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컥, 흐윽.

빗장뼈 위로 목이 졸렸다. 창백한 손이 호흡기를 꽉 짓누르자 숨이 턱 막혔다. 희열에 찬, 저주로 지은 성 같은 여자의 얼굴.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물거품이 흘렀다. 아무리 붙잡은 손을 잡아 뜯으려 애써도 몸은 자꾸만 가라앉았다. 모든 것이 어두운 회색으로 침잠하는 가운데 조금만 눈 돌리면 희게 죽은 시마의 눈동자가 보였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너머에 있는데. 아직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왜 멈춰 있나. 구해야 하는데. 구하러…….
점차 의식이 흐려지면서도, 눈꺼풀 위로 낙인찍힌 광경을 수백 번 되새겼다. 
나는 왜 그때 죽지 못했을까?
왜 내가 아니라 당신이었을까?


*


“무슨 안 좋은 꿈이라도 꿨어?”

이나흐는 헉, 숨을 들이켜며 깨어났다.
침대 넘어 어둠 속에서 흐릿하게 그림자가 보였다. 작은 조각도가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시마가 촛불도 켜지 않고 벽난로 불빛에 의지해 굳은살 박인 손으로 나무 조각을 다듬고 있었다. 시마의 유일한 취미는 그렇게 나뭇조각을 다듬어 자그마한 동물로 탈바꿈시키는 일이었다. 좁은 집의 선반에는 그렇게 만든 작은 조각품들이 줄줄이 서 있었다.

“…잘 기억이 안 나요.”

하지만 이미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이나흐는 다시 눈을 꼭 감았지만, 찝찝한 기분에 곧장 다시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그러자 어느새 시마가 조각을 내려놓고 다가온 모양이었다. 생생한 톱밥 냄새가 나는 손이 이마를 만졌다. 열 오른 이마에 비해 손길이 조금쯤 서늘했다.

“다시 자거라.”

그 낮고 고요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


시마 갈레온은 배를 타는 군인이었다. 솔트마쉬 출신은 아니고, 이 작은 해안가 마을이 앓고 있는 고질적인 해적 문제로 네버윈터 쪽에서부터 파병 온 부대의 일원이었다. 그렇게 눌러앉은 지도 꽤 오래되었고, 차가운 바닷바람이 어울리는 사람이어서 배타적인 해안가 마을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그럭저럭 지냈다.
시마는 소년이 파도 너머에서 밀려왔다고 했다. 이나흐는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었으니 간단하게 그 말을 믿기만 하면 되었다. 처음에는 서먹하던 제 이름도 성씨도 이제는 자연스럽게 입에 붙었다. 이나흐 갈레온은 그렇게 이나흐 갈레온이 되었다.
시마는 원체 말이 별로 없었다. 제 출신에 관해서도 많이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소년은 필연적으로 많은 부분을 상상으로 채워나갔다. 군인이 되어 나무를 깎고 무기를 만지는 한 여자의 삶을 그려보았다. 당장에 눈앞에 드러나는 것 말고, 그 바깥 언저리와 가장자리를 더듬어 모양을 톺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여간해서 잘되지 않았다. 이나흐에게 시마는 언제나 보이는 그대로 시마였고, 그 이전도 이후도 존재하지 않는, 말하자면 돌이나 나무처럼 그 자리에서 이대로 영원할 사람 같았다.

팔만 쓰지 말고 몸 전체를 써라. 발에 더 무게를 싣고.
거리를 내주면 불리해. 자, 이렇게.
너는 두 번 휘두르고 나면 오른쪽이 늘 비어.

그럴 때의 시마는 어찌나 단호한지,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일 때까지 무기를 휘두르다 보면 땀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대자로 드러눕기 일쑤였다. 
그렇게 한참을 훈련시켜놓고는 또 하는 말이,

“너는 커서 하고 싶은 걸 해. 책이라도 좀 보던가.”

