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커미션글... 어둠칼탁 친구들이었어요 우리애들 사랑하네 / 욕설이 나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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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와 연기에 관하여

 




1.



 난 좆나 부자가 될 거야. 누가 봐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부자가 되어서 눈짓만으로 남 부려먹으면서 편하게 잘 먹고 잘살 거야. 아무한테도 안 지고 누구 눈치도 안 보고 떵떵거리면서 살 거라고. 멍청이들이나 비참하게 사는 거야.
 잿빛 포탄 연기와 살 타는 냄새와 타오르는 불꽃 사이를 비틀비틀 걸어 나가던 순간. 이 세계에서 목숨이 얼마나 천박하고 값어치가 없는지, 총알 한 발보다 못하게 쓰이는지 알았다. 매캐한 담배 연기로 가득 찬 좁은 방에서 촛불 하나에 의지해 눈이 침침할 때까지 카드 패를 들여다보고 단 한 순간도 내 것인 적 없었던 것들을 잃고 또 잃다 보면. 쓰레기나 다름없는 인간들 사이에서 쓰레기 같은 희열에 젖어 어슴푸레한 밤을 나고 또 나다 보면. 문득 숨이 막힐 정도로 밀려오는 무력감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눈앞에 들이 밀어진 패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차피 인생의 값어치란 많이 쳐봤자 싸구려에 불과해. 그러니까 전부 걸어. 앞면 아니면 뒷면에.
 선택을 해야 해. 다른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2.


 “하.”

 모스 하이에는 눈을 번쩍 떴다. 먹구름에 뒤덮여 별도 없는 밤하늘이 보였다. 옛날 꿈인가, 별 거지 같은……. 생각하며 상반신을 들어 올리는데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몸 이곳저곳이 다 쑤셨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모스는 먹먹한 귀를 후비며 주위를 살폈다. 마차 바퀴 자국이 난 진창길과 회칠이 된 벽. 그 가운데 단단히 닫힌 단골 도박장 문이 보였다. 기억은 잉크가 쏟아진 페이지처럼 가물가물했지만 그래도 상황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술을 마시고 도박장에 갔던가 도박장에서 술을 마셨던가, 아무튼 인사불성이 되어 행패를 부리다 쫓겨나듯 밖으로 내던져진 후 그대로 길바닥에 엎어져 잠들었을 것이다.
 물기 어린 흙바닥 때문에 등이 온통 축축했으나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모스는 황급히 제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마구잡이로 뒤적이다 안 되어 뒤집어 보기까지 했지만, 역시나 땡전 한 푼 없었다. 아, 설마 또! 그는 낭패감을 느끼며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헝클었다. 그러다 문득 벼락같이 찾아온 깨달음에 장화를 벗어 던졌다. 가죽 장화를 거꾸로 들고 탈탈 털자,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 숨겨둔 칩 두어 개가 떨어졌다. 이거면 됐어. 먼지 묻은 얼굴이 반색했다. 그는 아픈 것도 잊고 벌떡 몸을 일으켜서는 망설임 없이 도박장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아니, 가려고 했다.

 “이제 그만해요.”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췄다. 모스는 문 앞에 선 채 굳이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선생 납셨네. 그런 거 너한테 안 어울려.”
 “이쪽 봐요, 브롤.”
 “왜, 문 닫히기 전에 한 판이라도 더 뛰려면 빨리…….”

 한 자루 단도가 탁! 경쾌한 소리를 내며 말을 가르고 문에 꽂혔다. 비수가 날아오면서 일으킨 가벼운 바람이 그의 뺨을 간질였다. 농담할 기분도 대충 넘어갈 생각도 없다는 다소 과격하고도 명백한 표현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성가신데. 상대해주는 게 싸게 먹히겠다는 계산이 선 모스는 느릿느릿 몸을 돌렸다.
 칸드라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모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돌아본 그와 눈이 마주치자 숨기지도 않고 양미간을 좁혔다. 그의 꼴이 말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당신,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그렇게 쏘아붙이는 목소리는 걱정스러운 듯도, 화가 난 듯도 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당황스럽네.”

 모스는 굴하지 않고 짐짓 능청스럽기까지 한 태도로 양손을 들었다.
 그는 칸드라가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고집이 등을 떠미는 것에 가까웠지만, 모스는 그 둘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 구별할 필요를 모르고 살았다고나 할까.
 사시사철 어둠에 잠긴 더스크월에서 죽음은 그리 대단한 사건이 못 되었고 죽음 뒤에 일어나는 일이란 더 시시했다. 그냥 차갑고 무감각한 바보가 될 뿐, 그러니 죽는 걸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할 필요도 무서워할 필요도 없다고. 이건 누가 한 말이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아하니 아마 지금쯤 죽고 없는 장교거나 병사거나 했을 것이다. 삶의 무게는 각자에게 다 다르다지만 죽음은 대부분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가짜 어음보다도 못해서 그걸 대단한 일처럼 취급하는 게 되려 어색했다.
 사람들은 죽은 뒤 소각당해 재로 돌아가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직접 눈으로 보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재와 검댕의 도시답게 다들 재와 검댕이 되려고 살았다. 그것뿐이었다.
 고작 그것뿐인데 왜? 내가 뭐라도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 쬐그만 여자는. 왜 이런 표정으로 귀찮게 구는 걸까.

 “너야말로 왜 이렇게 꼬치꼬치 따지는 거야? 대장도 안 그러는데.”
 “지금 몰라서 하는 얘긴 아니겠죠! 그건 그 인간이 무신경한 거고요.”

 굳이 대장을 언급한 것도 기분 상하라고 일부러 꺼낸 얘기였는데, 칸드라는 눈썹 끝을 치켜올리면서도 그리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모스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짐짓 껄렁한 표정을 내비치며 양손을 주머니에 꽂았다.

 “모르겠는데. 내가 그 자식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서? 오해야.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난 원래 이렇게 살았거든.”
 “당신이 지금 당신 꼴을 보면 절대 그런 말 못 할걸요.”
 
 뭐 어때서. 속으로 투덜거리며 혀로 입안을 건드리자 피 맛이 느껴졌다. 왼쪽 어금니가 흔들렸다. 쫓겨날 때 얻어맞았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원래 판이 클 때는 쪽박도 차고 그러는 거야. 이런 거 무서워하면 이 짓거리 못 해. 괜한 동정 받는 거 기분 별로야.”
 “동정이랑 걱정은 달라요.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요? 난 그저…….” 속상한 구석 때문에 격양되었던 칸드라의 목소리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렇게 해야 할 것 같다고 느껴 행동하면서도 스스로 명확하게 짚지 못해 혼란스러웠던 심정이 말로 꺼내놓으면서 서서히 다듬어지는 듯했다.
 “당신이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구니까 두고 보기 힘든 것뿐이에요.”
 
 모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목숨을 걸고 함께 일하는 사이란 바라건 바라지 않건 한없이 내밀해지기 마련이어서, 모스가 그런 만큼 칸드라도 모스가 가진 나쁜 버릇을 알 만큼은 알았다. 심지 굳은 눈빛이 자신이 약한 순간에 파고드는 게 거슬렸다. 그런 눈빛이 자기 껍질을 벗겨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 자기도 반강제로 같이 직면해야만 하니까.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쉽게 느낄 수 있었기에 더 그랬다.
 지금은 누굴 너무 가까이하고 싶지도, 위로받고 싶지도 않았다. 간지럽고 나약한 짓이었다. 건전한 위안이고 나발이고 성실한 자기파괴로 도피하는 쪽이 편하고 익숙했다. 남의 얼굴 한복판에 주먹이라도 꽂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었다. 그 김에 내깃돈도 받으면 좋고…….

 “브롤.”

 나직한 부름이 이런저런 궁리에 빠져 입을 다물고 서 있는 모스를 끌어당겼다.

 “그만 놔줘야 해요.”

 차분하게 가라앉아 이제 슬프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는 말하는 이에게조차 명확한 의미가 되어 닿기보다는 그저 그 공간에 흘러나왔다. 사람이 몸 붙이고 사는 땅에서 누구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박는 말들이 있다면 이런 식일까. 유령들이 맨발로 거리를 거니는 이 땅에서조차 생과 사의 두 세계를 구별하고 갈라놓는 명확한 몇 마디들. 떠난 사람은 그저 떠난 사람이라고, 명징하게 나누어지는 몇 순간들.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모스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두통이 있는 와중에 머리에 훅 열이 끼쳐 시야가 일렁거렸다.

 “두어 번 말하게 하지 말라니까. 난 그냥…….”

 모스는 부자연스럽게 말을 멈추었다.
 옆을 돌아보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또 하나의 그림자가 회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느껴졌다. 보지 않고도 그냥 알 수 있었다. 새까만 코트 자락, 아무렇게나 걷어 올린 소매. 그 모든 것이 흘러넘치는 검은 물처럼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그려졌다. 모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포기하기 싫은 것뿐이겠지.”

 그가 말했다. 뱃사람 식 뚝뚝 끊는 억양, 굵고 탁한 목소리로 뇌까리는 말씨에는 자기가 한 말을 두 번 생각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 그 단호함은 눈물이 날 정도로 익숙했고 한숨이 나올 정도로 잔인하고,

 그리고 조악했다. 누덕누덕 기워 만든 환영이었다. 부러졌다가 붙은 뼈처럼 이음매가 선명했다. 그런데도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울컥 치솟았다.

 “짜증 나게. 말 걸지 마. 쳐다보지 마.”
 “뭐라고요?”
 “아니, 너 말고……. 젠장!”

 왜 지워지지 않는 거야? 왜 죽어도 죽지 않는 거야? 이 씨발 새끼, 듣고 있는 거야?
 이래서야 진짜 미치광이 같았다. 더는 이 모든 걸 견딜 수 없었다. 모스는 도망치듯 도박장 지붕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원래 술에 만취하고도 익숙하게 나다니던 길이었기에 조금 비틀거리기는 했어도 그럭저럭 가뿐한 곡예를 선보일 수 있었다.

 “잠깐만요, 브롤!”

 다급하게 부르는 칸드라의 목소리에도 그는 두 번 뒤돌아보지 않았다. 




 

3.



