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커미션글... 어둠칼탁 친구들이었어요 우리애들 사랑하네 / 욕설이 나와요
재와 연기에 관하여
1.
난 좆나 부자가 될 거야. 누가 봐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부자가 되어서 눈짓만으로 남 부려먹으면서 편하게 잘 먹고 잘살 거야. 아무한테도 안 지고 누구 눈치도 안 보고 떵떵거리면서 살 거라고. 멍청이들이나 비참하게 사는 거야.
잿빛 포탄 연기와 살 타는 냄새와 타오르는 불꽃 사이를 비틀비틀 걸어 나가던 순간. 이 세계에서 목숨이 얼마나 천박하고 값어치가 없는지, 총알 한 발보다 못하게 쓰이는지 알았다. 매캐한 담배 연기로 가득 찬 좁은 방에서 촛불 하나에 의지해 눈이 침침할 때까지 카드 패를 들여다보고 단 한 순간도 내 것인 적 없었던 것들을 잃고 또 잃다 보면. 쓰레기나 다름없는 인간들 사이에서 쓰레기 같은 희열에 젖어 어슴푸레한 밤을 나고 또 나다 보면. 문득 숨이 막힐 정도로 밀려오는 무력감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서는, 눈앞에 들이 밀어진 패가 다른 무엇보다 중요했다. 어차피 인생의 값어치란 많이 쳐봤자 싸구려에 불과해. 그러니까 전부 걸어. 앞면 아니면 뒷면에.
선택을 해야 해. 다른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
2.
“하.”
모스 하이에는 눈을 번쩍 떴다. 먹구름에 뒤덮여 별도 없는 밤하늘이 보였다. 옛날 꿈인가, 별 거지 같은……. 생각하며 상반신을 들어 올리는데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몸 이곳저곳이 다 쑤셨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모스는 먹먹한 귀를 후비며 주위를 살폈다. 마차 바퀴 자국이 난 진창길과 회칠이 된 벽. 그 가운데 단단히 닫힌 단골 도박장 문이 보였다. 기억은 잉크가 쏟아진 페이지처럼 가물가물했지만 그래도 상황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술을 마시고 도박장에 갔던가 도박장에서 술을 마셨던가, 아무튼 인사불성이 되어 행패를 부리다 쫓겨나듯 밖으로 내던져진 후 그대로 길바닥에 엎어져 잠들었을 것이다.
물기 어린 흙바닥 때문에 등이 온통 축축했으나 가장 신경 쓰이는 건 따로 있었다. 모스는 황급히 제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마구잡이로 뒤적이다 안 되어 뒤집어 보기까지 했지만, 역시나 땡전 한 푼 없었다. 아, 설마 또! 그는 낭패감을 느끼며 신경질적으로 제 머리칼을 헝클었다. 그러다 문득 벼락같이 찾아온 깨달음에 장화를 벗어 던졌다. 가죽 장화를 거꾸로 들고 탈탈 털자, 아니나 다를까 그 안에 숨겨둔 칩 두어 개가 떨어졌다. 이거면 됐어. 먼지 묻은 얼굴이 반색했다. 그는 아픈 것도 잊고 벌떡 몸을 일으켜서는 망설임 없이 도박장 문을 밀고 들어갔다. 아니, 가려고 했다.
“이제 그만해요.”
뒤에서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발걸음을 멈췄다. 모스는 문 앞에 선 채 굳이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선생 납셨네. 그런 거 너한테 안 어울려.”
“이쪽 봐요, 브롤.”
“왜, 문 닫히기 전에 한 판이라도 더 뛰려면 빨리…….”
한 자루 단도가 탁! 경쾌한 소리를 내며 말을 가르고 문에 꽂혔다. 비수가 날아오면서 일으킨 가벼운 바람이 그의 뺨을 간질였다. 농담할 기분도 대충 넘어갈 생각도 없다는 다소 과격하고도 명백한 표현이었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성가신데. 상대해주는 게 싸게 먹히겠다는 계산이 선 모스는 느릿느릿 몸을 돌렸다.
칸드라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팔짱을 낀 채 모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돌아본 그와 눈이 마주치자 숨기지도 않고 양미간을 좁혔다. 그의 꼴이 말이 아니었던 탓이었다.
“당신,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예요?”
그렇게 쏘아붙이는 목소리는 걱정스러운 듯도, 화가 난 듯도 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당황스럽네.”
모스는 굴하지 않고 짐짓 능청스럽기까지 한 태도로 양손을 들었다.