이런 식이었다.
이나흐는 아무런 의심 없이 시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랐다. 하지만 서가에 있는 책들은 별로 재미가 없었다. 불평을 들은 시마가 엘리안더 씨의 도서관에서 다른 종류로 몇 권 빌려다 준 적도 있었지만, 이쪽에도 이나흐가 썩 흥미를 보이지 않자 곧 그만두었다.
너는 학자를 할 팔자는 아니구나. 내 자식이 맞나 보다.
그 말이 우습기도 하고 어딘가 기분 좋기도 해서 이나흐는 소리내어 하하 웃었다. 그래, 난 시마의 자식이 맞아요.
어지러운 바닷가 마을에는 다양한 삶이 있었다. 이나흐 갈레온은 그 어드메에 낀 자신을 상상해 보았다. 어부들의 반질반질 땀에 젖은 어깨나 선원들의 힘찬 구령 소리, 호각 소리.  꼬맹이라고 놀렸다가 크게 혼쭐이 난 뒤로 늘 공손한 인사를 빼먹지 않은 마을의 작은 어부에게 물질에 대해 이것저것 배울 수도 있었다. 장사 쪽은 아무런 재주가 없으니 쳐다도 안 봤고. 그렇다고 마실러 씨는 무슨 일을 하는 거냐고 물으면, 시마는 늘 말끝을 애매하게 흐렸다.
이나흐는 이런저런 궁리를 하다가도 곧 그만뒀다.

“하지만 나는 역시 시마처럼 되고 싶어요.”

그러면 그 무뚝뚝한 얼굴에 곤란해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이나흐가 대놓고 시마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는 얼마 되지 않는 순간이었다.

“군인은 위험해. 다른 일도 많아.”
“시마도 하잖아요.”

그렇게 말려도, 이나흐가 고집을 부리면 결국은 그 무뚝뚝한 눈썹이 한 꺼풀 누그러지며 물러났다.

“사람들을 지키는 게 내 일이야. 너도 포함해서.”
“그건 내가 시마의 가족이라서요?”
“아니야, 이나흐.”

단호한 대답에 그가 일순 시무룩한 얼굴이 되자, 시마가 한발 늦게 덧붙였다.

“내 말은, 네가 내 가족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시마는 말을 끌과 정으로 다듬는 것처럼 아주 천천히 발음했다.

“나는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지킬 의무가 있어.”
“왜요? 시마가 대단한 사람이라서?”
그게 내 일이라서.”

이나흐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동어반복이잖아요.”

시마는 무뚝뚝한 사람이어서 원체 설명을 잘 못했다. 어쩌면 남과 사는 게 익숙하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속 안에 든 것을 꺼내기 위해 시간이 많이 필요했고, 이나흐는 한 사람의 안에서 말이 단조 되는 과정을 우두커니 서서 기다리는 시간을 좋아했다. 시마가 제 질문을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 느낄 수 있었고, 시마와 떼려야 뗄 수 없는 특유의 그 진지한 태도가 좋았다.
지금 와 돌이켜보면, 모든 시간이 덧없고 소중했다.


*


창이 무참하게 몸을 뚫고, 눈앞에서 쓰러지는 죠바니오 마실러를 본 순간, 새하얗게 죽은 눈이 시야에 겹치고, 세상이 새빨간 덩어리로 뭉쳤고, 지진이 난 것처럼 눈앞이 흔들렸다. 이후로는 무슨 정신으로 싸웠는지 아무런 기억도 나지 않았다. 제대로 된 판단이라고는 하나도 내릴 수가 없었다. 몽롱하게 지쳐서 한 걸음 걷기도 힘들고, 팔이 천근만근 무거운 순간에. 이대로 전부 꿈이었으면 했던 시간이, 몇 날 며칠이 지난 것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흘러 겨우 그의 숨이 돌아왔을 때, 맥이 탁 풀릴 만큼 안도감이 들은 것과 동시에, 
이나흐 갈레온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기회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 되살아난 게 죠바니오가 아니라 시마였다면 좋았을 텐데.
죽은 지 백 년은 지난 드레이크마저 언데드가 되어서라도 돌아오는데, 당신은 이 세상에 아쉬운 것 한 점 없으니, 내게 돌아올 생각도 안 하겠지…….
그리고 직후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혐오스러웠다. 너무 부끄러운 미망(迷妄)이어서 차마 고개를 들 수도 없었다.