 포기하지 않았다, 라. 한 번 문 것을 놔주지 않는 버릇은 이미 몸에 밴 습관을 넘어서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다. 그가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발악하지 않았더라면 까마득한 옛날에 티케로스의 이름 모를 벌판에서 들짐승들의 밥이 되어 널브러졌을 것이었다. 한겨울의 포탄 밭에서 뜨거운 총신 하나만 붙잡고 벌벌 떨었던 때건, 사기를 치다 제대로 칼에 찔렸을 때건, 사랑해서 죽이겠다는 미친 여자에게 잡혔을 때건 매한가지였다. 순간순간이 절체절명의 고비였고 삐끗하면 져버릴 벼랑 끝 싸움과도 같았다. 그래도 그는 버텨냈다. 그 모든 일을 살아서 건너왔고 이를 가능하게 한 집념은 이제 본성에 가깝게 갈무리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야 했고 대박이건 쪽박이건 걸 수 있다면 걸어야 했다. 아무것도 없이 주저앉아 있는 건 질색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선택을 해야 했다.
 도망치듯 자리를 뜬 뒤로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 지긋지긋한 패배감, 실패한 도박이 가져다주는 경멸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 말대로 놓아주면 될 일인가? 놓아준다고 결심한들, 그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한 방법은 직면이었다.
 우나 스컬록과 우린 스컬록 쌍둥이는 언제나 말이 많은 반-유령들로, 식스타워즈의 무너져가는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그 음침한 언변과 최악의 다도 실력 때문에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은 인물들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가 못 됐다. 녹이 덕지덕지 붙은 펜스 문이 신경에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들은 모스가 드디어 세상이 두 동강 났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반겼다. 사람도 유령도 아닌 이들은 여전히 깔깔거리는 반존재적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변할 여지가 없는 자들이었다. 변화는 산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니까.

 “굉장한 일이었다고 들었어, 이쪽에도 소문이 쫙 퍼졌는걸.”
 “자세히 듣고 싶은데. 너희가 등대에서 뭘 봤는지 말해주지 않겠어?”

 그 재잘거림은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모스는 무심결에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가 그냥 내려놓았다. 또 괜히 독이라도 탔다면 곤란하니까. 전에 마신 차 맛이 아직도 입안에 깔깔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지금은 가타부타 떠들 시간 없어. 난 정보를 사려고 왔거든.”
 “그거야말로 우리가 잘하는 일이지.”
 “사교의 궁극이라고나 할까. 뭐가 궁금해?”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 넷이 이쪽을 보았다. 모스는 지끈거리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용건을 꺼냈다.

 “유령 하나를 찾아야 해.”
 “진부한걸!”
 “한편 고전적이네.”
 “뭐, 유령은 유령에게라는 말도 있잖아. 내가 방금 지어냈지만.”

 모스가 이죽거리듯 뱉어낸 말에 우나 스컬록은 뭐가 좋은지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
 “그래, 누굴 찾고 싶어? 위치를 알려주면 되는 걸까?”
 “어디 있는진 이미 알아.”

 모스가 사감을 뺀, 오로지 필요한 정보들을 늘어놓는 동안 반유령들은 그 가벼운 입을 다문 채 얌전히 들었다. 쓸데없는 질문으로 흐름을 끊지도, 이야기를 억지로 늘여놓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이건데,” 덕분에 모스는 단순한 결론으로 말을 맺을 수 있었다.

 “그 자식을 이쪽으로 불러올 수 있을까? 잠깐이라도.”

그가 말을 마치자 우나 스컬록은 갓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길고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고, 우린 스컬록은 티스푼으로 차를 저었다.

 “불가능해.”
 “그리고 무의미하지.”

 예상외로 단정적인 대답에 모스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방법이 없다고?”
 “방법 이전에 효용을 모르겠는걸. 그럴 필요, 그럴 쓸모를.”
 “영혼은 당사자가 아니야. 기껏해야 그가 흘린 일기 한 조각 정도나 될까. 분명 실망스럽고 소름 끼치는 만남이 될 거야.”
 “당연하지. 지성이 없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겠어? 내가 누군지 모르는 감각이라니.” 우린 스컬록이 과장되게 몸을 떨며 자기 팔뚝을 문질렀다.

 “뭐, 그 자식은 죽기 전이랑 별반 다를 것도 없겠네.”

 모스는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테이블 위에 양다리를 꼬아 올렸다. 이것도 일종의 거래 현장이니 괜히 초조한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분명하게 하자고. 아예 안 된다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쪽으로 불러오는 건 불가능해. 영혼이 그 등대 안에 있다면.”
 “등대는 등대니까. 누구도 등대를 옮길 수는 없어.”
 “하지만…….”

 두 스컬록은 말을 멈추고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더니, 한시에 고개를 돌려 모스를 보았다.
 
 “만나러 갈 수야 있겠지. 부르는 대신 찾아가는 거야.”

 모스는 괜한 기대감을 비추지 않으려 애쓰며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봐, 그 귀찮은 의식을 말하는 거라면…….”
 “아니. 그건 유령장 너머를 물질의 세계로 잠시 옮기는 방법이었지.”
 “그 반대의 방법은 시도해보지 않았잖아?”

 우린 스컬록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전등이 꺼지듯 주변이 어두워지며 낡은 저택의 모습으로 뒤바뀌었다. 거미줄이 뒤덮인 천장, 반쯤 부서지고 무너진 나무 기둥과 쥐 발자국이 다닥다닥 찍힌 먼지 가득한 바닥.
 모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우리 같은 존재가 되는 것 말이야.”

 우나 스컬록이 양 손바닥을 부딪쳤다. 그러자 다시금 화려한 저택의 모습이 돌아왔다. 눈부신 샹들리에, 벽을 장식한 금사 태피스트리, 색을 넣은 유리 램프, 사슴 머리 형상의 상아 조각품. 고색창연한 찻잔들.

 “두 세계가 얼마나 떨어져 있고 그 거리감은 견딜만한 것인가 아닌가? 그런 고민이야말로 불필요한 일이야. 둘 다 이 자리에 존재하니까.”
 “왼쪽 눈을 감으면 왼쪽 눈 밑의 세계와 오른눈이 보는 세계가 동시에 보이는 거랑 비슷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간 것뿐이야. 정말이야, 바뀌는 건 없을 거야.”

 이들은 그렇게 속삭였으나 모스는 알고 있었다. 이건 이미 실패한 실험이라는 것. 이 유령들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에 영원히 갇히고 말았다는 것. 두 세계 사이에 걸친다는 건 두 세계 모두 잃는 것과 진배없다는 것. 이건 도박일까? 도박이라면, 과연 걸 만한 도박일까?

 “어때? 만나러 가보겠어?”

 유령이 나긋하게 웃으며 물었다. 




 

4.



 생각해보겠다고 대꾸하고 스컬록 저택을 나선 뒤로, 온갖 상념이 그의 손님이 되려고 뒤따랐다. 뭘 생각해봐? 그냥 개죽음이면 어쩔 건데. 애초에 다 끝난 일인데 다시 봐서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딱 한 대만 제대로 갈겨준다던가. 두 대도 좋고. 근데 유령이 유령을 때릴 수 있던가? 그냥 왜 그랬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아니, 이유를 들어봤자 열 받기만 하겠지. 막상 다시 봐봤자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 허무할 테고. 그러면 그 나름 나도 편하게 잊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깔끔하게 단념이 될지도 모르고…….
 모스는 상념이 제멋대로 흐르도록 내버려 둔 채 손에 얹은 낡은 대검을 만지작거렸다. 흠집이 가득한 날에 문득문득 제 얼굴이 비쳤다. 먼지가 한 겹 쌓인 좁은 방, 제대로 균형이 맞지 않는 침대, 낡은 옷 몇 벌. 그가 남기고 간 건 정말 한 줌이었다. 그런 점조차 본인다웠다.
 이제 와 궁상맞게 되짚어본들 애당초 뭐 때문에 그를 그렇게까지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정말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다지만 그래도 이건 심했다. 카로는 무심하고 무뚝뚝하고, 제멋대로에 막무가내였다. 날이 갈수록 자기를 싫어해달라고 전심전력으로 시위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아예 얽히지 않는 게 나을 그런 놈.

 “너는 지겹지도 않냐?”

 모스는 돌아보지 않고 툭 내뱉었다.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그만 좀 따라다녀.”
 “소용없어. 이것도 결국 네가 바란 거니까.”
 “…….”

 모스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 말이 맞았다. 그는 그저 환각일 뿐이었으므로. 눈 감았다 뜨면 사라질 그림자였다. 쓸데없이 되새기지 않으면. 떠올리지 않으면.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하지만 외면하려 눈을 감을 때마다 어김없이, 부서진 파편들이 떠올랐다.
 틀어막는 손도 부질없이 흘러내린 붉은 피가 바닥을 적시고 짜 맞춘 돌 이음새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죽어가는 짐승처럼 얕게 그르렁거리다 서서히 멎어간 호흡. 그 뒤로 거짓말처럼 찾아온 정적. 카로 그라인은 그저 자는 듯이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는 얼굴은 지겨울 만큼 본 덕에 속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편안하게 잠든 적이 없었다. 불편하고 딱딱한 침대 위에서 습관처럼 한껏 찌푸리고는 매일매일 작은 전투와도 같은 밤을 넘겼다. 금방 일어나겠지, 그렇게 믿기에 이번의 잠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고요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게 질 나쁜 농담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조금의 불티도 남지 않은, 다 타버린 잿더미 같은 얼굴에 굵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붉은 액체가 촛농처럼 둥글게 뭉쳤다가 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모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실패한 내기. 처참한 패배.
 이 빌어먹을 자식은 단 한 번을 그냥 져주는 법이 없었지.

 “너도 후회라는 걸 해?”

 기억의 파편을 내던져버리려는 듯, 모스는 덜컥 말을 뱉었다. 

 “응? 너처럼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면 그딴 거 안 해도 되겠지?”
 “…….”
 “나한테 잘못했다고 생각한 적은 있냐? 미안한 적은 있고? 그딴 식으로 구는 게 나한테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네 멍청한 머리로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냐고.” 

 부질없이 허공에 부르짖는 일인 걸 알면서도, 그는 꾸역꾸역 노기를 쏟았다. 갈데없는 분노가 쌓이고 쌓여 목 끝까지 꽉 채워서 이제 더 담아둘 데가 없었다.
 환영은 그저 오래된 벽처럼 서 있었다. 얼마나 평소다운지. 사소한 행동이나 표정까지 이렇게 잘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진짜 거지 같네. 시발. 다 짜증 나.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한 거다.”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하. 그래서 속 편하시겠…….”
 “그래도 해.”

 후회한다고. 나직한 말이 무딘 칼처럼 찔렀다.

 “후회는 선택했다는 증거니까. 너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브롤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가, 이내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개새끼…… 넌 진짜 개새끼야. 절대로 용서 못 해.”
 