그는 칸드라가 유난스럽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다기보다는 그렇게 생각해야 한다는 고집이 등을 떠미는 것에 가까웠지만, 모스는 그 둘을 제대로 구별하지 못했다. 구별할 필요를 모르고 살았다고나 할까.
사시사철 어둠에 잠긴 더스크월에서 죽음은 그리 대단한 사건이 못 되었고 죽음 뒤에 일어나는 일이란 더 시시했다. 그냥 차갑고 무감각한 바보가 될 뿐, 그러니 죽는 걸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할 필요도 무서워할 필요도 없다고. 이건 누가 한 말이었더라. 잘 기억이 나지 않는 걸 보아하니 아마 지금쯤 죽고 없는 장교거나 병사거나 했을 것이다. 삶의 무게는 각자에게 다 다르다지만 죽음은 대부분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가짜 어음보다도 못해서 그걸 대단한 일처럼 취급하는 게 되려 어색했다.
사람들은 죽은 뒤 소각당해 재로 돌아가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직접 눈으로 보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재와 검댕의 도시답게 다들 재와 검댕이 되려고 살았다. 그것뿐이었다.
고작 그것뿐인데 왜? 내가 뭐라도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 쬐그만 여자는. 왜 이런 표정으로 귀찮게 구는 걸까.
“너야말로 왜 이렇게 꼬치꼬치 따지는 거야? 대장도 안 그러는데.”
“지금 몰라서 하는 얘긴 아니겠죠! 그건 그 인간이 무신경한 거고요.”
굳이 대장을 언급한 것도 기분 상하라고 일부러 꺼낸 얘기였는데, 칸드라는 눈썹 끝을 치켜올리면서도 그리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모스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는 짐짓 껄렁한 표정을 내비치며 양손을 주머니에 꽂았다.
“모르겠는데. 내가 그 자식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서? 오해야.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난 원래 이렇게 살았거든.”
“당신이 지금 당신 꼴을 보면 절대 그런 말 못 할걸요.”
뭐 어때서. 속으로 투덜거리며 혀로 입안을 건드리자 피 맛이 느껴졌다. 왼쪽 어금니가 흔들렸다. 쫓겨날 때 얻어맞았나?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원래 판이 클 때는 쪽박도 차고 그러는 거야. 이런 거 무서워하면 이 짓거리 못 해. 괜한 동정 받는 거 기분 별로야.”
“동정이랑 걱정은 달라요. 내가 그렇게 한가해 보여요? 난 그저…….” 속상한 구석 때문에 격양되었던 칸드라의 목소리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이렇게 해야 할 것 같다고 느껴 행동하면서도 스스로 명확하게 짚지 못해 혼란스러웠던 심정이 말로 꺼내놓으면서 서서히 다듬어지는 듯했다.
“당신이 이렇게 엉망진창으로 구니까 두고 보기 힘든 것뿐이에요.”
모스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목숨을 걸고 함께 일하는 사이란 바라건 바라지 않건 한없이 내밀해지기 마련이어서, 모스가 그런 만큼 칸드라도 모스가 가진 나쁜 버릇을 알 만큼은 알았다. 심지 굳은 눈빛이 자신이 약한 순간에 파고드는 게 거슬렸다. 그런 눈빛이 자기 껍질을 벗겨서 그 안을 들여다보면 자기도 반강제로 같이 직면해야만 하니까. 그 말이 진심이라는 걸 쉽게 느낄 수 있었기에 더 그랬다.
지금은 누굴 너무 가까이하고 싶지도, 위로받고 싶지도 않았다. 간지럽고 나약한 짓이었다. 건전한 위안이고 나발이고 성실한 자기파괴로 도피하는 쪽이 편하고 익숙했다. 남의 얼굴 한복판에 주먹이라도 꽂으면 기분이 나아질 것이었다. 그 김에 내깃돈도 받으면 좋고…….
“브롤.”
나직한 부름이 이런저런 궁리에 빠져 입을 다물고 서 있는 모스를 끌어당겼다.
“그만 놔줘야 해요.”
차분하게 가라앉아 이제 슬프게까지 들리는 목소리는 말하는 이에게조차 명확한 의미가 되어 닿기보다는 그저 그 공간에 흘러나왔다. 사람이 몸 붙이고 사는 땅에서 누구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박는 말들이 있다면 이런 식일까. 유령들이 맨발로 거리를 거니는 이 땅에서조차 생과 사의 두 세계를 구별하고 갈라놓는 명확한 몇 마디들. 떠난 사람은 그저 떠난 사람이라고, 명징하게 나누어지는 몇 순간들.