무슨 자격으로 기회를 바란단 말인가? 그날 이후로 자신은 살아 있으면 안 되는 거였다. 매일이 비명이었고 하루하루가 빌려온 시간이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돼. 내가 막아야 해. 나는 그러기 위해서 살아남은 거야.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는 단 한 순간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죽지 않은 거다. 책임을 버리고 나를 버리고, 바다로 뛰어들지 않은 거다. 반쪽짜리 스네이크 아이 시그가 뇌수를 흘리며 뒤쫓을 때, 로제 플로렌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이며 괴롭힐 때, 이나흐 갈레온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흡사 주문이라도 외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냐. 빌어먹을 것들.
나는 후회하지 않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단 말이다.
나는 후회하지…….

시마는 후회하지 않을까?

'나는 결국 당신 같은 사람은 못 되는 거였어요.'

뿌리부터 썩어빠진 것을 주워다가, 그만치 긴 시간을 들여 갖은 용을 써서, 고작해야 나로. 나로 길러낸 게 후회되지 않을까?


*


다시 만난 창백하고 흰 눈동자는 익사자와 같은 색이었다. 

[네 적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냐?]

귀 있는 신들이 들었다. (그래서 당신도 들었다는 건가? 빌어먹을 바다 같으니라고.)
이나흐 갈레온은 선택을 했다.
그리고 후회했다.
무슨 선택을 했건 후회했을 것이다. 알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료를 죽게 둘 수는 없었다. 소중한 동료니까. 비밀을 털어놓을 만큼 가까워졌으니까. 그만큼 소중해졌으니까. 
그것을 후회한다. 아무런 죄도 없는, 순박한 알스턴을 미워할 수는 없다. 그는 대단한 사람이다, 마을에 없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아니 이런 변명하지 않아도 이나흐 갈레온에게 중요한 사람이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수상한 티플링도, 먼 바닷속에서 온 엘프도 마찬가지다. 만약에라도 오늘은 두 번째의 죽음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견딜 수가 없었다, 약하기 때문에, 약해서. 그저 내 마음의 문제다. 내 마음이 기울었다. 내 마음이 증오와 애호를 한데 품지 못하고 약해진다. 이나흐 갈레온은 자신이 혐오스러워 더는 참고 견디지 못한다. 당신들이 나를 약하게 만들어.

“일단, 살고 보자고.”

내가 그럴 가치가 있는 인간인가? 그는 내내 자문한다.


*


쏴아아아
시체조차 건지지 못했기 때문에, 시마 갈레온의 무덤은 완성되지 못한 나뭇조각 하나를 제외하면 아직도 텅 비어있었다. 까마득한 절벽 위,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익숙한 바닷바람이 불어와 머리카락을 흩어놓았다. 이나흐는 잠깐 눈을 감고 그 바람을 느꼈다. 어느 늦은 밤 차갑게 이마에 내려앉았던 손길을 떠올리며.
피로에 젖은 눈매가 돌무덤을 훑었다. 이나흐는 천천히, 아무 곳에도 기댈 곳 없는 사람처럼 무덤에 손을 얹었다. 붕대가 감긴 손이었다.

“나는 아주 중요한 걸 잊고 있었어요, 시마.”

나에겐 여유 부릴 짬 따윈 없다는걸요. 감히 멈추어 설 시간도 없다는걸요. 감히 뭘 아끼고 소중히 여길 권리도 없다는걸요.

“나한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걸요…….”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다는 것, 내가 약하다는 것, 약해 빠진 주제에 전부 가지려고 했다는 것. 대체 무슨 자격으로 잊고 있었을까. 무슨 자격으로.
절벽에 차가운 파도가 와 부딪혔다. 
시리게 놓인 무덤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그것은 우두커니 말을 고르는 침묵과는 전혀 달랐다. 단호하게 마침표가 찍힌 그다음의 끝없는 고요함이었다. 제발 멈추지 마. 이나흐 갈레온은 마음속으로 빌었다. 그러나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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