 차라리 끝까지 나쁜 새끼였어야지. 그렇게 굴 거였으면 뒈지질 말던가. 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됐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고.
 제 이름처럼 앞뒤 재어보지 않고 위험에 달려드는 성정. 부싯돌처럼 부딪히던 순간, 불꽃을 피우던 순간. 그 불꽃이 스스로 태우고 무너져 재로 흩어지던 순간.
 모스는 그 재를 붙잡으려 애썼고 그 연기를 들이마셨다. 알고 있었기에 더 용서할 수 없었다.
 카로 그라인은 선택을 했다.
 그 뒤에 덧붙여질 어떤 말도 이 사실을 바꾸지는 못했다.




 

5.



 모스는 느릿느릿 스컬록 저택을 나섰다. 펜스 너머로 쪼그려 앉은 인영이 보였다. 설마설마했지만 그 조그만 몸집을 못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낡은 문이 녹슨 쇳소리를 내자, 칸드라는 제 무릎에 푹 묻은 고개를 굳이 돌리지 않은 채 모스에게 힐끔 눈길을 보냈다.

 “이제 어쩔 거예요?”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여기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모스는 이걸 어떻게 놀릴까 궁리하다가, 이번 한 번은 특별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어쩌긴 뭘 어째. 놀다가 때 되면 일하러 가야지.”
 “…….”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따라 죽기라도 할 줄 알았어?”
 “……그런 거 아니면 됐어요.”

 칸드라는 짐짓 무신경을 가장해 대꾸하고는, 툭툭 옷을 털고 일어났다. 그 얼굴에 담긴 옅은 안도감은 쉽사리 읽혔다. 모스가 멀뚱멀뚱 쳐다보는 동안 칸드라는 새침한 동작으로 빙글 돌아 앞서 걸어갔다. 모스는 한 발짝 늦게 뒤따르며 깍지 낀 양손을 제 뒤통수에 대었다.

 “어디 가? 바빠?”
 “왜 물어요?”
 “할 일 없으면 내가 잔뜩 따게 해줄 테니까 같이 가자고.”
 “브롤, 당신 정말……!”

 칸드라가 눈썹을 치켜세운 채 휙 돌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스는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뺀질거렸다.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흐른 끝에, 칸드라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번만이에요.”

 알았어, 알았어. 대꾸하며 그가 히죽거렸다.
 삶이란 언제 던질지 모르는 마지막 주사위 같은 것이어서, 제대로 걸어볼 만한 순간이 올 때까지 그는 그저 손안에 움켜쥐고 굴리며 그 뭉툭한 모서리를 외울 셈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 그는 생각했다. 분명히 올 거야. 비록 이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6.



 파도 소리가 들렸다. 물안개가 일어난 검은 바다 위로 등댓불이 비쳤다. 일렁이는 빛은 파도 위에 물비늘을 그리며 천천히 주변을 쓸었다. 빛이 닿은 물마루는 잠시나마 새파랗게 물들었다. 바다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육지를 희구하며 떠돌다 그 빛에 의지하여 비틀거리면서도 자기가 있을 곳을 찾아갔다.
 등댓불을 지키는 유령은 자기 자신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눈앞에 망연히 펼쳐진 것은 별이 박힌 하늘과 바다. 그리고 그사이에 그어진 이름 모를 경계선. 새카맣게 점멸했다가 다시 번지며 이어지는 순간과 순간들. 의미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영원히 멈추어 있다. 그저 이따금 고장 난 기록기처럼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의 꿈을 꾸거나,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케냐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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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10.9



 케냐에서 확인할 일의 목록을 정리해둔다. 

  • 칼라일 탐사대 관련 기사: 애버데어 숲 근처 백인 학살. 칼라일 탐사대가 사파리 관광을 한다고 떠나, 나이로비 북서쪽 대지구대 탐험 예정.
  • 잭슨 엘리어스가 남긴 나이로비 메모: 존스턴 케냐타라는 이름. 검은 바람의 신에게 저주를 받은 곳, 피투성이 혀 사교 집단, 산의 본부.
  •  잭슨 엘리어스가 질문한 사람들의 목록: “샘 마리가, 기차역”, 네빌 저민, 스타렛 선생, 셀커크 중위, 엔디콧 대령.
  • 케냐 몸바사 칼린디니 항구 아자 싱 앞으로 가는 소포.


 이른 시각 몸바사에 도착했다. 태양이 선명한 채도로 내리쬐었고 그을린 공기에서는 짭조름한 냄새가 났다. 인도양의 파도가 밭은 숨을 내쉬며 흰 모래밭을 향해 끊임없이 달려드는 동안 먼저 도착한 배들이 항구에 매여 미적거렸다. 사람들은 온갖 말로 떠들며 적갈색으로 지어진 낮은 건물들 사이를 분주히 오갔다.
 케냐는 사파리 목적의 관광객이 많아 비교적 총기에 관대했기에 큰 문제 없이 세관을 통과할 수 있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배에서 내려 새로운 세상을 마주할 때는 묵은 후회와 잘못을 뒤로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오묘한 착각에 젖곤 하는데, 실비아는 큰 감흥이 없었다.
 실비아 펠튼은 중년의 딜레당트로 내가 호주에서 자리를 비운 동안 프리스비의 연락을 받고 합류했다. 과거에 우리와 비슷한 사건을 겪었다고만 들었는데, 사실이라면 얌전히 손을 씻고 물러나 쉬다가 다시 현장에 불려온 셈이었다. 나는 은퇴한 군인 중에 이런 부류를 몇 보았는데 제 안에 자기만의 성(城)이 있지만 매사에 무뚝뚝하고 퉁명스럽다.
 첫날은 몸바사의 캐슬 호텔에 묵었다. 실비아가 최고의 숙소를 고집해서 얼떨결에 그렇게 되었다. 불안정하고 축축한 배 위에서 한 달여를 보내다 깨끗한 시트 위에 누우니 그대로 침대에 영혼을 빼앗길까 봐 겁이 날 지경이었다.
 얼마간 기력을 회복한 뒤 아자 싱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그는 영국령 케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도인 수출입업자로, 몸바사에 자기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현재 인도로 출장을 간 상태로 6주 뒤에 돌아올 예정이었다. 한밤중에 그의 사무실에 몰래 잠입했으나 큰 수확은 없었다. 사무실 금고에는 돈과 함께 잡다한 송장, 흰 가루(설탕과 제습제), 힌두스탄어로 쓰인 장부가 있었다.

 

 

 

1925.10.10


 몸바사에서 시간을 오래 지체할 수 없었기에 새벽같이 우간다 레일웨이를 타고 나이로비로 향했다. 이렇게 일찍 출발해도 밤이 늦어서야 도착할 예정이었다. 우간다 레일웨이는 몸바사에서 출발하여 북서쪽으로 진로를 펼치는 긴 철도다. 나는 프리스비와 함께 삼등칸으로 갔고 실비아는 일등칸에 타느라 일행이 잠시 갈라졌다.
 덜컹거리는 금속 소음, 긴 경적과 함께 기차가 출발하자 아침 햇살이 낀 창밖으로 아프리카가 펼쳐졌다. 떠날 때는 푸른 해안선 위로 부서지는 햇살을 볼 수 있었다. 자료를 정리하고 잡담을 나누고 담배를 피우면서 시간을 보내다 보니, 소금기 머금은 공기가 점점 멀어지면서 이내 잿빛 바오밥 나무와 가시 많은 아카시아, 누군가 손으로 가볍게 쥐었다 놓은 것 같은 모양의 이름 모를 관목이 드문드문 서 있는 넓은 초원이 나타났다. 선로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얼룩말 떼가 풀을 뜯었다. 고도가 올라가면서 주변이 어두워질 때쯤에는 저 멀리 서쪽으로 눈 덮인 킬리만자로 봉우리가 보였다.
 철도 여행은 순탄하게 마무리되지 않았다. 삼등칸 화장실 칸에 이 났다. 사람들이 놀라 웅성거렸고 새카만 연기가 금세 비좁은 기차 칸에 번졌다. 문득 섬뜩한 느낌이 들어 창밖을 보니 어둑한 아프리카의 풍경 위로 파란색 불꽃과 빨간색 불꽃이 나란히 떠올라 있었다. 살아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불꽃이라니, 묵시록의 한 장면이라고 해도 믿을 법했다. 눈처럼 보이는 부분이 전혀 없는, 그저 불꽃 덩어리였는데도 그것들이 이쪽을 쳐다보는 듯이 느껴졌다. 불꽃은 잠시 춤추듯 부유하다가, 기관차 앞쪽으로 휙 사라졌다. 잠시 후 폭발음이 들렸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찬찬히 되짚어보니 예전에 책에서 본 불의 흡혈귀와 비슷했다. 지능이 있는 가스나 플라스마 형태로, 이들이 여기 있다는 건 이들을 소환한 누군가가 있다는 뜻이었다.-

 굉음과 함께, 기차 앞쪽에도 불이 붙었다. 프리스비와 함께 식당칸으로 몸을 피하려 했으나, 직원이 문을 막고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흑인은 식당칸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큰 실랑이로 번지기 전에 식당칸에 있던 실비아가 직원을 밀치고 나와 주변을 훑어보았다. 우리는 우여곡절 끝에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키고 탄수차와 식당칸에서 물을 끌어와 불을 껐다. 다행스럽게도 큰불로 번지기 전에 막을 수 있었으나 기차가 멈추고 말았다. 주변이 정리되는 것을 기다릴 시간이 없어, 근처에서 나귀를 빌려 타고 마저 나이로비로 향했다.

 

 

 

1925.10.11


 밤에 도착할 예정이었는데, 반나절을 낭비해 다음 날 낮에야 나이로비 시내로 들어갈 수 있었다. 모두 녹초가 되어 노포크 호텔에 짐을 풀었다. 실비아가 합류한 뒤로 잠을 편히 자고 있다.


 호주에서 사교도들이 큰 의식을 치르는 날을 알아낸 것은 희소식이다. 동시에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적 여유가 촉박한 것도 알게 되었다. 호주에서 출발하기 전 메이벨에게 전보를 부처, 나이로비 조사를 부탁했다. 메이벨은 우리보다 먼저 나이로비에 도착한 뒤 작은 팀을 꾸려 할 일에 착수했다.
  오늘 메이벨 일행과 만났다. 메이벨은 여전했고, 그가 케냐에 도착해서 고용한 휴 레드우드와 맹수 사냥꾼 도리스 브렛츠와도 인사했다.
 여기부터는 메이벨 일행에게 받은 자료와 조사한 내용을 들은 대로 정리해둔다.