“내가 그걸 모를 것 같아?” 모스는 자기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두통이 있는 와중에 머리에 훅 열이 끼쳐 시야가 일렁거렸다.
“두어 번 말하게 하지 말라니까. 난 그냥…….”
모스는 부자연스럽게 말을 멈추었다.
옆을 돌아보지 않았으나 어느 순간부터 또 하나의 그림자가 회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느껴졌다. 보지 않고도 그냥 알 수 있었다. 새까만 코트 자락, 아무렇게나 걷어 올린 소매. 그 모든 것이 흘러넘치는 검은 물처럼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그려졌다. 모스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포기하기 싫은 것뿐이겠지.”
그가 말했다. 뱃사람 식 뚝뚝 끊는 억양, 굵고 탁한 목소리로 뇌까리는 말씨에는 자기가 한 말을 두 번 생각하지 않겠다는 단호함이 있었다. 그 단호함은 눈물이 날 정도로 익숙했고 한숨이 나올 정도로 잔인하고,
그리고 조악했다. 누덕누덕 기워 만든 환영이었다. 부러졌다가 붙은 뼈처럼 이음매가 선명했다. 그런데도 그 목소리를 들은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 울컥 치솟았다.
“짜증 나게. 말 걸지 마. 쳐다보지 마.”
“뭐라고요?”
“아니, 너 말고……. 젠장!”
왜 지워지지 않는 거야? 왜 죽어도 죽지 않는 거야? 이 씨발 새끼, 듣고 있는 거야?
이래서야 진짜 미치광이 같았다. 더는 이 모든 걸 견딜 수 없었다. 모스는 도망치듯 도박장 지붕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원래 술에 만취하고도 익숙하게 나다니던 길이었기에 조금 비틀거리기는 했어도 그럭저럭 가뿐한 곡예를 선보일 수 있었다.
“잠깐만요, 브롤!”
다급하게 부르는 칸드라의 목소리에도 그는 두 번 뒤돌아보지 않았다.
3.
포기하지 않았다, 라. 한 번 문 것을 놔주지 않는 버릇은 이미 몸에 밴 습관을 넘어서 살아남기 위한 방식이었다. 그가 그렇게 지긋지긋하게 발악하지 않았더라면 까마득한 옛날에 티케로스의 이름 모를 벌판에서 들짐승들의 밥이 되어 널브러졌을 것이었다. 한겨울의 포탄 밭에서 뜨거운 총신 하나만 붙잡고 벌벌 떨었던 때건, 사기를 치다 제대로 칼에 찔렸을 때건, 사랑해서 죽이겠다는 미친 여자에게 잡혔을 때건 매한가지였다. 순간순간이 절체절명의 고비였고 삐끗하면 져버릴 벼랑 끝 싸움과도 같았다. 그래도 그는 버텨냈다. 그 모든 일을 살아서 건너왔고 이를 가능하게 한 집념은 이제 본성에 가깝게 갈무리되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야 했고 대박이건 쪽박이건 걸 수 있다면 걸어야 했다. 아무것도 없이 주저앉아 있는 건 질색이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선택을 해야 했다.
도망치듯 자리를 뜬 뒤로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 지긋지긋한 패배감, 실패한 도박이 가져다주는 경멸스러운 감정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그 말대로 놓아주면 될 일인가? 놓아준다고 결심한들, 그건 대체 어떻게 하는 건데?
고민 끝에 그가 선택한 방법은 직면이었다.
우나 스컬록과 우린 스컬록 쌍둥이는 언제나 말이 많은 반-유령들로, 식스타워즈의 무너져가는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그 음침한 언변과 최악의 다도 실력 때문에 별로 친하게 지내고 싶은 인물들은 아니었으나 지금은 찬밥 더운밥 가릴 신세가 못 됐다. 녹이 덕지덕지 붙은 펜스 문이 신경에 거슬리는 쇳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들은 모스가 드디어 세상이 두 동강 났다는 소식을 전하러 온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반겼다. 사람도 유령도 아닌 이들은 여전히 깔깔거리는 반존재적 웃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변할 여지가 없는 자들이었다. 변화는 산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이니까.
“굉장한 일이었다고 들었어, 이쪽에도 소문이 쫙 퍼졌는걸.”
“자세히 듣고 싶은데. 너희가 등대에서 뭘 봤는지 말해주지 않겠어?”
