가 아니야.
그 모든 삶 속에서.
파록은 누구보다 차분하게 최악의 자신을 선택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은 나 자신이었다.
*
“실험을 해보자.”
루이즈 퐁소가 제안한 것은 섹스를 통해서 새로이 결속, 피의 결속과 같으면서도 조금 다른 ‘연결’을 이룬다는 기묘한 의식이었다. 루이즈도 이번에 처음 익힌 것이었고,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실험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파록 하자리는 차갑게 절망해 있었고, 절망한 사람이 그렇듯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선택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그는 그녀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면서도 내심, 하필이면 섹스라니 하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선물을 받은 사람처럼 곤혹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최소한 섹스를 할 줄은 알았다.
그는 부드럽게 손깍지를 끼며 물었다.
“제가 이 의식의 어느 부분에 집중하면 될까요?”
“내게 집중해.”
파록은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
그는 머릿속이 헤집어지고 재조립되는 감각에 토했다.
더는 분비되지 않는 위산 대신 붉은 액체가 침대 시트를 적셨다. 그는 부끄러움에 젖기도 전에 제 배 속을 뒤집어 놓는 이 감각의 정체를 알 수 없어서 공포에 젖어버렸다. 무서웠다. 너무 무서웠다. 더 이상 지속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한평생 귀가 멀었다가 갑작스레 세상의 소리에 직면하게 된 어린아이처럼 겁에 질려 주저앉아 엉엉 울고 싶었다. 모든 것이 너무 과했고 지나쳤고 혈관은 터질 것 같고 머릿속에서 새빨간 비상벨이 울렸다.
“기분… 기분이 이상해요. 이제 그만…….”
그가 눈가를 적신 채 비척비척 물러나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의식은 계속되고 있었다. 심지어는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루이즈는 어린애를 달래듯 그의 입가를 닦아주고 토닥이고 그를 재차 눕혔다.
젤로 젖은 딜도가 배 속으로 파고들었을 때, 파록은 서늘한 이물감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회의적이었다. 이미 뒤집힌 배 속을 물리적으로 재차 헤집는다고 무언가 유의미한 결과가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듯 처음에는 의미를 모르겠는 교합이었으나, 말을 잘 듣는 소년처럼 그녀가 시키는 대로 상대에게 집중하자 서서히 새로운 의미와 감각이 피어났다. 눈을 감으면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 진정이 되는 듯했으나, 동시에 배 속을 파헤쳐지는 감각이 너무 생생해졌다. 시각 정보를 차단하니 이제는 몸 전체가 합심하여 그녀를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는 아무리 그만두려고 해도 이 순간을 멈출 수가 없었다.
파록 하자리는 늘 침범하는 쪽이었다. 메스를 들고 배를 가르는 쪽이었고 타인의 집 문을 소리 없이 열고 들어가는 쪽이었다. 송곳니를 박아 넣고 주삿바늘을 찔러넣는 쪽이었다. 그래서 타인의 침입은 낯설고 부자연스러웠다. 하지만 혈족의 존재는 또 어떠한가? 이 세상에 그것만큼 부자연스러운 게 더 있을까?
그의 죽은 뇌를 어루만지며 말 그대로 곤죽으로 만들고 있는 새로운 침입의 감각에 비하면 섹스는 부차적이었다. 얼핏 덧없기까지 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맨 앞에 존재하는 것, 도망을 칠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이었다. 이 현상은 명명백백하게 섹스를 매개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것은 체험 지식이었다. 그의 몸이야말로 지금 쾌락과 쾌락으로 말미암은 현상의 증거였다.
구토감의 끄트머리에서, 파록은 애착을 느꼈다― 말도 안 돼― 그는 70년 만에 화들짝 잠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놀라며, 애착을 느꼈다. 그것은 잔뜩 물러서 썩어가는 과일처럼 너무나 징그럽고, 농후하고, 달착지근하고, 사랑스럽고, 역겨웠다.
그의 모든 혼란은 그녀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녀를 물고 싶었다. 배를 갈라 엉망진창으로 만들고 싶었다. 한입에 살점을 삼켜서 꼭꼭 씹어 피를 맛보고 그 안에 담긴 모든 비밀을 보고 싶었다. 그런 충동이 참을 수 없을 정도가 되자 그는 유독한 이빨을 그녀의 살갗 근처에서 달싹거렸다. 어린 짐승 같은 행동이었으나 헤카타의 저주가 깃든 송곳니는 귀엽게 봐줄 수 없을 만큼 위험했다.
루이즈는 재빠른 판단하에 그에게 재갈을 물렸다. 가여운 천 쪼가리가 그녀의 살갗 대신 갉히며 그의 신음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무정물을 매개로 깊게 진입할 때마다 길고 창백한 유령 같은 몸이 흔들리고 목구멍 안쪽에서 파묻힌 웅얼거림, 낮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기분 좋아.’