  • 나이로비의 신문사: 나이로비 스타, 이스트 아프리칸 스탠다드.
  • 나이로비 스타 - 나탈리 스마이드 부인.
     -칼라일 탐사대: 신문 기사는 대부분 기존에 알던 내용. 칼라일 탐사대는 이집트에서 얻은 정보를 확인하러 케냐로 왔는데, 그 정보란 이집트에서 케냐로 이주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것이었다. 주요 대원들이 햄프턴 하우스에서 묵었고 호러스 스타렛과 네빌 저민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당시 기사에 칼라일 탐사대의 사진이 동봉되어 있다. 펜휴는 전의 사진보다 뚜렷하게 젊어 보이는데, 반면에 하이파샤는 창백하고 아파 보였다.
     나탈리 부인도 당시 칼라일 탐사대의 방문을 직접 보았다고 한다. 기억하기로는, 초원에 엔디콧 대령이 사는데 그 집에도 며칠 묵었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어렵지만 다들 어딘가 기묘한 분위기였고 건강이 안 좋아 보였다.
     하이파샤는 그중에서도 유달리 안색이 창백해 안쓰러울 정도였다. 특히 아침에 심했다.
     로저 칼라일은 위스키를 좋아하는 청년이었는데 모습을 거의 보지 못했다.
     허스턴이 몹시 쌀쌀맞았던데 반해 오브리 경은 활기도 있고 매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격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어울렸다. 이를테면, 탄 카우르(작고 고약한 성격의 여자, 차 상인)가 햄프턴 하우스에 자주 들렀다.
     셀커크 중위: 아직 나이로비에 있을 텐데 소식을 들은 지 좀 되었다고 했다.
     존스턴 케냐타: 반체제 인사라며 악평했다. 키쿠유 중앙 협회 소속.


 그렇게 스마이드 부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술에 취한 중년 남성(사냥꾼 복장, 훈장 착용)이 쳐들어와서 화를 냈다. 엔디콧 대령이었다. 나이로비 스타의 기사 때문에 손님 다 떨어져 나가 먹고살 길이 없다며, 정정 보도를 낼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나탈리 부인은 물러설 기세가 아니었기에 상황을 해결하고자 엔디콧 대령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는 나이로비 남서쪽에서 사냥꾼 쉼터를 운영했다. 나탈리 부인이 쓴 기사를 간추리자면, 숲속에 있는 쉼터에서 비정상적인 일이 일어난다는 내용이었다. 일행이 미리 조사한 결과 6년 전부터 그 부근에서 12명이 사망했다. 그중 10명은 관광객으로, 6명은 미국인이고 4명은 영국인이었다. 남은 2명은 쉼터에서 고용한 하인들이었다. 모두 쉼터 부근으로 사파리를 나갔다가 죽었는데, 대체로 전망대 부근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 시체들 일부는 원숭이 입 정도의 크기로 뜯어먹힌 채였다.
 나탈리 부인은 놀라긴 했으나 엔디콧 대령을 안쓰럽게 여기는 듯했다. 들어보니, 온 가족이 함께 이민 왔는데 얼마 안 되어 미지의 병으로 부인과 아들을 떠나보내고 혼자 남았다. 그 뒤부터 사람이 조금 이상해졌다고 한다.

 

  • 이스트 아프리칸 스탠다드 신문사.
     1919년 난디족 다섯 명이 범인으로 체포당한 기사. 사람 다섯이 나무에 매달려 있는 사진. 해당 기사에 칼라일 탐사대 사건 조사를 맡은 책임자는 정부청사 식민지 내무차관 로저 코리던이라고 나와 있다.
  • 호레스 스타렛:
     스와힐리 타운의 병원 및 미션스쿨에서 일하는 성공회 신부 겸 의사.
     칼라일 탐사대가 의약품을 구할 곳을 찾아 들렀다. 바셀린 등 기본적인 의료 도구를 받고 돈을 기부했다. 그리고 엔디콧 대령의 집으로 갔다. 스타렛은 이후 참사 소식을 받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칼라일 탐사대의 시체를 확인할 때 곁에 있었다고 증언했지만, 좀 더 추궁하자 사실대로 말했다. 실제로는 당국에서 스타렛의 입을 막은 것에 불과하며, 에리카 칼라일까지 케냐에 온 탓에 범인을 찾는 일이 급해지니 아무나 용의자로 몰아 상황을 대강 정리했다고 한다.
  • 네빌 저민:
     정부청사의 법정 변호사.
     오브리 경이 그에게 와서 특정 종교집단을 조사했다.
     네빌 저민의 증조할아버지뻘 되는 웨이드 저민 경이 18세기에 발견한 폐허 도시 이야기를 했다. 콩고 분지 깊은 곳에 폐허 도시가 있는데 과거 흰 고릴라를 숭배하는 종교집단이 살았다고 한다. 그곳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도 존재한다. 자신도 언젠가는 그곳에 가보는 것이 꿈인데, 오브리 펜휴도 그 도시를 찾으려 해서 도움을 줬다고 한다.
     저민이 말하길 칼라일 탐사대는 나이로비를 떠날 때 필요 이상으로 많은 인원을 데리고 갔다. 듣기로는 오브리 경이 강력하게 주장한 탓이었다. 
  • 셀커크 중위:
     몇 주 전 본인 집에서 화재 사고로 사망했다. 짤막한 뉴스 기사만 남아 있었다.
  • 존스턴 케냐타:
     교단에 관해 묻자, 조용히 자기 방으로 가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교단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물어봐 가볍게 대답했다. 케냐타는 잭슨 엘리어스를 만났는데, 그가 불나방처럼 위태로웠고 뭔가에 쫓기는 것처럼 보였다고 증언했다. 케냐타는 피투성이 혀 교단이 오래된 교단이라는 것만 알고 있고, 이들이 정확히 무슨 일을 벌이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고 했다.
     거짓말일 가능성이 있다. 일행이 충분히 아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걸지도.
  • 탄 카우르:
     아시아인 구역에서 제일 큰 차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조카로 추정되는 십 대 후반 정도의 젊은이가 가게를 보고 있었고, 본인을 만나지는 못했다.


 조사를 끝난 후 일행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엔디콧 대령의 쉼터로 향했다. 쉼터는 보요이 족 영토 부근에 있었는데 자칼 같은 고양잇과 맹수 서식지라, 원래부터도 관광객에게는 추천되지 않는 곳이었다. 동물들이 다니는 길 부근에 지어진 전형적인 수렵 사냥 숙소로, 바닥에는 사자 깔개 장식이 걸렸다. 쉼터에서 조금 거리를 두고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일꾼은 라는 이름의 흑인 한 사람으로, 50대 정도 되어 보였고 말을 못 했다. 쉼터에서 일한 지는 6년 정도 되었다고 했다.

 전망대 쪽에서 주로 사건이 일어났다는 건 앞선 조사로 알고 있었기에 일행은 곧장 전망대로 향했다. 주변을 꼼꼼히 살펴보니 전망대 아래쪽 모래에 찍힌 자국들이 있었다. 짐승의 손톱자국에 가까운데 사자는 확실히 아니었고, 사람이나 원숭이 정도 크기의 낯선 자국이었다. 부근에 얼룩말 같은 동물의 뼈가 굴러다녔다.
 같은 날 밤 전망대에서 밤을 보내다 습격을 받았다. 바닥 문 쪽에서 사람들이 기어 올라왔다. 모래 먼지가 바람에 날려 시야를 가렸다. 습격자는 백인 남자 둘에 중년 여자 하나, 어린애 하나였는데 등불 아래에서 보니 산 사람이 아니라 몸에서 모래를 뱉어내는 괴물이었다. 칼로 찌르자 모래 먼지로 흩어져 흔적도 남지 않았다.
 끔찍한 밤이었다. 그 소동에 전망대가 무너졌으며 도리스가 많이 다쳤다. 괴물들을 다 죽인 줄만 알고서 다음 날 엔디콧 대령과 함께 전망대 부근을 순찰했는데, 밤이 되자 또 모래바람이 불더니 괴물들이 나타났다. 어제보다 숫자가 더 늘어있었다. 엔디콧 대령은 아이와 여자를 보더니, 넋을 놓고 그들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를 겨우 기절시킨 뒤 도망쳤다.
 정신을 차린 뒤로 대령은 술만 마셔댔다. 휴가 함께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는 가족들이 병이 나서 죽고 말았다는, 스마이드 부인에게 들은 바 있는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6년 전 칼라일 탐사대가 왔을 때 그런 사연을 내보이자, 가족을 다시 만나게 해주겠다며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그 오두막에서 설명하기 어려운 기묘한 짓을 했다. 일이 끝나자 그 자리에서 죽은 사람들이 일어났다. 엔디콧 대령은 까무러쳤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칼라일 탐사대는 떠나고 없었다.
 날이 밝은 후 전망대 부근을 철저하게 조사했으나 어떤 장치나 마법이 쓰였는지 알 수 없었다. 여유 시간이 적었기에 메이벨이 엔디콧 대령에게 전망대의 위치를 옮기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으로 이 일을 마무리했다.
 여기까지가 우리와 만나기 전에 메이벨 일행에게 있었던 일이었다. 정보공유를 끝낸 뒤, 우리는 따로 조사를 계속하되 필요할 때 연락하기로 하고 헤어졌다.

 

 

 


 1925.10.13


 메이벨에게 얻은 정보 중에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어 존스턴 케냐타를 찾아갔다. 메이벨 일행이 받았던 질문을 우리도 받았다. 이것저것 가늠할 여유는 없었기에 아는 바를 솔직히 대답했다. 잠깐 고민하던 케냐타는 입을 열었다.
 “저는 많은 걸 아는 건 아니고, 그들이 잔인하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습니다. 저희 할아버지가 무로기(예언자)라서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이제야 그런 세계에서 벗어나 당신들의 세계에 들어가려고 애를 썼는데 당신들이 먼저 날 찾아오다니 묘하군요.”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여러분이라면 위대한 분다리를 만나보셔도 좋겠습니다.
 잭슨 엘리어스는 위태롭고 그의 운명은 이미 묶여 있었지만 우리는 아직 운명이 결정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왔다.
 “밖에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데, 거리를 두고 그를 따라가세요. 그 친구가 멈추면 여러분도 멈추세요. 그가 노란 문으로 들어가면 재빨리 따라 들어가세요.”
 밖으로 나가보니 그 말대로 키가 크고 흰 셔츠를 입은 흑인 남자가 서 있었다. 그는 우리를 확인하고 싱긋 웃더니 몸을 돌려 스와힐리 타운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는 맨발이었는데 팔다리를 사뿐하게 움직였다.
 그가 주변을 예의주시하는 눈치였기에 이쪽에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미행이 있었다. 젊은 남자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도망을 쳤는데 인상이 낯이 익은 것이 몸바사에서도 언뜻 본 듯했다. 그곳에서부터 뒤따른 걸까.
 진흙으로 된 길을 지나 골목을 돌았다. 남자는 노란 문 앞에 멈춰서서 우리를 돌아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노란 문 안은 작은 헛간이었다. 상태가 그리 좋지 않은 노란 롤스로이스 로드스터가 세워져 있었다. 그걸 함께 타고 먼지가 자욱한 흙길을 달려서 또 한두 시간쯤 갔다. 주변으로 탁 트인 초원이 펼쳐지는가 싶더니, 나이로비를 벗어나 외딴 마을에 도착했다.