그 재잘거림은 배경음악처럼 깔렸다. 모스는 무심결에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가 그냥 내려놓았다. 또 괜히 독이라도 탔다면 곤란하니까. 전에 마신 차 맛이 아직도 입안에 깔깔하게 남아 있는 듯했다.
“지금은 가타부타 떠들 시간 없어. 난 정보를 사려고 왔거든.”
“그거야말로 우리가 잘하는 일이지.”
“사교의 궁극이라고나 할까. 뭐가 궁금해?”
호기심 가득한 눈동자 넷이 이쪽을 보았다. 모스는 지끈거리는 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용건을 꺼냈다.
“유령 하나를 찾아야 해.”
“진부한걸!”
“한편 고전적이네.”
“뭐, 유령은 유령에게라는 말도 있잖아. 내가 방금 지어냈지만.”
모스가 이죽거리듯 뱉어낸 말에 우나 스컬록은 뭐가 좋은지 입을 가리고 킥킥 웃었다.
“그래, 누굴 찾고 싶어? 위치를 알려주면 되는 걸까?”
“어디 있는진 이미 알아.”
모스가 사감을 뺀, 오로지 필요한 정보들을 늘어놓는 동안 반유령들은 그 가벼운 입을 다문 채 얌전히 들었다. 쓸데없는 질문으로 흐름을 끊지도, 이야기를 억지로 늘여놓지도 않았다.
“중요한 건 이건데,” 덕분에 모스는 단순한 결론으로 말을 맺을 수 있었다.
“그 자식을 이쪽으로 불러올 수 있을까? 잠깐이라도.”
그가 말을 마치자 우나 스컬록은 갓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길고 나른한 한숨을 내쉬었고, 우린 스컬록은 티스푼으로 차를 저었다.
“불가능해.”
“그리고 무의미하지.”
예상외로 단정적인 대답에 모스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방법이 없다고?”
“방법 이전에 효용을 모르겠는걸. 그럴 필요, 그럴 쓸모를.”
“영혼은 당사자가 아니야. 기껏해야 그가 흘린 일기 한 조각 정도나 될까. 분명 실망스럽고 소름 끼치는 만남이 될 거야.”
“당연하지. 지성이 없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겠어? 내가 누군지 모르는 감각이라니.” 우린 스컬록이 과장되게 몸을 떨며 자기 팔뚝을 문질렀다.
“뭐, 그 자식은 죽기 전이랑 별반 다를 것도 없겠네.”
모스는 퉁명스럽게 내뱉으며 테이블 위에 양다리를 꼬아 올렸다. 이것도 일종의 거래 현장이니 괜히 초조한 티를 낼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분명하게 하자고. 아예 안 된다는 거야?”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쪽으로 불러오는 건 불가능해. 영혼이 그 등대 안에 있다면.”
“등대는 등대니까. 누구도 등대를 옮길 수는 없어.”
“하지만…….”
두 스컬록은 말을 멈추고 자기들끼리 눈짓을 주고받더니, 한시에 고개를 돌려 모스를 보았다.
“만나러 갈 수야 있겠지. 부르는 대신 찾아가는 거야.”
모스는 괜한 기대감을 비추지 않으려 애쓰며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이봐, 그 귀찮은 의식을 말하는 거라면…….”
“아니. 그건 유령장 너머를 물질의 세계로 잠시 옮기는 방법이었지.”
“그 반대의 방법은 시도해보지 않았잖아?”
우린 스컬록이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전등이 꺼지듯 주변이 어두워지며 낡은 저택의 모습으로 뒤바뀌었다. 거미줄이 뒤덮인 천장, 반쯤 부서지고 무너진 나무 기둥과 쥐 발자국이 다닥다닥 찍힌 먼지 가득한 바닥.
모스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우리 같은 존재가 되는 것 말이야.”
우나 스컬록이 양 손바닥을 부딪쳤다. 그러자 다시금 화려한 저택의 모습이 돌아왔다. 눈부신 샹들리에, 벽을 장식한 금사 태피스트리, 색을 넣은 유리 램프, 사슴 머리 형상의 상아 조각품. 고색창연한 찻잔들.
“두 세계가 얼마나 떨어져 있고 그 거리감은 견딜만한 것인가 아닌가? 그런 고민이야말로 불필요한 일이야. 둘 다 이 자리에 존재하니까.”
“왼쪽 눈을 감으면 왼쪽 눈 밑의 세계와 오른눈이 보는 세계가 동시에 보이는 거랑 비슷해. 한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넘어간 것뿐이야. 정말이야, 바뀌는 건 없을 거야.”