그랬다, 기분이 좋다는 것, 오직 그것만이 중요했다.
직통으로 뇌를 범하는 듯한 감각에 머릿속이 달콤하게 뭉그러졌다. 흐물흐물하게 곤죽이 되어 녹아내렸다…….
기분, 좋았다. 이제는 아무것도, 그 어떤 것도 상관없다고 느껴질 만큼.
파록은 자신이 느끼는 감각이 무슨 의미인지 아무것도, 아무것도 모르면서 탐닉했다.
*
다음 날 밤. 눈을 뜨며, 파록은 제발 그 낯선 감각이 사라졌기를 바랐다.
그러나 멀미를 닮은 울렁거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죽어서 텅텅 빈 지 오래된 내장에 썩고 짓무른 과일들이 들어찬 상상을 하자 또 속이 쓰렸다. 거의 도피와도 같이, 파록은 침대에 누운 루이즈 퐁소의 죽은 살을 만져보았다.
고세대인 그녀는 그보다 훨씬 늦게 깨어났다. 그는 잠들어 있는 남을 바라보고 있었던 적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그건 그저 먹이를 먹기 위해서였지 함께 침대에서 일어난 상대를 바라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평소 같았더라면 그는 눈을 뜨자마자 침대를 떠나 제 몸에 진득하게 들러붙은 피, 아직도 멎지 않은 이마의 상처 때문에라도 살갗이 벗겨질 때까지 씻어야 했다. 그러나 새롭게 꽃핀 감각은 그의 가장 오래된 습관마저 멈춰 세웠다.
그는 이 감각에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지금 가장 세척이 필요한 건 그의 머릿속이었다. 그녀를 보기만 해도 구토감이 일었다. 뱃속이 뒤집혔다. 어떻게든, 무슨 짓이든 하고 싶었다. 그는 제 배 속 깊은 곳의 충동을 따라 움직여 보았다. 썩은 과일들이 여기저기 제멋대로 굴러가게 내버려 두었다. 그러자 그의 손은 차가운 허벅지를 따라 안으로, 안으로 움직였다. 어제 몇 번이고 제 성기를 찔러넣었던 음부까지 매끄럽게 손이 이어갔다. 그녀의 음핵 위를 지분거리던 근육 기억이 아직 남아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그는 아무런 감정 없이 그런 행동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지금은…… 자신에게 추잡한 의도가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알았다. 그녀가 눈을 뜨자,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을 맞추었다. 무슨 연인이라도 되는 양 부드럽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좋은 밤이에요, 루이즈.”
루이즈 퐁소는 약하다. 세상에나, 약해빠졌다. 그렇지만 이제 그에게 그런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제는 그녀의 흉내가, 괴물이면서 여전히 괴물이지 못한 면이, 괴물이 아님에 집착하는 면이 사랑스럽게까지 느껴졌다. 정확히 똑같은 이유로 그는 어제까지 그녀를 점수 매기고 깎아내렸는데 지금은 그 똑같은 면까지 말도 안 되게 사랑스러웠다. 그는 그녀의 드러난 젖가슴과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존재하지도 않던 인내심은 어느새 바닥났다. 허락을 제대로 받지 않고, 그는 반쯤 구명줄이라도 잡는 기분으로 벌린 다리 사이에 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조금 당황스러워하던 눈치를 빠르게 갈무리하고서, 그녀가 느릿하게 그의 목을 둘러 안았다. 안을 가득 채우자 충만감이 다시금 머릿속을 뒤엎었다.
루이즈가 말했다.
“가짜야.”
그것은 기다란 약관 밑에 촘촘하게 쓰인 작은 글씨의 경고문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제대로 된 ‘진짜’를 느껴본 적 없는 파록 하자리에게 그 말은 너무 피상적으로 느껴졌다. 이렇게 기분이 좋은데.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그의 뇌와 신경을 아무리 쥐어짠다 해도, 거기에는 가짜와 진짜를 구분해서 즐길 만큼의 기능이 없었다. 그는 그저 느껴진다는 사실만으로 그 순간 반쯤 미쳐버렸다…… 애호의 감각은 피의 맛으로나마 느끼던 간접적인 애착보다 더욱 선명하고 뚜렷하게 뱃속을 찔렀다. 그것은― 정말로― 말 그대로 관통당하는 기분이었다.
“오, 루이즈. 세상에 가짜 감정 같은 건 없어요…… 뇌의 수용체는 가짜 감정과 진짜 감정을 구분하지 못하고, 그렇게 정교하게 작동하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뇌의 문제를 말하는 게 아니야.”