 차가 서고, 마을의 오두막에서 섬세한 인상의 남자가 나왔다. 우리를 데리고 온 남자가 그와 대화를 나누었다. 잘 들리지는 않았으나 어조를 봐서는 우리와 함께 온 사람이 그를 설득하는 듯했다. 기다리는 동안 동네 아이들이 근처로 모여들어 눈을 빛냈다.
 마을 남자의 이름은 오코무라고 했다. 오코무는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우리에게 왜 이곳에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피투성이 교단을 막으려고 하는데 케냐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되는대로 길을 찾고 있다고, 조언을 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오코무는 우리를 살피는 것처럼 한번 쓱 보고는 따라오라고 했다.
 우리가 들어간 곳은 마사이 족 오두막이었다. 진흙으로 지어진 집이었는데 주변에 있는 다른 집들보다 더 컸고 형태가 조금 달랐다. 주변에 울타리가 쳐져 있고 문을 대신해 커튼이 달려 있었다. 오두막 내부는 긴 통로가 현관에서부터 한 바퀴 돌아서 방을 감싸는 형태였다. 통로 벽에 이것저것 가면이며 부적이 걸려 있었다. 창문도 조명도 보이지 않았는데 어딘가로부터 빛이 들어와 주변이 잘 보였다. 가운데 방에는 다채로운 기호와 문양이 일정한 패턴을 두고 그려져 있었다. 일종의 보호진인 듯했다.
 입구 반대편에는 몸집이 작은 노인이 앉아있었는데, 어쩐지 살아있는 것 같지 않았다. 오코무가 들어서서 노인의 발을 주물렀다. 이 노인이 바로 분다리였다. 오코무가 말하길, 분다리가 수련을 하다 보니 저편과 가까워졌고, 지금은 여기 있지 않아 그가 돌아오길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노인은 메마른 나무토막처럼 고요했고 우리는 반나절이 넘도록 기다렸다. 어느 순간 노인의 몸이 떨렸다. 이내 뻣뻣해지면서 부푸는 것처럼 생기가 돌았다. 그는 살아있는데도 미라처럼 주름이 많아 그 연배가 짐작되지 않았다. 노인이 방 안에 들어앉은 우리를 찬찬히 훑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말은 스와힐리어였고 옆에서 오코무가 통역해주었다.
 실비아를 보고서는 노란 옷의 왕이, 그 일이 완전히 다 끝난 게 아니라고 얘기했다. 실비아는 잔뜩 화가 나서는 뭐 씹은 표정으로 이마를 구겼다.
 내게는 집에 있는 가족에게, 형에게 연락하라고 조언했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는데, 그쪽이 아니고 나를 위해서 연락하라고 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프리스비에게는, 그 친구(아마도 자오를 말하는 듯했다)한테 줘서 보낸 물건 말고, 새로 소포가 올 텐데 그건 잘 가지고 다니라고 했다. 누가 보내는지는 이미 본인이 잘 알 것이라며.


 그렇게 한 마디씩 말을 건네고 나서, 분다리는 너무 희미해서 거의 들리지도 않는 숨을 내쉬었다.
 “임무는 위험한데 시간이 급박하다. 좋은 말을 듣고 싶으냐, 진실을 듣고 싶으냐?”
 “진실이 필요합니다.”
 “입에 발린 말 하는 놈들은 지하철에만 가도 널렸구만. 그걸 들으려고 그 긴 시간을 기다렸겠어?” 실비아가 불평했다.
 “피투성이 혀가 오만해진다. 이 땅의 사람들이 닥쳐올 피의 제사 때문에 교단에 납치되어서 산으로 사라지는구나. 지도자들은 썩은 생각과 행동으로 타락하고 있다. 우리가 케레나가의 주인 은가이에게 이 사악한 것을 막아달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
 분다리의 말은 구슬을 던지듯 무심하고 또 신중했다.
 “이제, 알고 싶은 걸 물어보거라.”

 

coc 니알라토텝의 가면들 캠페인 탐사자 시점으로 캠페인 내용을 기록한 글입니다.
저의 기록용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끝까지 스포일러입니다!

현재 플레이 중인데 마스터가 아니고/아직 엔딩을 안 봤다면
탁별로 정보량이 다르니 유의하세요.

 

호주편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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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에 어째서 웨버 씨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일까요?
 저는 당장에 일행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리고, 함께 머리를 모아 고민해보았습니다. 분명 까마득하게 오래된 고대 문명의 책이었습니다. 위조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고, 그 필체도 앞에 쓰인 글자와 유사했습니다. 전혀 설명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브레이디 씨는 일전에 웨버 씨가 저희에게 언질 없이 여기 들렀던 것은 아닌지 의심하는 눈치였고, 자오 군은 웨버 씨가 외계인이라고 주장했으며, 이외에도 동명이인일 수 있다는 둥 온갖 추측이 난무했습니다. 프리스비 씨는 말수가 적었고 내내 표정이 그리 좋지 않았습니다.

 무슨 추측을 하건 의문만 더해갈 뿐 알아낼 수 있는 게 전혀 없었기에, 저희는 일단 가던 길을 마저 나아가기로 했습니다.
 가다 보니 구덩이가 파인 평평한 공간이 나왔습니다. 전구가 바깥쪽에 달려서 그 아래 뭐가 있는지는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만, 다가갈수록 역겨운 냄새가 스멀거렸습니다. 주변은 저희 발소리 말고는 조용했는데, 그 정적을 뚫고 저 아래서부터 사람의 울음소리 같은 것이 어렴풋이 들렸습니다.
 프리스비 씨가 구덩이 안쪽으로 손전등을 비추었습니다. 그러자 밑에서 들리던 소리가 빛에 반응하듯 커졌습니다. 비명과 신음, 낮은 울부짖음이 울렸습니다. 프리스비 씨는 그 밑에서 뭘 본 건지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손전등을 떨어뜨리고 말았습니다.
 손전등이 떨어지는 소리를 신호로, 불에 덴 듯 끔찍한 비명이 쏟아졌습니다. 우리는 혹여나 누가 그 소리를 듣고 뒤를 쫓기라도 할까 봐 황급히 움직였습니다. 흡사 지옥과 연결된 구멍을 본 기분이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대체 무엇이 있었던 것일까요?


 급하게 나아가다 보니 어둑한 대광장이 나왔습니다. 퀴퀴한 냄새에 기묘한 악취가 섞였고, 이성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내내 오싹하고 불편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일 비슷한 감각을 빗대자면 동물원의 호랑이 앞에 서서 눈을 마주칠 때 뒷골에 오싹 스며드는 묘한 긴장감과 비슷했습니다. 어떤 장인의 솜씨인지 그 넓은 바닥이 타일 없이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고, 한가운데에 돌로 만든 거대한 고리 형태의 아치가 바닥을 뚫고 서 있었습니다.
 아치로 다가갈수록 불쾌한 느낌은 더 강해졌습니다. 고리의 이음새를 살펴보다 문득 온몸에 소름이 쭉 돋았습니다. 이 돌 고리는 사실 거대한 생물 위에 얹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바닥이 아니라 어떤 거대한 생물의 표면 위에 발을 대고 서 있었습니다!
 깨닫고 나니 피부 아래로 거대한 혈관이 펄떡거리는 게 보였습니다. 명백하게 살갗이었습니다. 원주민들이 말하던 지하의 거인 부나이 전설은 경악할만한 진실을 짚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괴물이 깨어나면 정말로 세상을 먹어치울까요?
 아연실색했던 것도 잠시, 뒤쪽에서부터 기묘한 휘파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습니다. 본능적으로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닥치며 사람을 끌어당겼습니다. 자오 군이 휩쓸려들 뻔한 것을 브레이디 씨가 자기 목숨을 바쳐 구했습니다. 우리는 겁에 질려 그곳에 다시 돌아가 보지도 못했습니다.
 발전기를 지나쳐 바닥에 붉은빛이 나는 광장에 다다라 겨우 쉴 수 있었습니다. 주변은 다시 고요에 잠겼습니다. 위험한 일에 끼어들게 만들어 미안하다며, 프리스비 씨는 이곳에 온 진정한 목적을 들려주었습니다. 세상을 위협하는 거대한 사교 집단의 존재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막아야 하는 사람에 대해서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프리스비 씨가 한 말을 이해했지만, 그래도 지금 당장 저희 셋이서 뭔가를 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방금 겪었듯 이 지하 도시는 위험으로 가득하니, 차라리 더 준비해서 돌아오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설득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런 데서 개죽음을 당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프리스비 씨도 제 말을 납득해 주었기에 이후로 저희는 침착하게 돌아갈 길을 찾았습니다.


 일단 전진하니 갈림길이 나왔습니다. 전등이 켜져 있었고, 길이 교차하는 공간에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세 층짜리 목조건물이 서 있었습니다.
 제일 왼쪽은 최근에 파기 시작한듯한 인공적인 길로, 드문드문 사람이 지나다녔습니다. 다들 땅을 파는 장비를 들고선 멍한 눈을 하고 비틀거리며 걸어갔습니다. 왼쪽에서 두 번째 길은 이어지다 끊겨있었고, 세 번째 길은 아치형의 넓은 공간으로 이어졌습니다. 이곳도 전에 본 광장처럼 넓고 어두웠습니다. 중앙 바닥에서 빛의 반구가 강렬한 보랏빛으로 주변을 물들이며 느리게 깜빡거렸습니다. 천장은 까마득하게 높아서 끝이 안 보일 정도였습니다.
 반구 옆에는 8m 정도 크기의 박쥐 날개가 달린 검은 형체의 입상이 서 있었습니다. 나뭇가지와 인간의 뼈 등을 얽어서 뼈대를 쌓고, 천과 살가죽으로 형태를 만든 것이었습니다. 그 위에 물감과 피로 칠을 입혀 피 냄새와 부취가 진동했습니다. 근처에 크기는 좀 더 작지만 비슷한 동상들이 여럿 서 있었습니다. 한쪽에는 불 피운 흔적이 있었고, 제단으로 사용한듯한 돌덩이에는 검은 피 얼룩이 묻어 있었습니다. 프리스비 씨가 중국에서 비슷한 광경을 봤다고 알려주었습니다. 지하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이 잔혹한 행태에 절로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봤던 길은 나름대로 메모하며 부지런히 쏘다니다 보니 어렴풋하게나마 길을 파악해둘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살금살금 숨어가며 차까지 훔쳐 빠져나왔습니다. 브레이디 씨를 저 아래 남겨두고 온 것 때문에 내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1925.8.4