이들은 그렇게 속삭였으나 모스는 알고 있었다. 이건 이미 실패한 실험이라는 것. 이 유령들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상태에 영원히 갇히고 말았다는 것. 두 세계 사이에 걸친다는 건 두 세계 모두 잃는 것과 진배없다는 것. 이건 도박일까? 도박이라면, 과연 걸 만한 도박일까?
“어때? 만나러 가보겠어?”
유령이 나긋하게 웃으며 물었다.
4.
생각해보겠다고 대꾸하고 스컬록 저택을 나선 뒤로, 온갖 상념이 그의 손님이 되려고 뒤따랐다. 뭘 생각해봐? 그냥 개죽음이면 어쩔 건데. 애초에 다 끝난 일인데 다시 봐서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딱 한 대만 제대로 갈겨준다던가. 두 대도 좋고. 근데 유령이 유령을 때릴 수 있던가? 그냥 왜 그랬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아니, 이유를 들어봤자 열 받기만 하겠지. 막상 다시 봐봤자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 허무할 테고. 그러면 그 나름 나도 편하게 잊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깔끔하게 단념이 될지도 모르고…….
모스는 상념이 제멋대로 흐르도록 내버려 둔 채 손에 얹은 낡은 대검을 만지작거렸다. 흠집이 가득한 날에 문득문득 제 얼굴이 비쳤다. 먼지가 한 겹 쌓인 좁은 방, 제대로 균형이 맞지 않는 침대, 낡은 옷 몇 벌. 그가 남기고 간 건 정말 한 줌이었다. 그런 점조차 본인다웠다.
이제 와 궁상맞게 되짚어본들 애당초 뭐 때문에 그를 그렇게까지 좋아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사람 마음이라는 게 정말 마음대로 되는 것 하나 없다지만 그래도 이건 심했다. 카로는 무심하고 무뚝뚝하고, 제멋대로에 막무가내였다. 날이 갈수록 자기를 싫어해달라고 전심전력으로 시위했다. 시간을 돌릴 수만 있다면 아예 얽히지 않는 게 나을 그런 놈.
“너는 지겹지도 않냐?”
모스는 돌아보지 않고 툭 내뱉었다.
“그런 표정으로 보지 마. 그만 좀 따라다녀.”
“소용없어. 이것도 결국 네가 바란 거니까.”
“…….”
모스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 말이 맞았다. 그는 그저 환각일 뿐이었으므로. 눈 감았다 뜨면 사라질 그림자였다. 쓸데없이 되새기지 않으면. 떠올리지 않으면. 보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하지만 외면하려 눈을 감을 때마다 어김없이, 부서진 파편들이 떠올랐다.
틀어막는 손도 부질없이 흘러내린 붉은 피가 바닥을 적시고 짜 맞춘 돌 이음새 사이로 스며들고 있었다. 죽어가는 짐승처럼 얕게 그르렁거리다 서서히 멎어간 호흡. 그 뒤로 거짓말처럼 찾아온 정적. 카로 그라인은 그저 자는 듯이 누워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자는 얼굴은 지겨울 만큼 본 덕에 속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편안하게 잠든 적이 없었다. 불편하고 딱딱한 침대 위에서 습관처럼 한껏 찌푸리고는 매일매일 작은 전투와도 같은 밤을 넘겼다. 금방 일어나겠지, 그렇게 믿기에 이번의 잠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고요할 수 있을까? 이 모든 게 질 나쁜 농담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조금의 불티도 남지 않은, 다 타버린 잿더미 같은 얼굴에 굵은 핏방울이 떨어졌다. 붉은 액체가 촛농처럼 둥글게 뭉쳤다가 선을 그리며 흘러내렸다. 모스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실패한 내기. 처참한 패배.
이 빌어먹을 자식은 단 한 번을 그냥 져주는 법이 없었지.
“너도 후회라는 걸 해?”
기억의 파편을 내던져버리려는 듯, 모스는 덜컥 말을 뱉었다.
“응? 너처럼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살면 그딴 거 안 해도 되겠지?”
“…….”
“나한테 잘못했다고 생각한 적은 있냐? 미안한 적은 있고? 그딴 식으로 구는 게 나한테 얼마나 잔인한 짓인지 네 멍청한 머리로 단 한 번이라도 생각해본 적 있냐고.”