“하지만 우리는 몸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잖습니까?”
“영혼을 부정하는 지오반니는 처음 보는데.”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영혼도 어디까지나 몸을 기반으로…….”
당신도 그렇게 믿고 있지 않은가요? 그렇게 해서 한심할 정도로 연약하고 물렁물렁한 자아를 붙잡고 있지 않나요?
그는 부드럽게 말했지만, 그녀는 전혀 넘어오지 않았다. 무언가 그가 모르는 대단한 것을 안에 품고 있는 듯한 아몬드 모양의 눈…… 파록은 그것이 늘 궁금하면서도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다. 여자들은 언제나 비밀을 감추고 있었다.
그는 정신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저는 당신을 설득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물리적인 걸음은 바짝 가까워졌다.
그가 빙글 돌아 천천히 그녀의 등 뒤에 섰다. 손이 양어깨에 걸치더니, 뒤이어 절지동물의 사지처럼 길쭉한 손가락이 봉긋한 가슴 위로 느른하게 기어갔다.
“…….”
“그저 당신 안에 들어가고 싶어요. 당신이 내 안에 들어왔으면 좋겠습니다.”
그녀의 배를 가르고 두개골을 갈라서 그 안에 든 신비를 파헤칠 수만 있다면 파록은 진작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의 무자비함은 피아를 가리지 않아서 단순히 자아를 찾기 위해서라면, 그것이 가능하기만 했더라면 부분 마취를 놓고 원격으로 메스를 움직이며 마지막 이성이 해체될 때까지 자신을 해체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답은 명료했다. 그렇게 해도 남는 것은 피와 고깃덩어리뿐이다…… ‘나’는 신경과 신경이 손을 잡고 만나 이루는 반짝임, 무수히 작은 전기자극 속에서 발산하는 파편 같은 생각에 있다…… 아니, 실은 그곳에조차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진짜 나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그는 눈이라는 창에 주목했다. 그녀의 눈이라는 작은 창에 비치는 자기의 형상을 노려보며 그 어딘가에서 자신을 잡아보려고 했다. 그것은 때로는 흐릿하고 때로는 뚜렷했다. 그는 지금 당장 그것을 볼 수 있으면 족했다.
애호의 감각은 그의 다른 모든 생각을 마비시켰다. ECT처럼 그를 긴급히 구조하고 전부 멈춰주었다. 그는 그녀도 그렇게 느낄 것이리라, 그런 식으로 자신을 이용하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기에 아무런 거리낌 없이 다가설 수 있었다.
그는 허벅지에 손을 얹고 더듬고 그녀의 다리를 벌렸다. 뒤이어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신음으로 귓가가 먹먹했다. 새로운 안식처에 지문을 찍듯, 무슨 발정한 짐승이라도 된 것처럼, 그는 어디서든 가리지 않고 해댔다. 그 행위에는 더는 결속을 공고히 한다는 목적의식은 남아 있지 않았다.
파록은 자기 안을 비집고 터져 나오려고 하는 이 이상한 애호의 기분을 참을 수 없었고, 참아야 할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어차피 코테리의 혈족들이 반쯤 정신을 놓은 채로 각자의 방에 틀어박혀 있는 찰나에, 그들이 누덕누덕 기워진 정신을 언제 꿰맞춰 돌아올지도 모르는 이때, 할 일도 없이, 빌어먹을 미스라스도 없이, 하고 싶은 짓이라고는 진득하게 몸을 맞추는 것뿐이었다. 섹스는 타인과의 연결이었고 순식간에 나 자신을 잊는 일이면서 동시에 몸으로서의 나 자신을 뼈아프게 자각하는 일이기도 했다. 파록은 위생 관념을 포함하여 지금껏 자신을 이루던 모든 강박을 잊고 그것이 주는 기이한 매력에 몰두했다. 더욱 솔직하게 말하자면 꼭 섹스가 아니어도 됐다. 뱃속을 헝클다 못해 터져나올 것 같은 기이한 정열을 달래기 위해서라면, 그녀와 하나가 되기 위해서라면 다른 무슨 행위라도 상관없었다, 매일 아침 제 배를 가르고 축축한 창자를 그 입에 쑤셔넣어야 한대도 그는 서슴없이 몸을 내주었을 것이었다.
그는 말 그대로 반쯤 미친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에 아무런 이질감도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세상의 기준으로 바라보자면 그는 이미 죽기 전부터 망가진 비정상자였고 인간 흉내나 내는 가짜 인간이었으며 태어났을 때부터 뇌병신이었다. 파록은 비죽 웃으며 그녀의 척추뼈에 입을 맞추었다. 단 하나 달라진 점이 있다면, 적어도 지금 그는 빌어먹게도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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