 밖으로 나와보니 주변은 어두컴컴했습니다. 돌아가는 길에 웨버 씨를 맡겼던 원주민 마을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습니다.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웨버 씨가 기어이 혼자 마을을 빠져나갔다는 것이었습니다. 맡겨두었던 얼마 안 되는 짐도 전부 챙겨 간 상태였습니다.
 다행히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는 그가 사막에 남긴 발자국을 뒤쫓았습니다. 발자국은 타이어 자국과 합류하면서 끊겼습니다. 아마도 지나가던 차를 얻어 타고 간 듯했습니다. 어쩔까 망설이는데 프리스비 씨가 쫓아가자고 강권해서, 결국 필요한 최소한의 양식만 구한 뒤에 다급히 뒤를 밟았습니다. 이후 나흘간 흔적을 따라갔습니다.
 칸캇지리에 도착해 인상착의를 수소문한 끝에, 포트헤들랜드 기차역에서 겨우 웨버 씨와 재회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습니다. 보기에는 그 사람이었는데, 말하는 뉘앙스도 달랐고 그런 척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저희를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습니다. 며칠 만에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나 싶을 정도였지요. 표정은 위화감이 들 정도로 차분하고 평온했습니다. 지낸 시간이 짧아 그런지 저는 웨버 씨가 그런 표정을 짓는 걸 처음 보았습니다.
 저와 자오 군은 함께 있어도 큰 도움이 되지 못했기에, 프리스비 씨와 웨버 씨 두 분이 이야기를 나누도록 자리를 비켜주었습니다. 돌아온 프리스비 씨가 전해주기를, 웨버 씨는 시드니에 먼저 가서 기다리기로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프리스비 씨의 눈가가 빨갰습니다. 분명 무언가 말 못 할 사정이 있으셨던 거겠죠.


 저는 호주의 사막을 적잖이 탐험했는데 이번만큼 기묘하고 또 강렬한 여행은 처음이었습니다. 제가 사는 세상이 가진 비밀을 또 한 꺼풀 벗겨낸 기분이었지요. 필요한 장비와 인원을 갖춰서 지하 도시를 제대로 답사하고 또 관찰하고 싶어졌습니다. 그곳을 점령하고 있는 사람들과… 존재의 위험성을 보건대 쉽지 않은 바람이겠지만요.
 거기까지 가기 위해서 일단 도와드리고 있는 일부터 마무리가 되어야 했습니다. 저희는 사람을 더 구하고, 차에 짐을 새로 싣고 다시 사막으로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원래 웨버 씨가 담당하고 있던 일이 많아서 이래저래 시간이 걸렸습니다. 콜즈 교수님의 집을 돌보는 일과 관련해 제게도 몇 가지 처리할 일이 남아 있기도 했고요.

 

 


 

 



1925.8.30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방금까지만 해도 차가운 사막의 밤하늘 아래 있었는데,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낯선 호텔이었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나는 외출복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목이 마른 것처럼 입안이 깔깔했고, 가진 돈이 꽤 사라졌고, 호텔 방 침대 위에는 책이 잔뜩 쌓여 있었다. 대부분 역사책이었다. 고장 난 필름이 감기듯 드문드문 이 책을 읽었던 장면이 떠오르는데 그 내용은 단편적이고 흐렸다.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낯선 장소에 들렀던 기억이 깨진 파편처럼 흩어졌다. 그 불투명한 이미지들은 내가 붙잡으려고 애쓸 때마다 손 틈새의 모래알처럼 빠져나갔다. 더 깊이 떠올리려 하면 곧장 두통이 찾아왔다.
 뒤늦게 일지에 쓰여있는 글을 찾아 읽어보았다. 아무래도 그 기계 때문에 일이 생긴 것 같았다. 누군가의 농간일까? 누구의, 어쩌면 관찰하는 정신의? 아니면 그냥 내가 미쳐가는 걸까? 정신적인 문제일까? …….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한 달이 사라졌다. 내가 나를 잊은 사이 너무 많은 시간이 지나버렸다. 그 시간을 이해하려고 애쓸 때마다 제동이 걸리듯 내 몸이 나를 방해했다.
 그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었기에 일단 일행을 찾아 나서려고 웃옷을 걸쳤다. 문득 외투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해진 쪽지가 잡혔다.


 [지금 시간, 현재 위치, 무사한지, 나 기억나는지 다 적어서 포트헤들랜드 기차역으로 전보 부치세요. 프리스비.]


 나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 시기 프리스비는 하루에 두 번씩 역에 들러 전보를 확인했다고 한다. 이후 내가 머무는 호텔로 전화가 왔다. 나는 수화기를 붙잡고 다급하게 물었다.
 “프리스비 씨,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그쪽은 다들 괜찮은 건가요?” 
 “……일라이저 씨 맞죠?”
 프리스비의 음성은 낮게 깔려 있었다. 뒤에서 자오가 떠드는 게 들렸다. “뭐래요? 외계인이래요? 드디어 정체를 밝힐 생각이 들었대요?”
 “나 누군지 알겠어요?” 프리스비가 천천히 말했다.
 “무슨 말씀을….”
 나는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수화기 너머가 잠시 고요하다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프리스비가 울음을 터뜨렸다. 나는 어쩔 줄 몰라 더듬더듬 사과했다. 물을 게 산더미 같았는데 도저히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다.
 “됐고 빨리 이쪽으로 와요!”
 아무래도 만나야 제대로 설명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리스비는 펑펑 울면서, 재클린이 죽었다고 얘기해주었다. 그 한 마디뿐이었지만 나는 재클린이 약속을 지켰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최대한 서둘러 가겠다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칸캇지리로 가는 내내, 나는 뒤죽박죽인 기억을 어떻게든 정리해보려 애썼다. 어렴풋한 기억 속에서 나는 이름을 바꿔가면서 지냈고 눈이 아플 정도로 책을 읽었다. 프리스비가 언성을 높이던 장면이나, 학자 행세를 하며 사람들과 이야기하던 장면 같은 것들이 드문드문 떠올랐다. 되는대로 진통제를 삼켰으나 그마저도 잘 듣지 않았고, 무지근한 두통이 계속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마치 안갯속에 빠져 헤엄치는 것 같았다.



 

 

1925.9.1


 칸캇지리에 도착한 후, 내가 없었던 사이 있었던 일을 들었다. 일행이 내 이름이 쓰인 책을 보여주었는데, 나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어서 얼떨떨한 느낌 뿐이었다. 여전히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으나 한 달 동안 내가 마치 내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브레이디의 마지막을 알고 나서, 나는 이제는 정말로 자오를 돌려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더는 그를 지켜줄 사람이 없었다.
 
 “자오,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내가 말을 꺼내자 자오는 단박에 표정을 구겼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주변이 고요해졌다.
 “형은 왜 자꾸 날 돌려보내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어려서 안 된다는 건 불합리하다고요!”
 “불합리하다고 생각해도 상관없습니다.”
 “아, 씨….”
 “자오, 그렇게 오기로 하는 거면…….” 지켜보던 프리스비가 한 마디 얹었다.
 “오기가 아니라니까요! 대체 몇 번을 말해야 해요?” 기름이라도 부은 것처럼 자오가 벌컥 언성을 높였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걸 듣기는 했어요?!”
 나는 그의 말을 끊었다. “자오. 언성 높이지 마세요.”
 “X발, 장난하나… 형이 지금 높이게 만들잖아요! 어디서 한 달 동안 자빠져 있던 인간이 오자마자 한다는 얘기가… 지금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진 알기나 해요? 형 없을 때 저 밑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알기나 하냐고요?!”
 자오는 내가 뭐라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쏘아붙였다. 그도 그 나름대로 눌러 참고 있던 것을 다 쏟아내려는 것처럼.
 “이참에 아예 솔직하게 말해보지 그래요. 지금 나를 돌려보내고 싶은 거예요, 아니면… 옛날에 형이 돌려보내지 못했던 사람들 생각하는 거예요?”
 나는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자오도 그런 내 기세를 알아챈 것처럼 말을 이었다.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나보고 어리다고 하면서 형이야말로 뭐 얼마나, 얼마나 어른스럽게 굴고 있는데요?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하는데… 나도 그렇고 다른 사람도 그렇고, 왜 자꾸 자기가 마음먹으면 지킬 수 있는 것처럼 구는 거예요?”
 재클린이 덧붙였다. 그러니까, 그게 문제라고 했잖아. 네가 여기 있는 모두의 보호자인 양 굴지 말라고.
 그저 습관이 되어서, 습관이 되어서였다.
 그 둘은, 정말로 어렸다. 돌아갈 곳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 애들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급급했다. 이상하지. 이상하게도…… 그 습관과 멀어지면, 그 애들과도 멀어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만둘 수가 없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얘기 다 했습니까?”
 내 목소리가 내 입에서 나오는 것 같지 않고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자오가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는 게 보였다. “…다 했는데요?”
 나는 그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내게는 선택지가 적었다. 아예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다 했으면… 저는 지금 자오 군한테 화내고 싶지 않으니까, 생각을 정리하고 오겠습니다.”
 나는 천천히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망가는 거냐고 쏘아붙이는 목소리가 귓전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졌다. 뭐라고 말하건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밤바람이 차가웠다. 잊고 있었던 한 달 동안 금연이라도 하며 지낸 건지, 담배를 좀 피웠기로서니 순간 확 오르면서 머리가 핑 돌았다. 이마를 붙잡고 난간에 기대어 있는데 프리스비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일라이저 씨. 괜찮아요?” 살피는 목소리였다.
 “자오도 지금 많이 심란해서 그래요. 방금 가족을 잃은 사람이 얼마나 예민해지는지 일라이저 씨도 알잖아요.”
 스스로 생각하기에 나는 지금 이런 위로를 받을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절로 입가에 쓴웃음이 머금어졌다. “죄송합니다. 프리스비 씨, 그간 신경 많이 쓰이셨겠죠.”
 프리스비가 내 쪽으로 다가와서 난간에 기대어 섰다.
 “솔직히, 화나 더 내려고 했는데. 돌아와서 이렇게 얻어맞고 있는 걸 보니까 저까지 그러면 안 될 것 같네요.” 프리스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짐짓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나는 거기에 속지는 않았다. “당신이 잘못한 거 아니니까요. 여기서 그렇게 크게 잘못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는 프리스비의 말을 들으며, 위로 올라가면서 점점 투명해지는 담배 연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칸캇지리의 밤은 채도가 낮고 푸르스름했다. 강렬한 사막의 낮과 대비되는, 무슨 죄라도 지어서 제 색깔을 잃어버린 것 같은 시간.
 “일라이저 씨가 없는 동안 제가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요.”
 프리스비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자오가 그동안 힘이 많이 되어줬거든요. 일라이저 씨가 뭘 걱정하는지는 알겠는데… 그 애 뜻을 존중해주는 건 어때요?”
 “…….”
 “좀 져주라는 거죠.”
 나는 그 밤에 기대서 다시금 누군가를 떠올리고 있었다. 내가 잊을 수 없는 누군가를.
 “그래야 하는 것 압니다. 사실 내가 말릴 수 있는 일이 아닌 것도요.”
 알고 있었다. 내가 아무리 말렸다고 한들 일어났을 일이었다. 그 애는 언제나 자기다웠고 내가 바꿀 수 있었던 건 전혀 없었다. 그런데도, 알고 있는데도 역시 좀 더 말려보지 않은 게 후회가 되었다. 나는 하염없이 후회했다. 이번엔 얼마나 물고 늘어져야 내가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사실은 그 생각뿐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좋은 어른이 되기를 이제는 포기했다. 미움받아도 상관없었다. 그게 나았다. 그냥 한 사람도 더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런 걸 더 견디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담배를 느릿느릿 손가락 위에서 굴리다가 비벼 껐다. 불이 꺼진 자리에 남는 재와 연기. 나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내게 태울 것이라곤 이제 나 자신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도 내가 멈출 수 없는 일이 너무 많았다.