부질없이 허공에 부르짖는 일인 걸 알면서도, 그는 꾸역꾸역 노기를 쏟았다. 갈데없는 분노가 쌓이고 쌓여 목 끝까지 꽉 채워서 이제 더 담아둘 데가 없었다.
환영은 그저 오래된 벽처럼 서 있었다. 얼마나 평소다운지. 사소한 행동이나 표정까지 이렇게 잘 기억하고 있을 필요가 있을까. 진짜 거지 같네. 시발. 다 짜증 나.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 한 거다.”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하. 그래서 속 편하시겠…….”
“그래도 해.”
후회한다고. 나직한 말이 무딘 칼처럼 찔렀다.
“후회는 선택했다는 증거니까. 너는 인정하기 싫겠지만.”
브롤은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가, 이내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개새끼…… 넌 진짜 개새끼야. 절대로 용서 못 해.”
차라리 끝까지 나쁜 새끼였어야지. 그렇게 굴 거였으면 뒈지질 말던가. 너는…… 나한테 그러면 안 됐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고.
제 이름처럼 앞뒤 재어보지 않고 위험에 달려드는 성정. 부싯돌처럼 부딪히던 순간, 불꽃을 피우던 순간. 그 불꽃이 스스로 태우고 무너져 재로 흩어지던 순간.
모스는 그 재를 붙잡으려 애썼고 그 연기를 들이마셨다. 알고 있었기에 더 용서할 수 없었다.
카로 그라인은 선택을 했다.
그 뒤에 덧붙여질 어떤 말도 이 사실을 바꾸지는 못했다.
5.
모스는 느릿느릿 스컬록 저택을 나섰다. 펜스 너머로 쪼그려 앉은 인영이 보였다. 설마설마했지만 그 조그만 몸집을 못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낡은 문이 녹슨 쇳소리를 내자, 칸드라는 제 무릎에 푹 묻은 고개를 굳이 돌리지 않은 채 모스에게 힐끔 눈길을 보냈다.
“이제 어쩔 거예요?”
아무래도 걱정이 되어 여기서 기다린 모양이었다. 모스는 이걸 어떻게 놀릴까 궁리하다가, 이번 한 번은 특별히 넘어가 주기로 했다.
“어쩌긴 뭘 어째. 놀다가 때 되면 일하러 가야지.”
“…….”
“표정이 왜 그래? 내가 따라 죽기라도 할 줄 알았어?”
“……그런 거 아니면 됐어요.”
칸드라는 짐짓 무신경을 가장해 대꾸하고는, 툭툭 옷을 털고 일어났다. 그 얼굴에 담긴 옅은 안도감은 쉽사리 읽혔다. 모스가 멀뚱멀뚱 쳐다보는 동안 칸드라는 새침한 동작으로 빙글 돌아 앞서 걸어갔다. 모스는 한 발짝 늦게 뒤따르며 깍지 낀 양손을 제 뒤통수에 대었다.
“어디 가? 바빠?”
“왜 물어요?”
“할 일 없으면 내가 잔뜩 따게 해줄 테니까 같이 가자고.”
“브롤, 당신 정말……!”
칸드라가 눈썹을 치켜세운 채 휙 돌아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모스는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뺀질거렸다.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흐른 끝에, 칸드라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이번만이에요.”
알았어, 알았어. 대꾸하며 그가 히죽거렸다.
삶이란 언제 던질지 모르는 마지막 주사위 같은 것이어서, 제대로 걸어볼 만한 순간이 올 때까지 그는 그저 손안에 움켜쥐고 굴리며 그 뭉툭한 모서리를 외울 셈이었다. 언젠가 기회가 오겠지, 그는 생각했다. 분명히 올 거야. 비록 이번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6.
파도 소리가 들렸다. 물안개가 일어난 검은 바다 위로 등댓불이 비쳤다. 일렁이는 빛은 파도 위에 물비늘을 그리며 천천히 주변을 쓸었다. 빛이 닿은 물마루는 잠시나마 새파랗게 물들었다. 바다에서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육지를 희구하며 떠돌다 그 빛에 의지하여 비틀거리면서도 자기가 있을 곳을 찾아갔다.
등댓불을 지키는 유령은 자기 자신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눈앞에 망연히 펼쳐진 것은 별이 박힌 하늘과 바다. 그리고 그사이에 그어진 이름 모를 경계선. 새카맣게 점멸했다가 다시 번지며 이어지는 순간과 순간들. 의미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영원히 멈추어 있다. 그저 이따금 고장 난 기록기처럼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것들의 꿈을 꾸거나,