 방으로 돌아간 나는 자오에게 더는 반대하지 않겠노라고 말했다. 자오가 말하는 만큼 본인이 어른이라면 제 말을 스스로 감당할 것이라 믿는다고. 자오는 아까까지 씩씩거리던 게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금세 화색이 되었다. 그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었다. 그는 어렸고, 하고 싶은 일이 있었고, 이 자리에서 꺾이지 않은 승리자였다. 나는 한 발짝 물러섰다. 이게 맞겠죠, 이게 맞는 일이겠죠, 나는 그저 누구든 붙잡고 그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브레이디든, 노라든, 누구든 대답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날 밤에는 아무도 말이 없었다.


 

 

 

1925.9.5


 사막 아래에 잠든 지하 도시는 서늘하고 어둡고 드넓었다. 분명 처음 마주하는 장소였는데 그 기이한 아치와 복잡한 길들이 묘하게 낯익었다. 침입한 흔적을 들킨 것인지, 사교도들은 전보다 경비가 삼엄해진 상태였다.
 우리는 보라색 돔이 있는 광장에서 박쥐를 닮은 괴물 셋과 맞닥뜨렸다. 그 괴물들은 두꺼비와 박쥐를 섞어놓은 것 같은 형태에 눈코입이 없었고, 날개는 구겨진 종이처럼 주름이 잔뜩 져 있었다. 제코가 그린 그림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그 박쥐 괴물이 레너드(우리가 고용한 사람 중 하나)를 붙잡고 날아가서 그를 기묘한 신상에 대고 짓눌렀다. 마구 소리를 지르던 레너드는 신상에 닿자 몸이 잠깐 축 늘어졌다가, 다시 깨어나 바둥거렸다. 우리는 그를 구하려고 애썼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그를 두고 빠져나오는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멈추지 않고 교차로가 있는 곳까지 향한 다음, 인원을 나누어 목조건물에 진입했다.
 허버트가 후에 알려주기를, 1층은 창고로 쓰는 듯한 공간이었다. 안에는 곡괭이나 밧줄 같은 채굴 장비가 든 상자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광업용 장비나 커다란 수레도 보였고, 작은 사물함 옆에 발전기를 돌리는 데에 쓰는 석유통이 여덟 개였다. 바닥에 사람 십여 명 정도가 누워서 자고 있었다. 살금살금 진입하는 도중 감시하던 사람이 깨어났다. 그가 명령하자 열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꺼번에 벌떡 일어나서는 뒤를 쫓았다. 그 사람들은 마치 자기 의지가 없는 존재들 같았다. 이후로는 도망치느라 더 둘러볼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2층은 내가 직접 살펴볼 수 있었다. 자오와 지노가 함께 들어갔다. 그곳에서는 몹시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안에 큰 우리가 일곱 개 있었는데 그 안에 전부 사람들이 들어차선 고통에 신음하고 있었다. 사교도들이 납치한 사람들을 가두어둔 곳이었다. 우리를 여는 데는 특별한 열쇠가 필요했다. 억지로 뜯어낼 궁리를 하고 있는데, 문득 한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몸을 비틀며 발작했다.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는 그의 가슴 부근이 울룩불룩하게 치솟다가 찢어졌다. 가죽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거기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사마귀와도 비슷하고, 파충류 같기도 한 괴물이었다.
 충격적인 광경 때문인지 자오의 상태가 나빠서 그를 다급히 바깥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는 갑자기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그 순간 위층에서 총성이 울렸고, 다급해진 나는 일단 지노에게 자오를 맡기고 뛰어 올라갔다.
 3층은 허스턴을 위한 공간으로, 이것저것 멀끔한 가구가 갖추어진 곳이었다. 내가 들어섰을 때 앞서 올라갔던 프리스비와 다지 교수, 그리고 클로다는 의자에 앉아 있었고 허스턴은 반대편 책상 쪽에 서 있었다. 갓 끓인듯한 차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총성이 들린 것치고는 지나치다 싶을 만큼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허스턴은 우리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도 전혀 놀라지 않은 눈치였다.
 그럴만했다. 허스턴은 내가 만난 자 중에 가장 말이 많은 사교도였다. 그가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많은 얘기를 떠들어댔는지 모른다. 그는 내게도 자리를 권했다.

 자, 지금까지 알던 세상을 잘 되짚어 봐라. 뭐가 진실인지 잘 생각해라. 아무리 진실을 외면하려고 해도 평소에 꾸는 꿈을 통해서 진실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너희가 이 모든 일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인류의 도태형, 고대부터 유전적으로 축적되어 온 집단 무의식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신이야말로 궁극의 진실이자 최종적인 현실이다.
 세상의 멸망은 위대한 신 니알라토텝의 뜻이다. 나를 죽인다고 해서 신의 뜻을 멈출 수는 없다. 나는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신들의 곁에 나란히 설 것이다.
 그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내가 그를 미치광이라고 믿는 만큼 굳건히.

 “내가 직접 보여줄 수도 있어. 같이 가세.”

 더 들을 필요가 없다며, 프리스비가 그에게 총구를 겨누었다. 총알은 책상 위를 때렸다.
 안타깝게 됐구먼, 중얼거린 허스턴이 클로다를 향해 카메라 형태의 기묘한 물건을 들이대고 세 번 정도 버튼을 눌렀다. 그 앞에서 눈부신 전기가 튀더니 클로다가 순식간에 숯덩이로 변해버렸다. 명백한 협박이었다.
 우리는 적당히 눈짓하고 장단을 맞추는 척했다. 허스턴은 우리가 당연히 그 일에 참여하고 그 신을 숭배하게 될 거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게 유일하게 논리적인 결론이기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떠들어댔고 나는 이참에 궁금했던 것 몇 가지를 알아냈다.
 원래는 세계 곳곳에서 문을 열 예정이었는데 여러 군데에서 차질이 생기긴 했지만 그래도 큰 문제는 없다는 것. 이집트랑 케냐에서 여전히 그날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 하이파샤와 부나이는 함께 케냐로 간 뒤 소식이 없다는 것.
 허스턴이 주장하기로는 신에게 가장 총애를 받는 건 자신이라는 것. 진짜 중요한 건 호주라는 것. 1926년 1월 14일, 시계가 울렸을 때 여기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 이들은 그날을 대비해 신상 안에 차곡차곡 힘을 축적해두고 있었다.
 “그러면 여기까지 왔으니 위대한 신에게 충성을 맹세하게나.”
 그렇게 말하는 그의 앞으로 거대한 신상이 보였다. 사람의 뼈와 살로 세워진. 
 “충성을 맹세하면 신께서 임하셔서 모든 걸 증명해주실 걸세.”
 한평생 그렇게 역겨운 미소를 본 적이 없었다.

 


 분명히 머리를 쐈다.
 그랬는데도 허스턴은 죽지 않았다. 그는 턱이 날아간 채 피거품과 함께 알아듣기도 어려운 말을 쏟아냈다. 프리스비가 그의 심장에 칼을 찔러넣었을 때, 마지막으로 끄르륵거리며 웃었다.
 동시에 돔의 보라색 빛이 훅 꺼졌다. 주변이 온통 암흑에 잠겼다.
 그러다 주변이 서서히 다시 보이기 시작했는데, 빛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그때 느꼈던 것은 박쥐가 초음파를 쏴서 주변의 물체를 인식하는 것처럼 기묘하게 뒤틀린 시야였다.
 돔이 있던 공간이 일그러지면서 갈라진 틈으로부터 무언가 쏟아졌다. 거대하고 너덜너덜한 날개가 허공을 잡아먹으며 천천히 펼쳐졌다. 날개에 달린 무수한 촉수가 춤추는 듯, 갈구하듯 꿈틀거렸다. 부글거리는 연기가 솟아나는 사이로 불타는 눈이 떠올랐다. 그 눈이 하늘로 솟구치면서, 완전한 어둠 속에서 거대한 형체가 드러났다.
 이후로는 아비규환이었다. 그 존재는 붙잡힌 사람들에게 촉수를 뻗었다. 근처에서 또 폭발이 있었는데도 그 괴물은 전혀 상처를 입은 것 같지 않았다. 자오는 다지가 업었고, 나는 프리스비를 붙잡은 채 빠져나왔다. 달려가다 문득 아까 본 광경이 뇌리를 스쳤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목조건물로 향했다. 냅다 2층으로 들어가 무식하게 우리를 열었다. 혼란을 틈타 거기 갇혔던 사람들을 내보내고 함께 도망쳤다.
 그곳의 육각형 타일, 복잡하게 꼬인 길들이 익숙했다. 그때 나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았다.

 

 

 

1925.9.6


 우리는 함께 빠져나온 사람들을 맡길 겸 근처 원주민 마을에 들렀다가 다시 돌아갔다. 하루가 지나자 다시 불이 켜져 있었고, 발굴 작업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듯했다.
 일단 목조건물로 돌아가 허스턴이 쓰던 3층을 뒤졌다. 어제 봤던 대로 침대, 탁자와 책상 등 생활공간이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서류장에 고대어로 쓰인 서류가 들었고, 한쪽 벽에 항해용 크로노미터가 걸려 있었다. 전에 제이덕이 알려준 적 있는 꿈 보내기 구리 그릇도 있었다. 책상 위에는 타자기와 편지, 문서들이 놓여 있었다. 또 원뿔 모자처럼 생긴, 전선이 달린 금속 헬멧이 한구석에 걸려 있었다.
 책상 위에서 타자기로 친 600장 묶음 원고를 발견했는데, 대강 훑어보니 허스턴이 쓴 것이었다.

 

<현실의 신들>


 후에 천천히 읽어보니 거기에는 지하터널에서 발견한 고대의 기록, 핵연료로 움직이는 거대한 비행선을 타고 여행하는 문명에 관한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또 관련된 글과 장치들을 잘 포장해서 개비건과 펜휴에게 보낸 기록, 회룡도와 검은바람섬에 대한 언급, 1926년 1월 14일이라는 날짜와 그때 해야 하는 일도 자세히 적혀 있었다. 허스턴은 신상의 기능에 대해서도 적었는데, 정확히는 마력을 흡수하고 저장하는 용도라고 한다. 정신조종기라는 기계에 대한 설명과 그 사용 방법, 또 번개총이 휘파람 소리를 내는 괴물을 쫓아내고 죽일 수 있다는 사실, 허스턴이 니알라토텝의 은총으로 시간 너머에서 위대한 이스족을 끌고 온 일에 대해서도 쓰여있었다. 지식을 뽑아내려는 용도로 그를 지하에 가둬뒀다고 한다.

 또 구겨진 편지 한 장이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었다.

 

에드워드 개비건의 편지


 금속 헬멧에는 전설이 연결되어 있고, 전선 끝에 삼각 패드가 달려 있었다. 허스턴은 이 물건을 잡혀 온 사람의 기억을 지우고 저항하기 어려운 명령을 내리는 데 사용한 듯했다.



 그곳의 지하에서 허스턴이 가둬두었다는 위대한 이스족을 만났다. 전기가 흐르는 센서를 문간에 설치해서 출입이 어려운 감옥을 만들었는데, 사람을 가둬둘 곳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아래쪽에 공간이 있어 어찌어찌 안으로 기어들어 갈 수 있었다.
 안에 들어서니 불이 켜졌다. 좁은 방 안에 그가 있었다. 3m 정도 크기의 원통형 형체가 마치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는 공중에 떠 있던 금속 집게 블록을 잡고는,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입으로 보이는 곳도 찾을 수 없었고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도 전혀 알 수 없었으나 머릿속에서 곧장 목소리가 울렸다.
 그 이스족의 이름은 카카카탁으로, 그는 나를 오랜 친구라고 불렀다. 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물었지만 그는 1차원적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라며,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마치 나를 어르듯이 이야기했다. 아주 오래전에 있었던 일인데 내가 기억하지 못하면 자신도 말해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는 오래전에 친구였고 서로 부탁을 하나씩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약속을 지키러 온 것이었다. 그는 자신을 가둔 퓨즈를 꺼달라고 했다.

 우리는 카카카탁의 자유를 되찾아주었다. 그는 보답의 의미로 질문 하나를 해도 좋다고 말했다. 나는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사교도들을 막을 방법이 있을까요?”
 “세상이 멸망하는 건 이미 순리적으로 정해져 있는 일이네.”
 “그러면 그걸 미룰 방법이라도.”
 “내가 아는 미래는 그렇지만, 미래가 한 가지로 고정되어있는 건 아니야.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지. 이 말은, 당장 멸망을 막는다고 해서 세상이 온전히 안전해지는 건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네. 사실이 그렇다 한들 해야 한다면 몇 가지 더 나은 방법이 있을 수는 있겠지.”
 그는 차분하게 사교도들이 자리 잡은 몇 가지 장소와 방법,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이름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 내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그의 감정 표현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신할 수 없기는 하지만 내가 알아들은 바가 옳다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자네가 지금 어느 시점에 있는진 모르겠지만 성공하기를 바라.”

 나 역시 그걸 바랐다.

 

 

 


1925.9.21


 달이 뜨는 날에 맞추어 동굴 입구 부근에 을 새겼다. 완성된 눈은 은은하게 빛이 났다. 이런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될까, 제대로 된 게 맞을까. 어지럼증 속에서 느리게 가늠하며 그 미약한 빛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전보다 더 어지러웠다. 오래 쓴 물건의 모서리가 닳듯 영혼의 일부분이 마모되는 기분이었다.
 더없이 선명하던 확신이 서서히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주저함, 망설임, 슬픔. 무력감. 그런 것들이 그림자처럼 들러붙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 끝이 있을까? 있다면 나는 왜 더는 상상할 수가 없을까. 어째서 끝을 그릴 수가 없을까.

 

 

 

1925.9.27


 우리는 시드니에 도착했고 이번 여정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던 다지 교수와 작별했다. 또, 내내 고민에 잠겨 있던 자오가 결국 중국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짧고도 길었던 그의 가출이 바야흐로 끝난 것이었다.
 나는 맥이 탁 풀려서, 이렇게 바로 돌아간다고 얘기할 줄 알았으면 말리지 말 걸 그랬다고 농담을 걸었다. 기껏 허락해주자마자 돌아가겠다고 하다니요,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하고.
 원래 붙잡고 말리면 더 하고 싶은 법이라고요. 그것도 몰라요? 그는 불평하듯, 짐짓 쑥스러워하며 미간을 찡그렸지만 나는 아주 마음이 놓여서 그냥 웃기만 했다.
 중국에는 그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도 이루고자 하는 일이 있고 그의 손은 그곳에서 고귀하게 쓰일 것이었다. 그거면 되는 이야기였다.
 무얼 보상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보상이 되지도 않을 테지만 짧은 며칠 동안 우리는 제법 잘 지냈다.
 그가 떠나기 전에 나는 묵혀둔 말을 꺼냈다. 혹시나 해서 덧붙이는 얘기인데, 혹여나 그때 했던 얘기는 마음에 두지 말라고, 나는 다 잊어버렸다고. 잘 지내라고.
 자오는 내 말에 잠시 고민하는 듯 머뭇거리다 툭 뱉었다.

 있잖아요… 형도 좋은 사람이에요.

 나는 그 말에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자오가 돌아간 날에 프리스비와 술을 마셨다. 사겠다고 해서 산 것은 사실 핑계고 내가 마시고 싶었다.
 “이럴 거면 왜 그랬어요, 진짜? 솔직하지 못한 인간이네….” 프리스비는 진심으로 황당하다는 듯 나를 봤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나는 손을 얼굴에 짚고 중얼댔다. “좀 더 좋게 얘기해줄 수 있었는데.”
 “어차피 똑같이 말했을 거잖아요.”
 “그래도 예전 같았으면…… 좀 더 잘해줄 수 있었을 텐데…….”
 “그때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데 말해 뭐하냐고요.”
 “프리스비 씨가 다 맞아요….”
 “아, 그런 생각 좀 하지 말아요! 옆에 있는 사람이 더 보기 힘드니까.”
 “제가 너무 제 얘기를 많이 했나요?” 아무래도 그랬다. 프리스비에게는 지나치게 얘기를 털어놓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왜, 이제 제 얘기도 듣고 싶으세요?”
 “예….”
 나는 코를 박고 있던 잔에서 겨우 고개를 건져 프리스비를 쳐다보았다.
 그는 술잔을 가볍게 빙글 돌려 그 안에 소용돌이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저는, 그냥 습관이 그렇게 되어서…… 원래가 그렇게까지 정을 안 붙이려고 해요. 제가 일라이저 씨보다 더 무책임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프리스비 씨는 중국에는 다시 안 돌아가실 건가요?”
 “아. 그게요. 제가 사실 일라이저 씨한테 말 안 한 게 있는데. 중국에 가면 메이벨을 만나야 하잖아요. 근데 제가 사실 마지막 날에 메이벨이랑…… 잤어요.”
 나는 순간 멈칫했다. “메…이벨 씨랑요?”
 “어쩌다가 분위기가 그렇게 돼서~ 그래서 다시 만나면 좀 어색하지 않을까나~.”
 “아니 그때 저도 같이 있었는데 어떻게… 아. 아니요. 말하지 마세요….”
 프리스비가 킥킥 웃었다. 나는 한숨을 쉬며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자오한테 팔찌를 주셨길래. 다시 안 돌아가실 건가 했는데.”
 그 허티옥 팔찌는 제비 부인, 그러니까 린옌위가 프리스비에게 준 일종의 애정의 징표이자 부적이었다. 
 “글쎄. 린옌위 씨랑은 더 깊게 얽힐 일이 없지 않을까요.” 프리스비가 가볍게 대꾸했다.
 “프리스비 씨는… 정리가 빠르시네요.”
 “살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너무 깊으면 피곤하거든요.”
 나는 불쑥 물었다.
 “그런데 그 친구는 왜 달랐죠?”
 잭슨 엘리어스 얘기였다. 평소라면 이렇게까지 캐묻진 않았을 텐데 그날은 나도 많이 취해 있었다. 프리스비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가벼운 웃음이 일순 사라졌다.
 “사람이 살다 보면 내 의지랑은 상관없이 마음에 깊게 남는 사람이 있잖아요? 잭슨이 저한텐 그런 사람이었어요. 잭슨이랑은 오래 같이 있고 싶었거든요.”
 “하필이면. 괜한 친구 때문에 고생이네요.”
 “예에. 그래서 끝을 봐야겠네요. 돌아갈 수가 없네, 이제.”
 별수가 없었다. 여기에는 잭슨 엘리어스와 그가 말아먹은 사람들만 남아 있었다.
 “일라이저 씨는 다 끝나면 뭐 할 거예요? 다시 미국으로 돌아갈 건가요?” 프리스비가 물었다.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나는 느릿느릿 대답했다.
 글쎄, 끝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1925.9.27

 나와 프리스비는 케냐로 향했다. 화물용 증기선을 타고 수에즈 운하를 통했다. 날씨는 나쁘지 않았고 배는 부드러운 항적을 그렸다. 수면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나쁜 꿈을 꾸었다.
 새카만 어둠이 나를 감싸 안고 손짓했다.
 꿈에서 나는 피투성이가 된 제이덕을 하염없이 붙잡고 있거나, 쓰러진 프리스비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막으려 하거나, 이제는 몇 조각인지도 모를 자오를 다시 하나로 모으려고 했다. 나는 또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일들을 계속해서 겪었다.
 자, 지금까지 알던 세상을 잘 되짚어 보게. 뭐가 진실인지 잘 생각해보라고. 턱이 없는 허스턴이 그륵거리며 웃었다.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사실은 꿈속에서, 진실이 새어 들어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거야. 그륵, 그르륵.
 닥쳐, 닥치라고… 나는 짓눌린 목소리를 겨우 뱉어낼 뿐 그 무엇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내 이름을 아는 괴물이 가까이에 있었고 나도 그의 이름을 알았다. 나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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